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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륜 장군님?”
세답방에서 함께 일하는 궁녀가 그 이름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신 중에 으뜸인 분이시잖아.”
“나는 잘 몰라.”
연우가 악비의 폐궁에서 머무는 동안 연우의 수발을 들어 주는 궁녀로 세답방의 궁녀인 서희가 불려왔다.
며칠을 이곳에 머물러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연우의 불안을 최소한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가까운 궁녀를 불러온 것이다.
이것은 황제의 친절한 배려라는 것을 상궁이 두 번이나 되짚어 주었다.
폐하께서 이렇게 네게 신경을 써 주신다, 라고.
“나도 직접 본 적은 없는데 폐하께서 반정에 성공하실 수 있게 앞장선 공신이라고 들었어.”
“그래?”
“그래서, 어땠어?”
“뭐가?”
“어젯밤 말이야.”
“나, 나, 나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당황한 연우가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감출 길이 없다.
“기억이 안 나는 얼굴이 아닌데?”
“정말이야. 기억이 전혀 안 나.”
“너 거짓말 못하잖아. 어디서 이게 못하는 거짓말을 하려고. 전부 기억하지? 어땠어? 응? 어땠어?”
“그, 그런 걸 물으면….”
연우가 새빨개진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동무 서희나 연우 자신이나 세답방의 궁녀들은 평생 사내와 관계를 가질 일이 없다.
황궁 안에서 궁녀가 사내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황제의 승은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가 여색을 탐한다고 해도 황궁 안에 있는 수백 명의 궁녀들에게 그 기회가 전부 돌아갈 리가 없다.
궁녀가 아니라 하더라도 귀족의 여식들과 민간에서 아름답다고 소문난 여인들이 황제의 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녀들에게 그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황제를 지척에서 모시고 자주 얼굴을 비출 수 있는 대전 궁녀들에게나 그 기회가 한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빨래나 하는 세답방 궁녀들이라니? 그들이 승은을 입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세답방이나 그 비슷한 곳에서 일하는 궁녀들은 평생 황궁에서 사내를 알지 못하고 늙어 간다.
그래서 그중에는 같은 궁녀들끼리 연인 삼아 서로의 외로움을 나누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보통은 나이가 지긋한 궁녀들 사이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사내의 음경이 정말 그렇게 크다니?”
서희는 궁금한 것이 많다.
있을 수 없는 기회를 연우가 잡은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일등 공신인 위륜 장군이다.
“모, 모른다니까.”
“사내의 음경이 시커멓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게 시커멓니. 말가죽처럼 시커멓고 두껍다고 하던데 말이야.”
“너, 너는 어디서 그런 걸 그렇게 들었니?”
“여기저기서 들은 말은 많아. 그런데 정말 그런 건지 궁금해서.”
“나, 나도 보진 못했어….”
“거짓말. 네 얼굴에는 봤다고 쓰여 있는데?”
“….”
서희의 말이 맞다.
연우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다.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전부 드러난다.
위륜 장군의 음경은 어젯밤에 똑똑하게 봤다.
제 손으로 쥐고 제 입으로 물고 빨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어떤 기분이었어?”
“모른다니까….”
“불덩이에 뛰어드는 기분이라고 그러던데, 정말이니?”
“나는 잘 모르겠어.”
“오늘 밤에도 또 할 거잖아.”
“….”
“그런데 악비 마마의 원혼이 네 안에 정말 들어오긴 하는 거니?”
“응?”
“그 원혼 말이야. 원혼이 정말 네 몸 안으로 들어오는 거야? 그때 기분이 어때? 악비 마마의 원혼이 네게 말을 걸기도 하고 그래?”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정말 아무 기억도 없어. 전혀 기억이 안 나. 그건 내가 아닌걸.”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이야. 그래서 하나도 기억 안 나….”
“흐음….”
“너무 아깝다…그걸 하나도 기억을 못 하다니….”
서희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연우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 일이 끝나면 너는 출궁하게 되잖아.”
“응….”
“그러면 위륜 장군께서 너를 거둬 주시지 않을까?”
“장군님께서? 설마, 장군님께서 왜 그런 일을 하시겠어.”
“그러면 책임을 안 지실까? 첩으로라도 데려가지 않으시겠어?”
“그러진 않으실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장군 정도 되시는 분께서 왜 나 같은 걸 데려가시겠어.”
“했으니까. 둘이 같이 했잖아.”
“이건 그런 게 아니니까….”
“잘 좀 해 봐. 재물을 가지고 출궁해 봤자 너한테 좋은 게 뭐가 있겠어. 재물은 너희 가족들이 전부 가로챌 거고, 너는 궁을 나가면 가족들을 또 돌봐야 하잖아.”
“재물을 절반으로 나눠서 가족들에게 절반 주고 내가 절반 가질까 생각 중이야. 얼마나 받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집과 땅을 살 재물은 주시겠지.”
“그 정도면 충분할 거야. 집과 땅을 사고 나서 그걸로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좋은 사람.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은 연우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비밀로 한다고 하지만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스스로가 알고 있다.
자신이 이미 사내를 아는 몸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런 몸으로 처녀인 것처럼 다른 사내에게 시집을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을 해야 할 것이다.
“아깝다… 장군이라는데…. 첩만 되어도 좋을 텐데… 너무 아깝다….”
서희가 갑자기 눈빛을 빛냈다.
“있잖아, 내가 한번 몰래 언질을 드려 볼까?”
“뭐?”
“내가 장군님께 네 이름이랑 이 일이 끝나면 네가 출궁한다는 것을 알려드릴까?”
“아니야, 됐어. 그러지 마. 그런 거 싫으니까 그러지 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장군에게 엉겨 붙을 수는 없다.
그 장군도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닌데 그런 사람에게 자신을 책임지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할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분명 미친 여자, 이상한 여자, 욕심 많은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 뻔하다.
“절대 하지 마. 절대로, 절대 하지 마. 알았지?”
“왜?”
“하지 마. 꼭 달라붙는 것 같잖아.”
“달라붙을 수도 있지. 그러면 팔자 고치는 것이 쉬운 줄 알아?”
“서희야.”
“이건 팔자를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우리 같은 것들이 장군의 첩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어? 평생 한 번도 오지 않을 기회야.”
서희의 말이 맞다는 것은 연우도 안다.
이건 평생 다시 오지 못할 기회가 맞을 것이다.
황궁의 수백 명의 궁녀들이 황제의 승은을 입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연우도 알고 있다.
황제의 눈에 한 번이라도 더 들기 위해서 내관들에게 뒷돈을 줘 가며 황제가 지나다니는 길목에 우연히 서 있기도 하고, 사내를 홀린다는 사향 주머니를 수백 냥 주고 사서 허리에 차고 다닌다. 심지어 동무 궁녀 중에 누군가 황제의 눈에 들 기미가 보이면 일부러 심술을 부리는 등 투기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궁녀들이 황제의 승은을 받는 것을 굳이 방해하는 까닭은 심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만큼 그 기회가 간절하기 때문이다.
누군들 평생을 궁녀로 늙고 싶을까.
누군들 이 황궁의 벽에 갇혀서 일생을 처녀로 살다가 이곳에서 죽고 싶을까.
어쩔 수 없는 형편 때문에 궁녀가 되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평범하게 살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있고, 평범하게 살 수 없다면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황제의 승은이라도 입어 보려고 그 난리들을 쳐댄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연우 자신에게 찾아온 이것은 어쩌면 기회다.
연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귀신의 그릇이 되어 모르는 사내에게 안기는 것이 기가 막히고 또 황망스런 일이지만 냉정하게 놓고 보면 이런 기회는 다시없다.
“나는 그냥… 출궁할 수 있는 것으로 족해…. 더는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아. …그냥 집에 돌아가는 것만도 감지덕지니까.”
연우가 조용히 눈을 내리 깔았다.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것이 좋다.
되지 않을 욕심이라면 더더욱 품지 않는 것이 낫다.
되지도 않을 욕심을 품었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때는 실망에 더해서 자괴감까지 들 것이라는 걸 연우는 안다.
생각시로 들어와 궁녀로 살며 연우가 배운 것은 체념이었다.
욕심을 버리는 것과 되지 않을 일은 체념하는 것.
그것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다.
연우는 그동안 목을 매달아 죽은 궁녀들을 여럿 봐 왔다.
그녀들이 목을 매달아 죽은 이유는 하나다.
욕심을 품었다가 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자 감당할 수 없는 좌절감에 스스로 목을 매단 것이다.
그 욕심의 종류가 비단 승은을 입는 것이나 대단한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군관과의 사랑을 욕심내다가 그것을 이루지 못한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매달았고, 어떤 이는 출궁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가 그것이 무산되자 목을 매달았다.
황궁 안에서 궁녀로 살며 가장 무서운 것은 쓸데없는 희망을 갖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루어질 일 없는 쓸데없는 희망이다.
그 쓸데없는 희망은 욕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에는 사람을 절망으로, 나락으로, 죽음으로 몰고 간다.
희망은 잠시는 달콤하지만 그 끝은 쓰고 아프다.
그것을 너무 많이 봐 와서 연우는 그 달콤함을 잠시라도 맛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희망이라는 달콤함을 모르는 채로 그냥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연우의 소원이다.
지금도 그렇다.
황궁에서 어떤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체념하고 있었더니, 이런 일이 일어났다.
바라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건 그렇게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달콤하지 않아도 이것은 대가가 보장되어 있다.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이것은 약속된 현실이다.
“나라면 욕심 낼 거야. 나라면.”
서희가 옆에서 눈을 흘겼다.
“나는 네가 아니잖아. 나는 이거면 족해. 더한 것은 내가 감당하지 못해.”
“그런 게 어디 있니?”
아무리 서희가 눈을 흘겨도 소용없다.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바라서는 안 되고,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은 눈에도 들이지 말아야 한다.
문득 연우가 새벽에 봤던 사내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 뒷모습이 유난히 눈을 시리게 만들었던 것도 떠올렸다.
눈에 담지 말아야 할 것을 담아서 그렇게 눈이 시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아예 눈을 감자.
그를 더는 보지 말자.
다른 욕심이 들어오지 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