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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가 있는 것 같더니 연우의 병이 더 깊어졌다.
처음 연못에 빠지고 옥사에 갇혔다 풀려났을 때 이틀 동안 꼬박 앓았던 연우는 정신을 차린 후 이틀 정도는 차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흘째가 되며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나흘째가 되자 이불이 흠뻑 젖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미음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래서야 귀혼 의식을 전혀 치를 수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엄동설한에 얼어붙은 연못에 빠진 것도 무리였는데 냉골인 옥사 안에 오래 방치되어 있어서 한기가 뼈에 스며든 것처럼 보입니다. 못해도 열흘은 보양을 해야 회복될 듯하옵니다.’
다시 연우를 진맥한 어의는 그렇게 황제에게 고했다.
황제의 본심은 이참에 연우 대신 다른 궁녀를 귀혼의 그릇으로 삼고 싶었지만 이미 악비가 던져 놓은 으름장이 있다.
다른 궁녀로 바꾸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악비가 이미 단단히 경고를 해 놓았기 때문에 황제 조영도 생각만 할 뿐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악비가 제대로 악귀짓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황제는 이제 하루라도 빨리 악비의 원혼을 성불시키고 싶을 뿐이다.
제발 이 황궁 안에서 악비의 ‘악’자도 듣지 않는 것이 황제의 소원이다.
대체 악비가 제게 무슨 원한이 그리 깊어 이런 짓을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은 생전에 악비와 접점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악비에게 나쁜 짓을 한 적도 없다.
부딪친 적이 있어야 나쁜 짓을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제대로 말 한 마디 해 본 적 없는 악비에게 자신이 무슨 잘못을 그렇게 대단하게 해서 죽어서도 자신을 이렇게 괴롭힌단 말인가.
‘가장 큰 일은 악비의 원혼이 폐하에게 씌는 것이옵니다. 악비의 원혼이 씌면 광증이 난 것처럼 굴게 되니 그것만큼은 막아야하지 않겠사옵니까.’
한술 더 떠서 무당은 그렇게 말했었다.
악비를 더 화나게 하면 그때는 황후나 후궁들을 괴롭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황제 자신에게 씌어 광인처럼 변하게 만들 거라는 말에 이미 조영은 충분히 겁을 먹었다.
원혼이 씌워 광인처럼 행동하던 궁녀를 이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런 꼴이 되고 싶지는 않다.
황제가 되어 벌거벗고 사람들 앞에서 그런 수치스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편이 낫다.
그래서 지금 조영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악비이고, 그 악비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위륜이다.
이미 위륜이 악비에게 호통을 쳐서 그녀의 행동을 막은 일이 있었다.
악비의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있고, 악비를 성불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내가 위륜이라면 그에게 의지할 도리밖에는 없다.
그런 황제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륜은 지금 다른 것에 온통 신경이 몰려 있다.
바로 연우의 병이었다.
‘왜 낫지 않는 걸까.’
어의의 말로는 뼈에 한기가 스며들어 그렇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좋아지는 것 같았다가 이렇게 갑자기 나빠지는 수가 있을까.
악비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저번 날 이후로 악비의 원혼은 더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연우의 몸에도 씌지 않는 것을 보면 악비가 성불한 것이 아닐까 싶다가도 무당이 아직이라고 하니 그것도 아닐 것이다.
연우의 얼굴은 창백했다.
밤만 되면 고열에 시달리고 낮에는 추위에 덜덜 떤다.
무엇보다 이틀 전에 갑자기 정신을 잃은 후로 눈을 뜨지 않고 있다.
미음을 입안으로 흘려보내도 삼키지 못하는 상황이라 어의가 성심을 다해 달여 올린 탕약도 먹이지 못하고 있다.
뼛속에 박힌 한기를 빼내야 한다며 어의가 내린 처방은 침전 안이 후덥지근할 정도로 불을 지핀 후에 연우의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침상에 눕는 것이다.
침전 안을 뜨겁게 하면 뼛속으로 온기가 스며들고, 그 온기로 인해 뼛속에 맺혀 있던 한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오며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그 한기를 막지 않고 전부 내보내기 위해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고 나름대로 어의는 열심히 설명을 했었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연우의 벗은 몸을 보고 음탕한 생각을 할 정도로 파렴치하지는 않다.
황제는 연우가 빨리 나아 이 귀혼이 서둘러 매듭지어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위륜은 귀혼보다는 연우가 빨리 낫기를 바랄 뿐이다.
‘어쩌면 악비의 원혼을 몸에 받는 것이 힘이 들어 이러는 것일 수도 있어.’
원혼이 씌운 여인과 교접을 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떨어지는데 그 원혼이 직접 몸에 씌는 것은 엄청나게 기운이 빨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몸의 모든 기력을 소진해서 회복할 기운이 없는 거라면 더 이상 악비의 원혼이 이 몸에 씌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로군.’
악비를 성불시키기 위해서는 귀혼을 마쳐야 하지만 귀혼을 계속 진행하면 이 여인은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다.
이 여인에게 더 이상 악비의 원혼이 씌우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악비를 성불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처음에는 악비의 원혼이 그저 음란한 욕망에 미친 그런 원귀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녀가 영비에게 씌어 한 행동이나 자신의 머릿속에서 걸어온 말들을 보면 마냥 음욕에 미친 원귀는 아니다.
그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만 믿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말을 듣고 영비에게 하던 짓을 멈춰 준 것만으로 악비가 자신과 연우를 아주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호감은 아니지만 황제나 영비에게 가지고 있는 악감정은 적어도 자신과 연우에게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떻게 해서든 악비를 성불시키고 싶다는 자신의 진심과 같은 여인으로서 희생당하고 있는 연우에게 악비가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추측을 할 수 있는 건 연우가 앓기 시작하면서부터 악비가 더는 연우의 몸에 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악비가 무자비한 악녀라면, 연우에게 어떤 측은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연우의 몸이 아프던 말든 빙의를 하고 음란한 행위를 요구해 왔을 것이 분명하다.
자신과 연우에게 악의가 없다면, 악의보다는 호의에 가까운 쪽이라면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마마.”
찬 물수건으로 연우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며 위륜이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남들이 보면 혼잣말처럼 보일 것이다.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마마. 제 말이 들리십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다른 때에는 말을 걸지 말라고 해도 고집스럽게 자기 할 말을 하던 악비가 지금은 왜 조용할까.
“마마. 다 듣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통을 부리는 걸까.
연우를 첩으로 삼으라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심술을 부리는 것일까.
그때까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있던 연우의 감은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낭자?”
위륜이 연우를 들여다봤다.
그녀의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다.
“낭자, 정신이 좀 드시오?”
악비가 자신의 말을 들어 준 걸까?
그래서 연우가 정신을 차린 것일까.
“낭자. 잠시만 기다리면 약을 가져오겠소.”
미음은커녕 약 한 모금 넘기지 못해서 지금까지 약도 먹이지 못했다.
‘약보다는 물을 먼저 마시게 해야 하나?’
잠시 머뭇거릴 때였다.
눈을 들어 위륜을 바라보던 연우가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낭자?”
벽을 향해 돌아누운 연우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애써 숨을 죽이고 있지만 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낭자. 많이 힘드시오? 그렇다면 어의를 불러….”
정신을 차리고 나니 너무 아파 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륜은 이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다.
몸이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다.
몸이 아픈 사람은 이렇게 울지 않는다.
신음하며 고통을 호소하지 이렇게 숨 죽여 흐느껴 울지 않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울 것이니 혼자 울지 말고 내게 말해 주면 좋겠소.”
연우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위륜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다는 말은 진심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뭐라도 해 주고 싶다.
그래서 이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낭자. 내게 말해 보시오. 내가 도울 수 있다면….”
“아니요….”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목소리 역시 젖어 있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아닌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위륜도 느끼고 있다.
“이 귀혼이 힘들어서 그런 것이라면 내가 악비 마마를 어떻게든 설득해 보겠으니….”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알려 주시오. 내가 미덥지 못해서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오.”
힘든 것이 있다면 왜 자신에게 말하지 못하는 걸까.
자신이 미덥지 못해서? 아니면 미안해서? 아마 후자일 것이다.
자신과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이 여인은 아마 제게 미안해서 말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나를 눈앞의 사람 한 명도 돕지 못하는 그런 몹쓸 사내로 만들지 마시오.”
“그냥….”
젖어 있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불안으로 물든 흔들림이다.
무엇이 이 여인을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물론 지금까지 연우가 겪어 온 모든 상황이 그녀를 불안에 떨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은 어느 정도 끝났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말해 보오.”
“그냥… 집에 가고 싶어요.”
울먹이며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위륜이 잠시 말을 잊었다.
“잠깐만이라도, 집에 다녀오고 싶어요….”
왜 울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는 이유를 왜 말하지 못했는지 그제야 알 것만 같다.
출궁은 금지되어 있다.
궁녀의 출궁은 사사로이 허락되는 것이 아니다.
모시고 있는 후궁의 허락이나 황제의 승인이 있어야만 한다.
더욱이 연우는 귀혼의 의식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이 의식이 끝나면 출궁이 약속되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끝나면’이다.
그 전에는 출궁할 수 없다.
그걸 알기 때문에 쉽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쁜 꿈을 꿨는데… 엄마가 많이 아픈 꿈이었어요. 꿈이라는 걸 알지만 실제처럼 생생해서… 정말 엄마가 아픈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연우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만큼 그녀가 말하기 힘들어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엄마가 많이 아파서 그런 꿈을 꾼 거라면… 어쩌면 임종도 지키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고 무서운 마음이 들어서…. 다 끝나고 출궁해서 집에 돌아갔을 때,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에 한 번만 다녀오고 싶은데… 갈 수가 없어요….”
‘가족? 이 아이의 가족은 모두 죽었어요.’
문득 악비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악비는 연우의 가족이 이미 다 죽었다는 말을 했다.
물론 그게 정말인지 거짓말인지는 위륜도 모른다.
다만 그게 정말이라면 연우의 꿈은 그래서 꾼 것 아닐까?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을 그녀가 꿈으로 느낀 거라면,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불안이 얼마나 심할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찌할까….’
위륜이 잠시 고민했다.
부하들을 보내 그녀의 생가를 살펴보라고 시킬 계획이었다.
정말 가족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 오라고 시킬 예정이었지만 연우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물론 최악의 상황에서 가족들이 전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녀가 받을 충격이 보통은 아니겠지만, 그런 충격은 혼자 견디는 것보다는 둘이 견디는 것이 낫다.
만약 귀혼이 끝나고 출궁한 연우가 혼자 집으로 돌아가서 더 이상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충격은 그녀 혼자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
이 연약한 여인이 그 비극적 사실 앞에서 혼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위륜이 잠시 상상해 봤다.
차가운 겨울, 얼어붙은 그 겨울 속. 아무도 없는 텅 빈 집 앞에 흐느끼며 울고 있는 장면이 절로 떠올랐다. 그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서럽고 안타깝다.
어차피 알게 될 진실이라면 혼자가 아니라 자신이 곁에 있어 주는 것이 더 버티기 쉽지 않을까.
적어도 무너져 내려 울게 될 때 자신이 붙잡아 주고, 위로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것은 못해도 그 정도는 해 주고 싶다.
“열이 내리고 미음을 한 그릇 다 들면 내가 집으로 데려가 주겠소.”
“네?”
놀란 연우가 돌아누웠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폐하께 허락을 받아내겠소. 잠깐만 다녀오겠다면 폐하께서도 허락해 주실 것이요. 대신 열도 내려야 하고 미음도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는 조건이요.”
어차피 출궁할 여인이다.
잠깐 정도의 외출은 황제도 굳이 막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귀혼 의식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곁들이면 황제는 아마 문제없이 허락할 거라고 위륜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