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6)

14. 가짜 왕

“정신 차려요. 전부 내가 한 것으로 하는 겁니다. 모시는 주인이 괴롭힘당하는 걸 보고 시녀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으로 해요.”

레일라가 빠르고 낮게 속삭였다. 말리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이 알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믿기 어려웠다. 어떻게 보면 왕의 광기 어린 눈빛과도 비슷해 보였으나, 말리는 그 둘을 절대로 혼동하지 않았다. 왕이 그녀를 맹목적으로 증오했다면, 그저 그는 그녀를 사랑할 뿐이었다.

말리는 그 사실에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비명도 지르지 말아요. 그냥, 그냥……. 내가 뛰어나갈 거예요. 그리고 말할게요. 당신은 죄가 없다고.”

말리는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은 굳건했다. 언젠가 산속에서 그녀의 입을 막았던 것처럼. 레일라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창백했으나 결심이 선 듯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깊게 심호흡한 뒤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말리.”

맹세코 레일라의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레일라는 언제나 그녀를 당신, 그대, 혹은 전하라고 불렀다. 남들 앞에서도 말리를 자신의 이름으로 불렀을지언정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본 적 없었다. 말리는 그 생경하고도 익숙한 울림에 어깨를 떨었다. 레일라가 옅게 미소 지었다. 정확히 그것은 미소 지으려 애썼으나 실패한 자의 표정이었다. 그는 그녀를 비스듬히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 이름을 한 번쯤 제대로 불러 보고 싶었죠. 그게 이런 때일 줄은 몰랐는데.”

그는 제 목을 더듬어서 곧장 목걸이 하나를 뚝 끊어 냈다. 그의 어머니가 물려주었다던 푸른 보석이 달린 목걸이였다. 그리고 그 목걸이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며 속삭였다.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쳐요. 이걸 팔아요. 팔아서 어디로라도 가요.”

말리가 웅얼거렸으나 레일라의 손은 여전히 그녀가 말하게 놔두지 않았다. 레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디온으로는 도망가지 말아요. 공주의 시녀가 벨담의 왕을 죽였고 공주는 사라졌으니, 그 나라는 곧 멸망하겠죠. 당신이 거기 휘말릴 필요는 없어요. 미안해요. 같이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리는 다음 순간 결심했으며 제 결심을 빠르게 실천에 옮겼다. 목걸이를 받아 든 손으로 제 입을 막고 있는 레일라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철썩, 소리가 났으며 놀란 레일라가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풀었다. 말리는 그 틈에 그의 손을 빼 버리고 버럭 소리 질렀다.

“미쳤어요?!”

“말리,”

레일라가 다시 그녀를 붙들려고 했으나 말리가 더 빨랐다. 그녀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왕의 시체에 부딪혔으며, 말리는 부글부글 피거품을 내뿜고 있는 왕의 시체를 보고 질린 표정이 됐다. 그러고는 제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남자를 향해 화를 냈다.

“갈 거면 두 명 다 가요. 저 혼자는 안 가요. 뭣보다 당신, 남자라고요. 시녀가 남자라는 것부터 밝혀질 텐데, 그럼 저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겠어요? 절 죽이러 대륙 끝까지 찾아올 텐데…….”

“아뇨. 그렇진 않을 거예요.”

레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벨담 왕은 자식이 없어요. 범인 하나만 죽이고 나면 맹주들 중 하나가 왕위를 이어받거나 그들끼리 영주국으로 갈라지겠죠. 그들은 왕에게 지킬 의리가 없습니다. 디온의 공주? 디온을 멸망시켜 돌아갈 곳을 없앴다고 생각하면 그만일 겁니다.”

말리는 복잡한 일은 잘 몰랐다. 하지만 레일라의 말을 듣자 하니, 왕이 죽은 후 혼란에 빠지고 나면, 다들 말리의 행방은 잘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냉큼 그러자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레일라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남자인 건, 제가 혼자 저지른 일이라는 걸 뒷받침해 주겠죠.”

“난 머리가 나빠서 그런 소리 이해 못해요.”

말리가 그를 노려봤다. 개소리 그만하라는 뜻이었으나 레일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해서 견디지 못하고 그를 죽였다고 하면 되니까요.”

“아.”

결국 말리는 제 연인의 멍청함에 탄식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레일라의 가슴을 밀쳤다. 퍽 밀쳐진 레일라가 잠시 멍한 표정을 했다.

“당신하고 내가 붙어먹은 걸 이 성의 사람들이 다 아는데도요?”

“…….”

“헛소리하지 말아요.”

“말리.”

말리는 피가 묻은 손을 치마에 신경질적으로 문지른 다음에, 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짜증이 다분히 묻어나는 동작에 레일라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말리는 어이가 없었다. 제 일거수일투족에 이렇게나 가슴 졸이는 자가, 어떻게 들어와서 왕을 죽일 용기는 가졌던 것인지.

……어떻게, 기사의 갑옷을 훔쳐 입을 생각을 했는지.

말리는 한심한 눈으로 레일라를 쳐다봤다. 그의 금발 머리 또한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말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머리카락을 귀 뒤로 차분하게 넘겨 주었다. 이상했다. 뺨이라도 치고 싶을 만큼 멍청한 소리를 하는 데다가 감당도 못 할 일을 벌여 놨는데, 왜 이렇게 손끝은 다정하게 굴고 싶은지 모를 일이었다.

“……왜 그랬어요?”

“……그야, 들어오자마자 당신이 목 졸리고 있었으니…….”

“아니, 그거 말고.”

말리는 엄지손가락으로 레일라의 뺨을 쓸었다. 핏자국이 번지다가, 빠르게 말라붙었다.

“그날, 왜 그랬어요.”

남자의 입이 다물렸다가, 약간 벌어졌다. 뭔가 할 말을 찾는 듯 보였으나 그도 말리와 마찬가지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시선을 돌리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던 레일라는 한숨 쉬듯 말했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모를 리가 없잖아요. 가끔…….”

지금 이 말을 해도 되나. 말리는 조금 망설였지만 그냥 나오는 대로 말을 뱉기로 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맴도는 말들은, 어쩌면 다시는 하지 못할 말 같았기 때문이다.

무릎을 적셔 오는 뜨거운 피와 빠르게 뛰는 심장 같은 것들은 말리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나보다 더 멍청한 계집애는 없을 것 같은데, 당신이 가끔 나보다 더 멍청한 것 같아.”

“…….”

“말을 탔으면 멀리멀리 도망쳐야 할 거 아녜요. 왜 잘난 듯이 거기에 창을 들고 오느냔 말이에요. 왜?”

“말리.”

레일라가 힘없이 대답했다.

“당신을 내버려 두고 도망칠 수 있었다면 나는 진작 그렇게 하지 않았겠어요?”

그랬을 것이다. 그럴 수 있었다면 그는 진작에 다른 남자와 도망쳤다며, 아니면 말리가 싫어 도망쳤다는 말을 두르고 사라졌을 것이다. 제 대신 학대당하는 계집애를 버리고 갈 수 있는 남자라면, 진작에 그리했겠지. 염치를 아는 인생이란 때로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알아채지 못할 줄 알았는데.”

사실 그날 대회장에 뛰어든 그 기사가 레일라임을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투구 밖으로 조금 비어져 나온 머리카락, 움직일 때마다 얼핏얼핏 그녀를 향하는 눈길, 제 몸 따위가 다치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거침없는 손속 같은 것들은 누가 봐도 레일라였다. 레일라의 손바닥에 박인 지 오래이나 이제는 물러져 가는 굳은살이 창검을 잡아 본 자의 것이었음을 말리는 파라디가 날뛰고 있는 그 자리에서 다시 기억해 냈더랬다.

하지만 말리는 그 수많은 말들 대신, 이죽거리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분풀이처럼 날뛰는 말을 대체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겠어요?”

“…….”

“어떤 말이 그따위로 인간처럼 움직여요?”

인간이든 말이든, 갑옷을 두른다고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말이나 사람이나 똑똑한 척하다가도 이럴 땐 참 멍청하다니까.

말리는 이어 물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요?”

“파라디가 그것까지 말했습니까.”

“그 수다스러운 말은 끝까지 내게 들러서 깐죽거리기까지 했거든요.”

레일라는 결국 웃고 말았다. 기력 없는 미소였으나, 말리가 웃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요, 파라디는 그런 말이죠. 그렇지요. 내가 입 다물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파라디는 내가 그러면 그럴수록 꼭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 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네요…….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말들을 끊고 말리는 다시 물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요?”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가, 부끄러운 듯 깜박였다. 남자는 시선을 아래로 하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용기를 달라고요.”

“…….”

“용기가 필요했어요, 나는…….”

그제야 말리는 파라디가 ‘그딴 소원’이라고 말한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남자는 잡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을 빌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남자가 빌 법한 소원이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비루해서…….”

남자는 제 얼굴을 가리듯 감쌌다가, 억눌린 목소리로 겨우 다시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 싸울 작은 용기조차, 나는 누군가에게 빌지 않으면 얻을 수 없어서…….”

“…….”

“그래서,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도 차마 하지 못해, 나는…….”

말리는 웃음을 터트릴 뻔하다 입술을 씹었다. 사랑한다고. 그 낭만적인 말은 이상하게도 이런 순간 그녀의 웃음보를 꽉 죄었다.

그녀는 참 인생이란 알다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상하게 머리가 차분해졌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봤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피가 제 치맛자락을 온통 물들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방은 조용했다. 말리는 진저리를 치며 제 치맛자락을 끌어당겼다. 피로 온통 젖어 질척거리는 치마가 젖은 소리를 내며 손에 쥐였다. 말리는 치맛자락을 쥐어짜려다가, 손만 적시고 관뒀다. 옷을 혼자 벗기도 어려웠거니와, 왕의 침실에는 갈아입을 만한 여자 옷도 없었기 때문이다.

…….

이상하게 머리 한 구석이 걸리적거렸다. 말리는 레일라를 다시 바라봤다가, 왕을 바라봤다. 방을 한 바퀴 둘러보는 말리의 시선 끝에 금색 가면이 걸렸다. 말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레일라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창백한 얼굴, 그리고 그 아래로 떨어지는 턱과 목선. 로브를 걸치고 있는 어깨 같은 것들이 눈에 걸렸다. 피가 묻은 긴 소매와 그 끝으로 보이는 긴 손가락. 단단한 팔목과…….

‘뻔뻔하게 살아, 계집애야. 제발 좀.’

‘어쩜 가장 뻔뻔하게 굴어도 제 몫 겨우 찾아 먹을까 말까 한 애들이 이렇게 멍청하게 굴까.’

그 순간 파라디의 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말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어나서 가면 쪽으로 걸어가 그것을 주워 들었다. 황금의 가면이 그녀의 손 위에 자리 잡았다.

맹세코 파라디가 뻔뻔하게 굴라던 것은 이런 뜻은 아닐 것이다. 그저 염치보다는 밥 한 술 더 챙겨 먹으라는 뜻에 가깝겠지만……. 말리는 레일라 쪽을 쳐다봤다. 그녀를 따라 허겁지겁 일어나던 레일라가 뭔가 알아차린 듯 시선을 마주했다. 말리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하나는 더 해 봐요.”

“……나는, 나는 못 해요.”

레일라가 주춤거렸으나 말리는 거리낌 없이 걸어가 그의 얼굴에 가면을 댔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말리의 시선일 뿐이다.

두 사람은 머리색이 같았다.

“그 누구도 왕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적이 없어요. 벨담에서는 왕이 쓴 가면이 몇 개나 되는지 아는 자조차도 거의 없죠.”

“……말리!”

“……턱은, 수염을 밀었다고 해요. 좀 달라도 그러려니 할 거예요.”

“나는, 나는 못 해요.”

레일라는 그녀의 가면 든 손을 옆으로 살짝 밀어 치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말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레일라를 노려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남자로 태어나서 공주인 척도 했는데, 왕 노릇은 못 하겠다고 할 거예요?”

남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말리는 그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길바닥에서 굴러먹던 계집애도 공주 노릇을 했다고요.”

그 말을 듣고서도 레일라가 그녀의 말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남자는 입을 닫고, 몇 번 제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에서 가면을 받아 들었다. 말리는 레일라가 가면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다가, 충동적으로 속삭였다.

“제가 왕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당신 얼굴을 다시 보았습니다.”

레일라가 할 말을 잊은 듯 그녀를 쳐다봤다. 말리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의 저 시체보다 당신이 훨씬 왕처럼 근사합니다.”

“아, 말리.”

레일라는 결국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말리가 언젠가 레일라에게 들었던 말이었고, 자신이 언젠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말리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벨담의 왕은, 왕비에게 금화 세 닢 따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쓰라 하시겠지요.”

“금화 세 닢뿐입니까.”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윽고, 가면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듣기 좋은 낮은 음성이 천천히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제 목숨도 아끼지 않고 쓰시라 하겠습니다.”

말리의 발끝에 피로 젖어 질척한 천이 걸렸다. 말리는 그것이 아주 오래되고 비루한, 그러나 자신이 소중하게도 여겼던 것임을 알아차렸으나 줍지 않았다. 오히려 말리는 그것을 꾹 짓밟고 올라섰다.

결국 그녀를 살린 것은 다름 아닌 레일라였다.

그깟 피 세 모금 따위가 그녀를 살리리라 장담하다니. 그녀의 어머니는 마녀조차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아, 가엾고 불쌍한 나의 어머니. 그녀는 지금부터 저지를 일을 생각하며 즐거이 읊조렸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당신의 딸은 왕을 불태운 마녀가 될 거예요.

말리의 입술에 레일라의 입술이 겹쳐졌다. 시체를 밟고 서서 하는 입맞춤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 맛이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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