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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가족이 있습니다. (13/13)

외전. 가족이 있습니다.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던 봄이 지나고 태양의 정열이 땅을 내리쬐는 여름이 찾아왔다. 구름이 높고 옅어 파랗게 갠 창천, 그 바로 아래에 있는 세이아 저택에서는 전과 다를 것 없는 아침의 상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노크 소리였다. 침대에 느긋이 걸터앉은 루베니오는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집사인 시엘에게 눈짓했다.

“쫓아내.”

이른 아침부터 찾아올 상대가 누구인지는 둘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 괴물을 제가요?’

시엘의 눈동자가 폭풍을 맞은 호수 표면처럼 위태로이 흔들렸다. 그러나 주인에 대한 충성이 먼저였는지 그는 긴장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퍽!

“윽!”

거침없이 열린 문에 정강이를 맞은 시엘은 아픔을 애써 참으며 바르게 섰다.

“가이사 님, 이러시면 안 되는……”

“가이사.”

탁! 루베니오의 거친 손길에 심신의 안정을 위해 마시던 향긋한 허브 차가 담긴 찻잔이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뱉었다. 일견 고요하던 아침을 내지르는 균열에 방 안의 긴장감이 점도를 꾸덕꾸덕 높였다. 살기에 색이 있다면 음침한 검정으로 물들었을 방으로 들어선 가이사는 꾸벅하고 고개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루베니오.”

“아침부터 미쳤나?”

“미치지 않았습니다.”

“또 시답지 않은 일이겠지. 듣고 싶지 않으니 물러가.”

루베니오는 더 이상 가이사를 보지 않았다. 그가 방문을 허락하지 않기에 억지로 밀고 들어왔지만 이래서야 진전될 게 하나 없었다. 가이사의 눈썹이 위로 팍 꺾였다.

그의 못마땅한 얼굴에 시엘은 목줄이 풀린 투견 보듯 가이사를 경계했다. 그러나 가이사가 시엘의 주인을 향해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그는 늘 그렇듯 이빨을 얌전히 감추고 낑낑거렸다.

“이제 그만 저를 이 집에 받아 주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언제까지 저를 외면하실 작정입니까? 그래 봤자 저는 이미 당신의 자식에게 순결을 빼앗긴 몸인데요.”

“큭! 콜록!”

놀란 시엘은 사레가 들렸다. 어찌나 심하게 들렸는지 루베니오의 살벌한 기세에도 컥컥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결혼하고 싶습니다.”

뒤를 이어 가이사가 시무룩한 어조로 덧붙였다. 좀처럼 장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가이사는 니네이나의 허락을 받고도 결혼식을 치르지 못했다.

“릭스.”

루베니오는 그런 가이사를 바라보는 대신 문 뒤에서 눈치만 보던 기사를 불렀다.

“예, 주인님.”

“시끄럽구나.”

끌어내라는 말을 아주 약간 고상하게 돌려 말했다. 그러나 직설적인 표현보다 사뭇 더 위험하게 들렸다. 침을 꼴깍 삼킨 기사가 가이사 가까이로 다가갔다. 가이사는 문만 열었을 뿐 그 방 안에는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한 채 장승처럼 서 있었다.

“…….”

루베니오의 명령을 받은 기사가 가이사의 팔로 손을 뻗자 소름 끼치도록 오싹한 붉은 눈이 릭스의 손을 노려보았다. 만지면 죽이겠다는 살벌한 시선이었다.

“가이사,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루베니오가 이마를 짚으며 조용히 뇌까리자 가이사는 이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닫아.”

끼익. 매정할 정도로 빠르게 닫히는 방문에 가이사의 어깨가 축 처졌다. 방금 전 가이사의 살기를 한 몸에 받느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기사마저 그런 그를 동정할 정도였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샤사롯 영지에서 돌아온 후로 가이사는 계속 루베니오를 찾았지만, 그의 허락을 받아 내는 길은 요원했다. 지금처럼 불쌍한 척하고 있어도 루베니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니네이나처럼 가이사를 사랑하지도, 가이사에게 약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이라면 분명 이 상황을 알아낼 것이다. 가이사는 니네이나의 귀에 들어갈 정보에 신경을 쓰며 더욱더 불쌍한 척을 했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하지?’

가이사의 머릿속으로 협박과 협박 비슷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쳤다. 그런 걸로 해결할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그런데 쓸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이사에게 루베니오는 ‘물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물 수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게 정확했다.

가이사는 니네이나에게 해가 되는 건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가진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와는 상관없이 루베니오를 해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영특한 루베니오는 이 관계의 전면을 가이사 본인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하아…….”

가이사는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뒤 머리칼을 거칠게 털어 내며 저택 한쪽에 있는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으아아아악!”

그 연무장에서는 주인 대신 가이사를 상대하게 된 기사들의 비명 소리가 끝없이 울려 퍼졌다.

* * *

“뭐? 가이사가 또 애먼 기사들을 패고 있다고?”

“패, 패다니요? 그것이 아니라 대련 중이시랍니다.”

“그게 패는 거지 다른 게 패는 건가?”

나는 찌뿌둥한 몸을 펴며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가이사가 아침부터 어디 갔나 했더니 또 아버지 방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나는 가이사에 대해 잘 알았다. 가이사는 아버지의 거절로는 상처 받지 않는다. 단지 화가 날 뿐이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하필이면 그가 그토록 애절히 소원하는 일이었기에. 이대로 둔다면 피해를 받는 건 불쌍한 세이아의 기사들일 게 뻔했다.

“우리 집 기사를 방패막이로 쓸 순 없지.”

웬만하면 둘이서 해결하게 두려고 했으나 하는 짓을 보아하니 몇 해를 넘겨도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채비를 해서 아버지의 방을 찾아갔다.

“아버지, 저예요.”

똑똑거리는 노크 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어서 오렴, 니나.”

하얀 와이셔츠만 가볍게 걸친 루베니오가 싱긋 웃으며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버지.”

“네가 왔으니 더더욱 좋은 아침이구나.”

폭사하는 여름의 햇살이 그의 금발 위로 잔잔히 흩뿌려졌다. 나는 변함없이 번쩍거리는 아버지의 광휘를 익숙하게 보아 넘기며 그가 안내해 주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버지가 좋아하실 만한 차를 가져왔어요.”

사라가 다가와 테이블 위로 찻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입안을 깔끔하게 씻어 주는 시원한 맛 때문에 식후나 아침에 상쾌하게 먹기 좋더라고요.”

나는 찻주전자를 내 앞으로 가져왔다.

“모나.”

가이사의 심장을 이식받은 나는 그와 심장을 공유하고 있었다. 드래곤의 언약 아래 계약한 네 명의 정령들 또한 나의 부름에 응답했다. 전체를 이식받은 가이사에 비하면 결속력이 턱없이 부족해서 자기들 마음에 따라 안 나타날 때도 있었지만 착한 모나와 나를 좋아하는 소나에 한해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아주 작은 일을 부탁하려 불렀음에도 어김없이 나타난 푸른색의 인어가 꼬리를 파닥거리며 뜨거운 찻주전자 위에 앉았다.

“식혀 줄래? 시원하게 먹고 싶어.”

수줍게 고개를 끄덕여 준 모나의 몸 위로 푸른빛이 일렁거렸다. 토독 토독 떨어진 파란 물방울은 신비하게 반짝거리며 사라졌다. 나는 모나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준 뒤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사각거리는 살얼음이 동동 흐르는 냉차였다.

“드셔 보세요.”

어딘가 아득한 시선으로 모나를 바라보던 루베니오의 표정이 깨졌다. 여유로우면서도 나긋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루베니오가 웃으며 차를 마셨다.

“시원하구나.”

“잘 골랐죠?”

“그래, 고맙다.”

“가이사가 고른 거예요.”

“…….”

루베니오는 일순 배신감까지 띠며 나를 바라봤다. 허망하게 허공을 헤매던 눈동자가 파르르 요동쳤다. 좀처럼 보기 힘든 격렬한 동요였다.

“푸흡!”

다소 멍하게까지 보이는 그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하하!”

나는 깔깔 웃느라 배꼽을 붙잡았다. 떨떠름하게 굳어 나를 바라보던 루베니오의 얼굴이 차츰 풀렸다. 찻잔을 내려놓는 손짓이 여느 때와 같이 우아했다.

“재미있었다면 그걸로 되었다.”

그는 내가 마음껏 웃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 차를 구해 온 게 진정 누구인지는 그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 그랬다.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대부분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설령 평생의 동반자를 결정하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벌써 한 달째네요.”

“겨우 한 달째지.”

루베니오는 시치미를 떼며 모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낯을 가리는 모나가 루베니오의 손가락 위에 덥석 올라갔다.

“어? 걔가 원래 그러는 애가 아닌데…….”

“너를 좋아한다면 나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나는 네 아버지니까.”

조곤조곤한 말투였지만 내겐 루베니오가 거드름을 피우는 것처럼 들렸다. 내 정령 친화력이 루베니오가 아닌 로페니아로부터 비롯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알고도 모르는 척 그렇게 말했으니까.

“굳이 이유가 있다면 미모 때문일 텐데요. 정령은 아름다운 자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처음 듣는 소리인데.”

“가이사가 그랬는걸요.”

가이사의 이름이 나오자 루베니오의 미간이 단번에 굳었다. 루베니오 또한 애틋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는 적극적으로 가이사의 편을 들 수가 없었다. 가이사 또한 내 도움을 바라지 않는 눈치였다. 이것 하나만은 본인 스스로 얻어 내려고 하는지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화풀이는 좀 해도 큰 사고는 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 정도면 꽤 기특하지 않아요?”

“누가 말이냐.”

드물게도 루베니오가 내게 정색해 보였다. 무표정한 푸른 눈동자가 한겨울의 고드름처럼 차고 시려서 그의 별명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가이사가 그렇게 싫으세요?”

“누구든 좋을까? 아깝기만 하거늘.”

“에이, 다 허락하셨으면서요.”

“흠.”

루베니오는 또 모르는 척하며 차를 이어 마셨다. 적군이나 다름없는 모나는 어깨에 올려 두고 예뻐하면서 가이사에게는 매정하게 굴었다. 사실 루베니오는 내게만큼은 단 한 번도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적극적으로 말린 것도 아니었다. 못마땅한 얼굴은 고수했지만 언제나 내 마음을 우선시했다. 그는 내 마음을 반대한 적이 없었다. 그가 진심으로 반대한다면 내 마음이 아플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이 아플까 염려되어 싫은 일도 반대하지 않으면서 가이사에게만 애꿎은 심술을 부렸다. 나는 내 아버지가 나를 위해 이미 많은 것을 양보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가이사 몰래 내 결혼식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건 가이사뿐이었다.

“이제 그만 가이사를 받아들여 주시는 게 어떨까요?”

그는 정말 싫은 숙제를 눈앞에 둔 아이처럼 깊이 한숨 쉬며 끙끙거렸다. 나는 머지않아 그의 고집이 끝날 것을 짐작했다.

* * *

“니나!”

그로부터 며칠 뒤, 가이사는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달려왔다. 긴 복도를 엄청난 속도로 가로지르는 긴 다리를 부럽게 보고 있는 사이 그는 훌쩍 다가와 나를 안아 들었다.

바스락. 그가 쥐고 있던 새하얀 종이가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어지간해서는 크게 흥분하지 않는 가이사는 뒤늦게 아차 하며 나를 내려 주고 종이를 폈다.

「니네이나 세이아-샤사롯-아델만」

그리고 그 아래.

「가이사 세이아-샤사롯-아델만」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다시 쓴 혼인 계약서였다.

세이아-샤사롯-아델만.

나는 가이사와 내가 결혼하면 받게 될 성을 잠시 바라봤다. 재산과 지위가 대물림되는 고위 귀족의 성이 세 개나 나열된 경우는 제국 역사상 최초였다. 세이아 공작 가문 하나만 해도 위세가 대단한데 샤사롯과 아델만까지 인정해야 했으니 칼리탄의 속이 쓰린 건 당연했다.

─내가 왜 이걸 허락해 줘야 하지? 나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겠다. 그토록 결혼이 하고 싶다면 셋 중 하나는 포기하도록 해. 기꺼이 사회에 환원해 주지.

─에이, 은근슬쩍 황실 사업에 쓰시려고요? 그렇게는 안 되죠. 소원 쓸게요.

─뭐?

─소원 쓴다고요. 벌써 잊으셨어요? 폐하께서 제 소원 하나 들어주셔야 하는 거.

─…….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는 최소 둘 이상일 거예요. 제가 못 낳는다면 입양하면 되잖아요? 세이아-샤사롯-아델만이라는 성은 저와 가이사의 대에서 끝날 거예요.

얼마 전, 가이사 몰래 칼리탄과 담판을 지은 보람이 있었다. 저 이름을 저렇게 묶어 두니 그가 진짜 내 것인 것 같아 이름만 봐도 배불렀다.

“정말 잘했어요, 가이사!”

나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아버지의 고집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우쭈쭈, 우쭈쭈. 잘했다, 내 새끼. 부둥부둥.

나는 가이사를 얼싸안고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기분 좋아요.”

“그렇게 좋아요?”

“예.”

루베니오의 허락이 오래 걸리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도와줄걸.

“하마터면 시위를 할 뻔했습니다.”

“무슨 시위요?”

“젊은 후작이 내 첫날밤만 먹고 버렸다는 시위.”

“그런 놈은 궁형에 쳐해야 하는데. 젊은 후작이라면 대체 누구…… 젊은 후작이요?”

“예, 젊은 후작.”

보자. 이 나라에 젊은 후작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던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내가 알기로는 가장 최근에 후작 지위를 받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나. 이제는 아델만까지 붙어 버릴 니네이나 세이아-샤사롯-아델만 후작 말이다.

“그게 무, 무슨 소리예요!”

“계속 굶기셨지 않습니까?”

“굶기긴 뭘 굶겨!”

“돌아오고 나서는 계속 방치하셨습니다.”

“그건 방치가 아니고……”

으음. 그는 내 목덜미에 입술을 쪽 맞추며 나직이 허밍했다. 노골적인 성애는 아니었지만 손등을 쑥 훑는 손짓 같은 게 야했다.

“으…….”

그의 송곳니가 긴장으로 헐떡대는 핏줄을 꾹 누름과 동시에 내 다리는 땅에서 떨어졌다.

“배고파요.”

부쩍 다가온 입술이 이지러지는 꽃잎처럼 속삭였다. 낮게 깔린 저음이 보드라운 입맞춤보다 자극적이었다. 그는 가까운 방을 찾아 들어갔고 하필 그곳은 내 방이었다. 복도를 쓸고 있던 어린 하녀의 볼이 가을의 단풍처럼 불긋했다. 나는 복도에 얼어붙어 꼿꼿이 조각된 그들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제 틀렸다. 소문이 나려거든 나 버리라지.

* * *

내 이름에 ‘아델만’이라는 성이 추가될 거라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퍼진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잠깐이라도 나가 서 있으면 땀이 뚝뚝 고였다. 몸이 서늘한 편인 가이사는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펄펄 날아다녔지만 나는 아니었다. 거세지는 폭염에 몸은 축축 처지고 입맛도 뚝 떨어졌다. 밖에 나가는 건 고사하고 방에서 얼음이나 잘근잘근 깨어 먹는 나태한 날들이었다. 내가 일 좀 안 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내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지 않는다니. 곧 죽어 가는 와중에도 루베니오를 제쳐 두고 나서서 뭔가 해 보려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당장 올해 가을에 가이사와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는데 꼼짝도 하기 싫어 그 일도 미루는 중이었다. 그런 내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도 심각해 보였던 것 같다. 눈에 불을 켜고 가이사를 감시하던 루베니오가 한발 물러나 나와 가이사를 별채에서 함께 지내게 할 정도였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신혼 같네요.”

나는 아침에 일어난 이후로 줄곧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점심때에 가까워졌지만 아침 식사도 거르고 가이사가 가져다준 주스만 쪼록쪼록 마셨다.

“아버지는 절대 허락 안 해 주실 것 같았는데.”

가이사와 나는 동거 중이었다. 귀족이 결혼 전에 동거를 한다는 건 연애에 자유로운 이 나라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배척되는 일은 아니었다. 평민들 사이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얽힌 귀족들은 연애결혼에 성공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그랬다. 덕분에 가이사와 나는 이곳저곳에서 자주 오르내리며 회자되는 모양이었다.

“곁에서 재롱이라도 부려 보라고 하셨습니다.”

“재롱? 아버지가 진짜 그렇게 말했어요?”

“정확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애가 원하는 것이 또 없으니 어쩔까? 뭐라도 붙여 줘야지.

가이사의 입으로 듣는 말에 양 뺨이 화끈했다. 이 정도면 사위 천대가 지나쳐 막장이 된 수준이었다. 가이사는 개의치 않았지만 나는 미안함과 민망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데 가이사의 말만 듣고 루베니오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루베니오와 가이사가 이런 식으로 머리싸움을 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내 앞에서 언성을 높여 싸우는 일은 없었지만 둘은 간교하게 움직였다. 가이사는 저런 식으로 불쌍한 척했고 루베니오는 모른 척하는 게 수준급이었다.

“내가 미쳐…….”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후궁의 암투에 골머리가 아픈 황제도 아니고.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저는 좋았습니다.”

“대체 어느 부분이요?”

“당신이 원하는 사람은 저 하나라는 걸 루베니오가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가이사의 입가로 조소가 빠르게 스쳤다.

“…….”

어이없어 바라보자 그는 급하게 표정을 수습했으나 나는 이미 다 본 후였다. 가늘게 쏘아 보내는 시선에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린 그는 나를 꼭 껴안았다.

“물놀이는 어떻습니까?”

웃음이 나왔다. 말을 돌리려는 수작인 걸 뻔히 아는데 귓바퀴를 유려하게 타고 내리는 목소리가 달아서 항복하고 말았다.

“갑자기 무슨 물놀이예요?”

“더위를 쫓기에는 물만 한 것이 없습니다.”

“으음.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이번 여름은 텄어요. 의욕이 안 나는걸요.”

“의욕…… 어떻게 해야 의욕이 나실까요?”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낮은 목소리 탓인지 왠지 잠이 왔다. 일어난 뒤 계속 누워 있기만 했는데 또 잠이 오다니. 나는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깜빡 잠이 들었다.

“니나.”

그리고 나를 부르는 달콤한 소리에 이끌려 일어났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식욕을 자극하는 풍미에 오래 굶은 배가 허기를 호소했다.

“먹고 다시 주무세요.”

나는 가이사의 가슴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그는 테이블과 의자를 두고 굳이 침대 위에서 날 이렇게 앉혀 놓았다. 부끄러워하며 내려가야 정상인데 그냥 이렇게 있고 싶었다. 나는 그의 옷자락 사이에 얼굴을 숨겼다. 숨을 푸푸 내쉬자 얇은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 숨결이 두툼한 가슴팍을 희롱할 때면 천이 나풀나풀 떠올랐다. 나는 그 사이로 보이는 반질반질한 가슴 근육을 눈으로 감상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계속 졸립니까?”

간지러웠는지 그는 내 머리를 꼭 감싸며 몸을 뒤척거렸다. 엉덩이를 받친 탄탄한 허벅지 근육이 꿈틀댈 때마다 그 모양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음식을 먹고 싶진 않은데 어쩐지 식욕이 돌았다. 나는 입술만 질겅거리다가 그의 도드라진 가슴을 꽉 깨물었다.

“윽!”

색이 진한 가슴의 정 가운데, 그 바로 옆에 동그란 잇자국이 찍혔다. 벼락을 맞은 듯 펄떡대는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 융기했다. 숨이 꽉 차오른 가슴팍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내 귀를 한입에 집어삼킬 것처럼 물었다. 어두컴컴한 동굴에 갇힌 젖은 숨이 뽀얗게 일어났다.

“제 의욕을 돋우시면 어쩝니까?”

타박하는 목소리가 귓가를 핥으며 끈적끈적하게 늘어졌다. 간지러워 턱을 치켜들자 송곳니에 귓불이 스쳤다. 그는 가슴에 남은 잇자국에 대한 앙갚음을 하려는지 내 귓불을 못살게 굴었다.

“한 입만 드세요. 나도 한 입 먹겠습니다.”

“가이사는 뭘 먹는데요?”

“당신 귀.”

먹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거 한 입 맞아요?”

“니나는 뭐든 이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까? 지기 싫으면 가득 드세요.”

드디어 내 귀를 놓아준 그가 팔을 쭉 뻗어 한쪽에 놓아두었던 그릇을 들었다.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지만 내 감각은 척척한 귀에 쏠려 있었다. 온도를 낮추는 마법 장치가 내뿜는 미풍에 젖은 귀가 시렸다. 그가 묻혀 놓은 흔적이 치덕치덕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나는 멍하니 그 시원한 감각을 즐겼다.

“이러면 먹을 줄 알았는데.”

그는 한숨을 쉬며 숟가락을 들썩였다. 억지로 먹일지 말지를 고민하며 숟가락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내가 애예요? 움직인다고 먹게?”

“고양이는 사냥 본능이 뛰어난 법인데 내 고양이는 조금 둔한 듯합니다.”

“뭐?”

“둔해도 귀여워.”

버럭 성을 내기도 전에 그는 소리 내어 웃으며 내 정수리에 턱을 꽁 찧었다.

“아야!”

아프지도 않지만 괜히 신경질을 냈다. 눈초리를 매섭게 세웠음에도 그는 겁을 먹은 눈치가 아니었다.

“한 입만. 응?”

고소한 수프를 후후 불어 식히는 정성에 날 선 신경이 누그러졌다. 별것도 아닌데 왜 그에게 짜증을 냈는지 모르겠다.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는 금세 미안해졌다. 기분이 오르내리며 미친 듯 널뛰기했다. 나는 찌푸린 이마를 풀고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렇게 크지 않은 숟가락이 쑥 들어와 수프를 떠먹였다. 끈끈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쑥 흘렀다. 빈속에 들어간 따뜻한 수프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내장을 데웠다. 그러자 갑자기 식욕이 확 돌았다. 왜 몰랐는지 궁금할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났다.

나는 코로 밀려드는 냄새에 끌려 그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았다. 조금 남아 있던 수프로 입안이 깔끄러웠다. 나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숟가락을 허겁지겁 입에 가져가 댔다. 그러나 기대감에 침을 꼴깍 삼키는 것과 동시에 나를 둘러싼 냄새가 변했다.

“욱!”

역겨움이 내장을 뒤흔들었다. 배가 고파 당장 먹고 싶은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어지러웠다.

“우웁! 윽!”

“니나?”

나는 가이사에게 그릇을 떠밀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끅끅하는데 뭐가 그렇게 서럽고 힘든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입을 벌려도 게워 낼 수 있는 건 없었다. 배 속이 뒤틀리는 괴로움으로 끙끙거리다가 눈물만 잔뜩 마셨다. 이거 설마? 내가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하고 있는데 어깨가 붙잡혔다.

“나…… 웁!”

두꺼운 살덩이가 버겁게 밀려와 치아 사이를 벌렸다. 잔뜩 골이 난 혀가 곳곳을 수색하며 돌기를 예리하게 세웠다. 날로 찌르듯 쑤석거리며 뒤지던 그는 점막을 할짝거려 입안을 한 움큼 적신 뒤에야 빠져나갔다.

“독은 아닌데.”

가이사는 내 입꼬리를 할짝거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혹시 모르니 더 살펴볼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벅찬 숨을 고를 생각도 못 하고 얼어 있던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팍 밀쳤다.

“바, 방금 나…… 구역질하는 거 못 봤어요?”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러더니 이리 와 보라는 듯 뒷덜미를 붙잡아 끌었다. 확인인지 키스인지 모를 그걸 또 할 생각인지 그의 입술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뭘 게워 내지는 않았다지만 나는 이 상황이 정말 미친 듯 부끄러웠다.

“임신한 것 같아요!”

내게 달려들던 가이사가 눈을 크게 뜨며 멈칫했다. 나는 그 틈을 타 그에게서 벗어나 세면대로 달려갔다. 물을 틀고 입안을 마구 헹구며 아직도 그 자리에 굳어 있는 가이사를 힐끔 내려다봤다. 멍하게 굳어 있는 아름다운 얼굴과 화장실 바닥에 꿇은 고고한 무릎이 새삼스러웠다. 사랑이 뭐고 마음이 뭔지. 내 앞에서 무릎 꿇는 것도 싫었다. 어울리지 않았다.

“일어나요.”

나는 잡고 일어나라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이사의 시선이 내 손바닥을 타고 쭉 이어져 오르다가 내 배로 향했다. 물리적인 힘이 있다면 배를 찢어 두 쪽으로 벌리고도 남았을 무자비한 열기였다. 목덜미로 발긋한 소름이 지그시 올랐다. 임신이 급한 건 아니었으나 임신을 하면 안 될 이유도 없었다. 피임은 자연스레 소홀해졌다. 세이아 저택에 와 반강제로 금욕하기 전에는 눈이 맞으면 서로를 찾았다. 나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그거라고.

“내가 헛구역질하면 그, 그거부터 의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그것도 했는데!”

그거와 그거. 에둘러 말하는 건 나답지 않지만 직설적으로 말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더위를 먹은 줄 알았습니다.”

가이사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가이사, 의외로 둔하네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이 와중에도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내가 임신하면 싫어요?”

“아닙니다.”

가이사는 생각도 하지 않고 즉답했다.

“잘 모르겠다, 정도로 대답할 줄 알았는데요.”

“사실 별생각 없었습니다. 아이에 대한 생각을 하려면 당신을 조금이라도 덜어 내야 하니까요.”

자기 머릿속에는 나밖에 없다는 말보다 직설적으로 느껴졌다. 저것이 오로지 그의 진심이라 그랬다. 나는 이미 가이사의 그런 성향을 알고 있었다. 그의 세계는 여전히 좁았다. 언제나 깊었다. 채운다면 다행이고 빈 곳으로 놔둔다면 자신을 가둘 수렁이었다. 그를 아버지로 둬야 할 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그에게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요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더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할 뿐이었다.

“생존은 쉽고 삶은 어렵다는 걸 느낍니다.”

그가 곰곰이 생각한 뒤 내놓은 답이었다.

“생각할 게 많아요. 나는 당신만 생각하는 것도 벅찼는데.”

“아직 임신이 확실한 건 아니에요. 의원을 만나 봐야 하는걸요.”

“아니요, 임신이 아니기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안에.”

그는 내 배 위에 손을 조심스레 올렸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여도 섭섭해하지 않을 결심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말이었다.

“아니, 생존은 단순하고 삶은 복잡합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내 배 위를 지그시 훑어봤다. 이 안에 어떤 괴생물이 도사리고 있나 경계하는 눈치였다.

“가이사는 정말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요. 내가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잖아요.”

나는 한숨을 삼키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으로 내 배를 쑥 문질렀다. 그의 손가락은 풀잎이 떨어트린 이슬처럼 움찔움찔 튕겼다.

“복잡한 게 아니라 다양한 거 아닐까요? 세상에는 무수한 즐거움이 존재해요. 오늘의 기쁨과 어제의 행복이 같으나 다르듯 매일이 그렇죠.”

“…….”

“내 존재만이 가이사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전부입니다.”

고집은. 나는 그를 새초롬하게 노려봤지만,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머지않아 그가 믿어 오던 단 하나의 지독한 신념이 부서지리라는 걸 알았다. 산산이 조각나 더 찬란해질 마음이었다.

* * *

루베니오는 생각했다. 오늘은 운이 좋은 하루라고. 그렇지 않다면 이만큼 황홀한 꿈을 꾸고 있을 리 없었다.

“아빠아아!”

그는 두 팔을 가득 벌리고 달려오는 어린 니네이나를 향해 양 무릎을 굽혔다. 빨빨거리며 달려온 아이가 작은 종아리에 힘을 주고 폴짝 뛰어올랐다.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잠시 고민해 보던 루베니오는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으로 여린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니나.”

품에 안긴 사랑스러운 생명이 까르르거리며 웃었다. 아기의 분내가 코끝을 말랑말랑하게 적셨다. 신경과 근육이 녹아 사라지려 했다.

“내 예쁜 딸. 신이 준 내 하나뿐인 보물.”

“새삼스럽게?”

아이는 깔깔거렸지만 루베니오는 감동에 차올라 찬사를 쏟아 냈다. 그 목소리는 흘러내린 옥구슬처럼 엮여 아름다운 노래가 되었다. 태풍에 날개가 꺾여 버린 나비처럼 애처롭고 우아한 음색이었다. 이것이 꿈이기에 그랬고 꿈이어도 황홀하여 그랬다.

“이렇게 자그말 때 안아 줬음 얼마나 좋았을까?”

“치. 지금 안아 주고 있잖아요.”

“그래, 그렇구나.”

꿈은 순간의 착시였다. 그는 이 꿈의 끝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알았다. 루베니오는 이 놀라운 기회를 가능한 한 오래 즐기기를 바라며 꿈속을 거닐었다. 아늑한 초원의 부산한 나비 떼가 그의 걸음을 쫓았다. 오색찬란한 나비 떼가 저마다의 춤을 선보였다.

“나비 예쁘다! 저것 봐요, 아빠!”

저세상 같은 황홀경에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말끝마다 그를 불렀다. 지금보다 더욱 맑은 목소리에 그의 눈가는 어쩔 수 없이 젖어 들었다. 우수에 찬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어린애는 순진한 눈망울을 굴리며 그에게 배시시 시선을 맞춰 왔다.

“아빠.”

“무슨 일이니?”

“니나는…… 아!”

입을 뻐끔거리는 아이의 코 위로 노란 나비 하나가 내려앉았다.

“뭐야, 간지러워.”

“아버지가 떼어 주마.”

“으응.”

코 근처를 손으로 파닥거리던 아이가 그를 믿고 얌전히 손을 내려놓았다. 뽀얀 코끝이 찡긋거렸다. 그 깜찍한 모습에 루베니오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고 싶어졌다. 무구한 눈망울이 그를 빤히 바라봤다. 아빠, 뭐 해? 나비 안 떼어 줘? 그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루베니오는 가슴 깊이 범람하는 감동을 쓰게 삼켰다. 그의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뻗어 갔다. 행여 여린 뺨에 상처라도 낼까 봐 조심스레 접근한 손은 아이의 얼굴을 다 가릴 만큼 컸다. 순간적으로 아이의 얼굴이 다 가려졌다. 그때까지 계속 버티던 나비가 루베니오의 손가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폴랑 날아갔다.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가 반짝반짝 떨어졌다. 그는 꽃가루가 아이의 코를 간지럽히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손으로 얼굴을 덮어 주고 있었다.

“이제 됐…….”

손을 치워 주던 루베니오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얼어붙었다. 아기 천사의 오동통한 뺨과 찬란한 색채, 온갖 달콤한 것으로 탄생했을 그의 외동딸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무표정한 흑발의 사내아이였다. 인간 같지 않은 새빨간 눈동자와 마주치자 소름이 돋았다. 루베니오는 그 순간 꿈에서 튕겨 깨어났다. 깨어남과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킨 그는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이 무슨…….”

잠을 헤매느라 몽롱하던 눈동자가 냉철한 이성으로 번뜩였다. 그의 미간은 서서히 구겨져 핏줄이 돋아날 지경이 되었다.

“끔찍한 꿈이란 말인가!”

빠드득. 이 우아한 남자는 험상궂은 얼굴로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그렇게 해도 악몽이 삭여지지 않아 냉수를 한입에 털어 넣기까지 했다. 며칠 밤을 새우며 일하느라 낮에 잠깐 눈을 붙였는데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그는 아무래도 불안하여 별채로 갈 채비를 했다. 아이를 직접 보아야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성 싶었다.

똑똑. 막 나가려는데 자로 잰 듯 일정히 날카로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도 들어 이제는 환멸까지 이는 소리였다. 평소라면 쫓아내 버렸을 텐데 지금은 달랐다. 혹시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떨어지지 않았을 놈이지만 그런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불안했다. 루베니오는 성큼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예상했다시피 가이사가 멀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임신했습니다.”

가이사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

그리고 무척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세상을 무수히 경동케 할 루베니오의 두뇌가 사고를 완전히 정지했다. 깜빡. 애처로운 점멸 끝에 참람한 분노가 지혜로운 뇌를 채웠다. 루베니오는 아주 조용히 가이사의 멱살을 붙잡았고 가이사는 구겨진 옷깃을 보며 침묵했다.

“하.”

한참 뒤, 부글부글 끓는 한숨이 터졌다. 루베니오의 손이 멱살을 겨우 놓아줄 때까지 가이사의 눈동자는 지치지 않고 바르르 떨렸다.

* * *

“가이사는 괜찮으려나?”

아버지께 몇 대 맞은 건 아니겠지? 구덩이에 산 채로 던져졌다거나? 금방 돌아올 것 같던 그가 늦어지자 걱정이 들었다.

의원 확인 결과 임신이 맞았다. 문제는 이 사실을 언제 루베니오에게 알리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일에 부모의 눈치를 보는 성격은 아니었다.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게 더 맞았다. 그런데 가이사는 많이 걱정되었다. 아버지가 나 몰래 처리하려 들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가이사는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지만 아버지는 상상 이상의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지스의 방패라는 배를 모조리 끌고 가 폭탄을 퍼부어 그를 수장하면 제아무리 가이사라고 해도 살아날 거라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버지에게는 언제 말씀드리죠?

─어차피 그의 귀로 들어갈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 전에 제가 먼저 찾아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선수를 치는 건 나쁜 작전이 아니었다.

“믿고 보내 주긴 했는데…… 역시 같이 가 줄 걸 그랬나?”

나는 사라가 가져다준 포도 한 알을 혀로 굴려 녹이며 나태하게 고민했다. 임신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건지 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게 귀찮았다. 지금도 말만 이렇게 하고 침대 밖으로 나갈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러 포도알을 집은 채 또 깜빡 졸았을 때였다. 가이사와 루베니오가 함께 돌아왔다.

“오셨어요, 아버지?”

아버지께 인사를 건네는 사이 가이사가 쏜살같이 다가왔다. 그는 손수건을 물에 적셔 포도물이 든 내 손을 닦아 주었다. 아버지의 시선이 내 손을 붙잡은 가이사에게로 향했다. 지그시 좁혀 들던 미간이 진퇴를 반복하다 간신히 펴졌다.

“그래. 입덧이 심하다던데 좀 나아진 거니?”

“과일은 괜찮아요. 아기 성격이 가이사를 닮아 새초롬한가 봐요.”

웃으며 꺼낸 농담에 새하얀 뺨이 겨울 성에처럼 무섭게 얼어붙었다.

“아버지?”

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루베니오의 창백한 얼굴이 무심히 갰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다가와 가져온 상자를 내밀었다.

“이걸 자주 보거라.”

상자 뚜껑을 열자 거울이 보였다. 알록달록한 꽃과 나비 자수가 뒷면을 통통하게 채운 수공예품이었다.

“예쁜…… 거울이네요?”

“그렇지. 열심히 보렴. 태아는 어머니가 자주 본 것을 닮는다고 하더구나.”

그는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

“가벼운 것이니 꼭 들고 다니세요.”

말도 안 되는 속설에 홀랑 넘어갔는지 가이사는 거울을 권하며 그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눈이 가이사를 향해 차갑게 번뜩이다가 다시 완만하게 풀어졌다.

“시간이 무섭지. 설마 네가 어머니가 될 줄이야.”

“할아버지가 되실 아버지도 있는걸요.”

내 농담에 내내 무겁던 아버지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널 그렇게 보내 두고 종종 헛것에 집착했다. 네가 아닌 그림자를 보고 너를 떠올렸지. 그러다 보니 눈에 밟히는 건 아이들뿐이었다. 나는 내가 아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 그래도 눈길이 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너의 분신일 텐데 미워할 리가.”

그는 두 팔을 너르게 벌려 나를 꼭 끌어안았다.

“너도 네 자식도 다 내 아이들이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지.”

산만 하게 부른 배로 아이를 품게 되더라도, 몇 아이의 어머니가 되더라도 그에게만큼은 나는 계속 어린아이였다.

“축복한다, 니나.”

당신은 어쩜 그렇게 나를 사랑할 수가 있었나요? 부모의 사랑은 깊이와 넓이를 따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부모가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그의 딸로 태어났기에 행운아였다.

“내게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버지예요.”

커다란 품이 물결처럼 잔잔히 떨렸다. 나는 그의 어깨 너머에 편안히 기대어 속삭였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또 아버지의 딸로 태어날 거예요.”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이번에야말로 같이 살고 싶다.

동시에 아버지는 영원히 몰라야 할 그의 서글픈 유언이 귓가를 스쳤다.

“당신의 딸로 태어날 수 있었음에 감사해요.”

내게 아버지를 돌려준 신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 * *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의 선율이 정다운 바야흐로 가을이었다. 나와 가이사의 결혼식은 아델만 영지의 모르테우스 신전에서 열렸다. 자비와 징벌의 신을 모시는 대신관이 결혼식 축언을 올렸고 주신의 성녀가 축복을 내렸다. 우리는 어린 신의 하얀 석상 앞에서 사랑을 맹세했고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풍성한 드레스가 신부의 배를 가렸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인님!”

“주인님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 주인님이야?”

수도로 올라가기 전 나를 보러 왔던 메이아가 눈초리를 뾰족이 세우고 상관을 노려봤다. 남자의 질투는 치졸하고 유치했다. 칼리탄 본인도 그걸 아는지 헛기침 소리가 어색하고 인위적이었다.

“결혼을 축하한다. 후작, 그리고 백작.”

칼리탄이 나와 가이사를 차례로 바라봤다. 세이아의 후계자이자 샤사롯 백작이었던 나는 세이아-샤사롯 후작으로 작위가 통일되었고 가이사는 여전히 아델만 백작이었다. 나에게는 아델만 백작 부인이라는 수식어가, 가이사에게는 세이아-샤사롯 후작 부군이라는 수식어가 하나씩 더 붙게 되었지만 실제로 쓰는 건 각자의 작위였다.

“여러모로 이례적인 결혼이야.”

그 사실이 여전히 못마땅했는지 칼리탄의 눈동자는 굳어 있었다. 황가로서는 세 가문의 혼인을 경계할 수밖에 없어 그랬다.

“결혼 기념으로 수도에 모르테우스 신전을 세우고 싶다는 청원서를 냈더군. 역사가 깊지 않은 신인데 그럴 이유가 있나? 결혼식도 자비와 징벌의 신의 신전이고.”

그러나 내게는 칼리탄을 물렁물렁하게 만들 완충제가 있었다.

“허가해 주실 거죠?”

나는 메이아를 눈짓하며 웃었다. 그녀의 노예 신분을 풀어 준 게 나라는 생색이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는 사이 두 사람의 관계도 변했다. 메이아의 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칼리탄이 메이아에게 느끼고 있는 건 애정이었다. 짝사랑 상대가 노예라면 어쩔 뻔했는가? 노예 출신 황후도 처음인데 노예 황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인인 내가 그녀의 신분을 풀어 주지 않았다면 그는 메이아를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칼리탄은 자신이 떠맡아야 할 사명에 목숨을 거는 지독히 냉정한 인물이었다. 하긴, 또 몰랐다. 평생의 숙원으로 여겨 온 ‘성군’이라는 허울뿐인 감투를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 저버릴 정열이 그에게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쉽게 허락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내 지적에 대번 서느렇게 굳는 눈동자는 몹시 단단하여 그 마음을 쉽게 내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메이아만이 닿을 수 있는 심해일 것이다. 나야 바라지도 않지만.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칼리탄을 노려보는 우리 집 가이사를 챙겼다.

“결혼 축하로 그 정도 선물은 괜찮지 않나요?”

“폐하, 신을 모시는 건 존경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메이아는 순진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귀족들의 이권 다툼에 서투른 게 아니었다. 메이아는 정말 단순히 내 편을 들고 있었다.

“결혼 선물로 하지.”

그것에 짜증이 났는지 칼리탄이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툭 내뱉었다. 내 이름으로 세운 신전이 내 명예를 얼마나 드높일지 계산하는 것보다 짜증이 더 앞선 듯싶었다.

“이만 가지.”

“네? 벌써요?”

“할 일이 많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발길을 돌려 버렸다. 쌩하니 걸어가는 황제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황궁 마법사는 나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수도에서 보자, 메이아.”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손을 흔들어 줬다.

“네!”

밝게 미소 짓는 얼굴이 사랑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나 역시 아쉬움을 느끼며 돌아서는 메이아를 꽤 오래도록 배웅했다.

“임산부가 오래 서 있으면 다리에 부담이 간다고 들었습니다.”

“배가 무거우면 그렇겠지만 저는 아직 그렇게까지 배가 나온 건 아닌걸요.”

“피곤하면 붓습니다. 뒤는 루베니오에게 맡겨 둬요.”

하객들이 다 떠난 건 아니지만 중요한 손님은 배웅한 후였다. 아버지는 특유의 냉랭한 표정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를 향해 고갯짓했다. 멀리서도 우리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가이사의 손에 떠밀려 자리를 옮겼다.

“가깝잖아요. 운동할 겸 걸어갈래요.”

아델만 성과 모르테우스의 신전은 걸어서 가도 될 정도로 가까웠다.

“임산부가 걸어갈 정도로 가깝지는 않습니다.”

“가이사와 나, 우리 둘이서만.”

마차를 향해 손짓하던 가이사는 멈칫하며 나를 돌아봤다.

“약으셨습니다.”

“똑똑한 거죠.”

내 말에 가이사는 한숨을 살짝 내뱉었다. 나는 그의 대답이 이미 정해졌음을 알았다.

“힘들면 안아 달라고 하실 겁니까?”

“물론이죠. 무리는 안 해요. 나만큼 내 건강 잘 챙기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글쎄요. 알면서도 속아 줄 수밖에 없는 게 제 신세라.”

“어머, 저를 부인으로 맞고도 신세 한탄을 하는 거예요?”

가슴팍을 쿡 찌르며 장난치자 가이사의 입꼬리가 스치는 바람처럼 잔잔히 떠올랐다.

“소중한 것일수록 안달복달하게 되는 게 인간의 심리니까요.”

인간. 그가 자연스레 꺼낸 한마디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가이사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가 앞장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충격을 쓸어 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마침 적당한 산책로가 있습니다. 시골 영지인 만큼 꽃도 곳곳에 피어 있어서 꽤 볼만할 겁니다.”

그가 이끈 곳은 울창한 숲길이었다. 나는 표정을 수습하고 태연스레 그의 옆구리에 찰싹 붙었다.

“여기만 어둡네요.”

“나무가 햇빛을 가려서 그렇습니다. 눈이 부시지도 않고 햇빛이 당신 살을 태울 일도 없습니다.”

“그늘이 시원해서 커다란 동굴에 들어온 것 같아요.”

“그 대신 도시보다는 길이 험합니다.”

오르막길이 있었다.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나무판자를 덧대어 만든 계단이 보였다.

“흙이 고르지 못하고 계단 사이의 간격이 넓어서 잘못하면 발이 미끄러집니다.”

“가이사가 있으니까 상관없잖아요.”

넘어지게 안 둘 거잖아?

“재빠르고 강한 남편을 뒀는데 이럴 때 믿어야죠.”

남편이 세계관 최강이라는 점은 이럴 때 좋았다. 내가 여기서 수백 번 넘어지려 해도 전부 막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믿어요, 가이사.”

나는 장난스럽게 외치고는 성큼 걸어갔다. 저 위쪽에 하얀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다. 그런데 걸을 때마다 배가 흔들렸다. 손바닥을 오목하게 오므려 엎어 놓은 만큼 나온 배였는데 고작 그걸로 그랬다. 할 수 없이 배 아래를 붙잡고 조심조심 걸었다. 몇 걸음 걸었다고 숨이 차 금세 헐떡거렸다. 배를 감싸 안고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땅에 떨어진 꽃 한 송이를 주워 들었다. 손가락으로 스치자 꽃잎이 감겨들었다. 사락거리는 감촉이 마음에 들어 계속 그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가이사는 올라오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끼고 돌아보니 계단 아래 멈추어 선 가이사가 보였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시선을 나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가이사? 거기서 뭐 해요?”

그가 못에 박힌 듯 선 채 올라오지 않아서 결국 내가 내려갔다. 쪼르르 뛰어내려 가 앞을 알짱거려도 그는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지 않았다. 나는 들고 있던 꽃으로 그의 손등을 간질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그래요?”

“코를…….”

“코?”

“이런 느낌은 오랜만인데…… 팔꿈치에 얻어맞은 느낌이 듭니다.”

“네?”

“코끝이 찡합니다. 매운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꽃가루 때문인가?”

그의 얼굴을 붙잡아 보려다가 손가락에 걸리는 꽃송이를 느끼고 멈췄다. 가져온 꽃을 버리기는 뭐한데 어디 둘 데도 없었다. 주머니 대신 선택한 건 대충 귓가에 꽂아 두는 것이었다.

“어디 봐요.”

드디어 양손의 자유를 얻었다. 나는 곧바로 그의 뺨을 당겨 나를 바라보게 했다. 그림자 한 줄기를 얹은 중앙의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매끄럽게 빛났다. 오로지 그 눈동자에 매혹되는 건 몹시 이상한 기분이었다. 일렁거리는 붉은 노을이 내 심장을 전율케 했다.

“나를 때리는 건 언제나 당신입니다.”

“…….”

나야말로 뺨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감동에 차 있는 사람에게 이 무슨 말본새란 말인가? 심술이 돋아 그의 뺨을 꾹 눌러 버렸다.

“그 무슨 멀쩡한 아내 가정 폭력범 만드는 소리지요?”

자, 어서 말해 봐요. 아이를 타이르듯 싱긋 위협하며 웃었다. 복사꽃 같은 입술은 열릴 생각을 안 했다. 열리지 않는 입술 대신 바람이 휘몰아쳤다. 위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드레스 자락이 펄럭거리고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눈도 아픕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실타래처럼 배배 꼬았다. 바람에 실려 날아온 꽃잎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눈알이 뜨끈해요. 녹아 없어질 것 같습니다.”

그의 음색이 깊은 떨림을 담아 겨울의 입김처럼 뿌옇게 젖었다. 붙잡아 쥐면 금속의 무딤만 느껴질 것 같던 눈동자가 불꽃으로 엮은 공처럼 흐느꼈다.

그는 지금 울고 있나? 나는 알지 못했다. 눈가는 말라 있었고 눈동자는 습했다.

“그런 기분이 듭니다.”

“어떤 기분인데요?”

“완전하고 완벽한 것. 괴롭고 속상한데 그래도 좋은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

“당신은 걸었고 나는 그걸 바라봤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당신이 멀리 떠나서도 아니고 내가 뒤쫓지 못한 것도 아닌데.”

중요한 건 나를 쫓아 달리는 것뿐이라는 남자는 추격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동면에서 깨어날 날을 숨죽여 기다리는 어린 짐승 같았다.

“숨이 막혔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바짝 흥분한 목소리의 음역대가 높아졌다. 그리고 박자는 빨라졌다. 그는 초조한 손길로 내 어깨를 그러쥐어 당겼다. 나는 그의 가슴에 왈칵 부딪쳤다.

“나는 실감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을. 내 삶을.”

낯설음은 불안했다. 그는 행복해서 무서워했다. 이 시간의 끝을 겁내며 웅크리다가 발작하듯 난데없이 폭발했다. 그는 온갖 나쁜 것에 중독되어 버린 서글픈 존재였다.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상처가 너무 깊어 과거의 불행으로 자해하며, 때때로 불행의 순간으로 불려갔다. 이렇게 행복하고 이렇게 평화로운데. 그래서 도리어 불안해했다. 신마저 원망스러웠다. 그를 이렇게 만든 놈들이 증오스러웠다. 내 앞에 있다면 그 불쾌한 살덩이를 갈기갈기 찢어 그의 평화를 위한 제물로 바쳤을 텐데. 이룰 수 없는 복수심이 깊게 사무쳐 어지러웠다.

“행복해요?”

나는 물었다.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딱딱하게 다문 입술을 바람이 자꾸 말리려 들었다.

“너무 행복하면 그렇다던데. 나도 가끔 그래요. 진부한 표현이지만 지금 이 시간이 꿈만 같아요. 행복해서 꿈같아요. 현실인데 바보같이.”

“…….”

“가이사도 그래요? 당신도 나와 같아요?”

그와 내가 선 이 땅은 깨진 유리 같은 게 아니었다. 단단한 흙더미였다.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영그는 생명의 땅이었다. 우리의 삶은 그런 일상이었다. 그가 지나쳐 온 날들과는 달랐다. 기가 막히게 달라서 때론 삐걱대고 때론 화가 나고 때론 억울할 수 있다. 그의 시작은 그러했고 우리의 삶은 이러하니까.

어느 날, 어느 순간이 온다고 해도 나는 또 물을 것이다. 당신은 행복하냐고. 그리고 내가 먼저 대답하겠지. 나는 행복하다고.

“아.”

시퍼런 불꽃과 새빨간 화염이 애처로이 낙하했다. 슬픔이었고 분노였다.

“같습니다.”

그는 한결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니나와 같아요.”

“응.”

“버거운 기분입니다.”

“벅차게 기쁘다고요?”

내 농담에 그가 드디어 피식 웃었다.

“예. 내 삶이 이렇게 완벽해지는 순간이 있을까 싶어서.”

그는 나를 꼭 끌어안고 숨을 깊숙이 짜냈다. 후우. 미끄러지는 숨이 땅 언저리까지 닿았다가 흩날렸다.

“행복합니다.”

그는 내 눈가를 입술로 꾹 눌러 찍었다. 코와 입술을 지나 턱 아래로 내려간 그가 입술을 열어 목울대를 깨물었다.

“흣!”

심장이 갈래갈래 쪼개어져 전신을 덮고 쿵쿵 뛰었다. 양 귀와 손발 끝까지 심장 소리가 커다랬다.

“그래도 아직 부족합니다.”

혀를 내민 그가 깨문 자리를 혀로 싹 핥았다.

“그럼, 하…… 만족할 때까지 채우고 채워서, 아!”

두렵도록 오싹한 열락이었다. 이런 탁 트인 숲에서, 그것도 대낮에, 열기로 취해 몽롱했다. 주춤 밀려 불룩하게 솟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렸다. 넘어가 나무에 등이 부딪친다고 해도 다칠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그냥 편히 기댈 생각으로 몸을 기울였다. 등이 나무에 닿기 전 떠오른 손이 내 등을 받쳤다.

“밑이 날카롭게 조각난 독입니다. 부어도 빠져나가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의 팔에 걸려 허리가 둥글게 휘어졌다. 뒤꿈치가 떠올라 발끝이 바닥을 긁었다. 발끝에 풀물이 진하게 오르는 게 보였다.

“현명하게 막아, 야죠……! 그리고, 채울…… 거예요.”

입술을 꾹 깨물고 신음인지 말인지 모르게 겨우 뱉었다. 나는 차오른 숨을 뱉어 내며 그의 턱을 손으로 당겼다. 겨우 떨어진 입술은 빨갛게 젖어 있었다. 반드르르한 입술은 꽃잎을 겹겹이 쌓아 만든 듯했다. 나는 촉촉한 그의 입술에 기대 비비며 장담했다.

“아직도 몰라요? 나는 지는 싸움은 안 해요.”

“믿음직스럽군요.”

그는 내 귀와 귀에 꽃은 꽃을 동시에 만지작거렸다. 험상한 살갗이 내 귓가를 따갑도록 문질렀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아 쿵쾅거리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려 주었다.

“가이사, 나는 여기 있어요.”

그의 손끝이 천을 깊게 파고들었다. 우그러진 천 사이로 드러난 살갗에 붉은 손자국이 생겼다.

“당신은 아무 걱정도 하지 마.”

그가 묻는다면 나는 영원토록 말해 주겠다. 나는 여기 있고 당신은 내 곁에서 행복할 거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든 끝없는 구애로 절실한 맹세를.

가이사의 눈가가 울 듯 일그러졌다. 눈이 마주치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깊고도 뜨겁게 부딪쳤다.

* * *

인생에 희(喜)와 비(悲)가 있다면 가이사의 인생에서 그 둘을 나누는 기준은 단연코 니네이나 하나였다.

니나. 고대어로 기쁨.

가이사는 루베니오가 지은 그녀의 애칭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의 장인은 가이사가 그녀의 애칭을 부를 때마다 서느런 눈으로 지그시 노려보지만, 발음까지 달아 멈출 수가 없었다.

루베니오의 기쁨이자 가이사의 기쁨.

루베니오는 신이 니네이나의 영혼을 창조할 때 온갖 달콤한 것들을 섞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가이사는 니네이나의 온몸이 생크림이나 꿀 같은 달달한 것으로 차 있는 건 아닐지 의심했다.

지금도 그랬다. 단내를 폴폴 풍기니 계속 식욕이 도는 게 아닌가? 가이사는 곧 나올 니네이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욕실 문을 열고 곧장 나아가 그녀를 납치했다. 덜렁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 뒤 하녀들이 따르지 못하도록 욕실 문을 닫아 버렸다.

“주, 주인님!”

방해하지 말고 그만 사라지라는 경고에 니네이나의 머리칼을 말려 주던 하녀들이 젖은 수건을 들고 굳어 버렸다. 흡사 천사를 납치한 지독한 악마를 보는 눈길들이었다.

“내가 못살아.”

가이사에게 붙잡혀 온 니네이나는 그의 품에서 익숙히 그를 타박했다.

“머리카락 아직 못 말렸잖아요.”

“제가 말려 드리겠습니다.”

바람으로 불어 말리면 머리카락이 건조해지기 때문에 수건으로 부드럽게 다독거려야 했다. 가이사는 그녀를 침대에 앉혀 놓은 뒤 마른 수건을 가져왔다.

“인형 같습니다. 가만히 앉아 계시니.”

“저, 정말!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목욕으로 상기해 있던 두 볼이 진하게 물들었다. 깨물면 터질 과즙이 무르게 흐르는 복숭아 같았다.

“복숭아 같기도 하고.”

가이사는 그 뺨을 깨무는 대신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금빛 머리 위로 하얀 수건이 둘러졌다. 그는 그녀의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내며 머리를 부드럽게 지압했다.

“으음…….”

커다란 손마디의 안락함에 그녀의 눈가는 나른하게 풀렸다. 최근 니네이나는 졸릴 때 입술을 오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잘 때도 종종 그랬는데 그럴 때면 가이사는 궁금해졌다.

“매번 뭘 그렇게 맛있게 먹는 겁니까?”

“먹다니요?”

“잘 때 입술을 오물거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아이를 가진 이후로.”

“응? 내가 그래요?”

“꿈에서처럼 잘 먹어 주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으음. 현실에서는 이상하게 입맛이 없네요.”

반듯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이사의 가장 큰 걱정은 니네이나의 입덧이었다. 벌써 임신 6개월 차에 접어들었는데 입덧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얼추 마른 머리칼에서 수건을 끌어 내리며 니네이나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지압까지 받은 덕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이사는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으로 몇 번 점검해 본 뒤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과일 말고는 잘 안 먹으려 드시니까 걱정입니다. 고기나 곡식 종류도 드시면 좋을 텐데.”

느리게 떠오르던 속눈썹이 금색 바늘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애가 안 먹고 싶다는 걸 어떡해요?”

그렇지. 안 먹고 싶으면 어쩔 수 없지.

“억지로 먹으라는 건 아닙니다.”

가이사는 빠르게 납득했다. 그녀의 말이 다 옳다고 고개도 열심히 끄덕이고 더 권하지 않았다.

“목말라요.”

그뿐일까? 그녀의 말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 컵에 물을 받아 달려왔다. 목을 축인 그녀를 정중하게 안아 눕혀 드리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 옆으로 와 줘요.”

침대에 누운 그녀는 옆자리를 탕탕 치며 그를 불렀다. 부르면 달려가 옆에 누워야 했다. 가이사는 냉큼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바로 주무실 겁니까?”

“응.”

“……정말 바로 주무실 겁니까?”

“네. 피곤해요.”

“…….”

이후부터는 그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괴로워하는 시간이었다. 달달하고 말랑한 몸을 품에 안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얌전히. 그녀를 배려하며.

어젯밤도 그제 밤도 그는 이렇게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품에 안은 채 아무것도 못 한 채로.

“가이사?”

금방 잠들 것 같았던 니네이나는 눈을 뜨고 그를 재촉했다. 얼른 그거 안 하고 뭐 하냐는 눈치였다.

가이사는 할 수 없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가느다란 어깨를 쓸고 얇은 천 너머로 언뜻 보이는 어깨뼈를 부드럽게 매만지고 유려한 허리 곡선으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그녀는 작은 새처럼 웅크려 둥지를 고르듯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으응…….”

기지개를 펴는 아기 새의 지저귐을 닮았다. 그런데 왜 가이사에게만큼은 다르게 들리는 것일까?

‘내가 미친 건가?’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속 편한 고운 눈가를 흘긋 내려다봤다.

“기분 좋아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 뺨을 붙였다. 포근한 숨이 색색거리며 그의 가슴을 간질였다.

“가이사, 사랑해…….”

가이사는 다급히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그거라도 뜯지 않으면 탁하게 목을 가르는 숨소리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가 생긴 건 싫지 않았다. 그런데 왜 몰아내고 싶을까?

내 아내의 배 속에서 당장 나가. 그는 진심으로 그녀의 배 속 작은 생명체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푸푸. 단잠에 푹 빠진 숨소리에 그의 밤은 끔찍이 깊어 갔다.

* * *

다음 날이 밝았다. 새벽 느지막이 잠이 든 가이사보다 니네이나의 기상이 느렸다. 가이사는 침대로 내리쬐는 햇빛을 맞으며 비몽사몽 조는 니네이나에게로 조심스레 접근했다.

“오늘은 작은 병아리 같네요.”

“으응…….”

마음에 안 든다고 눈초리를 세울 법도 한데 아침이라 반응이 느렸다. 니네이나의 반응을 확인한 그는 미리 준비한 수프를 한 숟가락 떠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고소한 향을 맡고 반사적으로 벌어진 입술 속으로 수프가 쏙 들어갔다.

냠냠. 맛있게 먹더니 또 눈을 꾸벅꾸벅 감았다. 가이사는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조금 더 수프를 먹였다. 작은 스푼으로 딱 다섯 번 먹였을 때였다. 묽은 수프를 우물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 먹을래요.”

“많이 먹어야 건강해집니다.”

그녀에게 가장 잘 통하는 말을 해 보았다. 그러나 마법의 단어는 이미 옛 영광이 된 지 오래였다.

“이제 건강하잖아요.”

“…….”

자신은 건강하다고 철석같이 믿는 순진무구한 얼굴에 가이사는 아연해졌다. 작년, 곧 죽을 것 같던 몸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혼자서 산책할 수 있었고 짧은 거리를 달릴 수도 있었다. 드래곤 하트가 있는 이상 큰 문제가 없다면 수명을 채우기 전에는 죽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 모습을 건강함이라고 봐야 하는가? 니네이나에게는 바위를 부술 악력도 없고 하루 내내 달려도 괜찮은 지구력도 없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봐요?”

“어떤 표정입니까?”

“불쌍하다는? 어휴, 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애를 어쩜 좋지? 약간 이런 느낌인데요?”

“……!”

가이사는 그릇을 얼른 내려놓고 니네이나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내 건강한 두부.”

자그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아프지만 말고 자라 달라는 부모의 바람을 닮아 있었다.

“건강한데 왜 두부예요?”

“건강해도 두부입니다.”

“그러니까 왜요?”

“두부처럼 생겼으니까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가이사는 화제를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자면서 꿈을 꾸지는 않았습니까?”

“제가 또 입술을 오물거렸어요?”

응. 내 가슴에 대고. 가이사는 차마 말 못 할 고충을 목구멍에 눌러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는 꿈은 아닌데…… 말이 나왔어요.”

“말고기가 먹고 싶습니까?”

지금 당장 말의 목을 쳐 신선한 말고기를 구해 오겠다는 의지로 그의 몸은 움찔거렸다.

“아니요.”

단호한 거부에 들떴던 눈동자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이 빠졌다.

“말을 타고 달리는 꿈이었어요. 왜 그런 꿈을 꿨는지 모르겠네요. 별 의미는 없겠지만.”

“말을 타는 건 위험합니다.”

“응. 나도 말을 타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런 꿈을 꿨다는 것뿐이죠.”

임신한 아내가 바라는 건 다 들어주고 싶은 남자에게 그녀의 꿈은 어려웠다. 니네이나는 잔뜩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가이사를 보고 피식 웃었다.

“우리 아기가 말 인형이라도 갖고 싶은 걸까요?”

“인형?”

“슬슬 아기 물건을 만들 때가 된 것 같아요. 애착 인형 하나 정도는 직접 만들어 줘야지요.”

“목각 인형도 괜찮습니까? 가벼운 나무를 둥글게 조각한다면 입에 물거나 손으로 흔들고 놀아도 다치지 않을 겁니다.”

이 세계의 인간은 강하다. 이 세계의 아기들도 현대의 아기들보다 강했다. 당연히 안전의 기준도 달랐다.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니네이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곧바로 백색 나무와 조각칼을 들고 돌아왔다.

“가루가 날릴 테니 밖에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니네이나가 바람을 쐴 수 있도록 발코니로 데려왔다.

“위험하니까 여기 앉아 계세요.”

니네이나는 가이사 앞에 앉아 그가 꼼꼼히 둘러 준 숄을 만지작거렸다.

“가이사를 닮았다면 튼튼하겠어요.”

“저를 닮습니까?”

“왜 그런 이상한 표정이에요? 가이사가 아빠니까 가이사를 닮아야죠.”

가이사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혐오하는 쪽에 가까웠다. 닮은 것은 원하지 않아야 했다. 마찬가지로 혐오스러울 게 아닌가? 그런데 예상외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니네이나의 눈치가 보여서가 아니라 정말 불쾌한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이사는 그것이 이상하고 놀라워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니네이나는 왜 또 그런 표정이냐며 깔깔거렸다.

“첫째는 아빠를 닮는 거 알아요?”

“그렇습니까?”

“생물학적으로 부성애는…… 음, 말하기 복잡한데 그렇대요. 엄마는 몸으로 낳아 확실한데 아빠는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아기가 보여 준대요. 나는 아빠의 아이라고.”

가이사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무를 깎았다. 귀로 한 번 듣고 머릿속으로 여러 번 재생하는 과정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같은 행동을 세 번 반복했을 때 단단한 나무를 무른 과일 깎듯 쉽게 긁어내던 손길이 멎었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니네이나를 훔쳐봤다. 그녀는 하녀들이 내려놓은 간식은 손도 대지 않고 우유 한 잔만 꼴깍거리고 있었다.

“당신의 몸에서 나를 닮은 것이 태어나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이사는 그런 상상을 했다. 니네이나의 몸속 깊이 침식해 그녀를 자신으로만 채우는 생각. 그를 닮았어도 그 살과 뼈는 그녀의 몸속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가이사는 자신의 태를 닮은 아기가 그녀의 몸속에서 자라날 거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곧 태어날 귀여운 아기를 생각하는 표정치고는 꽤 섬뜩한데요?”

“확실히 저는 루베니오 같은 근사한 아버지는 못 될 겁니다.”

“우리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던 거예요? 목표를 너무 높게 잡은 거 아닌가요?”

놀리듯 말하는 니네이나의 눈앞으로 그가 꽉 차올랐다.

“저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 팔을 짚고 몸을 낮춘 남자는 깊이 입을 맞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입술을 농밀하게 핥았다. 하얀 우유가 묻어 나오며 지문이 낙인처럼 남았다. 그의 눈동자는 손대면 델 것처럼 끓었다.

“당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니네이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입술 대신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어?”

그녀는 이마에 닿은 뜨거운 입술을 느끼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이걸로 끝?’

눈을 뜨자 부드럽게 웃고 있는 가이사가 보였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어린 여동생 다루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언제 들끓는 눈을 했냐는 것처럼 자리에 앉아 다시 사각거리며 목각 인형을 조각했다.

“…….”

대충 말 모양을 만든 그는 하녀에게 사포를 넘겨받아 겉을 문질렀다. 니네이나는 셔츠를 걷고 팔뚝에 힘줄이 서도록 열심히 사포질하는 가이사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미 근사한 아버지 같은데?’

이날 이후로 그녀는 아이가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을까 걱정하던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 * *

사람의 몸이라는 게 참 신기했다. 그렇게 음식이 안 넘어가서 다른 사람들 속을 썩였는데 거짓말처럼 달라졌다. 낮잠을 자다가도 한 번씩 벌떡벌떡 일어나 먹을 걸 찾았다. 바로 지금처럼.

“에그 샌드위치 먹고 싶어.”

먹고 싶은 걸 바로 먹지 않으면 마음이 또 달라졌다. 내 섭취량에 유난히 집착하는 가이사는 항시 대기하고 있다가 내 말에 바람처럼 반응하고는 했다. 튕기듯 일어나 침대를 빠져나간 그는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샌드위치를 들고 위풍당당 돌아왔다.

“정원에서 먹고 싶어요.”

이걸 입덧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임신 후 나는 특이한 버릇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원하는 걸 원하는 장소에서 먹어야 몸과 마음이 배불렀다. 지금처럼 들어주기 쉬운 조건은 큰 상관이 없지만 전에는 한여름에 이글루를 찾았다.

이글루에서 뜨겁고 얼큰한 탕과 즉석에서 구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가이사는 꽤 고생을 했다. 이글루 외에도 다사다난한 사건이 많았는데 태아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것과 원하는 장소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않으면 급격히 우울해졌다.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도 눈물이 퐁퐁 떨어져 호르몬의 신비에 나 또한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대체 어떤 애가 태어나려고 유난인지.”

“먹고 싶은 걸 원하는 곳에서 먹겠다는 게 뭐가 유난입니까?”

“가이사를 자꾸 귀찮게 하니까 그렇죠.”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다 즐겁습니다. 힘들지 않았어요.”

질문만 해도 귀찮아하며 대답하지 않던 과거의 그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 남자와 내 남편이 동일 인물이 맞는지 가끔은 헷갈릴 정도였다.

“먹고 싶은 걸 떠올려 줘서 감사합니다.”

“그게 감사할 일인가?”

“적어도 제 마음이 편해지는 일은 맞습니다. 최근의 저는 그 어떤 때보다 기분이 좋습니다. 천직 같아요.”

“천직?”

“두부를 부풀리는 일 말입니다.”

“부풀……려요?”

“가뜩이나 예쁜데 귀여워지기까지 해서 제정신을 차리기가 어렵습니다. 당신은 그만 예뻐져도 됩니다.”

내가 드레스야 뭐야? 부풀리기는 뭘 부풀린다고. 속으로는 툴툴댔지만 뺨에 닿는 입맞춤이 싫지 않았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정원에 테이블을 놓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는 들고 있던 샌드위치 접시를 하녀에게 넘기고 나를 부축했다. 배가 많이 부르기 전 침실을 1층 방으로 바꾸어서 위험한 것도 없는데 그는 살벌한 얼굴로 주위를 경계했다. 바닥에 물이라도 고여 있으면 담당 하인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눈초리였다. 바닥을 쭉 훑어보던 그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서늘한 눈빛을 풀고 나를 내려다봤다. 차갑던 눈동자에 불꽃이 톡 떨어져 물감 퍼지듯 온도를 올렸다.

“배가 점점 불러 오는 게 신기합니다. 동그란 수플레 같아요. 핥으면 생크림 맛이 납니다.”

밤새 내 배를 할짝거리는 이유가 그거였냐! 그는 요즘 요령이 생겨서 저런 말은 다른 사람 귀에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귓가에 바짝 붙여 소곤거리면 내가 그의 입을 막지 못하고 부끄러움으로 부들거린다는 걸 알았다.

나는 화끈한 귀를 손으로 감싸며 그를 흘긋거렸다. 날 놀려 놓고 뭐가 그렇게 좋다고 저런 얼굴인지. 누가 보면 행복한 세상만 아는 사람인 줄 알겠다. 반짝거리며 흐드러지는 빛깔이 아름다워서 나는 무지한 척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당신이 불편하지만 않다면 더 좋았을 텐데.”

잔물결이 일던 눈가가 먹구름처럼 애틋하게 흐려졌다. 다시 웃었으면 해서 그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이제 튼튼해서 괜찮아요.”

그는 내 손 크기를 가늠하듯 손바닥을 맞대었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감았다.

“차라리 내가 임신할 걸 그랬습니다.”

“풉! 뭐, 뭐요?”

배가 둥그렇게 부른 가이사가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차마 오래는 떠올리지 못할 모습이었다.

“모르테우스 신이시여…….”

그의 아버지를 부르며 장난스럽게 눈을 휘었다.

“저는 심각하게 말한 겁니다.”

삐쳤나? 다 같은 무표정이지만 뾰로통한 기색이 느껴졌다.

“루베니오는 입덧하는 니나를 보면 꼭 저를 노려봅니다.”

“아. 그거 알죠.”

나는 루베니오의 표정을 따라하며 눈꼬리를 차갑게 굳혔다.

“임신은 둘이 같이 했는데 내 딸만 죽어 가고 너는 멀쩡해?”

비슷했으려나?

“이런 느낌이잖아요.”

“……예. 루베니오가 그럴 때면 차라리 마음이 편합니다.”

질타를 받는 게 속 편하다니 뭐라고 해야 할지.

“그래도 그건 안 돼요. 제 취향이 아니란 말이에요.”

팔짱을 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 입술은 그의 귀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당신 매력은 복근이니까 그거 잘 지켜요. 관리 잘하고.”

때마침 바람이 휭 불어와 그가 입은 셔츠를 날렸다. 탄탄한 배에 찰싹 붙은 셔츠 위로 보이는 볼록한 윤곽을 나와 그가 동시에 바라봤다.

“단추 몇 개 더 풀고 물 몇 방울만 뿌려 주면 완벽하겠는데……?”

“그렇게 해 볼까요?”

“…….”

내가 미쳐. 혼잣말이 밖으로 흐른 걸 몰랐다. 뒤늦은 부끄러움에 발 빠르게 도망쳤다.

“세 살배기 아이도 아닌데.”

나직한 음성은 바람에 매달려 가까워졌다.

“뛰지 말라는 소리를 몇 번이나 더 해야 합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쫓아온 그가 내 팔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임신을 했어도 배만 나왔지 다른 부위는 크게 살찌지 않았다. 양손을 테이블에 대고 지탱하면 앉고 일어나는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었다.

“압니다.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부득불 나를 붙들어 앉힌 뒤 쿠션 두 개를 각각 내 등 뒤와 배 위에 올려놓았다.

“흐응. 그렇게까지 분담하고 싶다면 이렇게 나눌까요? 배 속에 있을 때는 내가 돌봤으니까 태어난 뒤에는 가이사가 아기를 돌보는 거예요.”

“출산 전까지 이 책을 완벽히 숙지하겠습니다.”

또 언제 사 왔는지 그의 품에서 손바닥만 한 책이 나왔다.

「기초 육아 상식」

그 책에 대한 신뢰가 꽤 대단한지 안 하겠다는 말은 안 했다.

“가이사가 가져온 책 중 유일하게 건전해 보이네요. 표지도 하얗고.”

“건실하고 올바른 도움이라면 다른 책들도 충분히 주었습니다.”

그는 샌드위치를 감싼 종이를 먹기 좋게 풀어 내 손에 건네주었다.

“그날도 니나가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날이요?”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언제요?”

“아기가 생긴 날.”

그를 탐닉하는 버릇이 든 눈은 야릇하게 입술을 쓰는 혀를 놓치지 않았다. 그날 저 붉은 입술이 삼킨 살결이 화끈거렸다. 내 위로 붉은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

도움이 되긴 했네. 나는 부푼 배를 습관처럼 문지르며 인정하고 말았다. 날이 좋아 자꾸만 배가 부르는 가을이었다.

* * *

「만삭의 겨울. 가이사가 달력에 표시한 예정일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통이 왔다. 우리 아기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태어……」

“으흑!”

잠깐 멈췄던 진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들고 있던 펜을 떨어트리고 배를 움켜쥐었다.

“육아 일기는 다음에…….”

그러게 육아 일기는 아기 태어난 뒤에 쓰라고 하지 않았냐며 안타까워하는 얼굴이 왠지 모르게 얄미웠다.

“가이사, 이…… 나쁜 놈!”

“니나?”

“아프다고!”

빛에 말려도 색이 바래지 않는 새까만 머리칼들이 내 손에 쭉쭉 뽑혔다.

“많이 아픕니까?”

“그럼! 당연히 아프지! 당신이 이 고통을 알아?”

가이사는 제 머리가 뽑히든 말든 내 손을 내버려 두었다. 흩날리는 머리칼을 보고 놀란 건 나였다.

“헉!”

아니지. 아니지. 내가 아파 죽는다고 자기는 더 아픈 얼굴을 하는 내 소중한 남편에게 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흐윽. 가이사, 내가 아까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미쳤나 봐. 미안해요. 사랑해요. 가이사가 제일 좋아. 흐어엉.”

“니나, 진정하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깨물어도 되고 꼬집어도 되고 때려도 됩니다.”

잡고 뜯으라는 듯 그는 내 손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 주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막 도착한 산파와 의원을 닦달했다.

“애는 언제 나오는 거지?”

“진통 주기가 지금보다 더 빨라져야…….”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가만두고 보기만 하겠다는 건가?”

나는 그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어루만지며 마음을 다스리려 했다. 그런데 복부가 꽉 웅크려 들었다. 까슬까슬하고 커다란 돌덩이가 내장을 스치며 장기를 밀어내고 터트릴 듯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무거워. 아파. 힘들어. 아파. 아파. 그는 바들바들 떠는 내 손을 붙잡아 주며 다시 의원과 산파를 재촉했다.

“쓸모없는 것들. 애를 끄집어내든, 윽!”

눈앞이 희게 점멸하며 이성이 끊겼다.

“가이사, 이 나쁜 놈아!”

나는 엉엉 울며 가이사를 때리다가 그의 머리칼을 잡아 뜯었다.

“니나, 다 괜찮습니다. 제가 곁에 있습니다.”

“그게 문제잖아!”

“…….”

“흐어엉. 아파…….”

가이사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나는 화를 냈기 때문에 그는 죄인처럼 머리를 수그려 내 분노를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광란의 진통이 잦아들면 나는 거침없이 헤집어진 그의 머리통을 붙잡고 끅끅거렸다.

“가이사, 미안해. 사랑해! 내가 가이사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아파서 제정신이…… 흐윽!”

내 손에서 까만 머리칼이 우수수 떨어지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의원과 산파가 움직였다. 이 난리를 친 것에 비하면 진통이 길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이 알려 준 대로 심호흡하며 아래에 힘을 줬다.

“으아아앙!”

세 번? 네 번? 그쯤 하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 손에 머리통을 얌전히 내주고 있던 가이사의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후우.”

그는 깊이 숨 쉬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고생 많았습니다, 니나.”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처음 느낀 건 생명의 탄생에 대한 경이로움 같은 게 아니었다. 드디어 끝났구나. 지독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감이었다. 나는 마찬가지로 수고한 가이사의 머리칼을 놓아주었다. 힘이 빠져 손이 저절로 미끄러진 것이었다. 손만 그럴까 다리도 덜덜 떨렸다. 사지 모두 통제를 벗어나 후들거리는 것에 놀라 아이를 잠시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으아앙!”

목청 큰 아기가 얼마나 씩씩하게 우는지 덕분에 정신이 돌아왔다.

“내 아기…….”

급하게 아기를 찾자 피막이 들러붙어 쭈글쭈글한 아기가 살짝 보였다.

“아드님이세요.”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앙앙 우는 아기가 가엽고 예뻐서 눈물이 핑 돌았다.

“탯줄은 직접 자르시겠어요?”

아기를 안아 든 의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가이사에게 물었다.

“아니.”

그는 냉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거절하며 땀으로 촉촉한 내 이마에 이마를 비볐다.

“왜…… 탯줄 잘라 줘요.”

내가 이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는지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우물쭈물하다가 일어섰다. 아기를 향해 걸어가는 옆모습이 꽤나 창백해 보였다.

“여기를 이렇게 자르시면 됩니다.”

의원이 가위를 가이사에게 건네줬다. 그는 그녀의 손에 있을 때보다 배는 작아 보이는 가위를 들고 얼굴을 찌푸렸다.

싹둑! 눈을 질끈 감으며 탯줄을 자르는 옆모습이 낯설었다. 탯줄 자르는 게 무섭다고? 저 사람이? 그러고 보니 피범벅이 되어 있을 아래도 전혀 보지 않았다. 보기 무섭다는 기색이었다.

내 참. 설마 가이사가 저런 얼굴을 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탯줄 자르기를 끝낸 가이사가 황급히 내 옆으로 돌아왔다.

“가이사, 아기 이름…… 생각해 봤어요?”

나는 산파와 의원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씻겨 데려온 아기를 안아 보며 그를 향해 물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느라 갈라지고 쉬어 예쁘지 않은 목소리인데도 그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쉬겠다는 얼굴을 했다.

“이름은 아직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몇 없는 새까만 머리칼과 작지만 반듯하게 선 콧날이 나보다는 가이사를 닮아 있었다. 나는 하염없이 아기를 바라보다가 속삭였다.

“생각해 봐요. 그건 당신이 해 줘요.”

그의 눈길은 그제야 처음으로 아기에게 닿았다. 그는 세상에 막 걸음한 우리 아들을 낯설게 바라봤다. 무리를 이룬 알파 늑대가 갓 태어난 새끼 늑대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와 닮은 머리칼을 가진 아기를 보는 새까만 눈동자는 머지않아 영롱하게 이지러졌다. 그 역시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 * *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의 작명 실력을 믿지 못했다. 그가 이름 후보를 뽑아 오면 선별과 수정을 거쳐 예쁘게 지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설마 후보군도 없이 선뜻 이름 하나를 확신할 줄은 몰랐다.

─엘리우스. 새벽의 첫째 별이라는 뜻입니다.

예상외로 낭만적인 이름이었다. 아기를 노려보며 씨름하기에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마음속에 미리 정해 둔 것처럼 거침없이 정한 이름을 나와 아기는 받아들였다. 아기의 이름은 엘리우스. 애칭은 엘시라고 지었다.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가이사는 아기 침대에 누워 노는 엘시를 내려다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당신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제가 이렇게 이상하게 생겼습니까?”

뭐래? 내 새끼 예쁘기만 하거든! 내 아기를 천재라고 믿는 엄마의 팔불출이 아니었다. 엘시는 객관적으로 봐도 예뻤다. 엄마 아빠 나눌 것 없이 출중하니 당연한 일이지만 엘시는 몹시 사랑스러운 얼굴로 태어났다.

처음 아기를 보고 가이사를 닮았다고 생각한 게 착각이 아니었다. 퉁퉁 불었던 살이 뽀얗게 변하자 점점 더 가이사를 닮아 갔다. 오죽하면 내 아버지인 루베니오가 엘시 얼굴을 처음 보고 놀라며 가이사와 엘시를 번갈아 쳐다봤을까? 가이사가 둘로 증식했다는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닌 게 분명했다.

“엘시 그만 노려보고 이리 데려와요. 맘마 먹이게.”

가이사는 몸으로 하는 건 금방 능숙히 배웠다. 아기를 돌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저만큼 안정적인 자세로 아기를 안는 초보 아빠가 또 있을까? 안전이 뭔지 제대로 보여 주는 두꺼운 팔은 엘시의 훌륭한 요람이 되고는 했다.

“무거우니 제가 들겠습니다.”

수유 방석에 아기를 눕히고 방석에서 아기가 떨어지지 않게 받치는 것도 가이사의 몫이었다. 덕분에 나는 손목 아플 일 없이 아기를 안아 젖을 먹일 수 있었다.

젖 냄새를 맡은 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귀여워라.”

쪽쪽. 힘차게 빠는 입술이 깜찍했다.

“아기라 앞이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꼭 이렇게 내 눈을 바라봐요.”

“이럴 때 보면 저를 닮았습니다. 니나를 좋아하는 게.”

“닮았다는 게 그쪽이에요? 밖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다 외모가 닮았다고 할 텐데. 봐요. 눈동자 색도 똑같잖아. 영롱한 붉은색.”

“다릅니다. 엘시의 눈은 푸른 새벽 호수 밑에 가라앉은 루비 같습니다. 새하얀 손으로 물과 함께 건져 내야 겨우 봉인을 풀 수 있는 그런 색.”

음. 나로서는 저 심오한 대답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가만 보면 가이사는 말이에요, 시 써도 되겠어요. 노랫말을 짓는다거나. 음유 시인 해도 되겠어요.”

풉! 생각해 보니 웃겼다. 하프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는 가이사라니. 살벌한 얼굴로 감미로운 사랑 노래를 부르는 건 너무 안 어울리잖아.

“저는 말재주가 없는 편입니다.”

“그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가끔 그 생각이 흔들린단 말이죠.”

말재주가 없는 척하는 건 아니고?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가이사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야!”

자기는 안 보고 둘이서만 이야기하는 게 심통 났는지 엘시는 내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머리카락만 조금 당긴 건데요.”

가이사는 아기의 손을 붙잡고 내 머리칼을 살살 풀어냈다.

“엄마를 아프게 하면 안 돼.”

그리고 훈육도 했다. 단호하고 냉정한 아빠의 눈빛을 가볍게 받아 낸 아기는 그러든가 말든가 젖이나 쪽쪽 빨았다.

쪽쪽.

“…….”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한데 이럴 때의 가이사는 종종 아기의 얼굴을 노려봤다. 긴장하면 어깨가 수축하는 것처럼 어색함을 못 이겨 그러는 듯싶었다. 눈싸움의 승자도 엘시였다. 가이사는 아이를 어려워하며 먼저 눈을 피했다.

저런 건 아직 서투네. 서툴러.

“우리 아기 귀엽죠?”

아기를 얼러 얼굴을 보여 주었다.

“엘시는 당신을 닮았습니다.”

“네? 어디가요?”

진심으로 의아해졌다. 이목구비는 물론이거니와 눈과 머리칼 색까지 아빠를 닮았는데 엘시의 어느 부분이 나와 닮았다는 걸까?

“냄새가.”

“냄새?”

그게 닮을 수 있는 부분이었나?

“엘시에게서는 당신과 같은 냄새가 납니다.”

커다란 어깨를 굽혀 몸을 만 그는 턱을 내 어깨 위에 살짝 올렸다.

“우유 냄새.”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그의 상체는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촉촉이 번져 가는 따뜻한 숨결과 함께 가라앉았다.

“꽃 냄새.”

이르게 찾아온 봄 햇살이 그가 입은 와이셔츠 위로 흘러내렸다.

“우유에 장미 꽃잎을 띄운 냄새가 납니다. 향긋하고 부드럽습니다.”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 주름의 굴곡이 매끄러웠다.

“냄새로 구분하는 거예요?”

후각이 발달한 짐승들은 그런 식으로 새끼를 구분하기도 한다던데. 인간도 할 수 있는 거였나?

“예.”

닮긴 뭐가 닮았다는 건지 코로 자꾸 킁킁거리는 게 귀엽고 웃겼다.

“당신 살 냄새가 납니다.”

“내 살 냄새요?”

“다른 놈에게서 그 냄새가 났으면 ……텐데.”

“뭐 했을 거라고요?”

그는 못 들은 척 눈을 나붓이 감았다. 섬뜩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촘촘한 속눈썹에 가리어졌다.

“나와 당신의 아이니까 봐주는 겁니다.”

깜빡. 금세 눈을 뜬 그는 젖을 빨고 있는 아이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아이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왈칵 찌푸려졌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그저 괴롭히는 아빠를 피해 내 가슴으로 얼굴을 팍 파묻었다.

가이사는 아가의 손가락을 앙 하고 깨물었다.

“……!”

아이는 곧바로 칭얼거리며 가이사의 뺨을 손으로 마구 밀었다.

“같은 냄새가 나는 게 꽤 귀엽기도 하고.”

아이를 괴롭히며 지그시 웃는 얼굴이 황당했다. 그러나 감동이었다. 그가 나 아닌 다른 인간에게도 친숙하게 구는 모습이.

“나쁘지 않습니다. 니나가 엄마이고 내가 아빠인 게.”

나는 정말 그의 저런 얼굴에 약했다. 무표정한 얼굴이 사르르 풀릴 때. 꽁꽁 언 빙하가 햇살에 녹아내렸다. 똑똑 떨어지는 처연한 물방울이 상쾌하고 구슬퍼서 떨어지는 것들을 다 핥아 주고 싶었다.

“이제 다 먹었나 봅니다.”

그는 엘시를 안아 들어 트림을 시켰다. 목을 잘 받쳐 안아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이 능숙했다. 이렇게 보면 가이사는 좋은 아빠였다. 보통의 귀족들은 가이사나 나처럼 아기를 직접 돌보지 않았다.

“지금 씻길 거예요?”

“예.”

그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엘시가 소화를 시키고 나면 욕실로 데려가 씻겼다. 아기를 직접 씻기는 귀족 아빠는 이례적일 것이다.

나는 욕실로 걸어가는 그의 뒤를 서둘러 쫓았다. 그는 한 손으로 엘시를 안아 들고 작은 아기 욕조에 물을 받았다. 손을 휘적거리며 온도를 맞추고 안에 넣어 주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우응!”

엘시가 괜히 투정을 부리자 장난감을 하나 집어 삑삑 누르는 것도 기계적이었다.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올린 셔츠 소매는 어느새 진한 색으로 물들었다.

“지금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라는 거 알아요?”

“엘시를 씻기는 거 말입니까?”

“응.”

“왜……?”

그는 엘시를 한 손으로 붙잡고 손을 툴툴 털어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겼다. 탄탄한 팔 근육을 따라 번들거리는 물방울이 팔꿈치를 타고 뚝 흘러내렸다. 나는 시선으로 물방울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순진한 척 고개를 기울였다.

“응?”

“왜 좋아하냐고 물었습니다.”

“응?”

“…….”

소매를 척척 걷어붙인 팔이 물에 젖는 게 섹시해서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헤헤 웃는 내 얼굴에서 절대 알려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었는지 그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혼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능숙한 기계처럼 엘시를 씻기는 손길이 분주했다. 그의 팔은 젖어 들고 찰박거리는 물소리는 고요하게 흘렀다.

* * *

“꺄아아!”

첨벙첨벙! 욕실에서는 엘시가 물을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아기가 내는 소리라고 보기에는 심하게 우렁찼다.

“씩씩하네, 우리 엘시.”

엘시는 커 갈수록 물놀이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물장구치는 걸 가장 좋아했는데 아기라도 가이사 2세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엘시를 씻긴 후의 가이사는 쫄딱 젖은 모습으로 나와 아기 방으로 들어갔다. 닦은 후 보습까지 충분히 챙기고 아기를 재운 뒤에야 그 방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본격적인 후계 수업의 일환으로 아직 봐야 할 서류가 많았지만 깃펜을 내려 두고 가이사에게 다가갔다.

“아기 돌보느라 힘들죠?”

벗은 상체에 뺨이 닿자 살 것 같았다. 육아는 가이사가 전담해서 하는데 지치고 힘든 건 오히려 나였다. 나는 그의 서늘한 어깨뼈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간지러워 움츠러드는 어깨의 등 근육이 크게 꿈틀거렸다. 어쩜 이렇게 탄탄할까 싶어 이로 자근거렸다. 꽤 흰 피부인데도 보는 것만큼 연약하지 않았다.

“이게 사람 피부야, 드래곤 가죽이야?”

날카로운 송곳니로 꾹 눌러도 까딱하지 않는 강철 피부를 과일 깨물어 먹듯 아삭거렸다.

“감각은 제대로 느낍니다.”

“그래요?”

나였다면 진즉 피부가 빨개졌을 텐데 그의 등은 멀쩡했다. 나는 손끝을 세워 어깨부터 허리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바닥이 매끈한 허리 곡선 사이로 쑥 사라졌다. 허리와 엉덩이를 잇는 딴딴한 굴곡을 타고 올라가 배꼽 아래쪽도 훑었다. 그의 몸을 탐색하는 건 꽤 재미있었다. 내가 이토록 과감하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햇볕에 잘 타지 않는 살결은 황홀한 다이아몬드 조각처럼 빛났다. 손가락을 꽉 움켜쥐어도 좀처럼 자국이 남지 않는 피부는 으스러지지 않는 강철 같았다. 이번에는 다시 그를 껴안고 가슴을 손으로 꼭 쥐었다. 어느 정도로 힘을 줘야 그가 내 가슴을 움켜쥘 때처럼 모양이 변할까 궁금했다.

꾸욱. 꾸욱. 강하게 힘을 줘야만 손 틈으로 살덩이가 튀어나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으며 가슴 근육의 율동을 관찰했다.

“하아.”

긴 한숨이 내 귓바퀴를 타고 질척하게 흘렀다. 검은 안개가 고막 안을 먹먹히 채웠다.

“제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지.”

눈을 치뜨고 천장을 노려보던 그는 순식간에 몸을 비틀어 나를 안아 들었다.

“까, 깜짝이야!”

“이런 의미 아니었습니까?”

좁은 방이 아닌데 큰 보폭으로 몇 발자국 걷자 바로 침대에 닿았다. 나를 침대에 앉힌 그는 두 무릎 사이에 내 하체를 가두며 천천히 몸을 숙였다.

“이런 의미가 뭐, 뭐죠?”

요요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휩쓸려 몸이 무너졌다. 큰 파도에 떠밀리듯 아래로 푹 꺼졌다. 머리칼이 퉁 튕겨 오르고 침대가 부드럽게 출렁였다. 그의 머리칼 끝을 붙잡고 있던 물방울이 내게로 떨어졌다. 차가운 물방울은 뺨의 열기에 바글바글 끓었다.

“노골적인 유혹이라고 생각했는데.”

거친 손마디가 눈가와 광대를 쓱 훑었다. 미적지근한 물방울이 넓게 퍼지며 순식간에 증발했다. 그윽한 체향에 물 냄새가 섞여 신비롭게 느껴졌다.

뚝. 뚝. 그는 물이 떨어지는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반듯한 이마에는 흔한 잡티 하나 없었다. 젖어 새까만 머리칼과 하얀 피부, 그리고 붉은 입술이 괴담 속 요사스러운 포식자 같았다.

“윽…….”

울먹거리는 내 신음에 입술을 맞출 듯 고개를 숙이던 그가 멈칫하며 눈을 들었다. 위로 치뜬 눈동자는 나를 탐색하다가 웃음기를 붉게 머금었다.

“니나.”

붉은 입술과 두 개의 눈은 이지러지는 세 개의 붉은 달처럼 까마득히 휘어졌다.

“사랑합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겨 조각난 세계에 홀로 유리된 기분이었다.

“으응. 빨리…….”

뭘 재촉하는지 모르는 순진한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그를 마구 끌어당기며 매달렸고 우리는 바람에 부딪혀 엉키는 나뭇가지처럼 몸을 맞댔다. 그는 내가 한 짓을 되돌려 주며 온몸을 느리게 어루만졌다. 여유로운 손길에 내 숨결은 곡조를 높여 갔다.

쾅! 쾅! 내 몸은 귀가 쨍하도록 내리치는 피아노 건반이 되었다.

“하아.”

다급하게 몰아쉬는 숨을 그가 앗아 갔다. 젖어 든 입술이 비껴가고 깨물렸다.

“아!”

그는 허리를 꽉 움켜쥐며 나를 머금었다. 촉촉한 입술은 이슬에 젖은 꽃잎 같은데 말랑한 살덩이의 압박감이 거셌다. 그는 포악하게 빨고 거침없이 휘저었다. 점막을 수색하며 단단히 틀어막기도 했다. 온몸에 그가 파고들어 와 꿈틀거렸다. 나는 손댈 수도 없는 은밀한 공간까지 마구 침범해 왔다. 상상하기 어려운 배 속 깊은 곳까지 그의 손이 쑥 밀려와 파헤쳤다.

“흐, 으응!”

죽겠어. 죽겠다고. 그는 울먹거리며 젖힌 내 턱을 한입에 삼키며 깨물었다. 그는 환히 웃고 있었다. 생리적인 눈물로 젖어 흐릿해진 시야에 만족스럽게 웃는 눈꼬리가 보였다. 잡을 만한 셔츠 옷깃도 없어 나는 있는 힘껏 손톱을 세워 그의 등에 매달렸다. 그는 내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며 드레스를 위로 끌어 올렸다. 나는 금방 몸을 파묻고 세차게 경련하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앞까지 와서 망설였다.

“이대로 그냥 하면 둘째 생겨.”

야 이 나쁜 놈아.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좀처럼 쓰지 않는 과격한 언어들이 샘솟았다.

“잠깐이면.”

“그게 내가 바라는 거거든!”

이번에는 딸을 낳겠다는 야심 찬 계획까지 있었다.

“둘째도 직접 낳을 겁니까?”

뭘 몰랐다는 듯 묻는 건지. 내가 아기를 낳을 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던 것 때문에 입양할 거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당연하죠. 아픈 기억은 금방 잊어요. 호르몬이, 아니 아무튼. 괜찮다고요.”

“또 내 새끼를 품어 줄 겁니까? 그렇게 힘들어 했는데도?”

“당신이랑 또 아기 가지고 싶어요.”

“뭐?”

“쉬. 그만 말해요.”

나는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막으며 본격적으로 거사를 준비했다. 우리 두 사람의 옷이 땅으로 툭툭 떨어졌다. 내가 입을 맞추며 끌어안자 가이사는 크게 흥분하며 가슴을 들썩였다.

“나를 좋아합니까?”

아파도 괜찮을 정도로? 그렇게 울었으면서도 또 이럴 정도로? 그는 한마디를 했는데 나는 그 뒤의 말까지 상상했다.

“응?”

간절하기까지 한 물음에 새삼스러워졌다.

“사랑해요, 가이사.”

그동안 손가락으로는 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말해 주었는데도 그는 또 감동에 찬 눈을 했다. 기쁨으로 흠뻑 젖은 그가 달려들어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나 하나가 될 수는 없었다.

“으아아앙!”

옆방에서 자고 있던 엘시가 저만 두고 뭐 하냐는 듯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이, 일찍 깼네, 아들아?

* * *

가이사는 다른 사람에게 엘시를 맡기는 걸 나보다도 더 꺼렸다.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인 듯싶었다. 그런 가이사에게도 나 말고 유일하게 신뢰하는 이가 있긴 했다. 루베니오 세이아, 바로 내 아버지였다.

“오셨어요, 아버지?”

“그래, 잘 지냈니?”

“그럼요. 저야 불편할 게 있나요? 엘시는 가이사가 거의 다 돌보는데요.”

루베니오에게 가이사는 영원히 마땅찮은 사위일 것이다. 그래도 엘시를 낳고부터는 관계가 조금 풀렸다. 정말 딱 눈곱만큼.

“고생이 많군.”

말뿐인 무감정한 치하에 가이사는 마찬가지로 무표정하게 대처했다.

“고생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러고는 방패막이 삼듯 엘시를 아버지 품에 반강제로 떠안겼다.

“순한 편이라.”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자주 들러 꼭 엘시를 보고 갔다. 아이를 달랑 안아 들고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매일 똑같이 못마땅해하긴 했지만 그는 엘시를 예뻐했다.

“커 갈수록 닮는군.”

엘시를 관찰하던 시선이 가이사에게로 쓱 흘렀다. 그의 눈빛이 서느렇게 변하려는 찰나 엘시는 방긋 웃음을 터트렸다.

“아우응!”

까르르 웃으며 손뼉을 짝짝 치는 엘시의 행동에 아버지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말이 많은 건 니나를 닮았어.”

깊은 푸른빛은 물기를 머금어 촉촉했다. 아기를 키우면 감성적이 된다는데 두 남자가 유난히 그런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아기를 안고 정원으로 걸어갔다.

“엘시가 대단하긴 하네요.”

“예. 루베니오가 먼저 자리를 피해 주기도 하고.”

그쪽의 문제? 나는 감동으로 그렁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한 말인데. 하지만 가이사가 보지 못했다면 아버지의 연약한 모습은 숨겨 주고 싶었다.

“그렇죠. 엘시를 워낙 예뻐하시니까요.”

아버지는 엘시를 안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루베니오의 뺨을 꾹꾹 누르며 장난치던 엘시는 그의 뺨에 손을 댄 채 금방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이의 손을 붙잡아 손가락 사이사이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고 부들부들한 뺨에도 입술을 눌렀다. 언뜻 성스럽기까지 한 잔잔한 입맞춤에 색색거리는 아기 숨소리가 깊어졌다.

루베니오는 아기를 단단히 껴안고 한 발짝 한 발짝 신중히 걸었다. 둥둥 떠오른 발걸음의 기쁨이 풀잎 위에 따스한 햇살처럼 내려앉았다. 살아 있는 거대한 요람의 품에서 내 아기는 편안해 보였다.

“엘시를 눕혀야 할 것 같은데.”

쿨쿨. 잠에 흠뻑 빠진 엘시를 품에 안은 아버지가 우리에게 다가와 물었다.

“1층에 아기 방이 있습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엘시 옆에서 같이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엘시를 내려다보며 싱그럽게 웃던 루베니오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뻔히 보이는 수작! 그렇다고 엘시랑 낮잠 잘 수 있는 기회를 놓치실 겁니까?

우르릉 쾅쾅! 격렬한 기세에 나긋한 봄바람은 광풍의 소나타가 되었다.

“자는 얼굴은 니나를 더 닮았습니다.”

가이사 판박이인 아들을 두고 나를 들먹이다니 황당했다. 더욱 놀라운 건 논리가 없는 가이사의 괴변에 아버지가 흔들린다는 점이었다.

“물론 천사 같겠지만…….”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엘시는 작게 뒤척였다. 아버지는 재빨리 숨을 죽이며 엘시를 얼싸안고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루베니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가이사는 거리가 충분히 벌어지자 음습한 속내를 대놓고 드러냈다.

“둘째 가지러 갈까요?”

이러려고 아버지 불렀냐? 2층의 아기 침실을 두고 1층의 아기 놀이방을 알려 줄 때부터 알아봤다. 가이사가 책을 읽어 주며 엘시를 재우는 일이 잦아서 1층 놀이방에는 큰 침대가 있었다.

“마음이 바뀌었습니까?”

루베니오 다음은 나였다. 태세를 바꾼 눅눅한 눈빛이 애처롭게 떨렸다. 가이사는 이쪽에 재능이 있었다. 약한 부분만 탁탁 건드려 뻔한 수작에도 넘어갈 수밖에 없게 했다.

참 비열……

“아기 싫어?”

은 무슨. 인간은 원래 순진하면 못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가이사는 딱 좋았다.

“좋아해요.”

“그럼?”

살짝 기우는 뺨에 나뭇잎을 투과한 햇살이 어른거렸다. 어휴. 새초롬한 미인이 얼굴을 제대로 쓰자 정신이 혼란했다.

“으응, 방으로 갈까요?”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행복하실 텐데 우리는 우리 식으로 행복해져야지. 나는 촉촉한 입술을 살짝 빨며 악동처럼 킬킬거렸다.

“이번에는 멈추지 말아요.”

“정말 그래도 됩니까?”

“……그렇다고 나를 침대에서 죽이지는 말고요.”

“설마. 내가.”

응. 설마 너라서 하는 걱정인 걸 왜 모르니?

“니나.”

“네.”

“가족이 생겨 다행입니다.”

“…….”

“당신이 내 아내라 정말 다행입니다.”

그는 가지지 못한 게 많았다. 상실의 아픔을 알기 전에 부재의 고통을 느꼈던 사람이었다. 없는 것에 익숙했고 갖는 걸 저어했던 사람이 저렇게 말하자 큰 감동이 밀려왔다.

“저와 당신 곁에 늘어 가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습니다.”

“엘시요?”

“둘째든. 셋째든. 열두째든.”

“응?”

잠깐. 너무 자연스럽게 뭔가 많이 건너뛰지 않았어? 갑자기 숫자가 너무 큰데?

“쉴 틈이 없습니다.”

커다란 개가 애교를 부리듯 귓바퀴를 다 빨아 놓았다. 황당해 올려다보는 내 눈빛에도 그는 뭐가 좋다고 함박 웃었다. 붉은 눈망울은 어느 때보다 맑게 반짝였다.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선물받은 어린 소년 같았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내뿜는 청량미에 웃음이 픽 터졌다. 농담이겠지?

“어서 침대로 가요.”

그는 내 몸을 사뿐히 안아 올렸다. 그의 등 너머로 눈부신 햇살이 빛났다. 나는 하늘로 이어지는 반짝임을 눈으로 좇았다. 빛은 하나가 아니었다. 태양의 주위는 작은 빛들로 오색찬란했다. 오늘의 태양은 푸른 물보라에 휩쓸린 별자리 같았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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