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우.’
겨우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하지만 이름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금 폐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건 황명이다.
귀혼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무당이 고르는 것이고, 그 대상을 바꾸는 것 역시 자신의 영역은 아니다.
그건 오롯이 황제의 영역이다.
어떤 이를 그릇으로 삼을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무당이고, 그걸 허락하는 것은 황제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자신의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명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연우라는 궁녀가 아니라고 해도, 저 서희라는 이름의 궁녀가 있는 폐궁의 침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맞는 행동이다.
그것이 맞는 행동이지만, 지금 위륜은 맞는 것보다는 옳은 행동을 하고 싶다.
옳은 행동은 옥에 갇혔다는 연우라는 궁녀를 구하는 것이다.
그녀가 영비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악비의 원혼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만약 후자라면 그녀는 죄가 없다.
그녀에게 악비의 원혼을 씌게 만든 것은 황제와 무당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악비의 원혼이 씌어 영비를 해치려 했다고 그녀에게 죄를 묻다니.
그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녀에게 죄를 묻기 전에 악비의 원혼에게 죄를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악비겠지.’
위륜의 심증으로는 그 사건은 분명 악비 원혼의 짓이다.
악비가 무슨 심통을 부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이상 자신도 그녀의 장단에 놀아나 줄 마음은 조금도 없다.
어차피 귀혼은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
귀혼을 두 번 치르고 오늘 아침 위륜은 코피를 쏟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코피라는 것을 흘렸다.
사흘 밤낮을 잠도 자지 않고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할 때에도 흘리지 않았던 코피를 이틀째 아침에 흘릴 정도로 귀혼이라는 것은 엄청난 체력을 필요로 한다.
어지간한 사내라면 하룻밤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이 귀혼을 치를 수 있는 사람은, 악비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황제가 무리를 해서 자신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다른 말로, 자신이 거부하면 이 귀혼은 유지될 수가 없다는 뜻.
코피까지 흘렸으니 이제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이 더 이상의 귀혼을 거부해 버리면 어떨까. 제 목이라도 치려 들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위륜은 살아오면서 권력을 이용해서 뭔가를 이룬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자신의 ‘우세한 지위’를 이용해서 연우를 구해 볼 생각이다.
연우는 지금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다.
그걸 모르는 척한다는 것은 사내로서, 인간으로서 실격이다.
이 일에 눈 감고 모르는 척하면 앞으로 어떻게 진실을 말하고 정당한 것을 말하겠는가.
위륜이 옥사가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도중에 병사들이 막아서긴 했지만 그를 끝내 막지는 못했다.
그는 공신 중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고 무엇보다 현무군의 수장이다.
황궁을 수비하는 금위대의 대장 정도면 막아설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이상 그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위륜이 연우가 갇힌 옥에 이르렀을 때 그의 어깨와 머리에는 눈이 하얗게 쌓인 후였다.
머리와 어깨의 눈을 걷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위륜이 옥사 한 곳 한 곳을 살폈다.
황궁의 옥사에는 주로 죄를 지은 환관들과 궁녀들이 갇힌다.
나라에 죄를 지은 귀족들과 대신들을 위한 감옥은 도성 북문 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고 일반 백성들을 가두는 옥사 역시 서문 쪽에 따로 있다.
위륜이 천천히 눈으로 옥사 안을 살폈다.
겨울이라 옥사는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벽도 없이 그저 나무 창살만 존재하는 이 옥사 안에서 겨울의 밤을 견디는 것은 가혹한 처사다. 차라리 얼어 죽으라고 말하는 것이 더 빠를 터.
그런데 이곳에 연우라는 그 궁녀가 갇혀 있는 것이다.
마침내 위륜이 연우를 발견했다.
그녀는 얼어붙은 옥사 안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죽어 가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쩐다….”
옥사를 부수는 것은 죄다.
죄인을 함부로 꺼내는 것 역시 죄다.
“역시 그 방법 밖에는….”
결정을 내린 위륜이 두 손으로 옥사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자물쇠를 단번에 부쉈다.
쇠로 만들어진 자물쇠인데도 그의 악력에 형편없이 부서졌다.
옥문을 열고 위륜이 들어섰음에도 연우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꼭 죽은 것만 같다.
“살아 있나….”
위륜이 연우의 코 바로 아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다행히 미약하게 숨은 붙어 있다.
‘몸이 얼음장이야.’
지금 연우가 입고 있는 옷은 아예 얼어붙었다.
‘물에 빠진 것은 영비 마마라고 들었는데 왜 연우 낭자의 옷이 젖은 것일까?’
이상한 일이지만 아직 위륜은 그 일의 자초지종을 모른다.
영비와 함께 연못에 빠졌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이라면 너무하지 않은가.
참형 이전에 밤새 얼어 죽으라고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물에 빠졌던 여자를, 젖은 옷을 입힌 채로 이 얼어붙은 옥사 안에 방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몸은 얼음장인데 이마는 뜨겁군.’
위륜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겉옷만 벗은 것이 아니라 안쪽의 상의까지 벗어 차가운 바닥 위에 깔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연우를 상의 위에 눕히고 그 축 늘어진 몸 위에 겉옷을 덮어 줬다.
이것으로 추위는 조금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오래 끌면 안 되겠어.’
위륜이 옥사 밖을 힐끗거렸다.
지금쯤이면 황제의 귀에 자신의 행동이 들어갔을 것이다.
옥을 지키던 병사들이 곧장 금위대에 이 사실을 알렸을 것이고, 금위대는 황제에게 고했을 것이니 이제 곧 황제가 이곳으로 온다.
위륜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아 그가 연우의 곁에 앉은 지 반식경도 되지 않아 황제 조영과 영비가 함께 옥사로 들이닥쳤다.
“당장 나오거라.”
황제는 이미 화가 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비를 총애하는 황제로서는 영비를 죽이려고 한 연우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위륜이 그런 연우가 갇힌 옥사 안에 함께 앉아 있으니 황제의 화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당장 나오지 못할까.”
“그럴 수 없사옵니다.”
황제의 명을 어기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신이 지금 여기서 나가면 이 궁녀는 죽는다.
“지금 그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부당하게 죄를 뒤집어쓴 여인을 보호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당하다니. 그대가 감싸고 있는 그 궁녀가 영비를 죽이려고 연못에 빠뜨린 것을 목격한 이가 한 두 명이 아니다.”
“악비의 원혼이 저지른 짓일 수도 있잖습니까.”
“악비의 원혼이 그랬던 아니던 간에 영비를 떠민 것은 저 궁녀가 맞지 않더냐. 그러니 죄를 지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원혼에 씌어 한 일을 어찌 이 궁녀가 한 짓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원혼에 씌면 육체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영비 마마께서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아닙니까, 영비 마마? 마마께서 악비의 원혼에 씌어 우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을 때, 그때 한순간이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몸을 움직이실 수 있으셨습니까?”
“그, 그건….”
황제의 곁에 서 있던 영비가 주춤거렸다.
지금 영비는 몹시 당황한 상태다.
위륜이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북벽이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그곳에 아슬아슬하게 계셨던 것은 마마 스스로의 의지로 몸을 움직이실 수 없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건 맞지만….”
“그렇다면 이 궁녀 역시 악비의 원혼에 씌어 있어서 스스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의 죄를 이 궁녀에게 묻는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닙니까?”
“원혼이던 뭐던 간에….”
영비가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위륜의 말이 더 빨랐다.
“이 궁녀의 몸에 악비의 원혼이 씐 것은 이 궁녀가 원해서가 아닙니다. 황실을 위해 원혼의 영매가 되기로 결정을 내린 갸륵한 충심에 상을 내리지 못할지언정 어찌하여 죄를 물으십니까? 죄를 물으신다면 악비의 원혼에게 죄를 물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신은 폐하께서 이 가혹한 처벌을 거두시고, 악비의 원혼에게 죄를 묻기 전까지는 귀혼을 거부하겠습니다.”
위륜의 목소리는 완강했다.
그의 성품이 얼마나 강직한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 성품의 위륜이라 그가 한 번 옳다 믿고 주장하는 것을 내칠 리 없었다. 위륜이 포기할 리 없다는 사실을 황제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륜의 말은 틀린 곳이 없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연우를 풀어줄 수 없는 것은 옳고 그른 것과는 별개로 영비를 밀어 넘어뜨렸다는 분 때문이다.
“폐하. 이 궁녀를 풀어주시기 전에는 소신도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습니다.”
위륜이 아니면 이 귀혼을 치를 사람이 없다.
무엇보다 위륜은 현무군의 상장군이다.
그런 그를 옥사 안에 가둬 놓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 비난의 화살은 전부 자신에게 쏟아질 터.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황제는 잘 알았다.
반정으로 황위에 올랐지만 그 반정을 주도한 것은 위륜이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위륜의 현무군이다.
만약 현무군에서 그들의 수장을 가둔 처사에 반발해서 황궁 안으로 군사라도 들인다면 자신이 이복형을 몰아낸 것처럼 위륜이 자신을 몰아내지 말라는 법도 없다.
“폐하. 저년을 용서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곁에서 영비가 속삭였지만 조영의 심정은 지금 갈팡질팡 갈등 중이다.
그때였다.
“폐하!”
금위대의 대장이 다급하게 뛰어오는 것을 보는 순간 조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현무군이 벌써?’
벌써 현무군이 이 소식을 알게 되어 황궁으로 몰려왔나 싶어, 가슴이 싸늘하게 내려앉았을 때 금위대 대장이 뜻밖의 보고를 올렸다.
“폐궁에 귀혼을 위해 들여보낸 궁녀가 미쳐서 날뛰고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
폐궁은 난리가 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폐궁 밖이 난리가 났다.
아닌 밤중에 진짜 난리 중의 난리였다.
폐궁에서 악비의 영매가 되어 귀혼을 해야 하는 궁녀가 벌거벗은 채로 눈밭을 뛰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눈이 내리는 황궁 안을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것은 서희였다.
그 모습이 너무 기괴한 나머지 다른 궁녀들도, 환관들도, 병사들조차 곁에 다가가지 못했다.
“어째서 저런 것이냐?!”
그 모습을 본 황제가 놀라 소리를 쳤지만 영문을 아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때 머리를 산발한 서희가 황제와 영비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흰자위 밖에 보이지 않는 그 눈은 섬뜩했다.
“꺄아아악!”
갑자기 서희가 제 쪽을 향해 달려오자 놀란 영비가 비명을 질렀다.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무서운 속도로 뛰어온 서희가 영비에게 달려들었다.
“이년! 이 못된 년! 이년!”
영비의 몸에 올라탄 서희가 다짜고짜 영비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꺄악! 아아악! 폐하! 폐하! 살려 주세요! 아악!”
비명을 지르는 영비와 그 위에 벌거벗고 올라타 마구잡이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사나운 서희를 본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서희의 힘이 얼마나 센지 병사들 네 명이 달라붙어도 그녀를 영비에게서 뜯어내지 못했다.
“당장 떼어내지 못하겠느냐! 당장 떼어내라!”
“아아악!”
그러나 서희는 마치 괴물처럼 무시무시했고 결국에는 병사들이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년! 네년이 폐하의 총애를 차지하려고 나를 모함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년! 이 못된 년! 네년 배 속에 든 폐하의 씨가 태어나게 할 줄 아느냐! 나도 못 가졌던 폐하의 자식을 네가 낳게 할 성싶으냐!”
그때 갑자기 서희가 조영을 쳐다봤다.
그 섬뜩한 눈에 조영이 뒷걸음질 쳤다.
“너는 이년 배 속에 든 것이 네 자식 같지?”
분명히 그 얼굴은 서희인데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틀림없이 죽은 악비의 목소리다.
조영은 제가 알고 있는 악비의 목소리가 서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아… 아아….”
두려움에 질린 조영과 서희의 아래에 깔려 비명을 지르며 우는 영비, 겁을 먹고 다가서지 못하는 병사들까지. 환관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한 사내가 그들을 헤치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 사내를 본 순간 서희의 눈자위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여전히 악비의 것이었다.
“장군.”
“당장 그 궁녀의 몸에서 나오시오.”
위륜이 진중한 표정으로 엄하게 말했다.
그의 두 팔 안에는 정신을 잃은 연우가 안겨 있었다.
제 겉옷으로 감싼 연우를 품에 안은 채로 위륜이 악비가 씐 서희를 노려봤다.
“황궁 안에서 어찌 이렇게 패악질을 저지른단 말이오.”
“이것들이 나를 업신여겨 이리 작당을 하는데 내가 어찌 가만 있는단 말입니까.”
“이쯤하면 되셨으니 그만하시오.”
“장군이 그리하라고 하면 그리해야지요. 나야 지금은 장군이 필요하니 말입니다.”
제법 고분고분 대답한 악비가 황제 조영과 영비를 번갈아 노려봤다.
“한 번만 더 허락 없이 내 그릇을 바꾸면 그때에는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다.”
서슬 퍼렇게 위협을 한 다음 서희의 몸이 스르륵 쓰러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드디어 서희의 몸에서 악비의 원혼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밤중의 소동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땅을 치며 서럽게 우는 영비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황제 조영, 그리고 덩달아 아무런 말도 못하는 궁인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