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3)

五장. 살정

“으으응….”

연우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몸이 무거워….’

전신이 무겁고 아프다.

맞은 것처럼 여기저기가 아프고 머리가 울린다.

‘나, 옥에 갇혔는데….’

기억이 흐릿하게 돌아왔다.

영비를 시해하려 했다는 죄로 옥사에 갇히고 죽어 가고 있었다.

‘여기는 아직 옥사일까….’

그런데 이상하게 춥지 않다.

춥기는커녕 훈훈한 온기가 전신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이마에는 시원한 물기가 느껴졌다.

‘여기가…어디지….’

살짝 고개를 돌리자 이마에 얹어져 있던 물수건이 툭 떨어졌다.

그제야 연우는 이곳이 폐궁의 침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곳으로 돌아왔다.

“깨어나셨소.”

그리고 투박한 사내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울렸다.

살짝 눈을 들자 위륜의 얼굴이 눈 안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떨어진 물수건을 들어 다시 연우의 이마에 얹어 줬다.

“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제 이 사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리고 왜 자신을 수발들고 있는 것일까.

“당분간은 내가 당신을 돌보기로 했소.”

“네?”

연우가 귀를 의심했다.

이 사내가 뭘 한다고? 제 수발을 든다고?

“하지만 저는 죄인이라… 곧 참형을….”

“진짜 죄인이 밝혀졌소.”

“진짜, 죄인이요?”

“서희라는 궁녀가 실토를 했소.”

“서희가 왜….”

“자기가 떠밀었다며 실토를 했소. 물론 악비의 원혼이 씌어 그렇게 된 것이라 폐하께서도 그 궁녀의 목숨은 살려 주기로 하셨소. 대신 곤장을 스무 대 맞고 궁에서는 쫓겨날 것이오.”

‘서희가 밀었다고?’

물론 연우는 영비가 왜 연못에 빠졌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풍덩 소리가 났을 때 이미 영비는 연못에 빠져 있었다.

‘정말 서희가 민 것일까? 왜? 악비 마마의 원혼이 씌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악비 마마의 원혼이 영비 마마를 무척이나 미워해서 그런 것이라 하오.”

“그런데 왜 장군님께서….”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왜 위륜이 여기에서 제 수발을 드는 걸까.

수발을 드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해도 된다.

“내가 하겠다고 자청했소.”

“어찌하여….”

“그냥, 그러고 싶었소.”

그 말을 하고 입술을 꾹 깨무는 사내의 옆모습을 보며 연우가 더는 묻지 않았다.

문득 깨달은 것은 지금 처음으로 연우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위륜과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꿈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빨리 나아서 하던 것을 마저 마쳐야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것 아니겠소.”

“네에….”

역시 그런 걸까.

위륜 역시 이 귀혼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

하긴 그럴 것이다.

이런 일에 오래 엮여 있어 좋을 것이 무엇인가.

‘내가 빨리 몸을 추슬러야지….’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 괜히 미안하다.

자신이 미흡해서 괜히 위륜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닐까.

***

아침이 되어서야 연우는 자신이 깨어난 날이 그 일이 있고 나서 꼬박 이틀 후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틀 동안 앓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앓던 이틀 동안 옆에서 병간호를 한 것이 위륜이었다는 사실을 옷을 갈아입혀 주는 궁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위륜은 이틀 동안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했다고 한다.

궁녀가 아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자신이 정신을 잃었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제게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바보니? 위륜 장군이 너를 옥사까지 가서 구해냈잖니.]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 진실을 말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악비였다.

밤이 아닌데도 악비의 목소리가 제 머릿속에서 들리자 연우가 적잖게 당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위륜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목소리는 갑자기 들려 왔다.

딱 목소리만 들려 왔다.

몸은 여전히 제 마음대로 움직였다.

밤이 아니라 악비가 제 몸까지는 움직이지 못하는 것일까.

“저를…말인가요?”

[그래, 너. 저 무뚝뚝해 보이는 장군이 세상에, 옥사까지 직접 가서 옥문을 부수고 네게 옷을 벗어 주고는 왕야께서 오셨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 아니겠니? 네가 아니면 귀혼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말이야.]

“왜 그러셨을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내가 여인을 위해 목숨을 걸 때는 이유가 하나뿐이야. 네게 반한 거지.]

“그럴 리가요!”

너무 놀라 연우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위륜 장군이 제게 반했다고?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면 그 사내가 왜 그랬을까? 너는 죄가 없다면서 너를 참하면 자기도 같이 죽이라고 아주 멋지게 말하던데? 왜 그랬을까?]

“그, 그건….”

[너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야. 너만 둔해서 모르는 거지.]

“하지만 그분께서 왜 저를…. 저를 잘 알지도 못하시는데….”

[원래 몸정이 마음정으로 변하는 거야. 일단 살부터 붙여 놓으면 그다음에 정은 자연스럽게 드는 거지.]

“하지만 겨우 이틀이었는걸요.”

[너한테는 겨우 이틀이지만 사내는 하룻밤만으로 무너지기도 한단다.]

“놀리지 마시어요….”

연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건 지금 악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위륜 장군이 저를 좋아하겠는가.

[두고 보렴. 그 사내가 네게 어떻게 하는지. 나는 그 사내가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단다. 이쯤 되면 내가 네게 은인이지 않니?]

머릿속에서 악비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가야. 나는 말이야 원한은 열 배로 갚지만 은혜는 스무 배로 갚는 사람이란다.]

“그게 무슨….”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자, 이제 누워 있으렴. 장군이 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리니 나는 이만 얌전히 있어야지.]

그 말과 함께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위륜이 들어섰다.

그는 손에 대접을 들고 있었다.

“약을 먹을 시간이오.”

“제, 제가 마실 수 있습니다.”

연우가 황급히 그에게서 약이 든 대접을 받아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연우에게 약 대접을 빼앗기지 않았다.

“아직 뜨겁소.”

결국 연우는 약이 식을 때까지 그 사내가 대접을 들고 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했다.

‘마마께서는 왜 그런 말씀을 하셔서….’

악비가 그런 말을 한 탓에 위륜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이는 연우였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위륜이 제게 하는 행동에 계속 눈길이 간다.

‘직접 물어볼까? 아니야. 어떻게 그런 것을 물어보겠어.’

그런 것을 어떻게 물어본단 말인가. 그러다가 아니면, 악비의 놀림에 이용당하는 것이라면 그때는 정말 부끄러워 죽을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오?”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위륜이었다.

약 대접을 내밀며 위륜이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

“아, 아니요….”

“혹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 말해 주시오. 이 폐궁에는 방이 많으니 나는 다른 방을 써도 괜찮소.”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아니라?”

“제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이유는….”

위륜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리는 연우의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뭐라고 대답하실까….’

만약 자신을 좋아해서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신분이 이렇게 다른데, 그렇게 되면 정말 첩이라도 될 수 있는 걸까.

자신은 이 사내의 첩이 되고 싶은 걸까.

‘첩은… 되고 싶지 않아….’

본처 자리를 노리는 것은 아니지만 첩은 싫다.

황궁에서 생각시로, 그리고 세답방의 궁녀로 지내면서 후궁들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미 잘 알고 있다.

후궁들의 질투나 첩실들의 질투나 비슷할 것이다.

위륜 정도의 장군이라면 분명 본처가 있고 첩실도 여러 명이 될 것이니 한 사내의 총애를 독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첩들의 싸움은 어떠할 것이며 본처와의 신경전은 또 어떠하겠는가.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남을 해치면서까지 제 욕심을 채우고 싶지는 않다.

“연민이라고 해 둡시다.”

위륜이 대답하는 순간, 연우의 안에서 실망 어린 마음이 일어났다.

‘그럼 그렇지…. 나 따위가 무슨…. 불쌍해서 그러는 것을 좋아해서 그러는 것으로 착각을 하다니….’

“약이 쓰면 이것을 드시오.”

위륜이 내민 것은 사탕이었다.

사탕은 황궁 안에서도 후궁들이나 먹을 수 있다.

물론 황궁 밖에서는 귀족들의 간식이겠지만 연우 같은 세답방 궁녀는 먹어 볼 일이 없다.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사탕을 연우가 빤히 쳐다봤다.

“드시오.”

재촉하는 목소리에 입안에 사탕을 넣었지만 단맛을 알 수가 없다.

분명 달콤하고 맛있어야 하는데 단맛을 느낄 수가 없다.

위륜이 조금 전에 한 말 때문이다.

연민.

그 단어가 가슴에 박혀서 약의 쓴맛도, 사탕의 단맛도 느낄 수가 없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불쌍해 보였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얼마나 불쌍하게 보였으면 ‘연민’을 느꼈을까.

하긴, 대단한 장군이 보기에 자신은 초라하고 불쌍해 보일 것이다.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옥사 안에서 얼어 죽어 가고 있었으니 그보다 더 불쌍한 처지가 또 있을까.

닿지 않는 거리.

위륜이라는 이 사내가 서 있는 곳과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절대로 닿지 않는 거리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다른 삶이 주어졌고 그건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마음이 닿을 수 없는 거리고, 감히 닿아서도 안 되는 거리다.

“감사합니다….”

자신은 그저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은혜에 감지덕지하며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악비가, 틀렸다.

***

[사내가 어찌 그리 무심해?]

난데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막 잠들려던 위륜이 번쩍 눈을 떴다.

침상에서 자고 있는 연우가 제게 말을 건 것인가 싶어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지금 연우는 침상 위에서, 그리고 위륜은 침상 아래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중이다.

이 침전 안에 다른 사람은 없다.

[여인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런 것을 물을 때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건데 그걸 모르다니. 장군도 어지간히 목석이네요.]

목소리는 제 머릿속에서 울렸다.

“악비 마마?”

믿을 수 없지만 이건 악비의 목소리다.

[저 애가 잠들어 있으니 내가 하는 말이지만, 나는 원래 이런 일에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남의 애정사 따위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장군은 너무 목석이라 보고 있는 내가 다 열이 받아서 하는 말이에요. 장군, 정말 모르겠어요? 저 아이가 장군을 좋아하고 있는 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위륜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연우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그럴 리가 있나.

그녀는 그저 겁먹은 궁녀일 뿐이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녀의 순결을 빼앗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악비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여인이 사내에게 왜 잘해 주냐고 묻는 것은 나한테 마음이 있으신가요, 이 뜻인데 장군은 귀가 처먹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거예요. 싸움만 잘하면 뭘 해. 여인의 마음을 잘 헤아려야지. 그러니까 지금까지 동정이었지.]

악비는 계속 빈정거렸다.

[여인에게 있어서 첫 사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사내인 장군이 알기나 할까 몰라요. 나는 원래 몸을 파는 기생 출신이긴 했지만 그런 내게도 첫 사내에 대한 연정이라는 것이 있는데 하물며 사내라고는 눈도 마주쳐 본 적이 없는 이런 순진한 아이는 오죽하겠어요? 첫 사내를 알았는데 그 마음이 어디 가겠냐고요. 장군 얼굴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생각만 해도 뺨이 붉어지는 마음을 장군이 어찌 알겠어요. 모르니까 연민 같은 헛소리나 지껄이지.]

“마마.”

왜 악비는 제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선의? 그런 것이 악비에게 있을 리가 없다.

이건 자신도 곤란하게 만들고 이 궁녀도 곤란하게 만들려는 악비의 못된 놀이가 분명하다.

악비가 누군가.

폭군보다 더한 악행으로 황궁 안에 소문이 자자했던 여인이다.

잔인하고 오만하며 남의 눈에 흐르는 피눈물을 보며 즐기며 웃었다는 악비의 말을 누가 순진하게 믿겠는가.

물론 악비가 ‘그릇을 바꾸면 가만있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은 덕분에 연우가 다시 이 폐궁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그것이 순전히 연우나 자신을 위해 그런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연우의 몸이 필요해서 그런 것에 불과할 것이다.

악비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 꼬임에 넘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더는 듣지 않겠습니다.”

[장군. 귀혼이 끝나면 이 불쌍한 아이가 어찌 될지 아십니까?]

“출궁하겠지요.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순진하기도 하셔라. 그때 왕야의 표정을 못 보셨나요? 왕야가 정말 이 아이를 출궁시킬까요? 그럴 리가요. 아마 귀혼이 끝나고 내가 성불하게 되면 왕야는 아마 이 아이를 출궁시키는 척만 할 거에요. 황궁 밖으로는 자객을 보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겠죠.]

“폐하께서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폐하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 표정은 함께 봤잖아요. 아무리 이 아이가 죄가 없다고 판명이 났다고는 하나, 사람의 마음에 맺힌 분은 그리 쉽게 풀리는 법이 아니지요. 무엇보다 왕야의 곁에는 영비가 있어요. 영비 그 간악한 것이 왕야의 귀에 저 아이를 죽이라고 속삭이면 왕야가 어찌하겠어요.]

“나를 흔들지 마십시오, 마마.”

황제가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영비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장군. 이 아이를 지켜 줄 수 있는 건 장군밖에 없습니다. 장군이 이 아이를 첩으로 들이겠다고 하면 왕야도 영비도 어찌하겠어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첩?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걸까.

자신은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았다.

정실부인도 들이지 않았는데 첩이라고?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게다가 혼인은 인륜지대사다.

그런 것을 양친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아이는 장군을 흠모하고 있고, 장군도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기고 있으니 장군께서 이 아이를 거둬들이는 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좋지 않을까요? 책임을 져야지요. 여인의 순결을 가진 책임을.]

책임.

그 단어에 위륜의 가슴이 턱 막혔다.

물론 책임은 지고 싶다.

하지만 의무감으로 지는 책임이 한 여인을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의무뿐인 책임보다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내를 만나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열두 살에 생각시가 되어 궁에 들어와 바깥세상 물정은 전혀 모르는 아이인데… 궁 밖에 나가서 혼자 어찌 살지….]

“가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가족? 이 아이의 가족은 모두 죽었어요.]

그 말에 위륜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죽어? 가족들이?

[그런데 이 아이는 그 사실도 모르고 있지요. 이미 오래전에 전염병이 돌 때 이 아이의 양친과 두 동생은 모두 죽었어요. 이 아이는 출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지만 기다리는 것은 텅 빈 집과 가족들의 무덤뿐이겠지요. 아이, 불쌍해라… 가엾어서 어찌할꼬….]

그럴 수 있다.

한 번 궁에 들어오면 바깥세상 소식은 전해 듣기 힘드니 이 궁녀의 가족들이 모두 죽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궁녀는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이라면 악비의 말처럼 얼마나 가여운가.

[아직 시간이 있으니 더 고민해 보세요, 장군. 다만 그것만 기억해 주세요. 이 아이가 장군을 몹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위륜의 머릿속에서 악비의 목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조용한 침전 안에는 연우의 고른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한 번 잠이 달아나 버린 후라 더는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을 것이 뻔해서 위륜이 잠들어 있는 연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장군 얼굴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생각만 해도 뺨이 붉어지는 마음을 장군이 어찌 알겠어요.’

뻔한 거짓말이다.

뻔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계속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뭘까.

원혼의 말이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지.’

위륜이 악비의 말을 믿지 않는 이유는 많다.

일단 그 말을 한 것이 악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 여인이 자신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

고작 며칠을 봤다고,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저를 좋아하겠는가.

세 번째로, 자신처럼 무뚝뚝한 사내를 왜 좋아하겠는가.

이틀의 귀혼 의식 중에 자신은 이 여인에게 말 한 마디 건 적이 없다.

귀혼 의식이 끝나면 이 여인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침전을 나서서 개인적인 시간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왜, 무슨 이유로 이 여인이 제게 반하겠는가.

그럴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옥에서 구해 준 것이 고마워서? 그런 이유로 사랑에 빠지겠는가.

‘그래서야 아가씨란 아가씨들은 전부 십 리 밖으로 도망칠 겁니다.’

저를 따르던 부하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자신처럼 무뚝뚝하게 굴면 여인들이 무서워서 죄다 도망칠 거라는 말이었다.

그 말이 맞다.

전혀 다정하지 못하고 도리어 무섭게 인상만 쓰는 자신을 이 어리고 겁 많은 궁녀가 왜 좋아하겠는가.

이 모든 이유를 따져보면 이 여인이 저를 좋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제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그 말을 할 때 이 여인의 표정이 어떠했더라.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연민이오.’

그렇게 대답했을 때 이 여인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가족은 다 죽었어요.’

악비의 그 말이 계속 신경 쓰인다.

정말 이 여인의 가족들이 죽었다면, 이 여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악비의 말이 맞는지 확인부터 하는 것이 낫겠지. 일단 이 여인의 고향이 어딘지 알아낸 다음에 부하 중 한 명을 시켜 그곳에 다녀오게 하면 악비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생각이 결정되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소매 안에서 뭔가가 흔들렸다.

꺼내 보자 작은 주머니가 나왔다.

사탕이 든 주머니다.

위륜은 단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도 일부러 부하들을 시켜 사탕을 사 오게 만들었다.

황궁의 소주방에서 만드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영비를 신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주방에 영비의 입김이 닿아 있으면 이 사탕에 무슨 독을 넣어도 알 길이 없다.

악비의 말 중에서 한 가지는 위륜도 동감한다.

영비가 이 여인을 해치려 들 것이라는 사실 하나는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이곳에서 숙식하며 곁을 지키고 있다.

다른 이들에게 맡기지 않고 이 여인의 수발을 제가 드는 이유가 그것이다.

안심이 되지 않아서.

자신이 곁에 있어 주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화를 입을지 몰라서.

너무 약하고 스스로를 지킬 힘이 전혀 없고, 그렇게 위태로워 보여서 가만히 둘 수가 없다.

‘이렇게 여린데 어떻게 이 무서운 황궁에 피었을까….’

잡초는 억센 법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가녀리고 가녀리다.

바람만 불어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것처럼 그렇게 가녀리다.

가녀린 꽃은 황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데 참 기특하게도 버텨 왔다. 그 무서웠던 시절에도 참 기특하게 버텨 왔다.

위륜이 손을 들어 잠든 연우의 머리를 살며시 쓸어내렸다.

그러자 잠든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평온해졌다.

자는 얼굴이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이는 건 눈의 착각일까.

하지만 꼭 그렇게 보였다.

제가 머리를 쓸어 줘서 기쁜 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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