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3)

六장. 인과응보

예상대로 황제는 출궁을 허락했다.

대신 날이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온다는 조건을 달았다.

다행스럽게 밤새 열이 내렸고 연우는 아침 일찍 미음이 아닌 죽과 함께 약도 한 그릇 비웠다.

눈은 그쳤지만 날씨는 한층 더 얼어붙은 탓에 연우는 솜을 누빈 옷을 겹겹이 껴입고 거기에 털모자가 달린 외투까지 입어야만 했다.

아직 완전히 다 낫지 않았기 때문에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며 위륜이 연우의 수발을 드는 궁녀에게 부탁해 그녀를 꼭꼭 싸맨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이들은 대동하지 않고 위륜과 연우, 단 두 사람만 움직이기로 했다.

그들이 출궁을 한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연우의 생가는 도성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황궁을 나서 도성의 북문을 통과한 후, 말을 타고 반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도성 인근.

그곳에 그녀의 생가가 있었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에만 두 시간이 걸렸다.

처음 말을 타 본다는 연우를 배려한 탓이다.

조금 가다가 쉬어 가고, 또 조금 가다가 쉬어 가는 것을 반복한 끝에 반 시간 걸리는 거리를 두 시간이나 걸려 마을 초입에 이르렀을 때 연우는 바짝 긴장했다.

10년 만에 돌아오는 집이다.

10년이나 지났는데 여기까지 오는 풍경도, 마을 입구도, 그리고 마을 입구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목도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10년 전 낯선 사람의 손을 잡고 떠나올 때의 풍경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에 연우의 마음이 이상하게 설렜다.

풍경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두고 온 집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괜찮을 거야.’

악몽을 꿨다.

그건 정말 악몽이었다.

집은 폐허가 되어 버렸고 꿈속에서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두 동생은 아픈 엄마를 두고 비쩍 마른 모습을 한 채 텅 빈 눈으로 앉아 있었다.

굶고 있는 동생들과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 가는 엄마.

‘엄마’라고 부르려고 한 순간 꿈에서 깼다.

깨는 순간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기억은 마치 현실처럼 생생했다.

아무리 꿈일 뿐이라 되뇌도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귀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돌아갔는데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벌을 받는 걸까.

가족들과 떨어져 살 생각을 품어 버린 것에 대한 벌일까.

하지만 결코 가족들이 싫어서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니다.

가족들을 사랑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었을 뿐이다.

하지만 떨어져 살 가족들도 없다면.

정말 아무도 없다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지만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풍경을 보는 순간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이 길을 따라 돌아가면 그리운 집의 울타리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건강해진 엄마와 다 자란 동생들, 그리고 땔감을 정리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됩니다.”

연우가 제 뒤에 앉은 사내에게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연우는 위륜과 함께 말을 타고 있다.

혼자서는 말을 탈 줄도 모르고, 지금 위륜의 가슴에 의지해서 말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연우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마저도 힘이 들어서 땀이 차오르고 있다.

현무군의 장군이라는 사내가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 주는 것이 연우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연민이라고 하지만, 이런 연민조차 자신에게 베풀어 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말을 타고 오면서도 이 겨울의 추위가 조금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두껍게 껴입은 옷 때문이 아니라 제 뒤에서 저를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는 사내 때문이었으리라.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군요.”

연우를 앞에 태운 위륜이 말을 움직여 나아갔다.

위륜이 일부러 천천히 말을 몰아온 것은 연우의 아직 다 낫지 않은 몸을 배려한 탓도 있지만 최대한 늦추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의 가족은 다 죽었어요.’

악비의 말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집으로 빨리 가 봤자 그녀의 아픔이 앞당겨질 뿐.

그러니까 조금만 더 천천히.

어차피 알게 될 아픈 사실이라고 해도 조금만 더 천천히, 조금은 더 늦게 그녀가 알게 하고 싶다.

“만약, 만약에 말이오….”

만약 돌아갔는데 아무도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는 마시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위륜이 차마 그 말을 뱉지는 못했다.

“예전에 엄마가 많이 편찮으셨어요.”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연우였다.

“약을 쓰면 낫는 병인데 약값이 없어서 아버지가 혼자 우시는 것을 봤어요. 아버지는 젊었을 때 병사로 전쟁에 나가셨다가 한쪽 다리를 잃고 돌아오셔서 다른 일은 못하셨어요. 아래로 남동생이 두 명 있었는데 일곱 살, 아홉 살이라 엄마가 혼자서 삯바느질을 해서 식구들을 먹여살렸는데 너무 고생을 하셔서 병이 나신 거예요.”

연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미 10년이나 지난 일을 꺼내는 까닭에 지금은 담담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 그녀가 느꼈을 감정은 달랐을 터였다. 아마 세상이 무너지는 그런 감정이었으리라.

모든 것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생각시가 되었어요. 돈을 열 냥 받았는데 그중에 한 냥은 엄마의 약값으로 쓰고 나머지로 땔감도 들이고 양식도 들이라고 아버지께 부탁했어요. 그다음에 황궁으로 데리고 들어가 줄 사람을 따라 집을 떠났어요. 열두 살에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어요.”

“머잖아 아주 돌아오게 될 거요.”

“지금도 믿기지 않아요. 제게 일어난 모든 일이요….”

“인과응보에 사필귀정이라고 하지 않소. 선한 삶을 살았으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고, 이제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지금 위륜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연우의 생가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과는 달리 위륜의 긴장감이 더해졌다.

‘울면 어떻게 위로해야 하지?’

위륜은 타인을 위로하는 것은 아직 어색하다.

다정한 행동 자체가 어색하다.

여인을 이렇게 가까이 한 것 자체가 연우가 처음이다.

우는 여자도, 아픈 여자도 처음이고, 누군가를 이렇게 걱정해 보기도 처음이다.

연우에게는 연민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연민도 처음이다.

연우가 처음이다.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저기예요.”

연우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커다란 밤나무 아래에 작은 초가집이 울타리를 끼고 그곳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집에 인기척은 없었다.

말에서 내린 위륜이 울타리를 살폈다.

‘낡았군….’

울타리는 꽤 오랫동안 닫힌 상태였던 것이 틀림없다.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마당도, 집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다.

‘역시… 다 죽었나….’

악비의 말이 맞았던 거다.

오래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은 다 죽고 이 집은 더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되었다.

“장군님?”

혼자서는 말에서 내리지 못하는 연우가 위륜을 불렀다.

“장군님.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면….”

“낭자.”

위륜이 돌아섰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낭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

“거기, 누구요?”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위륜의 눈에 지게를 지고 걸어오다 멈춰 선 소년이 보였다.

“우리 집에서 뭘 하는 겁니까?”

딱 봐도 연우가 입은 옷이며 위륜의 모습이 지체 높은 귀족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소년이 조금 겁 먹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곳까지 지체 높은 귀족이 온 일은 없었고 그럴 일도 없기 때문이다.

“정이니?”

소년을 먼저 알아본 것은 연우였다.

“누구시길래 제 이름을….”

소년을 바라보는 연우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마지막으로 동생을 봤을 때 동생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장성한 소년이 되어 제 앞에 서 있다.

키가 훌쩍 자랐지만 얼굴은 아직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눈 아래의 커다란 점은 동생의 얼굴에 있던 점이었다.

“누이?”

그제야 소년이 퍼뜩 깨달았다.

“정말 누이요?”

“나를 알아보겠니?”

지고 있던 지게를 내던진 소년이 얼른 뛰어와 연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누이 얼굴이 맞네. 연우 누이야.”

10년이 지났는데도, 당시 열두 살이었던 자신의 얼굴을 동생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연우가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

[깔깔깔깔. 그걸 믿다니. 정말 순진한 장군님이 아닌가 몰라.]

악비가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에 위륜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아니, 어떻게 그걸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있어요? 장군, 나이가 몇 살인가요? 가족이 다 죽었다고 정말 믿는 것이 너무 귀여운데요? 장군의 표정이 정말 볼 만했어요.]

속았다.

악비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위륜은 애써 분을 가라앉히는 중이다.

악비에게 아주 된통 속았기 때문이다.

연우의 가족들은 죽지 않았다.

전염병으로 다 죽었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었고 실제는 그저 그녀의 가족들이 작년에 근방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간 상황이었다.

작년 봄까지 원래의 집에서 살다가 그 집이 너무 낡은 탓에 근방에 있는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갔고,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무탈했다.

[역시 장군은 놀리는 재미가 있어요. 물론 연우도 놀리는 재미가 있구요. 그래서 둘이 아주 천생연분이라니까.]

“마마께서 악몽을 꾸게 하신 겁니까? 가족들이 죽는 악몽 말입니다.”

위륜도 짐작 가는 것이 있다.

연우가 혼절하기까지 앓아누웠던 것, 그리고 어머니가 죽는 악몽을 꾸며 깨어난 것, 그것들이 다 우연은 아니다.

아마 악비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래야 둘이서 오붓하게 이렇게 나들이를 올 것 아닙니까?]

“이건 나들이가 아닙니다.”

[나들이에요. 단둘이서. 얼마나 좋아요. 이참에 연우에게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것이 어떤가요?]

“마마.”

[솔직해져 봐요, 장군. 좋아하잖아요. 우는 것만 봐도 안쓰러워서 어쩌지 못할 정도로 좋아하잖아요. 연민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할 수 있다는 걸 이제 그만 인정하지 그래요?]

“마마. 일방적인 마음을 밀어붙이는 것은 실례입니다.”

[드디어!]

위륜의 머릿속에서 악비가 기뻐하며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인정했군요, 장군. 인정했어요. 연우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인정했어요.]

이 원귀를 어떻게 해야 할까.

죽었으면 곱게 저승으로 갈 것이지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걸까.

그것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좋으십니까?”

[당연히 좋지요. 선남선녀가 짝을 이루는 것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좋으시면 이제 그만 성불하시지요.”

[싫어요.]

“마마.”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았어요. 그전에는 절대로 성불하지 못해요.]

“해야 할 일이라면….”

이상하다.

악비의 목적은 음란한 욕구를 만족할 때까지 채우는 것이 아니었나?

그래서 이 귀혼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악비는 지금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일까.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은 이전에도 해야 했던 일이 몇 개 더 있었다는 뜻이고, 그걸 이미 이루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체 악비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자자, 이제 장군이 나설 때예요. 연우의 부모가 딸이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하잖아요? 가서 빨리 저 부모를 안심시켜 주세요. 멋진 사윗감 행세를 해 보라구요.]

“마마.”

인상을 한 번 쓴 위륜이 연우와 그녀의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황제와 약속한 시간은 해가 지기 전까지다.

그러니까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가족들이, 특히 어머니가 무사한 것을 알았으니 연우는 이제 안심하고 돌아갈 것이다.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이요.”

위륜이 다가서자 연우가 잡고 있던 엄마의 손을 놓았다.

연우와 엄마, 두 사람 모두 아쉬움이 놓는 손에서 묻어났다.

“엄마. 이제 돌아가야 해요.”

“언제 또 볼 수 있니?”

“그건….”

엄마의 질문에 연우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귀혼이 끝난 후 출궁을 약속받았지만 그게 언제일지 장담은 할 수 없다.

연우 대신 대답한 것은 위륜이었다.

“머잖아 출궁할 겁니다. 폐하께서 약조를 해 주셨습니다.”

“폐하께서? 황제 폐하께서 왜 우리 연우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건가요?”

놀란 것은 연우의 부친이었다.

예전에 전쟁에 나가 한쪽 다리를 잃었다는 그녀의 부친은 궁녀가 된 딸이 말을 타고 나타났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당연하다.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오지 못하는 황궁에서 황제가 친히 출궁을 약속해 주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충분히 이상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귀혼의 대가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아마 연우는 죽어도 그녀의 입으로 귀혼을 한 대가로 출궁하게 되었다는 말은 못 할 것이다.

이럴 때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것을 위륜은 안다.

“이렇게 알려드리게 되어 송구하지만.”

“장군님.”

놀란 연우가 위륜의 옷자락을 잡았다.

귀혼에 대해 말할까 봐 놀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위륜이 아주 작게 눈웃음을 지었다.

안심하라는 뜻으로 말이다.

“저와 혼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순간 연우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연우가 장군님께 시집을 간다구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말에 놀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했다.

궁녀가 된 딸이 장군과 혼례를 올린다니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다만 위륜만 어색하게 그 시선들을 전부 받아낼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악비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말이다.

***

“감사합니다….”

돌아가는 내내 말이 없는 위륜에게 연우가 겨우 말을 걸었다.

연우는 위륜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변명해 준 것이리라.

위륜 때문에 곤란한 상황을 피한 것 또한 사실이다.

“출궁하게 되면 같이 다시 한 번 가족들을 찾아 뵙시다.”

“네?”

“낭자와 내가 혼인했다고 그분들에게 믿음을 줘야 하지 않겠소.”

“하지만….”

“나는 이 귀혼이 끝나면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하오. 현무군이 지키던 국경으로 가야 하니 낭자도 나와 함께 국경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아마 납득을 하실 거요. 물론 정말 같이 가자는 것은 아니요. 국경은 먼 곳이니 낭자가 오랫동안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않아도 나와 함께 있다고 가족들이 믿는다면 적어도 걱정은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소.”

위륜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식으로 해 두면 자신이 나중에 돌아가지 않아도 가족들은 더 이상 염려를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국경에서 장군의 아내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믿을 테니 말이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정말 놀랐었다.

이런 숨은 뜻이 있는 줄 모르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과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는 말을 위륜이 했을 때는 정말 당황했다.

‘이런 것도 연민이겠지.’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라서 제게 이런 동정을 베푸는 것이다.

[바보니? 동정이 아니라 너를 좋아하는 거야.]

‘아, 악비마마?’

연우가 놀라 하마터면 뒤를 돌아볼 뻔했다.

그러나 침착하게 앞을 쳐다봤다.

악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며칠 만이다.

[이 무뚝뚝한 사내가 너를 보며 눈웃음을 짓는 걸 못 봤니? 너를 좋아하는 거라니까. 날 믿어 봐. 나만큼 사내를 잘 아는 여자는 없어.]

‘그렇지 않아요, 마마. 장군께서는 그냥 제가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안쓰러워서? 그러면 세상 모든 불쌍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해 줘야지 왜 너한테만 그러는 건데? 너도 참 순진해서 탈이야.]

‘마마가 잘못 보신 거예요. 장군님은 그냥…’

[그냥? 그냥 뭐? 사내들은 그냥 친절을 베풀진 않는다니까. 네가 사내를 몰라서 그러는 거야. 혼인을 누가 핑계로 삼겠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렇게 숙맥이니 내가 다 떠 먹여 줘야지 어쩌겠어.]

‘마마?’

그때였다.

‘손이 제 멋대로….’

연우의 손이 제멋대로 앞으로 뻗더니 고삐를 쥐고 있는 위륜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닌가.

‘마마. 이러지 마세요….’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지금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악비인 탓이다.

아직 밤이 아닌데도, 무당의 주술이 없는데도 악비가 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낭자?”

위륜이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당연하다.

갑자기 손을 잡는데 누가 안 놀라겠는가.

“그, 그, 그러니까 장군님. 이건….”

다행히 목소리는 빼앗기지 않았다.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몸이 더 빨리 움직였다.

위륜의 손을 잡은 연우가 제 뒤에 있는 위륜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안기듯이 기대자 귓가에 당황해서 몰아쉬는 숨결이 느껴졌다.

“장군님, 그러니까 이건 제가 아니라 악비 마마께서….”

핑계가 될까.

위륜이라면 믿어 주지 않을까.

“마마께서 또 심술을 부리시는 거라면, 어쩌겠소. 그냥 내게 안겨 있으시오.”

다행이다. 믿어 줬다.

“네에….”

그러는 와중에도 손은 제멋대로 위륜의 팔을 더듬고 저를 뒤에서 안아 주듯 품고 있는 사내의 허벅지를 만져 댔다.

‘마마. 제발 이러지 마세요….’

하지만 악비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에서 떨어지면 안 되니 꽉 잡으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연우의 두 손이 사내의 양쪽 허벅지를 꽉 잡았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소.”

대답하는 목소리는 애써 아무렇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동요하는 목소리.

‘너무하세요, 정말….’

연우는 악비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좋은 분께 왜 이러세요…. 제발 이 분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이 사내는 좋은 사내다.

너무 좋아서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이 사내의 신부가 되고 싶을 정도다.

‘혼인하게 되었다’고 이 사내가 거짓말을 했을 때 솔직한 심정으로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좋았던 것은, 이 사내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감히 욕심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사내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히,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사내를.

그러니까 더 미안한 짓을 하고 싶지 않다.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고,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악비는 왜 이런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곤란? 하긴 곤란하게 만들긴 했지.]

‘마마!’

그때 악비가 다시 대답했다.

[이 사내는 지금 무척이나 곤란한 지경이야.]

‘그러니까 왜 이런 일을….’

[왜 곤란한가 하면, 좆이 섰거든.]

‘마마…!’

연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연우는 악비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거리낌없이 음란한 말들을 뱉을 때마다 땅 속으로 숨어 버리고 싶을 정도다.

[느껴지지 않니? 이 사내의 좆이 지금 섰다고. 왜 섰겠니? 너한테 박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지금 이 사내는 겨우 참고 있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 네 다리를 벌리고 좆을 쑤셔 박고 싶지 않겠니? 들어 봐.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지고 있어. 너도 알지? 이 사내의 좆이 얼마나… 아, 생각만으로도 돌아 버릴 것 같구나. 아직 해가 지기 전이지만 이 말 위에서라도 박히고 싶어 미치겠어. 말 위에서도 사내와 교접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니?]

‘제발 마마….’

귀를 막아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귀를 막는다고 듣지 못하는 소리가 아니다.

악비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일까.

정말 위륜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것만 같다.

정말 제 엉덩이 아래쪽에서 단단한 것이 저를 찌르고만 있는 듯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자꾸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악비의 말 때문이다.

연우의 얼굴이 달아오르며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제 숨도 불규칙하게 거칠어졌다는 것을 연우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 사내의 좆이 생각나서 나는 성불도 못 하겠구나. 저승에 가면 이런 좆을 가진 사내가 있기나 하겠니? 너는 좋겠구나 아가야. 이렇게 실한 사내가 너를 좋다고 하니. 이런 사내는 평생 한 여자만을 바라볼 사내잖니. 지고지순하지. 얼마나 좋니. 내가 상대했던 못된 놈들과는 다르게 말이야.]

빨리 환궁하고 싶다.

[그래, 빨리 환궁해서 침전 안에서 이 사내와 뒹굴고 싶지?]

‘아니요. 아니요, 마마. 아니요, 마마….’

[자, 조금만 엉덩이를 돌려 보렴.]

‘꺄악! 마마!’

연우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제 엉덩이가 멋대로 뒤쪽에 앉은 위륜의 사타구니 사이를 비빈 것이다.

마치 유혹을 하듯 그의 허벅지를 잡고 그의 벌어진 사타구니에 제 엉덩이를 비볐다.

“오늘따라… 마마께서 심술이 어지간하신가 보오….”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장군님. 마마께서 자꾸만….”

“마마께서 지금 하시고 싶다 하시오?”

“그건….”

“밤까지 기다리지 못하겠다 하시오?”

결국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악비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음란한 말을 하긴 했지만 밤까지 기다리지 못하겠다, 여기에서 당장 하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 그걸 원하는 것은 연우 자신이다.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은, 밤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악비가 아니라 연우 자신이다.

머리가 돌기라도 한 것인지, 지금 당장 이 사내에게 안기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악비의 탓을 하고 싶지만 이 마음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드러낼 수 없어서 악비의 핑계를 대 본다.

이건 악비가 원하는 거라고, 자신이 아니라.

“마마께 성불하실 각오를 하라 전하시오.”

“장군님?”

그 순간 위륜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을 연우도 느꼈다.

정말 크게, 사내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고삐를 잡은 손을 놓더니 연우의 허리와 턱을 잡았다.

“아…!”

사내를 향해 고개가 돌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의 입술에 사내의 입술이 덮였다.

멈춘 말 위에서 위륜이 연우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연우는 눈을 감는 것도 잊었다.

입안 가득 사내의 숨결이 밀려 들었다.

그 숨결에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혀 올 즈음에 연우는 악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성불하겠구나. 아이, 부러워라. 여기에서 계속 구경하고 싶지만 나는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가마. 황궁에서 보자, 아가야.]

그 목소리가 마지막이었다.

그 후 더는 악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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