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침내 겨울
“니네이나 세이아-샤사롯.”
루베니오는 니네이나의 공식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녀는 본명은 이제 니네이나 세이아-샤사롯으로 바뀌어 있었다. 황후를 재판하는 과정에서 타르시와 황후가 로이드와 샤사롯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웠음이 드러나 그들 가문이 복권되었기 때문이다.
니네이나는 세이아와 샤사롯의 정당한 후계가 되어 세이아의 공녀와 샤사롯 백작이라는 두 지위를 동시에 갖고 있었지만 계승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브람에게 습격당한 날을 기점으로 단 한 번도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의 목숨을 연명하는 건 가이사가 구해 온 이상한 물이었다. 오래된 신전의 터에 있는 우물에서 퍼 왔다는 성수는 하루에 세 번 니네이나의 입가를 타고 들어가 그녀의 죽음을 막고 있었지만 성수가 할 수 있는 건 니네이나의 영혼이 죽음의 강에 이르지 못하게 막는 것뿐이었다.
“이제야 너를 니나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는데.”
기쁨이라는 뜻의 애칭 니나. 루베니오는 언제나 그 애칭을 불러 줄 날을 꿈꿔 왔다. 타르시를 없애면 그 이름을 부를 자격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며 달려왔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건 죽은 듯 잠에 빠진 딸의 모습이었다. 혹시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까 봐 그는 니네이나를 감히 기쁨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함부로 부르기에는 너무도 오래 소중히 간직한 애칭이었다.
‘너는 내 기쁨이었다고. 태어난 순간부터 언제나 기쁨이기만 했다고.’
루베니오는 아이가 깨면 꼭 그 이름을 불러 주고 싶었다.
“…….”
가이사는 루베니오가 잠시 자리를 비운 뒤에야 나타났다. 그는 타르시의 흉계를 막아 루베니오를 살렸고, 브람의 자폭에서 메이아를 구했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 했다.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 살렸고 그녀가 아끼던 이라 지켰다.
‘다 했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했잖아.’
그럼에도 눈을 뜨지 않는 니네이나를 볼 때면 가이사는 입을 꾹 다물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렇게 버티면 마음 약한 니네이나가 그를 동정해 일어나 주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가이사는 무력했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 하찮았다.
그는 괜찮을 줄 알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후회했다. 그날, 루베니오가 아니라 니네이나의 곁에 있어야 했다. 레어노스의 보호 마법은 니네이나의 정신을 보호할 뿐 육체를 보호하지는 못했다. 소나 하나로 안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덧없는 후회는 계속되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당신은 괜찮았을까?”
푸르게 질린 입술은 맹독에 질식된 사람처럼 마비되어 있었다. 가이사는 고개를 숙여 그 입술을 애처롭게 매만졌다. 그렇게 하면 그녀의 정신이 돌아올 것처럼 목덜미를 쓸고 가슴을 도닥였다. 차갑게 떨어진 체온이 그를 두렵게 했다.
“살고 싶다며…….”
그녀는 언제나 살고 싶어 했다. 오래전의, 아니 바로 몇 달도 안 된 그때의 그는 그런 니네이나를 싫어했다. 그는 죽고 싶은데, 삶이 지옥 같은데, 그녀 혼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미워했다. 몇 마디의 날 선 말을 삼키지 않았고 그녀를 차갑게 주시하며 진저리 쳤다. 귀찮아했고 보고 싶지 않아 했다. 심지어 빨리 죽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나는…….”
너를 동경했다. 미워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두려웠을 뿐이다. 그는 어두운 뒷골목이 익숙했다. 니네이나가 품은 그 밝음에 홀려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은데, 아버지를 죽이고 유지하는 목숨이니 계속 이렇게 괴로워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 마음을 바꾸려 드는 그녀에게 홀릴까 봐 몇 번이나 그녀가 사라지기를 바랐다. 지금의 고통은 그때의 죄였다. 그때의 벌이었다.
과거를 거스르던 가이사는 결국 두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았다. 그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불타는 작열감으로 미어지는 가슴이 그제야 그를 사람으로 존재하게 했다. 그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녀 앞에서는 아직 인간이었다. 인간을 사랑한 신이 인간을 증오한 그에게 벌을 주는 거라면 앞으로 다시는 인간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미워하지 않을게.”
그가 흘린 눈물이 니네이나의 뺨 위로 툭 흘러내렸다. 니네이나가 울고 있는 것 같아서 그는 다급히 그 눈물 자국을 닦아 냈다.
“나는 이제…… 인간을 사랑해.”
가이사는 니네이나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녀는 그저 니네이나였다. 그는 지금껏 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부정해 왔다. 인간이 아니라 니네이나일 뿐이라며.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니네이나의 어떤 것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인간이어도 좋았고 그 이상의 무엇이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널 사랑해.”
가이사 아델만은 니네이나 세이아-샤사롯을 사랑한다. 그에게 인간의 역사를 기록할 힘이 있다면, 인간의 운명을 서사할 능력이 있다면, 가이사 아델만이라는 인간의 옆에는 그 문장만이 남기를 빌었다. 누구를 죽인 자도, 어떤 해를 당한 자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신이 인간의 운명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신이 존재한다면 들어주기를 바랐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테니.”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역사는 그의 이름을 다르게 기억해야 할 테니. 니네이나의 몸속에 내재해 있던 성물의 힘은 그녀의 상처를 반쯤 치료하고 소진되었다. 성물 덕에 심장을 공격당했음에도 즉사를 면했지만 치명타가 아니라고 해도 그녀의 몸이 버틸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성물. 그것이 아니라면 성물에 준하는 힘이 필요했다. 가이사는 이번에도 니네이나의 얼굴을 오래 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카사비올라. 주신의 익애를 한 몸에 받는 성녀를 잡아 그녀를 살려야 했으니까. 쉽사리 떨어지지 못하는 발걸음이 무거운 자취를 남기며 쿵, 발에 매달린 심장처럼 덜컹였다.
* * *
제국에 있는 주신의 신전을 다 뒤져도 카사비올라의 머리카락 한 올 찾지 못했다. 가이사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신의 신전까지 모두 수색했다. 그리고 의외의 장소에서 카사비올라의 흔적을 발견했다.
수도에서 마차로 일주일은 족히 걸리는 풍요로운 시골 영지, 아델만. 영주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조용하고 안온한 그 마을에 들어서 있는 작은 신전에 대신관의 발걸음이 닿아 있었다.
가이사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델만 영지로 내려갔다. 그는 하늘을 날아 반일 만에 카사비올라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의 신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세요.”
카사비올라의 얼굴을 보자마자 냅다 둘러메고 납치하려던 가이사의 계획을 막은 건 작은 신전의 울림이었다.
쿵! 신의 옷감에서 탄생한 광휘가 일순 몰아쳐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었다. 벽이 으득 부서져 갈라지고 몰아치는 바람에 안구가 뻑뻑하여 눈을 뜨기 어려웠다. 겨우 눈을 떴다고 해도 강림이 선사한 빛의 물결은 그 황홀함으로 인간의 눈을 멀게 했다. 고결한 카사비올라조차 엄청난 황홀경에 혼미해져 의식을 잃었을 정도였다.
“…….”
그러나 가이사는 두통에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신이 폭압하는 신성에 머리가 지끈지끈 울렸다. 새하얀 벼락 수만 개를 모은 듯한 빛기둥이 광란했다. 시간이 지나자 빛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계속 줄어들었다. 계속계속 줄어들었다.
‘뭐야, 저 꼬맹이는?’
마침내 드러난 신의 본체를 가이사는 그렇게 평했다.
[흠.]
신의 음성은 가냘팠다. 어린 인간 아이처럼 낭랑하고 맑은 음색이었다. 신의 위엄을 찾아보기 어려운 꼴이었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가이사는 신이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건 당연히 이례적이었다. 신의 율법은 인간계를 어지럽히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신의 강림은 두 가지의 조건을 충족해야만 이루어졌다.
첫 번째, 신을 모시는 신전 안에서만 강림할 것.
두 번째, 강림을 위해서는 신력의 일부를 대가로 할 것.
신은 영원을 사는 존재였다. 무수한 세월 쌓아 온 신력은 강림 몇 번 정도로 사라지지 않는다. 신들의 암묵적인 율법이 신의 강림을 엄격히 지양하기 때문에 이례적일 뿐이다. 그런데 저 신의 본체는 이상했다. 성체로 탄생하는 신의 본체가 유아가 되었다는 건 그만큼 신력의 소모가 컸다는 뜻이었다.
자비와 징벌의 신, 모르테우스. 그는 20년도 되지 않은 어린 신이었다. 영생을 사는 다른 신들에 비하면 갓난애 수준도 되지 않을 작은 신이 대체 그사이에 무슨 짓을 저질러 저 꼴이 되었단 말인가?
[이거 참 쑥스럽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신을 의심하고 경계하던 가이사의 눈동자에 옅은 파문이 일었다. 그 얼굴조차 볼 수 없게 했던 강렬한 휘광이 걷히고 신이 가진 색(色)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흉포한 붉음도 우울한 검정도 아닌 광활한 녹색.
[가이사.]
가이사는 오래도록 그 색을 선망해 왔다. 그런 그가 알아보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저렇게 작아졌다고 해도. 저렇게 달라졌다고 해도. 한 몸처럼 의지해 왔던 존재의 영원한 부재. 다시는 만날 수 없는데, 그것이 다 자기 탓이라는 자책감. 죄스럽고 괴로워서 마음껏 애타하지도 못했던 그리움이 좁았던 균열을 터트리며 범람했다.
“레어노스……?”
[내 아들아.]
작은 신이 두 팔을 벌리며 그를 불렀다. 와서 안기라는 듯 팽팽하게 편 가슴이 작고 여렸다. 가이사가 기억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꿈속의 레어노스는 건장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거나 산처럼 거대한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기운도 전과 같지 않았다. 처음 보는 낯선 자에게서 아버지의 향취를 느낀 가이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혼란스러워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신은 다정한 음색으로 퍽 안타까워했다. 또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한 채로 있으면 그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아버지.’
가이사는 무릎이 휘청 꺾이는 것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가 신의 앞에 멈췄다.
종말의 드래곤 레어노스. 자비와 징벌의 신, 모르테우스가 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삶이었다.
[종말의 선물이 너를 원하는 곳에 이르게 할지니.]
작은 손이 가이사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손길 한 번에 살이 패고 뼈가 뚫려 심장에 거대한 구멍이 났다. 하지만 가이사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신은 가이사의 심장에서 쏙 빠져나온 녹색 구슬을 그의 손에 건네줬다.
[가여운 아들아, 신의 음성을 들으라.]
꼬마 신은 짐짓 근엄한 얼굴을 했지만 가이사의 뺨을 쓱쓱 매만지며 사심도 약간 채웠다.
[간악한 자가 너의 운명을 해하였으니 너는 네 심장을 찢어 먹이라.]
“…….”
초보 신이 오랫동안 고심하여 만든 계시를 듣는 아들의 반응은 딱딱했다.
[흠. 그리하면 다 나으리라.]
막무가내였다. 가이사는 그의 체온이 미지근하게 남은 구슬을 꽉 움켜쥐었다. 모르테우스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가이사가 이 신전을 찾은 건 니네이나를 구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래도 설마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가이사는 모르테우스의 눈을 바라봤다. 신이 되어 더 위압적으로 변한 시선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싹 돋았다. 신경 줄이 끊길 것 같은 위압감이었으나 가이사는 살며시 웃는 눈매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모르테우스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되어 짧은 시간마저 더 줄어들 게 할 터였다. 그래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대신 마주 보는 눈동자가 무수한 감정을 쏟아 냈다.
보고 싶었습니다. 가이사는 우직하게 그 한마디를 눈에 담았다.
사실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사과였다. 가이사는 그에게 항상 죄스러웠다. 미안하다. 죄송하다. 잘못했다. 차라리 당신의 눈에 띄지 말았어야 했는데. 당신의 목소리에 응답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가이사는 모르테우스의 본체가 유아로 퇴행한 이유를 짐작하고 말았다. 니네이나에게 걸린 강력한 보호 마법. 신이 된 몸으로 인간사에 깊게 개입한 것이 그의 죄였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신의 본체를 허물 정도면 암묵적인 율법쯤은 가볍게 어긴 게 분명했다.
가이사는 그 이유가 자신에게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짐작했다. 그때도 그랬다. 레어노스는 앞뒤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가이사를 살렸다. 그것에 대한 벌을 감수하고 가이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려고 했다. 가이사는 오래도록 그 마음에 보답하지 못했다. 죽고 싶어 했고 세상을 살아가게 한 그를 원망했다. 그의 마음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스스로를 대체품이라고 폄하했다.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가?’
가이사는 해츨링인 척하는 미천한 인간이었다. 반쪽짜리 가면을 쓴 불완전한 존재를 진심으로 품으려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또 다른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을.
─가이사의 죄책감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슬프게 해요.
그녀는 가이사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감사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미안해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가이사는 이제 그에게 죄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단지 감사할 뿐이다. 지금껏 그를 지켜 주고 있던 하나뿐인 아버지에게.
가이사가 전하는 묵묵한 진심에 모르테우스는 기뻐했다. 두 뺨이 상기한 어린 신은 입꼬리를 연신 움찔거리며 말했다.
[계시를 해석하는 건 인간의 몫. 더는 신의 음성을 갈구하지 말지어다. 신의 자비로…… 아, 못 해 먹겠네.]
깨금발을 든 어린 신이 두 팔을 가득 벌려 가이사를 끌어안았다.
[너 왜 이렇게 얌전해졌냐? 어릴 때는 빽빽거리더니.]
“아버지…….”
[하. 이것 봐라. 이제야 날 아버지라고 불러 주네.]
“전에도 불러 드린 걸로 압니다.”
[들어도 들어도 아쉬운데 그깟 게 얼마나 된다고? 이래서 자식 키워 봤자 소용없다는 말을 듣는다니까!]
모르테우스의 목소리에서 힘이 조금씩 빠졌다. 지상에 내려앉은 태양처럼 강렬했던 휘광도 약해졌다.
[아들아.]
“……예, 아버지.”
가이사에게 아버지가 있다면 오직 이 자그만 신뿐이었다. 가이사의 마음을 읽은 신은 두 팔에 힘을 줘 가이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신의 눈길이 라가니우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어린 인간 소녀에게로 향했다.
카사비올라 대신관. 전생의 그녀는 엘레니야 수석 신관이라고 불렸다. 레어노스가 심장을 부탁했으나 인간에게 배신당해 죽었던 라가 신전의 수석 신관은 이번 생도 불행할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신의 율법을 가장 강력히 받들어야 할 주신이 참지 못하고 개입할 정도로 신의 사랑을 받는 영혼이었다.
어느 신이든 유독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인간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으며 진귀한 물건일 수도 있었다. 모르테우스는 떳떳했다. 소소한 죄를 몇 개 짓기는 했으나 자신의 사랑을 관철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아쉬웠다. 벌써 떠나야 할 시간이라니.
‘쩨쩨한 주신 놈. 내 아들이 누구 때문에 불행했는데.’
라가 신전의 신관들이 드래곤 하트를 이용했던 걸 구실로 주신을 협박해 얻은 기회였다. 딱 한 번뿐인.
[가이사, 이번 삶에서는 마지막이다.]
모르테우스가 이번 생의 가이사를 만날 기회는 더 없었다. 적어도 1000년은 비축해야 강림할 만한 신력을 되찾을 것이다. 모르테우스는 이미 한계였다. 그는 신이 하지 말아야 할 금기를 여러 번 어겼고 빚을 갚으라며 주신을 협박해 아슬아슬하게 신의 본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이상의 기적을 바란다면 그는 더 이상 무엇으로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
익히 짐작한 사실이었음에도 가이사는 흔들렸다.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을 정도였다.
[늦지 않아야 그녀를 구할 수 있을 텐데.]
“……!”
놀리듯 짓궂게 내뱉은 말에 가이사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반쯤 몸을 빼고 있었다.
‘그 애가 기억을 되찾고 설명해 줘야 이 녀석이 나에 대한 고마움을 알 텐데.’
모르테우스는 생색이라도 내 볼까 하다가 말았다. 가이사의 반응은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농담이다. 성수를 먹였는데 그럴 리 있겠어?]
아버지를 버리고 달려가려던 가이사가 반쯤 회까닥 돌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을 떠올리며 모르테우스의 눈치를 봤다. 작은 신은 피식 웃으며 가이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니네이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루베니오를 지켜보는 가이사를 볼 때면 신은 언제나 이렇게 해 주고 싶었다. 너에게도 아버지가 있다고. 너는 신의 축복을 받는 신의 아들이라고.
[지켜보마.]
모르테우스는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은 단지 세상에 남긴 사랑하는 아이를 지켜보고 싶어 했다.
[너희 두 사람을.]
신의 손길은 자욱한 빛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인간은 닿을 수 없으나 신은 내려다볼 수 있는 까마득한 천공으로.
* * *
모르테우스가 돌아갔음에도, 이번 생에는 다시 볼 수 없다고 하였음에도 가이사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가장 크게 차지한 건 니네이나의 회복이었다. 혹시 몰라 기절한 카사비올라를 챙겨 세이아 저택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빠르고 가벼웠다.
‘이것만 있으면 다시 볼 수 있다.’
가이사는 니네이나의 눈이 좋았다. 커다란 눈망울에 담긴 온갖 것들이 다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눈을 감은 사이 자꾸만 사라지려던 그것들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을 테니 그는 또 한 번의 이별에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백작님, 그분은……?”
가이사는 포대처럼 안아 들었던 대신관을 메이아에게 떠넘겼다.
“앗!”
“잘 보관해.”
“보관……이요?”
사람을 어떻게 보관하라는 말이지? 주인보다 빠르게 회복한 하녀의 눈동자에 의문이 깃들었다.
“그녀에게 써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쯤 카사비올라가 입은 대신관의 성복을 발견하고 쩔쩔매던 신실한 하녀의 눈빛이 불손해졌다.
대신관 = 성력 덩어리 = 주인님께 도움이 될 보약.
계산이 끝난 메이아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바뀌었다.
“네! 잘 보관하겠습니다!”
대신관을 어떻게 구워 먹여야 주인님께 보양이 될까 고민하는 하녀를 두고 가이사는 니네이나의 방문을 열었다. 문이 살짝 열리자 그 방의 고요가 들려왔다. 아침을 불러 밝히려는지 활짝 열린 커튼 사이로 겨울의 하얀 태양이 내려앉았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걸린 바람이 창문을 시리게 두드렸지만 벽 안을 무겁게 채운 벽난로가 방의 공기를 훈훈하게 했다. 햇살과 장작불이 뒤섞여 옅은 온색으로 물든 방 안에 한 여자가 그림처럼 누워 있었다. 푸르고 창백한 피부 위를 하필 새하얀 이불로 덮어 놓아 그 안에 든 것이 사람인지 녹아내릴 물거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가이사는 성큼 걸어가 이불을 들추었다. 성급한 걸음과는 달리 이불을 살짝 끌어 내리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니네이나.”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부르고 두 번 부르고 수십 번 불러도 깨어나지 않았다. 활력을 새로 불어넣지 않는다면 이대로 말라 죽어 버릴 것이다. 푸르게 질린 입술을 훑고 창백한 턱을 지나 목덜미와 쇄골을 훑던 손이 하녀들이 입혀 놓은 잠옷 단추를 열었다. 상처를 가려 놓은 붕대를 풀자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깊은 상처가 보였다. 심장이 ‘쿵!’ 하고 잘못 뛰기라도 하면 피가 울컥 배어 나올 것 같았다.
─너는 네 심장을 찢어 먹이라. 그리하면 다 나으리라.
신의 계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할 수 있도록 중의적으로 내리는 게 그들의 규칙이었다. 인간사에 깊이 개입하는 것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런 것치고 모르테우스의 계시는 해석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신이 가이사의 심장을 찢어 구슬로 만들었으니 그것을 먹이면 된다는 뜻이 아닌가? 중의적인 의미까지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을 테지만 모르테우스가 계시를 꼬아 놨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걸로…….”
가이사는 모르테우스가 꺼내 준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드래곤 하트. 그것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맹독과 다름없었다. 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나간 실험체가 무수했고 가이사 본인도 그 힘 때문에 죽을 뻔했다. 무엇보다 적응하는 과정에서의 고통이 극심했다. 그런 걸 니네이나가 견딜 수 있을까?
“아.”
가이사는 절망으로 신음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가 아플 거라고 생각하자 입술이 바짝 메마르고 가슴이 쿵 가라앉았다. 타인을 위한 애틋함이 부르르 전율하는 쇠사슬이 되어 심장을 꽉 물었다.
‘아프다. 그런데 무엇이 아프지?’
─마음이 아픈 거예요.
언젠가 툴툴거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마음이 어떻게 아플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이 해를 입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러나 가이사는 해답을 찾아 가고 있었다. 그건 심장에 직접 불을 집어넣는 것과 닮았다. 화르르 타오르는 염열에 녹아 죽지 않고 산 채로 불타는 고통을 그대로 느껴야 했다.
쿵!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열풍이 몰아쳐 혈관과 신경을 지져 버렸다. 가이사는 불판에 굽는 살아 있는 생선처럼 펄떡거렸다. 그 고통을 겪는다면 그녀는 죽음을 갈망할지도 모른다. 뼈가 부서지고 몸이 무너지는 고통은 재워 둔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아플 거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하는 건 아닐까? 누구보다 그 고통에 대해 잘 아는 가이사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살고 싶어요.
강렬한 청금색이 깊이 내리감긴 눈앞에 번쩍였다. 삶의 의지로 충만한 빛이 그를 집어삼켰다. 가이사는 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입을 벌려 구슬을 밀어 넣었다. 성물이 그랬던 것처럼 구슬은 물처럼 녹아 찰랑거렸다.
가이사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가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봐 몸을 숙여 입술을 입술로 막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청정한 숲 내음이 입안 가득 번졌다. 가이사는 향긋한 입술을 빨지 않으려 애쓰며 혀를 밀어 넣었다.
두 개의 불꽃이 서로의 옆을 가로질렀다. 좀 더 세찬 불꽃이 점막을 자극하자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그를 빨아 먹기 시작했다. 고룡의 심장은 작은 조각으로도 강력했다. 심장 조각은 그녀의 온몸을 빠르게 정화하며 뻗어 나갔다. 니네이나의 몸이 녹색 불꽃에 불타는 것 같았다.
움찔. 하얀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다 삼켰음을 확인한 가이사가 몸을 살짝 떼어 내 그녀를 살폈다.
“하아…….”
작은 가슴이 달콤한 숨결을 내뱉으며 부풀었다. 두 사람의 가슴이 밀착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두 눈이 살며시 올라갔다.
새파란 청금석. 대지의 융성에 제련되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묘묘한 빛이 밤을 현혹하는 달처럼 떠올랐다. 가이사는 이제까지 니네이나의 존재에 감사했다. 그녀에게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의 존재에 감사했다. 그가 그녀를 되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가이사는 더 이상 니네이나의 모습에서 레어노스의 흔적을 쫓지 않았다. 죽음을 두 번 덧씌웠던 붉은 눈동자는 아득히 환희했다. 그는 마침내 이르렀다. 편안히 머무를 수 있는 삶의 지평선 끝자락에.
“니네이……”
그러나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눈은 다시 감겼다. 다 아문 가슴의 상처만이 그녀의 회복을 알렸다.
* * *
‘어라?’
방금까지 가이사의 얼굴을 보고 있었는데 그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두컴컴한 공간에 혼자 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홀로 남아 있으니 우주의 먼지가 된 기분이었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그 성질에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데…….’
브람에게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자 퍽 걱정스러워졌다. 내가 죽으면 세상에 분풀이를 하겠다고 협박하던 가이사가 아니었나? 포악해졌을 그도 걱정되었지만 비 맞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리고 있을 얼굴도 눈에 선했다.
‘돌아가야 해.’
나는 적극적으로 공간을 탐색했다. 내 시선을 기뻐하는 것처럼 공간이 뒤틀렸다. 하얀 눈송이를 닮은 빛이 꽃처럼 피어났다. 하나둘 피어나는 예쁜 빛에 몸이 닿자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빨려 들어왔다. 빛은 빠르게 차올랐다. 수만 개의 빛보라가 봄의 꽃잎처럼 휘날렸다. 내 몸 전체가 새하얗게 물들 정도였다.
─인간의 아이야, 이대로라면 넌 죽겠구나.
레어노스, 아니 모르테우스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차올랐다.
‘누가 부자 사이 아니랄까 봐 똑같은 말을 했네.’
무신경했던 가이사와는 다르게 모르테우스 쪽은 나를 많이 안타까워했다. 정확하게는 내 죽음으로부터 비롯할 가이사의 삶을 애타게 걱정했다.
─그 아이와 상성이 완벽히 맞는 건 너뿐인데…….
─그 아이?
─내게 아들이 하나 있거든. 혼자 두고 와서 걱정돼.
─흥. 아버지라는 자들은 하나같이 다 왜 그렇죠? 왜 두고 떠나는 거예요? 같이 있으면 되잖아요.
꿈이라 신의 위엄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해도 지고의 존재에게 좋을 대로 굴었다니, 뒤늦은 민망함이 찾아왔다.
─그게……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것이…….
─저도 올해 성년이에요.
─……미안하다.
─당신이 사과할 사람은 제가 아닌걸요.
나는 그때 내게 사과해야 할 사람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루베니오였다. 그런데 바로 그를 떠올린 것과는 다르게 나는 그에게 사과받을 자신이 없었다. 짐밖에 안 되는 내가 그를 원망할 자격이나 있을까 해서였다. 매일같이 빌빌대다가 죽을 내가 뭐 그렇게 잘났다고 돌봐 준 아버지를 원망하겠는가?
그때의 나는 쓸모없게 태어난 걸 미안해했다. 좀 더 쓸모 있는 아이가 되어 아버지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꿨다. 나는 내 친부를 궁금해하며 그리워했다. 죽기 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만나 보고 싶었다.
루베니오는 본인의 사정을 말해 주지 않았지만 사실 그때의 나는 대충이나마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오지 못하는 이유가 있고 그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 같은 천치를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한 그를 미워하지 못했다. 간혹 느껴지는 그의 애정을 그리워하며 나 역시 아버지를 사랑해 왔다.
내 아버지는……. 그를 소개할 다음이 떠오르지 않아서 슬펐다. 나를 돌봐 주고 지켜 준 친부의 얼굴을 끝까지 모를 거라는 예감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럼 내 삶이 남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테니까. 바람처럼 내려와 바람이 되어 사라질 허무한 삶. 그것이 내 신세라고 생각했다.
─직접 보는 게 좋겠다.
모르테우스는 그런 나를 안타까워하며 아주 특별한 꿈을 꾸게 했다. 나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루베니오가 남은 평생을 지옥처럼 살다가 결국 자살하는 꿈이었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이번에야말로 같이 살고 싶다. 남편이 아니어도, 아버지가 아니어도 좋아. 당신과 아가는 어여쁜 호수 옆에 집을 지어 살고 나는 그 집을 지키는 힘이 센 미물이 되어…….
마지막 유언을 남기려는 듯 홀로 속삭이던 루베니오는 곧 그런 자신을 조소했다.
─욕심이겠지. 지키지 못한 내가 품기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창가를 바라봤다.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하얀 새의 날개에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
─니나……. 내, 아가…….
무심히 흐렸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니나는 기쁨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나도 알지 못했던 내 애칭을 소리 죽여 불러 보다가 괴로워했다. 흉통을 느꼈는지 가슴을 손으로 내려치던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제 심장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안 돼!’
나는 소리치며 달려갔지만 환상과 닿을 수는 없었다. 붉은 피가 그의 셔츠 자락을 적시고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힘이 빠져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그는 고개를 틀어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이미 지나간 하얀 새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루베니오는 한때 새가 머물렀던 빈자리를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한 밤에, 달빛이 노래하는 이 편안한 밤에…… 잘 자렴, 잘…… 자렴…….
샤루에르 가곡 13번. 금방이라도 호흡이 멎을 듯 거칠고 위태로운 목소리가 부른 노래는 아이의 밤을 지켜 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자장가였다. 그 노래가 끝났을 때에는 그도 죽어 있었다. 미련이 남아 눈도 채 감지 못하고 구름 하나 보이지 않는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이건 네 아버지의 운명. 그리고 이건 내 아들, 가이사의 운명이지.
미처 눈물을 닦기도 전에 루베니오보다 더 참혹하면 참혹했지 덜하지는 않을 가이사의 삶이 펼쳐졌다. 레어노스가 죽은 뒤 가이사는 루베니오의 옆에서 지내며 이것저것 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 모든 걸 관두었다.
루베니오가 죽고 가이사의 삶은 정적으로 변했다. 그는 인간의 나라를 훌쩍 떠나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으로 먹었고 최소한으로 움직였다. 그의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녁이 되면 태양도 사라져 깊은 어둠만 우울한 밤을 적셨다. 그는 불을 켜 주변을 밝히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가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는 했다.
─아름다운 것…….
그게 무엇이냐는 듯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죽어 있는 눈은 언제나 고요했다.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는 신록의 숲, 햇빛이 부서져 흐르는 새하얀 폭포, 우짖고 뛰어노는 어린 짐승 등. 그는 포악스러울 정도로 주변을 어수선하게 두리번거릴 때가 있었다. 한참 그러고 난 뒤의 그는 좌절과 절망의 빛으로 어그러졌다.
─아름다운 게 뭡니까?
때론 하늘을 향해 묻기도 했다. 주변에는 대답을 해 줄 이가 없으니 소름 끼치는 침묵만 널리 퍼졌다. 그럼 그는 실망하다가 괴로워했다. 가만히 서 있는 그의 등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달이 떠오르고. 낮밤이 수백 번, 수천 번 바뀌어도 그는 괴로워했다.
─죽고 싶어…….
간혹 못 참고 그 말을 내뱉을 때면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씹었다. 피가 터질 때까지 발작적으로 씹고 난 뒤에야 그는 무표정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또 그렇게 최소한의 생을 유지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결국 이루지 못했다는 괴로움으로, 그는 그토록 원하던 죽음에 이르러서도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죽어 가는 그 순간 가이사는 끊임없이 잘못을 빌었다. 아름다운 걸 찾으며 오래 살고 돌아오라던 레어노스의 유언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걸 찾지 못했고 오래 살지도 못했다. 그는 죽어 가는 제 몸을 방조했다. 마음에 병이 나 먹지 않고 버티니 인간의 몸은 끝내 죽음에 이를 수 있었다.
자살이었다. 가이사는 결국 죽음을 택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책하며 죄스러워하다가 잘못을 빌며 죽었다.
─죄송합니다. 죄송…….
메마른 입술로 죽을 때까지 속삭이는 음울한 목소리는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할 만큼 어두웠다. 그의 삶이 지옥이었음을 시사하는 유언이었다.
─어려서부터 불행하게 살아온 녀석이다. 행복이 뭔지 모른다는 녀석이 불쌍해서 좀 더 살아 보라고 큰 힘만 남겨 둔 채 아직 성체도 되지 못한 녀석을 혼자 뒀지. 더 이상 학대당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르테우스의 눈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남긴 유언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행복을 찾기를 바랐던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가이사는 그 유언 때문에 지독히 불행했으니까.
─인간의 시간으로 10년이 넘었다. 저 녀석의 삶을 바꿀 방법을 찾은 게. 내 선택은 너다, 니네이나.
─당신의 선택은 짐작했어요. 그렇지 않다면 제게 이런 꿈을 보여 줄 리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저죠?
─인간의 운명이란 게 참 별나지. 상성이라는 게 존재하거든. 극악한 불운을 타고난 삶을 단 한 사람이 바꾸기도 하지. 루베니오와 가이사는 상성이 꽤 좋은 편이었다. 가이사는 루베니오에게서 내 모습을 봤고 루베니오는 가이사에게서 네 모습을 봤지. 충족은 없어도 갈증을 미룰 정도는 되었기에 루베니오가 살아 있을 때는 가이사도 그토록 싫어하는 인간 사회에 머물렀지. 그러나 둘은 서로를 향한 애정이 없었다. 두 사람이 끝내 불행하게 죽은 이유지.
─저는 다르다는 건가요? 저는 저 사람을 알지도 못해요.
─정확히 말하자면 너로도 부족해. 그러나 네 전생과 합한다면 가능성이 있어. 루베니오의 영향력이 있는 네 육체와 의지가 곧은 네 전생의 기억을 결합할 생각이다.
─전생?
─인간의 아이야, 거래를 하자. 나는 네 아버지를 살릴 기회를 주고 너는 내 아들을 살릴 기회를 주는 거지.
─당신 말대로 하면…… 루베니오가 살 수 있나요?
─너 하기에 달렸다. 네 의지가 중요해. 어떠냐, 내 손을 잡겠니?
─저는 제가 아무것도 못 하는 천치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그 결과가 저것이라면…… 뭐라도 해 볼래요.
─신의 축복이 함께하리.
모르테우스의 손에서 신력이 폭발했다. 그의 힘은 내 전생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이번 생의 기억을 가뒀다. 니네이나 세이아의 사망 예정일 3개월 전의 일이었다.
* * *
이제야 어떻게 된 건지 알겠다. 내가 니네이나의 기억과 감정을 느낄 수 있던 이유를 말이다. 계속 궁금했던 의문이 풀리자 속이 시원했다. 나는 방긋 웃으며 상쾌하게 눈떴다.
‘뭐야, 이 음침한 얼굴은?’
눈을 뜨자마자 낑낑거리며 내 몸을 기웃거리는 시커멓고 거대한 늑대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눈 감지 마세요.”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를 협박했다. 그러고는 내 눈을 빤히 주시했다.
잠시 뒤, 그의 눈동자에 환희가 물결처럼 번져 가다가 다시 의심이 들어섰다. 환희와 의심은 엎치락뒤치락 싸우며 자기들끼리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런 남자를 두고 내 몸을 체크했다. 오래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몸은 이상할 정도로 상쾌했다. 씻기고 양치까지 했는지 입안까지 상쾌했다.
‘좋아. 문제 될 건 없네.’
나는 마음 놓고 두 팔을 벌렸다.
“가이사.”
이긴 건 환희였다. 그는 쪼르르 다가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어디 아프신 곳은 없습니까?”
“그러게요. 며칠이나 지났죠? 분명 상처가 났는데 몸은 하나도 안 아프네요. 다 나았나?”
가슴을 내려다봐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한 달을 넘겼습니다.”
“한 달?”
그렇게나 잤단 말이야? 한 달 만에 상처가 다 아문 게 신기했다. 제법 큰 상처였는데 이 세계의 경이로운 회복력이 도와준 걸까?
“때마침 첫눈이 오는군요.”
가이사가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주무시는 동안 완연한 겨울이 되었습니다.”
내 시선을 따라 밖을 응시하던 그가 어리광을 부리듯 연약하게 속삭이며 젖은 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깜짝 놀랐습니다. 다시 눈을 감으셔서.”
“아, 그거는…… 저 꿈에서 가이사의 아버지를 만났어요. 레어노스가 신이 되었더라고요. 신의 이름은 전생의 삶을 따르지 않고 새로 지어지는 거래요. 새 이름은 모르테우스, 자비와 징벌의 신이에요!”
어때? 놀랍지? 나는 가이사의 반응을 기대했으나 그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들은 것처럼 무덤덤했다.
“영지의 신전에서 아버지를 뵈었습니다. 당신을 고쳐 주신 것도 그분의 도움이었습니다. 제 심장을 찢어 먹이라는 계시를 내려 주셔서 먹였는데…….”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저렇게 했다. 엄청난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져서 혼미했다.
“잠깐만요. 그럼 가이사가 가지고 있던 드래곤 하트가 제 몸에 들어왔단 말이에요?”
“극소량입니다. 원주인이 허락해서 그 정도는 당신의 몸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고통은 없으십니까?”
“아프지는 않은데…… 전에 심장이 연결되면 서로의 생각이 들린다고…… 헉! 가이사 지금 내 생각 듣고 있어요?”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
“말했듯이 극소량이라 그런 현상은 없습니다. 감정이 살짝 느껴지긴 합니다. 당황하셨네요.”
“……왜 나는 가이사의 감정이 안 느껴지죠? 이것도 재능의 문제인가요?”
“아니요, 이건 적합률의 문제입니다. 심장을 통째로 바꾼 저와 다르게 당신은 당신의 심장을 가진 채라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통도 없는 듯하고.”
휴우, 다행이다. 하마터면 수치사 할 뻔했다. 가이사가 내 마음을 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의 몸을 훔쳐보며 희희낙락했던 과거가 떠올랐으니까.
“요긴하게 쓰실 수 있을 겁니다. 드래곤 하트는 인간에게 독이지만 그만큼 영약이기도……”
“영약이요?”
그래서 이렇게 몸이 가뿐한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땅에 발을 내디뎌 보았다. 성물을 먹었을 때보다 몸 상태가 훨씬 좋았다.
“이제는 정말 건강해지셨습니다.”
“건강?”
“예, 건강합니다. 그건 영구적인 겁니다. 제가 그렇듯.”
영구적? 나 영원히 건강한 거야? 그의 말을 증명하듯 활력과 생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으…….”
뺨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진부하지만 정말 이대로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니네이나?”
“고마워요, 가이사!”
몸에 날개라도 달린 듯 가볍게 점프해 그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 팔에 힘이 생겨 숨을 못 쉬도록 꽉 끌어안을 수도 있었다.
“다 당신 덕분이에요!”
“그런데 니네이나, 루……!”
가이사는 행동은 재빠른데 말은 느린 편이었다. 그가 느긋하게 건네는 말을 기다리지 못한 나는 그대로 입술을 맞댔다. 멈칫하며 뒤로 살짝 물러나려는 입술을 빨고 침범하자 소극적으로 물러났던 혀가 움찔했다. 옆에 기대듯 파고들어 문지르자 알싸한 박하 향이 느껴졌다.
“으음…….”
내가 고양이처럼 골골거리며 몸을 얽자 그의 턱에서 힘이 살짝 풀렸다. 맛을 보듯 점막을 몇 번 건드리던 그는 입맛을 다시며 야박하게 입술을 떼어 내려 했다.
“이제 진짜 옵……!”
나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계속 탐하는데 저승에서 기어 온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이건 아버지의 목소리인데? 죽다 살아 돌아온 나는 루베니오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내가 반색하며 돌아보자 루베니오의 얼굴에도 기쁜 빛이 어렸다.
“아버지?”
“니나!”
내 말에 반응했는지 반사적으로 환하게 웃던 루베니오는 내 옆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
뺨이 상기한 가이사가 입술을 수줍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 딸이 깨어났다. 기쁘다. 내 딸이 깨어났는데 웬 도둑 새끼가 내 딸의 입술을 훔치고 있다. 화가 난다. 두 감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루베니오의 손에서 화사한 꽃다발 하나가 툭 떨어졌다.
* * *
내가 누워 있는 동안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가장 큰 변화는 칼리탄이 황제가 된 것이겠지만 크게 와닿은 부분은 내 이름에 대한 것이었다.
니네이나 세이아-샤사롯. 나는 세이아의 소영주임과 동시에 샤사롯의 수장이 되었다. 복권된 샤사롯 가문의 재산이 정리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불어나는 권력에 대한 책임감도 함께였다. 나는 날이 풀린 후 가장 먼저 샤사롯의 영지를 찾기로 했다.
“저는 지금껏 신의 가호를 받아 온 듯합니다.”
나와 함께 샤사롯 영지에 가기로 한 가이사가 뜬금없이 말했다.
“당연히 받고 있죠. 신의 눈길은 언제나 닿는답니다.”
가이사가 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나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를 달래려 하였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가이사는 고개를 저으며 뒤쪽을 흘긋 바라봤다. 건물 입구에서 막 걸어 나오는 루베니오가 보였다.
“루베니오가 지금껏 우리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한 건 신의 가호였을 겁니다. 저를 지켜 주려는 아버지의 가호.”
가이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가호’라며 두 번 강조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루베니오를 볼 때면 질린다는 듯 약간씩 창백해지곤 했다. 루베니오가 가이사를 죽이려 든 건 아니었다. 대신 천덕꾸러기를 보듯 싫어했다.
─미안하구나.
그리고 내게는 미안해했다. 저런 도둑놈을 못 알아보고 내게 붙인 게 퍽 안타깝다는 듯 애틋한 눈으로 나를 살펴봤다.
“음…… 제가 공양미 300석으로 마왕에게 팔려 간 공주도 아닌데 말이죠.”
“제가 마왕입니까?”
“아버지의 눈에는 그렇지 않을까요? 가이사도 딸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글쎄요. 아직 가져 보지 못한 존재에 대해서는 그 어떤 감정도 들지 않습니다.”
“그래요?”
“예. 그러나 루베니오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오! 가이사가 어떤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니! 나는 그 사실을 새삼 크게 기뻐하며 가이사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런데 이 남자의 얼굴은 어딘지 스산했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내게서 당신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면 나도 눈이 돌겠거든.”
고개를 살짝 숙인 그가 내 귓바퀴를 물어뜯을 것처럼 어른거리며 진득하게 속삭여 왔다.
‘그러니까 아직 없는 딸은 몰라도 나를 빼앗기기는 싫다 이건가?’
가이사에게는 협박보다 칭찬이 잘 통했다. 이를 테면 칭찬은 가이사도 춤추게 한다, 요법이었다.
“그래요. 아이 착하다. 얌전하다.”
착한 생각. 얌전한 생각. 착한 생각. 얌전한 생각. 착하다 착하다 해 주면 어느 순간 착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여 나는 고운 말만 그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이 방법이 통했는지 차츰 무덤덤하게 돌아온 그는 내 옆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니나.”
타르시가 죽고 루베니오는 나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너는 내 기쁨이다.
그런 뜻이라는데 애정을 한 움큼씩 품고 말할 때마다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너를 지켜 줄 기사들이다.”
“지켜 줄…… 기사들이요?”
내 호위는 가이사 한 사람으로도 차고 넘쳤다. 그래서 단출하게 떠나겠다고 말해 두었는데 루베니오 뒤를 따라온 기사는 족히 수십은 되어 보였다. 샤사롯의 영지는 평화로운 곡창 지대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 무장한 수십의 기사들이 필요할 만큼 위험한 여정이 아니었다. 이쯤 되자 저 기사들이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켜 줄지 궁금해졌다.
“지금은 마법을 쓰던 하녀도 없으니 데리고 가렴.”
메이아는 지금 황궁에 있다. 황궁 마법사로 취직해 칼리탄 아래에서 일하고 있었다. 메이아는 그날 브람에게서 나를 지키지 못했던 걸 반성하며 더 강해져서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녀의 성장 폭이 원작보다 가파른 걸 보면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용히 따를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저야 신경 쓰지 않지만…….”
나는 가이사를 바라보았다. 감각이 예민한 그에게는 누군가의 감시를 용인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스트레스였다. 그는 이미 같은 방법으로 잔뜩 시달려 질려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공격도 살의도 없지만 어두운 곳에 숨어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고, 심지어 그것이 한둘이 아니다. 더욱이 감시자를 보낸 위쪽의 눈치가 보여 감시자를 제거할 수도 없다면 신경 쓰이지 않겠는가?
“무슨 문제라도?”
루베니오가 가이사를 향해 서릿발 같은 시선을 보냈다.
“……아닙니다.”
기 싸움에서 지는 건 대부분 가이사 쪽이었다. 기사들이 내 마차 뒤로 다닥다닥 붙는 게 보였다.
“여행은 큰 즐거움과 위험을 동반하지. 조심하렴.”
루베니오는 내 의사를 몇 번이나 물었다. 나는 그때마다 가이사를 사랑한다고 했고 그는 무척 큰 충격을 받아 며칠을 내리 앓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 후 루베니오는 가이사를 공략했다. 지금은 귀여운(?) 심술에 그쳤지만, 가이사가 반격한다면 루베니오의 총공세가 쏟아질 것이다. 그걸 잘 아는 가이사는 루베니오의 눈치를 보며 나를 향해 구조 신호를 보냈다.
‘도와주세요.’
이건 뭐, 첫째의 텃새에 부리나케 도망 온 둘째를 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루베니오의 손을 잡자 그의 얼굴이 온화하게 풀렸다.
“내가 같이 가 줘야 하는데 미안하구나.”
칼리탄이 황제가 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시국은 불안정했고 루베니오는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루베니오는 억지로라도 나를 따라오려 했지만 나는 그가 무리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사랑해요, 아버지.”
내 말에 아쉬움으로 가득하던 루베니오의 얼굴에 기쁨이 샘솟았다. 그는 이 짧은 한마디에도 충분히 행복해했다. 그러니 그에 비하면 욕심쟁이인 가이사도 챙겨 줘야 했다.
“사랑해요, 가이사.”
감히 내 딸의 사랑을 받아? 다른 손으로 가이사의 손을 잡아 주자 루베니오의 얼굴은 못마땅함으로 굳었다. 그런데 어쩔까? 한 명은 사랑하는 아버지이고 한 명은 사랑하는 남자인데. 내가 말없이 손을 꼭 붙잡자 루베니오의 얼굴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도 나를 당해 내지 못했다.
“건강하세요. 선물 사 올게요.”
“기대하고 있으마.”
마차가 곧 출발했다. 떠나는 마차를 보며 그는 한결 안심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루베니오가 더 이상 안 보이게 되자마자 가이사를 와락 끌어안았다.
“영지에 도착하면 따돌릴까요?”
“예?”
“뒤에 따라오는 저 기사들 말이에요. 번거롭잖아.”
나는 악동처럼 킬킬 웃으며 가이사의 머리카락을 비비 꼬는 장난을 쳤다.
“루베니오가 눈이 뒤집혀 내려올지도 모르겠군요.”
“싫다고는 안 하네요?”
“당신의 말이라면 뭐든 좋습니다.”
“가이사는 은근 여우란 말이죠.”
자기에게 이득이 되니까 냉큼 그러겠다고 하는 거면서 말이야. 앙큼한 그의 입술을 손으로 꾹꾹 누르자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손가락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제일 좋아하는 건 그 말입니다.”
“무슨 말?”
어차피 마차에는 우리 둘밖에 없는데 그는 내 귓가에 입술을 붙여 은밀함을 더했다.
“사랑해요, 니나.”
루베니오 몰래 못된 장난을 치듯 비밀스럽게 속삭인 애칭이 달콤하고 야릇했다. 루베니오가 불러 줄 때와는 전혀 다른 화끈거림이 배꼽 아래까지 번져 간지러웠다.
“사랑해요, 가이사.”
마차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연분홍 꽃나무가 울창한 길을 달렸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온다. 그리고 또 오겠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건강한 겨울이. 이 사람이 있음에 반복되는 사계절의 합주도 더는 두렵지 않았다.
“꺄아아아! 주인님이 사라지셨어요!”
니네이나와 함께 샤사롯 영지로 내려왔던 하녀 하나가 아침부터 니네이나의 방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 내용이 과히 심각하였기에 화병의 물을 갈던 사라는 물론이고 창밖을 지키던 기사들까지 니네이나의 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가시는 걸 보지 못하였는데 대체 어떻게?”
그중 순진하고 열의 넘치는 어린 기사 하나가 의문을 제시했다.
“이거예요.”
주먹을 불끈 쥔 사라는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종이 쪼가리를 불쑥 내밀었다. 올망졸망한 글씨로 쓰인 작은 편지로 하녀와 기사들의 고개가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가이사랑 놀러 가. 찾지 마.」
털썩 쓰러진 리아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왜 우리까지…….”
이게 다 기사들 때문이었다. 하녀들은 미움을 가득 담아 기사들에게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사라는 그 틈을 타 다른 사람들 몰래 니네이나의 쪽지를 곱게 접어 제 주머니로 쏙 넣었다.
* * *
초봄의 서늘한 바람은 잠을 깨우는 재주가 있었다.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와 함께 반쯤 졸고 있던 나도 눈을 떴다. 말발굽 소리가 다각거릴 때마다 내 고개를 지탱하던 검은 옷자락에 뺨이 스쳤다. 부드러운 천은 결코 거칠지 않았고 딱딱한 어깨는 나와 높이를 맞춰 주려 잔뜩 굽어 있었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날렵한 턱과 굳게 다문 입술을 따라 올라가자 짙은 홍색의 눈이 보였다.
‘잘 잤어요?’
연인이면 연인답게 그런 말을 한마디쯤 할 법도 한데 저 남자도 참 여전했다. 그래도 나는 알았다. 그가 늘 내 안부를 묻고 있다는 것쯤은 말이다.
“가이사는 말이에요, 나를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해.”
나처럼 눈치 빠른 연인이 어디 흔한 줄 알아? 소통이 안 되면 싸우기 일쑤라고! 괜히 젠채해 보았다. 어린애 투정이나 다름없는 유치한 짓이었지만 그의 앞에서는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다행입니다.”
그의 어깨가 불편할까 봐 살며시 떨어지는 내 뺨을 어느새 따라온 손이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겼다. 그리고 그는 쌀쌀한 아침 바람에 언 코를 손으로 살짝 쥐었다.
“당신을 만나서.”
새벽에 피어난 이슬 하나를 톡 떨어트리고 마는 잎사귀의 싱그러움 같은 게 왜 그에게서 느껴지는 걸까? 사랑스럽다는 수식어와 절대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남자인데 사르르 웃는 눈매가 그렇게 보였다.
“으…….”
봐도 봐도 당최 적응을 못 하는 신체가 또 주인 말을 듣지 않고 붉게 피어났다. 나는 화끈한 살갗을 손으로 감추며 고개를 돌렸다.
“떨어지지 마세요.”
내 어깨쯤은 한 팔로도 너끈히 감을 커다란 손이 나를 쫓아왔다. 인간을 통째로 삼키는 거대한 아나콘다에게 물린 기분이 들었다. 어찌나 꽁꽁 묶었는지 달아날 수가 없었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고개가 픽 꺾여 그의 가슴에 기대고 마는 건 그래서겠지.
“춥습니다.”
“시원한걸요.”
“아직도 코가 빨갛습니다.”
“…….”
“이리도 추워하시니 어쩔 수가 없군요. 제가 덥혀 드리는 수밖에요.”
“무슨?”
그의 고개가 급격히 기운다 싶더니 부딪혀 만들어진 불씨가 입술로 튕겨 올랐다. 다 쓴 라이터를 엄지로 탁탁 튕길 때처럼 잔 불꽃이 어른거렸다. 혀가 불씨에 닿아 아릿했다. 때론 간지럽고 때론 아찔했다.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고삐를 붙잡아 당겼는지 말발굽 소리가 멈추었다. 눈을 뜨려 하면 매몰찰 정도로 몰아붙이는 통에 숨이 가빠졌다.
“하, 읍……!”
입술을 맞붙인 채 그는 나를 안아 들었다. 마부가 앉는 자리는 좁아서 흔들림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끼익. 나무판자가 거칠게 울었고 마차로 연결된 천막이 젖혀졌다. 그와 내가 마차 내부로 들어서자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빠르고 강하게 소리가 부대끼고 시야는 점멸하며 돌았다.
“잠, 깐…….”
앞을 보려고 했지만 그가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 틈을 준 게 아쉽다며 몰아쳐 왔다. 열락에 내몰린 숨결이 화끈거렸다. 데워진 숨이 표피를 지날 때마다 무릎 사이가 좁아 들려고 했다. 움찔거리는 하체에서 폭신한 감촉을 느꼈다. 아마도 마차에 앉은 듯한데 몸은 그때부터 기울어져 눕혀졌다. 내 위에 올라선 남자가 잠시 입술을 떼어 냈다.
“하. 미치겠네.”
촉촉이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한 남자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이 다급했다. 하얀 손가락 틈으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이 아름다웠다. 멍한 시선 끝에 홍염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고 무한히 변화하는 저녁 하늘처럼 일렁댔다.
“불꽃같네요.”
그는 차가운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정의해 왔기 때문에 붉은 정염은 여전히 낯설었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볼 때마다 열이 오릅니다. 왜 이러는 겁니까?”
“그런 건……”
“저는 압니다.”
뭐야, 그럼 나한테 왜 물었는데?
“홀리는 겁니다.”
“홀……려요?”
“당신에게 홀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그건 아니지. 홀리는 사람이 누군데 그래! 내 눈은 세모꼴로 변하여 그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피식 웃은 그는 내 머리맡에 팔뚝을 대고 몸을 숙였다. 그의 손가락이 내 눈가를 간질였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처럼 감질나게 굴더니 대뜸 말했다.
“요망하게 생겨 가지고.”
“요, 요망?”
당장 뒷목을 붙잡고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발언이었다. 눈을 부릅뜬 나보다 새초롬하게 바라보는 그에게 더 어울리는 단어였다.
“니나.”
그는 노래하듯 내 이름을 흥얼거리며 눈가를 접어 싱긋거렸다.
“니나.”
쪽. 이번에는 지독히 단 입맞춤도 함께였다. 그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촉촉했다. 내 의지를 배반한 눈꺼풀이 아래로 내리 감겼다. 눈을 감아도 혀를 야하게 내밀고 있을 그의 얼굴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나는 그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며 내 입술을 스르르 파고들어 오는 그를 받았다. 그는 상냥하게 굴다가도 종종 포악해졌다. 그게 본성이라도 되는지 어두울 때는 더 그랬다. 얼얼하여 눈가에 눈물이 맺힐 때까지 빨렸다.
“하, 으응……!”
숨이 고갈하여 그의 옷깃을 붙잡고 낑낑거렸다. 그는 간악하게도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쏟아지던 꽃잎처럼 끊임없이 부닥치는 체온에 갈 길은 길어졌다. 기도에 꽃잎이 무섭게 차올라 숨을 쉴 때마다 간지러웠다.
* * *
이른 아침의 촉촉한 잔디를 밟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도착해 보니 해가 높이 떠 있었다.
“시원하다.”
서늘함이 사라진 부드러운 봄바람이 기분 좋았다. 눈을 감고 음미하는데 그가 부리나케 다가왔다.
“춥습니다.”
“헉!”
위험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찰랑이는 말에 나는 서둘러 입술을 가리고 뒷걸음질 쳤다.
“더 이상은 못 해요!”
“뭘 못 한다는 겁니까?”
그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이, 이 능구렁이!”
“아하하!”
뭐야. 왜 웃는 건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그는 큰 소리로 하하 웃어 버렸다. 새하얀 구름을 몰아내어 하늘을 푸르게만 물들일 만큼 청명한 소리였다.
“이제 참겠습니다. 저는 인내를 모르는 하잘것없는 짐승이 아니니까요.”
얼떨떨하게 서 있는 나를 붙잡은 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능구렁이라고 부른 걸 마음에 담아 둔 거죠?”
나만 놀림받을 수 없으니 바로 받아쳤다.
“이 앞부터는 손잡고 갈까요?”
또 피식 웃거나 다시 받아칠 걸 기대했는데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른의 미소였다. 그런 거 있지 않나? 세월의 깊이가 묻어나는 눈빛 같은 거.
“천 살도 넘게 많으니 어른은 어른이지.”
나도 그래서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지도 몰랐다. 평소 나이 많다고 뭐라고 하면 즉각 몸으로 행동을 보이던 남자였는데 오늘은 안 그랬다. 그냥 조용히 내 손을 붙잡고 오솔길을 걸었다. 내가 무슨 감정을 보이든 받아 주려는지 앞장서 걷는 어깨는 커다랗고 굳건했다. 나는 그의 옆으로 쫓아가 그와 나란히 걷는 걸 선택했다.
“배려는 괜찮아요. 아무 감정도 안 든단 말이에요.”
“그냥 손을 잡고 싶은 것뿐입니다. 저는 당신의 손을 좋아하니까요.”
이 앞에는 로페니아의 무덤이 있다. 그렇게 멀지 않아 마차에서 몇 걸음 걷자마자 묘석이 보였다. 그래서였다. 그가 긴장하고 있는 건.
“기억도 안 나요.”
“압니다.”
“…….”
그와 난 로페니아의 무덤 앞에 섰다. 한 번쯤은 들러야 할 곳이라 오긴 했는데 와서 뭘 해야 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거창한 말 같은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공유한 추억이 없었다. 배 속에서의 기억 같은 건 내게 없으니까.
“꿈에 찾아오셔서 말씀해 주시는 건 어때요?”
무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작게 중얼거려 보았다.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고민하면서도 입은 다시 종알거렸다.
“이대로라면 난 정말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없잖아요.”
푸른 잔디 위에 핀 하얀 들꽃이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나는 그 볼품없는 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일부러 찾아왔는데 나눌 말이 없어 아쉬웠다. 이상하게 눈가가 자꾸 메마른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립니다.”
그는 나를 일으켜 무덤가를 빠져나왔다. 마차 가까이 올 때까지 흐느적거리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그는 나를 나무 옆에 앉혔다. 참 이상했다. 깔고 앉은 천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넋을 놓고 있었다는 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옷이었다.
“당신 옷이 망가지겠어요.”
“하나 사 주시겠습니까?”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진지했다. 옷 살 돈이 없는 건 절대 아닐 테고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노력이었다.
“제가 가이사보다 부유하기는 하죠.”
“이 땅의 모든 게 당신의 것입니다.”
“너무 갔잖아요.”
“정말입니다.”
“그야…… 이제 내 땅이긴 하죠.”
그런 의미로 말한 거겠지? 샤샤롯의 영지가 이제는 내 것이라는?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어쩐지 눈빛이 음습했다. 누군가 그의 말에 반박한다면 몸소 그 실력을 보여 줄 것 같았다.
“그럼 가이사도?”
그런 와중에 당신의 대답이 궁금하다면 나는 당신에게 미친 걸까? 사심 가득한 내 말에 놀랐는지 그가 눈을 순진하게 떴다. 누구든 죽일 것처럼 으스스한 눈동자보다 지금 이 모습이 귀여웠다.
“기꺼이.”
내 손을 붙잡은 그가 내 손등 위에 입술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는 자기가 입 맞춘 자리를 입술로 비비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의 입술이 사르르 부딪칠 때마다 기묘한 소리가 났다. 지지배배 우는 새의 짝짓기 노래 같았다. 딱 가이사만큼 고요한 노래.
“레어노스가 언제 제게 마법을 걸었는지 알아요?”
“모릅니다.”
“과거에 레어노스의 정신체와 만났더라고요. 그가 내게 정신 계열 보호 마법을 걸어 놓았는데 기억의 일부가 봉인되어서 그때의 기억이 없었어요.”
“지금 그 마법이 깨졌다는 건 압니다. 당신에게서는 더 이상 아버지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요?”
“아마도 당신이 쓰러져 있을 때였을 겁니다. 제가 당신에게 심장을 나누어 준 날. 당신은 다시 잠들었고 그때 아버지의 마법은 소멸했습니다.”
“다 알고도 물어보지 않은 거예요? 당신은 내 몸에서 레어노스의 마나가 느껴져서 좋았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레어노스가 왜 내게 그런 마법을 걸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아요?”
“왜 정신 계열 마법이었는지는 궁금합니다.”
“그때의 저는 정신이 살짝 불안했거든요.”
그사이의 험난한 과정 같은 건 그가 모르기를 바랐다. 운명처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행복한 흐름 같은 걸 그도 하나쯤 가졌으면 했다. 그가 순진하게 기뻐하기만을 바라는 내 이기심이었다.
“레어노스는 내가 당신을 만날 걸 알았대요. 그래서 내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나 봐요.”
“그랬군요.”
“레어노스는 당신을 위해 정말 많은 걸 했어요. 그는 당신을 무척 사랑해요.”
가이사의 미소가 깊어졌다.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항상 제 곁에 있다는 것 또한.”
그는 고요했다. 넉넉한 사랑을 받고 자라 항시 여유로운 사람 같았다. 아버지의 일이라면 무섭게 닦달하며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대략의 실마리를 알았으니 이제 됐다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놀라웠다. 꿈에서 본 가이사는 레어노스의 유언 한마디 한마디에 엄청나게 집착했으니까.
“신께서 내게 가이사의 미래를 꿈으로 보여 준 적이 있어요.”
“제 아버지를 이르시는 겁니까?”
“네. 모르테우스 신이요.”
“그렇군요.”
“궁금하지 않나요?”
“미래의 제 옆에는 당신이 있을 겁니다.”
자신의 미래는 자기가 제일 잘 안다는 확고한 말에 눈가가 떨렸다. 그는 내 부재를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본 미래에서 그가 얼마나 처절한 모습으로 죽어 갔는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즐거운 얼굴로 내 손등을 간질이는 행동에 집중했다. 그의 입술은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맛보고 틈을 벌려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그 순진한 행동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이상했는지 어느 순간 그의 행동이 딱 멈췄다.
“아닙니까?”
“맞아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지금처럼 믿으면 되었다. 그가 믿고 있는 것이 곧 실현될 미래가 될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지금처럼 딱 이래요.”
가이사는 내 옆에서 계속 행복할 것이다. 그게 진실이고 우리의 미래였다. 다른 건 나 역시 필요하지 않았다. 그게 설령 신이 보여 준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을 물고 빨고?”
내 절박한 마음 같은 건 모르는지 그는 빙긋 웃으며 계속 장난을 쳤다.
황망함과 민망함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얼마나 더 할 생각인데요?”
“보신 게 아닙니까?”
“자세한 미래까지는 못 봤어요. 잠깐 정도.”
“그럼 모르는 채로 계시는 게 낫습니다.”
내 손을 놓아준 가이사가 망토의 모자를 내 머리 위로 씌웠다.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분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 이제 건강해졌어요.”
“나는 이제 살고 싶습니다.”
그건 무슨 대답이지요? 순간적으로 그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당신이 건강해야 제가 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감기도 걸리지 말고 열도 오르지 말고 딱 지금처럼만. 당신이 아프면…… 마음이 아픕니다. 너무 아팠습니다.”
“…….”
여기가 아팠다고 말하는 아이처럼 그는 내 손을 가져가 그의 가슴 위에 올려 두었다. 쿵! 쿵! 그의 가슴은 빠르게 헐떡거렸다. 평상시의 부드러운 음률이 아니었다. 놀라 허둥지둥 달음박질치는 심장이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있으면 괜찮아집니다. 계속 이렇게 있어 주세요.”
그가 원하는 대로 손을 가만히 두었다. 그의 손이 내려간 다음에도 내 손은 지끈거리는 심장 위를 맴돌았다.
“나는 가이사의 과거도 보았어요.”
“싫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을 텐데요.”
“그런 말을 하면 내 마음이 아파요.”
“실수였습니다.”
그가 입술을 어색하게 다물었다. 그는 몇 번이나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다. 그것이 걱정되는지 그는 계속 내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이 또 귀엽고 애잔해서 나는 금방 표정을 풀었다.
“당신이 자신을 더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날 좋아하는 만큼만 사랑하면 되잖아요.”
내 말에 가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북함을 느꼈는지 혈색도 창백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내가 날 사랑스러워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그런가?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그럼 지금보다 아주 약간씩만이라도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
“응.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좋잖아요.”
“전 그냥 니나가 좋은 겁니다.”
가이사의 논리는 언제나 하나였다. 이유도 하나였다. 그 말이 얼마나 사람을 민망하고 부끄럽게 만드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나는 뺨이 붉어지고 목구멍이 바싹 마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 그러니까요. 당신도 그렇잖아요. 내 모습이 조금 안 좋거나 이상해도……”
“당신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수더분하던 얼굴이 즉각 반발하며 본인의 절대적인 논리를 펼쳤다.
“내 눈에는 언제나 예쁩니다. 당신은 내가 찾은 유일한 아름다운 존재라고 말했잖습니까. 어떤 모습이든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으으. 그만둬, 바보야. 내 아름다움에 대한 가이사의 일장 연설에 귓불이 후끈거렸다. 얼마나 뜨거운지 얼얼할 정도였다.
“얼굴이 상기하면 더 아름, 윽!”
부끄러움으로 덜덜 떨리던 손이 결국 사고를 쳤다. 그의 가슴을 한 움큼 잡히는 대로 움켜잡아 버렸다. 단단한 흉곽 한 덩어리가 내 손바닥 위에 꽉 차올랐다.
“미, 미안해요.”
그의 가슴을 곧바로 놓아주었지만 손바닥을 적시던 체온과 단단한 살의 촉감은 찍힌 듯 남아 있었다. 손바닥까지 붉게 열이 올라 간지러웠다. 당장이라도 박박 긁어 시원해지고 싶은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붉게 변한 입술이 살짝 벌어져 혀를 내보이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빨고 싶어.”
뜨겁다 뜨겁다 했더니 불길이 확 일었다. 눈알까지 뜨거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으…….”
파르르 경련하다가 감기는 시야로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걸 끝으로 내 몸은 불길에 휩싸였다. 내 허리를 휙 감싸며 달려든 그와 함께 쓰러졌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꽉 붙잡아 주세요. 다른 곳은 만지지 못하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내 허리를 팔로 꽉 옥죄었다.
“왜 못 만지는데요?”
“제기랄. 당신이 날 죽일 거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나운 눈동자였다. 순간적으로 정말 궁금해서 물었는데 내 말이 그를 크게 자극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혀뿌리를 얽어 드는 살덩이가 크고 뜨거웠다. 가뜩이나 부르터 있던 입술은 그의 흔적으로 차올랐다. 그는 도톰해진 입술을 강하게 빨았다. 하프 줄이 틱 튕기는 것처럼 내 몸도 펄쩍 뛰었다.
“아!”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그렇게 날렸다. 그 틈까지 꽉 채운 그가 호흡을 빼앗으며 필사적으로 나를 훔쳤다. 눈물이 맺힐 만큼 뜨겁고 강한 열기에 뇌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곤죽이 되도록 짓밟고 주무른 뒤에야 그가 내 사정을 봐주며 입술을 할짝거렸다.
“하아.”
달게 내뿜는 젖은 숨이 빨린 흔적으로 얼룩진 입술을 쓸어내렸다. 생리적인 눈물로 눈가가 흐렸다. 강하게 내리비치는 태양이 잎사귀에 맺혀 눈부시게 흩어졌다. 가이사의 눈가로 흩어진 햇살 조각이 마치 환상 같았다. 눈을 황홀하게 하는 광경에 홀려 나는 그의 뺨을 가만히 문질렀다. 내 손바닥에 뺨을 기댄 그가 달콤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성욕이 이는군요.”
“콜록!”
숨이 잘못 넘어가 사레에 걸렸다. 고개를 비틀고 기침하자 그는 내 몸을 일으켜 등을 다독였다.
“괜찮습니까?”
“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성욕은 자연스러운 욕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고 키스도 하는데 멀쩡한 게 더 이상합니다. 니나는 내게 성욕을 느끼지……”
나는 거침없이 질주하는 입술을 막으려 손을 뻗었다. 그는 내 손이 닿기도 전에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느껴요.”
딱 잘라 그것만 말하는 내 목소리에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빨개진 얼굴로 받아쳐 봤자 소용없으니 인정하고 마는 게 편했다.
“하지만 가이사의 처음을 여기서 취할 수는 없잖아요?”
먼저 일어나 그에게 손을 뻗었다.
“당신은…… 늘 저를 놀라게 합니다.”
그는 내 손을 붙잡았다. 힘을 줘도 이제는 버틸 수 있는데, 그는 순전히 본인의 힘만으로 몸을 세웠다. 두꺼운 허벅지에 잡힌 바지 주름이 시야에 박혔다.
“바치겠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그를 야릇하게 바라보던 내 시선이 민망할 정도로, 그는 맹목적으로 갈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목이 마른 건 그만이 아님에도.
“이제 그만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는 건 당신만이 아니라는 걸.”
나는 짐짓 새침하게 말하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까치발을 들었다.
“나도 널 사랑해.”
내 고백에 눈가가 시큰해졌는지 아름다운 눈동자가 반지르르 빛났다.
“사랑합니다, 니나.”
이윽고 나붓하게 접히는 눈매가 싱그러워서 이 땅의 붉음과 푸름이 정말 모두 내 것인 듯하였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말고 우리 둘만 지낼까요?”
“네.”
기회주의자의 대답이 무척 빨라서 웃음이 픽 흘렀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
“얼른 가요. 이 땅의 모든 걸 가져야 하잖아요?”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진부한 해피 엔딩 외의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가, 그에게는 내가 이 땅의 전부이자 유일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