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가을의 끝 (11/13)

9. 가을의 끝

나는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할 뻔 - 그럴 뻔했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잘 잤다 – 했다. 끊임없이 생을 확인하며 부닥쳐 오는 가이사의 불안감을 달래 주고 싶어서였다. 빨리 이 일을 끝내야지, 또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이제는 진짜 마무리할 때가 되었으니까. 아침 일찍부터 칼리탄에게 알현을 신청한 것도 그래서였다. 칼리탄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를 두고 본론부터 들이밀었다.

“드디어 계약을 이행할 마음이 생겼나?”

이것 봐요, 전하. 계약서의 갑은 저라고요! 얕은수에 웃음이 픽 나왔다.

“계약은 이미 이행했죠. 전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았을 뿐인걸요.”

“도무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

“그건 전하도 마찬가지시잖아요?”

내 능청에 칼리탄이 혀를 차며 물러났다. 고작 혓바닥 정도로 이 담화의 우위를 점할 수는 없었다.

“그대가 왜 루베니오의 딸인지 알겠다.”

“칭찬 감사해요.”

“……칭찬이 아니다.”

우리 아빠를 닮았는데 왜 칭찬이 아니야?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고 칼리탄은 떫은 감을 씹어 삼킨 얼굴이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됐다.”

칼리탄의 눈길이 내 옆에 앉아 차를 마시는 가이사에게 잠시 머물렀다.

“비밀스러운 용건은 아닌가 보군. 둘이 함께 온 걸 보니.”

아마 무의식적인 발언이었을 것이다. 칼리탄 역시 혼자에 익숙한 사람일 테니까.

“가이사와 저는 실과 바늘 같은 사이거든요.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어요.”

“아델만 백작을 향한 영애의 신뢰가 몹시 두텁군. 부러울 정도야.”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무슨 의미지?

“어떤가, 나도 그 안에 들여 보는 건?”

칼리탄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은근히 떠봤다. 그러나 그 미묘한 말투는 내가 아닌 가이사를 자극했다. 찻잔을 다소곳이 내려놓은 가이사가 눈을 서늘하게 내리뜨며 허락을 구하듯 나를 바라봤다.

죽여도 됩니까?

안 돼요. 쓸모가 있단 말이에요.

가이사는 드물게 짜증이 치민 얼굴이었다. 전부터 칼리탄을 유난히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원작에서는 무관심에 가까웠는데 말이다.

“그녀는 내…….”

칼리탄을 향해 뭐라고 경고하려던 가이사가 눈을 깜빡거리며 고심했다. 이내 고고한 붉은 눈에 반짝임이 어렸다.

“내가 그녀의 것입니다.”

가이사는 정답을 알아낸 아이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야, 그거.

무미건조한 얼굴에서 옅은 뿌듯함을 읽어 낸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 사람, 내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려다가 말을 바꾼 게 분명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데 그건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칼리탄에게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려던 것이라면 말이다. 칼리탄은 가이사처럼 ‘내 것’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를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싶은 것일 테니까. 차마 그 사실을 지적할 순 없었다. 가이사가 뿌듯함과 기쁨으로 입꼬리를 씰룩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칭찬을 바라며 나를 지켜봤다.

“…….”

잘했다고 해 줘야 하나? 여기서? 그의 체면을 지켜 주기 위해 손을 꼭 잡아 주는 것으로 그치자 가이사는 불만족스러워하면서도 눈을 나른하게 내리깔았다. 좋은 의미로도 수더분하다고 표현할 수 없는 화려한 얼굴이 일렁이는 노을처럼 잠겼다.

“세이아의 재주는 타고나는 것인가?”

“재주요?”

“길들이는 것.”

칼리탄의 목소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가이사의 눈빛이 대번 싸늘해졌다. 내가 손을 붙잡지 않았다면 당장 튕겨 나가 칼리탄의 목을 베어 냈을 포악함이었다. 잘 벼린 날카로운 송곳니에 살갗이 얼얼하게 터지는 기분이었다.

“큼.”

쭈뼛 서는 소름에 놀라 목을 잡고 잔기침을 하자 가이사가 내 찻잔을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칼리탄의 눈빛이 점점 더 기묘해졌다. 놀람에서 경악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두죠. 진심이 아니잖아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가이사에게 찻잔을 돌려줬다. 테이블에 그냥 내려 두면 되는데 일종의 습관이라 나도 모르게 그런 것이었다. 아차 하다가 이내 아무렴 어떠냐 넘어가는 내 모습과 자연스레 찻잔을 내려놓는 가이사의 행동을 지켜보던 칼리탄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난 그렇게 될 수 없다.”

빠른 인정이었다. 홀로인 동시에 양어깨가 무거운 칼리탄은 가이사처럼은 살 수 없을 테니까. 언뜻 위태로워 보였던 얼굴은 빠르게 변화했다. 담담한 얼굴에 매서움이 서렸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조만간 폐하께서 요양을 떠나실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황제, 황후, 황태자. 셋밖에 모르는 극비를 말하자 칼리탄의 미간이 지그시 좁아졌다.

“루베니오의 연락책인가?”

“아쉽게도 틀리셨어요. 출처는 저예요.”

황제의 폐암은 손쓸 새 없이 진행 중이었다. 이맘때의 황제는 아직 병의 정체를 알지 못하지만, 몸이 안 좋다는 걸 깨닫고 요양을 떠났다.

“흥미롭군.”

다행히 이 전개는 원작과 다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해하는 칼리탄이 보였지만 대답해 줄 마음은 없었다.

“임자가 있는 몸이라 그 흥미는 거둬 주시는 게 좋겠어요.”

칼리탄에게 한 말인데 가이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바라봤다.

임자라니 그게 누굽니까?

……가이사, 당신이잖아.

어처구니없다는 내 눈짓에 살벌하게 맴돌던 기운이 일순 사라졌다. 그의 기세는 다시 얌전, 아니 조금 전보다 훨씬 평화로워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야.”

칼리탄이 이마를 짚으며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산만하게 구는 게 거슬리는 것 같았다.

“아, 죄송해요.”

양 뺨이 상기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앉아 있는 가이사를 무의식적으로 흘긋 챙긴 뒤 칼리탄에게 집중했다.

“오늘 찾아뵌 건 전하께 좋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예요.”

“내게 맡겨 놨던 소원을 빌려던 게 아닌가?”

내가 웃으며 가벼이 고개를 젓자 칼리탄은 못마땅한 얼굴로 다리를 꽜다. 계속 말해 보라는 눈치였다.

“폐하께서 요양을 떠나시면 황태자 전하께서 실무를 대리하실 예정이죠?”

“실무라고 해 봤자 대단한 권한이 있는 건 아니다. 내가 맡을 수 있는 건 간단한 정사(政事) 정도지. 중요한 일은 마법을 통해 폐하께 빠르게 전달될 테니까.”

“그 정도면 충분해요. 이제 폐하께서는 타르시에게 큰 관심이 없을 테니까요.”

타르시에게 굳이 광증이라는 병명을 붙여 황제의 눈 밖에 나게 한 이유였다. 타르시를 쳐 내는 것 정도로는 아픈 황제가 움직이지 않도록.

“무슨 말이지?”

“즉결 재판을 통한 사형 선고가 내려질 예정이거든요. 전하께서 주관하신 재판에서.”

“재판?”

“역모죄로요.”

누구보다 그것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던 내가 역모를 입에 담자 칼리탄의 표정이 변했다. 역모로 몰아가려면 그와 엮일 황족이 필요했다. 칼리탄은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감히 나를 이용하겠다는 말인가? 대가도 없이?”

자세를 바꿔 앉은 칼리탄이 위압적인 얼굴로 나를 압박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감각이 밀려왔고 동시에 가이사의 살기가 칼리탄을 폭압했다. 전이 ‘죽일까?’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죽인다’ 정도였다. 표정을 굳힌 칼리탄도 문제였지만 중요한 건 나였다.

싸우지 마, 고래들아! 새우 등 터져!

큰 고래의 손을 잡아당기자 고래 싸움이 저절로 멈췄다.

“이용이 아니라 도와주는 거죠. 제가, 전하를.”

나는 그 틈을 타 여유로운 척 웃었다.

“도와? 날 협박할 생각인가?”

칼리탄이 가이사를 데려온 이유가 그거냐는 듯 가이사를 흘긋거렸다.

“제가 가이사에게 전하를 해쳐 달라고 부탁한 뒤 그 죄를 타르시에게 씌울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

“저를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그런 얕은수는 안 써요!”

“화가 나는 게 그쪽인가?”

자기가 먼저 오해해 놓고 황당해하는 어조였다.

“흠.”

원작 남주답게 칼리탄은 신념은 쇠심줄이었다.

죽으면 죽었지 협박에 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설득해야만 했다. 칼리탄과 나의 적은 같고 적의 적은 아군이 될 수 있다. 또한 그는 배신의 위험이 낮았다. 지금의 입지를 버릴 수 없는 칼리탄은 세이아를 등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의 손해를 감내할 이유가 없었고 그런 모험을 꾀하기에는 그가 너무 현실적이었다. 칼리탄 이상의 적임자는 없었다.

“어쨌든 도움이 맞아요. 타르시를 쳐 내는 일이 황후를 멸할 테니까.”

나는 타르시의 재판인 척하며 황후의 죄까지 은연중에 밝힐 생각이었다. 현장에 없는 황제가 개입할 수 없을 만큼 신속하게.

“전하께서 원하시는 일이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칼리탄은 내가 건넨 밧줄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다고.

“소원을 빌었다면 간단했을 텐데.”

칼리탄은 한 번 튕겼지만 가당찮았다.

“아깝게 두 번의 대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죠. 저는 셈하는 법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나와 좋은 관계를 만들 생각은 없는 건가? 손해를 감수하여 더 큰 이득을 취할 수도 있을 텐데.”

칼리탄이 고작 이런 걸로 마음을 줄 리는 없다. 기껏해야 마음의 빚 정도인데 그건 효율적이지 않았다. 서로 원하는 것을 얻는다면 그만인 관계. 더 이상의 호의를 더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 기회에요.”

“그 잔인함은 세이아의 특징인가?”

뭐요?

“자신의 사람 외에는 가차 없는 것. 그 눈빛은 마음을 꺾고 사람을 하찮게 만들지. 그 안에 들어가고 싶다고 갈구하게끔 해. 스스로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칼리탄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씁쓸하고 아련한 눈빛은 허공을 헤맸다. 내가 아니라면…… 칼리탄, 이 남자가 설마 루베니오를……? 순간 루베니오를 애타게 바라보던 칼리탄의 눈빛이 떠올랐다. 루베니오의 마음을 원하고 갈구하던 탐욕이었던가!

“나는 세이아가 싫다.”

역설적이게도 그 말은 세이아가 좋다는 말로 들렸다. 역시! 루베니오를 노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루베니오는 불혹에 가까운 나이가 무색하게 성별 불문하고 홀릴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 아버지란 말이야!

“그러니 영애의 제안을 수락하지.”

앞의 말이랑 결론이 달랐다.

“이번 한 번만.”

한 번이라는 조건은 도리어 미련 같았다.

‘참사랑인데?’

황태자가 우리 아빠를 짝사랑한다니. 하지만 나는 칼리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루베니오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아서 신경을 끌 수 있었다. 경계심이 가시자 측은함이 들었다. 루베니오의 매력에 푹 빠진 불쌍한 중생 같으니. 나는 서둘러 본론으로 돌아왔다.

“우선은 저를 지켜 주셔야겠어요.”

“영애를?”

칼리탄이 가이사가 있는데 왜 자기까지 필요하냐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그리고 세이아 저택으로 가 주셨으면 하는데요.”

칼리탄은 더더욱 이해 못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각에는 이것이 최고의 덫이었다.

“지금 당장.”

칼리탄이라면 분명 완벽하게 해낼 수 있겠지.

* * *

칼리탄과의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칼리탄 다음은 아실로였다. 아실로에게는 아실로만 할 수 있는 일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두 형제가 나란히 황궁에 있으니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황태자궁을 나서서 황자궁으로 향하려는데 황태자궁을 나오자마자 익숙한 사람과 마주쳤다.

“니네이나.”

루베니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흐…… 흠. 좋은 아침이에요, 아버지.”

이것저것 벌여 놓은 게 있는 나는 제 발 저린 도둑이 되어 그의 눈을 살짝 피했다.

“너와 함께라면 언제나 좋은 아침이지.”

봄의 풀잎처럼 싱그럽게도 웃은 루베니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했다. 그의 팔불출 같은 발언에 경계심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매서운 관찰안이 나와 가이사를 지그시 훑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바쁘구나. 뽈뽈거리며 돌아다니기 힘들 터인데.”

꿀꺽. 침이 저절로 꼴깍 넘어갔다.

“집에도 재미있는 짓을 벌여 놓았지.”

헉! 거기까지 눈치챘다니! 표정을 관리하려고 했지만 루베니오의 은근한 눈길에 동공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내 모습에 루베니오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내 생각쯤은 이미 다 꿰뚫었을 이지적인 푸른 눈이 다정하게 접혔다.

“아이가 만든 판을 깨는 부모가 있을까.”

부드러운 손길이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루베니오는 이런 식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했다. 그는 내가 어릴 적 해 주지 못한 걸 지금이라도 다 해 주려는 듯 작은 일도 칭찬하고는 했다.

“이기고 싶지도 않거늘.”

나에게는 져 주고만 싶다는 애정이 깊고 넓었다. 어린애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걸 그저 지켜보는 듯한 눈동자에는 화도 담겨 있지 않았다.

후우,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가 얕게 흘러나왔다.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사실 루베니오에게 부탁해서 그가 나섰다면 더 쉬웠을지 모른다. 아니. 필히 그랬겠지. 그래도 나는 내 길이 그의 등 뒤만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끼어들 틈도 없이 끝날걸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모든 변수를 계산할 수 없는 한 완벽한 계책이란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왕은 배수진 가장 뒤쪽에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선봉에 서게 하려면 그를 적대시하는 자들은 이제 나부터 제거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루베니오를 지켜 주고 싶으니까. 내가 해낼 수 있다. 해내 보이겠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나를 믿어 주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통했는지 루베니오는 큰 감동이라도 받은 것처럼 탄식했다. 그의 눈가에 물기가 잔잔하게 어려 달빛 호수처럼 영롱하게 빛나다가 사라졌다.

“너의 체스 말이 어떻게 킹을 잡을지 지켜보마.”

나를 믿고 지켜보겠다는 암묵적인 허락이었다. 내가 뿌듯함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길게 늘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출렁거렸다. 봄날의 햇살처럼 나를 감싸던 루베니오의 얼굴이 변한 건 그때였다.

“이건…….”

루베니오의 손가락이 내 목 쪽으로 뻗어 나갔다.

‘헛!’

전날 가이사가 깊게 빨아 자국이 남은 딱 그 자리였다. 키스 마크가 있는 곳!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고 신경 쓰지 않았는데 까딱하다가는 큰 사달이 날 것 같았다.

“어, 어머나. 벌레에 물렸나 봐요. 간지럽더라고요.”

나는 손으로 목을 가리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내 입을 통해 순식간에 벌레로 지칭된 가이사가 상처 받은 눈빛을 쏘아 보냈으나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은 미처 없었다. 워낙 순식간이라 자세히 보지도 못했을 루베니오의 눈동자가 기이한 안광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친 달 아래 선 연쇄 살인마의 눈처럼 시퍼렇게 번들거리는 눈이 녹아내리는 눈송이처럼 사르르 접혔다.

“벌레라…… 물린 자국을 보면 무슨 벌레인지 알 수 있지. 위험한 벌레일지도 모르니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안심하렴. 널 해치지 않아. 루베니오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알았다. 나는 해치지 않더라도 위험한 벌레가 된 가이사는 작신작신 밟히리라는 걸!

안 돼! 가이사를 살려야 해!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내가 가진 유리 몸은 체력뿐만 아니라 순발력도 한참 모자랐다. 루베니오는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처럼 내 머리칼을 덥석 집어 들어 올렸다.

쌩! 어디선가 인위적인 바람이 불어와 내 목덜미를 머리칼로 덮었다. 덕분에 보지 못했는지 루베니오는 찡그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탓에 그의 의심은 더 깊어졌다.

“가이사.”

“예.”

오싹하도록 건조한 부름에 가이사의 흰 얼굴이 창백해졌다. 반분 이상 회까닥 돈 푸른 눈동자가 가이사를 위협하며 휘날리는 내 머리칼을 느른하게 훑었다.

“뭐 하는 거지?”

가이사, 이 미친 자야……. 나 정말 당신 때문에 못살겠다고! 거기서 바람을 쓰면 당연히 당신인 줄 알잖아! 의심만 더 깊어진다고!

“……더우신 것 같아 열 좀 식혀 드린 겁니다.”

어떻게 변명하기도 어려운 인위적인 바람이었다는 건 아는지 가이사는 순순히 자기 짓임을 인정했다.

“치워.”

“…….”

루베니오는 욕만 안 했지 거의 욕설과 다름없는 섬뜩한 짓씹음을 거칠게 내뱉었다. 불어오던 바람이 잔잔해지고 내 머리칼은 가라앉았다.

‘잘 가요, 가이사…….’

나는 긴장한 채 뻣뻣하게 선 가이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어디서 물린 거지?”

응?

루베니오의 반응이 내 생각과 달랐다. 그는 몹시 찝찝해하며 내 목덜미를 두 번 세 번 살폈다. 그래도 같은 결론이 나오는지 고아한 미간이 분노로 점점 더 좁아 들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나름 평이한(?) 분노였다.

“날이 추워져 따뜻한 실내로 벌레가 들어왔나 봅니다.”

으응?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키스 마크가 벌레 물린 자국으로 둔갑이라도 했는지 루베니오는 내 목덜미에 남은 자국을 벌레에 물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감춘 거지?”

뭔가 계속 거슬리는 건 있는데 눈앞에 들이밀 증거는 없는 것 같았다. 루베니오는 심증만 가지고 가이사를 매섭게 추궁했다.

“…….”

더는 변명거리가 없는지 가이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내게 눈짓했다.

도와주세요.

헉! 귀엽게도 정말 그렇게 들렸다.

“제, 제가 아버지께는 비밀로 해 달라고 했어요!”

나는 귓가에 열이 화끈하게 오르는 걸 느끼며 앞으로 나섰다.

“네가?”

“네. 별것도 아닌데 지금처럼 신경 쓰며 걱정하실까 봐서요.”

“…….”

루베니오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넘어가 줄지 말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조금 전에도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감이 아무리 좋고, 머리가 아무리 뛰어나도 루베니오는 결단코 나를 이길 수 없다. 정확히는 이기고 싶지 않아 했다.

“그렇구나. 해충을 미리 막지 못한 내 잘못이다.”

내 머리칼을 놓아준 루베니오가 눈가를 누그러트렸다.

“제 방에 들어온 해충까지 어떻게 신경 쓰시겠어요? 괘념치 마세요.”

“세상에는 유익한 곤충도 있다지만 너를 무는 순간 그저 더러운 벌레일 뿐이다. 조심하거라.”

스산한 목소리가 끝에 힘을 주며 음울하게 울렸다. 동시에 루베니오의 시선은 가이사에게로 향했다. 그쪽만 기온이 뚝 떨어져 춥고 시렸다. 가이사의 눈동자가 파르르 요동쳤다.

“아, 아버지도 벌레 조심하세요.”

나는 루베니오의 팔뚝을 붙잡으며 빙긋 웃었다. 다시 나를 마주 본 루베니오도 나를 따라 웃어 주었다. 서로 벌레를 조심하라며 걱정하는 부녀 사이에 낀 가이사만 이 상황에서 웃지 못했다. 희극과 비극 사이 그 어디쯤에 있을 촌극이었다.

* * *

큰 사달 없이 루베니오는 돌아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함박 웃으며 손을 흔들던 나는 그의 그림자가 사라지자마자 벽에 기댔다.

“하아…….”

“방금은 정말 위험했습니다.”

이런. 벽이 아니라 가이사였다. 바윗덩이처럼 딱딱해서 벽인 줄 알았더니.

“머리카락에 가려 들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귓가로 바로 내리꽂히는 숨소리에 나는 발작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는 한 손을 뻗어 주춤 물러나다 넘어지려는 나를 익숙하게 붙잡았다.

“조심.”

아직도 귓바퀴가 뜨끈했다. 열이 치달아 얼얼해진 고막이 먹먹할 정도였다. 나는 숨을 옅게 고르며 진정해야 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예요?”

“루베니오가 내 흔적을 착각한 거 말입니까?”

내 흔적. 그렇게 발음하는 목소리가 나른하게 끌렸다.

“지, 짐승이에요? 그런 게 뭐가 흔적이라고.”

“내가 물고 빨았으니 내 흔적입니다.”

“으아아…….”

부끄러워 몸서리치는 내 반응에 가이사의 고개가 갸웃 까딱였다.

“탐이 나시면 다음번에는 당신이 제게 하세요.”

“누가…… 하고 싶대요?”

목이 꽉 막혀 목소리가 샜다.

“그럼 저만 하겠습니다.”

“왜 가이사만 해요! 그건 불공평…….”

기분이 좋아졌는지 빙긋 웃는 얼굴에 내 목소리는 점점 더 흐려졌다.

“그럼 당신도 제 몸에 남기실 겁니까?”

“……그런 거 묻지 마요.”

“싫으시면 제가 당신 몫까지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싫어하는 음식을 대신 먹어 주겠다는 느낌이었다. 전에는 좀 더 무섭게 웃었는데 지금은 미소가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광이 번쩍 나는 뺨이 뻔뻔하기는 했어도.

“그랬다가는 그때야말로 가이사가 아버지 손에 죽을 거예요. 이번에는 어떻게 넘긴 거죠?”

“환각 마법으로 벌레에 깨물린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루베니오가 키스 마크와 벌레에 물린 자국을 구분 못 할 리가 없으니 마법을 쓴 모양이었다. 정신력이 높은 루베니오에게 웬만한 환각 마법은 통하지 않겠지만 가이사는 드래곤 하트가 이식된 몸…… 잠깐, 마법?

“가이사, 마법도 할 줄 알아요?”

“예.”

드래곤 하트를 가졌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가이사가 마법을 사용하는 건 처음 봤다. 원작에서도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고.

“혹시…… 마법 쓰는 거 싫어해요?”

내 목덜미를 내려다보고 있던 가이사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를 응시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이제는.”

“이제는?”

“뭐가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그냥…… 다. 가이사도 저를 궁금해하잖아요.”

가이사는 또 낯설게 피식 웃었다.

“마법은 제가 본래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 아닙니다. 순전히 드래곤 하트의 덕을 보는 것이라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혼자가 아니라 꼭 아버지가 곁에 있는 것만 같은.”

“아…….”

“마법은 드래곤의 일상입니다. 쓸 때 느끼는 감정은 편안하여 나쁘지 않지만 그 후가 지독하게 외로웠습니다. 아버지가 소멸한 날을 떠올리게 되니까요.”

검술이 온전한 가이사의 재능이라면 정령술은 버프를 받은 것이고 마법은 선물받은 것이었다. 레어노스가 물려준 유산일 테지만 낭떠러지 바로 앞을 겨우 버티고 선 가이사에게는 떠올리는 것만도 힘든 일이었겠지.

“그런데 얼마 전 이 힘을 썼을 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빨리 당신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얼마 전이요?”

그가 언제 마법을 썼지? 내가 잘 때 썼나?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홀로 하늘의 필터를 달리 받는 화려한 낯빛은 그 휘광 때문에 결코 평범할 수 없었지만 예쁘게 말린 입꼬리는 보통의 사람 같았다. 큰 불행도 행운도 없이 평범하게 자라 온 보통의 사람. 지금의 미소가 때 묻지 않은 아이처럼 맑아서 더 캐묻고 싶지 않았다.

“니네이나.”

그런데 갑자기 가이사가 소리 내어 나를 불렀다.

“당신은 이런 거 저런 거 생각하느라 쉽게 지치는 겁니다. 작은 머리를 어찌나 굴리고 혹사하는지. 그건 본능인 겁니까? 절제가 불가능한?”

“……뭐요?”

시비 거는 거지? 이거 시비 거는 거 맞지? 내가 찌릿 노려보자 가이사는 피식 웃으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장자인 자신이 봐주고 넘어가겠다는 것처럼 포근한 미소였다.

“아실로 황자 말입니다. 회유하고 싶은데 어디까지 말해도 될지 고민하시는 게 아닙니까?”

으음. 어떻게 알았지? 정말 내 속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하나?

“어린애가 뭐라고.”

가이사는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아직까지도 고민하고 있었다. 아실로를 회유하려다가 실패하면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가이사가 기억 수정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편리하겠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답지 않게도, 나는 가이사만은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어려운 것이라면 더더욱.

“맞아요. 어린애가 뭐라고. 저는 당신이 더 중요해요.”

내 말에 가이사의 양 뺨이 서서히 불긋해졌다.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던 그가 침착한 척 말했다.

“그깟 어린애 기억 하나 지우는 게 뭐가 힘들겠습니까?”

흥. 그까짓 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어. 겨우 그딴 게 이 몸에게 타격이나 줄 수 있겠어? 고고한 흑표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오만한 콧대를 치켜세우는 걸 목격한 기분이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

“외롭지 않습니다. 당신이 있는데 내가 왜 외롭겠습니까?”

그 순간 숨이 턱 막히며 시야가 조각나 어그러졌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문제가 될 것 같다면 황자의 기억을 지우겠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도도하게 말한 가이사가 내 손을 붙잡았다.

“가죠.”

흑표의 새침한 꼬리가 우악스레 내 허리를 휘감는 기분이 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반쯤 끌려가다시피 해 황자궁에 도착했다.

* * *

“갑자기 무슨 일이지?”

감히 당일에 알현을 신청하다니. 오늘만 특별히 만나 주는 것일 뿐 다음부터는 어림없어. 오늘도 깜찍한 황자님께서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사람을 물려 주시겠어요? 중요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아실로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으나 곧 손짓으로 시종을 물렸다. 아직 어린 황자임에도 황제의 귀애를 받는 덕에 반발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가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서야 본론에 들어갔다.

“제가 황자님께 말씀드린 황태자 전하의 비밀을 기억하세요?”

“그게 정말 비밀의 전부는 아니겠지?”

아실로의 입술에는 힘이 꾹 들어가 있었다.

“전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이지?”

“황태자 전하는 황자님을 미워하지 않아요, 이제는 알고 계시죠?”

나는 굳이 소리 내어 다시 말했다.

“하려는 하는 말이 뭐야?”

“두 분 사이가 많이 좋아지셨다고 들었어요.”

의도한 바는 아닌데 내가 세이아 저택에 둘을 함께 초대했던 게 일종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칼리탄과 아실로의 사이가 원작보다 좋아져서 두 사람이 가끔 이야기도 나눈다고 들었다.

“황후께서 좋아하실 일은 아닐 테죠.”

황후는 아실로를 혼내며 닦달하는 모양이었지만 아실로는 황후와 황태자의 갈등에 괴로워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만약 둘 중 한 사람만 선택해야 한다면 선택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칼리탄이 너는 용서했어도 황후는 절대 용서하지 않아. 잔인한 말을 입으로 직접 내뱉지 않아도 똑똑한 아실로는 내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또…… 아니, 형님께서 참다못해 움직이시는 건가?”

“세상에는 공생할 수 없는 관계가 있어요.”

“그것이 어머니와 형님이라는 거야?”

“네.”

아무리 조숙하다고 해도 일곱 살 어린아이가 뭘 얼마나 알까? 안타까웠으나 대답을 망설이며 기만할 수는 없었다. 아실로는 혼란스러워하며 고개를 가로젓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노려봤다.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아실로는 똑똑하다. 괴로워하면서도 상황을 바로 보고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저는 황태자 전하와 손잡은 쪽이에요. 이해관계가 맞거든요.”

무슨 이해관계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는지 아실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머니께 무엇을……?”

“황자 전하의 대답에 달렸어요. 살리고 싶으세요?”

이 말은 곧 칼리탄과 내가 원하는 게 황후의 죽음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칼리탄이 매 황궁 무도회 때마다 찾는 달빛 분수. 칼리탄의 모친인 멜로리아는 아름다운 분수 옆 메마른 가지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 황제와 릴리스가 몸을 맞댄 채 춤추고 있을 경쾌한 선율을 들으며.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제국의 황후가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제발 부탁이야! 내 아들만은 건드리지 마!

─제가 뭘 했다고요? 몸이 안 좋은 당신을 대신해 황태자 전하를 보필하겠다는 것뿐인데요.

멜로리아는 치욕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그녀의 어린 아들은 다 자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그리고 다짐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당한 치욕을 다 되갚아 주겠다고.

어린 아실로가 그간의 사정을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아실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쯤이면 나는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한다. 아실로가 대답하지 못하겠다면 더 직접적으로 상황을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도록 당근을 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황태자 전하는 황후 폐하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예요.”

내 말에 충격이 컸는지 아실로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아무리 영특하다고 해도 아실로는 아이였다. 아이다운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언컨대 두 사람 사이에 희망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숨만은 구명할 수 있겠죠.”

그리고 헛된 희망은 빨리 버리는 게 나았다.

“황자님이 지금 제 손을 잡으신다면.”

아이는 선택해야 했다. 누구의 밧줄을 잡을 것인지.

* * *

─니네이나. 네 보금자리를 망친 여자다. 자기 이익을 위해 너와 함께 자란 암살대 전원을 죽였지!

타르시는 브람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루베니오와 니네이나를 함께 벌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둘 중 니네이나를 죽이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타르시의 손에서 꼭두각시 암살자로 키워진 브람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세이아 저택으로 향했다. 타르시를 모시며 자주 드나들었기에 세이아 저택을 잘 알고 있는 브람은 쉽게 숨어들었다. 그러나 경계가 삼엄하여 니네이나의 방까지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 그는 기회를 엿보며 니네이나가 지낸다는 건물의 입구에 숨어 있었다. 그렇게 지낸 지 며칠 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황태자 칼리탄이 세이아 저택을 방문한 덕분이었다.

“엘리니움의 차기 태양께 신의 눈길이 함께하시기를.”

“오랜만이군, 세이아 영애.”

브람은 칼리탄이 세이아 영애라고 칭하는 여자를 멀리서 살펴봤다. 색이 연한 백금발과 푸른 눈동자. 연약해 보이는 왜소한 몸과 가녀린 팔다리. 눈처럼 희고 창백한 피부까지. 니네이나는 계속 별장에 머물렀기 때문에 브람이 직접 그녀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특징은 모두 맞아떨어졌다. 황태자 칼리탄도 그녀를 세이아 영애라고 불렀고 여자의 뒤를 따르는 건 그녀의 전속 하녀라는 메이아였다. 한 가지 이상한 건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델만 백작은 어디 있지?’

좀처럼 그녀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루베니오의 개, 가이사 아델만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아델만 백작이 있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그 누구도 가이사 아델만의 한계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건 누구도 가이사 아델만을 상대할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브람이 노리고 있던 것도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이었다. 가이사 아델만이 잠시 떨어져 있을 때.

“주인님, 이것 좀 보세요. 겨울 꽃이 피었어요!”

메이아가 수풀 사이에 난 붉은 꽃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백금발의 여자는 메이아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수풀을 향해 다가갔다. 셋 중 유일하게 검을 지니고 있는 칼리탄과 여자가 멀어졌다.

“예뻐라!”

여자가 꽃을 따며 함박 미소 지었다. 브람은 그 예쁜 얼굴을 보자 살심이 치밀었다. 그의 동료들은 지금쯤 어떤 지옥을 헤맬지 모르는데 저 여자 홀로 편안하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이고 싶은 여자의 목이 눈앞에 있었다. 브람은 더 망설일 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림자 속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온 브람이 꽃을 따는 여자를 향해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챙! 붉은 피가 선홍의 꽃을 따던 여자의 손바닥에 흠뻑 담겼다.

* * *

나와 가이사는 아실로와 담판을 지은 후 곧장 세이아 저택으로 향했다. 익숙한 사람이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뺨이 길게 베인 칼리탄이었다.

“설마 다치셨어요?”

브람에 대한 건 원작을 통해 알고 있었고, 타르시가 마지막으로 브람을 움직일 거라는 건 우나를 통해 알았다. 그러나 칼리탄이 다칠 줄은 몰랐다. 원작에서는 칼리탄의 무력이 브람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걸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내 말에 칼리탄이 못마땅한 낯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지켜야 할 사람이 둘이나 있지 않았나.”

칼리탄의 옆에서 주인 맞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 빛내던 메이아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칼리탄을 바라봤다.

‘메이아가 칼리탄에게 빠졌던 이유가 이거였지.’

내가 칼리탄에게 부탁한 건 두 사람이었다. 브람의 눈을 피해 몰래 빠져나온 나를 대신하여 미끼 역할을 해 준 에브릴과, 같이 있을 메이아. 그러나 일반적으로 봤을 때 하녀의 안위를 염려하는 주인은 없었다. 있다고 해도 칼리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작의 메이아가 칼리탄을 사랑했던 건 저런 모습 때문이었다. 황태자 주제에 모순되게도 그는 신분 고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황족으로 태어난 그에게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노예이든 다 제 아래 신분이었고 본인에게 대들지 않는 한 넉넉한 성품이기도 했다.

반면 노예 생활의 위험을 일찍이 경험하며 성별과 이름을 숨겨야 했던 메이아는 그런 황태자의 배려를 고마워했다. 모두가 ‘노예 출신’ 공녀라고 낙인을 찍고 볼 때 칼리탄 홀로 아무런 색안경도 없이 메이아 그 자체를 봤다.

‘둘은 어떻게 되려나?’

오늘 보니 전혀 가망이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두 사람을 은근히 훔쳐보며 지하로 향하는 아래쪽 계단을 밟았다.

“오…… 오셨어요, 주인님.”

지하에는 내 옷을 입고 있는 에브릴이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내 방에서 머무르며 하녀들의 시중을 받게 했더니 건조하게 말랐던 피부에 제법 윤기가 돌았다. 그녀는 내 대역으로 딱 알맞았다. 아직 나이가 어린 탓에 나만큼이나 체구가 작았다. 내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가발을 씌워 두면 나와 거의 흡사했다. 그렇기에 쓸모가 있었다. 게다가 영악한 그녀는 손익 계산을 할 줄 알았다. 그녀는 무너져 가는 타르시와 나 사이에서 저울질을 했지만 어떻게 해야 자신이 살 수 있는지를 잘 알았다.

─너를 죽이려 했던 할아버지께 복수하고 싶지 않아?

우습게도 그녀의 선택을 확고히 만든 건 그 말이었다. 평생 천한 것으로 살아오며 물건 취급을 당해야 했던 에브릴은 모든 증오를 타르시에게 돌렸다. 타르시는 무너지는 성이었고 에브릴은 땅으로 떨어진 천공성을 짓밟고 싶어 했다. 천성이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다 타르시와 요르케의 업보였다. 나는 에브릴이 되갚을 수 있게 해 줬을 뿐이다.

“너도 다쳤니?”

“괘, 괜찮습니다.”

에브릴은 길게 베여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복종시키는 건 두려움이었다. 자신보다 큰 존재, 자신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 그렇게 인식할 때만 얌전해졌다. 사람을 그렇게 다루는 게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빠르고 안전하다면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수고했어.”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이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밥값을 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짐짓 고압적으로 말하자 에브릴은 고개를 거듭 숙이며 대답했다.

“메이아, 에브릴을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렴.”

내 허락이 없으면 치료도 받을 수 없다. 값비싼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고급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에브릴의 위치는 그것이었다.

“주인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에브릴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인사하자 메이아가 몹시 뿌듯해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메이아를 옆에 붙여 놨더니 저런 것을 가르친 모양이었다. 나는 손짓으로 그녀들을 보냈다. 이 일은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은밀히 진행해야 했다.

“브람은요?”

“고집이 쇠심줄처럼 질기더군. 시끄럽게 읍읍거려서 재갈을 물려 놨다.”

브람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타르시의 취향인지 세이아 저택의 감옥은 외양이 엄청나게 살벌했는데 가뜩이나 험악한 공간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려왔다.

“으우우!”

눈에 핏발이 선 브람이 뭐라고 소리쳤다.

“으?”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이 일이 내가 판 함정임을 깨달았는지 분개하며 온몸으로 쇠창살을 들이박았다.

쿵! 쿵! 다친 몸의 상처가 벌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더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차라리 기절시켜 줄래요?”

내 말에 가이사가 브람에게 다가갔다. 무슨 짓을 했는지 곧 브람의 몸은 축 늘어졌다. 브람은 설득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타르시의 꼭두각시였다. 자신이 그의 인형이라는 것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착하고 상냥했던 원작의 메이아는 그런 브람을 안타깝게 여겨 그를 설득하려 했다. 브람을 포함한 암살대 전원은 타르시에게 이용당한 것뿐이라고 알려 주려고 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을 때 메이아의 행동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타르시가 이용하려 했든 어쨌든 메이아와 칼리탄이 암살대를 모두 죽인 건 사실이었다. 암살대가 가족인 브람에게는 두 사람이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러나 메이아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메이아는 브람의 손에 큰 상처를 입었다. 브람이 메이아의 설득에 넘어가는 척하며 방심시킨 뒤 메이아를 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나는 메이아와 같지 않았다. 브람이 불쌍해도 외면할 수 있었다. 그는 죽어야 했다.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나나 루베니오를 죽이려 들 테니까. 그걸 감수하고 브람을 동정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선택했어.’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브람의 분노와 증오 역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나는 내가 브람에게 가해자라는 걸 인정했다. 그건 브람을 비롯한 암살대가 나를 노렸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피할 수 없는 악연인 것이다.

“낙인은 어떻게 되었어요?”

가이사는 브람의 소매를 걷어 붉게 찍힌 낙인을 보여 줬다.

“너무…… 오늘 찍힌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약간의 처리를 하면 오래된 것처럼 보일 겁니다.”

약간의 처리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숨 쉬고 있는 브람을 철저히 외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검은요?”

말없이 서 있던 칼리탄이 오래된 단검 하나를 꺼내 브람의 낙인 옆에 붙였다. 단검에 찍힌 꽃문양과 브람의 낙인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저 단검은 칼리탄이 다섯 살 때, 그를 시해하려던 자에게서 나온 물건이었다. 문양이 있는 건 우연이었다. 타르시나 황후는 암살자에게 특정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루베니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증거는 조작하면 그뿐이라고.

저 검이 칼리탄의 손에 남아 있는 건 그들의 오만 때문이었다. 어리고 약했던 소년은 강력한 황위 후계자로 자라났다. 소년이 계속 나약할 거라고 믿고 자신들의 권력은 영원할 거라고 판단한 과오는 스스로 내던진 족쇄가 되어 그들의 목을 죌 것이다. 이걸로 늙은 범의 무덤이 될 제단의 마지막 제물이 갖춰졌다. 타르시의 마지막 카드가 그가 짠 체스 판의 킹을 죽일 것이다.

* * *

“폐하!”

야심한 밤 겨우 단잠에 이른 황제는 자신을 애타게 찾는 소리에 깨어났다. 끄응, 몸이 찌뿌둥하고 기력이 없었다. 뼈마디가 시리고 오한이 드는 것이 아무래도 감기 기운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

감히 어떤 놈이 내 잠을 깨웠냐며 묻는 황제의 목소리는 냉엄하고 까칠했다.

“황궁에서 다급한 서신이 왔습니다.”

황궁에서? 황궁의 일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황제지만 몸이 아프니 오늘따라 그것도 귀찮았다.

“들어오라.”

그러나 아직, 아니 죽는 그 순간까지 권력을 승계할 마음이 없는 황제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타르시 세이아가 황태자 전하를 시해하려 했습니다!”

“타르시가?”

시종의 말은 놀라웠다. 황제는 서신을 넘겨받아 읽었다.

「……타르시 세이아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발견했습니다. 암살자 브람은 어린 시절부터 타르시가 키워 온 자이며 요르케의 사병이라고 알려졌던 암살대 출신입니다. 요르케가 그토록 큰 암살대를 조직했다는 점이 수상하여 조사해 보니 암살대 역시 타르시의 것이었습니다. 감히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 신성한 수도에서 해서는 안 될 대죄를 지은 타르시 세이아를 일벌백계하여야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사료…….」

“허어…….”

서신을 다 읽기도 전에 황제는 기가 막혀 한숨을 내뱉었다.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암살자의 습격을 받은 칼리탄이 그 암살자를 생포해 배후를 캐 보니 타르시가 나왔다. 암살자의 팔뚝에는 기이한 꽃모양 낙인이 찍혀 있었는데 알아보니 그것이 요르케의 것이라고 알려진 암살대의 상징이었다. 암살대를 키워 온 건 타르시였고 타르시는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요르케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으로 추정된다. 감히 황족을 시해하겠다는 무도한 생각을 한 자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

“쯧. 계륵은 될 줄 알았거늘.”

황제는 서신을 다 읽기도 전에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파 왔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요양을 보내 주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또 사고를 치다니. 이제 보니 귀찮은 짐 덩이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태자 전하께서는 간악한 자의 손에 상처를 입으셨다고 합니다.”

“태자에게 태의를 보내라.”

황제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칼리탄이 얼마나 다쳤고 상태가 얼마나 위중한지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타르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감히 황제의 배려는 생각하지도 않고 또 일을 쳐 귀찮게 만든 그에 대한 분노만 일었다. 자기 자신과 황후 외에는 무심한 편인 황제는 이 문제에 관심을 끊었다. 황제는 타르시를 버린 지 오래였다. 타르시에게 사형이 내려지든 말든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귀족, 타르시 세이아에 대한 재판을 허락한다.”

아프든 말든 황태자가 알아서 처리하게 두라는 듯 퍼석하게 메마른 손이 사납게 손짓했다. 황태자가 보낸 시종은 그렇게 내쫓겨 황궁으로 돌아갔다.

* * *

“대역 죄인 타르시 세이아에 대한 귀족 심판을 시작한다.”

칼리탄은 일부러 뺨에 난 상처를 내보이며 재판장에 나타났다. 야심한 시각이고 빠르게 처리한 일임에도 재판장에 나타난 사람이 꽤 많았다. 타르시의 추락을 지켜보려는 추악한 시선들이었다.

“타르시 세이아를 끌고 와라!”

죄인이 입장하는 쪽문이 열리고 죄인이 된 타르시가 들어왔다. 타르시는 내가 순간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인상이 확 바뀌어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팔다리는 앙상하게 말라 힘이 없었고 입술은 부르터 반쯤 돌아가 있었다. 순순히 끌려오지는 않았는지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은 흙과 먼지가 묻어 넝마를 기워 만든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휙휙 돌리며 누군가를 찾는 몸짓은 말 그대로 광인 같았다. 나는 지금 타르시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분노. 오로지 그것뿐일 터였다. 평소 하찮게 여기던 무리가 고개를 뻣뻣이 들고 그의 추락을 지켜보는 것에 대한 분노, 감히 위대한 자신을 이따위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런 일을 겪게 한 자에 대한 분노.

“으아아악!”

나와 눈이 마주친 타르시가 이를 악물고 괴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 재판장에서 그의 발언은 허락되지 않을 예정이었다.

“시끄럽군.”

화려한 의자에 앉은 칼리탄이 손짓하자 두툼한 재갈이 타르시의 입에 물려졌다.

“우읍! 으으읍!”

그는 몸부림치며 온 힘을 다해 나를 증오했다. 짐승같이 헐떡거리는 꼴이 우습기는 했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전하,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세이아의 수장인 루베니오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다.

“공작의 발언을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칼리탄에게 짧게 목례한 루베니오는 물건을 평가하듯 타르시를 바라봤다. 광활한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들어차지 못했다. 까마득하게 넓고 아득해서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뿐이었다.

“저것은 세이아의 수치입니다.”

“읍! 으으으!”

눈자위의 핏발이 터진 타르시가 발광하며 루베니오를 노려봤다.

“저는 저것을 세이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타르시를 가문에서 내치면 그는 귀족으로 심판받을 수 없게 된다.”

같은 대역 죄인이라도 신분에 따라 다른 재판 결과를 받기도 했다. 역모라는 죄에 대한 벌은 당연히 사형이지만 최소한의 예우를 해 주느냐 안 해 주느냐에 따라 죽기 전까지의 고통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상관없습니다.”

별다른 냉소나 비소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덤덤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시렸다.

“면피하기 위해 아버지를 버리는 것인가?”

칼리탄이 의자 팔걸이를 쾅 내려치며 인간의 도리를 버리겠다는 루베니오를 나무랐다.

“저것은 제 아버지가 아닙니다.”

루베니오의 말과 동시에 그의 옆에 서 있던 시엘이 움직였다. 시엘이 건넨 서류는 시종의 손을 통해 칼리탄에게 건네졌다.

“이 일이 있기 전에도 그는 세이아가 아니었습니다.”

이 일을 계획하면서 가장 먼저 처리했던 일이었다. 타르시를 타르시 세이아로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역모는 죄인의 가문까지 멸문하는 대죄였으니까.

“그렇군.”

영혼 없는 칼리탄의 고갯짓에 웃음이 피식 나려는 걸 참았다.

“완전무결한 세이아를 위해 내린 판단이다. 나 루베니오 세이아는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가문의 위신을 해한 타르시를 인정할 수 없다.”

목소리가 컸던 것도 아닌데 그 내용 탓에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칼리탄의 입술을 주시했다.

“장로 12인 전원은 가문의 영예를 위해 결단을 내린 수장의 뜻을 받든다.”

칼리탄은 마지막 문단을 읽으며 타르시의 눈앞으로 서류를 던졌다.

“지금 이 순간부터 타르시를 가문에서 축출한다.”

가계에서 축출된 이름에는 빨간 빗금이 쳐졌다. 타르시는 지워진 자신의 이름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바라봤다.

“날짜는 사흘 전이군.”

결말까지 짜여 있는 연극 무대였다. 그리고 칼리탄은 극의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앞으로는 죄인을 타르시라고 칭하겠다.”

“으…… 으윽!”

타르시는 세이아를 자신이 일궈 낸 가문이라고 믿었고, 그 자부심이 대단했다. 아마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그 다음으로 사랑하는 게 ‘세이아’라는 성이었겠지. 온갖 더럽고 잔인한 짓을 해 가며 지독히 아껴 온 성을 한순간 잃은 충격이 컸던지 그는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재갈에 막혀 인간의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가 비통하게 울렸고 광택이 흐린 눈알은 촉촉해졌다. 주르륵 흘린 눈물이 주름진 눈가와 툭 튀어나온 광대를 지나 입에 물린 재갈에 스몄다. 그 씁쓸한 맛에 그는 잠시 숨을 죽이는 듯도 하였다.

“대역 죄인, 브람을 들여라.”

평민인 브람은 재판을 거치지 않았다. 황족을 시해하려 했다는 죄가 명백하기 때문에 그는 황궁의 옥사에 갇혀 있었다. 끌려 나온 브람을 꿇린 기사는 그의 옷소매를 걷어 선명한 낙인을 내보였다. 가이사의 말대로 무슨 마법적 장치를 거쳤는지 아주 오래된 낙인 같아 보였다.

“죄인, 타르시는 고개를 들어라.”

타르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기사는 그의 턱을 강하게 붙잡아 젖혔다.

“저 낙인을 잘 알고 있겠지?”

아직 이 연극을 파악하지 못했을 타르시의 눈동자 위로 의아함이 스쳤다.

“네가 키운 암살대의 상징이 아니더냐?”

칼리탄의 말이 들린 후에야 머리가 돌아갔는지 타르시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브람은 저만 살겠다고 냅다 고개를 젓는 타르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타르시를 향한 미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죄스러워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고 붙잡힌 것에 대하여.

“타르시가 지내던 사저에서 발견한 증좌를 내오라!”

칼리탄의 말에 미리 준비해 뒀던 증거가 쏟아졌다. 어린 시절 노예로 팔렸던 브람을 사 간 게 타르시의 집사였고, 그는 종종 그렇게 어린 노예를 사들였다는 보고서. 암살대의 본거지가 타르시의 비자금으로 운영되었음을 증명하는 블랙 상단의 서류. 타르시의 주거지에서 발견된 인두와 다수의 증거품에 브람의 팔뚝 낙인과 똑같은 무늬가 있다는 점 등. 잘 조합하여 엮은 덫이 벗어날 수 없도록 타르시의 발목을 꽉 물었다.

“수도 내에서 잡힌 암살자들의 시체에서 대역 죄인 브람과 같은 낙인이 몇 나온 걸 봐서는 그 모든 게 타르시의 소행으로 짐작……”

“그만.”

줄줄이 이어지는 증거에 칼리탄이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서 손을 들어 올렸다.

“더 볼 것도 없군. 제국법상 역모를 저지른 평민은 재판을 받지 않는다.”

“끄, 끄으…… 으아아아아!”

칼리탄이 자신을 평민으로 칭한 것이 치욕스러웠는지 타르시는 몸을 뒤틀다가 손톱으로 제 두피를 벅벅 긁었다. 두피를 다 벗겨 낼 기세로 미치광이처럼 발버둥 치자 하얀 백발에 피가 붉게 배어 나와 그 꼴이 험악했다.

“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이냐!”

찰싹! 기사 하나가 타르시의 뺨을 내리치며 호통쳤다.

“큭!”

눈을 부릅뜬 채 기사를 노려보던 타르시가 숨을 씩씩 몰아쉬며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흑!”

그러나 제압된 건 타르시였다. 기사는 감히 자신에게 대든 평민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연신 발길질하며 타르시의 복부를 걷어찼다.

퍽! 퍽! 몇 번의 발길질에 타르시의 입가로 피가 흘렀다. 육체적 고통에는 익숙하지 않을 타르시는 본능적으로 몸을 말아 머리를 감쌌다. 그의 핏발 선 눈이 마지막 저주처럼 발길질하는 기사의 발을 찢어 죽일 듯 노려봤다.

“으아아아!”

묶여 있던 브람이 크게 동요하며 울부짖었다. 엄준해야 할 재판장이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끌고 가라!”

그 꼴을 보던 칼리탄이 이마를 짚고 소리쳤다.

“예, 전하!”

브람과 타르시는 머리채가 잡혀 바닥으로 질질 끌려갔다. 죄인의 피가 바닥을 흠뻑 적시고 빨간 길을 만들었다.

“그런데.”

칼리탄의 서늘한 목소리가 시시하게 끝나 버린 재판장에 내려앉았다. 다 끝난 줄 알고 쑥덕거리던 귀족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고 칼리탄을 바라봤다. 의자에서 내려온 그의 구두가 타르시가 쏟아 낸 핏방울을 짓밟았다.

“이 문양, 어딘지 낯이 익더란 말이지.”

피에 젖은 인두를 직접 손에 든 칼리탄이 그걸 쥔 채로 어느 한 곳을 돌아봤다.

“……?”

의자에 앉아 타르시의 재판을 지켜보던 황후가 미간을 좁히고 눈을 매섭게 치떴다. 칼리탄이 말을 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제가 다섯 살 때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보았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황후 폐하?”

칼리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종이 작은 상자 하나를 공손히 내밀었다.

“이 단도 말입니다. 황후께서 제게 주신 것이 아닙니까?”

저 단도는 원작에서도 나오는 것이었다. 죽을 뻔했던 다섯 살의 황태자에게 현 황후, 릴리스가 내민 단검. 단검을 보며 오늘 죽을 뻔했던 걸 잊지 말고 조용히 죽어 살라는 뜻이 아니었다. 릴리스는 다섯 살의 칼리탄이 그 단검으로 죽기를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멜로리아가 죽을 것이라는 협박을 속삭이며. 그러나 어린 칼리탄이 무엇을 알았을까? 그 말은 사실 멜로리아에게 한 말이었다.

─황태자 전하, 어머님과 당신 중 하나만 살 수 있다면 누가 죽어야 할까요?

릴리스는 까르르 웃으며 멜로리아를 협박했다. 어린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당신이 죽어야 할 테니 그 손으로 칼리탄을 직접 죽이라는 말을 그렇게 전했다. 그 후 며칠 뒤, 멜로리아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

칼리탄에게 저 단검의 의미는 그랬다. 어머니의 목숨값이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지?”

그런 검을, 황후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쉽게 인정했다. 자신이 건네준 게 맞노라고.

그 순간 칼리탄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피었다. 비늘까지 독으로 무장한 화려한 독뱀의 교란이었다. 애처롭고 지독한 독향을 뿜어내는.

“부족한 소자가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때 당신은 황후가 아니었는데.”

“뭐?”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지 않았다. 권선징악도 믿지 않았다. 선과 악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데 누구를 선이라고 칭하며 누구를 악으로 칭한단 말인가?

“이 단검의 문양이 이 인두의 문양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건 제가 다섯 살이었을 때, 당신께서 저를 죽이려 했다는 증좌가 됩니다.”

“……!”

그때서야 황후는 벌떡 일어나 칼리탄의 손에서 상자를 뺏어 들었다. 상자 안의 단도를 자세히 살피던 황후가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어떻게…… 모함이다! 모함이야!”

쨍그랑! 상자를 내던진 황후가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타르시와는 다르게 황후는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를 건드렸다가는 요양 가 있는 황제가 당장이라도 달려올 게 뻔했다. 타르시의 재판은 그래서 필요한 눈속임이었고 더 멀리 내딛기 위한 발판이었다. 오늘 우리는 황후와 타르시를 모두 잡을 것이다.

“감히 이딴 음모를 꾸미다니! 황태자의 성정이 음습한 건 알고 있었으나 어찌 이런 짓까지 꾸며 나를……”

“그만하세요, 어머니.”

이 모든 잔인한 광경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냉랭히 지켜보던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의 손을 붙잡았다.

“황자! 이 어미는 너무 억울합니다!”

반색한 황후가 사랑하는 아들의 어깨를 붙잡으며 애처롭게 흐느꼈다. 아실로가 제 편을 들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제가 다 봤습니다. 어머니의 궁에서.”

“아, 아실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당황한 황후가 울먹거리던 것도 잊고 더듬거리며 아실로를 불렀다. 그러나 소년은 표정을 서늘히 굳힌 채 어머니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실로는 칼리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각자의 어머니를 닮은 형제가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후 벌어질 일을 감내하며 차분히 내려뜬 어린 소년의 눈가가 고단해 보였다.

“어머니의 침실에는 지하로 통하는 비밀 공간이 있습니다. 서랍장 세 번째 칸 바로 옆의 벽을 두 번 세게 누르면 아래로 통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 안에 모든 증거가 있습니다.”

빨리 이 일을 끝내려는지 막힘없이 빠르게 내뱉는 황자의 말을 황후는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제 아들을 지켜보는 황후의 뒤로 칼리탄의 지시를 받은 기사 몇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나는 살리고 싶다. 두 분 다.

나를 믿지 못한 아실로는 황궁으로 돌아온 칼리탄과 이야기를 한 뒤에야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이건 욕심인가?

─욕심이죠.

잠깐의 망설임도 없는 내 대답에 아실로는 서러운 얼굴로 그런가, 했다. 애늙은이도 이런 애늙은이가 또 없었다. 답답해서 몇 마디 더 했다.

─그런데 욕심 좀 부리면 어때요? 그게 뭐가 나쁘죠? 저는 포기하기 싫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 거예요. 한 번뿐인 삶에 후회가 있으면 되겠어요?

남들이야 욕심쟁이라고 욕을 하든 말든 알 게 뭔가?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어린아이를 덕으로 감화하지는 못할망정 뻔뻔히 내뱉는다고 남들이 나를 손가락질해도 상관없었다. 누가 저 어린아이의 욕심을 죄라고 할 수 있을까? 아실로에게 죄는 없다. 나는 저 아이가 그 사실을 알았으면 했다.

─가져도 돼요, 욕심. 책임질 자세가 되어 있다면 얼마든지요.

─어머님은 크게 화내실 거야. 나를 미워하실지도 몰라. 다시는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실지도 모르지. 그 뒷감당은 다 나보고 하라는 건가?

─그렇죠.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거든요.

나는 1000냥에 웃음을 파는 광대가 되어 손짓했다. 지금의 모든 말은 다 내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 뻔뻔한 자태에 내내 창백했던 아실로의 뺨이 동그랗게 말렸다.

─내 어머니는 절대 형님을 살려 주지 않을 거야. 누구를 더 사랑해서도, 덜 사랑해서도 아니지. 나는 두 분을 다 살리고 싶어. 욕심이라고 해도 좋아.

서럽고 여리게 웃던 소년은 곧 형만큼이나 단단한 눈을 하고 내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도와줘.

작은 소년이 품은 황홀한 빛이 부담스러웠다. 그걸 왜 내게 말하는 것일까? 내게는 저런 아름다운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그 누구보다 황후의 추락을 기뻐하며 우짖는 사람들 중 하나였으니까.

“황자님의 말씀처럼 황후궁에서 이 모든 게 나왔습니다!”

돌아온 기사가 황후의 궁에서 발견한 것들을 칼리탄에게 바치며 보고했다.

“뭐?”

황후는 격앙한 숨을 내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실로를 바라봤다.

“아실로?”

“이제 그만 죄를 인정하세요, 어머니.”

아실로는 차가운 표정으로 황후를 외면했다.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애초에 증거를 남기지 않았던 황후는 믿지 못하며 조작된 증거를 살폈다. 황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 물건들은 그녀도 처음 보는 것일 터였다.

“난 처음 보는 것들이야!”

황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발뺌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황후궁에서 나온 물건을 황후께서 모르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모함이다! 나를 모함하려는 놈들이 벌인……”

“10년 전, 당신은 수로 공사를 핑계로 인부들을 끌고 갔습니다. 한 가지 이상한 건 그들 중 살아 돌아온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때 이 공간을 만든 게 아닙니까?”

“그건…….”

황후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동요하는 틈을 타 칼리탄은 그녀를 매섭게 몰아붙였다.

“제 친모이신 전대 황후가 살아 계실 때는 없던 공간입니다. 그런 곳을 당신 외에 또 누가 안단 말입니까?”

알고 있던 나머지는 모두 죽이고 아실로에게만 알려 준 황후의 비밀스러운 공간.

황후는 아실로를 멍하니 바라봤지만 굳어 떨리는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아들의 배신에 충격을 받아 얼어 버린 황후에게 서늘한 음성이 내려왔다.

“황후께서 타르시와 공모했다는 증거도 증인도 있는데 계속 발뺌하실 겁니까?”

“나는…… 몰라! 모르는 일이야!”

“차차 밝혀질 겁니다. 당신의 죄도.”

“감히!”

눈을 치뜬 황후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팩 돌아섰다.

“비켜라, 폐하를 뵈러 갈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방만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재판장의 재판관은 엄연히 칼리탄이었기 때문이다.

“황후 폐하를 모셔라!”

추상같은 명령에 시녀들이 달려와 황후를 부축했다.

“놔! 감히, 이것들이! 놔! 놓으라고!”

칼리탄은 끌려 나가는 황후를 고요하게 바라봤다. 숨을 쉬는 것도 잊었는지 미동도 안 하는 가슴은 성에로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 가슴 깊이 통렬한 카타르시스가 치솟는 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동시에 비참하게 죽어 간 어머니를 회고할 것이다. 그는 갈비뼈가 심장을 뻐끔 조이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강렬한 쾌감에 취해 있었다. 소름 끼치게 번뜩이는 눈동자 위로 한 줌의 연민과 들끓는 증오가 휘몰아쳤다.

“…….”

칼리탄은 황후가 사라진 뒤에야 허리를 굽혀 떨어진 단도를 주웠다. 힘이 들어간 손아귀에 그가 결코 잊지 못할 꽃의 낙인이 붉게 찍혔다. 황후는 당분간 황후의 궁에 감금될 것이다. 그 이상의 조치는 할 수 없었다. 궁에 감금한 것만으로도 황제는 길길이 날뛰며 황궁으로 돌아올 테니까. 남을 상처 입힌 죄는 고스란히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법임에도. 황제 또한 내가 놓은 덫을 향해 달려올 타락자였다.

* * *

니네이나, 가이사, 루베니오는 재판이 끝나자마자 곧장 세이아 저택으로 떠났다. 그들을 실은 세이아의 마차가 황궁의 정문을 넘어 세이아 저택으로 도착한 흔적이 장부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흔적을 남겨 들어온 이후 가이사는 또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저도…….”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니네이나는 반쯤 정신을 놓고 있었고 그녀를 데려가기에는 이곳의 환경이 좋지 않았다.

“대역 죄인을 가두는 황궁의 지하 감옥입니다. 더럽고 습한 곳이라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에 니네이나는 멈칫했다. 사실 그녀도 자기가 가면 짐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 너는 그냥 이곳에 있으려무나. 일의 마무리 정도는 내 몫으로 다오.”

그 틈을 치고 들어오는 루베니오의 강건한 말에 니네이나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이사, 너도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나 혼자로도 충분해.”

루베니오의 말에 가이사는 반사적으로 니네이나를 바라봤다. 사실 그는 그녀 곁에 있고 싶었다. 이곳이 안전하다는 건 알지만 갈수록 옆에서 떨어지는 일이 힘들어졌다.

“가이사…….”

그러나 니네이나는 가이사가 루베니오를 따라가기를 바랐다. 그녀의 작은 부름에 갈등의 천칭이 조금씩 기울었다. 가이사가 판단했을 때에도 더 위험한 건 루베니오였다.

“보호 마법도 제거했다고 하지 않았나? 나 혼자로도 충분해.”

“자꾸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듭니다. 제가 파악하지 못한 마법 장치가 되어 있다면 당신 혼자서는 대처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가이사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고 드래곤이되 드래곤이 아니었다. 신체의 일부를 드래곤의 것으로 대체한 까닭에 마법에 대한 감지 능력이 상당히 높았으나 본래 그는 마법에 재능이 없었다. 두 개의 기질이 합쳐져 가이사의 마법 감지 능력은 불완전했다. 낌새가 이상하다는 건 알아도 무엇이 문제인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아마 타르시의 마지막 한 수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대로 루베니오를 혼자 보냈다가는 니네이나가 울게 될 거라는 막연한 직감이 들었다. 상실의 아픔. 믿어 왔던 아버지의 부재. 가이사는 그 절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니네이나가 그 괴로움을 가능한 한 몰랐으면 했다.

니네이나의 옆에는 공격 마법이 가능한 충실한 하녀가 있었고 그 외에도 상당한 무력 집단이 이 집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안전해. 가이사는 속으로 수십 번 중얼거린 후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루베니오를 따라가겠습니다.”

루베니오와 니네이나는 서로 가이사와 같이 있으라며 실랑이를 벌였으나 결국에 승리한 건 이번에도 니네이나였다. 루베니오가 보기에도 이 저택에 있는 니네이나는 안전했다. 그리고 시간이 별로 없었다. 황후가 궁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루베니오와 가이사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타르시와 같은 죄인은 ‘흑무(黑無)’라고 부르는 특수한 감옥에 갇힌다. 말 그대로 어둠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주로 타르시와 같은 높은 신분 출신의 대역 죄인을 가둬, 죽기 직전까지 비밀을 토설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으아아아!”

지금도 고문이 한창인지 지하 입구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비명이 울려왔다. 가이사는 이래서 니네이나를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냉정한 척해도 그녀는 인간을 고문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겪는 일이 아님에도, 가이사 자신이 있다면 누구보다 안전할 텐데도, 심지어 무서워하기까지 했다.

‘같은 처지도 아닌데 대체 왜 무서운 거지?’

인간의 마음 중 상당 부분을 잃어버린 가이사는 지독한 고통에 숨이 껄떡 넘어가는 타르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려 나간 손가락과 발가락이 피에 젖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손톱을 먼저 뽑았나 보군.’

가이사는 피에 젖어 형체가 불분명한 덩어리를 보며 무심히 생각했다. 가이사의 기준으로 봤을 때 타르시는 너무 편안하게 죽고 있었다. 적어도 1년 이상은 공을 들여 천천히 죽여 줘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친절하게 육체를 절단해 주었다. 저렇게 하면 심신이 빠르게 상해 오래 살려 둘 수 없었다. 가이사는 그것을 내심 아쉬워하며 먼저 안으로 들어서려는 루베니오의 앞을 막아섰다.

“제가 먼저.”

말보다 행동이 앞섰다. 루베니오는 그 행동이 마땅찮았는지 미간을 팍 일그러트렸다. 우아한 인상이 시리게 변했으나 가이사는 그것을 덤덤하게 보아 넘기며 앞장서 걸었다.

“오셨습니까, 공작님!”

타르시를 고문하고 있던 간수가 허리를 굽신굽신 굽히며 옆으로 비켜섰다. 높은 신분을 향한 낮은 자의 비굴함으로 보기에는 간수의 눈빛이 깨끗하고 담담했다. ‘공작’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는지 타르시의 초점이 루베니오를 향해 흐리게 잡혔다. 눈과 혀는 아직 멀쩡했다.

“큭…… 으, 컥! 큭큭…….”

이빨이 뽑혀 입가가 피에 절었는데 뭐가 그렇게 웃긴지 타르시는 광소했다. 루베니오는 그런 타르시를 가만히 보아 넘기며 간수를 바라보았다.

“나가 있게.”

“예!”

삐걱. 문을 열고 나가려던 간수가 멈칫하며 루베니오를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간수에게 루베니오는 짧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간수는 납작 엎드려 정중히 절한 뒤에야 밖으로 나갔다.

“나를 죽이러 왔나?”

“교육이 덜 됐군. 하등 쓸모없는 버러지 따위가 내게 말을 낮추다니.”

루베니오는 작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타르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한때는 아버지였던 것을 바라보는 눈길이 사뭇 고압적이고 냉정했다. 분노나 흥분은 없었다. 타르시의 최후를 지켜보는 게 사명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루베니오! 내가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으냐?”

킥킥. 뭐가 그렇게 웃긴지 타르시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나를 죽이고 황후에게 그 죄를 덮어씌울 심산이겠지. 나와 황후를 모두 처리하면 샤사롯을 복위시킬 테고.”

타르시의 말이 맞았다. 이번 재판에서는 일부러라도 샤사롯과 로이드의 이름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했다. 황제의 경계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다. 순차적으로 해결해야 가장 매끄러운 길을 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놈!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키웠어! 네 생각을 모를 성싶으냐!”

글쎄. 루베니오는 타르시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짐작하든 상관없었다.

“왜 로페니아였지?”

그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타르시가 대답해 주지 않으면 그뿐일 테지만 그래도 이유쯤은 알고 싶었다.

로페니아. 루베니오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면 괴로워졌다. 그가 지키지 못한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죽은 아내였다. 신혼의 반은 꿈같았고 나머지 반은 지독한 현실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그녀의 가족을 살려 줄 수도 없었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에 괴로워하는 그녀를 구원해 줄 수도 없었다. 아이를 품에 안아 보지도 못하고 절명한 로페니아의 뺨을 타고 흐르던 창백한 눈물이 손가락을 시리게 적시던 감각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럼에도 로페니아를 생각할 때면 분홍 장미를 품에 안고 화사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니네이나를 임신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 로페니아는 언제나 그렇게 환하고 싱그러운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들의 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는 상냥한 메시지. 꿈으로부터 오는 아름다운 추억이 그를 가장 괴롭게 했다.

‘선하고 다정한 로페니아. 나의…… 로페니아.’

마른 배를 매만지며 웃던 로페니아의 얼굴이 냉철하게 올라가는 눈꼬리 너머로 사라졌다.

“큭…… 크하하하!”

쇠사슬을 차고 매달려 있던 타르시가 광소를 터트리며 몸을 흔들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로페니아는 너에게나 아내였지 내게는 종마였다! 샤사롯이 가진 정령의 힘! 따로 마법을 수련해야 하는 로이드보다 더 간편…… 으악! 뭐! 아악! 으아아악!”

타르시의 턱을 움켜쥔 루베니오가 그 입안으로 검을 쑤셔 넣었다. 어느새 뽑힌 루베니오의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덜렁 베어져 나간 혀가 바닥에 퉁 떨어져 한 번 튕겨 올랐다가 나동그라졌다.

“…….”

역시 그랬던가? 그뿐이었던가? 루베니오는 작은 정령과 함께 꽃을 따던 로페니아를 떠올렸다. 로페니아의 정령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페니아의 가문인 샤사롯에 흐르는 정령 친화력은 분명히 존재했다.

마법의 로이드와 정령의 샤사롯. 자손 대대로 이어져 온 특별한 힘은 두 가문을 강력하게 유지해 왔다. 로이드와 샤사롯은 대대로 욕심이 없었다. 두각을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히 머물며 황가를 보필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건국 초기부터 후작과 백작 가문으로 머문 이들이었다. 두뇌가 뛰어나 재상, 현자, 대상단주 등을 많이 배출한 세이아와는 다른 특징이었다.

루베니오가 봤을 때, 타르시는 열등감덩어리였다. 타르시의 문제는 차남이었던 게 아니다. 더 뛰어난 장남이 있었던 것. 언제나 뛰어난 형님에게 한 발짝 뒤처졌던 열등감이 그의 트라우마였다. 그러니 차남으로 태어나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생각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들 가문을 치워 버린 일만 해도 그랬다. 타르시는 로이드와 샤사롯의 힘을 탐내고 질투했다. 로이드와 샤사롯의 힘은 특별했지만 그렇다고 겁먹을 만큼 강력한 건 아니었다. 세이아는 세이아대로의 장점이 있었고 그 부분을 살리면 충분히 강성한 가문으로 키울 수 있었다. 역사를 돌이켜 봐도 무수한 학자들이 세이아 출신이었다. 그런데 타르시는 자신 외의 특별함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 홀로 특출하고 싶었던 타르시에게는 샤사롯과 로이드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익보다는 귀족의 정도(正道)를 택했던 두 가문이었으니 더욱 그랬을 터였다.

마침 황태자 칼리탄을 지지하며 릴리스와 황제의 불륜을 우려했던 샤사롯과 로이드는 황후에게도 없애고 싶은 상대였다. 그렇게 이해가 맞아 황후와 타르시는 손을 잡고 두 가문을 멸문으로 이끌 계락을 짰다. 그런 주제에 겉으로는 화합을 다지는 척 샤사롯에게 혼인 동맹을 청하고 로페니아와 루베니오의 혼사를 추진했다. 그 이유가 정령의 힘을 탐냈기 때문이라니. 대체 얼마나 이중적인 건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으아아악!”

루베니오의 검이 타르시의 한쪽 눈을 도려냈다.

“크, 크흑……! 크하아아악!”

이번에는 반대쪽 눈이었다. 텅 빈 두 눈과 잘린 혀. 모두 없어진 손가락과 발가락. 이쯤이면 원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이딴 것에게 시간을 더 쓸 필요는 없었다.

“크흐…… 으으아!”

타르시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구속되어 있었고 루베니오의 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가슴을 갈랐다. 심장이 반쯤 잘려도 뇌는 살아 있으니 타르시는 고통에 몸을 경련하며 천천히 죽어 갔다.

“너무 쉽게 죽음을 허락한……!”

루베니오에게 투덜거리던 가이사의 무덤덤한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왜 그러지?”

불길한 예감을 느낀 루베니오가 인상을 쓰며 추궁했지만 가이사는 루베니오에게 대답해 줄 정신이 없었다. 그는 감옥 밖으로 튀어 나갔다.

* * *

‘니네이나를 죽여! 끔찍하게 터트려라!’

그 시각, 브람은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멍하니 따라가고 있었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어야 할 죄인의 몸이었지만 브람은 밖에 나와 있었다. 브람은 재판장에서 끌려 나와 타르시와 다른 황궁 감옥에 수감되었다. 브람에게는 알아내야 할 것이 없어서 그는 타르시와 같은 흑무에 갇히지 않았다. 튼튼한 쇠사슬이 그의 몸을 억압하고 있었지만 브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솟아났다. 고대에 광전사를 만들 때 사용하던 마법이 브람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마법이 깃든 건 브람이 아주 어릴 때였지만 그 마법이 발동한 건 재판장에서 함께 끌려가던 타르시가 발동어를 생각해 내고 몰래 속삭인 뒤부터였다. 그것이 타르시의 마지막 한 수였다.

루베니오가 혼자 왔다면 브람을 흑무로 불러 루베니오를 죽이고 타르시 자신이 살아 도망칠 방법을 생각했겠지만 불행히도 루베니오는 가이사와 함께였다. 타르시는 광전사가 된 브람도 가이사를 없앨 순 없다고 판단했다. 그건 가이사의 진언에 당한 적 있는 타르시의 무의식이 보내는 경고였다. 하여 타르시는 죽는 그 순간까지 브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니네이나를 죽이라는 죽음의 목소리였다. 브람이 세이아 저택에 도착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타르시의 생명은 끊겼지만 브람의 머릿속을 울리는 타르시의 목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브람은 가렵고 뜨거운 몸을 아무렇게나 긁으며 세이아 저택으로 침입했다.

‘니네이나. 니네이나. 잊지 말아야지.’

온몸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브람은 섣불리 터트리지 않고 니네이나가 지내는 건물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전과 마찬가지로 경비가 삼엄하여 들키지 않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인내심이 짧아진 브람이 신경질적으로 피부를 벅벅 긁다가 상처를 내었다. 몽글몽글 샘솟는 핏방울에 그의 모든 신경이 쏠렸다.

‘피 냄새.’

피. 피다. 피를 봐야 해!

“으아아아아!”

브람은 괴성을 지르며 경비를 서는 기사들에게 뛰어갔다. 숙주의 생명을 대가로 폭주를 일으킨 마법이 그에게 막대한 힘을 선사하는 게 느껴졌다.

죽일 수 있다. 브람은 양쪽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 * *

가이사와 루베니오가 황궁으로 떠난 뒤에도 나는 잠들지 못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복잡한 머릿속의 생각은 수면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곧 들이닥칠 황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황제와 황후에게 불륜의 고통을 맛보여 줄 생각이었다. 불륜으로 흥한 자는 불륜으로 망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여자를 대할 때의 황제는 질투심이 강하고 옹졸한 성격이었다. 황후를 사랑해서 이것저것 해 주었지만 길리안과 황후의 사이를 의심하였을 때에는 황후도 큰일을 당할 뻔하였다.

황제가 황후를 감금하고 자기만 볼 수 있는 곳에 끔찍한 낙인을 찍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황제는 질투의 화신이라 부부의 내밀한 사정에 대해서는 쉽게 이성을 잃고 포악해졌다. 웃긴 놈이었다. 자기도 불륜을 사랑이라고 지껄인 주제에 배신당했다는 듯 구는 걸 보면 말이다. 황후도 지독한 의처증을 잘 알아서 혹시나 그런 의심이 들 만한 일은 철저하게 피했다. 타르시와의 협력이 비밀스러웠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둘의 비밀스러움을 ‘불륜’으로 포장할 생각이었다.

“그 사람이라면 황제 앞에서도 떨지 않고 잘해 주겠지.”

타르시를 감금한 흑무의 간수는 황후에게 원한이 있었다. 간수의 하나뿐인 딸이 황후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이었다. 황후는 누구든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다. 흑무의 고문관이라는 특별하고도 끔찍한 직업을 가진 간수는 혹시나 딸에게 악영향이 있을까 걱정하여 그간 귀족들에게 받은 뇌물을 사용해 갓 낳은 딸을 한미한 귀족가에 입양시켰다. 황후의 시녀였던 딸조차 간수가 친부라는 사실을 몰랐으니 간수는 황후의 처리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딸이 처리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간수는 딸의 복수를 할 날을 꿈꾸며 흑무를 지켰다. 원작에서는 황후가 흑무로 보내졌었다. 황제가 죽은 뒤의 일로 칼리탄의 짓이었는데 그때 간수가 황후를 지독히 고문하며 딸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왔다. 나는 그래서 그 간수를 먼저 포섭해 두었다.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가슴에 복수의 칼을 품고 있던 아버지는 내 제안을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그는 어떠한 대가도 받으려 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의 의지를 존중했다.

“지금쯤 타르시는 죽었을까?”

타르시는 길리안과 같은 모습으로 죽어야 했다. 그것이 황제의 의심에 힘을 실어 줄 테니까.

“주인님!”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메이아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메이아의 무례에 놀라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굉음이 지면을 강타했다.

쾅! 콰지직직!

‘뭐야? 지진인가?’

“소나!”

나는 생각과 거의 동시에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녹색 결계가 눈부시게 빛나며 내 앞에 순식간에 드리워졌다. 나타나는 정령의 모습에 무심코 안심하려던 눈길이 길을 헤매며 멈췄다.

“윽…….”

가슴이 지끈거렸다. 심리적 요인이 아니라 확실한 육체적 피해가 있었다. 왼쪽 가슴께를 파고든 날카로운 유리 조각. 고개를 들자 깨진 창문으로 넘어오는 낯선 자가 보였다.

브람. 나는 그의 이름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낯설었다. 피부 위에 용암을 들이부은 것처럼 꿀렁거리는 몸체는 인간이 아니라 차라리 괴물에 가까웠다.

“주인님!”

메이아가 비명을 지르며 브람의 앞을 막아섰지만 그녀는 몇 초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브람은 쓰러진 메이아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고 내게로 곧장 다가왔다. 살의로 범벅된 눈길에 오한을 느끼기가 무섭게 나는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손과 발이 경련을 일으키며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아파.’

종이에 손을 베여도 아픈데 피가 줄줄 흐를 정도의 상처라면 어떨까? 당연히 아팠다.

쾅! 쾅! 다가온 브람은 검을 휘둘러 결계를 부수려 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소나가 내게로 날아와 내 뺨을 어루만졌다.

창문 너머로 가이사가 달려왔다.

“니네이나!”

브람은 단단한 결계를 부수려고 노력하는 대신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가이사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붉은 폭풍이 솟구쳤다. 불길 속에 갇힌 까만 그림자가 무어라 소리치며 괴롭게 죽어 가는 게 보였다.

나는 후회했다. 브람을 그렇게 외면한 것을. 혹시 동정심이라도 들까 봐, 그래서 메이아처럼 위험을 감수하게 될까 봐, 감옥에만 가둬 두고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원작을 피하려다가 다른 화를 입은 것이다. 좀 더 냉철한 마음으로 상대를 분석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랬다면 당신이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가이사를 또 저렇게 만든 것이 후회되었다.

“안 돼…….”

그는 손을 덜덜 떨며 피가 흐르는 내 가슴 위를 지혈했다.

“아직…… 살고 싶, 흐…….”

죽고 싶지 않았다. 당신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죽지 마.”

안 죽어. 죽기 싫어.

“나를 두고 가지 마. 당신은, 당신은…… 안 돼. 제발…….”

너무 고단해서 잠시 눈을 감고 싶을 뿐. 다시 눈을 뜰 수 있게 된다면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할 텐데.

* * *

황제는 밤사이 달려 새벽녘 황궁에 도착했다. 그의 첫아들이 황제를 마중 나와 있었다.

“황후가 타르시를 죽였습니다.”

칼리탄을 보자마자 화가 난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던 황제가 일순 멈칫했다.

“……뭐?”

“직접 보시죠.”

칼리탄이 눈짓하자 두 구의 시체를 덮고 있던 천이 걷혔다. 한 구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으나 한 구는 시일이 꽤 지나 부패해 있었다. 시체에서 올라오는 지독한 썩는 냄새에 황제는 코를 막으며 물러났다.

“먼저 죽은 건 길리안입니다. 기억하십니까? 황후의 궁에 불이 났던 때를. 그때 죽었죠.”

길리안. 묘하게 익숙한 그 이름을 되뇌어 보던 황제는 곧 길리안이 누구인지를 떠올렸다. 황제의 시선이 눈이 뽑히고 혀가 잘리고 손가락 발가락이 모두 절단된 두 시체로 향했다. 혀가 잘린 길리안이 괴성을 지르며 황후에게 달려들던 것도 생각났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찰싹! 멈춰 있던 손이 매섭게 떨어져 칼리탄의 뺨을 쳤다.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타르시의 죽음에도 황제는 금방 냉혹해졌다.

“황후를 어떻게 한 것이냐?”

설령 황후의 짓이라고 해도 두 죄인을 죽인 것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반응을 익히 예상했던 칼리탄의 입가에 피맺힌 조소가 어렸다. 황후가 이들을 죽인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은지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황제는 필시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길리안과 릴리스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신경 쓸 수밖에 없겠지. 참으로 더러운 성정이었다.

“뭐? 그게 무슨 말이냐!”

황제가 길길이 날뛰며 칼리탄의 멱살을 붙잡았다. 장성한 아들은 그런 황제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웃었다.

“타르시와 릴리스도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황후와 타르시가 공모했다는 증거입니다. 둘은 아주 오래전부터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폐하의 눈을 피해 만난 것도 수십 년에 이르지요.”

실제로 황후와 타르시는 황제의 눈을 피해 자주 만났다. 그 미심쩍은 낌새를 황제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애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의처증이 어디 갈까? 칼리탄은 계속 황제를 자극했다.

“흑무의 간수를 데리고 와라.”

간수, 베하르가 황제의 앞에 납작 엎드려 고했다.

“감금되어 있던 황후께서 몰래 궁을 뛰쳐나와 타르시를 죽이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둘의 대화가 수상하여 몰래 엿들었는데 황후께서는 타르시에게 ‘잘 가, 내 사랑.’이라고 하시며 저렇게…….”

베하르의 눈짓을 따라 두 시체를 내려다보던 황제의 눈이 충격으로 굳었다.

“길리안 저놈을 저렇게 만든 것도 황후였어…….”

“폐하의 짐작이 맞습니다. 황후는 그런 식으로 폐하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얀…… 내가 지금껏…… 아니, 아니다. 황후를 만나 봐야겠다.”

“이것 먼저 보고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또 뭐냐!”

“황후의 비자금 출처입니다.”

황후는 내탕금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막대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준 것도 물론 있었지만 그녀가 가진 재산의 상당 부분은 타르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게 연인 릴리스를 위한 타르시의 선물이었을 겁니다.”

“고작 이 따위 돈 때문에 황후가 나를 배신했단 말이냐!”

“사랑 때문이었겠지요. 그녀는 본래 사랑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칼리탄은 우매한 아버지를 속으로 비웃으며 그들이 실컷 떠들던 말을 그대로 해 주었다. 릴리스는 평소에도 황후가 된 이유를 오로지 황제를 향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해 왔다. 돈도 지위도 권력도 중요하지 않았다고. 황제가 평범한 거리의 백성이었다고 해도 그를 사랑했을 것이라며. 절절하고 애처롭게 매 순간 진실한 사랑을 속삭였다.

“황후께서는 다른 남자도 사랑하셨나 봅니다. 주로 밤에 만나셨더군요.”

“밤?”

“증거가 있는데 언제까지 황후의 거짓말에 놀아나실 생각입니까? 길리안을 죽인 것도 타르시를 죽인 것도 다 폐하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입막음이었습니다.”

“황후가 밤에 타르시를…….”

올해 들어 황제는 쇠약해지는 몸에 신경을 쓰느라 황후와 밤을 보내지 못했다. 혹시 그럴 때마다 타르시를 찾아간 걸까? 작은 의심이 피어오르자 걷잡을 수 없어졌다. 황제는 최근 들어 의심스럽던 황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황후는 타르시를 죽이라고 계속 주청을 올렸다. 타르시가 광증을 일으켰을 무렵이었다. 미친 타르시가 살기 위해 황후와의 내연 관계를 말할까 봐 겁이 나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의처증 환자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감히!”

황제는 크게 분노하며 황후의 궁으로 달려갔다.

“으아아아악! 네가 감히 나를 배신해!”

피로 흠뻑 젖은 옷을 입고 잠들어 있던 황후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황제를 맞아야 했다. 황후의 방에서 은은히 흐르던 수면 향은 열린 창문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 * *

타르시의 죄는 곧 황후의 죄이기도 했다. 황제는 대역 죄인과 협력한 황후를 폐위하고 흑무로 보냈다. 고문을 받다가 죽은 황후의 시신은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적어도 황제는 그렇게 알았다. 그날, 아실로가 옆 나라 루스히로 유학을 떠나며 황후를 몰래 빼돌렸지만 말이다. 그 후, 황제는 점점 더 쇠약해졌다.

황후에게 배신당한 충격과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고문해 죽였다는 충격으로 매일 밤 악몽을 꿨다. 고문당한 황후가 나오는 꿈인지 다 네 잘못이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곤 하였다. 황태자 칼리탄은 그런 모습을 빌미로 황제가 실성하였다고 주장했다. 장성한 아들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요양을 핑계 삼아 멀리 보내 버리고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의 즉위식에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은 참석하지 못했다. 공작의 외동딸이 깊이 앓고 있는 탓이었다. 황제는 지독한 슬픔에 휩싸인 마음으로는 기쁜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공작의 의지를 존중했다. 가을이 다 지나고 겨울이 찾아왔을 무렵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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