외전
벨담 성의 하인이며 시종, 시녀와 하녀들이 모두 갈렸다. 왕의 광증이 도져서 그렇겠거니 하던 자들은 왕을 가까이서 모시던 시종장이 그 해고의 행렬 가장 앞에 서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사람들은 모두 이유를 궁금해했다.
한 달쯤 지나자 슬슬 해고된 자들 중 입이 가벼운 자들이 참지 못하고 떠들어 댔다. 얼마 전의 결투 대회에서 모욕을 당해 분을 참지 못한 왕이, 제가 품은 여자의 시녀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노라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제후국에서 온 공주에게 직접 톱을 쥐여 주고 시녀의 시체를 난도질하라고 했다는 소리에 사람들이 모두 기함했다.
하여 벨담 성은 새 하인들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돈 앞에 장사 없었다. 미친 왕의 유일한 미덕은 주머니를 잘 연다는 것이라, 새로 들어오는 하인들은 1년에 금화 두 닢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꺼림칙해하면서도 벨담 성으로 일하러 들어갔다.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를 왕 때문에 죽인 여자는 시름시름 며칠을 앓았다. 당연했다. 자신 때문에 맞아 죽은 시녀의 시체를 피 칠갑을 해 가며 밤새 톱질했는데 누가 멀쩡하겠나.
새로 들어온 시녀들은 그녀를 가엾이 여겼다.
하지만 공주의 시녀로 잠시 일했다는 나디아라는 여자는 “저 여자 그나마 신세 편 거야.”라며 새로 온 시녀들 앞에서 어깨를 으쓱했다.
“어째서요?”
새로 들어온 시녀들 중 어린 여자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어보았다. 나디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오래 일한 시녀로서 특유의 텃세를 부리기엔 벨담 성의 일손은 부족했다. 보통 때였으면 그딴 걸 물어볼 시간에 가서 일이나 하라 일갈했을 텐데.
그러나 나디아는 일하기가 싫었고, 눈앞의 소녀들은 호기심 때문에 나디아의 일을 대신 해 줄 의사가 충만했다.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소녀들을 힐끗 보고는 마지못해 말해 준다는 듯 내뱉었다.
“예전에는 저 공주를 엄청나게 때렸다고. 밤마다 죽는 소리가 났어. 왕께서 잠자리 버릇이 얼마나 고약한지 아니.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 게다.”
히에엑.
소녀들이 질겁했다. 개중에는 분명 젊은 왕의 눈에 들어 아이를 배고 저 황금 가면을 벗기겠다는 어렴풋한 희망을 품은 계집애도 있을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그딴 생각 따위는 나지도 않겠지만.
나디아는 새삼스럽게 계집애들에게 일렀다.
“혹시라도 왕의 침소에 들겠단 생각일랑 버리렴. 왕에게 맞아 죽어 관짝에 담겨 성을 나간 여자들이 열 명은 넘는단다.”
“…….”
“지금도 보렴.”
나디아가 턱짓으로 저 먼 곳, 공주가 있는 방 문을 가리켰다. 최근 아프다는 여자는 방 안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 문은 엄청나게 반짝이는 데다가 앞에 병사들이 즐비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때리지야 않는다지만 왕께서는 아프다는 여자를 하루도 가만두지 않으시지 않니.”
“…….”
일설에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새벽까지 왕의 상대를 하다가 아침에 까무룩 잠든다 했다. 정사하는 신음 소리가 얼마나 적나라한지도 소문이 돌았다. 그나마 비명 소리 새어 나오던 전보다야 낫다는 것이 바깥 것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새로 들인 시녀들이 아침에 왕이 나간 후 여자의 침소에 들어가면, 여자는 시녀들을 볼 틈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 대낮까지 일어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나디아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가 알던 공주는 예민병이 도져 몇 시간도 제대로 잠 못 이루곤 했으니까.
그러다 일어나서는 까득까득 손톱을 씹으며 걸어 나가 하루 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책이나 본다던가.
게다가 가끔은, 복도를 지나가던 시녀들 중에 그 여자가 숨죽이고 서재에서 미친 듯이 웃는 소리를 들은 이들이 허다했다. 아하하, 아하하학. 웃음소리가 바깥에 새어 나가는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안 웃을 수도 없다는 듯 웃어 대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시녀들은 역시 여자가 미친 게 분명하다 생각했다.
나디아 또한 그 소리를 들은 적 있었다.
“아흐흑, 아학.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그 소리를 들었을 땐 소름이 확 돋았다. 왕의 광증이 저 여자한테도 옮겨 간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나디아는 새삼스럽게 디온 공주의 시녀 자리를 물리길 참 잘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 지에이치 갠†소 *・✿.。.:*
“제가 미쳤답니다.”
말리는 침대에 누운 채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침대 위에 깔린 보드랍고 얇은 섬유의 감촉을 드러난 맨등으로 한껏 만끽 중이었다. 그녀는 손안의 가면을 매만졌다. 황금색의 얇은 가면. 코까지만 가리고 턱은 드러내게 되어 있는 가면은 맨들거리고 따뜻했다. 방금 전까지 사람 얼굴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그래, 저 사람 얼굴 말이다.
말리는 누운 채 시선만 흘깃 제 옆의 남자에게로 던졌다.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남자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밀짚색 머리카락이 말리가 한 달 전까지는 늘 봐 왔던 길이보다 훨씬 짧게 잘려 있었으나 푸른 눈은 여전히 호수처럼 고요했다. 말리는 만지작거리던 가면을 옆으로 내려놓고는 한쪽 팔을 베고 모로 누워 남자를 올려다봤다.
“예. 아침에 자고, 깨면 서재에 틀어박혀 책이나 보고, 식사는 물리고 과일이나 조금 깨작거렸더니 미친년이 되어 있더군요. 세상에 이렇게 팔자 좋은 미친년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자, 레일라가 손을 뻗어 말리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식사는 다 하셔야지요. 암만 그런 척하려 하신다지만.”
“그런 척이 아니라도, 잘 안 먹힙니다.”
레일라의 안색이 걱정스럽게 변했다.
“아프십니까.”
“아프긴요. 신세만 좋습니다.”
말리가 코웃음 쳤다.
그녀가 미친년인 척하고 있다는 것은 이 자리의 둘만 알았다. 그럴 만도 했다.
왕의 시체를 레일라의 것으로 둔갑시켜 놓고 개에게 다 먹이느라고 둘 다 무진 고생을 했다. 그렇게 피바다를 만든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레일라가 왕 행세 하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하나는 미친 척해야 했고 하나는 광증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척해야 했다. 레일라의 목은 생각날 때마다 주변인들에게 소리를 지르느라 한 달째 쉬어 있었다.
“그냥 역해서 그렇습니다. 그자가 고기를 좋아해 제 식탁에도 여즉 고기가 자주 오르는데, 그 날 개들이 그자의 시체를 씹는 꼴을 새벽 내내 봤더니 영 역해서 말이에요.”
“…….”
그녀의 말에 레일라의 표정이 한층 더 흐려졌다. 말리는 어이구, 하면서 그 얼굴을 보자마자 몸을 일으켜 레일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또 자기 탓 하지 마세요. 아니니까.”
“……예.”
레일라는 기어이 말리가 그의 어깨를 꼬집고 나서야 간신히 얼굴을 폈다. 말리는 다시 손을 놓고 뒤로 털썩 누웠다.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한 달 전까지, 그러니까 왕의 앞이라면 자신을 정돈하느라 정신없었을 테다. 하지만 말리는 이제 침대 위에서 제멋대로 굴어도 상관없었다. 왕은 죽었고 왕의 가면은 레일라가 쓰고 있었으니까.
다만 본의 아니게 미친년으로 살아야 하긴 했으나, 말리는 작금의 상황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맨발로 성을 걷든 서재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책을 읽든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서재를 관리하던 시종장이 잘려서, 새로 들어온 시종장은 그녀가 책에 침을 묻혀 보든 말든 바빠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기사단장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 그래요.”
말리는 눈을 깜박였다. 애당초 왕은 결투 대회에서 왕에게 모욕을 준 기사를 찾으러 가라는 명령과 함께, 기사단장에게 그를 찾지 못한다면 목숨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사단장이 돌아왔을 때 진짜 왕은 죽고 없었다. 사흘 후에 돌아온 기사단장은 왕의 가면을 대신 쓴 레일라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물러갔다.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엄청나게 조마조마했다. 왕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남자가 혹시라도 왕의 부재를 눈치챘을까 봐. 그리고 기사단장은 벨담의 영지 순찰을 자처하며 떠났다가, 오늘 막 돌아왔던 것이다.
“어때요. 이제는 눈치챈 것 같아요? 아니면 아직도 영문 모르는 듯하던가요?”
레일라는 말리의 물음에 침묵했다가 한참 후에 답했다.
“아뇨.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물끄러미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왕의 손속은 본래 잔인했고, 레일라를 찾지 못한 기사들은 죽음을 각오한 채였다. 수십 명의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죽여 달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왕을 가장한 레일라는 한참 후에야 답했다. 돌아가 쉬라고.
기사단장이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올려다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말리는 후에 “들키면 어쩌려고 했어요?” 하고 타박했으나. 레일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 혼자 죽는 게 낫지, 그 스무 명을 다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그 말에 말리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 “나도 죽어요!”라고 타박했으나, 어쨌든 그건 후의 일이다. 여튼 그때의 기사단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가면 쓴 레일라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힌 순간은 생각보다 길었고, 시선을 내린 직후 기사단장은 물러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간 왕의 수호를 소홀히 한 만큼 벨담을 둘러보고 위험 요소를 제거하겠다며 벨담 순찰을 자처해 성 밖으로 나간 것이 보름도 더 전의 일이다. “혹시 우리 둘 다 들킨 게 아닐까요?”라고 말리는 걱정했으나 레일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었다.
괜찮으니 안심하라는 말에도 말리는 밤새 불안해하며 “다른 영주들을 부르러 간 거면 어쩌죠?”라고 물었으나 그녀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레일라는 생각했다.
막 수색에서 돌아왔던 기사단장과 눈이 마주친 시간은 짧았으나, 레일라에게는 아득히 길게도 느껴졌었다. 갑작스럽게 턱수염을 깎고, 감기에 걸렸다며 목소리가 변한 왕. 모를 리가 없다. 적어도 가장 가까이서 왕을 모셨던 기사단장이라면 아주 기민하게도 그가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레일라는 그날 기사단장의 눈에 떠오른 의혹을 모르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냐는 눈.
틀림없었다. 기사단장은 당장이라도 일어나 레일라의 목에 칼을 겨눠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직후, 단장의 눈에 서린 것은 결단이 아닌 갈등이었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왕은 서른이 넘던 기사들을 함부로 다뤘다. 기사단장은 벨담의 영토를 굳건히 지켜 온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황금의 가면을 쓴 왕 아래에서는 그 자부심도 모두 박살 났다. 기사들은 왕의 기분에 따라 목이 잘리고 팔이 잘렸다. 그로 인해 스무 명 남짓하게 남은 기사들을 끌고 왕을 모욕한 자를 찾느라 사흘 밤낮 내내 잠도 못 자고 벨담을 뒤진 터였다. 죄인을 찾는답시고 기사는 단 한 명도 성에 남겨 두지 않은 채. 비상식적인 일이었으나 그 왕의 옆에서 비상식을 수없이 겪어 왔기에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그의 앞에는 왕이 아닌 다른 자가 왕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기사단장의 눈동자가 일렁였고, 레일라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보였다. 그 작은 기색을 기사단장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대치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레일라는 기사단장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기사단장은 스스로를 의심했을 것이다. 저것은 왕이 맞는가. 그도 성으로 들어오며 시종들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왕이 미쳐 날뛰었으며 공주의 시녀를 죽였다고. 그 피바다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해 시종들이 헛구역질을 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거기 어디에도 왕이 바뀌었다는 말은 없었다. 왕은 그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왕좌에 앉아 무도한 황금의 가면을 쓰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이 맞는가.
기사단장은 성으로 오며 수없이 기도했을 것이다. 길길이 날뛰는 왕의 손에 또다시 목을 늘어뜨리고 죽을 제 부하들을 생각하며 왕의 성정이 바뀌었으면, 하다못해 생각이라도 바뀌었으면.
혹시 자신은, 왕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에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정말로 바뀐 것인지, 아니면 왕이 바뀐 것으로 생각하고 싶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신이 기사단장의 소원을 들어주어 왕이 잠시나마 사람처럼 구는 것인지.
그는 분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기사단장은 고개를 숙였다. 레일라도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기사단장이 물러간 후 레일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근처의 시종에게 명령했다. 기사들에게 사흘간의 휴가를 주고, 충분한 포상을 주라고. 시종은 제 귀를 의심하다가, 레일라의 말 없는 채근에 당황하여 뛰어갔다.
이후 벨담 순찰을 요청하던 기사단장은, 레일라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황금의 가면을 쓴 왕과 눈을 마주치지도, 왕좌 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것은 그 또한 어떤 선택을 했다는 방증으로 보였다. 하지만 확신할 수도 없었기에, 레일라는 굳이 말리에게 그런 것들을 늘어놓지 않았다.
‘……어쨌든 나 홀로 더 생각해 봐야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레일라는 짧아진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헤집었다. 평생 길러 왔던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 놓으니 매번 머리가 지나치게 가벼워 당황하곤 했다. 말리는 훨씬 보기 좋다고 웃었으나 레일라는 아직도 거울을 볼 때면 거울 속의 자신이 다른 사람 같기만 했다.
“오늘은 무얼 하셨습니까.”
복잡한 머릿속을 헤집느니 제 옆에 누운 여자를 보는 것이 훨씬 좋다. 실제로 말리와 이야기하다 보면 근심 같은 것은 이상하게도 눈 녹듯 사라지곤 했다. 레일라의 물음에 말리는 누운 채로 웃었다.
“저야 방금 이야기했듯이 누워서 미친 척 웃으면서 먹고 놀기만 했죠. 팔자가 아주 좋습니다.”
“부럽습니다.”
레일라는 웃으며 그녀의 볼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졌다. 그저 한 말인데 말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러우십니까? 왕이신데요. 물론 왕이 아닌데 왕 노릇 하는 것이 힘드시기야 하겠지마는…….”
“남 노릇 하는 버거움보다는, 으음.”
가면을 쓰고 있는 데다가 수하들이 제 눈 마주치는 것을 싫어했던 왕이기에, 기사단장이라는 고비를 무사히 넘긴 다음에는 레일라가 왕 노릇 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정말로 왕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벨담은 다섯 맹주를 거느리고 있는 큰 나라였고, 레일라가 왕 대신 보아야 할 일이 천지에 널려 있었다. 공주였던 시절에 어깨너머로 배운 것들을 떠올리며 간신히 벨담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레일라는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말리가 깔깔 웃었다.
“높으신 나으리들에게는 그런 고충도 있답니까? 왕이라는 건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요.”
“공주 해 보니 별로 좋지 않은 걸 이미 아셨지 않습니까.”
그 말에 말리의 눈썹 한쪽이 찡그려졌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입매가 웃고 있어 레일라는 말리가 화내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말리는 몸을 웅크려 레일라가 침대에 짚은 손목을 붙들고 앙, 무는 시늉을 했다. 어린애 같아 귀여우면서도 웃음이 나, 레일라는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입맞춤이 깊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말리가 가느다란 팔을 뻗어 레일라의 목을 휘감았고, 남자는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에, 뺨과 코와 입에 연신 입맞춤했다. 하느작거리는 허리를 손으로 단단히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허벅지를 벌려 그 사이에 자리했다. 여자가 제 앞섶을 손가락으로 풀어내느라 꼼지락거리는 것이 가슴팍 사이로 다 느껴져 레일라는 입 맞추다가 웃고 말았다.
“왜 웃어요?”
말리가 뾰로통한 척 묻자 레일라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쪽 소리 내며 입 맞추고는 속삭였다.
“참 잘했다 싶어서요.”
하지 않은 말이 무엇인지 둘 다 알았다. 당신 손가락이 자그마하게 꼬물거리는 그 움직임 하나에, 남 노릇 하기를 참 잘했다 싶다……. 그런 생각도 이내 여자의 신음 소리에 묻혀 쓸려 나갔다. 허겁지겁 말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레일라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 * *
“역시 당신을 때려야 할까요?”
미친 여자와 광증이 도진 왕의 색사가 이렇게 즐겁기만 해서야 어쩌나, 하는 뜻이었다. 누운 레일라의 가슴을 베고 있던 말리가 피식 웃으며 돌아누웠다.
“뭐 원하시면 내일 말채찍이라도 하나 가져오시지요.”
“정말로요?”
레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말리가 히죽히죽 웃었다.
“제가 들고 당신 엉덩이라도 몇 대 때려 드릴 테니.”
아하하, 작은 웃음소리가 흩어졌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탐하느라 달뜨게 흘린 소리가 아직 바깥 것들의 귀에서 사라지지도 않았을 터다. 레일라는 제게 기댄 말리의 둥근 어깨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말라서 뼈가 드러난 어깨와 쇄골이 안쓰러워 먹는 것이라도 잘 먹으라 매번 볼 때마다 부탁했으나 말리는 계속 먹는 것들이 역하다며 과일만 조금 먹었다. 게다가 미친 여자 노릇을 지속하려면 비쩍 마른 꼴이 보기도 좋다나. “본래 팔자 사나워 피둥피둥 살쪄 본 적 없으니 이렇게 사는 게 저에게는 보통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속상해 뭐라도 해 주고 싶었으나 아직은 둘 다 남인 척하는 것만도 힘에 부쳐, 참으로 편안히 사는 것 하나가 그렇게도 힘들다 싶었다.
“파라디 그 얄미운 애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파라디요?”
“말채찍 생각을 하니 걔가 생각이 나서요.”
겅중겅중, 레일라가 없을 때 벨담 성 마당을 박차고 뛰어 도망가던 말을 생각하며 말리는 입 밖에 낸 말과는 달리 조금 그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그렇게 가기 전에 콧등이라도 한 번 때려 줄 걸 그랬어요.”
그립다는 말은 취소, 취소.
레일라는 제가 사랑하는 여자의 심술맞은 말에 벙싯 웃고 말았다. 못되고 날 선 말들만 내뱉지만 어쩌면 이렇게나 사랑스러운지 알 수가 없다.
“너무 자주 오십니다.”
말리가 툭 내뱉었다. 레일라의 가슴 위에 엎드린 채였다. 미친 여자라기엔 지나치게 총기 있는 데다가 말간 눈을 보며 레일라는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까지만 봐주십시오.”
“봐주고 말고 할 게 어딨습니까. 당신이 왕이신데요.”
말리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도 오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레일라도 말리가 느끼는 불안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홀로 잠에 들기가 어려웠다. 말리도 그것을 모르지 않으니 말리거나 궂은 말은 하지 않는 것이다.
레일라는 왕의 가면을 쓰던 날까지도 왕의 침실과 레일라의 침실 말고는 아무 곳도 몰랐다. 피바다가 된 왕의 침실을, 시종들은 불과 하루 만에 깨끗하게도 치웠다. 그 침대에 묻은 피들이 왕의 것임을 알기라도 했던 것일까.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지만 저들을 괴롭힌 남자의 흔적을 시종들은 참으로 빠르게도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천으로 된 시트란 시트는 모조리 갈고 의자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벽 장식도 바꾸었고 하다못해 피가 튀어 거멓게 된 은촛대도 금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레일라는 도무지 그 방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언제나 왕의 방으로 들어가는 말리의 뒷모습만을 보았고, 그 방에서 튀어나오는 비명과 애원을 귀로 들으며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방에 그가 누워 있다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지는 데다가 불안하고 어둠이 무서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하여 레일라는 왕의 가면을 쓰고 불면을 호소하며 방을 바꾸었다. 왕의 침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곳에 다시 차려졌으나, 그곳에서도 잠들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왕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야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으므로, 계속해서 방을 바꾸는 것에 대해 시종들은 아무도 이상해하지 않았다.
다만 레일라의 불안만 더해 갔다. 기사단장이 물러간 뒤에도 레일라는 여전히 불안해 결국 말리의 방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눈 밑이 거멓게 변한 채로 말리를 붙들고, 그녀의 침대에서야 겨우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벨담으로 오기 전에는 결벽적으로 제 근처에 사람이 오는 것도 싫어했던 레일라였다. 추운 것은 싫다며 저를 붙들고 잠들던 계집아이의 말라붙은 눈물이 아직도 선연할 정도로, 누군가와 함께 잠에 든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이유야 분명했다.
“사내가 그렇게 겁이 많아 어찌하신답니까.”
말리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니 파라디에게 용기를 달라는 보잘것없는 소원이나 빌지 않았겠습니까.”
레일라가 웃었다. 그의 어머니는 파라디의 고삐를 레일라에게 쥐여 주며 간절히 필요한 것이 생긴다면 파라디에게 빌라고 속삭였었다. 아주 멀고도 오래된 기억이었으며, 레일라는 벨담으로 떠날 때만 해도 다른 소원을 빌 셈이었다.
만약, 아주 만약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마지막에는 자신을 사라지게 해 달라고.
제 어머니의 불행한 인생을 알고 있었으니 성에 들어온 후에도 자신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기대 같은 건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다만 벨담으로 가게 되었을 때는 정말로 절망스러워…… 차라리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레일라는 말리의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넣어 부드럽게 매만졌다. 말리가 간지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듯 레일라의 가슴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 다정한 압박감을 레일라는 참으로 달가워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요.’
얼굴도 본 적 없는 왕의 가신이 들어와, 레일라의 모국에서 사신이 방문할 예정임을 알렸었다. 아마 시집간 공주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흉흉한 곳으로 보내 놓고는 궁금은 한가.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하려다가, 제 손에 닿는 황금 가면의 차가운 감촉에 지레 놀랐다. 하지만 가신에게 그 모습을 들킬 순 없어 손끝에 닿는 금속 면을 어루만지는 척 손을 얼버무렸다. 문득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들일 필요 없다.’
‘……예?’
‘디온에는 앞으로 아무것도 지원하지 말라.’
레일라는 가면에서 제 손을 내리고 정면을 응시했다. 가신은 레일라의 말뜻이 무엇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일라는 턱을 괴고 웃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디온은 지도에서 지워질 것이다.’
끝까지 자신의 둘째 딸이 아들인지도 몰랐던 아비와, 기력 없이 성 한구석에서 시들어 가던 계집애도 보기 싫어 벨담으로 치워 버린 왕비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모든 것들을 치워 버릴 것이다. 차가운 돌벽으로 된 성은 모두 불에 태워 버리자.
깊은 숲의 고독함을 제물로 바쳐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싶었던 그의 어머니는 그 성에서 가장 외롭게 죽었다. 숲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불에 태우게 해 달라던 부탁마저 아무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오갈 데 없는 어린 여자애를 금화 몇 닢으로 꾀어, 죽으러 가는 공주의 옆에 붙여 준 자들도 모두 불태워 버리자. 금화에 꾀인 여자애의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이 없게.
그렇게 생각해 놓고 레일라는 흠칫하여 말리의 갈색 머리카락을 쳐다봤다. 그녀를 바닥에 깔아뭉갠 남자들의 잔인성에 말리가 질릴 대로 질려 있음은 레일라 또한 익히 알았다. 부엌의 아궁이, 길바닥, 하수구 앞이며 마구간까지 할 것 없이 말리의 치마를 들추어 댄 놈들을 말리는 입이 부르틀 정도로 저주해 댔기 때문이다.
레일라는 혹시라도 제가 이런 짓을 하라 명령한 것을 그녀가 알면 어쩌나, 하는 어린애 같은 두려움에 빠졌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고, 그는 말리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것도 멈춘 채 그녀의 머리통을 불안하게 쳐다봤다.
“뭐, 할 말이 아예 없지야 않을 것 같긴 하네요.”
“……예?”
그래서 레일라는 말리가 입을 열었을 때 화들짝 놀랐다. 그 바람에 가슴팍이 들썩이자 말리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한심한 듯 픽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시나요. 친정 시녀 죽고 나서 비쩍비쩍 말라 가는 계집애가 새삼 불쌍해서 정들었다 하시면 된다 이 말이었어요.”
“……아.”
그제야 레일라는 말리가 조금 전 했던 말을 잇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있던 과일 접시 안에서 포도 한 알을 떼어 입에 넣었다. 뭘 먹든 그 볼이 볼록해져 있는 것이 귀여웠다. 레일라는 애써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제 불안을 눈치채일까 봐서다.
“그래도 높으신 분들은 원래 따로 주무시는 게 원칙이라면서요. 왕도 저를 불러다 제 욕구를 다 풀면 내보내고 혼자 잤답니다. 하도 자꾸 제 방에서 주무시니 바깥 것들이 떠드는데, 잠은 따로 자야 하지 않을까요.”
“……추운 건 싫으시다면서요.”
레일라가 못내 불퉁하게 답하자 말리는 눈을 둥글게 떠 보이며 못마땅하게 받아쳤다.
“그땐 겨울이고요, 지금은 여름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를 지금 시녀들이 동정하다 못해 얼마나 살뜰히 챙기는지, 목욕물은 또 얼마나 뜨겁게 덥혀 주는지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하하.”
레일라는 나직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린 짐승이 몸을 말듯이 치대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자는 척하는 거예요?” 말리가 몇 번이나 쿡쿡 찔렀으나 남자는 굳건히도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다가, 숨이 차츰 낮아지더니 조용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잠들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말리는 굳이 레일라를 다시 흔들어 깨우려 하지 않았다. 레일라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음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리야말로 요즘 부쩍 잠이 늘어 레일라보다 먼저 잠들곤 했다. 레일라가 그때마다 괜히 저를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쓸어 주고 입 맞춘 후 푹 잠에 들 때까지 아기 어르듯 가슴 위쪽을 가볍게 두들겨 주는 다정한 사람임을 말리는 알고 있었다.
하여 말리도 제 허리를 붙든 손을 가볍게 풀어내고, 옆으로 그를 뉘어 머리 밑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아름답고 창백한 얼굴이 촛불 아래 피곤을 품은 채 풀어졌다. 그나마 식사를 괜찮게 하여 최근 혈색이 돌아온 장밋빛 입술을 말리는 한 번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그때 그 입술이 작게 열렸다.
“디온에서는…….”
“예?”
“디온에서는 본래……. 부부가 혼인을 하면 여행을 멀리 떠난답니다.”
감겼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사이에 졸음과 꿈이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음을 말리는 엿보았다.
“첫째 아이는 첫 부인의 자식이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자식이 생길 때까지 긴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는 게 관습이지요…….”
“별 희한한 관습이 다 있군요.”
“하지만 당신하고 나는 여행을 떠날 수 없으니까…….”
레일라가 작게 하품했다.
“내가 당신의 침실로 여행 온 것으로 하지요…….”
말리는 심술궂게 웃었다.
“불공평해 죽겠네. 저는 여행 못 가잖아요?”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려던 남자는 그 말에 간신히 푸른 눈을 다시 뜨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살풋 웃었다.
“꼭 같이, 여행을 해요. 가면을 벗으면 저 먼 곳으로 가서…….”
레일라는 잠에 완전히 들 때까지 정신없이 말들을 늘어놓았다. 차갑고 투명한 물에 발을 담그고, 당신은 예쁜 목걸이를 하고요……. 멋진 마차를 타요. 파라디처럼 심술궂은 말 같은 것 말고……. 그 말투가 어찌나 평화로운지 말리도 옆에 같이 누웠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어찌나 잠이 쏟아지는지 불안이 숨어들 틈 따위는 없었다.
분홍빛 뺨이 탐스러운 아기가 태어난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벨담의 왕은 왕비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그녀의 고향인 디온을 짓밟아 또다시 그 잔인성이 구설수에 올랐으나, 어찌 된 일인지 왕비는 매일매일 웃어 역시 왕비도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모두 수군거렸다. 그러나 왕은 대체로 치세를 보였고, 궁의 사람들은 일말의 불안감만 감수하면 얼마든지 평탄한 나날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벨담 성의 두 사람은 영원토록 행복하였다.
― fin
가짜 시녀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