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장. 누명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니?”
아침부터 서희가 졸라대지 않았으면 연우는 폐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 봤자 볼 것도 없다.
이 폐궁은 악비가 죽은 후 아무도 돌보지 않은 탓에 잡초만 무성하게 자랐고 지금은 그 무성하게 자랐던 잡초 위에 하얀 눈이 쌓여 있을 뿐이다.
눈이 내리는 풍경은 원래 운치가 있는 법이지만 이 폐궁에서 보는 겨울 풍경은 그저 삭막하다.
“나와 봤자 아무것도 없는걸….”
연우가 털이 수북한 옷깃을 여몄다.
지금 연우가 입고 있는 옷은 세답방 궁녀는 감히 입지도 못하는 귀한 비단에 여우털로 만든 겉옷이다.
총애를 받는 후궁 정도 되어야 입을 수 있는 값비싼 겉옷을 연우가 입을 수 있는 것은 일명 ‘황제의 배려’ 때문이다.
털신을 신고 털 가죽옷을 입고 매일 진수성찬이 차려진 수랏상을 받고 낮에는 향유를 띄운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할 수 있다.
감히 궁녀가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니다.
아마 이 귀혼의 의식이 끝날 때까지 이런 화려한 호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이런 것이 조금도 달갑지 않다.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기름진 산해진미를 먹어도 마음은 이 버려진 폐궁처럼 쓸쓸하고 삭막할 뿐이다.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이미 삭막한 뜰을 하얗게 물들여 놓았다.
오랫동안 온기가 없었던 지붕에도 눈은 수북하게 쌓였다.
악비가 총애를 받을 무렵에는 이 쓸쓸한 폐궁에도 사람들이 넘쳐났을 것이다.
온갖 화려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을 이 폐궁은 이제 그저 버려진 공간일 뿐이다.
이 귀혼마저 끝나고 나면 다시 이 폐궁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악비는 잊히겠지.
‘나쁜 사람이었잖아….’
악비는 백 번 죽어 마땅한 악녀였다.
악비가 살아생전에 행한 악행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도 자꾸만 죽은 악비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는 건 자신의 안에 악비의 원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까.
비록 귀혼을 할 때에만 제 몸에 깃드는 원혼이지만 그 영향을 받아서 자꾸만 악비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곳이라도 좋으니 여기에서 호강하며 살고 싶다.”
연우의 곁에서 서희가 부러움을 잔뜩 담아 중얼거렸다.
제가 입고 있는 옷과 연우가 입고 있는 옷을 번갈아 보던 서희가 살며시 여우털로 만든 깃을 건드려 봤다.
“출궁한 다음에도 너는 잘 살겠지? 폐하께서 재물을 두둑하게 주실 테니까.”
“난 잘 몰라.”
“모르긴. 아마 평생 이런 옷을 입고 살 수 있을 거야.”
서희의 말이 아마도 맞을 것이다.
황제가 지금 제게 해 주는 것을 보면 출궁할 때에도 섭섭하지 않게 재물을 챙겨 줄 것이 분명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게 너무 좋다거나 기대가 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출궁해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냥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책임질 수 있는 재물까지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렜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마음이 무겁다.
이 쓸쓸함이 마음에 박히고 제게 일어났던 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위륜 장군도 아마 잊을 수는 없을 거다.
‘장군님은….’
벌써 두 번의 밤을 보냈다.
어제도 첫날처럼 그는 악비가 아닌 자신에게는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자신은 그가 돌아갈 때까지 지쳐 잠든 시늉을 했고 그는 말없이 일어나 자신의 곁에서 떠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귀혼이 끝나기 전에 그와 한 마디라도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악비가 아닌 궁녀 연우로서 그에게 말을 걸어 볼 기회가 있을까.
고생하셨습니다, 혹은 감사했습니다, 아니면 다 잊으세요, 그런 말이라도 할 기회가 주어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는 고목의 가지에 잠시 바람이 앉았다 간다고 해서 나무가 그 바람을 기억하는 건 아니다.
자신은 위륜에게 있어서 그저 의미 없이 앉았다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다.
바람은 나무를 기억해도 나무는 바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 이 마음은 아마 꽤 오래도록 쓸쓸하겠지.
악비가 저를 불쌍히 여겨 저승으로 떠나기 전에 제 기억을 지워 주지 않는 이상 말이다.
‘소원을 이제라도 말해 볼까….’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생전에 악비는 제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었다.
만약 그 소원을 지금 빌면 어떻게 되는 걸까. 들어줄까?
만에 하나 정말 소원을 들어준다면 ‘귀혼의 기억을 지워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원혼이니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저기 봐, 연우야. 저 쪽에 연못이 있어.”
연우의 손을 잡아끌고 서희가 데려간 곳에는 정말 연못이 있었다.
날이 추워 얼어붙은 연못의 위에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그거 아니? 예전에 악비가 살아 있을 때 이 연못에 사람을 빠뜨려 죽였대.”
“정말이니?”
연우는 처음 듣는 말이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폭군의 눈에 든 궁녀들의 손발을 묶어서 이 연못에 빠뜨렸다고 들었어. 이 연못은 겉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어서 빠지면 나올 수가 없대. 그렇게 죽은 사람이 서른 명이 넘는대.”
“그러면 이 연못에 시체가….”
하얀 눈이 덮인 얼어붙은 연못 아래에 수십 구의 궁녀들 시체가 있다는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추워서가 아니라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어 연우가 겉옷을 더 여밀 때였다.
“연우야. 영비 마마께서….”
서희가 연우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제야 연우도 폐궁으로 들어서는 영비를 볼 수 있었다.
영비는 화려하게 아름다운 여인이다.
예전에는 영비도 연우나 서희 같은 궁녀였지만 작금의 황제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은 후 후궁이 되고 잉태까지 했다.
궁녀들 사이에는 영비가 낳은 아이가 아들이면 그녀가 나중에 태후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연우도 그 소문은 들어 알고 있다.
자신이 이 귀혼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한 것이 바로 영비이기도 했다.
“영비 마마를 뵈옵니다.”
연우와 서희가 얼른 그녀들 앞으로 다가온 영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렸다.
“네가 연우라는 궁녀이냐?”
고개를 조아린 연우의 머리 위에서 꿀을 바른 것처럼 고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러하옵니다.”
“머리를 들어라. 내가 네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죄인처럼 머리를 숙이고 있느냐.”
“하오나 마마….”
“머리를 들라는데도.”
영비의 말에 연우가 겨우 얼굴을 들었다.
뽀얗게 분 화장을 한 아름다운 영비의 얼굴이 연우를 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허리를 숙인 영비가 직접 손을 내밀어 연우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비의 고운 손에 연우가 감탄했다.
연우는 세답방의 궁녀다.
하는 일은 늘 빨래를 하는 일이다.
궁 안에서 모아진 빨래는 산더미처럼 많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리를 제대로 펴 볼 틈도 없다. 그렇게 빨래를 하고 말리고 다림질을 하기를 몇 년을 해 왔다.
겨울에는 차갑게 얼어붙은 물에 빨래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연우의 손은 거칠고 버석버석하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 제 손을 잡은 영비의 손은 꿀을 바른 것처럼 고왔다.
영비와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다른지 손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나와 폐하를 위해 희생하는 네 공로를 치하하기 위함이야.”
“소인은 그저….”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연우는 한 번도 중요한 사람이 되어 본 적이 없다.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연우는 단 한 번도 중요한 사람이, 고마운 사람이 되어 본 적이 없다.
있어도 없어도 되는, 때로는 눈칫밥을 먹는 존재에 불과했다.
“네게 얼마나 고마운지 너를 모를 것이야.”
영비의 말에 연우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울면 안 되는데 감정이 울컥거려 눈시울이 금방 붉게 물들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하거라.”
“그런 것은 없습니다.”
“뭐든지 말하래도.”
영비가 자상하게 웃었다.
“이 귀혼이 끝나고 출궁하고 나면 사가로 갈 생각이냐?”
“그러하옵니다.”
“사가의 형편은 넉넉하고?”
“그렇지 못하옵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한 채 지어 주마. 넓은 집과 많은 하인들이면 네게 충분한 은혜 갚기가 되겠지.”
말만 들어도 황송하다.
넓은 집에 하인들이라니. 그런 것은 꿈도 꿔 보지 않았다.
기껏해야 예전에 살고 있던 낡은 흙집을 벗어나 제대로 지붕을 가진 집에서 끼니 걱정, 겨울에 땔감 걱정하지 않고 살 정도의 재물을 챙겨 주면 감지덕지일 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것만 하더라도 모자라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절반 나누어 가족들에게 반, 자신이 반,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가족들과 떨어져서 혼자 살아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영비의 말에 연우는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과하게 받아도 되는 걸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고작해야 영비의 원혼에게 몸을 내주고 대장군 위륜과 밤을 보내는 것이 전부인데 자신이 그렇게 큰 대가를 받아도 되는 것일까.
과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살아오며 욕심을 부린 적도 없고 부릴 생각도 없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것이 하나 있구나.”
“무엇이든지 하문하시옵소서.”
“악비의 원혼이 네게 말을 걸기도 하느냐?”
“네?”
“악비의 원혼이 네 몸에 깃들 때 네게 말을 걸고 서로 대화도 하느냐고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연우가 거짓말을 했다.
악비가 제게 말을 걸긴 하지만 그런 것을 말하고 싶진 않다.
악비가 제게 하는 말이라는 것이 전부 음란한 말뿐이기 때문이다.
“그래? 아쉽구나. 악비가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고 싶었는데. 실은 나는 소주방의 궁녀였단다. 알고 있지?”
“네, 마마….”
영비는 소주방의 궁녀였다.
같은 궁녀이긴 하지만 소주방이나 생과방은 세답방보다는 처지가 낫다.
“그래서 그런지 궁녀들을 보면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잘해 주고 싶단다. 그러니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지 부탁하렴.”
“네, 마마.”
“그래.”
영비가 웃는 소리가 연우의 귀를 스쳤다.
귓가에 부는 바람인줄 알았는데 영비의 웃는 소리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연우의 눈앞에서 화려한 옷자락이 흔들렸다.
“마마-!”
고개를 든 연우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직전까지 저와 함께 서 있던 영비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연못에 빠졌기 때문이다.
“마마-!”
하얀 눈이 덮인 얼어붙은 연못이 쩌저적 깨지며 영비가 그 깨진 얼음 속으로 풍덩 빠졌다.
“마마!”
“마마!”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영비의 궁녀들이 혼비백산해서 달려와 저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누가 병사들을 불러와!”
소리를 지르는 궁녀들 중 누구도 얼음 연못으로 뛰어들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 연못이 깊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연못 안에 시체가 잔뜩 있다는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겁이 나서 감히 연못 안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있는 사이, 그 연못 안으로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