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6)

10. 모든 사랑의 시

따뜻한 물수건이 몇 차례나 제 몸을 더듬고 나서야 말리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눈을 가늘게 뜨니 레일라는 어느새 멀끔하게 다시 몸을 단장한 채로 천에 뜨거운 물을 적셔 그녀의 몸을 닦아 주고 있었다. 정액이 하얗게 말라붙은 배를 조심스럽게 닦아 내던 레일라가 말리와 눈이 마주쳤다. 말리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돌아온 것은 사내의 발개진 뺨이었다.

“배 맞은 사내를 이렇게 부려 본 것은 처음이에요.”

“……하지만 제가 당신 몸을 닦아 드린 것은 처음은 아니니까.”

“그야 배 맞은 사내를 시종도 아니고 시녀로 부리는 여자가 흔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말리는 옆으로 몸을 구부려 자신의 팔을 베고 레일라를 올려다봤다. 레일라가 민망한 듯 코를 훔쳤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요.”

“예.”

“왜 저에게 공대하세요?”

레일라가 멈칫하다가 그녀의 배를 마저 닦았다. 천 끝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꼼꼼히 배꼽 안도 닦아 주니 간지러워 말리는 몸을 약간 비틀며 웃었다.

“사내들이 좆 한 번 쑤셔 넣고 나면 반말하는 일이 그리도 흔한데, 제가 이제는 편하지 않으세요?”

그 말을 듣고 레일라는 얼굴을 굳혔다.

“당신이 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흐음.”

말리는 길게 누우면서도 계속해 레일라를 쳐다보다가 빙긋 미소 지었다.

“좋아요. 저를 계속 불편해해 주세요.”

“……뭐요?”

“불편하다면서요. 불편하게 여겨 주세요.”

“…….”

이상하게 여길 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를 편하게 여기는 것을 좋아한다 생각할 텐데 말이다. 하지만 말리는 아니었다.

“제가 불편하면 불편할수록 저를 귀하게 대해 주시지 않겠어요?”

“…….”

“사람들은 편할수록 남을 무심코 낮추니 말이에요. 저에게 앞으로도 쭉 공대해 주세요. 편하게 여기지 마시고.”

하, 하고 레일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말리는 진심이었다. 지저분한 시궁창을 뒹굴던 떠돌이 계집애는 사람들에게 있어 편한 걸 넘어서서 만만한 상대였다.

그녀는 전혀 모르는 남도 제 치마를 들추고 뺨을 치고 저를 마구 부릴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리하여 말리는 상대가 제 사타구니에 좆을 수십 번 쑤셔 넣었다 해도 제게 공대해 준다면 참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요.”

말리는 모로 누운 채 레일라가 제 몸을 닦아 주는 것을 다 기다렸다 일어섰다. 그리고 상반신을 세워 자신의 몸을 들여다봤다. 왕의 침대에 다시 그녀가 누울 것을 의식한 듯, 레일라는 그녀의 몸에 그 흔한 손자국 하나 내지 않았다. 뭐 손자국 정도 하나 추가했대도, 왕은 그녀에게 관심도 없어 사실 눈에 띄는 곳만 아니면 크게 뭐가 달라졌는지도 모를 것이다.

레일라는 그녀의 머리 위로 쟈가드로 된 드레스를 새로 꺼내어 입혔다. 소매가 길고 네크라인은 턱까지 올라오는 데다가, 등은 잔뜩 조이게 되어 있는 외국식의 드레스였다. 말리를 서게 하고 등의 끈을 조이는 레일라에게, 말리는 돌아선 채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무엇을요.”

“오늘 저녁에 갈래요, 내일 새벽에 갈래요?”

레일라는 어디를요, 라고 묻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등에 달린 끈을 끝까지 잘 조여 묶은 후, 말리를 다시 돌려세우고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아무 곳에도 안 갑니다.”

“……오늘내일 안에 가는 게 나을 텐데.”

말리는 입가를 가리고 웃으려다가 손끝으로 입의 상처를 건드려 한쪽 눈을 찡그렸다. 상처가 아릿했다. 하지만 레일라가 제 얼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기에 여기서 상처나 치료해 달라 하기도 애매했다.

“오늘 오전부터 그 개지랄을 벌였잖아요. 핑계가 좋다고요. 사나운 공주가 결국 제 방을 다 부수고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까지 손찌검하는 바람에 귀한 집안의 시녀애도 결국 질려서 도망쳐 버렸다더라.”

“……당신.”

“아니면, 혹시 우리 소리가 들렸을 수도 있으니까……. 왕의 좆을 사타구니에 끼우지 못해 안달이 난 공주가 제 보지를 쑤셔 달라고 졸라 시녀애가 기함해 도망갔다는 게 나을까요?”

말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하하 웃었다.

“그러면 그 빌어 처먹을 왕이 궁금해서 나를 다시 부를지도 모르죠. 그 사람은 이상한 거 좋아하더라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왜요.”

말리는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뜨며 레일라를 쳐다봤다.

“떠날 때로는 아주 괜찮잖아요.”

“…….”

“이따 오후에 파라디를 타고 나갔다가 말이 도망쳐 버렸다고 하고 걸어서 돌아올게요. 그리고 나는 성질을 부리고, 아넷사나 나디아와 앤을 달달 볶을게요. 모두 지쳐서 잠들면 당신은 성 밖으로 나가서 파라디와 만나요. 그리고 멀리 떠나세요.”

“당신!”

결국 레일라가 큰 소리를 냈다. 말리는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여기서 계속 그러고 살 거예요?”

“…….”

“당신 들키는 건 시간문제예요. 벨담 여자들이야 덩치가 크고 목소리도 커서 지금 당장 그렇게 웅크리고 걸으면 모르겠지만……. 이제 곧 봄인 건 아세요?”

레일라의 눈이 흔들렸다. 말리는 비죽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달을 따 온 처녀 트리스탄에 이 남자를 비유했던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가 정말 트리스탄이었다면, 심장이 얼어붙어 저 같은 것은 내팽개치고 단숨에 달아나 버리는 그런 위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레일라의 몸은 벗겨 놓으면 누가 봐도 남자였다. 지금은 말리의 옆방을 혼자서 쓰고, 욕실도 말리의 것을 빌려 쓰니 가능했다. 하지만 어깨를 조금만 펴면, 그리고 자세를 바로 한다면 금방 알 수 있다. 저건 절대로 여자의 그것이 아니다. 지금은 날이 추워 모두 어깨를 움츠리고, 두껍게 망토를 두르고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니 고개를 푹 숙이기만 해도 여자로 봐 주는 것이다.

하지만 벨담의 여름에도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닐 수는 없다. 들키기 전에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지금은 타이밍도 핑계도 좋았다. 말리는 벨담 왕에게 시달린 지 두어 달이 됐고, 히스테릭해져 있는 상태라는 걸 온갖 시녀들에게 다 보여 주었다. 왕의 요상한 성벽도 성 내에서 쉬쉬하기는 하지만 모두 알고 있는 상태이니, 공주에게 분풀이당하던 시녀가 도망쳤다는 것도 충분히 그럴 법했다.

“제가 당신을 찾지 않는 것이 조금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야 내가 당신 머리채를 좀 잘라 볼까요? 당신 같은 흉한 시녀를 제 옆에 두고 싶지 않다고 하며 찾지도 말라 하는 거죠.”

“……제가 흉합니까?”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머리가 짧은 처녀애를 누가 보기 좋아하겠어요.”

레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안 갑니다.”

“…….”

“제게 염치가 넘쳐흐른다 한 건 당신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려고요?”

말리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캐물었다.

“그러다 둘 다 죽으려고요?”

여름까지 그렇게 살까. 까딱까딱 들킬 날만, 죽을 날만 기다리며 목을 늘어트리고 그동안은 붙어먹고 그게 행복이라 믿으며 벨담 왕의 그늘에서 살까? 그러느니 너나 나나 각자 제 갈 길 가는 게 행복이고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말리의 눈을 레일라가 가만히 들여다봤다.

한참 후, 레일라는 나직하게 한숨 쉬듯 말했다.

“방법을 찾겠습니다.”

“…….”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레일라는 고개를 숙여 말리의 헝클어진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태도가 너무나도 조심스러워 말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이 든 나무 동이를 들고 돌아서 욕실로 나가는 레일라를 바라봤다.

* * *

레일라는 그날 오후 제 얼굴에 시퍼런 멍을 달고 말리의 침실 문을 열었다. 침실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온 아넷사가 레일라의 얼굴을 보고 기함한 후, 말리를 힐끔 쳐다봤다. 말리가 레일라의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궁금해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레일라가 스스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고 말할 수야 없는 일이다. 말리는 쟈가드 드레스로 몸을 감싼 채 술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날 저녁 내내 말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예감은 희한하게도 들어맞았다. 왕은 말리를 그렇게 때린 후 본색을 드러냈다는 듯이, 매일같이 말리를 더 거칠게 때렸다. 그전에는 기껏해야 생채기나 내며 즐거워하더니 말리를 침대에 눕혀 목을 조르고, 그녀가 숨을 못 쉬어 눈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보아야 겨우 풀어 주었다. 말리의 목에는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리하여 말리는 베일을 머리부터 목덜미까지 두르고 있는 일이 늘었다.

왕은 말리에게 상처를 내는 것을 점점 기꺼워하는 것 같았다. 레일라가 상처에 약초를 찧어 바르는 시간이 늘었다. 말리는 왕에게 얻어맞고 온 다음이면 레일라를 제외한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시녀들은 처음에는 꺼림칙해했지만 그다음 날이면 레일라가 얼굴에 푸른 멍을 달고 있는 것을 보고 어느새 레일라에게 모든 것을 미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푸른 멍은 푸른 약초를 문질러 물든 것이라는 건 두 사람만 알았다. 말리는 약초를 손질해 내다 팔던 자신의 어머니가 가르쳐 준 것들을 드문드문 기억하고 있었다. 레일라는 더 이상 제 얼굴을 후려치지 않아도 되었다. 상처를 치료한 다음에는 잠이 들기를 기다리며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나눴다.

레일라는 디온의 둘째 왕자로 태어났다. 레일라의 어머니는 왕에게 지극히 사랑받았고, 왕비의 질투를 두려워해 레일라를 여자아이로 키웠다. 남자아이라는 사실을 알린 채 키워졌다면 틀림없이 왕비에게 죽임당했을 거라고 레일라는 말했다.

“하지만 참는 게 힘들지 않았나요?”

말리는 레일라의 팔 안에 누워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천진한 듯 물었다. 레일라가 여상히 대답했다.

“여자아이로 길러진 게 당연해서, 머리카락이 긴 걸 거추장스러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식사를 새 모이만큼 먹는 게 익숙해서, 딱히 더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하지만 몸이 자라는 건…….”

“오래된 시녀가 감추는 법을 가르쳐 주었죠.”

레일라의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왕비의 손에 그 목을 늘어뜨린 것이다.

“벨담에 와서 몸이 커진 건요?”

말리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레일라는 쓰게 웃었다.

“부끄럽지만 험한 일을 하니 허기가 지더군요.”

“……아.”

말리가 호되게 그를 부린 것이 허기를 불러왔던 모양이었다. 벨담은 부유한 왕국이었으니 공주의 시녀가 식사하는 것을 아까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몸에 살이 붙고 못다 자란 키가 커지는 것은 좀 곤란했다. 레일라는 소매를 덧댄 자국을 보여 주었다.

“옷을 살 여유도 없고, 절 감춰 주는 옷도 많지 않았으니까 덧대는 데도 애를 먹었어요.”

“이런, 돈이라면…….”

말리는 일어나 제 서랍을 열려 했다. 벨담 왕이 그녀에게 쓰라며 집어 준 금화가 그럭저럭 두어 닢 있었다. 하지만 레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돈이에요.”

“…….”

레일라는 말리를 흐린 눈으로 보며, 자신이 언제부터 사랑에 빠졌는지를 가늠해 보려 애썼다. 그가 그녀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그도 몰랐다. 회랑 앞 우물가에서 머리를 매만지던 그때부터였을까? 삼각뿔 모자를 벗고, 우물 안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아이를 ‘예쁘다’고 생각한 때부터였을까. 그때는 분명, 저런 애가 차라리 공주에 더 어울리겠다고만 생각했을 터였다.

산적에게 쫓기고 처음으로 바꿔치기를 제안했을 때, 말리가 제 뺨을 후리면 하겠다는 대답을 하자 레일라는 어리둥절했더랬다. 왕성에서의 적의에는 익숙했으나, 이깟 시녀 계집애가 저를 미워할 일이 있겠나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일라의 따귀를 올려붙이는 그 손길에는 명백한 악의가 있었고, 레일라는 말리가 처음엔 정말 싫었다고 고백해 왔다. 말리가 키들키들 몸을 흔들며 웃었다.

“오자마자 시녀들의 뺨을 때리는 걸 보고는 미친 계집애라고 생각했겠어요.”

“……악의가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죠.”

목걸이를 가지고 장난을 칠 때에는, 영악해 빠진 계집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담의 시녀들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레일라는 적어도 저 시녀애를 자신과 바꿔치기로 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제법 그럴싸한 선택이었다고 자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리가 처음으로 왕의 침대를 데운 새벽, 레일라는 그게 과연 괜찮은 선택이었는지 의심하게 됐다. 휘청이는 마른 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매섭게 흘겨보는 가느다란 눈. 시녀들에게 부축받아 가는 말리를 보고 레일라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차라리 죽음으로 끝내는 게 나은 선택이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레일라는 제 인생에 말리까지 휘말려 들게 한 뒤였다. 그전이라면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일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죽은 뒤의 디온을 걱정하는 척했으나, 기실 레일라는 그 어떤 것도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죽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이후 레일라는 자신이 죽은 뒤 그 미치고 영악해 빠진 계집애의 결말이 어떠할지를 계속 생각하게 됐다. 레일라의 속이 어떻든 시녀 계집애는 공주, 아니, 왕자에게 계속해서 허드렛일을 시켰다. 하지만 레일라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말리가 왕의 침실에 들어간 날이면 속이 홧홧하게 불타 찬물에 손을 담그고도 하나도 시린 줄 몰랐다.

말리가 제 목욕 시중까지 들게 했을 때도, 레일라는 수치스럽기는커녕 부끄럽고 민망해 미치는 줄로만 알았다. 남자의 방에 매일 침수를 들러 가는 여자애는 어찌나 무서운 것이 없는지, 레일라에게 제 젖가슴을 문질러 달라 했다. 생전 처음 만져 보는 말랑거리고 부드러운 감촉에 레일라는 그만 아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는 레일라의 속은 전혀 모르는 듯이 굴면서도 레일라의 손을 씻어 주었다.

“아. 그거…….”

말리가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다 신음했다. 갈라진 손을 보기 싫어 기름소금으로 박박 문질러 준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야 갈라진 손 위에 소금이 끼얹어지면 퍽 따가울 것이라고 고소히 생각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으나, 레일라에게는 좀 다르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제 가슴 아래쪽을 보세요. 아주 기뻐지실 거예요.” 말리가 그렇게 말했을 때 레일라는 무슨 소리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알게 됐다. 말리의 가슴은 새빨간 손자국으로 지저분하게 상처가 나 있었다. 벨담 왕이 그녀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단박에 알 만한 부분이었다.

네가 나와 바꿔치기를 제안했으니 얼마나 기쁘겠니. 너는 이런 상처 안 입어도 돼서. 그렇게 노래하듯 말하는 말리를 보며 레일라는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기쁘다. 하지만 그 기쁨은 상처를 입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진 것에 대한 비루하고도 거대한 기쁨이었다.

하지만 내 목숨을 위해 이 계집애가 매일 밤 다칠 이유는 뭐란 말인가. 생각해 보면 그렇게 대단한 목숨도 아니었다. 디온에서는 천덕꾸러기였고, 벨담에 와서는 매일 희롱이나 당하는 처지였다. 간단하다고 생각했던 시녀 일도 보통은 아니었다. 다른 시녀들에게 일이 느리다고 텃세나 당하고, 기사들은 레일라를 우습게 봤다. 이렇게 앞으로도 쭉 살아가게 되는 걸까?

길바닥으로 도망치겠다고 장담했으나 길바닥에 나선 인생이라고 그렇게 대단하고 아름다우리란 장담을 할 수도 없었다. 벨담 성에서의 인생은 참담했으나, 누가 봐도 벨담 성은 따스한 온실이나 다름없었다. 벨담 왕은 제 성의 인력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인사였으니 적어도 배곯거나 춥게 자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망쳤을 때, 레일라는 그보다 더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단순히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다 해서 좋은 삶은 아니다. 더욱이 레일라는 말리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흐음……. 당신 착하군요…….”

“인간으로서의 최저선은 넘지 않는다고 해 두지요.”

말리는 신기하게 레일라를 올려다봤다. 착하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 것 같지만, 말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였다. 그리고 레일라는 우아하고 아름답게도 답했다. 정말이지 귀하신 왕자님이었다.

아무튼, 레일라가 말리를 두고 떠난다 한들 뒤통수가 아려 올 게 뻔했다. 레일라가 갈등하거나 말거나 말리는 제 생활을 참 잘도 영위했다. 그녀가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레일라는 무심코 감탄할 뻔했다. 책 읽는 것이야 레일라에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으나 말리에게는 버거운 일일 것이 뻔했다. 하지만 말리는 그렇게 괴롭힘당하고도 홀로 앉아 책을 읽었다.

“……그야 책은 비싸니까…….”

“단지 책이 비싸고 귀하기 때문에 누리고자 한다면, 당신이 이 벨담 성에서 누릴 만한 것은 수십 가지도 더 되지요.”

말리는 어쩐지 창피해졌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레일라는 말리의 콧등에 자잘하게 입 맞췄다.

“당신이 따뜻한 빛 아래서 책을 보는 광경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이 약간은 편안해졌습니다.”

“왜요?”

“당신이 약간 웃고 있었거든요.”

레일라는 말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속삭였다. 그날 기사가 제 엉덩이를 주물렀고, 더없이 치욕스러운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자 마음이 풀어졌다고.

책을 들여다보며 이따금 작게 소리 내어 글을 읽는 말리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서재의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에 비추어 책을 보느라, 창문에서 아주 가까운 자리에 자리 잡은 그녀의 정수리에 햇빛이 일직선으로 떨어졌다. 먼지가 공기 속에 부유하는 것이 다 보였고, 레일라는 그날 처음으로 벨담 성에서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말리가 불러다 무릎 앞에 앉히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묶을 때는 속절없이 가슴이 설렜다. 이상했다. 어릴 적 제 어머니가 머리카락을 땋아 주는 것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귀 옆, 관자놀이와 이어진 부분의 잔털까지 꼼꼼히 더듬어 빗는 말리의 손가락 끝에 이상하게도 간질간질하게 가슴 끝이 저려 왔다.

누군가 그게 사랑이라고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레일라는 제 방에 앉아서 언젠가 말리가 깨물어 버렸던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상처를 들여다봤다. 이상하게도 그 흉하디흉한 상처 자국만 봐도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랑의 시를 떠올릴 수 있었다.

레일라는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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