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무치는 외로움
말리가 탄 파라디의 고삐를 끌고 들로 나갈 때는 가슴이 설렜다. 탁 트인 들판에서 찬 바람을 맞으니 그 바람이 시려 말도 못 할 정도로 추워도 속이 다 시원해졌다.
그리고 오늘, 바람을 맞으며 툴툴대는 여자를 보고 레일라는 조금 웃었다.
파라디와 티격태격하는 말리는 참 기세도 좋았다. 파라디는 레일라를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댔다. 저깟 계집애를 그렇게 알뜰살뜰 돌보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빨리 도망쳐서 신이 나게 세상을 떠돌아다니자고 자꾸만 졸라 댔더랬다.
“……그런 소리를 했어?”
파라디의 등에 탄 말리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갈기를 잡아당겼다. 파라디가 소리 질렀다.
“아파, 이 계집애야!”
“아프라고 당겼다 왜!”
“아하하.”
파라디는 체격이 크고 힘이 좋은 말이었다. 따라서 레일라가 말리와 함께 파라디에 타는 것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말리를 뒤에서 안아 태운 레일라가 부드럽게 고삐를 당겼다.
“파라디, 기분은 어때?”
“거지 같아!”
입에서 나오는 말과는 다르게 멋들어지게 걸으며 파라디가 고개를 푸르르 흔들었다.
“내가 오늘 너희들이 희한하게 마구간에 정답게 걸어오는 꼴이 아무래도 사달이 났다 했지. 대관절 인간 어린애들은 왜 그렇게 쉽게 눈이 맞는다니? 레일라 너, 사리 분별 제대로 하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어쭈.”
말리가 일부러 파라디의 등 털을 잡아 뽑았다. 파라디가 펄쩍 뛰었다.
“하지 마, 이 계집애야!”
“너는 아주 오래 산 것처럼 말한다? 그래 봐야 말 주제에.”
전성기의 말들이래 봐야 서너 살 정도다. 레일라와 오래 지냈다 해도 일고여덟 살 정도일 게 뻔했다. 말리는 심술궂게 웃었지만, 곧 파라디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계집애야 나는 일흔 살이 넘었다고!”
“뭐? 거짓말하지 마.”
“사실이에요.”
레일라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말리는 놀라 레일라와 파라디를 번갈아 쳐다봤다. 파라디가 툴툴댔다.
“정말이지, 머리가 있으면 말하는 말이 다른 말들보다 좀 오래 살 거라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냐?”
“말하는 말 처음 보냐고 물었던 말이 나한테 할 말은 아니거든?!”
“아! 쥐어뜯지 말라고!”
짧고 폭력적인 대화 끝에, 말리는 파라디가 아주 오래전 어떤 마녀의 말이었으며 마녀 덕분에 사람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세상에, 너 엄청나게 꼬부랑텡이네.”
“그래! 그러니까 나를 어른으로 모시라고.”
“이건 질겨서 고기로도 못 먹겠어.”
“야!!!”
파라디가 고함을 질렀다. 말리는 웃으며 색색 숨을 몰아쉬다가 슬쩍 물었다.
“그럼 그 마녀는?”
“아. 죽었지.”
“……말한테 사람의 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는 마녀인데도?”
“야, 그거랑 그건 다르지.”
파라디가 푸르르 웃었다.
“아무리 마법을 부려도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죽이겠다고 하는데 버텨 낼 수가 있겠어?”
말리가 조용해졌다. 파라디는 흥얼거리듯 말했다.
“마녀들의 마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늘을 걷고 악마를 불러내고 사람들을 조종하는 게 아니야. 마법에도 제물이 필요하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라 다른 게 필요하지.”
“뭐가 필요한데?”
“글쎄, 외로움이나 고독함 같은 거?”
“그게 뭐야.”
파라디가 머리를 흔들며 다각다각 들판 위에 솟은 바위산으로 걸어 올라갔다. 야트막한 동산에 가까운 그 바위산은 벨담 성의 바로 근처에 있었으며 벨담 성의 마구간지기가 산책로로 추천한 곳이었다. 말을 타고 시녀와 함께 바위산으로 올라가는 공주의 모습은 벨담 성의 경비병들에게도 아주 잘 보이리라.
“마녀들이 왜 숲에서 혼자 산다고 생각해?”
“글쎄? 우리 엄마는 혼자 안 살았는데.”
말리는 별생각 없이 대꾸했으나 다음 순간 돌아온 놀라움 섞인 침묵에 움찔했다. 파라디가 정말 놀랍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려다가 신경질을 냈다.
“레일라! 이 눈가리개 풀어 줘! 저 계집애가 안 보여!”
벨담 성의 말구종들은 지나치게 성실했으며 모든 말들이 뒤를 보고 놀라지 않도록 착실하게도 뒤쪽 눈가리개를 달아 주었던 것이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 파라디가 물었다.
“너를 낳은 여자가 마녀라고?”
“으응, 마을 사람들이 그랬어. 하지만 뭐. 나는 엄마가 진짜 마녀라고 생각 안 해.”
“아냐, 흥미 있는걸. 더 이야기해 봐.”
“아니, 그 전에 네가 하던 말부터 마저 해. 왜 마녀들은 숲에서 혼자 사는 거야?”
파라디가 푸르릉 코웃음 쳤다.
“마녀들은 마법을 쉽게 부릴 수 없어. 그네들이 부리는 마법은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그 대단치도 않은 마법을 부리기 위해서 마녀들이 바쳐야 하는 제물은 추상적인 거야. 가을 들녘의 햇살, 가장 먼저 불어오는 봄바람의 부드러움…….”
“정말 추상적이네.”
“하지만 그 뭣보다 적확한 제물이기도 하지. 가을 들녘에서 햇살을 훔쳐 마법을 부리면, 그 들녘의 추수는 완전히 망해 버리지. 들판이 완전히 황금빛이 되기 직전에 돌풍을 불어오게 해서 밀을 모조리 쓰러트린 마녀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없어?”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익숙한 그림이기는 했다. 말리는 눈을 껌벅였다.
“사실은 햇살을 훔쳤기 때문에 빈 자리에 돌풍이 들어앉은 것뿐인데, 돌풍을 부리는 마법을 부리는 마녀가 된 거야.”
파라디는 바위 옆을 슥 돌아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마녀들은 숲에서 혼자 살지. 깊은 숲의 적막함이나 고독감, 사무치는 외로움은 가장 쉽게 모이는 제물이니까. 하지만 그 제물로 부릴 수 있는 마법은 한정돼 있어.”
“뭔데?”
“친구를 만드는 거지. 악마를 부른 마녀의 이야기는 들어 봤을 건데.”
“그건 들어 봤지.”
“사무치는 외로움은 꼭 제물로 바치지 않아도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이거든.”
알 듯도, 모를 듯도 했다. 말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동화책에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는 그만두고. 그럼 우리 엄마는 마녀가 아니었던 거네. 그럴 줄은 알았어.”
“왜?”
“우리 엄마가 마법을 부리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흐음.”
파라디가 끝내 바위산 정상에 섰다.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벨담 시가지가 보였다. 낮은 지붕들, 군데군데 바람과 함께 흐르는 연기들, 그리고 걸어가는 사람들과 외성 벽을 순찰하는 경비병들. 디온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널찍하고 커다란 수도. 말리가 햐, 하고 숨을 터트리는데 레일라가 작게 속삭였다.
“그건 모르는 거랍니다.”
“왜요?”
“나의 어머니는 깊은 숲의 고독함을 제물로,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거든요. 그리고 왕이 찾아왔고, 내가 태어났지요.”
“…….”
“어쩌면 당신의 어머니도 마지막 마법을 부려 당신을 얻었을지도 모르죠.”
말리는 몸을 살짝 비틀어 제 허리를 쥔 남자를 쳐다봤다. 메마른 바람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남자는 여상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건 모르는 거잖아요.”
레일라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남자는 눈을 가늘게 휘었다. 말리는 남자의 버석한 손에서 고삐를 빼앗아 쥐었다. 가볍게 당기자 파라디가 투덜대면서도 정상에서 고개를 돌려 다각다각 돌길을 걸어 내려갔다. 사방은 모두 메말라 갈색이 된 풀들뿐이었으나 말리는 그 와중에도 조금씩 눈을 틔운 나뭇가지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엄마는…….”
입을 열었으나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는 염소의 젖을 가장 먼저 짰다. 말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거친 밀반죽을 화덕에 넣어 구운 후 막 일어난 말리를 식탁 테이블 앞에 앉혔다. 식탁 위에는 언제나 거친 밀빵과 염소젖이 있었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말리를 데리고 숲으로 나가 약초를 캤다.
여름이면 가끔 운 좋게 나무딸기를 딸 수 있었다. 약초와 흙냄새가 함빡 묻어나는 손으로 엄마는 말리의 입에 딸기를 넣어 주었다. 채 익지도 않은 딸기를 급한 마음에 따서 입에 넣곤 하는 말리와 달리 엄마가 딴 딸기는 모두 잘 익은 것들이었다. 그 딸기를 입 안에 넣으면 자잘한 알맹이에서 과즙이 터져 나왔다. 달고 향긋한 맛과 풋내 같은 것들이 섞여 어린 말리에게는 그 이상 가는 기쁨이 없었다.
점심때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약초에서 흙을 털어 내어 말리고, 나무 창문을 모두 열었다. 햇빛이 낮 동안 집에 충분히 들어와야 나쁜 악마가 밤에 침범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동안 말리는 앞치마를 털고 오두막 아래의 땅굴에 들어가 엄마가 소금에 절여 저장해 놓은 돼지고기를 들고 나왔다. 오늘은 꼭 돼지고기가 들어간 수프를 먹고 싶다고 조르면, 엄마는 웃으면서 돼지고기를 조금 자른 후 도로 고기를 집어넣으라고 일렀다.
그리고 엄마는 화덕 위에 낡은 냄비를 올리고 돼지고기를 넣어 볶는다. 땅에서 막 뽑아낸 감자, 그리고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아 통통하고 생기가 넘치는 무스카리 뿌리, 버터를 조금 넣으면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갈색으로 익어 말리의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엄마는 그 위에 물을 부었다. 가끔은 마을에서 얻어 온 싸구려 술을 부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저녁은 따뜻한 돼지고기가 들어간 수프를 먹게 되는 것이다.
“……마녀는 아니었어요.”
그 모든 이야기를 말리는 삼켰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이었다. 이제는 하도 오래되어 저 기억 아래로 가라앉아 잘 생각나지도 않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죠.”
바위산을 걸어 내려가며 말리는 자신이 찢으려던 앞치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마구 짓밟고 구긴, 그리고 찢어 버리려던 앞치마.
그 앞치마를 찢으려던 것을 말린 사람은, 지금 제 손을 감싸 쥐고 있는 남자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 앞치마가 자신을 지켜 줄 거라던 엄마의 말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적어도 누군가를 만나게 해 주긴 한 셈이었다.
* * *
알렉시스가 또 우느라 왕의 기분을 망쳤다고 했다. 말리는 왕에게 끌려가 그의 비위를 맞추겠다고 성심성의를 다했으나 왕은 별것 아닌 이유로 또 그녀를 손찌검했다. 엉덩이를 찰싹 때리고, 가슴을 꽉 쥐는 수준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였다.
문제는 왕이 실수했다는 것이다. 왕의 손바닥은 두껍고 단단했으며, 그냥 때리기만 해도 말리의 입 안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오늘 새벽의 왕은 제 손에 반지가 끼어 있는 걸 깜박했다. 말리의 뺨은 보기 싫게 찢어졌고, 엉겁결에 놀라 주저앉는 바람에 혀를 깨물었다. 입 안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말리를 보고 왕도 좀 놀란 듯했다. 그는 말리를 내보냈고, 엉망이 된 그녀를 보고 레일라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말리는 레일라에게 터진 입 안을 보여 주며 웃었다. 레일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말리의 태도는 제가 씹던 음식을 그대로 보여 주며 장난치는 개구쟁이 같았으나 입 안은 개구쟁이의 장난 수준이 아니었다.
“당신이 도망친 다음에, 의사로 변장해서 성에 들어오면 되겠어요. 그럼 우리는 이 성에서 오래오래 잘 살 수 있겠죠?”
말리의 방에는 이제 향유 냄새보다 고약 냄새가 더 진해진 지 오래였다. 벨담 성의 늙은 의사는 레일라가 찾아갈 때마다 쯧쯧 혀를 차며 고약을 내주었다.
“저는 약을 다루는 재주가 없는걸요.”
“내가 아니까 괜찮아요. 그 의사도 영 돌팔이 같던데 뭘.”
레일라가 뺨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 내고 고약을 펴 바르자 말리는 이마를 찡그렸다. 장난친다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쓰라려…….”
“조금만 참으세요.”
레일라의 얼굴이 먹먹했다. 그는 되도록이면 말리의 앞에서는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가슴이 턱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 바르면 입 맞춰 줘요.”
“입술도 터졌는걸요.”
“안 그러면 약 안 바를래요.”
말리는 응석 부리듯 말했다. 레일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조금 웃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가볍게 떨어지는 입술에 말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 아직 다 안 발랐는데 상부터 줘요?”
“그 고약, 입에 들어가면 쓰거든요.”
“아, 약아빠진 사람.”
키득키득 작은 웃음이 번졌다. 그러다가 이내 입술이 맞물렸고, 숨이 가빠졌다. 레일라가 고개를 저었으나 말리는 고집스럽게 그를 끌어당겼다. 결국 말리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레일라가 제 엉덩이를 쥐고 개처럼 헐떡거리게 만드는 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새벽이 지나 아침 햇살이 방 안에 들어찼을 때에서야 말리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아직도 음욕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의 그녀와 달리 레일라는 금세 단정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는 말리의 젖가슴 위에 입 맞춘 후, 침대보 위에 떨어진 씨물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 냈다.
“역시 당신의 애를 낳아야겠어요.”
“무슨 소리예요.”
말리가 샐쭉 웃었다.
“왕의 애를 밴 척하고, 당신 애를 낳으면 왕은 그 애의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가면을 벗어 던지겠죠? 그럼 곧장 죽어 버릴 거야…….”
왕의 얼굴이 내보이게 되면 모두가 피를 토하고 죽으리라는 저주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
레일라는 그녀의 뺨이 침대보에 쓸리지 않도록, 그 사이에 자신의 손바닥을 끼웠다. 그러고는 말리의 옆에 모로 누웠다.
“그러려면 왕이 진탕 취해야 할 텐데, 그게 참 쉽지가 않네…….”
왕은 여전히 구음만을 반복시킬 뿐이었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걸까? 말리는 왕의 좆을 제 안에 넣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쉽지 않았다. 그는 말술인 데다가, 말리와 뭔가를 같이 먹지 않았다. 꼭 말리뿐만은 아니었다. 연회에서도, 만찬에서도 그는 좀처럼 식사를 하려 들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있으니 입을 움직이는 것이 번거로운 듯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 자식의 씨물을 품으면…….”
그렇게 말하다가 말리는 퍼뜩 놀란 눈을 했다. 레일라는 제 품 안의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라자 반사적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말리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재수 없이 그 새끼 애를 배 버리면 어떻게 하죠?”
“……당신.”
“그러면 영원히 그 새끼의 좆을 빨아야 할 텐데…….”
말리는 진저리를 쳤다. 생각만 해도 싫은 듯했다. 레일라는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리의 어깨를 담요로 감쌌다. 한참 후에야 말리가 중얼거렸다.
“따뜻해.”
“불을 더 피울까요.”
“아니야, 괜찮아요. 곧 봄인걸. 으음, 그러고 보니…….”
말리가 레일라를 올려다보며 심술맞게 웃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녀가 웃는 일은 아름답거나, 고혹적이라거나, 해맑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음험하거나 심술궂거나, 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미소였는데도 레일라는 말리가 그렇게 웃을 때면 숨이 턱 막혔다. 갑갑하거나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심장이 빨리 뛰고, 그녀를 부서지도록 안아 버리고 싶었다.
이 비틀린 감정을 레일라는 사랑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자아이로 태어나 레일라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그 짧은 삶에서, 단 한 번도 애틋하고 아련하고 고귀한 일이 없었으므로 제게 찾아온 사랑 또한 그런 것이라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품에 안긴 여자는 귀하고 애틋했다.
“당신 내 옆에서 자면서 무슨 생각 했어요?”
“……당신 옆이요?”
“그 날 있잖아요.”
밤을 새우고, 기사의 망토를 빌려 방으로 돌아온 날을 말하는 것이었다. 돌바닥 위에 담요를 깔고 모로 누운 레일라를 말리는 제 침대로 불러올렸더랬다.
“저야말로 묻고 싶어요. 당신은 무슨 생각이었나요.”
“글쎄요. 그냥…….”
말리는 방만하게 늘어진 자세로 키들거렸다.
“차가운 바닥에서 자고 일어나면 빌빌댈 당신이 꼴 뵈기 싫을 게 뻔했거든요.”
그러니까, 저런 소리를 해 대도 어여쁘기만 하니 어찌 이게 사랑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레일라는 미소 지었다.
“그러니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무슨 소리예요? 꼴 뵈기 싫다니까.”
레일라는 그날 죽은 듯이 잠든 말리의 옆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추운 건 싫다고 중얼거리며 잠든, 못돼 처먹은 여자애가 살아온 인생은 어떤 것일까 가늠하느라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내몰리는 일이야말로 제일 비참한 일이라고 말하며, 뺨을 쳤던 공주를 제 옆에서 재우는 계집애야말로 누군가의 따뜻함이 절실했던 이였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아무리 고단한 하루라도 다 내려놓고 쉴 곳 하나쯤은 따뜻해야 하는 법인데, 잠자리마저도 차갑다는 게 얼마나 속을 베어 내는 일인지 저는 알거든요.’
그 말이 뜻하는 바야 뻔했다. 단 한 명도 그녀에게 다정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그녀는 베푸는 법을 몰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풀었다. 서툴고 거칠게, 그러나 절실하게.
아무 말도 섞지 않았지만 말리는 잠들 때가 되면 당연한 듯 레일라가 누울 자리를 비우고 모로 누웠다. 불안정하던 숨소리가 평온해지면 레일라는 그 등을 천천히 감싸곤 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얻어맞은 자국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더듬던 키스가 깊어졌다. 말리가 다리를 벌려 그를 휘감았으나 레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다쳤잖아요.”
왕은 집요할 정도로 말리의 허벅지 안쪽을 헤집어 놨다. 꼬집고, 때렸다. 레일라는 방금 전에 교합할 때도, 말리가 흠칫거리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참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낸다고 했으나 말리는 성에 차지 않는 것 같았다. 상처가 난 곳도 있었다. 말리가 앙탈을 부렸으나 레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더 안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레일라는 말리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갔다. 긁히거나 상처 난 허벅지 안쪽을 보니 욕지기가 나왔다. 왕을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죽여 버린다라.
레일라는 잠시 그 생각에 매몰될 뻔했다. 하지만 제 사타구니 사이에서 우뚝 멈춘 남자가 말리는 궁금했던 모양이다. “당신……?” 그 말에 레일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그런 번잡스러운 생각보다 더 집중해야 할 곳이 있었다. 레일라는 제 엄지손가락을 한번 쭉 빤 뒤, 그녀의 음부를 살살 문질렀다. 벌겋게 변한 곳을 피해 부드럽게 지분대니 잔뜩 맺힌 꿀이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 나왔다.
“아응…….”
말리가 달콤한 숨을 내뱉었다. 레일라는 빙그레 웃으며 혀를 내밀어 안을 게걸스럽게 핥았다. 추접한 소리가 이내 침실을 메웠다. 대음순부터 소음순까지, 집요한 혀 놀림에 말리의 허리가 비틀리기 시작했다. 구멍 위의 음핵을 살짝 물었다가, 다시 핥으니 여자는 히익 소리를 냈다. 레일라는 검지와 중지를 다시 빤 뒤 그녀의 안쪽에 천천히 집어넣고 살살 긁었다.
“아흑, 흑, 아, 아. 더. 더…….”
“말했잖아요, 다치셨다고.”
레일라는 상냥하게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안쪽을 빠르게 쓸어 냈다.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멍 주변이 끈적해지고, 이어서 물이 스며 나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레일라는 다시 입술을 구멍 위의 자그마한 콩알 위에 대고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손가락은 계속 움직이는 채였다.
“으응, 아흥!”
추웁, 춥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신음 소리도 높아져만 갔다. 얼굴은 새빨갛게 익었고, 허벅지는 파르르 떨리고 있다. 레일라는 반대편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한껏 벌리며 속삭였다.
“공주님에게 예쁜 장난감을 마련해 드려야겠어요.”
“아앙, 내 장난감은, 당신이, 제일…….”
그 와중에도 말리는 웃으며 제 말을 받아쳤다. 레일라는 웃으며 이를 세웠다. “하응!” 신음과 함께 말리가 허리를 튕겼다.
“벨담의 산에서 나는 나무 중에는 오크 나무가 가장 단단하다죠. 아주 단단하고 큰 물건을 하나 가져다드릴게요.”
“아응, 응……. 그것을 어디 쓰려고…….”
레일라는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음핵을 꾹 눌렀다.
“아학!”
말리가 자지러지며 몸을 세웠다. 구멍이 움찔거렸고 레일라의 손가락이 다시 안으로 파고들었다. 천천히 하겠다고 했지만, 여자가 이토록 좋아하니 레일라의 손놀림도 빨라졌다. 어느새 오른팔이 살짝 뻐근해졌다. 하지만 팔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점막 안은 축축해지다 못해 넘치게 된 지 오래였다.
“아흐흐, 으, 아흑!”
끝내 절정을 맞은 말리가 뒤로 축 늘어졌다. 레일라는 차분하게 말리의 허벅지에 입을 맞춘 후 손가락을 안에서 빼냈다. 말리는 다리도 채 닫지 못하고 그대로 개구리처럼 사지를 벌린 채 덜덜 떨었다. 쾌감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다시 수건을 가지러 일어나는 레일라에게 킥킥대는 웃음이 따라붙었다.
“그래, 하나 가지고 오세요. 왕께서 박아 주지 않으니, 이것이라도 박아 보았다 하며 그 앞에 다리를 벌리고 엉거주춤 걸어가면 혹시 모르지. 씨물이라도 안에 한 번 부어 줄지.”
레일라는 고개를 슬쩍 돌리고 픽 웃어 보였다. 말리의 가늘게 뜬 눈도 웃음으로 가득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아침 일과를 준비하던 시녀 하나가 그녀의 방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기함해 그 모습을 훔쳐보고 놀라 달아났다는 것은 끝내 몰랐다.
* * *
“내가 들은 것이 있다.”
여느 때와 같이 들어온 왕은 침대에 누워 조각상 쪽을 바라보고 있던 말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바로 올라오지 않고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저런 소리를 내뱉었다. 말리는 등골이 싸하니 소름이 돋았다.
뭘, 뭘 들었을까.
“앙큼한 년.”
그대로 누워 있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었다. 말리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앉은 후 왕 앞에 무릎으로 기어갔다.
“아이, 무슨 소리를 들으셨을까요. 제가 폐하를 매일 밤 그린다는 이야기?”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며 웃어 보였으나 그 입가가 떨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왕의 가면은 오늘 한층 더 화려한 것이었는데, 그의 입매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그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왕은 기분이 나쁠 때보다 기분이 좋을 때 그녀에게 더 가혹하게 굴었다.
“요사스러운 것. 길바닥의 창녀라 했는데 그보다 더 너절할 줄이야.”
“무슨 소리신지 도통 모르겠어요, 폐하.”
“네 친정 시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그걸 시녀라 할 수는 없지.”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말리는 태연을 가장하려 했으나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손끝이 와들와들 떨리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들판을 지나가던 상인의 수레를 얻어 타고, 그 좆을 빨아 주며 전대 속의 은화를 훔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손 한번 떨지 않았는데, 이게 이렇게나 무서운 일인지 몰랐다. 말리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저는…….”
왕은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쳐다봤다. 가면 속의 싸늘한 눈이 이토록 공포스럽게 다가오다니 말리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저의 시녀가 폐하의 마음을 거슬렀나이까? 그렇다면 당장 불러 매질하시구…….”
“미친년.”
왕이 그녀의 말을 자르고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밀었다. 힘이 실린 손짓이었고, 말리는 대번에 침대 밑으로 떨어져 굴렀다. 쿵, 소리가 났으며 얇은 네글리제만 입은 몸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혔다. 아픔에 눈물이 글썽했으나 지금 제 몸의 아픔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말리는 허겁지겁 엎드렸다.
“폐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로 몰라요.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인 것을 들킨 걸까? 들킨 것이 분명했다. 말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뗐다. 모든 일은 모름지기 잡아떼는 게 최고였다. 그러면서도 말리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오늘 레일라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셈했다.
오늘의 몸단장은 나디아가 했다. 최근 시녀들은 말리를 화려하게 장식해 보았자 장신구 때문에 그녀의 몸에 생채기만 더 는다는 것을 알고 최대한 간소하게 그녀를 장식했다. 그러니 많은 시녀가 붙을 필요가 없었다. 레일라는 오후에 그녀의 목욕을 도왔다.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말리를 욕조에 앉히고, 사타구니를 빨았다. 키득거리며 목욕을 끝낸 후 레일라는 물을 버리러 가며 세탁부에 들러야 한다 말했다. 그리고 돌아왔는지 어떤지 모른다.
세탁부는 왕의 경호대 뒤에 붙어 있다. 남자인 것을 들켰고, 왕의 여인을 탐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바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말리는 차가워진 손가락을 꾹 쥐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레일라야. 정말로 모른단 말이냐?”
왕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비단신이 눈에 보였다. 비단신 끝에 달린 것은 말리가 평생 일해도 살 수 없는 황금 뱀 장식이었다. 말리는 저것이 마치 왕 같다고 생각했다. 호시탐탐 자신을 해치고 삼키려 드는, 교활하고 잔인한 뱀.
“정말, 정말 모릅니다, 폐하…….”
말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반쯤은 연기였고 반쯤은 정말로 무서워서 떨어지는 눈물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자신은 어디까지 변명해야 할까. 레일라가 남자인 것을 몰랐다? 최근에야 알게 됐다? 머릿속에서 변명거리가 난잡하게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말리는 정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득해지기만 했다.
죽,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하지.
그 남자가 이미 죽었으면 어떻게 하지?
그 생각에 사로잡힌 순간 말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손을 모으고 이마를 댔다.
“폐하, 제발 살려 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무정한 왕은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발끝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밀었다. 머리를 들라는 소리였다. 말리의 젖은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가장 무섭다더니.”
“…….”
“아무것도 몰랐으니 그리했겠지. 안 그러냐?”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왕은 탄식하듯 비웃었다.
“미친년이 씨물에 환장한 줄로만 알고 있었더니 뒤에서 여색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말리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왕이 말을 이었다.
“네가 데려온 시녀를 시켜 밤마다 네 가랑이를 빨게 한다지. 손가락으로 쑤셔 달라고 애원하고 각좆을 가져오라 한다는 이야기가 내게 들렸다. 직접 본 사람도 있다.”
“……아…….”
“아넷사라는 네 시녀를 불러 물었다. 언제부턴가 목욕은 꼭 친정 시녀만 데리고 한다더구나.”
입이 빠끔빠끔 벌어졌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 말은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맞았다.
왕이 신발 끝으로 말리의 머리를 가볍게 찼다. “아!” 말리가 옆으로 쓰러져 구르자 왕이 일어나 그녀의 옆에 쭈그렸다. 그러고는 네글리제와 함께 가슴을 움켜잡았다가 쭉 찢었다. 북, 소리가 났다.
“음탕한 년들이…….”
말리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고 왕을 관찰했다. 왕은 다리를 잔뜩 벌리고 개구리처럼 앉아 있었는데, 그 사타구니가 이미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왕의 입가는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조금 벌어져 있었다.
“짐의 눈 아래에서 붙어먹어.”
찢어진 네글리제 위로 드러난 가슴을 왕이 찰싹 때렸다. “아!” 말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신음했다. 그러면서도 눈치를 봤다. 그녀는 자신이 죽음의 위협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레일라가 남자인 것은, 왕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다. 그녀는 감히 왕의 여인이면서 왕 몰래 시녀와 붙어먹은 계집이었다. 왕이 저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긴 했지만 벨담 왕은 예측이 힘든 사람이었다.
그녀의 가슴을 마구 주무르던 왕은 이내 말리를 대리석 위에 완전히 눕혔다.
“다리 벌려.”
말리는 훌쩍훌쩍 울며 누워 꼴사납게 다리를 벌렸다. 왕은 일어나 팔짱을 끼고 그녀의 주변을 서성였다. 화려하고 잔뜩 치장한 옷을 입고 있는 왕이 가면까지 쓰고 벌거벗은 저를 뚫어져라 관찰하는 것에 새삼스럽게 수치심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말리는 눈을 돌렸고, 왕이 곧장 그녀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아흑!”
“눈을 어디다 두는 거냐.”
왕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왕의 침실에는 이제 당연한 듯이 말채찍과 회초리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는데, 그는 양가죽으로 된 짧은 말채찍을 들고 왔다. 말리가 바르르 떠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왕은 몸을 숙여 말채찍 손잡이 끝으로 그녀의 가슴을 헤집듯이 관찰했다. 다리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생식기 안쪽을 뒤집고, 대음순과 소음순을 벌렸다.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들여다보던 왕이 피식 웃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발악을 했구나.”
“아, 폐하. 제발요.”
눈물이 또다시 흘렀다.
“폐하께서 저를 사랑하시지 않는 듯하여 짧은 즐거움을 찾았을 뿐이에요. 하지만 단 한 번뿐이었습니다. 계속 후회했어요. 저는 폐하의…….”
말리의 입술이 달싹였다. 비참했다. 이 순간에도 레일라를 걱정하기보다 어떻게 말해야 자신이 살아남을까 머릿속에서 재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그녀는 누운 채로 울며 빌었다.
“폐하의 것이에요. 폐하의 양물을 원했어요. 각좆 같은 것은 넣어 보지도 않았답니다. 디온에서 폐하의 여인이 되리라 들었을 때부터 제가 원해 왔던 것은 폐하의 아이를 낳아, 악!”
왕이 듣기 싫다는 듯이 그녀를 다시 걷어찼다. 그의 입매가 일그러져 있었다.
“발칙한 것.”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말리는 엉엉 울었다. 왕은 그녀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았다. 몹시 흥분한 듯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애를 낳고 싶다는 계집이 어찌 여색을 해.”
“흐윽, 흑.”
“하기야, 남색을 하였다 애라도 배면 그것이 더 웃기는 일이었겠지. 내 너에게 씨물을 부어 준 적 없으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왕이 말채찍을 내던지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제 하의를 내리다가, 신경질을 냈다. 말리는 허겁지겁 일어나 왕의 하의를 벗겼다. 매듭을 풀자 잔뜩 서서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양물이 튀어나왔다. 말리가 그것을 빨려 하자 왕은 손등으로 그녀의 얼굴을 밀어 냈다. 그리고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예.”
기다렸다는 듯 밖에 있던 시녀 하나가 대답했다.
“디온 공주의 친정 시녀를 데려와라.”
말리가 얼어붙었다. 바깥에서 예, 하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이 멀어졌다. 왕은 피식 웃었다.
“네 앞에서 내가 그 계집에게 씨물을 부어 주마. 그 후에는 내 개에게 던져 줄 것이다. 내 사냥개들과 접붙여 보고 어디, 여색이 나은지 짐승이 좋은지 물어보자꾸나.”
“폐하!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말리가 애원했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뒤통수가 차가워졌다.
“저를 버리지 마세요! 제발요! 뭐든 다 할게요! 폐하! 싫어요!”
그 와중에도 그녀는 애처롭게도 거짓말했다. 버리지 말라니, 그렇게나 애틋한 말이 이 왕에게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그녀는 왕의 무릎을 붙잡고 매달렸다. 왕이 그녀를 걷어차려 했으나 하의를 채 벗지 못해 버거웠다. 말리는 울부짖으며 왕의 양물을 잡아 물었다. 왕이 그녀를 밀어 내려 했으나 말리는 그 손끝에 제대로 힘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입 안에 넣고 쭉쭉 빨고, 핥아 올렸다. 레일라를 끌고 와, 그가 레일라를 벗기면, 그러면…….
말리는 엉엉 울었으나 입 안에 버겁도록 양물이 가득 차 있어 소리도 잘 나지 않았다. 왕은 그녀의 목구멍 끝까지 제 것을 처박았다. 구역질이 났으나 말리는 차라리 그대로 질식해서 죽는 게 나으리라 생각하며 숨을 참았다. 왕의 정액이 제 목구멍으로 넘어갔고, 왕은 곧장 제 것을 빼 말리의 얼굴에 남은 씨물을 마저 뱉어 냈다.
“폐하, 디온 공주의 친정 시녀를 데려왔사온데…….”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말리는 그걸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왕이 즐겨 쓰는 것들 중에 가장 커다란 채찍을 들고 그의 앞에 내밀었다. 군마에게나 쓰는 물건이었다. 왕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말리는 엉엉 울며 웃었다.
“폐하, 저에게만 해 주세요. 제발요. 폐하를 다른 계집애와 나누다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반쯤은 진심이었다. 왕은 그녀의 손에서 채찍을 받아 쥐고 웃었다. 생각은 해 봤지만 알렉시스가 하도 겁을 먹고 울어 손댈 생각도 해 보지 않은 물건이었다. 왕이 채찍을 휘둘렀다. 철썩 소리와 함께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윽,” 간신히 고통을 참는 소리에 왕은 이마를 찡그렸다.
“소리는 크게 내라지 않았느냐.”
“예, 그럴게요. 그럴게요. 아!”
새 도구를 써 보는 데만 골몰해 왕은 문밖에 공주의 친정 시녀가 물러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한 채, 그대로 서서 제 색사가 끝날 때까지 공주의 비명을 듣고 있다는 건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