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공주의 인생
아이러니한 건, 왕이 레일라를 여전히 말리의 곁에 두었다는 것이다. 왕은 색사가 끝난 후 침대에 엎드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말리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웃었다.
“나도 안단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지만 이 행위가 너 같은 계집에게는 참으로 버거운 것을. 그러니 네게도 조금의 즐거움은 있어야겠지.”
“그 말씀은…….”
“적당히 붙어먹거라. 어차피 애가 생길 것도 아닌데 무얼.”
말리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왕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왕은 참으로 인자한 사람인 양 그녀를 자애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애당초 그 계집애에게는 동하지도 않는다. 거인 같고 비쩍 마른 그 계집애를 데려다 비명을 들어 봤자 뭘 한담.”
“…….”
“다음에 그 계집애랑 붙어먹는 것이나 내키면 보여 주려무나.”
말리는 그제야 경련하듯 웃을 수 있었다. 레일라가 이상 성욕자의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뒤로 왕은 심심찮게 레일라의 이야기를 했다. 주로 자신이 보는 앞에서 레일라와 붙어먹어 보라느니, 아니면 네 비명이 시원찮으면 그년의 비명을 듣는 게 재미있을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말리는 그때마다 기함하며 왕에게 절절하게도 매달렸다. 말리의 등에는 묵은 상처들이 늘어 갔고 레일라의 안색은 더더욱 파리해져 갔다. “그년과 치르는 색사를 내게는 보여 주지 않을 것이냐?”라고 제 엉덩이를 꼬집는 왕에게 말리는 아양을 떨었다.
“여색은 한 번이면 충분해요. 저에게는 폐하뿐이랍니다.”
하지만 왕에게는 말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왕은 점점 더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구는 말리가 지겨운 듯, 알렉시스를 더 자주 불러 댔다. 비극적인 것은, 왕이 말리에게 점점 더 가학적이어지는 것처럼 알렉시스에게도 그리했다는 것이다.
날은 따뜻해졌으나 성에서 마주치는 알렉시스는 목과 어깨를 모두 가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빈틈없이 몸을 가리운 옷을 입은 두 여자는 서로를 지나칠 때면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 왕을 모시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요.”
성 근방의 풀밭에 누워 첫물 포도를 집어 먹으며 말리가 중얼거렸다. 그 내용이야 워낙 자주 듣던 것이었으나 레일라는 부드럽게 그녀를 만류했다.
“누가 듣습니다.”
“들으라지. 이 성 사람들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드물걸요.”
말리는 왕의 침실을 지키는 기사들이 툭하면 왕에게 뺨을 맞고 정강이를 걷어차인다고 말했다. 외모가 출중한 시녀들은 자신들이 왕의 눈에 띌까 노심초사했으며 외모가 못난 시녀들은 왕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만 일할 수 있었다.
“여름의 결투 대회에 오는 기사들 걱정에 다들 밤을 지새울 정도인걸요.”
“결투 대회요.”
“선왕의 맹주들이었다는데, 사납기 그지없다고 해요.”
벨담의 맹주들은 왕에 버금가는 위세를 자랑한다고 했다. 왕도 그들을 신하로 대할 수 없으니 시녀들은 설설 기어야 했다. 몇 해 전의 결투 대회에서 한 맹주의 눈에 아름다운 시녀가 들어왔다. 왕은 결투 대회의 상 대신 시녀를 내주었고 맹주는 그 시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 시녀는 감감무소식이 됐다. 아내로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맹주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으므로.
“결투 대회에서 혼자 고꾸라져 죽으면 좋겠다.”
“나! 나 시켜 줘!”
옆에서 대꾸한 건 풀을 뜯던 파라디였다. 파라디는 고개를 푸르르 흔들었다.
“결투 대회 전에 나를 풀어 줘! 실수로 놓쳤다고 하는 거야! 그러면 내가 미친 척하고 거품을 물고 왕을 밟아 죽일게!”
“멍청아. 너 그냥 도망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아니야!”
“아니라도. 말이 안 되잖아.”
“왜!”
파라디가 콧김을 뿜었다. 말리는 포도 한 알을 레일라의 입에 넣어 주려다가, 고개를 흔드는 레일라를 보고 픽 웃은 후 제 입에 넣곤 우물거리며 답했다.
“미친 척하고 거품을 물고 밟아 죽이기엔 왕은 가 닿지 못할 높은 의자에 앉아 있을걸? 내가 결투 대회 한 번 보지 못한 촌무지렁이라도 그건 안다.”
“내가 가서 받아 버리면 되지!”
“바보야. 왕을 밟아 죽인 말을 기사들이 그냥 놔둘 것 같니?”
왕을 밟아 죽이기도 전에 배치된 궁수들이 너를 쏴 죽일걸? 말리의 비아냥거림에 파라디가 짜증을 냈다.
“아! 정말이지. 레일라 넌 어디서 이런 계집애를 데려와서! 사사건건 안 된다는 말만 해! 사람이 좀 긍정적으로 살아!”
“말한테 사는 방법에 대해 참견 받다니 내 인생도 참 틀린 것 같기는 하다마는.”
말리는 여상하게 대꾸하며 레일라를 올려다봤다. 레일라가 빙긋 웃었다.
“마실 것을 드릴까요.”
“젠장. 레일라 너도 그렇게 태연하게 그 계집애 시중을 들고 있지 말라고.”
말이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아일라가 죽었을 때 네게서 용기를 빼앗아 간 것 같아.”
“아일라?”
“쟤를 낳은 엄마 말야.”
말리의 물음에 파라디가 답했다. 레일라는 말없이 파라디를 노려봤다. 파라디가 움찔했다.
“아, 알았어. 아일라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알아 둬. 아일라의 빚만 갚으면 나는 저 계집애가 날 놔주든 말든 이곳의 마구간을 뛰쳐나가 버릴 거야.”
“……빚?”
“파라디는 내 어머니에게 빚을 졌거든요.”
레일라가 나직하게 답했다.
“내 어머니는 마녀의 말이었던 파라디를 죽을 위험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파라디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나쁜 것들을 모아 악몽이 되고 싶어 했거든요.”
“악몽…….”
“악몽은 말의 형태를 가졌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파라디는 애초부터 자신이 악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몰랐고, 말이 모은 나쁜 것들은 파라디를 짓눌렀다. 파라디의 영혼이 악에 잠식되기 직전, 레일라의 어머니인 아일라가 파라디를 구해 주었다.
“그때 저 애가 아일라의 뱃속에 있었지. 아일라는 내게 저 애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딱 한 가지 들어주고 나면 가도 좋다고 말했어.”
파라디가 투덜거렸다. 말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일라를 바라봤다.
“그런데 아직 놔주지 않은 거예요?”
“쟤 얼굴 보면 모르겠니, 계집애야!”
파라디가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푸르릉 콧김을 뿜었다.
“쟤는 지 엄마 죽고 디온 성에 들어간 후로 세상 다 산 것처럼 굴어. 원하는 게 뭐가 있겠니 대체! 나도 답답해 죽겠어! 차라리 저걸 태우고 세상을 돌아다닐 수라도 있다면 마음이 풀리겠다마는!”
그 뒤로 파라디는 한참이나 벨담 왕성의 마구간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짚이 너무 축축하다느니, 말들이 너무 많다느니 하는 거였다. 그 시시콜콜한 불만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말리는 레일라를 쳐다봤다. 그녀의 옆에 앉아서 멀리 있는 성을 쳐다보는 남자는 정말로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말리는 기뻐졌다. 그녀는 침대에서의 레일라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안에 들어와 헐떡거리는 레일라의 얼굴은 그 무엇보다 자신을 절실하게 원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떠올린 말리는 다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신이 사정없이 얻어맞은 그날부터 레일라는 자신에게 손대지 않았다. 그녀가 무얼 하든, 어떤 것을 먹고 마시거나 쓰고 입든 옆에서 손발처럼 굴었으나 다시는 말리의 침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인지야 뻔했다. 말리가 울부짖고 얻어맞는 그 모든 시간 내내 레일라는 문 앞에 서 있었으므로. 하지만 몰랐던 것도 아닌데. 말리는 다시 포도를 입 안에 집어넣었다. 방금 전까지 새큼했던 포도가 이상하게도 쓰게 느껴졌다.
* * *
초여름의 결투 대회가 다가올수록 성의 분위기는 날을 세운 듯 예리하게 바뀌어 갔다. 시녀들은 맹주들과 그 기사들이 머물 방을 마련하느라 바지런히 굴면서도 노심초사했다. 그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 기사님들 중 한 명만이라도 낚아서 시집갈 테야!”라고 말하는 시녀가 없지는 않았으나, 다들 저게 철이 없어 그렇다며 혀를 찼다.
마구간지기는 말들을 잘 먹였다. 덕분에 파라디는 털에 윤기가 줄줄 흘렀다. 왕의 기사 하나가 파라디를 보고 “저게 공주 말만 아니었으면 내가 탈 텐데, 히야…….”라고 군침을 흘렸으나 파라디는 모른 척하다가 몰래 다가가 뒷발로 그 기사를 차 버렸다.
기사는 다리가 부러졌다.
문제는 그 기사가 왕을 대신해 결투 대회에 나갈 기사였다는 것이다. 성에 두 번째로 도착한 맹주와 식사를 하던 도중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은 대노했다.
“그 빌어먹을 말의 머리를 성문에 효수하여라!”
표면상으로 말의 주인인 말리는 식사를 채 마치지도 않은 맹주와 왕 앞에 불려 나가 무릎을 꿇고 빌어야 했다.
“송구하고 또 송구하여요. 파라디는 본디 어릴 적부터 저만 따르게 길러진 말인지라 그러합니다. 게다가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왕의 기사를 감히 상하게 한 죄 달게 받으라 하고 싶으나 사람의 말을 모르는 짐승이온지라,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왕 앞에서 무릎 꿇는 것은 익숙했으나 전혀 모르는 자가 식탁 앞에서 제가 비는 것을 관전하고 있는 모양새가 이상하게도 굴욕적이었다.
참 이상하지. 사람이 지푸라기 덮을 땐 거친 줄 몰라도 깃털 이불 덮을 때는 거친 줄 안다더니. 공주로 산 기간이 뭐 얼마나 된다고. 모르는 사람 앞에 무릎 꿇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유독 어렵게 느껴지네.
그런 생각을 하며 말리는 입에 걸리는 대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제 말의 잘못은 저의 잘못이고, 그러니 이 레일라를 벌하세요. 그 말은 레일라와 자란 유일한 친구랍니다…….
그 말들이 효과가 있었는지, 식탁 앞에 있던 맹주가 입을 열었다.
“허허, 왕이시여. 그만하시지요. 어리석은 짐승이 무얼 알겠습니까. 왕의 기사가 그리된 것은 애석한 일이나, 기사가 출전하지 못한다 하여 왕의 명예가 흐려지는 것이 아님을 저희 모두가 압니다.”
“아, 트로이. 내 아버지의 형제여. 그리 말씀하니 기쁘기 한량없소. 그러나 오랜 기간 나를 대신해 싸우려 준비한 기사의 노고는 무엇이 되는 것이오? 기껏해야 공주의 말 따위가 그 기사의 노력을 깡그리 없애 버릴 줄이야.”
트로이라고 불린 맹주는 새카만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였다. 눈이 가늘고 작은 것이 비열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왕보다도 더 인자하여 말리는 조금 안심했다.
“게다가 저리 아리따운 여인이 눈물로 읍소하니 옆에서 보는 내가 다 안타깝소이다. 왕의 여인 아닙니까. 진주알 같은 눈물을 떨구는 것이 참으로…….”
말리는 조금 떨었다. 왕은 가면을 쓴 채 트로이를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그렇군요. 그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곧장 넙죽 엎드려 절했다. 왕은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을 던졌다.
“네가 분명 네 말의 잘못은 네 잘못이라 했으렷다.”
엎드린 땅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말리는 느리게 답했다.
“……예.”
“좋다. 네 말을 베지 않으마. 하지만 네가 대신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벌이요?”
“싫으냐?”
뭔지 말을 해 줘야 싫은지 아닌지 알 것 아냐. 하지만 그녀는 파라디를 쓰다듬던 레일라의 표정을 알고 있었다. 그 시건방진 말이 마치 제 가족이라도 되는 듯한 따뜻한 표정 말이다. 그리하여 말리는 고개를 들고 답했다.
“아니요, 받겠습니다.”
왕이 잔인하게 웃었다.
“그래. 너는 네 말의 죄를 대신하여, 누구든 대회에서 우승한 기사의 침대를 덥혀야 할 것이다.”
말리는 제 귀를 의심했다.
* * *
방에 돌아올 때까지의 기억이 없었다. 그녀는 비척비척 걸어 제 방으로 돌아왔다. 왕에게 가는 말리를 따라간 것은 앤이었는데, 앤은 창백한 얼굴로 속삭였다. 트로이는 맹주들 중 가장 강력한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벨담의 맹주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나 여태까지 선왕과의 맹약 때문에 남아 있었노라고.
그런 트로이가 그녀에 대해 칭찬했으니 왕이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말리는 낮게 웃었다. 앤이 그녀의 차가운 어깨를 주무르며 필사적으로 속삭였다.
“괜찮아요, 공주님. 괜찮으실 거예요.”
뭐가 괜찮단 말인가. 말리는 왕이 그 말을 하고 나서의 식탁의 공기를 떠올렸다. 트로이는 잠시 입을 닫았다가, 와하하 큰 웃음을 지었다.
‘왕의 여인을 우승하는 기사에게요?’
‘그렇습니다. 뭐, 우승하는 기사의 주인일 수도 있겠지요.’
‘이거 발칙한 상품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트로이는 그녀를 슬쩍 곁눈질했다. 탐욕이라기보다는 지배욕에 가까운 눈길이었다. 말리는 그 눈빛을 다시 기억해 내고 몸을 떨었다. 차라리 자신이 탐나 그러는 거라면 그러려니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맹주는 제 몸 같은 게 탐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자신들끼리의 지위를 재확인하는 짐승들끼리의 행위였다.
벨담 왕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줄로만 알았는데, 똑같은 자가 세상에는 또 있었다.
끝이라고는 없었다. 말리는 아득해졌다.
‘제 기사들에게 지금이라도 일어나 마저 훈련하라고 해야겠군요.’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을 테니 놔두시지요.’
징그러웠다. 그녀는 흐린 시선을 공기 중에 흘렸다. 눈에 제대로 들어오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난 죽을 거야…….”
“아녜요, 공주님.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앤은 그녀의 잠자리를 얼른 봐 주고 오늘은 일찍 주무시라며 인사하고 나갔다.
침대에 누운 말리의 귓가에 문밖에서 앤이 작게 다른 이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다 들렸다. ‘시녀장님 좀 불러 줘, 빨리. 도저히 안 되겠어. 나는…….’ 아넷사가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 났다면, 앤은 언제고 제 근처에서 도망치고 싶어 안달인 시녀였다. 그러니 아마 시녀장을 부르는 것도 제 배치를 바꿔 달라 읍소하려는 것이리라.
뭐 앤의 예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말리는 자신의 앞길을 뻔히 예상할 수 있었다. 대체로 사내들이라는 것은 제 물건을 남에게 빌려주지 않았다. 거기에는 여자도 포함된다. 자신보다 못한 사내에게는 물론이고, 자신보다 잘난 사내에게는 더더욱이다.
왕은 자신을 상품으로 내건 것이 아니라 아예 갖다 바친 것이었다. 그러니 맹주들이 떠난 후에는 어떻겠는가. 말리는 괴로워했다. 표면적이기는 하나 국혼으로 온 공주를 트로이가 데려갈 리도 없으니 벨담에 남아 그녀가 맞이할 끝도 좋지 않을 게 뻔했다.
분노가 차올랐다. 말리는 누워 침대보를 박박 긁었다. 파라디를 찾아가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 기사의 일이 있은 후로 파라디는 작은 마구간에 갇혀 감시를 당하고 있다 했다. 지금 파라디를 찾아가 봐야 밖으로 끌고 나올 수도, 쥐어 잡을 수도 없었다.
답답했다.
레일라가 찾아온다 해도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말리는 눈을 감았다.
‘마말리야. 너 호강해 보고 싶지 않니.’
그렇게 자신에게 물었던 레일라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버리고, 울부짖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호사와 금붙이로 가득한 삶이 이런 것일 줄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녀는 거기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말리는 그때 자신이 어떠했는지도 기억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가를 떠돌며 하녀 자리를 구하던 떠돌이 여자애가 왕비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기뻐한 것은 자신이다. 물리지 않을 거냐고 물어본 것도 자신이며, 고작 뺨 한 대 올려붙이는 것으로 승낙한 것도 자신이다.
그러니 그녀는 차마 레일라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이제는 제 침대로도 올라오지 않고, 제 곁을 맴돌다가 최근에는 아예 그녀를 보면 외면하고 다른 일을 찾아 사라져 버리는 그 어깨 움츠린 남자를 생각한다면.
대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 물어볼 대상은 그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제 어머니를 생각했다.
엄마. 나를 왜 멋대로 낳았어?
수많은 딸들이 괴로운 밤마다 되뇌는 말을 그녀 또한 되뇌며 잠에 들었다. 그 밤의 끝까지 레일라는 찾아오지 않았다.
* * *
벨담 성의 성벽에는 푸른 안찬꽃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 꽃들이 일제히 활짝 만개한 날, 왕은 아름답게 장식한 백마를 타고 성을 나섰다. 그 옆에는 말리가 있었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에는 진주알이 알알이 장식되었으며 뺨에는 붉은 보석을 갈아 넣은 분이 발려 있었다. 파라디는 여전히 작은 마구간에 갇혀 있었기에 말리는 왕이 가진 말 중 가장 순한 암말을 탔다.
결투 대회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들판에서 열렸다. 들판에는 이미 넓은 목책과 가제보가 세워져,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넓고 높은 가제보에 왕이 앉았다. 말리는 왕보다 훨씬 앞쪽에 앉았다. 모두가 이 결투 대회의 부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 자리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몰렸다.
오만 시정잡배에게 희롱당했을 때보다, 수백 명이 저를 쳐다보는 위에 장식된 제 모습이 훨씬 치욕스러웠다. 왕은 그녀의 뒤쪽, 더 높은 곳에 앉아 우쭐거렸다.
“날이 좋구나.”
왕은 가면이 아니라 베일을 썼다. 더운 날씨에는 그렇게 한다고 했다. 베일은 얇고 하늘거리는 천 여러 개가 겹쳐져 있었는데, 가면과 마찬가지로 그의 수염 난 턱밖에 보이지 않았다.
햇빛 아래에서 본 왕은 이질적이었다. 말리는 물끄러미 왕을 올려다봤다. 왕은 그녀를 힐끗 보고 픽 웃었다. 그뿐이었다.
“마실 것을 가져다드릴까요.”
아넷사가 그녀에게 물었으나 말리는 고개를 저었다. 앤은 그날부로 배치가 바뀌었다. 성의 화훼부로 갔다 했다. 평소엔 게을러터져 생각이 없어 뵈던 나디아도 슬금슬금 그녀를 피하는 것이 아마 앤의 뒤를 따를 것 같았다. 아넷사는 남아 있기는 하였으나 이전과 명백하게 태도가 달랐다. 이전에는 그녀에게 입 안의 혀처럼 굴려 애썼다면, 지금은 제 할 일만 한다는 식이었다. 그러니 말리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왕의 주변에 맹주들 다섯 명이 앉았다. 그 남자들의 시선이 제 뒤통수에 꽂히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뿌우―
나팔수가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를 불었다. 목책이 열렸고,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우쭐대고 있었다. 말들 또한 무거운 투구를 썼는데, 말리는 저도 모르게 파라디에게 저 투구를 씌운다면 얼마나 불평해 댈지 상상하고 웃을 뻔했다.
아니…….
그 말썽꾸러기 말이 뭐가 좋다고 웃는단 말인가.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따지고 보면 그 말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말의 주인도 사실 자신이 아닌데. 말리는 남자를 떠올렸다. 레일라를 본 지도 오래됐다. 정확히는 레일라의 얼굴을 본 지 오래됐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말리는 그날 이후 결투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왕의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마 왕도 말리가 울고불고 읍소할 것을 알고 있으니 그리했을 것이다. 하여 말리는 새벽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레일라가 새벽에 깨어 그녀 몰래 기척 없이 나가곤 하는 것을 말리는 알고 있었다. 레일라는 긴 하루를 밖에서 보내며 잡일을 도왔다. 그 꼴이 보기 싫어 말리 또한 하루 내내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고, 두 사람은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다.
서재의 시종은 밤에는 그녀가 거기에 있는 것을 못마땅해했으므로, 말리는 어두워지면 별수 없이 몇 페이지 읽지도 못한 책을 덮고 제 방으로 돌아와 찬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레일라가 유령처럼 들어온다.
레일라는 침대의 말리 옆에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고, 말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 후 이불을 어깨 위까지 덮어 주곤 했다. 자신을 보고 싶지도 않아 하는 남자치고는 눈물 나게 다정하여 말리는 자신이 깨 있다는 것을 티 내지 않으려 죽도록 노력했다.
보기 싫다기보다는, 볼 수 없음이리라.
말리는 레일라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말리와 정을 통한 이후로 언제나 죄책감에 몸부림쳤으며 왕이 저를 채찍질한 날 이후로는 더했다. 게다가 파라디가 벌인 일로 발생한 결과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레일라가 그녀를 볼 면목이 없는 것이야 당연했다.
말리는 레일라를 십분 이해했으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폭풍이 그녀의 속에 소용돌이쳤다.
“……지만 왕께서는 첫 아이를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때 뒤에서 나누고 있는 대화가 그녀의 귀에 들렸다. 말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맹주들이었다.
“그녀가 디온의 공주임을 압니다. 허나…….”
“……니까. 그렇지만……는 아니니…….”
꼴에 그녀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는지 저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그녀는 힐끗 뒤를 쳐다봤다. 그때 마침 맹주와 이야기하던 왕의 얼굴이 말리 쪽을 향했다. 베일에 가려 왕의 시선은 볼 수 없었으나, 말리는 왕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왕이 비웃음을 띠었다.
“……꼭 그 첫 아이가 한 여자의 배에서 나오리란 법은 없지요. 비록 저가 내 애를 낳겠다고 그리 애원한다 해도 말입니다.”
말리는 이를 악물 뻔했다. 왕은 말리의 발악을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리가 손톱을 세우고 왕에게 달려들 수는 없는 법이다. 왕과 맹주들 근처에는 칼을 찬 기사들이 열 명은 서 있었다. 그녀는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대가로 목숨을 잃으리라.
죽기보다는 진창에 구르는 것이 나았다. 말리는 여전히 죽기 싫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않은 척, 때마침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긴 척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왕이 보는 자신의 뒷모습은 어떠할까. 레일라처럼, 귀가 수치심에 새빨개져 있을까? 그녀는 궁금해하며 동시에 생각했다.
그래, 저 미친놈의 침대를 덥히는 것보다야 다른 놈의 침대를 덥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녀가 웃으면서 아양을 떨고, 살살 마음을 녹인다면 저를 품은 맹주 하나가 자신을 데려가겠노라 해 줄지도 모르지 않는가. 왕보다 강한 맹주들이라면…….
부질없는 상상이었다. 시녀 계집애보다 공주의 삶이 나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이미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지 않은가. 맹주의 첩실은 뭐 대단히 나을 일인가.
말리는 울적한 마음으로 결투장을 바라보았다. 목책 안에서는 기가 막힌 개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말들끼리 얽혀 뒤집힌 자들, 창을 세우고 달려드는 자들, 창을 놓쳐 검을 빼서 싸우는 자들……. 다쳐서 퇴장하는 자, 다친 자 대신 다시 난입한 자…….
이 자리에 벼락이 떨어져서 다 죽었으면 좋겠다.
말리는 그렇게 빌며 아득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이쿠!”
“저런!”
누군가가 엄청난 힘에 밀려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하필 중갑옷을 입은 자라 소리도 엄청났다. 와장창,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렸다. 투구를 눌러쓴 그의 상대는, 왕의 깃발을 등에 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