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6)

5. 때고 남은 재

날은 금세 추워졌다. 벨담 성은 아주 튼튼하고 커다랬으나 초겨울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말리는 제 코끝이 차가워진 것을 알고 잠에서 깼다. 그 추위가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검을 들고 있다는 겨울의 여신 알라이아를 떠올리게 했다.

말리는 느리게 제가 덮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차가운 방 안의 공기에 드러난 어깨가 금세 따뜻해졌다. 발끝도 온기가 도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말리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뾰족하게 말했다.

“춥습니다. 불을 더 때세요.”

방 안에 있던 인기척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이쪽을 가만히 관찰하는 것이 느껴져, 말리는 느리게 눈을 떴다. 눈앞에는 밀짚색 머리카락을 이상하게 틀어 올린 여자가 엉거주춤한 포즈로 앉아 있었다.

레일라였다.

“내가 한 말이 안 들리나 봅니다.”

“……아.”

말리의 말에 레일라가 움찔하며 일어섰다. 말리의 눈치를 보면서 방 안의 난롯가로 느리게 다가간 레일라는, 어설픈 손놀림으로 부지깽이를 집어 난롯가의 재를 쑤석대어 불씨를 드러냈다. 그러고는 옆에 쌓아 둔 장작을 집어 안에 툭 던졌다.

퍽.

당연하게도, 난롯가 안의 불씨가 재와 함께 터져 나왔다. “앗,” 레일라가 당황해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재는 풀썩 일어나 레일라를 덮쳤고, 레일라는 곧 한심한 꼴이 됐다. 쯔쯔. 침대 안에 누워 그 꼴을 다 보고 있던 말리는 결국 기가 막혀 혀를 찼다. 어설픈 것도 하루 이틀이지.

벨담에 입성한 지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 레일라의 시녀 노릇은 여전히 어설펐다.

애당초 공주로만 스무 해 넘게 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디온이 작은 왕국이라고는 하지만 레일라의 곁에 있는 시녀들은 언제나 세 명, 또는 네 명이었다. 레일라는 먹고 자고 싸는 것 외에는 모두 남의 시중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저 머리카락 트는 건 언제쯤 솜씨가 좋아지는 거야?’

치렁치렁한 머리를 이상하게 틀어 올린 것 또한 그랬다. 레일라 공주는 벨담 성에 입성하자마자 벨담의 시녀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벨담의 시녀들은 디온과 달리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꼰 후 망으로 고정하고 그 위에 베일을 썼는데, 그 머리카락을 스스로 틀어 올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레일라는 언제나 잔머리가 한가득 삐져나온 채로 다녔다. 한낱 시녀의 방에 거울이 있을 리도 없으니 당연하다.

“아…….”

말리가 상념에 잠겨 있거나 말거나, 레일라는 황망한 표정으로 재투성이가 된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더니 허겁지겁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재를 손으로 쓸어 담는다고 제대로 담길 리 없었다. 손만 지저분해질 뿐이지. 말리는 그 기가 막힌 꼴을 쳐다보다가 결국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해서 언제 치우겠어요?”

오리 깃으로 가득 채웠다는 면 이불은 과연 따뜻하고 좋았다. 말리는 벌거벗은 몸에 그 이불만 대충 뒤집어쓰고는 맨발로 걸어 레일라의 뒤에 섰다. 난롯가 앞에 쭈그려 앉은 레일라는 엉겁결에 이쪽을 돌아봤다가, 얼굴이 새빨개졌다.

“미, 미안합니다…….”

존대도, 반말도 아닌 이상한 말투였다. 말리는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가 답했다.

“그럴 때 저라면 당신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레일라는 멍청하지는 않았다. 제 입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레일라는 재투성이가 된 그대로 말리의 앞에 엎드려 머리를 바닥에 두 번 찧었다. 말리는 무표정하게 레일라의 웅크린 등을 내려다보다가, 맨발을 뻗어 레일라의 이마와 바닥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녀의 차가운 발등에 레일라의 따뜻한 이마가 닿았다. 말리는 그 감촉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 번째로 이마를 찧던 레일라는 이마에 닿는 물컹한 감촉에 흠칫하고 위를 올려다봤다. 말리는 옅게 웃었다.

“사죄할 시간에 다른 시녀를 불러 치우게 하세요.”

“……그러겠습니다.”

“내 목욕물을 준비하고요.”

“예.”

레일라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무릎 꿇고 대답했다. 말리는 그런 레일라를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새 차가워진 발을 덥히기 위해서였다.

* * *

말리는 따뜻한 물에 발을 넣었다. 적당한 온도로 덥혀진 따뜻한 물. 사자의 용맹한 모습이 새겨진 흰 돌 욕조는 말리가 들어가자 크기가 딱 맞았다. 아마 키가 큰 레일라 공주였더라면 벨담의 시녀들은 더 큰 욕조를 구해 오든가, 아니면 그녀의 무릎을 구긴 채 공주를 씻겨야 했을 것이다.

“어떠신가요.”

“괜찮아.”

“향유를 넣어 드릴까요.”

“됐어.”

벨담 왕은 그녀에게 시녀 세 명을 내렸다. 차례대로 앤과 아넷사, 나디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말리에게 살가운 것은 아넷사였는데, 지금도 그녀의 목욕물 안에 직접 손을 넣어 온도를 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남쪽에서 좋은 꽃 기름이 들어왔는데…….”

“나는 싫어.”

욕조 안에 들어앉은 말리는 새침하게 대답한 후 눈알만 굴려 아넷사를 올려다봤다. 빨갛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솜씨 좋게 틀어 올려져 망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 옆에 말없이 서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레일라의 머리는 아넷사에 비하면 처참할 정도다.

“너는 알지 모르겠지만, 그거 아니? 나는 첩 딸이란다.”

“예에…….”

“그래서 그런가, 호사스러운 것들은 나랑 그닥 인연이 없단다. 꽃 기름이라니, 생각만 해도 재채기가 나. 앤에게 말했는데 너희들끼리는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아넷사가 어색한 얼굴이 됐다. 말리는 레일라를 힐끗 다시 쳐다봤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리가 제멋대로 휘둘러 핑계로 쓰고 있는데도 그 표정은 무섭도록 변하지 않았다. 그 손놀림이 서투른 것에 비하면 표정 관리는 우스운 모양이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귀히 자라지 않았단다. 내 손만 봐도 그렇잖니.”

말리가 물속에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부르튼 손끝과 갈라진 손톱. 손톱은 벨담에 도착하기 전, 산을 헤매다가 그랬다며 시녀에게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그러고도 남은 손의 굳은살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몇몇 벨담 사람들은 디온이 생각보다 더 척박한 왕국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공주마저도 가끔은 우물물을 긷는 곳. 그것은 레일라 공주의 소생 탓이기도 하다고들 생각하게끔 만든 건, 물론 말리다.

“하지만 귀하신 분이니 귀히 모시려는 마음 이해해 주시어요.”

아넷사는 애교 어린 말투로 부드럽게 답했다. 그러고는 바로 따뜻한 물에 제 손을 담가 체온을 올린 후, 말리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말리는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아넷사의 손재주를 즐겼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오늘은 제가 목욕을 도와드리고 싶은데…….”

말리가 축객령을 내리자, 아넷사는 아쉬운 눈으로 말리와 레일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말리는 매번, 제 목욕에 누가 들어오든 모두 내치고 레일라만 남게 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온 이방인 공주가 벨담의 시녀들을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렇게나 제 시녀 하나만 싸고도는 것은 마뜩찮았다.

게다가 공주의 시녀는, 아넷사가 보기에 참 어설펐다. 그야 디온에서는 나름대로 귀한 집 따님이었다니 그렇겠지만 해도 너무했다. 아넷사 앞에서 실수한 것만 열 손가락을 훨씬 넘어간다. 목욕이라고 잘 시중들 리 없다.

“나는 내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그리 기껍지 않단다. 아직은 네가 낯설구나.”

말리는 그런 아넷사의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말리 또한 능숙한 사람이 목욕을 시켜 주는 것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있었으며 아넷사의 능숙한 손길 따위는 그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말리는 턱끝으로 아넷사를 내보냈다.

끼이익, 탁. 욕실의 양쪽 문이 맞물려 닫히고, 이제 돌벽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말리는 욕조 안에 턱까지 담근 채, 무릎을 끌어 모아 앉은 후 레일라에게 명령했다.

“나를 씻겨 주세요.”

아마 아넷사가 이 모양을 보았으면 아주 이상한 표정이 되었을 것이다. 제 시녀에게 공대를 하는 공주라니. 하지만 말리는 레일라와 둘만 남으면 언제나 공대를 했다. 그 이유야 간단했다. 그녀는 레일라가 자신을 모셔야 하는 이 상황을 못 견뎌 하고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말리가 레일라를 하대하고 발로 걷어찬다면 레일라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녀를 돌볼 것이다. 하지만 말리는 레일라가 그러지 않길 바랐다. 포기하고 익숙해지는 것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오로지 귀하게 자란 공주를 향한 심술에서 시작된 그 공대는 아마 레일라에게 가끔은 굴욕을 안겨 줄 것이다. 모두가 그녀를 외면하고 천히 대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역할을 바꾸자고 제안한 시녀만이 레일라에게 존대한다.

그게 참, 가끔은 더더욱 싫을 것이다.

말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레일라를 올려다봤다. 레일라는 무심한 눈으로 다가와 그녀의 욕조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다음 소매를 걷고 물에 손을 담갔다. 레일라가 말리를 씻겨 주는 것은 벌써 세 번째였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듯, 따뜻해진 손으로 해면을 쥐고 물을 먹인 레일라는 거기에 기름소금을 먹여 손바닥에 문질렀다. 거친 소금이 조금 녹아, 말리의 피부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동작들은 심상해 보였으나, 말리는 레일라의 속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귀와, 무릎 꿇은 드레스 자락 끝으로 보이는 발목이 새빨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레일라는 유독 흰 피부를 가졌다. 공주로 살아온 그녀는 어떤 파도가 쳐도 변하지 않는 얼굴빛을 가졌으나, 이 성에 와서 시도 때도 없이 잘 물드는 귀 끝은 그녀의 마음을 너무나 잘 보여 주었다.

말리는 제 상박을 조심스럽게 문지르는 레일라를 내려다보다가, 팔을 들었다. 따뜻한 물 위로 새하얀 젖가슴이 드러났다. 어젯밤 벨담 왕이 세게도 쥐고 주물러 손자국이 다 난 가슴을 힐끗 본 레일라는 고개를 숙이고 해면에 기름소금을 마저 먹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젖가슴 위를 천천히 문질렀다.

시녀애의 젖가슴까지 닦아 주는 신세를 얼마나 참담히도 여기는지, 그 귀 끝은 빨갛다 못해 새카매져 있었다. 말리는 문득 심술이 났다.

“아파요.”

말리는 조용히 속삭였다. 귀 끝이 물든 레일라 공주가 흠칫했다. 귓가에 닿는 말리의 숨결 때문이리라. 살짝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말리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얼굴은 아주 가까웠으며 레일라 공주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말리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욕조 바깥으로 팔을 뺐다.

바닥에 놓인 기름소금 통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손이 닿지 않았다. 놀란 와중에도 레일라는 착실하게 기름소금 통을 들어 말리에게 받쳐 주었다. 이젠 이런 눈치 정도는 생긴 모양이었다. 말리는 그 안에서 기름소금을 아주 조금 덜어 내 손바닥으로 비볐다. 그리고 레일라의 손을 당겼다.

“이건 손으로 살살 문질러야 안 아프다고요.”

“…….”

“공주님은 혼자 씻으셔서 모르셨겠지만.”

말리는 레일라의 손등 위에 기름소금을 살살 문질렀다. 소금이 저들끼리 부딪히며 기름에 녹는 소리는 아주 작았다. 사각사각……. 그 소리 사이로 말리는 제 손가락을 레일라의 손가락 사이 틈에 끼워 넣어 문질렀다.

레일라 공주가 미미하게 이마를 찡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 보름 사이 그녀의 손은 보기 드물게 거칠어져 있었다. 암만 레일라 공주가 디온에서 찬방에 격리된 신세였어도, 험한 일 한 번 해 본 적 없었던 이다. 그런 그녀는 요즘 마구간을 드나들며 말여물을 주고, 돌바닥을 닦아 냈다. 말리의 방에는 아주 커다랗고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그 카펫을 다 들어내고 찬물에 천을 적셔 돌바닥을 닦아 내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기름이 부드럽게 윤활제 역할을 했으나 갈라진 손등에 소금이 문질러지는 건 아무래도 좀 따가울 것이었다. 하지만 말리는 레일라 공주의 손등에 자신이 덜어 낸 소금이 다 녹을 때까지 느리게 손가락을 놀렸다. 손가락 사이사이의 골에 제 손가락 끝을 집어넣어 문지르고, 손바닥을 빙글빙글 돌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손등 위를 쓸어 내며 말리는 레일라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제 손을 홀린 듯 내려다보고 있는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한때는 자신이 받았을, 혹은 그마저도 지겹고 일상적이어서 물려 버린 일들을 보는 마음이 어떨까 궁금했다.

물론 말리의 심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레일라의 거친 손등에 기름이 충분히 배어든 것 같자, 그녀는 자신이 담그고 있는 따뜻한 물에 레일라의 손을 집어넣어 찰박찰박 씻어 냈다. 그러고는.

“……!”

레일라가 이번에는 정말로 기함해 화들짝 손을 떨쳐 냈다. 말리가 그 손을 제 젖가슴 위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물이 좀 튀었고, 말리의 오른 가슴 위에 레일라의 손톱이 스치며 붉은 줄을 냈다. 제 손을 다른 손으로 쥐고 당황하던 레일라는 말리의 가슴을 보고 두 배로 당황했다.

“주, 죽을죄를…….”

“됐어요. 몸 굽히지 마세요.”

되었다, 일어나거라. 한때 그렇게 말했던 공주에게 말리는 똑같이 말하지는 못했으나, 최대한 비슷하게 말했다. 그 거만한 말투에도 레일라는 다른 때와 달리 별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말리의 몸에 상처를 낸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이깟 건 상처라고 할 수도 없는데.

말리는 제 무릎과 발바닥, 젖가슴과 엉덩이 군데군데 나 있는 상처들을 생각하며 욕조 가에 턱을 괴고 말했다.

“손으로 부드럽게 문질러서 나를 씻겨요. 서둘러야 할 거예요.”

“…….”

“물이 식고 있으니까.”

“더운물을…….”

“더 떠 오다가 내가 그사이 감기에 걸리면 당신은 정말로 차가운 방에서 다른 시녀들과 자게 될 거예요.”

말리의 말에 레일라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관둔 듯 손을 기름소금 통으로 뻗었다.

“……해 본 적이 없어 서투를 것입니다.”

“그런 건 이미 지겹도록 한 달 내내 겪고 있는걸요.”

말리는 싱긋 웃고는 그녀가 자신을 편히 씻길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제 뒤쪽의 욕조 가를 손으로 두들겼다.

“여기 앉아서 씻기는 게 편할 거예요. 쪼그리고 앉아서 씻기다 보면 옷도 다 젖고, 현기증도 오거든요.”

“……감사합니다.”

레일라가 머뭇거리다가 기름소금 통을 들고 욕조 가에 앉았다. 말리는 턱을 들어 제 뒤쪽에 앉은 레일라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새삼스레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럼 그렇지. 레일라는 욕조에 앉은 후에야, 자신이 말리를 뒤에서 감싸 안듯 씻겨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귀 뒤부터, 목을 따라 어깨까지.”

말리는 레일라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시선을 정면으로 두었다. 벽면에는 훌륭하게 조각된 황금 물고기가 있었다. 벨담의 성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황금 조각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레일라는 이내 결심한 듯, 천천히 소금을 퍼 손바닥 사이에서 문질러 녹인 뒤 말리의 귀 뒤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길고 가느다란 레일라의 손은 말리의 목을 감싸기 충분했고, 레일라는 곧 적당한 강도를 찾은 듯했다. 똑같이 목을 감싸도, 왕의 손과는 사뭇 달랐다.

“왕과는 좀 다르네요.”

“……예?”

“왕이 내 목을 틀어쥘 때는 내 숨을 막을 때뿐이거든요.”

“…….”

레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리는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매일 시녀들이 죽어 나간다는 소문이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나 봐요. 아주 못된 버릇이 있어.”

“……어떤…….”

말리는 다시 턱을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파리한 얼굴이 아주 가깝게 보였다. 언제나 창백한 안색이지만 따뜻한 목욕탕에 들어와서인지, 뺨 끝만 살짝 붉어져 있었다. 제대로 틀어 올리지 않아 쏟아져 내릴 듯 허술한 금발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 꽁꽁 언 겨울의 호수 같은 눈을 보며 말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버릇 다 말해 주는 순간 공주님께서는 아주 기뻐질걸요.”

“……제가요?”

“당연하죠.”

말리는 물속에서 손을 들어 제 목뒤를 문지르던 레일라의 손을 끌어 내려 그 엄지를 제 오른쪽 쇄골 바로 아래에 두었다. 레일라의 손은 아주 컸고, 자연스레 레일라는 말리의 오른쪽 가슴을 쥐듯이 감싸게 됐다. 이제는 뺨 전체가 붉어졌다. 하지만 말리는 그 뺨을 못 본 척, 그녀의 엄지손가락을 지그시 눌렀다.

“쇄골 아래를 천천히 눌러 주세요. 거기가 답답해…….”

이제 레일라의 네 번째 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말리의 유륜을 꾹 누르게 됐다. 그 생경한 감촉에 레일라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말리는 모르는 척 제 반대쪽 쇄골 아래를 꾹꾹 누르는 시늉을 했다.

“겨드랑이부터 여기까지 눌러 주세요. 아주 피곤하니까.”

“…….”

레일라는 이내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원한 감각이 등까지 전해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말리는 눈을 감고 천천히 뒤로 몸을 기댔다. 레일라가 저를 끌어안듯이 하는 모양새가 됐다. 레일라는 한참 동안 말없이 기름 묻은 손으로 그녀의 가슴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그리고 깊이 눌러 댔다. 그 후에는 잠시 멈췄다. 말리가 뭐라고 하길 기다리는 모양이었으나 말리는 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일라는 코만으로 한숨을 작게 쉬곤, 결국 기름소금을 조금 더 덜어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렸다. 빙글빙글 원을 그리듯이 부드럽게 움직이자 기분이 나른해졌다. 말리는 눈을 감고 노래하듯 말했다.

“제 가슴 아래쪽을 보세요. 아주 기뻐지실 거예요.”

눈을 감아도 레일라가 의아해하고 있다는 것은 기색만으로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레일라는 손끝으로 말리의 가슴을 아주 조심스럽게 헤쳤다. 그리고 손이 딱 멈추었다. 아마 레일라는 지금 말리의 가슴 바로 밑, 피가 맺힌 곳을 보고 있을 것이다.

“왕의 잠자리 버릇이 아주 안 좋더라고요.”

말리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반 바퀴 빙글 돌렸다. 그리고 눈을 떠 위를 올려다봤다. 레일라의 눈동자 안에는 공포와 슬픔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다.

벨담의 왕은 잠자리 버릇이 안 좋았다. 그와 함께 잠에 든 적 없으니 엄연히 말하면 여자를 대하는 버릇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대체적으로 말리를 물건처럼 다뤘다. 공주이니 귀하게 대해 준다 말했으나, 그의 말이 진짜라면 세상의 모든 공주들은 온몸에 잇자국이며 멍 자국, 매 맞은 자국이 나야 마땅했다.

난폭한 남자들은 흔했다. 왕이라고 우아하고 고상할 리 없었다. 그는 제 흥분을 오로지 말리를 매질하는 것과 구음으로만 해결하는 듯했다. 벨담 성에 들어온 지 한 달 보름이 지났지만 말리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만한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왕은 일주일에 한 번은 그녀를 불렀는데, 왕에게 불려 간 밤이면 말리는 턱이 얼얼하도록 왕의 것을 물고 있어야 했으며 깨물리거나 꼬집혔다. 가끔은 손바닥이나 작고 가벼운 채찍으로 얻어맞기도 했다.

세 번째의 밤이 지나고 나서 말리는 확신했다. 왕은 여자 때리는 것을 좋아했다. 레일라는 말리가 왕에게 불려 갈 때마다 공주의 시녀 된 자로 매번 문 앞에서 쪼그려 기다렸으나, 말리가 소리 지르거나 울지 않으니 아마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말리가 목욕할 때에는 시중을 들면서도 숫제 눈을 질끈 감거나 다른 곳을 보곤 했다. 그러니 더더욱 몰랐을 수밖에. 제 몸을 남에게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남의 몸을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레일라를 볼 때마다 말리는 심술이 일어났다.

“어떤 나라의 왕자님께는 대신 매 맞는 아이가 있다곤 하죠.”

“…….”

“공주님 대신 매를 맞는 말리가 있어 기쁘시지요?”

얼어붙은 호수 같은 눈. 이를테면 말리는 그 얼음 위에 망치질을 한 셈이었다. 말리는 레일라가 입은 벨벳 드레스 자락을 젖은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다.

“말리도 호강에 겨웠지요. 매 맞는 아이를 보살펴 주는 왕자님은 없을 텐데. 말리는 공주님의 보살핌을 받네요.”

그렇게 말하며 말리는 욕조에 앉은 레일라의 허벅지 위로 팔을 올리고, 응석을 부리듯 엎드렸다. 레일라가 움찔하든 말든 말리는 제 팔에 얼굴을 묻었다. 이윽고 레일라가 천천히, 그녀의 엎드린 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손끝은 더 이상 서투르지 않았다. 대신 그 차갑고 무표정한 공주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아주 부드럽고도 다정했다. 그래서 말리는 짜증이 났다. 동정받기 위해 이런 심술을 부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가 한 말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말리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목욕을 하고 나면 할 일을 머릿속으로 꼽기 시작했다. 벨담 성에서 말리는 정말로 호강을 하고 있기는 했다.

‘어디까지 했더라…….’

말리는 곧 요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했던 심술이 천천히 녹아 욕조 속으로 사라졌다.

* * *

벨담 왕은 부자였고 왕이며 귀족들이 부를 과시하는 방법은 다양했으나 그의 경우는 다소 고상했다. 그 커다란 성의 한 켠에는 아주 큰 서재가 있었으며 왕은 그 서재를 책으로 가득 채웠다. 일만 권의 책이 꽂힌 서가. 책이 백 권만 있어도 그 주인은 엄청난 애서가 소리를 들었으니, 일만 권의 책은 어떻겠는가.

성을 둘러보던 말리가 그 서재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뻐졌는지는 말도 못할 것이다. 귀한 책을 만져 보다니.

말리는 벨담의 시종장에게 자신이 그 서재에 드나들어도 되는지를 은근히 물어보았고, 시종장은 길고 긴 주의 사항을 주기는 했으나 그녀를 막지는 않았다.

벨담 성의 서재는 성에서 손꼽게 따뜻한 방 중 하나였다. 너무 추우면 가죽으로 만든 책들의 장정이 줄어드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재의 창문들 중 열두 개가 통유리로 만들어진 창이었는데, 이 창문들은 남향으로 나 있어 햇빛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말리는 서재로 들어가자마자 망토를 벗어 문 앞에 던져 놓았다. 내팽개치는 것에 가까웠으나 마음이 급했다. 얼마 전 보던 가시나무 공주 이야기의 뒤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새파란 색으로 물든 가죽 장정을 손에 들고 급히 넘겼다.

어릴 적 저주받아 두 눈이 없는 공주는 가시나무 밑에 버려져 가시나무 공주라고 불렸다. 가시나무들은 불쌍한 공주를 위해 가지를 뻗어 가시나무로 된 성을 만들어 냈다. 그러자 공주를 버린 왕이 다시 그녀를 찾았다. 용을 죽인 한 기사에게 공주를 수호하라는 임무를 준 것이다.

‘기사는…….’

말리는 의자에 앉아 손톱을 깨물었다. 그녀가 잘 모르는 단어들 때문이었다.

말리가 글을 배운 것은 여관에서 하녀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배운 것들뿐이었다. 방 하나에 은전 한 닢, 말여물은 동전 두 닢 같은 글은 눈 감고도 쓸 수 있었으나 용의 불꽃이나 기사의 철검, 왕이 앉은 황금 왕좌 같은 것들을 읽어 내기에 그녀는 아직 부족했다. 그래서 말리가 서재에서 집어 드는 책들은 모두 동화나 설화를 담은 책들이었다. 어린 귀족들을 위한 예법 책도 있었으나 재미가 없어 집어치웠다.

그나마 기사가 용을 죽인 내용은 삽화가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벨담 왕의 책들은 모두 비싸고 고급스러운 책들이었으며, 삽화는 금박과 보석을 가루 내 만든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다. 자연스레 삽화가 들어간 페이지는 아주 적었다.

그러니 말리는 왕이 왜 기사에게 공주를 수호하라는 임무를 주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새로 펼친 페이지에는 모르는 단어들이 한 문단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말리가 이 페이지까지밖에 보지 못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아무리 곱씹어도 모르는 단어들이 너무 많았다. 대강 문맥만 보고 뒤까지 읽어 내기에는 무리였다.

말리는 책을 테이블에 펴 놓고 고개를 들었다. 서재에는 그녀뿐이었다. 아넷사와 앤 등에게 책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어서 말리는 항상 서재에 혼자 왔다.

레일라는 논외였다. 아넷사나 앤, 나디아보다 레일라에게 그 사실을 들키는 게 배는 싫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 한낱 시녀였다는 사실, 그것도 길바닥 어중이떠중이 출신이라는 건 레일라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왜일까.

말리는 한참 동안 책을 들여다보며 끙끙대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가시나무 공주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자신의 한계인 것 같았다. 서가를 뒤져 삽화 많은 책을 겨우 찾았다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당장 서재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말리가 벨담 성에서 보내는 낮은 대체로 평온했으며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시간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벨담에 오기 전까지 그런 시간들은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했으며, 여관에서는 하루 종일 일하다가 손끝이 부르터 식당에서 쓰는 기름을 몰래 문지르다 혼나기 일쑤였다. 그나마 제대로 된 일자리가 있을 때는 좀 나은 편이었다. 길에서 자야 할 때는 어떻고! 당장의 끼니보다도 내일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생활들이었다.

그러니 말리는 이 시간이 정말로 소중했다. 그녀는 책을 덮고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갔다. 서재에 난 유리창은 놀랍도록 투명했는데, 그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을 보는 것을 말리는 좋아했다.

창밖 풍경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남향으로 나 있는 창문 아래로는 마구간이 보였다. 벨담 왕이 타는 귀한 말들을 열 마리나 돌보고 있는 마구간이었기에 보통의 마구간보다는 호사스러웠다. 기사들이 두어 명 짝을 지어 순찰하고, 흙바닥에 여물이 될 짚 더미를 놓고 썩썩 소리를 내며 짚을 써는 마구간 하인들.

그리고 그 사이로 눈에 익은 금발 머리가 보였다.

말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그렇구나.’

레일라 공주였다. 말리가 제 볼일 보라고 하자마자 파라디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벨담 성으로 들어올 때 말리가 타고 있던 파라디는 왕의 마구간에 함께 모셔졌다. 품종도 아주 좋은 데다가 튼튼한 암말이었기 때문에, 왕의 말들을 관리하는 종자는 은근히 파라디가 수말들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물론 파라디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레일라 공주는 주변을 어설프게 둘러봤다. 누가 봐도 주변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티가 나는 모양새였다. 저래서야 누가 저이가 마구간에 평범하게 들렀다 생각하겠는가. 말리는 혀를 찼다. 애초에 마구간은 여자들이 들를 일이 별로 없는 곳이다. 그녀는 천천히 유리창 한쪽의 작은 돌림쇠를 열었다. 창 한쪽을 아주 조그맣게,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 수 있는 장치였다. 풍경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 정도만 열려도 충분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기사 한 명이 나오다가 두리번대는 레일라를 발견하고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댔다. 레일라는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새카매져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기사의 손을 쳐 냈다. 기사는 일부러 어이쿠, 소리를 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갑옷을 입은 채 넘어졌으니 소리가 어마어마했다. 와장창, 주변 기물들이 같이 넘어졌다.

“어허, 이 계집애 보게!”

말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런 놈들 개수작이야 워낙 많이 본 일이었다. 순진해 보이는 여자가 있으면 일단 손을 대고 본다. 기함해 밀어 내면 나동그라진 후 협잡을 부린다. 길거리의 양아치들이나 기사나 별다를 것이 없었다. 기사는 대번에 일어나 붉으락푸르락하며 레일라에게 으름장을 놨다.

“너 이 계집, 나를 밀쳐?”

“……그것은 당신이!”

뜻밖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 시녀들은 기사들에게 이기지 못할 것을 아니 죄송하다 사과하다가 몇 번 희롱당하는 게 전부였는데. 레일라는 기사에게 대들고 있었다. 저러다 맞을 텐데. 말리는 유리창에 저도 모르게 이마를 댔다가, 그 차가운 감촉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뗐다.

“내가 뭐? 어? 내가 뭐?”

기사는 더더욱 우악스럽게 굴고 있었다. 우스운 건, 그 기사가 레일라보다도 키가 한 뼘은 작았다는 것이다. 레일라가 길게 솟은 송곳이라면 갑옷을 입은 기사는 동그란 공 같았다. 레일라는 그 기사를 내려다보며 항의했다.

“당신이 나를 희롱하지 않았나?”

“이 계집애가 하대를 하네?”

“……나는!”

레일라가 멈칫했다. 말리는 혀를 쯧, 하고 찼다. 평민이라 할지라도 기사 서임을 받는 순간 귀족이다. 시녀들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레일라가 입성할 때, 본래 귀족 출신의 시녀라고 말해 두기는 했으나 대체로 성안에서는 어느 나라든 기사들이 시녀들보다는 한 수 위이기 마련이다. 아주 대단한 집안의 따님이 아닌 이상은.

그리고 볼모에 가깝게 시집온 공주의 시녀는 말할 것도 없다.

“너 뭐?”

기사가 이죽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레일라가 멈칫하다가 어깨를 폈다.

“나는……. 공주의 시녀다.”

공주의 시녀. 그 같잖은 울림에 기사가 참 나, 하고 혀를 찼다.

“벨담 성에 공주가 어딨어? 어? 어디 보자. 네가 그 볼모로 온 공주의 시녀인 게로구나? 하하! 나 참,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공주의 시녀면 왕의 기사를 막 이렇게 밀어 버려도 된단 말이냐? 어디 얼마나 대단한 공주라 시녀까지 콧대가 이렇게 센지 한번 보자꾸나!”

기사가 레일라에게 삿대질하며 한 발 다가갔고, 레일라는 한 발 물러섰다.

그 귀 끝이 새빨개진 것이 말리가 보는 창가에서도 아주 잘 보였다. 저런 때도 화를 저렇게 못 감추다니. 시녀 일에 적응하기가 영 힘든 모양이었다. 말리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돌아섰다. 요령 없는 공주가 시녀로 살려면 저 정도 어려움은 겪어야 할 것이다.

‘저럴 때면 그저 그냥, 차라리 엉덩이를 만지든 말든 샐샐 웃음이나 치고 자리를 무마하면 그만인데.’

저 기사도 딱히 그녀를 겁탈하려거나 엄청난 짓을 하려던 건 아닐 것이다. 그냥, 그저 여자가 잘 없는 곳에서 시녀애를 보니 장난이 치고 싶은 것뿐이지. 그러니 거기 맞춰나 주고 웃어나 주면 피차 편할 것을. 말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가시나무 공주 이야기를 다시 파 볼 요량이었다.

‘왕은 기사를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사는 승…….’

그다음 단어를 도무지 어떻게 읽는지, 어떤 뜻인지도 짐작 가지 않았으나 말리는 그 단어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책에 골몰했다.

아니, 골몰하려 했다.

와장창, 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았다면.

말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유리창을 다시 닫아 놓지 않은 탓이었을까. 바깥의 원색적인 소리가 너무나 잘 들렸다.

“이 계집애가 별로 예쁘지도 않은 것이, 빠닥빠닥 고개를 들고 어디다 대꾸를 해. 예뻐해 주려고 했더니 말뼉다구 같은 게 확 목을 꺾어서 마구간에 매달아 놓을까 보다…….”

말리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얻어맞았는지 밀려 쓰러진 레일라, 주변에 둘러서서 보기만 하고 도와주지 않는 하인들과 씨근덕대는 기사가 있었다. 기사는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박차가 달린 금속 신발을 신고 발을 쿵쿵 굴러 대고 있었다. 그뿐인가. 드레스를 수습해 일어나려던 레일라의 옆구리를 한 번 걷어차기까지 했다. 레일라가 헉, 숨을 들이켜는 것이 보였다. 그런 주제에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는 것이…….

“게 있었니.”

그 순간 창 밑의 모두가 이쪽을 올려다봤다. 어림잡아 여섯 명은 되는 시선이 모두 자신을 주시하고 나서야 말리는 화들짝 놀라 입을 가릴 뻔했다.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물러서는 대신 애써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돌보고 오라 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게서 뭐 하는 거니. 물을 게 있으니 빨리 들어오너라.”

기사 역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리창과 바닥의 거리는 그리 차이 나지 않았고, 기사가 그녀를 알아보기는 충분한 거리였다. 암만 기사들이 시녀들을 하대한다 해도, 막상 그 시녀의 주인이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기사에게도 충분히 불편한 일일 것이다.

말리는 일어나려다 말고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레일라를 직시했다. 햇빛 아래라 그림자가 져 푸른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말리는 가타부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창밖에서는 더 이상 소란이 나지 않았다.

“묻고 싶으신 게 무엇입니까.”

그렇게 밀쳐져 넘어진 주제에, 서재에 들어온 레일라는 또다시 고요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빳빳이 든 고개 아래로는 흙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말리는 턱을 괴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책을 짚었다.

“여기.”

“…….”

그녀가 보다가 막힌 부분이었다. 레일라가 다가와 흘끗 책을 봤다.

“몰라요.”

“……승계.”

“무슨 뜻이에요?”

레일라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답했다.

“누군가가 가진 것을 이어받는다는 뜻입니다.”

“아.”

말리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기사는 왕과 먼 친척이었고, 용을 물리치고 돌아온 기사에게 작위를 승계하라고 어떤 사람들이 말했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을 그제야 말리는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녀가 책을 짚어 보며 문장을 곱씹는 것을 보던 레일라가 입을 열었다.

“또 궁금한 게 있으신지.”

그 말에 말리가 고개를 들어 레일라를 봤다. 레일라의 얼굴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귀를 새빨갛게 붉히던 레일라는 어디로 갔을까. 자신을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레일라 공주는 언제나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속으로 비웃고 있겠지.’

말리는 투덜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아까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자신이 어려운 말을 모른다는 걸 들킨 마당에, 굳이 아닌 척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말리는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을 테니 거기 계세요.”

“……네.”

레일라는 말리에게서 꽤 먼 곳에 앉았다. 말리가 자신을 불편해할 거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국 머잖아 레일라는 말리의 바로 옆에 앉게 됐다. 복잡해지는 이야기 때문에 말리는 레일라를 계속해 부르게 됐고, 레일라는 멀리서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말리의 옆에 의자를 깔고 앉아 버린 것이다.

「기사는 공주가 싫었으며 증오했습니다. 용을 물리친 기사는 왕의 자리 따위는 관심 없이 멋진 세상 속에서…….」

말리가 글자를 따라 짚던 손가락을 멈추자 레일라가 입을 열었다.

“모험.”

“아, 모험.”

「모험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가시나무로 만들어진 성 앞에 선 기사는…….」

* * *

그날도 말리는 책을 다 읽지 못했다. 아넷사가 서재로 와, 갑작스레 왕이 말리를 불렀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말리는 창밖을 바라봤다. 햇빛이 누레지기는 했으나 해가 지려면 아직 먼 시간이었다. 대낮부터 계집애랑 붙어먹고 싶으면 다른 계집애가 있을 텐데. 말리는 한숨을 쉬고 싶었으나 아넷사 앞에서 그럴 수도 없었으므로 그저 책을 덮고 일어났다.

왕에게 가기 전 아넷사가 말리의 머리를 풀어내고 다시 빠르게 땋아 주었다. 말리는 거울 안에서 제 뒤에 말없이 서 있는 레일라를 봤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와 있는 건 여전했다. 말리는 입을 열었다.

“아넷사. 내가 없을 때 저이가 머리를 만지는 법을 좀 배우게 해 주련?”

“……제가요?”

아넷사가 흘끗 레일라를 돌아봤다. 레일라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리는 슬쩍 웃으며 아넷사에게 말했다.

“저이는 디온에서도 좋은 집 딸이라 매일 머리를 남들이 만져 주어야 성으로 왔단다. 홀로 머리하는 법을 몰라 이곳에서 자꾸 깔보이는구나.”

“아…….”

아넷사가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찰나였지만 영 싫은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일라는 시녀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레일라가 하도 간절히 말리에게 간청해, 방도 시녀들과는 따로 쓰는 참인 데다가 말도 없었다. 시녀들이 뭘 도와 달라 해도 제대로 답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가서 일만 돕고 돌아왔다. 그게 다 그들에게는 외국인 시녀애가 콧대 높게 구는 것으로 보이리라.

“그러면 조금 이따가…….”

“……죄송합니다.”

아넷사의 말을 끊은 것은 레일라였다. 레일라는 보기 드물게 분명한 눈으로 거울 속의 말리를 쳐다보고 말했다.

“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야 내 시녀가 기사들에게 떠밀리고 다니는 데야.”

기사들에게 떠밀려? 아넷사가 조금 놀란 얼굴이 됐다. 레일라는 그 말에 또 귀 끝이 조금 빨개졌다. 제가 당한 치욕을 남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싫은 모양이지. 말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에 비친 레일라를 바라봤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고, 아넷사가 어색하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가 조금 이따가 땋아서 틀어 올리는 법을 알려 드리지요. 그렇잖아도 매번 보면서 머리를 좀 만져 드리고 싶었답니다. 화장도 조금만 하시면 훨씬 미인으로 보이실 텐데…….”

그러나 레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저녁에 부탁합니다.”

“저녁이오? 저녁은…….”

“공주님의 침실 앞을 지켜야 하니까요.”

레일라와 달리 말리는 표정 관리에 영 매번 애를 먹곤 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레일라의 말에 이마를 팍 찌그러트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말리는 한쪽 눈썹이 자꾸 구겨지려는 것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깟 일이야 아무려면 누가 해도 상관없는 것을. 그리고 내가 저녁 넘어까지 있으면 어찌할 게냐.”

“그러면 내일 배우면 될 일이지요.”

뜻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넷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자꾸 둘을 번갈아 보고 있어, 말리는 더 뭐라 하지 않았다.

……아마 공주로 자라 제 허물을 지적받는 일이 영 기껍지 않은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젊은 왕은 가벼운 가면을 쓰고 있었다. 평소에 쓰는 입과 코 밑만 뚫린 가면이 아니라, 코와 광대 아래까지만 가려져 있는 황금의 가면. 저렇게 얼굴 드러내도 괜찮나. 맨얼굴은 반만 가려도 되는 건가. 다 가려져 있는 게 아니어도 괜찮은 건가. 마녀의 저주는 어디까지 드러내야 모두 타 죽는 건가. 그런 잡스러운 생각들을 하며 말리는 입술을 벌렸다. 왕의 얇은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두꺼운 수염이 턱에 거칠게 비벼지는 감각이 끔찍했다.

왕은 덩치가 커서, 그 무게를 말리에게 온전히 실을 때면 말리는 참 사내를 받아 내기가 버거웠다. 사내치고는 호리호리한 편인데도 그랬다. 그는 말리의 다리를 벌리지도 않고 그저 그 위에 올라타 말리의 입술을 빨아 대길 좋아했는데 왜인지는 몰랐다.

낮부터 술을 마신 듯 입술이 술 냄새에 흠뻑 젖어 있었다. 뜨끈한 혀가 난잡하게 말리의 입 안을 훑었다. 입 안에서 혀들이 얽히는 감각은 이상하게도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곧 입술을 떼어 낸 왕이 그녀의 목덜미를 살짝 핥다가, 깨물었다.

아야. 말리가 작게 신음 소리를 내자 왕이 웃었다.

“아프냐.”

“아니오…….”

“거짓말을 하는군.”

왕이 그녀의 가슴 위를 찰싹 손바닥으로 때렸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말리가 어깨를 움츠렸지만 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맨살을 꼬집어 올렸다.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한다 했지?”

“으응……. 벌을 주신다 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며 왕은 말리를 내려 보다 흠칫했다. 공교롭게도 레일라가 목욕을 돕다 상처를 낸 곳이 눈에 띈 것이다. 손톱에 스친 붉은 자국을 보고 왕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이것은 무엇이냐?”

“아. 제 시녀가 목욕을 돕다 실수를…….”

“그래?”

그렇게 물은 왕은 입술을 들어 올려 웃더니 눈앞의 가슴을 손으로 때렸다. “아응.” 말리가 신음했다. 아파서였다. 몇 번 더 손찌검을 하고 나서야 입을 뗀 왕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네 어디 가서 다른 사내와 붙어먹고 거짓을 고하는 것은 아니냐?”

“그럴 리가요…….”

말리가 화들짝 놀라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왕이 짓궂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네가 움찔하는 걸 보니 맞는 게로구나.”

“아니, 아닙니다. 이건…….”

“입 닥치거라.”

그렇게 말하는 왕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했다. 말리는 이게 농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그리 험악한 분위기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디온의 공주는 말도 없고 조신하다 들었는데 어째 내 침실에서 영 겸연쩍은 기색도 없는 것이 내 알아보았다. 네년 내가 불러 주지 않는 동안 어디서 누구와 붙어먹은 게냐.”

“정말 아닙니다…….”

왕이 다시 찰싹, 그녀의 가슴 위를 때렸다. 민감해진 살이 슬슬 짜증스럽도록 아팠다. 왕은 말리의 찡그린 눈썹이 퍽 재미나다는 듯 바라보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것 보려무나. 나를 만나기 전에 아무래도 다른 사내놈을 만난 모양이지. 요전처럼 나긋나긋하게 굴지도 않고, 때리는 대로 바짝바짝 눈썹이 찌푸려지는 걸 보니 네 어디서 비빌 만한 다른 사내를 찾은 게로구나.”

그 눈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고, 그제야 말리는 왕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챘다. 그러니까, 왕의 취향은 그런 것이었나 보았다. 말리는 가만히 왕을 쳐다보다가 샐쭉 웃어 보았다. 가면 사이로 보이는 눈이 한층 더 휘는 걸 보니 이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계집이 감히 귀한 분을 어찌 속이겠습니까.”

“요년.”

왕이 손을 뻗어 말리의 뺨을 움켜쥐었다.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요년 요거 기가 막히게 요사를 떠는구나. 어디서 누구와 붙어먹었느냐.”

“아이…….”

말리는 몸을 슬쩍 꼬며 배시시 웃었다.

“귀한 분 잘 모시기 위해 배워 온 것이지, 붙어먹었다 하시면 부끄러워요.”

그렇게 말하는 말리의 손이 왕의 앞섶에 닿았다. 방금 전까지 제 욕망을 다 채운 듯 미동도 없던 앞이 그사이에 불룩해져 있었다. 그의 취향은 아무래도 범상치 않긴 한 모양이었다. 때리고 꼬집는 것도 모자란 모양이지.

다른 놈이랑 붙어먹었냐는 추궁도, 그리했다는 말리의 대답도 거짓임을 둘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왕은 말리가 그러했다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역할극 같은 것이 하고 싶은 것일 게다.

말리는 손끝으로 왕의 것을 옷깃 위에서 살살 쓸면서 아양을 떨었다.

“얼마나 배워 왔는지 볼까.”

“배움이 모자라도 너무 나무라지 마셔요.”

“모자라면 벌을 받아야지.”

그렇게 말하는 왕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말리는 축축하게 젖은 앞섶을 헤집으며 웃어 보였다.

매 순간이 고역이었다.

추운 날 갈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동동 발을 구를 때가 있었다. 발가락이 다 얼어 발톱이 거멓게 죽을 지경이었는데, 한 사냥꾼이 그녀를 열흘간 재워 주겠다고 나섰다. 당연히 그 사냥꾼은 열흘 동안 따뜻하게 불 지펴 놓은 집에서 말리를 괴롭혔다. 차라리 얼어 죽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요긴하게 배운 것도 있었다. 버겁고 곤욕스러운 상황에서 정사를 빨리 끝내는 방법이다. 어쨌든 남자들은 침대에서 제 욕심만 채우면 바로 뒤로 널브러지곤 했으니까.

“요사스런 계집이…….”

그렇게 말하는 왕의 목소리에는 즐거움 반, 환희 반. 어쨌든 왕은 말리가 제게 치대는 것이 퍽 좋은 모양이었다. 그야 왕을 상대한 계집들이래 봐야 죄 귀한 몸이셨을 텐데 이런 잡기를 어느 계집애가 부렸겠어.

말리는 으응, 교태를 부리며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난 직후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폐하의 것이 품고 싶습니다.”

암만해도 애를 빨리 배든가 해야 이 노릇이 끝날 모양이었다. 말리는 최대한 왕을 즐겁게 해 준 후에야 넌지시 그렇게 말했다. 아이를 낳아야 가면을 벗을 수 있다는 왕. 그에게도 제게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생각 외로 왕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목소리에서는 즐거운 기색이 가신 지 오래였다. 유희는 끝났으며 그녀는 오늘도 아이를 가질 일은 요원하다는 것만 알게 됐다.

왕은 늘어져 나른하게 말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숨은 뜻은 분명했다. 말리는 부아가 났으나, 얻어맞아 부은 뺨으로도 생긋 웃어 보였다. 이보다 더 미움받는 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왕이 그녀를 보지 않는데도 말리는 환하게 웃었다.

말리가 설렁줄을 당겨 시녀들을 부른 건 한참 후였다.

* * *

성벽이 희한한 자들은 널리고 깔렸다. 그러니 왕이 여자의 사타구니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애를 낳아야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말리는 천천히 걸었다.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다. 어젯밤에 늦게 잠들었는데도 이상하게 새벽에 눈이 떠졌다. 다시 잠들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아서 일어났다. 이른 새벽이라 그녀의 방 앞에는 보초 하나만 서 있었다. 깨어나 방을 나온 그녀를 보고 보초가 시녀를 부르려 했으나 말리는 고개를 저었다.

태생이 천해 그런가, 말리는 똥밭을 걸어도 제 뒤에 시녀 하나는 꼭 붙어 있는 모양이 영 불편했다. 보초가 불안한 얼굴을 했으나 말리는 “내가 어디 가 자빠져도 네 탓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렴.”이라며 다독이고 방을 걸어 나왔다. 그녀가 갈 데가 딱히 많지는 않았다. 어차피 성을 나가려면 문에서 보초를 서는 기사들의 눈에 띌 것이었으니 그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도 일러두었다.

한겨울의 공기는 차갑고 뼈를 때리는 듯했다. 자신의 방이 있는 내성을 나오자마자 말리는 더 두꺼운 숄을 두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입김이 짙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곧 함박눈이 내릴 듯했다.

“……서 말야.”

내성 뒤로 통하는 길이 보이기에 피해 가려던 말리는 문득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움찔했다. 뒤쪽에는 내성의 화장실들이 몰려 있었는데, 화장실들은 죄다 성 옆에 둘러져 있는 해자로 배출구가 통해 있었다. 아무리 해자에 흘려보낸다 해도 오물이 길에 튀거나, 냄새가 나는 경우가 흔했기에 대부분의 벨담 성 사람들은 내성 뒷길에 접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일라의 취향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말리는 조심스럽게 내성 뒷벽 쪽으로 다가갔다.

“가끔은……. 그래. 그 저열한 품성이 참으로 기가 막히게도 여겨지는구나.”

예상대로 레일라가 내성 뒤쪽에 있었다. 익숙한 밀짚빛 금발 머리를 땋지도 틀어 올리지도 않은 채로 늘어트린 그녀는 이쪽에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말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레일라와 함께 있는 말 상대 또한 그러했다. 상대 역시 레일라와 같은 방향을 보고 서 있었는데, 그 종족은 인간이 아니었다.

“에구, 지랄이다. 네 잘못이 아니다. 인간 계집애들은 다들 왜 그리 못됐니?”

말.

말리는 이마를 찡그렸다. 왕의 마구간에 있어야 할 파라디가 레일라의 옆에 서서 말답지 않게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말리는 왕의 말들은 이른 아침이면 마구간지기가 모두 풀어 아침 산책을 시키면서 몸을 덥힌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파라디 또한 아침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저렇게 따로 나오다간 들킬 텐데.

“그리고 인간 남자들은 왜 그렇게 여자 엉덩이를 못 만져서 안달인 거야? 윤기가 흐르는 털도 없는데 말야…….”

“파라디.”

레일라가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의 목덜미를 두들겼다. 파라디가 투덜댔다.

“말리 그 계집애, 나는 영 불안해. 나는…….”

말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에 말리는 저도 모르게 성벽 뒤로 몸을 숨겼다. 아무래도 앞서 말한 못된 인간 계집애라는 건 자신을 말하는 듯싶었다. 둘이 함께 사이좋게 내 험담을 했던 모양이지. 말리는 코를 찡그렸다. 파라디라고 제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산속에서 레일라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렸을 때, 정작 비명을 질렀던 것은 파라디니까 말이다…….

“파라디.”

말리가 상념에 잠기려는데, 레일라가 파라디를 다독이며 나직하게 불렀다. 그 목소리가 편안하면서도 낮아서 말리는 흠칫 놀랐다. 레일라는 말리가 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마저 말을 이었다.

“불안해하지 말렴. 나의 불안과 너의 불안이 만나 더 큰 불안을 불러오게 될 테니.”

“하지만…….”

“조금만 참아.”

파라디의 밤색 갈기와 윤기 나는 털을 쓰다듬는 손길은 메마르고 건조했다.

“내가 나갈 때, 적어도 너는 데리고 갈 테니.”

“제발 그래 줘. 여기 마구간은 얼마나 답답한지 하루 종일 있으려면 짜증이 난다, 짜증이 나. 너 손은 왜 그래?”

“아, 어제 찬물로 청소를 하다가…….”

* * *

말리는 흘끗 레일라를 내려다봤다. 레일라는 언제나 그렇듯이, 말리의 방에 깔려 있는 카펫을 모조리 걷은 뒤 찬물로 방을 닦고 있었다. 본래 가장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들이 할 일이었으나 레일라는 굳이 자신이 자청해 방 청소를 하곤 했다.

그녀는 긴 소매를 걷고 걸레를 양동이에 담갔다. 나무로 된 양동이 안에 찬물이 찰랑거렸다. 벨담의 여인들은 대부분 길고 넓은 소매로 된 드레스를 입었다. 소매 끝이 아주 넓어 찬 바람이 들이치기에 겨울의 벨담 여인들은 소매 안쪽에 긴팔로 된 상의를 보통 입었다. 그러나 레일라는 그럴 요령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옷을 껴입고 싶지 않은 것인지 모르지만 긴 소매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말리의 앞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으며 아넷사와 나디아는 말리의 옆에서 자수를 놓고 있었다. 앤은 불을 쑤석이다가 잠시 나간 참이었다. 말리는 물끄러미 찻잔을 보는 척하며 레일라를 보았다. 겨울이니 손이 부르터 피가 안 나는 날이 없을 것인데, 저 체념한 얼굴은 어쩌면 저렇게나 태연하게 찬물에 손을 담그고 있을까.

그 밀짚색의 금발을 보고 있으니, 그날 아침 파라디와 레일라가 나누던 말이 떠올랐다.

‘가끔은……. 그래. 그 저열한 품성들이 참으로 기가 막히게도 여겨지는구나.’

말과 레일라는 말리에 대해 떠들었더랬다. 저열한 품성이 누구를 가리켜 하는 말일지는 뻔했다. 심술궂은 저를 가리키는 말일 테지! 말리는 조금 짜증이 났으나 표정에는 드러내지 않고 찻잔을 들어 입에 댔다. 차는 끝맛이 달큰한 것이 아주 고급인 듯했다.

“아넷사, 잠시…….”

돌아온 앤이 문밖에서 고개를 내밀어 아넷사를 불렀다. 겨울이니 성의 부엌에서 숯을 나누어 받아야 하는데, 그 양이 너무 많은 듯했다. 요즘 벨담 왕은 말리를 퍽 흡족해했는데, 그래서일까. 부엌에서 보내는 숯의 양이 늘었다. 침방에서 빨아 보내는 침구들도 부쩍 질이 좋아졌다. 베갯머리송사라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은 아니라는 걸 실감하는 세월이었다.

……매 맞는 것도 베갯머리송사에 속한다면 말이지.

말리는 자조했다. 매 맞아 벌었다는 말이 웃길 따름이지만, 매 맞은 후에 그대로 길바닥에서 얼어 죽을 것을 걱정하던 세월에 비하면 호사스럽다고도 할 수 있었다.

아넷사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말리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디아도 같이 가렴.” 하고 둘을 내보냈다. 시녀들이 나가자마자 말리는 레일라를 손짓해 불렀다. 레일라는 나디아와 아넷사가 나가자마자 자신을 부를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걸레를 빠르게 정리하고 일어났다.

“무슨 일이시지요.”

“이리 오세요. 심히 보기 안 좋습니다.”

“하지만 하녀들에게 청소를 맡기기가…….”

말리는 뾰족하게 말했다.

“청소야 험한 일 해 본 적 없는 공주님에게 꼭 필요한 일일 테죠. 저는 청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머리카락이 아직도 엉망이잖아요.”

아. 레일라가 조그맣게 알겠다는 듯 감탄사를 냈다. 다만 표정은 변화라곤 없는 게, 마치 허수아비라도 보는 것 같아 섬뜩했다. 말리는 투덜댔다.

“아무리 귀히 자란 시녀라도 머리를 아예 만질 줄 모른다는 건 좀 어불성설 아닐까요.”

“그……. 죄송합니다.”

레일라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말리는 뾰족하게 말했다,

“게다가 그 구식 버팀 살도 거슬려요. 좀 빼면 안 되나요? 그건 디온에서도 유행이 지난 옷이잖아요.”

디온에서야 그녀가 유행이 지난 옷을 입어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디온의 왕비는 그녀가 구식 옷을 입는 것을 반겼으리라. 어여쁘게 치장하는 것보다 못난 것이 환영받았다. 하지만 여기는 벨담이었고, 오래된 구식 드레스를 고집하는 시녀는 너무 눈에 띄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레일라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머리 다듬는 법은 아넷사나 앤에게 배우겠습니다.”

“뭘 꺼려요? 어차피 아넷사와 그날 이후로 한마디도 섞지 않은 것 같은데.”

사실이었다. 말리가 왕의 침대에 불려 간 이후로 그 둘의 머리 다듬기 수업은 단 한 번도 실행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리는 턱끝으로 공주를 부렸다. 말하자면 레일라는 말리의 앞에 얌전히 등을 돌리고 엉거주춤 몸을 구부리게 되었단 얘기다.

말리는 레일라의 정수리로 손을 뻗었다가 흠칫했다. 정수리가 일견 너무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의 추리와 의문을 거친 후, 말리는 레일라가 자신보다 한참은 키가 크다는 것을 떠올렸다.

“……바닥에 앉으세요.”

“예.”

레일라 공주는 말리가 왜 그러는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고개만 약간 갸웃대며 말리의 무릎 사이, 바닥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물로 청소해 차갑기 그지없을 그 바닥에 앉은 레일라의 뒤통수를 보고, 말리는 심술궂은 손으로 레일라의 정수리에 난 머리카락 가닥을 확 잡아당겼다.

“아얏.”

레일라는 머리가 당겨지며 죽는 소리를 냈다. 말리는 작게 킥 웃었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것 같은 당신도 고통은 느끼나 보지.

하긴. 화도 내고.

머리를 세게 잡아당기다 못해 자신의 무릎 사이로 몸이 당겨져 제게 기대게 된 레일라의 새빨간 목뒤를 보며 말리가 생각한 것이었다.

* * *

레일라 공주는 화가 나면 목덜미와 발목, 그리고 귀가 새빨개지곤 했다. 말리가 두어 달간 지켜보고 나서 알게 된 것이었다. 레일라는 대부분 비는 시간이면 파라디를 찾곤 했는데, 성안의 사람들 중 질이 나쁜 이들은 레일라를 한 번씩 건드려 보곤 했다. 그것은 그녀가 어떤 일을 당해도 큰 비명을 지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사가 걷어찼는데도 숨만 들이켜는 종자니 그럴 수밖에 없지.’

말리는 목덜미를 빨갛게 붉힌 채 마구간 지푸라기를 터는 레일라를 보며 생각했다. 서재 창문은 마구간에 드나드는 레일라를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아, 저 버팀 살 아직도 그대로네.’

레일라를 아래위로 훑으니 오늘도 그녀는 그 유행 지난 버팀 살을 드레스 밑에 받치고 나온 듯했다. 레일라는 마구간을 천천히 나오고 있었는데, 마구간지기가 지나가며 그녀의 허리를 툭 건드렸다. 언뜻 보기에는 별일 없이 스쳐 지나간 것 같지만, 말리는 그런 일상적인 움직임들이 얼마나 치욕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마, 지금 레일라는 말리가 그간 느꼈던 것보다 배는 더 치욕스러울 것이다.

평생을 귀하게 살아왔을 이가 천한 누군가의 저열한 의도가 가득한 손길에 여과 없이 노출된다는 것은 어떠할까, 말리는 조금 궁금해졌다.

죽고 싶을까? 빨리 도망치고 싶을까? 아니면 다 죽여 버리고 싶을까?

나는 그랬는데.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을 비집고 웃음이 나왔다. 좋아서라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녀는 서재의 유리창을 손으로 톡톡 두들기며 아주 잠깐, 레일라에 대해 생각했다.

저 공주님은 차라리 벨담 왕의 밑에 깔리는 게 나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왜냐하면 말리가 지금 레일라를 보며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레일라는 매일매일 화가 나 새빨개진 얼굴로 말리가 지내는 방을 청소한다. 공주의 시녀라지만 벨담 성은 손이 모자란 곳이라, 아주 가끔은 정원의 풀 뽑기나 세탁실에도 불려 간다. 자연스레 세탁실의 양잿물을 만드는 남자들, 혹은 정원사, 아니면 지나가는 기사들의 손을 탄다. 유형도 가지가지다. 그저 일단 다가와서 만지는 남자, 혹은 유혹하는 남자. 그리고…….

말리는 힐끗, 다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마구간을 막 벗어나 성벽 쪽으로 가던 레일라가 누군가를 마주하고 있었다. 기사의 종자인 듯했다. 걸친 튜닉은 기사의 것이라기엔 짧았으며 벨담의 문장이 박혀 있었으니.

종자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는데, 말리가 있는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말리는 저도 모르게 살짝 발돋움했다. 발돋움해 봐야 더 잘 보일 리가 없는데도.

종자는 자신이 든 물건을 레일라에게 몇 번 내밀었고, 레일라는 손을 내젓다가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남자는 끈질겼으며 레일라는 고개를 흔들다가 이내 뭐라 뭐라 말했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마 거절의 말이리라.

남자는 이내 실망한 듯 고개를 떨궜다가, 자신이 들고 있는 물건을 레일라의 발치 앞에 내려놓고 뒤로 돌아 뛰었다. 레일라는 당황한 듯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 물건을 들어 올렸다.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레일라는 그것을 들고 성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영 마음에 걸리는 듯 다시 서성이다, 결국 그토록 꺼려하던 마구간지기에게 다가가 그 물건을 건넸다.

멍청이.

마구간지기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말리는 그의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레일라는 고개를 흔들며 물러섰다. 남자가 돌아오면 그 물건을 돌려주라 말한 거겠지. 마구간지기의 평가는 어떨지 몰라도, 말리는 레일라가 아주 멍청하진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저 선물을 받아 버리면 더 귀찮아질 테니 말이다.

차라리 거칠게 대하거나 대놓고 희롱하는 이들은 거절하기도 쉽다. 하지만 천천히 다가와 열렬한 마음을 고백하는 남자들. 그리고 그것을 부드럽게 거절했는데도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는 남자들이야말로 악질이다. 한 번 거절했는데도 두고 간 선물을 받아 오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줬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하지만 저렇게 행동하면,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다는 소문을 퍼트리기는 어려울 텐데. 좀 거북해도 가벼운 여자애인 양 구는 게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말리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대체.’

자신이 왜, 레일라가 도망칠 때를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보던 책도 내버려 두고 말이다. 말리는 저도 모르게 스스로가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기까지 하며 그 광경에 몰입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때였다.

돌아선 레일라가 문득 위쪽을 올려다봤고, 말리와 눈이 마주쳤다. 말리는 화들짝 놀랐으나 되도록이면 티 내지 않으려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부딪혔다. 말리는 태연을 가장하기 위해 웃으려다가, 이미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아까부터 웃고 있는 채였다.

비웃음, 혹은 어이가 없는 웃음일 것이다. 그래야 했다. 말리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 발짝 물러섰다.

레일라는 그런 자신을 한참이나 올려다보다가, 이내 성으로 들어왔다. 말리도 레일라가 모습을 감춘 후에야 창에서 떨어졌다. 유리창이 여전히 열린 채여서 말리는 창을 꽉 눌러 닫았다.

* * *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레일라가 그렇게 말했을 때, 말리는 물끄러미 레일라를 올려다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좀 낫네.’

머리카락 가닥가닥을 잡아당겨 가며 말리가 머리를 땋아 준 날 이후, 레일라는 부쩍 단정해졌다. 그저 하나로 묶기만 해도 머리가 온통 튀어나오곤 했던 예전과는 확 달라져서 아넷사가 놀라워할 정도였다.

오늘도 비록 머리카락을 위에서부터 반만 묶어 땋아 넘겼을 뿐이지만, 보기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 벨담 성에서 잘 먹어 그런지 얼굴도 좀 살이 붙은 거 같기도 하고.

‘키도 더 커진 것 같은데.’

벨담 성의 시녀들은 따로 모시는 주인이 없는 한, 한곳에서 식사를 했다. 말리에게 붙은 시녀들은 원한다면 말리가 먹고 남긴 음식을 먹을 수 있었지만 레일라는 그것들을 사양하고 시녀들이 식사하는 구역에서 끼니를 때웠다. 아마 말리가 먹고 남긴 것을 먹고 싶지는 않을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벨담 왕은 부리는 이들에게 인색하지 않았다. 성의 하인들까지 모두 식사 시간만 기다릴 정도니 말이다. 레일라는 원래 새 모이만큼만 먹었지만, 부쩍 식사량이 늘긴 했다. 함께 식사하러 갔던 앤이 슬쩍 귀띔한 이야기였다.

일이 힘드니 무리도 아니었다. 말리도 농장에서 일할 때는 틈만 나면 몰래 흙에서 무와 당근을 뽑아 털어 먹었더랬다. 디온 성에서도 순무를 훔쳐 뽑아 먹는 게 일상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말리는 레일라의 머리 꼭대기를 보며 키를 가늠해 봤다. 그렇잖아도 어지간한 남자들만큼 크던 키가 훨씬 더 크면, 정말로 눈에 띄지 않을까. 디온에서는 키가 큰 여자들을 보고 달을 따 왔다던 처녀 트리스탄에 비유했다. 가진 것을 다 잃은 처녀 트리스탄은 신에게 자신을 지킬 힘을 가지게 해 달라고 빈다. 신은 밤이면 인간들을 추위에 떨게 만드는 두 개의 달 중 하나를 따 오라 분부하고, 키가 유독 컸던 트리스탄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절벽으로 올라가 발돋움해 달을 딴다. 그리고 트리스탄은 차가운 달 때문에 심장이 얼어 버리고, 남자가 된다.

‘저 정도로 키가 커지면 트리스탄이라는 소리를 듣겠는걸.’

“……저.”

“아.”

말리는 레일라가 재차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 덕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레일라는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말리 때문에 난처해하고 있었다. 말리는 이마를 찌푸리며 짐짓 이미 들은 척했다.

“무슨 부탁이지요.”

“……파라디를 좀…….”

파라디. 말인즉슨, 그 말할 줄 아는 말을 좀 데리고 나가 타 달라는 이야기였다. 말리는 대번에 레일라의 말을 납득했다. 파라디는 공주가 디온에서부터 타고 온 말이다. 아무리 인질이고 볼모인 공주의 것이라 해도 왕의 기사들이 몰고 나갈 수 있을 리 없고, 훌륭한 말이 열 마리나 되는 벨담 왕이 파라디를 탈 이유도 없었다. 그리해 파라디는 두 달째 아무도 타 주지 않는 마구간에서 지내고 있다 했다.

“마구간지기가 운동을 시키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답답한 모양입니다.”

이해는 됐다. 암만해도 성의 앞뜰을 몇 바퀴씩 휘휘 도는 것과, 너른 들판을 누군가가 몰고 달려 주는 것과는 활동량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말리는 이마를 찡그렸다.

“나는 그 말이 싫은데요.”

“……파라디를 데려가 주신다면 아마 심술을 덜 부릴 겁니다.”

그랬다. 말리는 파라디가 싫었다. 레일라 공주와 산에서 옷을 바꿔 입고 그녀가 파라디에 탔을 때, 파라디는 일부러 거칠게 걸었다. 핀잔은 기본이었다. 그러니 말리가 파라디를 좋아할 리 만무했다. 그녀는 거기에 덧붙였다.

“나는 승마도 못 하고요.”

사실이기도 했다. 산에서 파라디를 타고 걷는 것은 괜찮았으나 파라디가 조금 속도라도 내면 말리는 어김없이 파라디의 갈기를 꽉 붙들고야 말았다. 그러면 파라디는 아프다며 목을 휘휘 돌려 말리가 더욱 겁먹게 만들었다. 그뿐인가. 그 일주일 동안 가끔은 승마에 익숙하지 못한 말리를 놀리기도 하고, 대체 뭐 하느라 승마도 못 배웠냐며 쏘아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파라디를 타고 그녀가 달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 들판까지만 나가 주시면 제가…….”

레일라가 말끝을 흐렸다. 사람 눈이 적은 들판까지만 파라디를 데려가면 자신이 몰겠다는 뜻이었다. 말리는 참 나,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저는 들판에 혼자 있고요?”

“…….”

“당신이 말을 타고 달릴 동안 호위 기사 하나 없이?”

레일라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말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레일라의 부탁은 애초에 어불성설이었다. 사람 눈을 피하려면 호위 기사도 없이 들판에 나가야 한다. 말리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제가 왜 당신 부탁을 들어줘야 하죠?”

그녀는 레일라의 부탁을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의 입장은 뒤집혔으며 말리는 공주로서 벨담 성에 살고 있었다. 레일라는 말리에게 뭘 요구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파라디를 타고 들판에 나가 주는 것이 말리에게 대체 어떤 이득이 되겠는가. 말리는 이쯤 해서 레일라 공주가 뭔가 아직도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자신이 둘만 있을 때는 존대해 줘서 그럴까.

“당신이 아직도 공주인 줄 알아?”

그래서, 말리는 레일라의 착각을 고쳐 주기로 했다. 그녀는 눈앞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레일라에게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착각하지 말아요. 당신 처지는, 그래.”

“…….”

“당신 손가락만 봐도 보일 텐데.”

그제야 레일라가 제 손에 시선을 내렸다. 부르트고 새빨갛게 부은 손. 점점 더 추워지는 날씨에 계속 찬물을 만지고 덥힐 틈도 없이 일해서였다. 언제나 길게 길러 다듬었던 손톱은 짧아지고 갈라져 있다. 거스러미도 보기 싫게 올라와 있는 데다가 손등은 허옇게 일어나 있다. 건조해서였다.

원래도 곱거나 예쁜 손은 아니었지만 그래 놓으니 더 보기가 싫었다. 레일라는 손을 보았다가, 물끄러미 다시 말리를 바라봤다. 말리는 이마를 찡그리며 제 옆을 더듬었고, 찾던 것이 손에 잡혔다.

말리는 그대로 손에 쥐인 것을 집어 던졌다. 물건은 팍, 하고 레일라의 가슴팍에 맞고 떨어졌다.

레일라가 엉거주춤 물건을 주워 올렸다. 나무통에 담긴 것은 아넷사가 매일 정성스럽게 말리의 손에 발라 주는 손기름이었다. 기름에 향을 섞고 한참이나 저어야 나오는 흰 기름은 아주 고급품이었다. 말리는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꼴 보기 싫으니까 그거나 가져다 바르고 입 다물어요.”

“…….”

“당신이 지금 그 말 같은 걸 신경 쓸 처지나 돼요?”

레일라의 길고 커다란 손안에서 그 나무통은 이상하게도 작아 보였다. 말리가 쥐었을 때는 손가락을 잔뜩 벌려야 온전히 들어왔는데. 말리는 어쩐지 그게 부아가 났다. 본래 공주인 레일라의 손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쥐어지는데, 제게는 버거운 크기. 그게 말리가 의식하지 않으려는 어떤 걸 상징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말리는 괜히 더 강하게 말했다. 미련스럽게, 서툰 것도 정도가 있지. 언제나 표표해 보이는 레일라 공주는 손이 저 꼴이 돼서도 그 못돼 처먹은 말 따위를 걱정한다.

“말이 마구간에 있는 게 대체 뭐가 어떻단 말이야? 그 말은 마구간에서 여물이나 처먹고 따뜻한 옷까지 두르고 졸고나 있을 텐데.”

“배가 부른 게 다는 아니니까요.”

“……당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말리는 어이가 없었다. 왕의 마구간에 있는 말들은 겨울이 되니 따뜻하게 깃털을 넣어 누빈 옷을 두르고 운동했다. 사람이 입는 것보다 한참은 좋은 옷이다. 눈앞의 레일라는 그런 옷을 두르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갖고 있는 옷은 기껏해야 두꺼운 천으로 된 망토. 그리고 성에서 준 벨벳으로 된 시녀복 정도다.

벨벳이라는 것은 언뜻 보기엔 따스해 보이나 걸치면 그렇게 몸이 시릴 수 없었다. 비싸고 허울만 좋은 옷감이었다. 찬 바람이 숭숭 들어오니 춥다 못해 뼈가 다 아플 것이다. 하여 시녀 중에는 집에서 옷을 대다가 시녀복 안에 입는 이들도 있었으나 레일라가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신이 그 손으로 여물을 썰면서?”

마구간지기가 기회를 봐, 레일라에게 말여물을 썰게 시키는 걸 말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열 마리, 아니, 파라디까지 열한 마리의 말들은 정말 어마무지한 양의 여물을 먹었다. 새벽의 새파란 빛 아래서 레일라는 가끔 여물을 썰었다. 날카로운 칼로 여물을 썰다가 손톱까지 썰 뻔한 것을 말리는 알고 있다. 왼손 둘째 손톱에 가로로 흠집이 나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시녀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하고 있는 게, 저 공주다.

가짜 시녀 주제에.

“그야 파라디 입에 들어가는 건 제가…….”

“아.”

말리는 코웃음 쳤다.

“그 말이 아직 당신 것인 줄 아는구나.”

레일라가 멈칫했다. 말리가 덧붙였다.

“아니면 아직 여물까지 쑤어 보지 않아서 여유를 부리고 있거나.”

“…….”

“여물 쒀 본 적 있어요?”

레일라의 푸른 눈이 말리를 향했다. 또 저런 눈. 그녀는 레일라의 저 고요한 눈이 싫었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눈. 말리는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새벽에 일어나 이 빠진 칼로 여물을 썰고, 그걸 이만한 솥에다 넣어 끓이죠. 그 솥 앞에서 쭈그려 앉아 여물이 풀이 죽는 걸 기다리다가 졸고, 졸다 넘어져서 화덕에 앞머리를 태우기 일쑤죠. 앞머리나 타면 다행이지. 그러다가 얼굴에 화상이라도 입으면 그나마 허덕이며 살던 비루한 인생도 끝나는 건데. 그걸 알면서도 졸게 되거든요. 너무 힘이 드니까.”

“…….”

“아직 거기까진 안 가서, 말 걱정 같은 거나 하고 있나 봐.”

레일라가 입을 열었다.

“기분을 상하게 할 뜻은 아니었어요.”

“그랬으면 당신한테 내가 그깟 기름통이나 던졌을 것 같아요?”

말리는 턱을 괴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저 공주에게 제 못난 면이야 이미 숱하게도 보여 줬지만, 그래도 여유 있어 보이고 싶었다. 그녀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이야 당신이 도망쳐도 절대 같이 못 가요. 공주의 말을 훔쳐 간 시녀를 대체 어떤 기사가 내버려 둘까요. 추적이 붙겠죠.”

“…….”

“당신이 며칠 타 줘도, 어차피 그 말은 남아서 승마도 못 하는 내 말로 평생을 살아야 해요. 그러니 당신 처지나 걱정해요. 말 생각할 시간에 그 기름이나 바르고.”

그제야 레일라는 제 손안의 기름통을 다시 내려다봤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틈에 슬픔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말리는 마구 쏟아 낸 사람 특유의 심호흡을 했다. 아주 잠깐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미안합니다. 아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레일라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말리는 저도 모르게 등을 굳혔다. 레일라는 그 기름통을 쥔 채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땅에 박았다. 쿵, 쿵, 쿵. 세 번. 레일라가 그녀에게 사죄한 적은 많았고, 말리는 매번 레일라가 머리를 세 번 박으면 그만하라 말했기에 이번에도 세 번이었다. 어쩐지 말리는 이번에는 그만하라는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레일라가 하는 양을 보았다. 레일라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말리 쪽을 보지 않은 채, 기름통을 얌전히 내밀었다.

“돌려드리겠습니다. 감히 제 처지에 무례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아니.”

“저를 대신해 당신이 충분한 무도와 야만을 감당하고 있음을 제가 잊었습니다.”

바닥을 보고 있는 레일라의 입술이 달싹였다. 말리는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레일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앞으로 불편하게 해 드릴 일 없을……. 아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미련하고 서툴러 또 그런다면.”

또 그런다면, 까지 말하고 레일라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또 그런다면? 매질을 할까? 왕의 사나운 개에게 먹이로 던져 줄까? 아니면 나를 내려다보던 예전의 당신처럼, 매번 죽을죄를 지었다 말하는 나를 두고 매번 용서한다 말해 줄까? 말리의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레일라는 말을 잇는 대신, 천천히 제 손에 있던 기름통을 말리가 앉은 곳 옆에 올려 두었다. 결 좋은 나무통의 이음새 사이로 흰 기름이 살짝 배어 나와 있는 게 보였다. 레일라는 공손히 두어 발자국 물러난 뒤 말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말리는 어이가 없었다. 레일라의 태도가 며칠 전 그녀가 봤던 것과 꼭 같았기 때문이다. 기사의 종자가 준 선물을 마지못해 마구간지기에게 맡기는 모습. 쭈뼛거리며 손을 떼는 것까지 완전히 같았다.

‘지금 누구를 뭐 취급하는 거야?’

손이 저 정도로 갈라져 피가 나는데도 한사코 거절하는 꼴이, 말리는 마치 자신이 그 종자가 된 것 같아 불쾌해졌다. 물론 그녀는 언제나 레일라에게 기꺼이 심술을 부렸다. 하지만, 이건 마치…….

‘내가 널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 같아?’

배려라니. 누굴 그깟 종자랑 같은 취급을 해! 말리의 속에서 짜증이 확 올라왔다. 내가 너한테 이상한 마음이라도 품고 이러는 줄 알고. 배려 같은 거 한 적 없어. 네 주제나 알라는 뜻이야.

공주가 여상히도 발랐을 그 흰 기름은 이제 말리의 것이었다. 레일라는 벨담 성에 와서 단 한 번도 호사를 누려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흰 기름이 사방에 널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더분히도 거절하는 태도를 말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인정하기도 싫었다. 말리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 그대로 돌아서려는 레일라의 팔을 붙들었다. 갑작스럽게 잡은 팔에 레일라가 화들짝 놀랐다.

“무슨…….”

“착각하지 말아요. 배려라니.”

그렇게 말하며 말리는 레일라의 팔을 확 잡아끌어 주저앉혔다. 엉겁결이라 레일라는 말리의 기세에 떠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이 그리 우스꽝스러울 수가 없었다. 말리는 코웃음 치며 주저앉은 레일라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찍어 눌렀다. 레일라가 숨을 들이켰다. 말라빠지고 단단한 허벅지가 확 짓눌리니 아픈 모양이었다.

말리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레일라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기름통을 비틀어 열었다. 빠각, 하고 작은 소리와 함께 나무통은 쉽게도 열렸다. 레일라가 눈알을 희번덕댔다. 아무리 고요히 굴었어도 상황이 당황스럽긴 한 모양이었다.

“주제를 알란 말이야.”

말리는 기름통에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어 그악스럽게 긁어낸 다음 레일라의 손등에 펴 발랐다. 흰 기름덩어리가 손등에 부딪혀 철퍽 소리가 났다. 레일라가 당황해 손을 빼려고 했지만 말리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왼손으로 레일라의 손을 꽉 쥔 다음, 오른손으로 기름을 문질러 발랐다.

“이딴, 피나 나오는 손을 하고 말 따위나 생각하지 말라고.”

“그…….”

“당신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짜증 나니까 말하지 말아요.”

말리는 씨근덕거리며 레일라의 손에 꼼꼼히도 기름을 펴 발랐다. 어찌나 손이 건조하고 메말랐는지 기름이 스밀 때마다 거친 피부는 빠르게도 기름을 빨아 먹었다. 기름을 발라 댄 후에도 말리는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레일라의 손을 꼭꼭 누르며 기름이 흡수될 때까지 힘을 줬다.

한 손이 끝난 후엔 다음 손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이 갈라진 사이사이까지 꾹꾹 누르고 있을 때쯤엔, 레일라도 포기한 것인지 손에 힘을 뺐다. 기름은 손의 손마디까지 전부 바르고도 남아, 다 끝나고 나니 말리의 손이 끈적해졌다. 말리는 씨이, 하고 혀를 차고는 제 손을 맞대고 문질렀다. 평소 그녀가 바르는 양보다 배는 많았다.

그때였다.

“……고맙습니다.”

말리의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맴돌았다. 말리는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봤다. 그리고 더 놀라 버렸다. 레일라의 새파란 눈이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아래에서 올려다보거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와는 달랐다. 바로 옆에서, 나란히. 게다가 얼굴은 너무나 가까웠다. 말리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레일라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음을 알아차리고 놀라 뒤로 몸을 빼려다가, 실수로 주저앉았다. 뒤로 나동그라지듯 하는 말리에게 레일라가 손을 뻗었으나, 말리가 넘어지는 게 더 빨랐다.

결과적으로 말리는 주저앉고, 레일라가 그녀 위로 몸을 겹치게 됐다. 이상했다. 어째서인지 그 순간 레일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느리게, 마치 구름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 다 잠시 서로를 직시하느라 말이 없었다.

하나, 둘, 셋.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억겁처럼 길었다. 말리는 자신이 뭐라도 말해야 한다고 느꼈고, 저도 모르게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 내게 뭐라도 이득이 있다면 해 줄 수도 있어요.”

“……이득이요.”

아차. 왜 이딴 소리를. 말리는 제 입을 막고 싶었으나 마음과는 정반대의 소리가 입에서 잘도 계속해 흘러나왔다.

“책을 읽기가 힘들어요. 혼자 보려니 가시나무 공주도 다시 막혔고.”

“……책을 읽어 드리면 될까요.”

“그리고 승마도 가르쳐야겠군요.”

레일라의 얼굴이 일렁였다. 말리는 짐짓 턱을 쳐들었다. 레일라의 시선이 자신보다 높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그 말은 제 것이고 당신이 타고 도망칠 수도 없으니 말예요.”

겨우겨우, 레일라가 가졌던 것들을 제가 빼앗으려 하는 거라고. 기어이 빼앗아 저 가짜 시녀보다 내가 더 공주처럼 굴면 되는 거라고. 말리는 그때의 자신을 저녁이나 되어서야 그렇게 합리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어떤 부분은 도저히 스스로에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말리는 그저 자신이 가시나무 공주를 읽고 싶었던 거라고, 그리고 진짜 공주보다 더 공주다운 공주가 되는 건 장기적으로 보면 제게 이득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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