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장. 궁녀 연우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때까지 죽은 것처럼 누워 있던 여인이 살며시 눈을 떴다.
실은 조금 전에 사내가 몸을 일으킬 때에도 여인은 잠들지 않았었다.
그저 어떤 얼굴로 저 사내를 대해야 할지 알지 못해 지쳐 쓰러져 자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을 뿐.
이 여인의 이름은 연우다.
십 년 전에 어린 생각시로 황궁에 들어온 세답방의 궁녀다.
십 년이나 황궁에서 살았으니 당연히 폭군 조운이 황궁의 주인으로 군림할 때도 황궁 안에 있었고 악비도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사실 연우는 세답방 궁녀라서 황제나 황후, 후궁들을 직접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하루 종일 빨래에 파묻혀서 살았기 때문이다.
아침 눈을 뜰 때부터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빨래를 하고 잘 마른 빨래를 다듬이질해서 곱게 펴고, 다리미질도 하고, 꿰매고 다듬느라 하루 전부를 보냈다.
그런 연우도 딱 한 번 악비를 직접 본 적이 있다.
언제였던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빨래를 하던 중에 빨래 속에 섞여 있던 은밀한 서신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 은밀한 서신은 황궁의 내관이 악비에게 전하는 연서였다.
그것이 빨래의 소매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을 연우가 발견했다.
그런 것이 발견되면 분명히 큰일이 날 거라는 생각에 몰래 숨겨 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빨래를 잘 말려 다시 악비의 궁으로 보낼 때 소매 안에 원래대로 넣었다.
나중에 악비가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세답방의 궁녀들을 불러 누가 자신의 의복을 빨았는지 추궁했고 결국 연우가 그 앞까지 불려나갔다.
‘기특한 짓을 했더구나. 나는 빚을 지고는 살지 못하는 성격인데… 상으로 뭘 줄까?’
‘사, 상을 받을 생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때 연우는 악비가 무서워서 그저 덜덜 떠느라 바라는 것을 말도 꺼내지 못했었다.
실은 연우에게도 바람이 있었다. 다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말을 꺼낼 수가 없었고, 또 악비는 너무 무서웠다.
악비의 악명에 대해서는 연우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말해도 좋아. 나는 뭐든지 다 들어줄 수 있으니까.’
‘황궁 밖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하지 못했다.
황궁의 궁녀로 들어와 십 년을 살았지만 앞으로 평생 궁녀로 살 자신이 없었다.
연우가 열 살 때 궁녀로 입궁한 것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함이었다.
연우가 열 살 때,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다.
약값은 비쌌고 집은 가난했다.
그때 궁녀로 들어갈 어린 소녀들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연우는 제 발로 가서 궁에 들어가겠다고 하고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어머니의 약값도 하고 집에 양식도 들여놓았다.
그렇게 입궁해서 십 년을 궁녀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십 년 동안 갇혀 지내다 보니 궁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한 번 궁녀는 영원히 궁녀로 살아야 한다.
죽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연우는 궁 밖으로 나가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고 가족들과 살고 싶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소원이었지만 그런 것을 악비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라도 바라는 것이 생기면 날 찾아오렴.’
악비는 그렇게 말하고 연우를 보내 줬지만, 그로부터 며칠 후 악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교를 하다가 황제에게 들켜 목이 잘려 죽었다는 말에 연우는 그때 만약 자신이 소원을 말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악비는 소원을 들어줬을까.
아니면 오히려 악비의 사건에 연루되어 자신도 목이 잘렸을까.
악비가 죽으며 그녀 혼자 죽은 것은 아니었다.
악비의 음란한 행위에 동참하고 그녀를 부추겼다는 죄로 악비 처소의 궁녀들이 모두 목이 잘려 죽었다.
만약, 자신이 그 연서를 감춘 것과 그 감춘 것을 악비에게 몰래 전해 줬다는 사실이 들통났더라면 자신의 목도 잘렸을 것이다.
악비는 희대의 요부였지만 폭군은 잔인한 학살자였다.
악비도 죽는 마당에 일개 궁녀쯤이야, 황제 조운이 가볍게 죽였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연우는 며칠 전에 악비의 이름을 다시 들었다.
‘네가 악비의 그릇이 되어 줘야겠구나. 대신 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전부 들어주마.’
갑자기 불려간 대전 상궁의 면전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연우는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며칠이면 될 것이다. 그 며칠 동안 사내와 교접을 하면 그 후에는 궁에서 나갈 수 있게 해 주마.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할 만큼 많은 재물도 하사할 것이다.’
며칠이면 된다.
딱 며칠 동안만 사내에게 몸을 허락하면 그 후에는 재물을 가지고 궁을 나갈 수 있다.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
며칠만 눈을 딱 감고 있으면 된다.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왜 하고 많은 궁녀들 중에서 자신이 선택되었는지 연우는 알지 못했다.
황궁 안에는 많은 궁녀들이 있다.
어리고 어여쁜 궁녀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황궁에서 제일 존재감이 없는 세답방의 궁녀인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주어졌는지 연우는 아직도 그 영문을 모른다.
이 일이 몸을 버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차피 자신이 싫다고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궁녀에게 있어서 황제의 어명은 거절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하고,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아야 한다.
이 일에 대한 보상이 아무것도 없어도 다리를 벌리라면 벌릴 수밖에 없다.
궁녀에게 자유가 있던가.
궁녀에게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던가.
없다.
특히나 자신을 지정해서 이 일이 주어진 이상, 도망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낫다.
좋은 쪽.
이 일이 끝나면 궁에서 나갈 수 있고, 가족들과 살 수 있다.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딱 그것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어제, 첫 밤이 지났다.
어제 연우는 처음으로 사내를 경험했다.
그건 아프면서도 기묘한 경험이었다.
어제 자신의 몸을 지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제 몸에 다른 존재가 들어온 것을 연우도 느꼈었다.
그것이 악비의 영혼이었을까.
다른 존재가 제 입을 통해서 음란한 말을 하고 음란한 교성을 질러대는 것을 연우는 전부 들었다.
그때 연우의 의식은 몸 안에 남아 있었고 몸이 느끼는 모든 감각을 연우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한 몸 안에 두 개의 혼이 공존하고 있던 것이다.
연우 자신의 혼과 악비의 혼.
그런 까닭에 연우는 저를 안는 사내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경험했고 그리고 또 기억하고 있다.
제 몸이 벌어지며 들어서던 사내의 음경도, 제가 스스로 입에 물었던 그 음경의 물컹한 느낌도, 사내가 저를 물어뜯고 더운 숨을 끼얹던 순간의 느낌도, 저를 부서뜨릴 것처럼 박아대고 짓눌러 오던 사내의 모든 느낌이 연우의 몸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름이… 위륜 장군이라고 했었지….’
위륜 장군. 처음 보는 사내다.
연우가 궁 안에서 볼 수 있는 사내는 환관들이나 병사들이 전부다.
그러나 저 위륜이라는 사내는 그동안 연우가 봐 왔던 사내들과는 사뭇 달랐다.
얼굴도 체격도 모든 것이 다르다.
저렇게 큰 사내를 연우는 처음 봤다.
저렇게 얼굴이 잘난 사내도 처음 봤다.
모든 사내들이 저렇게 큰 음경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저 사내의 음경이 유독 큰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도 연우는 모른다.
다만 어젯밤 제 입을 빌려 악비가 ‘생전에 보지 못한 크기’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 저 사내의 음경이 다른 사내들보다 큰 것이 분명했다.
‘저분도 황명이라서 억지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겠지….’
만약 황명이 아니라면 그런 사내가 자신 같은 세답방 궁녀와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
살며시 일어난 연우가 살그머니 방문을 열어봤다.
아주 조금 방문을 열고 밖을 훔쳐보는 연우의 눈에 어둠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뒷짐을 지고 걷고 있는 뒷모습이 연우의 눈에 박혀들었다.
사내의 모습이 눈에 시린 것은 그 위로 떨어지는 시린 눈송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눈이 시리게 보이는 것이리라. 아마도.
***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장군. 이것이 폐하께서 공신을 대하는 방식이랍니까?”
황궁에서 돌아온 위륜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의 측근의 부하들이었다.
몇 년 동안 위륜과 생사를 함께한 네 명의 부하들은 위륜이 돌아오기를 뜬눈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위륜이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가 새벽잠이 들었다 깨기를 기다려 불만을 토해놓기 시작했다.
위륜은 새벽에 깨어나는 것이 몸에 밴 사내다.
한 번도 해가 뜬 이후에 깨어나 본 적이 없다.
그가 깨어나는 시간은 항상 일정했다. 아직 새벽이 새파랗게 어려 있는, 동트기 직전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찬물에 몸을 씻고 그와 오래도록 동거동락한 칼을 닦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수년 동안 이 일과를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황명을 받아 황궁에서 은밀한 일을 수행하고 나온 오늘도 여전히 그의 일과는 동일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오늘은 그의 앞에 네 명의 부하들이 불만을 가득 품고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물러달라는 청을 올리십시오.”
“황궁에 사내가 없어 장군을 불러들여 그런 짓을 시키신답니까? 이 나라에 사내가 없어서 하필이면 그런 일을 장군께 맡기신답니까?”
“이건 장군을 업신여기고 수치를 주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돈을 주고 사 올 수 있는 남창들도 얼마든지 있는 형국에, 어찌 장군께 이런 처사를 내리신 답니까.”
부하들의 불만은 이미 날카롭게 서 있었다.
“맞습니다. 남창이 있지 않습니까. 굳이 장군께 하명하시지 않아도 남창만으로 충분한 것을 왜….”
“이건 장군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노골적으로 장군을….”
“오늘따라 많이들 시끄럽구나.”
칼을 닦던 위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한마디에 불만을 잔뜩 토로하던 부하들이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상명하복이라 하지 않았더냐. 내가 너희에게 적전에 가서 죽으라 하면 너희는 그것이 부당하다, 왜 하필 너희더러 죽으라 하는 것이냐, 다른 병사들에게 죽으라 할 것이지 너희에게 죽으라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내게 항명할 것이냐?”
“그건….”
“그건 아니지만….”
위륜의 질문에 부하들이 말문을 잃었다.
군에는 상명하복의 질서 체계가 있다.
위에서 명령하면 아래에서 따른다는 그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불구덩이인줄 알면서도 위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창과 칼을 들고 뛰어드는 것이 병사들이다.
죽음이 무서워 항명을 하는 것은 병사의 수치다.
적어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아왔다.
특히나 위륜의 현무군은 더더욱 그러했다.
위륜의 한 마디에 모든 이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그에게 생과 사를 맡겨 왔다, 아무런 의심도, 항명도 없이.
“나 역시 그러한 것이다. 어명이 내려졌고 나는 그 어명에 따를 뿐이다. 폐하께서 나를 어찌 쓰시던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폐하께서 내게 칼 한 자루를 주며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죽으라 하시면 그것을 따르지 못하겠느냐. 꼭 죽을 수밖에 없는 명을 내리셔도 그 명을 지켜야 하는 법이다. 아랫사람이 명을 가려서 받는 법이 있다더냐? 너희는 지금 내게 하극상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냐? 내가 명을 지키지 않는데 어찌 너희에게, 병사들에게 명을 지키라고 하겠느냐.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 나 역시 명을 지키는 것뿐이니 너무 호들갑들 떨지 말거라.”
위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당사자인 위륜은 담담하지만 부하들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위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아가 치미는 것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이들이 따르는 것은 황제가 아니라 위륜이기 때문이다.
황제를 위해 목숨을 건 것이 아니라 위륜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위륜이 황제를 섬긴다면 자신들이 섬기는 것은 위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위륜에게 내려진 황명이 이들에게는 가혹하고 참기 힘든 것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다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병사들을 잘 단속하거라. 험한 곳에 있다가 이런 곳에서 편안하게 지내게 되면 분명히 긴장이 풀려 사고를 치게 된다. 부하들을 단속하는 것이 너희의 임무이니 다른 곳에 성을 내지 말고 맡은 일에 신경을 쓰거라.”
그 말을 마친 위륜이 부하들에게 나가라 손짓했다.
부하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나가라는 손짓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물러났다.
“성질들 하고는….”
부하들이 나가자 위륜이 쓴웃음을 지었다.
부하들의 성격이 저런 것은 누구보다 위륜이 잘 알고 있다.
원래가 험한 성품들인데 변방에서 매일같이 싸움을 치르면서 더 험해진 성격들이다.
얌전하게 당하는 법을 모른다.
마치 성난 늑대들처럼 항상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저런 자들이 자신의 말에는 순한 짐승처럼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 남들의 눈에는 신기해 보일 터였다.
“남창이라….”
위륜이 칼날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제 입으로 꺼낸 말이지만 지금 문득, 자신의 처지가 정말 남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창이란 무엇인가.
대가를 받고 몸을 파는 사내다.
여인만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내가 받는 대가가 무엇일까.”
이 은밀한 황명을 따르는 것에 있어서 한 번도 대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황명을 따르는 일에 대가가 다 무엇인가.
싸움을 대가없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이 남창이 아닌 점은, 대가 없이 신하된 마음으로 이 일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자신은, 남창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하던지 간에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이유다.
사람을 죽여도, 스스로의 몸을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신하된 도리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는 것, 황제를 따르는 것, 그것이 신하된 도리이고, 그것이 자신이 지켜야 하는 단 하나의 명예라고 생각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