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분노
왕의 침대에서 일어나는 데에도 말리는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설렁줄을 두 번이나 당겼는데 들어온 건 레일라 하나뿐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벌써 새벽이 지나 부옇게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시녀들도 새벽 내내 기다리다 지쳐 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말리의 방 앞에서 기다리던 초반 이후로 매번 왕의 침실 바로 앞에 앉아 보초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레일라나 겨우 설렁줄 소리에 깼겠지.
레일라는 침대 끝에 멀거니 걸터앉은 말리를 보고 흠칫했다. 머리카락이 온통 흐트러진 채 널브러지듯 앉아 있던 말리가 그런 레일라를 보고 픽 웃었다. 생각해 보니 레일라는 왕의 침실에 그녀를 부축하러 들어온 적은 있었지만 항상 그녀를 다른 시녀들의 손에 맡겼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리라.
말리는 손을 들어 왕의 침실 한 켠에 장식되어 있는 천을 가리켰다. 레일라가 허둥지둥하다 그 천을 들어 올려 폈다. 말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고는 천을 받아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를 신경질적으로 닦았다. 닦여 나가는 것도 마땅히 없어 다리 안쪽은 천에 거칠게 쓸려 나갔는데도 말리는 한참 동안 그 짓을 했다.
지쳐 천을 내팽개치고 나니 레일라가 망토를 들고 있었다. 말리는 그 망토를 둘러 걸치고 레일라를 바라봤다. 보통은 다리에 힘이 없어 시녀 둘이 그녀를 양쪽에서 부축하듯 걷게 하지만, 저 공주님에게 절 맡기다간 둘 다 바닥에 나동그라지기나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말리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신고 온 신발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걸 찾다가 왕을 깨울 수도 없어 맨발로 나왔다. 소름이 절로 돋았다. 나오자마자 보초가 문을 닫았다. 레일라가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며 그 뒤를 따랐다.
왕의 침실에서 말리의 방까지 가려면 회랑 하나와 커다란 복도를 지나야 했다. 그리고 한참을 걷다 보면 말리의 방이 있는 건물로 이어지는 정원과 두 번째의 회랑이 나온다. 그 정원 한가운데에는 한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나오는 분수가 있었다. 벨담 왕이 외국 사신이나 영주들만 오면 자랑하는 분수였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회랑에 들어서자마자 분수 소리가 들렸다. 이런 아침에도 분수를 틀어 놓는 모양이었다. 그 물 소리를 들으며 말리는 갈등했다. 저 분수에 뛰어 들어가고 싶었다. 그만큼 춥고 발이 시려웠다. 그때였다. 내내 그녀의 뒤를 따르던 레일라가 발걸음을 빨리하더니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몸을 낮췄다. 말리는 저도 모르게 멈췄고, 제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레일라는 천천히 제 신발을 벗더니 말리의 앞에 내려놨다. 뭐 하느냐는 눈으로 말리가 쳐다보자, 레일라는 한숨 쉬듯 말했다.
“이거라도 신고 가십시오.”
레일라가 신고 있는 것은 시녀들에게 지급되는 가죽신이었다. 이제 겨우 성에 익숙해진 것을 보여 주는 듯 조금 닳은 앞코는 말리의 맨발가락 앞에 맞닿아 있었다. 말리는 그 가죽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죽신을 발로 걷어차 버리고 싶은 충동과, 찬 발가락을 저 비루한 신 안에라도 빨리 감추고 싶은 충동이 복잡하게 싸웠다.
답을 내린 건 말리가 아니라 레일라였다. 레일라는 망설이는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맨발을 쥐었다. 밤새도록 왕의 침실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었던 것치고는 놀랍도록 따뜻한 온기였고, 말리는 저도 모르게 그 온기에 굴복하고 말았다. 레일라가 제 발을 들어 옮기는 데 순순히 따른 것이다. 자그마한 발은 말리의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큼 넓은 공간을 남기고 레일라의 신 안에 들어갔다.
키만 큰 게 아니라 발도 크네. 두 발이 다 들어간 그 커다란 신을 보며 말리는 눈을 두어 번 껌벅였다. 제게 신을 신긴 레일라가 일어나자, 그녀의 시야에는 레일라의 하얀 발만 남았다. 발목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있었다. 말리는 저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과 산을 넘어올 때 난 상처였다.
우스운 일이었다. 공주는 아직도 공주였고, 시녀는 아직도 시녀였다. 제게 신을 벗어 주는 레일라를 보니 확실했다. 산을 맨발로 걸어도 시녀에게 가죽신 벗어 바치란 소리 한 마디를 하지 않던 공주는, 회랑을 맨발로 걷는 시녀에게 자신이 신었던 가죽신을 벗어 신기려 들었다. 갑작스레 박탈감이 들었다. 아무리 턱을 고상하게 치켜들어도, 공주처럼 웃어도 영원히 공주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말리는 그 순간 절감했다.
레일라는 말리가 제 발을 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런 신체 접촉에 놀란 말리가 화들짝 손을 빼내자, 레일라가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신이 커서 그냥 걷긴 힘드실 터이니 절 붙들고 끌면서 걷는 게 나을 겁니다.”
“…….”
듣고 보니 반박할 말이 딱히 없었다. 그러나 말리는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은 채 레일라만 쳐다봤고, 레일라는 결국 한숨 쉬듯 말했다.
“손이 싫으시면 제 어깨를 붙들고 누르시듯…….”
“그 키로요?”
대번에 뾰족한 말이 제 입에서 뛰쳐나갔다. 레일라가 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레일라 공주의 어깨를 자신이 누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말리는 이를 물고 입술을 조금 내민 채 레일라를 쳐다보다가, 혀를 차며 그의 왼 팔꿈치 위를 붙잡았다.
“이대로 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반말에 레일라가 문득 뭔가를 알아차리고 정원 저편을 바라봤다. 회랑의 기둥 사이로, 아침 일찍 일어난 정원사가 하품하며 걸어오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남들 앞에서는 어찌 되었든, 언제나 말리는 레일라에게 하대했으며 예외는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오늘따라 그것이 이리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말리는 그 정원사를 바라보는 레일라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마 아주 찰나일 것이다. 하얀 아침의 햇빛이 투명하게 레일라의 속눈썹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햇빛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밤을 새 지친 얼굴의 솜털까지도 아주 선명하게 비췄다. 속눈썹 아래로 자리한 물빛 눈동자는 정원사가 아니라 아득한 어딘가를 비추고 있었다. 파리한 입술이 달싹이는 듯하다가,
갑자기 그 빛이 모두 사라졌다.
말리는 파드득 놀랐다. 별것도 아니었다. 그저 레일라가 정원 쪽에서 그녀를 향해 얼굴을 돌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어찌나 집중했는지, 그 얼굴을 가득 비추던 그 모든 빛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자리한 것 같았다. 놀라 얼결에 레일라의 팔을 잡았던 손이 떨어졌는데, 레일라가 더 놀라 그녀의 손을 엉겁결에 움켜잡았다.
“아.”
말리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레일라를 올려다봤다. 놀란 듯 두어 번 깜박이던 푸른 눈이, 아주 약간 휘어졌다.
제 살을 깨물던 왕 앞에서도 태연했으나 이상하게도,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 * *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레일라는 다른 시종들을 불러 뜨거운 물을 가져오게 했다. 신 하나 신었다고 해서 발이 따뜻해지는 법 없었으니. 욕조에 뜨거운 물이 채워지는 걸 보며 말리는 멀거니 서 있었다. 팔을 걷어 올리던 레일라가 의아한 듯 말리를 쳐다봤다. 말리는 별말 없이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얼어붙었던 발끝이 뜨거운 물에 닿으니 그야말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보통 때였다면 물 안에서 연신 손을 문질렀을 것이나, 말리의 시선은 레일라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소매를 걷은 레일라가 향유를 가져올 때에서야 말리는 입을 뗐다.
“퍽 익숙해지셨네요.”
“……계속 서투르면 저도 당신도 힘들 테니.”
향유의 뚜껑을 열던 레일라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다만 그녀는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말리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얼굴을 돌렸다. 여전히 남의 몸이 보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둘 다 힘들다고 말한 사람치고는 여전히 결벽하게도 굴었다.
말리는 결국 레일라가 해면을 쥐고 기름소금을 문지르는 것을 빼앗았다. 레일라가 당황했으나 말리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마따나, 피곤해요. 공주님이 절 씻기면 하루 종일 걸린다고요. 알아서 씻고 나갈 테니 제 침대나 정돈하세요.”
그렇게 말해 놓고도 말리는 레일라가 나간 자리에서 한참이나 해면을 들여다봤다. 이상했다. 그녀가 일에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제 젖가슴을 닦아 달라며 심술궂게 굴 때가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신발 얻어 신은 것도 호의랍시고 제 마음이 무뎌진 모양이었다.
머리까지 물에 적시진 않았다. 머리까지 말리고 자려면 얼마나 걸릴지 감도 오지 않았다. 말리는 정말로 피곤했으며 빨리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래야 이 싱숭생숭함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몸을 닦고 나오니 레일라가 가져다 놓은 제 실내복이 보였다. 말리는 일부러 거친 손으로 그 옷을 털어 내 가며 입었다. 죄 없는 옷에서 먼지만 조금 날렸다.
아침도 물리고 말리가 침대에 겨우 누웠을 때는 이미 해가 한참이나 떴을 때였다. 두터운 이불을 덮고 눕자 창문 밖에서 저 멀리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구보를 하는 기사들의 소리인 듯했다. 잠을 자고 싶은데 뒤통수에 날이 선 듯, 머리가 베개에 쉬이 묻히질 못했다.
겨우 잠이 들려는 때 탁, 하는 큰 소리 때문에 다시 깼다. 불똥 튀는 소리였다. 벽난로를 누군가가 뒤적여 줘야 할 텐데 아넷사도 앤도 그녀가 쉰다는 이야기에 오후까지 들지 않겠다 했다. 말리가 막 몸을 뒤척이던 때였다. 소리 없이 누군가가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흘끔 고개만 돌려 뒤쪽을 바라보니 레일라였다. 누웠을 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레일라는 벽난로 앞에 앉아 부지깽이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불을 뒤적였다. 숯을 뒤적이는 소리와 함께 불씨가 작게 흩날렸다.
숨죽인 채 장작 두어 개를 집어넣고 난 레일라가 다시 일어났다. 부지깽이는 언제 내려놨는지 소리도 못 들었다. 말리가 곁눈으로 보는 줄도 모르고, 레일라는 구석에서 두터운 담요 하나를 다시 펴고 그 위에 누웠다.
긴 금발 머리가 바닥에 흩트러졌다. 레일라는 방금 전 불을 돌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거칠디거친 손짓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넘기고는 몸을 웅크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펴고 누운 담요의 끝을 집어 어깨에 올렸다. 담요 한 장으로 몸을 돌돌 만 모양새였다. 말리는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제 방에 가서 자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야.
레일라의 성격은 결벽하다 못해 강박적이었다. 그녀가 디온의 공주였던 시절에도 남에게 몸을 보이는 게 싫어 홀로 씻었을 정도이니. 레일라는 말리에게 딱 하나만 부탁했다. 친정에서 온 시녀라 핑계 대고 말리의 방에 제 방을 붙여 달라고. 시녀들은 두 명이 한 방에서 잤지만, 덕분에 레일라만은 홀로 방을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좋은 제 방을 놔두고 왜 말리의 방 한 켠에서 저러고 있을까. 그야 시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답이야 뻔하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잠을 자야 하는 주인의 방에서 불을 돌볼 사람은 그녀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레일라는 진짜 시녀도 아니지 않은가.
말리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 결벽한 성격 때문에라도 시녀 노릇을 완벽히도 해내고 싶은 걸까. 그렇다 해도 불 돌보는 노릇이야 말리에게 잘해 주고 싶어 안달 난 아넷사에게 맡기면 될 노릇이다.
‘똑같이 문 앞에서 밤을 샌 여자가 대체 저게 무슨 궁상이란 말야?’
궁상.
말리는 그 말을 입 안에서 되뇌었다. 그랬다. 궁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레일라는 제게 시위 같은 것을 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녀 노릇이나마 제대로 좀 하라 했더니 문 앞에서 밤을 새우고, 공주처럼 신발을 벗어 준다. 그리고 이젠 제 방을 놔두고 말리의 방에서 불을 본다.
그게 아넷사였다면 아넷사가 참으로 착한 여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일라가 그러니 참으로 싫었다. 어찌 보면 저를 동정하는 듯도 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사실 말리가 밤을 새어야 했던 것도, 맨발로 돌아와야 했던 것도 다 레일라 때문인데. 꼴 뵈기 싫은 것도 그래서이리라.
말리는 다 들리도록 탁, 한숨을 내쉬었다. 레일라의 어깨가 움찔했다.
“공주님.”
“……예.”
자는 척할 생각은 아니었던지, 레일라가 부스스 일어나,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주무시는 걸 깨우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사람의 목소리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아니면 밤을 새 지쳐서였는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가뜩이나 낮은 목소리인데, 마치 목이라도 졸린 듯한 거친 소리가 됐다. 말리는 가끔 제 목을 조르곤 하는 벨담 왕을 생각했다. 그는 제 목을 졸랐을 때 말리가 새된 소리를 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레일라 공주가 만약 왕의 침대에서 저런 소리를 냈다면, 글쎄. 그 왕은 좋아할까.
……차라리 내가 낫지.
말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반신만 조금 일으켜 세우고 침대를 두들겼다. 레일라가 이상한 표정을 했다.
“이리 와요.”
“…….”
“추워서 잠이 안 와요.”
그 이상한 표정이 당황한 표정이라는 것을, 말리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레일라의 이상한 표정이 한참은 더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레일라는 조금 뒤에, 까마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추우시다면 불을 더 때 보겠습…….”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깨고요?”
뾰족한 목소리에 레일라가 입을 닫았다. 말리는 저 여자에게, 불은 됐으니 제 방에 가서 자라고 했을 때 그녀가 뭐라고 할지 너무 잘 알았다. 아마 됐으니 가서 자라 한다면, 레일라는 끝까지 여기 있을 것이다. 말리가 불쌍해서든, 아니면 시위 때문이든. 레일라는 주로 말리가 제게 뭔가 베푸는 듯한 순간을 못 견뎌 하곤 했다.
공주의 자존심이 고작 세 달 만에 꺾이진 않을 테니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여자애를 시녀 삼았더니 이제는 공주가 되어 저를 부린다. 그게 비록 스스로가 초래한 일일지라도, 아마 말리가 자신에게 뭔가 베푸는 것이 그리 편안하지는 않으리라.
그래서 말리는 다시 침대를 두들겼다.
“저는 차가운 바닥에서 자는 게 얼마나 싫은지 알아요.”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얼마나 싫을까!
건방지고 못돼 처먹은 시녀 계집애가 고작 찬 바닥에서 시위 좀 한 것 가지고 제게 긍휼한 듯 구는 게 말이다!
그 생각이 정확했던 듯, 레일라는 바닥에 선 채로 한참 동안 말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또 한참 동안이나 할 말을 고른 후에야, 옹졸한 말을 내뱉었다.
“……내 뺨을 친 당신께서 그런 말을 하실 줄은 몰랐는데.”
아, 제기랄.
말리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석 달 전 산에서 뺨 한 대 때리게 해 달랬던 것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었다니. 역시 저 공주는 자신을 싫어하고 있었다. 여전히. 말리는 옅게 웃으면서 턱을 괴었다.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그러지 못한단 말이 있죠. 공주님이 아실까 모르겠네요.”
“……모르진 않아.”
“예. 공주님. 사람은 말이죠.”
말리는 턱을 괴지 않은 쪽의 손가락으로 침대를 두드리며 말했다.
“거친 일이나 힘든 일에 익숙해지는 것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게 있답니다. 따뜻한 잠자리에서 내몰리는 것이야말로 제일 비참한 일이에요.”
“…….”
“아무리 고단한 하루라도 다 내려놓고 쉴 곳 하나쯤은 따뜻해야 하는 법인데, 잠자리마저도 차갑다는 게 얼마나 속을 베어 내는 일인지 저는 알거든요.”
레일라가 이마를 약간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그러니 전 따뜻하게 자고 싶어요. 추워 죽겠다고요. 가뜩이나 밤새 시달렸는데.”
말리는 레일라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잘라 버렸다. 레일라의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더 이상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레일라는 쭈뼛거리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워낙 크고 넓은 침대라 두 사람이 누워도 자리는 충분했다. 말리는 이불을 들어 올려 레일라가 들어오도록 자리를 만들어 줬다. 차갑게 식은 레일라의 몸이 이불 안으로 들어오자, 말리도 순식간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불을 때도, 이불 안이 추운 일은 왕왕 일어난다.
레일라는 말리와 마주 눕자마자 눈을 감았다.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또한 금색이었다. 요정의 속눈썹은 금색이라던데, 이 공주님도 요정일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말리는 저도 모르게 킥킥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웃음소리에 레일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불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잠에 들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게 시녀와 덮는 이불 안임에야.
“……경험담인지.”
목소리가 하도 꺼질 듯 작아서, 말리는 뒤늦게야 그게 제게 던져진 질문임을 알았다. 막 잠들려는 참이었는데. 귀찮은 듯 몸을 구부리면서도 말리는 쉬이 대답했다.
“저의 엄마는 제가 열세 살 때 돌아가셨답니다.”
“…….”
“매일 얼굴에 흙을 묻히고 땅을 갈아엎어야 먹고살 수 있었지만 그래도 같이 누운 엄마가 등을 어루만져 주시면 참 따뜻했어요.”
레일라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말리는 그런 레일라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마주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불을 어깨 위로 덮어쓰며 말리는 작게 말을 끝맺었다.
“그 후로도 어딜 가나 매일 얼굴에 흙을 묻히고 죽도록 일해야 하는 건 똑같았는데, 잠자리가 차가우니 이상하게도 속이 땅으로 꺼지는 것 같더랍니다.”
“…….”
하암. 하품을 했다. 눈물이 약간 맺히기에 말리는 이불에 얼굴을 비벼 닦아 냈다. 그리고 이불 속에서 웅얼댔다.
“추운 건 싫어…….”
분명 공주의 몸은 차갑기 그지없었는데도 이불 속에 누가 하나 더 들어오니 그것도 온기랍시고, 금세 잠이 왔다. 말리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꿈을 꿨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가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아주 천천히,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