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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되찾아야 할 때 (2)(5권) (10/13)

건강이 없습니다

5권

8. 되찾아야 할 때 (2)

내가 생각한 흐름은 이게 아니었다. 나는 카사비올라의 증언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일을 타르시의 자작극으로 몰아갈 증거를 꾸몄다. 그런데 갑자기 말을 바꾸다니? 이건 나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카사비올라 대신관! 감히 주신의 이름을 팔아 추악한 거짓을 고하는가!”

“나는 내 신께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사실만 고했습니다.”

분노한 타르시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지만 소녀는 달콤한 음색으로 속삭이며 고개를 저었다. 타르시에게 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재판을 열었을 황제의 얼굴도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당황과 의심으로 흔들리던 황제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은 자답게 금세 태세를 전환했다. 본인에게 이로운 쪽으로.

“타르시 세이아! 감히 짐에게 거짓을 고하였는가!”

황제의 벽력같은 노성에 백발노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모함입니다! 폐하께서 어찌 저를 버리려 하십니까!”

노인의 외침에 노인을 스승으로 둔 황제가 일순 멈칫했다. 멈칫하긴 뭘 멈칫하는 거야! 황제는 제 이익에만 눈먼 황제답게 굴어야 했다. 어린 딸의 안전을 간절히 부탁하던 열여덟 살의 루베니오는 그토록 야멸치게 외면하지 않았던가!

황제가 도와줬다면 니네이나와 루베니오는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황제에게는 타르시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루베니오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고 루베니오는 그런 황제를 원망하면서도 그 사실을 직시했다. 그런데 여기서 감히 동정심이라니! 그런 건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폐하, 이 자리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건 세이아의 싸움이었다. 희생을 감수하고 타르시를 구할 생각이 아니라면 황제는 내게 발언권을 허락해야 했다. 황제는 지금 이어질 내 발언이 타르시에게 나쁜 쪽으로 작용할 것을 알았다. 그는 망설였고 나는 버티고 섰다.

“……허락한다.”

결국 황제는 결국 이런 사람이었다. 그 지독한 이기심에 비소가 흘렀다.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타르시를 향해 돌아섰다.

“할아버지께서는 대신관 세 분의 증언을 모욕하고 계세요.”

이건 기회였다. 타르시를 재기 불능으로 만들 기회.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

“저는 이 자리에서 제 할아버지인 타르시 세이아 전대 공작의 작위 계승권 영구 박탈을 청합니다.”

“작위 계승권 영구 박탈이라니……!”

당연히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루베니오 또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몸과 마음에 병이 있으십니다. 이미 사라진 고대 유물 중 하나인 흑마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이 자리를 벌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딴 말에 넘어가 이 자리를 만들어 준 황제를 함께 질타하는 말이었다. 민망한 변명이라는 건 아는지 황제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신을 모시는 대신관들의 증언마저 모욕하며 어떻게든 다시 공작이 되려는 할아버지를 저는 말리고 싶어요. 그릇된 욕심이 할아버지를 저렇게 변하게 만든 것 같아…… 더는 보고 있기 무섭습니다.”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콕콕 찍으며 할 수 있는 한 서럽게 속삭였다. 루베니오 앞에서는 한 번 실패한 전술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잘만 통했다.

“할아버지께는 광증이 있으세요.”

광증은 무슨 광증이냐는 듯 타르시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딱 내가 원하던 얼굴이었다.

“보세요!”

내 비통한 외침에 사람들의 눈길이 타르시에게로 향했다. 깜짝 놀란 타르시가 표정을 수습하려 했으나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후였다. 그리고 그 얼굴은 내게 충분한 도움을 주어 내 말의 설득력을 높여 주었다.

“할아버지는 공작위에 집착하고 계세요.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셨는지 다 죽여 버리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으셨어요. 실제로 저를 향해 달려든 적도 있으시죠. 그날 할아버지의 광증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여럿 있으니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시종을 보내 지금 당장 확인해 보시면 될 거예요.”

굳이 따로 확인해 보지 않아도 황제라면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진짜 광증인가 하며 타르시를 의심하는 게 보였다. 저들도 참 얄팍한 사이였다.

“작위에 대한 열망이 할아버지를 미치게 만들었어요.”

나는 앞으로 한 발 나서며 가슴 위를 짚었다. 애처롭게 떨리는 내 눈길이 타르시에게 향하자 그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얼굴을 했다. 나를 도와주는 꼴이라는 걸 알았는지 부들부들 떨며 참고 있지만 뻗치는 분노를 다 감추지는 못했다. 저 성격을 생각하면 지금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깊이 감추고 서글픈 얼굴을 꾸며 냈다.

“더는 이런 비극이 없기를 바라며, 저는 이 자리에서 간절히 청원합니다.”

타르시가 했던 짓은 이미 소문이 다 나 있었다. 루베니오가 그 소문을 흘러가는 대로 둔 탓이었다. 여러 입을 거치며 타르시는 쌍둥이 형을 시기해 형을 죽이고 조카를 빼앗은 악당이 되어 있었다. 실제로도 크게 틀린 말 같지는 않지만 사실이 어떻든 사람들이 인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할아버지를 막아 주실 분은 폐하뿐이세요.”

나는 또 한 번 읍소했다. 타르시를 버려라. 그는 더 이상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말했다. 이 일로 황제도 타르시의 판단력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미 광증이란 소문이 은연중에 돌고 있으니 혹하는 마음도 들겠지. 루베니오를 견제할 패로 타르시만큼 적당한 인물은 찾기 어려울 것이나 그렇다고 미쳐 버린 망종을 쓸 수는 없었다. 그것은 더 이상 패가 아니었으니까.

“……그릇된 선례는 남기지 말아야지.”

고심하는 척해 봤자 황제의 결정은 언제나 본인 위주였다.

“거짓으로 짐의 눈을 가린 타르시에게 죄를 묻겠다.”

“폐하! 그런 말도 안 되는…….”

“태의는 일주일간 타르시를 관찰하여 그의 광증이 사실인지 판단하라. 그의 병이 사실일 시에는 그를 요르리나 지방에서 요양하게 하고 사실이 아닐 시에는 죄의 엄중함을 따져 벌하겠다.”

이렇든 저렇든 결론은 타르시를 버리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주목이 쏠려 다행이었다.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내 몸은 아무도 보지 못했을 테니까.

* * *

타르시가 반쯤 끌려가다시피 퇴장하고 루베니오는 황제에게 불려 갔다. 나는 가이사와 함께 이만 집으로 돌아가 쉴 생각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의 눈치를 보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내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미리 기다린 손님이 있었다.

대신관 카사비올라. 언젠가는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먼저 찾아와 줄 줄은 몰랐다.

“카사비올라 대신관…….”

“영애께 라가니우스 신의 눈길이 머무시기를.”

가이사의 시선이 어린 대신관의 얼굴에 잠시 머물다가 떨어졌다. 신전과 신관을 좋아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진 가이사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서늘한 냉기를 분명 느꼈을 테지만 카사비올라는 맑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저에게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에요.”

나긋나긋한 음성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경계와 의심을 허물기 딱 좋아서 나는 이 어린 대신관이 살짝 부담스러웠다.

“가타부타 길게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제 거래는 거절하셨으면서 증언을 그렇게 한 이유가 뭐죠?”

“저는 그저 증언했을 뿐입니다. 제가 느낀 그대로를.”

말간 얼굴이 순진하게 갸웃거렸다.

─금지된 마법 같은 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녀의 증언은 그랬다. 거짓은 없었다. 단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는 사실의 일부를 감추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한 것이었고 나를 위한 증언이었다. 중립의 증언을 할 것이었다면 그녀는 타르시에게 말해 준 그대로 증언했을 것이다.

“개인적인 판단을 담은 건 사실일 텐데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아무 대가도 없이 그런 증언을 받은 게 꺼림칙했다. 나는 떨떠름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걱정을 받은 사람처럼 포근하게 웃었다.

“나의 신께서 당신의 안녕을 원하셨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잠시 손을.”

손? 손을 주면 알려 주겠다는 건가 싶어 그녀가 내미는 손을 붙잡았다. 내 손보다 조금 작고 나만큼이나 마른 손목이었다. 그러나 따뜻했다. 그녀의 청명한 기운이 내 몸을 깊게 파고들자 가이사가 움찔하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대신관의 기운은 몸을 성결하게 씻어 낼 뿐 해악을 담지는 않았다. 가이사의 어깨는 긴장으로 굳어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붙잡아 떼어 내지는 않았다. 대신관의 성력은 그 자체로 명약이었다. 그런데 이거 사사롭게 쓰면 안 될 텐데? 신의 허락이 없다면 황제의 죽음 앞에서도 쓸 수 없는 힘이었다.

“이걸 왜 저한테 해 주는 거죠?”

“나의 신께서 그것을 바라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신성 모독이 될 테지만 굉장히 광신도 같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카사비올라 대신관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성녀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건 자신을 구해 준 신이었다. 라가니우스 신의 계시로 지옥을 탈출한 어린 소녀는 신을 구원자로 여기며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의 사명 또한 인간을 위한 게 아니라 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신의 뜻이라는 거였다.

“신께서 저에게 왜……?”

한낱 인간에게 무엇을 바라서? 라가니우스의 눈물로 만들어졌다는 성물이 내 몸에 녹아들어 사라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마셔도 된다. 이 힘을 써도 된다. 그렇게 다정히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에요.”

무구한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그녀는 내 의문점은 하나도 풀어 주지 않고 홀랑 돌아서 나풀나풀 걸어갔다.

“자, 잠깐! 이렇게 가는 거예요?”

황당해서 소리쳐 불러 봤지만 그녀에게서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나는 길게 끌리는 하얀 성복 자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가이사를 바라봤다.

“카사비올라 대신관은 성물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녀가 채워 준 기운은 성물을 처음 마셨을 때와 비슷했다. 성물만큼 넘쳐흐르지는 않아도 위태롭던 몸이 한순간 청명해졌다. 나는 좀 더 또렷해진 시야를 확인하다가 조금 늦게 가이사의 살기에 반응했다.

“저를 직접 보지는 못했겠지만 지금의 접촉으로 당신 몸에 있는 성물의 기운은 느꼈을 겁니다.”

“헉! 어쩌죠?”

가이사는 섬뜩한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사비올라 대신관을 죽이면 이번에야말로 신벌 받아요, 가이사.”

그녀가 성물의 행방을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을 테니까. 말한다고 해도 증명할 방법은 없을 테고.

“이번에도 들키지 않을 겁니다.”

“신에게 어떻게 안 들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요.”

우리 집 가이사가 사고를 치기 전에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 * *

“니네이나.”

내 방에 도착하자마자 가이사가 나를 불러 멈춰 세웠다.

“왜 그래요?”

그러고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살펴봐야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살펴보고 있는데 뭐를 더……?”

웃으며 농담처럼 피식 내뱉은 말이 그의 뺨 위에서 살포시 흩어졌다. 아. 왜 이렇게 가까워졌지? 당황하여 갈피를 못 잡는 사이 서늘한 이마가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 내 이마에 닿았다. 염열의 선홍빛 눈동자가 바로 앞에 보였다. 까딱하다가는 눈끼리 부딪칠까 봐 무서울 정도였다. 그가 눈을 내리감자 햇살을 흡수한 속눈썹이 가지런하게 반들거렸다.

“…….”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을 열고 가슴을 부풀리고 공기를 삼키면 된다는 본능을 희게 변한 뇌는 떠올리지 못했다. 투명한 물거품에 입과 코는 물론 귀까지 뽀르르 잠겨 버렸다. 미칠 듯 간지럽고 초조해서 차라리 얼른 피해 버리고 싶은데 단정하게 눈을 감은 얼굴이 아름다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역시 그때 버섯을 먹고 쓰러진 게 몸에 무리가 갔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물의 힘이 고작 이것밖에 안 남았을 리가.”

건조한 입술에서는 차가운 숨결이 흘렀다. 겨울바람처럼 서늘한 냉기에 입술이 잠깐 시렸다. 내가 하릴없이 입술을 움츠리는 순간이었다.

“사실 알고 있었는데…….”

그가 쓸쓸하게 속삭이며 얼어붙은 내 입술 위에 입을 살짝 맞추었다. 고의인지 우연인지 구분도 안 가는 연약한 입맞춤은 젖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떨어졌다. 그 잠깐의 접촉이 불꽃같은 열기로 변해 서늘하던 표피를 포근하게 만들었다.

“믿고 싶어서 멍청한 짓을 할 뻔했습니다.”

가이사는 흐트러진 내 앞머리를 정리하며 얼굴을 살짝 구겼다.

“왜 말하지 않은 겁니까?”

“뭘요?”

내 얼굴이야말로 멍청해 보였을 것이다. 사고 회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나는 그의 말을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그의 젖은 입술을 바라봤다. 짜증이 났는지 살짝 구겨져 있는 미간이 섹시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내 마음은 이미 중증이었다.

“성물 말입니다. 몸으로 직접 느꼈을 당신은 알고 있었을 텐데요. 그 힘의 효력이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

24시간 중 23시간 30분은 저런 무표정일 남자였지만 다른 때보다 사나움의 강도가 높았다. 으르렁거리는 말투도 그렇고 번들거리는 눈빛도 그랬다.

‘헉! 들켰다!’

나는 차츰 이 일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모, 몰랐는데요?”

나는 일단 시치미를 뗐다. 그의 눈동자가 의심으로 즉각 변했지만 모른다는 사람에게 자기가 어쩔 것인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왜 그래요?”

‘어휴, 저 뻔뻔한 사람.’이라고 말하듯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으음. 나는 몰라. 모른다고! 스스로 세뇌하자 정말 그런 것 같은 억울함이 몰려왔다.

“저는 좀 둔한 편이잖아요. 지금도 이렇게 멀쩡한데 달라진 걸 어떻게 알겠어요?”

불쌍한 척 눈가를 일그러트리고 한껏 억울하다는 몸짓을 해 보이자 그의 얼굴이 조금 풀어지는 게 보였다. 나를 믿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이제 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발뺌을 무시하고 나를 닦달하는 것 외에 그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좋게 넘어가는 게 더 나은 방법이었다. 라는 게 내 계산인데 뭔가 착오가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시겠다니 어쩔 수 없겠군요. 당신 몸에 직접 묻겠습니다.”

상식에 어긋난 먼치킨을 상식선에서 생각하다니! 전에 없던 위기다! 가이사의 손이 내 턱을 붙잡는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모, 몸으로 묻는다는 게 뭔데요?”

키스를 할 것처럼 몸을 숙이던 가이사의 눈썹이 으쓱 올라갔다.

“지금부터 알려 드리겠습니다.”

붉은 입술이 아찔하게 다가와 내 아랫입술을 빨았다. 그리고 아주 살짝 깨물어 당겼다. 아픔인지 쾌감인지 모를 찌릿한 자극에 나는 펄쩍 뛰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자, 잠깐! 말로 해요! 말로!”

“물론 인간의 언어로 들을 겁니다.”

그는 어떤 위협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데 나는 몰이를 당하는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침착해요, 가이사.”

나는 거칠게 호흡하며 양 손바닥을 보여 줬다.

“저는 침착합니다.”

그는 콧방귀도 뀌지 않은 채 특유의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런데 눈동자가 붉게 날 서 있었다. 무언의 직감이 이건 아니라는 신호를 보냈다.

“제가 다 얘기해 줄게요!”

“지금 당장?”

내가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흥정했다.

“다, 당장…….”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해 보세요.”

잔인한 사람. 그는 호흡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계속 은근하게 나를 압박했다. 나 같은 개복치는 스트레스를 조금만 받아도 죽는단 말이야! 나는 꼬리를 사냥꾼의 먹이로 희생해 도망가는 도롱뇽처럼 그와 멀찍이 떨어져 한마디 툭 내뱉었다.

“좋아했잖아요, 내가 건강해진 걸.”

이상을 감지했을 텐데도 내가 씩씩하게 웃어 보이면 안도하고 기뻐하던 가이사. 고작 운동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속아 넘어가려던 루베니오. 내가 건강해졌다고 재잘거리며 같이 즐거워하던 메이아, 사라, 린지, 리아, 라일……. 내 일상이 된 존재 모두가 내 건강을 기뻐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그들은 좋아졌다는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믿고 싶어 했다. 누구보다 좋은 머리를 아둔하게 굴려고 했고, 누구보다 뛰어난 감각으로도 그럴 리 없다며 고개 저었다. 나는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하지 않았다. 착각이라도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기뻐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당신이 건강해졌다고, 그렇게 믿고 싶어서…….”

신의 앞에서 타락을 고해하는 성인처럼 괴로워 사무치는 그의 목소리에 쓴물이 차올랐다. 그랬다. 나는 저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서 숨기려고 했다. 그게 악수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미뤄 두고 싶었다.

“…….”

어느새 바싹 마른 그의 입술은 거칠고 메말라 보였다. 열기가 붉게 모인 눈가를 꾹 내리감은 그가 숨을 나지막하게 내쉬며 감았던 눈을 떴다.

“미안합니다.”

진정이 됐는지 평소처럼 돌아온 가이사가 천천히 걸어왔다.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 해서. 당신께 부담을 줘서.”

“뭐, 그렇게까지…… 나도 잘한 건 없는데요…….”

병세를 제대로 알리지 않은 환자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내 주치의가 아니기도 했고.

“충전이 된다는 걸 알아서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가이사의 얼굴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해결책이 있으니 다 괜찮다는 듯 넉넉한 눈동자는 성자처럼 포근하기까지 했다.

“충전이라니요?”

“대신관 카사비올라가 유의미한 성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으니 다행입니다. 당신의 몸에서 그녀의 성력이 느껴집니다. 음침하긴 해도 꽤나 맑고 강대한 힘이라 당신을 충분히 지탱할 수 있어요.”

음침? 성녀라는 카사비올라 대신관의 성력이? 아니. 그런 것보다는 뉘앙스가 더 문제였다.

“가이사, 황제도 카사비올라 대신관의 성력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알죠?”

“압니다.”

그래. 안다니 다행이었다. 설마 성녀라고 불리는 여자를 납치해 성력을 쪽쪽 뽑아낼 생각을 우리 집 가이사가 했을 리 없다. 그녀는 주신 라가니우스의 첫 번째 종이었다. 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이곳의 신은 실재하나 인계에 유의미한 개입은 잘 하지 않았다. 신관들이 마음껏 타락할 수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인간계의 일은 인간이 만드는 역사였고 신은 개입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으니까. 그런데 카사비올라쯤 되면 달랐다. 주신에게 그녀는 딸과 마찬가지였다. 신은 사랑하는 첫 번째 종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카사비올라는 일찍이 그런 이유로 지옥에서 구해져 대신관이 된 소녀였다.

“그래요. 그녀를 건드리면 진짜 신벌이……”

“신의 눈을 가리면 됩니다.”

네?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눈이 반쯤 회까닥 돌아 있는 걸 보아서는 이미 그럴 마음이 만만이었다. 내가 간신히 붙들어 놓은 목줄을 풀어 주면 당장 달려가 성녀의 목을 개처럼 물어뜯을지도 몰랐다.

“후, 좋아요. 당신이야 어떻게 피한다고 쳐요. 나는요?”

한낱 인간이 어떻게 신을 피하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그는 인외의 먼치킨이니까 그렇다고 쳐 보자. 그런데 나는? 나는 유리 몸에 개복치인데 그 뒤탈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억지로 빼앗은 성력이 내 몸에서 힘을 발휘하겠어요? 신의 힘이란 결국 신의 것인데?”

내 말에 설득이 됐는지 주저하는 낌새가 보였다. 지금이 기회였다.

“들어 봐요. 카사비올라 대신관의 말에 따르면 주신은 나를 도와주려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굳이 척을 질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가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로 설득해 보겠습니다.”

어째 설득이 안 되면 다시 협박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설득이 아니라 부탁을 해야죠.”

“……부탁해 보겠습니다.”

그 떨떠름한 얼굴에 나는 방긋 웃고 말았다.

“착하네요, 가이사.”

“…….”

손을 붙잡고 손등을 톡톡 도닥이자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기뻐해야 하는지 불쾌해해야 하는지 헷갈린다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신이 이런 식으로 인간을 돕기도 하나요? 카사비올라 대신관 같은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특별한 경우잖아요.”

내가 신이 사랑하는 인간이었다면 자연스레 성력이 내려왔을 것이다. 그 대가로 신의 사명 또한 주어졌을 것이고.

“나한테 내가 모르는 성력이라도 있나?”

내 몸을 내려다봤지만 새삼 달라진 건 없었다.

“조금도 없습니다.”

불필요한 행동 대신 그가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대신관의 성력을 느꼈던 걸 생각해 보면 그는 성력도 감지하는 모양이었다.

“가이사는 성력도 감지해요?”

“전에 제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렸을 겁니다. 콜로세움이 불에 타 도망쳤던 날 당시 저를 붙잡은 성기사가 라가 신전 소속이었습니다.”

신전 지하에서 눈을 떴고 그 신전에서 생체 실험을 받았다는 게 가이사의 설명이었다.

“성녀가 지내는 주신의 신전 아래에서…… 그런 참혹한 일이 일어났다는 건가요?”

“수도의 라가 신전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은 사라져 터도 남지 않은 옛 신전이 되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그 신전을 직접 파괴했기 때문이죠.”

신전을 파괴해? 듣도 보도 못한 사건이었다. 최근에 그런 사건이 있었던가? 이 몸에서 눈뜨고 나서 나름 책도 많이 읽고 주요 사건 같은 건 틈틈이 정리해 두었다. 그런데 신전 파괴 같은 대사건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내가 다 아는 건 아니니까. 가이사는 엘리니움 제국에서 태어난 게 아닐지도 모르고.’

시간대가 어긋난 것 같은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지만 착각일 것이다. 가이사는 분명 스물네 살이라고 했으니까.

‘잠깐. 그럼 가이사의 아버지는 가이사를 구하기 위해 신전을 파괴한 벌로 신에게 죽은 걸까?’

인간도 아니고 내게 한 짓과 지금의 가이사를 키워 낸 걸 보면 여간 범상치 않은 존재가 아니었다. 신이라도 개입해야 수긍이 갈 죽음이었다.

“신벌이 내릴 거라고 해서 미안해요. 안 좋은 기억이었을 텐데.”

“신전과 신관은 싫지만 신벌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은 없습니다.”

응? 아버지가 신벌로 죽은 게 아니었어?

“왜 그런 얼굴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제 아버지가 신벌로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헉! 어떻게 알았지? 내 마음이라도 읽었나?

“마음을 읽은 게 아니라 표정을 읽었습니다. 눈에 다 보이니까.”

내가 그렇게 읽기 쉬운 사람이란 말이야? 당황스러워서 어떤 얼굴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굳어 있자 그가 내 뺨을 간지럽게 매만지며 씁쓸하게 웃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죽였습니다. 그뿐입니다.”

서글픈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화가 났다. 교양 과목으로 들은 범죄 심리학 교수님이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피해자 중에는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족들이 힘든 건 다 자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가이사가 딱 그랬다. 가이사는 어떤 나쁜 사람들에게 붙잡혀 가 고문과도 같은 인체 실험을 당한 피해자였다. 그리고 그 레어노스라는 분은 그런 가이사를 구출하려다가 죽은 사람이었다. 그게 어떻게 그 사람을 가이사가 죽인 게 된단 말일까?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몇몇 피해자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가이사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뜨거워서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버지께서 가이사를 살리신 건 아니고요?”

내 말에 평온하게 돌아가던 가이사의 얼굴이 금이 간 유리 조각처럼 깨졌다. 그는 외면하려던 진실을 지적당한 사람 같았다. 분노했고 동시에 슬퍼했다.

“저는……. 아닙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는…….”

그는 고장 난 기계처럼 부정어를 반복적으로 말했다. 툭 끊어진 실에 걸린 인형처럼 위태로운 몸짓이 가여워서 마음이 찢어졌다.

“그 감사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슬퍼 울지도 못하는 건조한 눈동자가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슬퍼할 거예요.”

그는 흐느껴 울 줄을 몰랐다. 바윗덩이처럼 딱딱해져 무생물처럼 움직일 뿐이었다. 나는 좀처럼 곱아들지 않는 그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잠시 뒤, 그가 내 어깨에 기대 오는 게 느껴졌다.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술렁거리던 숨결이 조금씩 말랑해졌다. 점점 더 이 사람을 혼자 놔두고 싶지 않아졌다. 살고 싶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 또한 간절하게.

* * *

잠시 뒤 눈가가 완전히 짓무른 건 나였다. 가이사는 말없이 손수건으로 내 눈가를 톡톡 닦았다.

“눈물이 많으십니다.”

“아닌데. 나 잘 안 울어요.”

진짜였다. 아프고 괴로워 생리적으로 흘린 눈물은 많았지만 감정적인 동요로 흘린 눈물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가이사가 그럴 리 없다는 듯 피식 웃는 게 아닌가.

“당신, 방금 나 비웃었죠?”

“아닙니다. 왜 비웃겠습니까? 솜털도 다 안 난 참새가 날 수 있다고 삐약거리는 것 같아서 신기하기만 합니다.”

“…….”

그게 무슨 비유지요? 놀리는 건가? 그나저나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게 남아 있었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라가니우스 신은 당신에게 미안해서 저를 도와준 게 아닐까요?”

“신이 한낱 인간에게 미안해할 것 같습니까?”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는 말투라 그런가 설득력이 높았다.

“신은…… 자비로운 존재가 아닌가요? 신전을 파괴해도 신벌을 안 내렸다면서요……?”

그의 눈치가 보여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무조건 선한 존재라는 건 아니에요.”

나는 신 편이 아니다. 당신 편이다. 이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가정이다. 그런 의미를 담아 필사적으로 눈빛을 보냈다.

“그런 말을 조심스럽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와 신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신이라고 해도 무수한 인간의 역사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전지전능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능력이 없어서 나를 못 구해 준 신을 쓸데없이 뭐 하러 원망하겠어? 시간만 아깝지. 그런 말투였다. 그런 것치고는 신에게 불손하고 신관도 싫어하고 언행도 불민했으나 그의 입가는 냉소적이었다.

“인간은 신을 본떠 만든 존재라는 걸 아십니까?”

“그런 설이 있다는 건 알죠.”

“인간에게 기호가 있고 성격이 있는 것처럼 신도 그렇습니다. 당신을 도와준 게 변덕일지 호의일지 아니면 다른 무엇일지는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알 수 없습니다.”

“으음…… 신전에 가서 물어보기라도 해야 할까요?”

말을 해 놓고도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웃었다. 신은 간절한 음성에 응답한다지만 그건 정말 몇 없는 경우였다. 그리고 그런 드문 경우마저 성력이 없으면 들을 수 없었다.

“고민해 봤자 알 수 없겠네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여차하면 그 대신관을……”

“우나는 어떻게 되었죠?”

우리 집 가이사가 험상궂은 생각을 하기 전에 서둘러 말을 끊어 냈다.

“……타르시 옆에 아직 있습니다.”

가이사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대답을 착실히 해 줬다. 내가 흐뭇하게 웃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알겠습니다.”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응? 뭘 알아요?”

“당신이 내게 바라는 것. 그 대신관을 건드릴 때는 미리 물어볼 테니 그만 걱정하셔도 됩니다.”

오. 내가 그랬나? 그냥 가이사가 착해진 것 같아서 흐뭇해한 것 같은데? 멋대로 오해해 주고 알아서 척척 그래 주겠다니 나는 그냥 주는 대로 받아먹고 고개만 끄덕이면 되었다.

“그래요.”

흐뭇함이 넘쳐 나는 또 방긋 웃었다. 가이사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선물을 잔뜩 받아 놓고 또 선물을 바라는 욕심쟁이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원하시는 게 뭡니까?”

아무래도 가이사에게는 잘못된 공식이 입력된 것 같았다.

내가 웃는다 = 가이사에게 바라는 게 있다

이런 공식 말이다. 미안하지만 잠시 착각하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타르시가 지금쯤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나와라 가이사 방망이! 뚝딱! 딱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반쯤 즐기며 한숨과 함께 흐르는 가이사의 말을 들었다.

“우나.”

가이사가 정령을 불렀는데 우나라는 정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환한 거 아니에요?”

“우나가 곧바로 떠나면 타르시가 이상함을 느낄 겁니다. 우나에게는 타르시가 잠들었을 때에만 소환에 응하라고 미리 명령해 두었습니다.”

예약 서비스 같은 기능이었다.

“그럼 차 한잔 하고 있을까요?”

“아니요. 그 전에 해 둬야 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가이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옆으로 바람이 이지러졌다. 익숙한 초록빛이 범람하여 만든 꽃봉오리 속에서 한 쌍의 날개가 활짝 피어올랐다. 가이사가 다루는 정령 중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알려진 바람의 정령, 소나였다.

“당신의 몸에 소나의 영구 소환진을 새길 겁니다.”

표식을 영구히 새기려면 점막 접촉을 위한 체액 전달이 필수다. 내 머리는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아가며 그 사실을 상기해 냈다. 그런데 그거 꼭 각인 같지 않나? 가이사 눈에만 보이는 각인.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부끄러웠다.

“어디에 새길까요?”

어버버 입술이 떨렸다. 그가 못할 질문을 한 것도 아닌데 내 머리는 일순 가동을 멈췄다.

“아, 아무 곳이나. 어차피 당신 눈에만 보이는 거잖아요.”

“제가 좋은 곳에 하라는 말씀이군요. 볼 때마다 떠올리기 좋게.”

난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는데 제멋대로 받아들인 남자는 신중한 얼굴로 고민했다.

“지금처럼 이마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나쁘지 않을 것 같다면서 그의 시선은 점점 더 아래쪽으로 향했다. 어디를 보는 거지? 발목? 질척하거나 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건조하지도 않았다. 시커먼 우주에 홀로 불타는 태양처럼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사납게 활활 타올랐다. 살갗을 델 것만 같아서 나는 손으로 그의 시선을 가렸다.

“그런데 그거 꼭 해야 돼요?”

서늘한 손이 그의 눈가를 가린 내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이끌며 옆으로 치우자 간신히 가려 놓은 눈동자가 다시 보였다.

“만약을 위해서입니다. 불필요한 일이 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겠지만 대비하여 나쁠 것도 없습니다.”

“아깝지 않나……?”

“전에 말했다시피 새긴 표식은 제 의지로 무효화할 수 있습니다.”

“으음…… 그러세요, 그럼.”

“아직 어느 위치에 새길지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시 신중한 눈길로 내 몸을 쓸었다. 그 눈길이 야릇하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문제일까? 나는 얼른 다시 그의 눈가를 손으로 가렸다. 왜 자꾸 가리는지 모르겠다는 듯 좁힌 눈썹이 보였다.

“내가 골라 줄게요. 후보지가 어디어디인데요?”

“심장…….”

그는 말끝을 흐리며 내 가슴께를 응시했다. 욕정을 담은 축축한 눈길은 아니었다. 수술 부위를 확인하는 의사의 시선과 비슷했다.

“심장?”

그걸 장기에도 새길 수 있는 건가? 엄연히 말하면 내 신체 부위 중 하나니 안 될 건 없었다. 나도 안 보이고 그도 안 보이고 공평할 것 같았다.

“심장으로 정한 거예요?”

“발목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발목?”

특이한 취향이네. 심장은 그럴듯한 의미라도 있지, 발목은 왜?

“아프거나 해가 되는 건 아니죠?”

“고통 없는 문신을 새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볼 수 있는 것도 저와 소나 정도고.”

가이사의 어깨 부근을 팔랑팔랑 날아다니던 소나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우리를 관찰했다.

“소나 표정이 왜 저러죠?”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니 신기한 것 같습니다.”

그런 표정이 아닌데? 설명하기 어렵지만 부끄러움과 기대가 반반 섞인 느낌이었다. 순진무구할 정령의 눈동자에서 이유 모를 야릇함을 느끼고 말았다.

‘내가 글러 먹어서인가……?’

뭐 눈에 뭐만 보인다더니 내가 딱 그랬다. 후. 진정해야 했다. 이건 일종의 보호 조치지 그, 그런 종류가 아니다!

“겉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나도 심장은 느낌이 좀…….”

“느낌?”

“아니. 이상한 생각을 했다는 게 아니라…… 심장이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모습에 나는 굉장히 억울해졌다.

‘정말 나만 이상해? 나만?’

뭐라고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답답했다.

“자, 어서 해 줘요.”

이렇게 된 거 얼른 해치우고 끝낼 생각으로 두 팔을 벌렸다.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자신감의 표식이었는데 그게 우스웠는지 가이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얼른…….”

“원하시는 대로.”

성큼. 단 한 발짝으로 거리를 좁힌 그가 내 턱을 붙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 입을 맞춰야 하는구나.’

나는 미끄러지며 흘러가는 검은 머리칼을 마지막으로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런데, 소나는?’

눈을 뜨자 손으로 양 뺨을 감싼 채 우리를 지켜보는 소나가 보였다. 기대와 설렘으로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정령의 빛에 당황한 나는 그대로 그의 가슴을 밀쳤다.

퍽! 둔탁한 소리 다음으로 신음한 건 나였다.

“윽!”

그는 멀쩡한데 내 손목이 잘못 꺾였는지 찌르르 통증이 올라왔다.

“저를 치시면 어쩝니까!”

그가 답지 않게 큰소리를 내며 내 손목을 붙잡아 살폈다. 그래. 사람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그 뉘앙스가 아닌 것도 같고……?

“때려서 미안해요……?”

이게 맞나 의심하며 사과하자 그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것 같았다.

“당신이 아까 당신을 때리면 어쩌냐고…….”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니, 같은 사람인데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때린 사람이 아프다니.”

“이 와중에 그게 억울하십니까?”

철없는 아이를 혼내는 듯한 얼굴에 나는 살짝 찔끔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당신이 아팠으면 한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갑자기 왜 그러신 겁니까?”

약간 얼얼할 뿐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그는 금방 내 손을 놓아줬다.

“소나가 보고 있어서 놀랐어요.”

“그게 왜 놀랄 일입니까?”

“다, 다른 사람이 보잖아요!”

“소나는 정령입니다.”

“그래도 생물……도 아니지만 지성체잖아요. 부끄럽지 않아요?”

“…….”

가이사는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린 꽃을 줍듯 나를 살랑 안아 올려 침대로 걸어갔다.

‘이 자세에 새삼 부끄러워하기에는 너무 많이 경험해 버렸다…….’

침대로 들어온 그가 나를 눕히고 휘장을 쳐 가렸다. 침대를 허락받지 못한 소나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를 원망스레 바라봤지만 가이사는 야멸치게 휘장을 쳐 버렸다.

“돌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건 임시로 새길 때와는 다르게 소나가 필요합니다.”

이걸로 괜찮겠냐는 얼굴이었다. 어두운 밤 홀로 잠들기 무서워하는 어린 동생에게 향초를 켜 주는 손위 형제 같기도 했다.

그의 그런 행동이나 말투가 부끄럽고 민망하면서도 묘하게 설렜다. 휘장을 내려서 주위는 어두웠고 나를 곧장 직시하는 눈은 선명했다. 그는 정말 밤의 매혹적인 악마 같았다. 달콤한 말은 사용할 줄 모르고 그저 존재하는 것뿐인데도 그랬다. 몸 속 깊이 흐르는 체향이 알싸하게 코끝을 적셨다.

“의식이 이렇게 야해도 돼요?”

“야합니까?”

딱히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는 듯한 얼굴로 그는 천천히 내 발목을 쥐었다. 뱀의 비늘처럼 서늘한 손이 스르르 움직여 발목을 움켜쥐었다. 먹잇감의 숨통을 조이는 뱀처럼 강인한 손아귀는 내가 아픔을 느끼기 직전에 멈췄다.

“발목도 정말 가늡니다.”

“부러트리지 마세요.”

“안 그럽니다.”

그럴 리 있겠냐며 정색한 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발목을 쓸었다.

“간지러운데…….”

나른하게 흐르는 서늘한 손길이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우직한 손마디가 마치 깃털같이 사르르 움직이는데 뭐라도 붙잡지 않으면 이상한 신음이 흐를 것 같았다.

“으…… 그만, 가이사…….”

그의 옷깃을 붙잡고 고개를 가로젓자 내 발목을 꿰뚫을 듯 바라보던 눈동자가 이번에는 내 얼굴을 삼켰다.

“꼭…… 필요한 거예요?”

“사심입니다.”

별로 말해 주고 싶지 않았는지 그의 대답은 느리고 낮았다. 사방이 막힌 곳에서 나는 둔탁음처럼 이질적인 목소리가 기묘하게 살갗을 긁었다.

“그럼 그만해…… 더 이상은, 너무…….”

부드럽게 쥐고 매만질 뿐인데 상처와 굳은살이 많은 그의 손은 거칠었다. 사나운 살갗이 나를 다 짓뭉갤 것 같았다. 박하 잎을 마구 문대면 딱 이럴 것이다. 차갑고 아릿하고 알싸했다. 그 악마 같은 체취가 입술에 맞닿았다. 그의 입술을 통해 물을 받아 마셨을 때처럼 달큼한 혀가 내 입술을 촉촉이 적셔 핥았다. 점막 접촉을 통한 체액 전달. 별도의 무언가를 더 하지 않아도 그 조건은 이미 충족했을 것이다. 그는 한 팔로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내 발목 쪽으로 또 다시 손을 뻗었다.

“으……!”

그대로 훑어 내리는 손길에 발가락이 꽉 오므라들었다. 그만. 제발, 그만. 뻐끔거리는 내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 삼키어 사라졌다. 발목에 시린 바람이 모여들었다. 그의 손이 만든 아주 작은 회오리가 뼛속 깊이 각인되었다.

나는 그것으로 이 의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 유의미한 사실은 아니었는지 그는 손도 입술도 떼어 내지 않고 몸을 자꾸 기울였다. 그의 팔에 잡힌 허리가 뒤로 차츰 꺾였다. 어느새 허리가 아니라 내 머리를 감싸 쥔 손이 나를 지탱하며 눕혔다. 쪽. 그의 입술이 달콤한 소리를 남기며 살짝 떨어졌다.

“다, 다 했으면 그만…….”

“왜 그만해야 합니까?”

그의 허벅다리와 양팔 사이에 갇혀 뜨거운 시선을 받아 내기란 쉽지 않았다. 열망을 숨기지 않고 속삭이는 눈은 부드럽고 달콤하게 휘어져 있었다. 그는 지금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맛있는 먹이를 먹어 더 이상 사냥감을 공격하지 않게 된 상냥한 짐승 같았다.

“…….”

나는 그의 젖은 입술이 다시 다가와 나를 매만지는 걸 말리지 못했다. 가만히 입술을 벌리자 나직이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내 입속에 빨려 사라졌다. 자세를 바꾸려고 했는지 그의 손이 내 옆구리 안쪽을 스치며 등허리를 파고들었다.

“읏!”

놀라 혀를 깨물어도 젖은 숨결은 괜찮다며 쉬쉬 달랬다. 그의 팔 근육이 꽉 조여드는 게 느껴졌다. 침대가 크게 덜컹거리며 흔들리던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천을 박박 긁는 소리였다.

“자, 잠깐. 무슨 소리가 계속…….”

내가 그를 밀어내고서야 나를 놓아준 가이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가슴팍에는 아주 작은 짐승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고양이 같기도 하고 호랑이 같기도 한 기묘한 생김새였으나 황홀할 만큼 깜찍하다는 건 누구도 반박 못 할 진실이었다.

“이 애는…… 누구죠?”

“우나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우나의 존재를 설명해 준 가이사가 우나의 뒷목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덜렁 잡아 휘장을 열었다. 휙! 가이사는 아무렇게나 우나를 던졌으나 고양잇과 짐승의 태를 한 정령은 바닥에 우아하게 착지했다. 그러고는 하악질까지 했다. 이를 드러내며 분노하는 정령을 보고서도 가이사는 휘장을 다시 쳐 버렸다.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가 명백했다.

“쟤가 그…… 정령 맞죠? 사념체라는?”

내 말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오늘 본 타르시의 시커먼 얼굴이 떠올랐다. 며칠 만에 살이 홀쭉하게 내려앉고 피로로 지쳐 보였다. 타르시라면 깨소금 맛이겠지만 우나는 가이사도 공격할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계약자도 공격하는 유별난 성격이긴 하지만 크게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캬옹! 가이사의 말을 다 알아들었는지 밖에 있는 정령 한 마리가 그르렁거리며 울었다. 안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타르시 얼굴만 봐도 그게 아니던데…….”

나는 조심스레 휘장을 열었다. 대기하고 있었는지 폴짝 뛰어든 우나가 내 허벅지에 내려앉았다.

“헉!”

물리려나 싶어 잠시 긴장했는데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까칠하게 눈을 치뜬 정령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제 냄새가 나서 신기해하는 겁니다.”

오래 붙어 있으면 자연스레 그 사람의 체취가 몸에 밴다. 냄새를 다 맡을 때까지 내버려 두자 만족스러웠는지 골골거리며 내 무릎에 몸을 말고 누웠다.

‘무릎 냥이다……!’

용맹한 왕(王) 자 무늬가 고양이인지 호랑이인지 헷갈리게 했지만 하는 행동은 딱 고양이였다. 그 모습을 질투한 건지 전전긍긍하며 뱅뱅 돌고 있던 소나가 서러운 얼굴로 침대로 달려와 내 허벅지에 내려앉았다. 두 정령이 정령의 언어로 뭐라 뭐라 다투며 기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의외로 소나가 안 밀리네요.”

“소나가 가장 먼저 태어난 정령입니다. 우나가 제일 어리고.”

“그래요?”

둘은 씩씩거리며 솜방망이 한 방씩을 주고받았지만 어차피 내 허벅지는 넓었다.

“싸우지 말고 둘 다 있으면 안 될까?”

그동안의 상황을 보면 알아들었을 게 분명한데 다툼은 멈추지 않았다. 바람과 흙이 서서히 일어나 충돌하기 시작했다.

[ßijø ØŁđ Ŋʼnß Ŀĸ.]

내 말에는 꿈쩍도 안 하던 녀석들이 가이사의 말에는 얌전해졌다. 둘은 사이좋게……는 아니고, 영역을 나누어 내 허벅지를 차지했다.

“뭐라고 했어요?”

“시끄럽게 굴면 역소환하겠다고 했습니다.”

아. 집에 돌아가기 싫었구나. 귀여워서 피식 웃자 우나의 귀가 쫑긋 섰다. 아무리 봐도 저 귀여운 생명체가 타르시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

“타르시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우나를 향해 묻자 우나는 정령의 언어로 컁컁거렸다.

“감시하는 태의 때문에 화를 꾹 참고 있는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질긴 인간이라고 합니다.”

우나는 깜찍한 입을 씩 올리며 사납게 웃었다.

“그래도 곧 미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

어, 음…… 쟤가 많이 무서운 애긴 하구나.

“타르시는 역시 포기하지 않네요. 요양 가는 것보다 황제의 벌을 택할 줄 알았어요.”

어쩌면 편하게 죽을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광증은 사리분별을 어렵게 합니다. 수는 단순하겠지만 어떤 미친 짓을 해 올지 모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가이사가 조심해야 한다며 경고했다.

“세 번째 선물은 신중해야겠죠.”

서로 물고 뜯을 시간은 줘야 하니까.

* * *

우나가 타르시에게로 돌아가고 얼마 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타르시는 몸부림치며 깨어났다.

“으으…….”

이를 얼마나 사리물었는지 턱이 얼얼하게 당겼고 깨문 입술은 군데군데 터졌다.

“브람! 어디 있느냐, 브람!”

타르시의 신경질적인 부름에 깊은 그림자에 숨어 있던 검은 기사가 조명 아래로 나왔다. 혀가 잘린 기사는 무어라 화답하지 못하고 몸을 깊게 낮추었다.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것이야!”

타르시는 그동안 브람에게 예와 아니오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게 아니어서 표정이 거의 없는 브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쩔 줄 모르는 반응마저 영혼 없는 기계 같았다. 끄응, 하며 몸을 일으킨 타르시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숨을 거푸 내쉬었다.

“황후에게 내 서신을 전한 게 분명하겠지?”

신경질적으로 갈라진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조금 전보다는 이성을 갖추고 있었다. 브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타르시의 분노가 거세졌다.

“황후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그 자리에 올려 준 게 누구인데!”

평소라면 물건 몇 개를 던져 깨트리고 노예를 불러 채찍질하며 화를 다스렸겠지만 지금은 손아귀를 꽉 움켜쥐는 것으로 참아야 했다. 타르시는 답답함에 숨이 껄떡 넘어가는 한이 있어도 니네이나가 원한 것처럼 되어 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광증이라니! 보란 듯 멀쩡함을 증명하여 나를 모함한 잡것들을 찢어 죽일 것이다!”

타르시는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도 소리를 낮추었다. 교활한 늙은 범은 지금이 몸을 사려야 할 때임을 잘 알았다.

“다시 써 줄 터이니 황후에게 가서 답신을 꼭 받아 오너라.”

타르시의 말에 브람의 얼굴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

말없이 고개를 젓는 브람의 행동을 참지 못한 타르시가 협탁의 화병을 집어 던지려다가 급하게 손의 방향을 바꿨다.

퍽! 베개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브람의 얼굴에 꽂혔다가 바닥으로 퉁퉁 굴러떨어졌다.

“감히 내 명령을 안 들어?”

“…….”

브람은 또다시 침묵하며 고개를 저었다. 브람은 타르시가 만든 인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혀를 자르고 문자를 익히지 못하게 한 것 역시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온갖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하는 노예가 말과 문자를 모두 할 줄 모르니 그야말로 완벽한 체스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타르시는 자신의 걸작마저 답답하게 느껴졌다.

“말을 해!”

타르시는 브람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며 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흥분하여 날뛰는 노인의 힘은 생각보다 거세서 브람의 고개가 몇 번이나 돌아갔다. 그렇게 분풀이를 하고 나서야 진정한 타르시는 머리를 굴릴 여유가 났다.

“설마…… 황후가 내 서신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한 것이냐?”

브람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를 버렸단 말이냐!”

망설이던 브람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문 쪽을 눈짓했다. 계속 소리를 지르면 방문 밖에서 타르시를 감시 중인 태의가 들으리라는 염려였다.

“감히 네까짓 놈까지……!”

모멸감과 분노로 타르시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러나 타르시는 채찍을 찾는 대신 돌아섰다. 지금은 인내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이 빚은 그를 인내하게 만든 놈들에게서 톡톡히 받아 낼 생각이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동안 받아먹은 건 생각도 안 하고 그를 버린 황후와 황제.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있는 줄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루베니오와 니네이나. 그 모두가 피눈물을 흘리며 지금의 과오를 후회하게 해 줄 것이다.

“남은 게 너밖에 없으니 할 수 없군.”

타르시는 다소 아쉬운 얼굴로 브람을 바라보았다. 공들여 키운 암살대가 다 죽고 남은 건 브람 하나였다. 그 모든 게 루베니오 때문이었다.

“암살대가 모두 죽었으니 이 세상에서 네 얼굴을 알고 있는 건 오로지 나 하나다. 루베니오도 네 얼굴은 모를 것이다.”

브람은 타르시가 손에 쥔 마지막 패 중 하나였다. 밖에 내돌린 적이 없으니 루베니오도 알 수 없었다.

“모두가 죽고 너 혼자 남았다. 네가 해야 할 건 잘 알고 있겠지.”

잠시 불에 타 사라진 아지트를 떠올리고 있던 브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다. 네 목숨을 걸어서라도 완수하거라.”

브람은 수많은 그림자에 녹아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홀로 남은 타르시는 이성을 좀먹는 분노와 치열하게 싸우며 손등을 부득부득 긁었다. 소리를 삼킨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하얀 시트 위에 흔적을 남겼다.

* * *

─나의 신께서 내게 이르시니 그 어떤 해악도 불어닥치지 못하리라.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가이사와 함께 라가 신전을 찾았지만 카사비올라 대신관은 신전에 없었다. 신의 계시라는 저 말을 남겨 두고 지난 새벽에 포교 활동을 떠났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신관을 홀로 가게 둔단 말이에요? 호위도 없이?”

“신의 눈길이 항상 성녀님께 닿아 있으니 호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교육 신관은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관의 태평함에 혼이 쏙 빠져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대신하여 가이사가 불쑥 물었다.

“어디로 갔습니까?”

싸늘한 말투와 건조한 얼굴에도 신관의 얼굴색은 변하지 않았다.

“신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놈의 신! 신! 신! 열이 받았지만 신관의 앞에서 신성 모독을 할 수는 없었다.

“오브레이 신관님!”

때마침 신전의 정원에서 뛰어놀던 어린 신관들이 그를 불렀다.

“그럼 이만.”

빠르게 내뱉은 오브레이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달려오다 넘어진 아이에게 달려갔다. 나는 오브레이가 아니라 옆에 있는 가이사를 붙잡아야 했다.

“어딜 가려고요?”

앞으로 튕겨 나갈 것처럼 팽팽하게 부푼 어깨 근육을 붙잡자 가이사가 시선을 내게 내렸다.

“짐작 가는 곳이 있으니 잡아 오겠습니다.”

“누구를요?”

“성력 덩어리.”

“…….”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보다 훨씬 가관이었다. 성력 덩어리라니. 방금 저 신관이 성녀님이라고 부르는 걸 못 들었단 말인가? 아이고, 우리 집 가이사야. 나는 가이사가 사고라도 치기 전에 그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나를 두고 어디를 가려고요?”

“아.”

미처 그 생각은 못 했는지 압축한 용수철처럼 긴장했던 근육이 느슨히 풀어졌다. 하긴. 이걸 두고 어딜 혼자 가겠어? 가더라도 안전한 곳에 두고 가야지. 번뜩이는 눈빛이 정돈된 건 좋은데 어째 그 의미가 미묘했다. 나는 갈수록 잘 들리는 가이사의 눈으로 말해요 스킬을 애써 외면했다.

“하하. 라가니우스 신이 가이사의 생각을 읽고 카사비올라 대신관을 대피시켰다는 생각은 그냥 제 망상이겠지요?”

“…….”

왜 대답 안 하는 건데! 잘만 열리던 입술이 지금은 꾹 다물려 있었다.

“아니라고 대답해요.”

나 지금 굉장히 불안하니까.

“신의 생각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나 몰래 흉악한 생각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성녀 납치라든가. 어쩐지 간밤에 나를 자꾸 재우려 드는 게 수상하기는 했다.

“내 생각인데요. 가이사가 카사비올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그녀가 더 일찍 돌아오지 않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시기가 너무 적절했다. 카사비올라 대신관은 여태 신전 밖으로 나온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인데 하필 이때라니.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이사 탓일 거라는 데에 직감이 쏠렸다. 신이 카사비올라를 가이사로부터 피신시킨 것이다.

“초조해하지 말고 기다려요. 그녀가 돌아올 곳은 결국 라가 신전이니까.”

이유는 달라도 누구나 하나쯤은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카사비올라에게는 라가 신전이 그랬다. 나는 그녀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돌아올 곳…….”

내 말을 따라 하던 가이사가 곧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정도는 기다려 보겠습니다.”

짜다. 구두쇠세요? 어느 지방까지 간 줄 알고 일주일이래? 그러나 상관없었다. 일주일쯤 흐르면 시대는 격변해 요동칠 예정이었다. 가이사라면 그때의 날 두고 떠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요. 그럼 우선 집으로……”

“신전에는 무슨 일이지?”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 바로 떠오른 건 아니지만 확실히 아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뒤를 돌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다.”

톡톡 쏘는 언짢은 말투에 그를 떠올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키가 작은 일곱 살 황자님이 보였다.

“제국의 황자님을 뵙습니다. 신의 자비가 닿으시기를.”

내 인사에 고개를 까딱거린 아실로가 가이사를 매섭게 바라봤다. 요것 봐라? 귀여워서 웃음이 쿡쿡 났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아실로를 흘긋 내려다본 가이사가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만족하지 못했는지 뽀얀 얼굴이 짜증으로 찡그려졌다. 아실로는 곧 얼굴을 휙 돌려 가이사의 인사를 무시해 버렸다. 전에 가이사에게 무시당한 일에 대한 복수인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가이사는 아실로의 귀여운 괴롭힘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지독한 무신경에 아실로의 입가가 또다시 씰룩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아실로는 덩치 큰 형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칼리탄도 그렇고 가이사도 그렇고. 검을 좋아한다고 하더니 기사에 대한 동경심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저는 카사비올라 대신관을 찾아뵈려 들렀답니다. 황자님께서는 무슨 용무로 이곳을 찾으셨나요?”

“마음을 정갈히 다스리려고 들렀다.”

자못 진지한 대답이 너무 귀여워서 ‘풉!’ 하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으나 참아 냈다. 무례한 비웃음으로 들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대들은 너무 번잡스럽군. 신전에서는 좀 더 정숙하도록 해라.”

“네, 황자님.”

나는 빙긋 웃으며 공손히 대답했고 가이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침묵하고 있었다.

“너는 왜 황궁에 다시 안 들르는 거지?”

어라? 아실로의 반응이 내 생각과 조금 달랐다. 또 가이사를 보며 부들부들 떨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게 관심을 보였다.

“어머. 저를 보고 싶으셨나요?”

내 짓궂은 농담에 질색하며 파르르 떠는 암팡진 입술을 보니 관심이 내게 옮겨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볼일이라도 있는 걸까?

“너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경계한 작은 황자님이 낯빛을 어둡게 가라앉혔다.

“지금의 사태를 모르나?”

“사태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자 황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실로는 황후와 타르시에 대해 말하는 것일 터였다. 어젯밤 응답하지 않는 황후에 대한 분노로 파르르 떨던 타르시가 기어코 오늘 아침 황후와 설전을 벌인 모양이었다. 둘 사이에 험한 말이 오고 갔다는데 그건 자세히 듣지 못했으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살벌했다. 황제가 의아함을 가지기 시작할 만큼.

‘이 아이에게는 위태롭겠지.’

아실로가 왜 신전을 찾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아이의 가족을 망치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꼬마야, 그들이 먼저 내 가족을 망쳤어.’

나는 속에서 일어나는 격정을 삼키고 마음씨 좋은 누나처럼 아실로를 대했다.

“조심하세요. 힘든 상황일수록 더더욱.”

나는 솜털이 하얗게 돋아나는 뽀얀 뺨을 바라보다가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다음에 찾아뵐게요. 지금은 장소와 시기가 좋지 않네요.”

미안하지만 아실로는 계속 내 패가 되어 주어야 했다.

* * *

내 경고가 통했는지 아실로는 더는 내게 말을 붙이지 않고 돌아갔다. 그런 말을 듣고도 황후와 타르시에 대해 말을 꺼낼 만큼 아둔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아실로가 떠난 빈자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가이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제 아버지랑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어린것에 약한 점이 닮았습니다.”

“네? 전혀 아닌데요.”

아실로를 대하는 나는 마녀 같았을 것이다. 어린애를 살찌워 잡아먹는 마녀.

“저는 아실로 황자를 이용할 생각이에요. 꿍꿍이가 있는 미소였다고요.”

“그럼 왜 그냥 보냈습니까?”

“지금은 그를 쓸 때가 아니니까요.”

“루베니오였다면 황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줬을 겁니다. 들어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우리 아버지 얘기는 왜 나와요?”

“당신은 루베니오와 많이 닮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다른 점입니다.”

루베니오보다 내가 못하다는 말 같지는 않았다. 나는 좀 반성하고 있는 부분인데 말이다. 왜 아실로를 그냥 돌려보냈을까? 그 아이를 살살 달래 정보를 토해 내게 하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나는 죄 없는 아이를 이용하는 것에 죄책감을 가진다는 게 마땅찮았다. 그들은 나와 로페니아를 해쳐 루베니오에게서 피눈물을 뽑아내지 않았나? 그 생각을 하면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그 피눈물을 되갚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들이 하는 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인간의 마음과 양심이 그 아이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마지막 제동을 걸었다. 내가 그렇게 한다면 아실로의 남은 삶이 너무나 불행해질 테니까. 나는 아실로를 달래어 그가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쉬운 방법은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 둔 채.

“그 마음은 오히려 제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난 별로 따뜻한 성격은 아닌걸요. 지금도 보세요. 어린 황자님을 완전히 쳐 내지는 않았잖아요. 급해지면 망설이지 않고 이용할 거예요.”

“당신은 선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보통의 고양이처럼.”

“전 사람인데요.”

“비유가 그렇다는 겁니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는 자기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을 지킨다. 가이사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실로 황자를 귀여워하면서도 차갑게 볼 수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가 당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뭐야. 나 굉장히 나쁜 사람 같……”

“더 들어 보세요.”

그가 한 걸음 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가슴팍에 내 얼굴이 맞닿을 것 같았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완전히 무시한, 아주 친밀한 사이에만 허용되는 거리감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흘긋 올려다보고 안심했다. 그러자 가이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피식 웃었다.

“당신 지금,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가 나를 한 번 보고 표정을 풀어낸 걸 알고 계십니까?”

너였어? 너는 괜찮아. 이런 맥락으로 내가 반응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의 설명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져서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저는 이 느낌을 실감하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옅은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지는 붉은 입술이 나른하게 당겼다.

“나는 이 안에 있다는 걸.”

그는 서늘한 손으로 내 목덜미와 쇄골을 비껴 그었다. 잘게 떨리는 목의 울림까지 색스러워 내 몸은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내장을 찌르르 울리는 기이한 감각을 참지 못하고 내가 입술을 꾹 깨물자 눈앞의 하얀 턱 아래에 푸른 핏발이 섰다. 그 은근한 반응에 내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마, 망측한 얼굴 그만둬요.”

나는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며 앞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신전 정원에서 놀고 있는 어린 신관 몇몇이 달아나는 나와 쫓아오는 가이사를 호기심 어린 얼굴로 지켜봤다.

“망측한 얼굴이 뭡니까?”

언제 따라붙어서는 처음 들어 봤다는 듯 요사스럽게 갸웃거리는 바로 그 얼굴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린 신관들의 교육에 좋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데리고 가야지.

“니네이나?”

화끈한 생각에 열을 들이붓는 부름이었다. 아아악! 나는 속으로 마구 비명을 지르며 그를 돌아봤다.

“레, 레어노스는 어린아이를 아꼈나 보죠?”

내 입이 아무 말이나 떠오르는 대로 지껄였다.

“정확히는 어린 동족을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그건 종족 특유의 보호 본능이기도 했고.”

“종족 특유의 보호 본능?”

이상한 말에 낯부끄러운 상념이 멎었다. 새끼를 보호하는 본능이란 모름지기 모든 짐승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모성애나 부성애로 나타나는 그 애정은 종족 유지를 목적으로 발달한 애틋함이었다. 하나 이상했던 건 레어노스가 인간이 아니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레어노스와 가이사는 동족이 아니잖아요.”

레어노스가 단순히 어린 개체를 아끼고 보살피는 사람이어서 가이사를 구해 준 거라면 가이사는 지금처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꼭 가이사가 레어노스의 동족이어서 구해 준 것처럼 말했으니까.

“레어노스를 마지막으로 그 혈맥이 끊겼습니다. 저는 가장 유사한 대체품이었고.”

“대체품? 가이사를 위해 죽었다는 레어노스가 땅 밖으로 비집고 나와 고함칠 만큼 불효막심한 발언일 게 틀림없네요.”

조금 흥분했는지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쏘아붙였다. 내 반응에 놀란 건지 그는 멈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갈팡질팡 헤매던 가이사의 눈가가 혼이 난 아이처럼 서럽게 일그러졌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저를 아껴 주신 걸 모르는 게…….”

어, 어, 어쩌지? 설마 울려는 거 아니지? 아니야.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으응. 알아요. 다그치려는 건 아니었어요.”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다가가자 가이사의 눈빛이 일순 번뜩였다. 어려운 문제의 정답을 드디어 알아맞혔다고 환희하는 눈빛 같았지만 내 착각이었는지 금세 불쌍하게 변했다.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나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속이 상해서…….”

내가 그의 손을 꼭 붙잡자 눈가까지 발개진 눈이 나를 마주 봤다.

“레어노스도 분명 그럴 거예요.”

손을 당겨 어깨를 꼭 끌어안자 그는 아주 온순하게 내게 몸을 기대 왔다.

“네.”

앞으로는 안 그러겠다는 듯 착실히 대답도 했다. 이렇게 착하게 잘 받아들이는데 무작정 화내고 다그친 게 너무나 미안했다. 다시는 안 그래야지. 아직 가이사에 대해 잘 몰라서 실수를 하는 것 같았다.

“마침 오늘이 열 번째 밤이네요.”

가이사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잊지 않으셨군요.”

“그럼요.”

“…….”

하아. 한숨을 쉬는 것처럼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내려왔다. 막막한 낭떠러지에 내몰린 사람 같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두 번째 기억에서 가이사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가 레어노스 맞죠?”

어린 개체를 아끼고 고통에 시달리던 그를 일깨워 준 목소리였을 테니 대상은 그뿐이었다.

“맞습니다.”

“정답을 알아맞혔으니…… 어때요? 몇 시간 일찍 그 얘기를 해 주는 건?”

“…….”

나의 은근한 부추김에 얌전히 안겨 있던 가이사가 몸을 쓱 일으켰다.

“앗!”

커다란 덩치는 미꾸라지처럼 매끄럽게 도망갔다. 그러고는 곤란한 상황을 외면하려는 것처럼 멀뚱히 서서 허공만 응시했다.

“가이사.”

“예.”

“저…… 밤이 몹시 기다려져요.”

짓궂을 만큼 달큼하게 웃자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그의 눈가가 다시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 확연한 반응에 내 귓가도 뜨끈뜨끈해졌다. 어? 이게 아닌데?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해 주려는 순간에 그는 이미 대답해 버렸다.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뭐를 열심히 준비하겠다는 거지요? 알고 싶고 알기 무서운 말이었다.

* * *

이윽고 밤이 왔고 가이사의 기억 이야기는 그를 죽여 주겠다던 목소리가 들린 다음으로 넘어갔다.

‘언제 죽여 줄 거야?’

그때의 가이사는 말을 할 기운도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는 이렇게 생각만 해도 의사소통이 되어 다행이었다.

─상황 파악부터 좀 하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왜 다시 깨어난 거지?

하나 귀찮은 게 있다면 서로의 생각이 다 들린다는 점이었다.

‘시끄러워.’

─네가 할 말은 아니구나, 꼬맹아. 깨어난 이후로 ‘죽여’라는 말을 몇 번 들었는지 셀 수도 없으니.

생각을 멈춘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고통의 나락에서 끊임없이 허우적거린 가이사의 몸은 바들바들 경련하고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걸 외면하기 위해 뭐든 발작적으로 생각해 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의 고통을 인정해야 했고 두려워해야 했다. 가이사는 그것이 죽는 것보다 더 싫었다.

‘죽여. 죽여. 죽여. 죽여.’

그리고 레어노스는 그 모든 생각의 흐름을 다 읽고 있었다. 어떤 것보다 솔직하게 공유되는 마음이 끔찍한 어둠이라는 건 레어노스에게 매우 씁쓸하게 다가왔다.

─나는 레어노스다. 꼬맹아, 네 이름은 뭐냐?

만 년을 살아온 이 세계의 마지막 고룡(古龍)이 언약과 다름없는 이름을 알려 왔다. 레어노스는 그렇게라도 해서 죽여 달라는 가이사의 생각을 끊어 내려고 했다. 레어노스라는 진명(眞名)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가이사는 그의 부름이 귀찮고 괴로웠다.

‘없어. 아무것도.’

그의 생각은 자연스레 진실한 대답을 떠올렸고 고룡은 그 모든 걸 들었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 이름도 없지?

‘열 살. 아무도 지어 주지 않았으니까.’

또 반사적으로 생각이 떠올랐다. 가이사를 ‘야’, ‘이 새끼’ 등을 비롯하여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말로 부르던 친부의 존재와 전투 노예로 키워지던 시절 불렸던 몹쓸 명칭까지 차례차례. 좋은 기억이라고는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 가이사 같은 사람이 생각을 들킨다는 건 영혼이 찢기는 것과 같았다. 짓이겨지기를 반복하여 이미 무뎌진 가슴을 비참함과 분노가 다시 찢어 발겼다. 그러나 축 처진 사지와 표정 없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생각을 몸으로 표현하는 법을 이미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생각 이상으로 레어노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넌…….

가이사는 현재 레어노스의 심장을 이식받은 상태였다. 고고한 드래곤의 심장은 새로운 주인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가이사의 잠재력이 강해 불안정하게라도 공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건 레어노스로 하여금 가이사를 동족, 혹은 동족과 유사한 어떤 존재로 인식하게 했다. 드래곤의 심장은 가까운 혈족일수록 비슷한 파장을 가졌고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심장이 다른 아이에게 있다면 드래곤이 느낄 생각은 하나였다. 아주 가까운 혈족의 어린아이. 즉, 레어노스는 가이사를 보호해 줘야 할 해츨링으로 인식하고 말았다. 하물며 그 해츨링이 지금과 같은 학대를 받은 상태라면 그때 해츨링을 보호할 성룡이 느낄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윽!

레어노스는 가이사가 드래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본능과 이성의 괴리감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한번 시작된 공명은 거세게 날뛰며 드래곤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그러자 가이사의 육체에 반발하던 레어노스의 심장이 차츰 안정적인 궤도를 찾아갔다.

─갈수록 가관이군.

가이사의 몸에 이식된 드래곤 하트가 안정되자 가이사의 기억이 레어노스에게로 빠르게 흘렀다. 고룡의 고고한 눈동자가 흠칫 떨린 건 그 순간이었다. 진심으로 죽음만을 바라던 가이사의 옛 자취를 더듬었을 때, 레어노스는 기억 속에서 지금보다 훨씬 어린 시절의 가이사를 보고 말았다. 거듭된 학대로 실망하고 좌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모의 사랑을 바라던 아주 어린 가이사.

─아버지…….

말을 갓 배웠을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부모에게 사랑을 부르짖던 아이의 몸은 마르고 왜소했다. 포식자에게 둘러싸인 먹잇감처럼 한껏 몸을 웅크리고 앉아 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움찔거렸다. 지금의 가이사는 잊어버린, 어쩌면 지워 버린 시절이었다. 두려워하고 좌절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기대했다. 그리고 삶을 열망했다. 자신이 더 노력하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어린 가이사는 언젠가는 이 좁은 골방을 나가 자유롭게 뛰노는 그의 모습을 누군가가 지켜보는 상상을 하며 잠들었다. 싸늘한 방에 어두컴컴한 오한이 밀려올 때도 햇살같이 부드러운 꿈은 영롱하게 반짝였다. 차츰 그 빛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이사는 만 년이나 되는 방대한 기억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레어노스가 고작 10년짜리의 기억을 모두 흡수하는 데에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가이사의 기억을 모두 읽은 레어노스는 지금의 사태에 진심으로 분노했다. 가이사는 잔인한 상황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놓지 않는 아이였다. 뭔가를 계속 해 보려고 했었다. 그런 그가 모든 희망을 버린 건 이 지하에서였다.

─이래서…… 인간들이란!

레어노스는 혐오를 담아 습관적으로 말했다. 가이사는 거칠게 흐르는 레어노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린 드래곤 레어노스는 이 땅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이 죽으면 그 힘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 하트를 땅으로 돌려보내는 의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마지막 드래곤인 레어노스에게는 장례를 치러 줄 동족이 없었다. 레어노스는 자신의 심장이 악한 곳에 쓰일까 봐 염려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직전, 인간 세상에 영향력이 있으면서도 선한 인간을 찾아 장례를 부탁했다. 그 인간이 바로 당시 라가 신전의 수석 신관이었던 엘레니야였다. 그러나 엘레니야는 가장 믿고 있던 대신관 할데스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할데스는 엘레니야를 죽이고 드래곤의 심장을 훔쳐 냈다. 그리고 드래곤의 힘을 사사로이 이용하려 했다. 레어노스의 육체는 죽었지만 드래곤 하트는 가이사에게 이식됐다. 드래곤 하트가 약하게나마 박동을 시작했기에 레어노스의 영혼도 저승을 이탈하여 되돌아온 것이다. 방금 그 사실을 깨달은 레어노스는 고요히 분노했다.

─감히 드래곤의 심장을 허락받지 않은 인간 따위가 이용하려 들다니.

이 땅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 하트가 주인의 분노에 동화하여 크게 울부짖었다. 그 영향으로 드래곤 하트의 엄청난 힘을 담고 있던 가이사의 몸이 크게 경련했지만, 심장에서 발산한 빛은 멈추지 않고 뻗어 나갔다.

쿵! 쿵! 대지가 우레와 같이 울었다. 돌무더기가 쏟아져 지하에 남아 있던 사람을 매장했고 땅 위에서는 사람의 비명 소리와 건물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죽을 수 있나?’

시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는지 가이사의 눈앞으로 초록색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 빛은 분노로 타오르며 가이사의 몸도 갈기갈기 찢고 있었지만 그는 안도하고 환희했다.

“커, 커억……!”

고통으로 터진 신음과 피가 입 밖으로 연거푸 흘렀다. 레어노스의 마법은 드래곤의 심장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든 지성체와 기록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가이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이 간 천장이 우지끈 휘어지며 그의 몸 바로 위로 떨어졌다. 천장에 눌리면 몸이 산산조각 날 테니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었다.

‘고맙다.’

가이사는 아주 잠깐 레어노스에게 감사했다. 고작 10년밖에 안 된 새끼 인간의 건방짐에 레어노스는 실소했다. 곧 신전이 와르르 무너져 그 흔적조차 이 땅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가이사의 정신은 살아 있었다.

‘내가 왜 아직도 살아 있지? 돌무더기에 눌려도 죽지 못하는 것인가?’

─너는…… 나와 같이 가자. 난 널 죽일 수 없어.

‘약속이 틀리……!’

눈부신 녹음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뇌 신경을 눌러 죽이던 날카로운 고통이 잦아들고 벌벌 떨리던 사지가 가지런히 정돈되었다. 아무렇게나 꺾여 있던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갔고 진물이 질질 흐르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상흔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실로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았던 암흑 무저갱에 상냥한 빛줄기가 톡톡 떨어졌다.

시각, 청각, 촉각. 고통만 인지하던 몸에 감각이 하나둘 돌아왔다. 가이사는 자신이 왜 죽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그의 몸은 신전 지하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나무와 풀로 가득한 푸른 정원은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황홀경이었으며 낙원이었다. 햇살까지 반짝반짝하게 재현해 둔 오색찬란한 공간에서 가이사는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앉아 있던 가이사는 곧 거대한 덩어리를 발견했다. 존재는 산처럼 컸다. 아름다운 녹색 비늘을 가지고 있었고 눈은 새벽이슬을 머금은 풀잎 같았다. 그러나 차가웠다. 그건 이미 사체였다. 고고하게 죽은 드래곤의 사체 아래로 붉은 피가 동그랗게 고여 있었다.

철퍽! 가이사의 발바닥에 사룡의 피가 밟혔다.

“왜…… 죽여 준다고 했잖아!”

가이사는 소리치며 드래곤의 머리를 두 주먹으로 내리쳤다. 레어노스가 처음으로 들은 가이사의 육성은 맑았다.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어린애의 것이었다.

─죽일 수가 있어야지. 그 어떤 드래곤도 해츨링을 죽이지는 못해.

죽은 드래곤은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레어노스의 영혼은 가이사에게 생각으로 뜻을 전달했다.

─사룡(死龍)이라고 해도 말이지.

레어노스는 방금 인간계의 인과에 어긋나는 일을 저질렀다. 설령 신이라고 해도 벌을 면치 못할 죄였다. 신전을 무너트린 게 문제가 된 건 아니었다. 드래곤 하트가 일으킬 재앙을 그 주인인 레어노스가 책임지고 막은 것까지는 괜찮았다. 죽어야 할 생명을 사신에게서 가로챈 것이 레어노스의 죄였다. 본래대로라면 레어노스는 이 일을 수습한 뒤 사계(死界)로 불려 가 그간의 공로에 대한 포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어노스는 순리를 지키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벌로 이 땅에 남게 되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에 고여 땅바닥을 기며 1000년을 다시 사는 것이 그에게 내려진 벌이었다.

“왜……?”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덜너덜해진 몸을 복구한 회복력이 그냥 나올 수는 없었다. 드래곤 하트는 주인의 허락하에 가이사의 몸에 동조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뛰는 심장은 가이사에게 맞춰 주려 하고 있었다. 가이사는 그 소리를 들으며 레어노스의 생각을 모두 읽었다. 레어노스는 가이사가 해츨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짜 해츨링이 아니니까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었다. 생각으로 내뱉는 말은 다 핑계였다. 그가 가이사를 죽이지 않은 건 고작 10년밖에 안 되는 한 인간 소년의 참상이 만 년을 살아온 드래곤을 슬프게 했기 때문이다.

드래곤에게 인간은 한낱 벌레와 다르지 않다. 굳이 해칠 것도 없지만 날아들면 귀찮으니 짓밟기도 했다. 그런데 레어노스가 마주한 가이사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었다. 드래곤의 심장에 매달려 살아가는 어린 존재는 레어노스에게 색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만 년을 살면서도 처음 느끼는 낯설고 벅찬 감흥이었다. 머리로는 심장 탓임을 알았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레어노스는 가이사의 생애에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고 분노했다. 심장을 공유한 사이의 완벽한 공감이었다. 게다가 가이사의 삶은 레어노스가 드래곤 하트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에 생긴 일이었다. 그것에 대한 책임감과 어린 존재에 대한 믿을 수 없도록 애틋한 감정이 맞물렸다.

가이사의 기억이 만 년을 살아온 고룡의 마음을 움직였다. 시커먼 골방에서 홀로 버티면서도 포기하지 않으려던 한 줌의 새싹 같은 존재였다. 그런 아이를 어떻게 사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의 레어노스는 가이사를 마치 친자식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단순히 가이사를 해츨링처럼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다. 훨씬 더 복잡한 감정이었다. 심장의 공명을 느끼며 읽었던 10년의 기억 속에서 가이사는 태어나고 자랐다. 인간의 성장 시기의 반분을 함께했다. 자신의 아이가 자라나는 기쁨과 다르지 않았다. 레어노스는 그 아이가 계속 자랐으면 했다. 전과 같은 빛으로 빛나기를 바랐다. 보듬고 싶었다. 지켜 주고 싶었다. 아기 새의 깃털처럼 간지럽고 손바닥에 한 줌 담아낸 햇살처럼 온유한 애정에 가이사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졌다.

“그건…… 거짓말이잖아.”

가이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본 맹목적인 애정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사랑을 바라지 않는 아이는 없었고 결핍되어 있던 아이라면 달콤한 감정이 더 자극적이었다. 분개하고 두려워하고 외면해 가며 날뛰는 가이사의 감정을 레어노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무엇이든 좋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 대가를 치를 거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나는 언제나 아이를 가지고 싶었거든.

레어노스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동족의 수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더 줄어들었다. 레어노스가 장성하였을 때 그는 이미 동족 하나 없이 혼자였다. 드래곤은 고독했다. 강건한 정신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외로웠다. 그렇게 살았기에 가이사의 상처를 더 보듬고 싶어 했다. 가이사의 머릿속으로 웅크리고 누워 새파란 하늘을 홀로 바라보던 드래곤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에 밟히는 어린것을 찾았으니 한 번이라도 품에 안아 보고 싶었지.

좀 더 일찍 찾았으면 좋았을걸. 그렇게 후회하는 목소리가 쓸쓸하게 잠겼다.

─가이사.

대부분의 그린 드래곤이 그렇듯 레어노스도 숲을 참 좋아했다. ‘가이사’는 레어노스가 막 태어났을 때 처음 본 숲의 이름이었다. 레어노스는 가장 사랑하고 아꼈으나 이제는 사라진 옛 숲의 이름을 간직하고 싶어 했다. 언젠가 아이를 낳으면 그 이름을 물려줄 것이라며 툴툴거리는 어린 레어노스의 잔상이 빠르게 가이사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지금 레어노스가 하고 있는 결심도.

‘원하지 않아. 필요 없어!’

가이사는 힘껏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몸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털썩 쓰러지는 가이사의 몸을 녹색 바람이 부드럽게 받쳤다.

─네게 그 이름을 주마.

드래곤의 슬픈 목소리와 함께 젖은 홍염의 눈동자가 힘을 잃고 스르르 감겼다. 그 후, 가이사는 아주 긴 잠에 빠졌다. 드래곤의 동면과 비슷했다. 가이사의 꿈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그의 경험이 아니라 레어노스의 기억을 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레어노스는 가이사의 꿈에 종종 놀러 와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푸른 잔디 위를 나란히 걷고, 언덕에 걸린 노을을 함께 바라봤다. 평화롭지만 무료한 레어노스의 일상에 가이사의 꿈이 녹아들었었다. 가이사의 꿈은 1000년 동안 이어졌으나 꿈이 으레 그렇듯 아주 긴 시간을 보내도 그 시간의 소요가 가늠되지 않았다.

─잘 잤나?

좋은 꿈이었기를 바라는 다정한 인사말에 가이사가 눈을 떴다. 인간인 가이사는 1000년을 버틸 수 없었다. 그랬기에 레어노스는 가이사의 시간을 멈춰 두었다. 가이사의 시간은 다 자라지 못한 열 살의 어린애 그대로였다. 사실 그 외에도 레어노스가 굳이 1000년이란 시간 동안 가이사를 잠재워 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레어노스의 선택이었다. 하나뿐인 심장을 가져갈 존재를 정하는.

드래곤 하트의 힘을 인간이 감당하기 위해서는 레어노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1000년의 시간은 그 힘을 조율하기 위해 쓰였다. 만 년 하고도 1000년을 더 버틴 심장은 이미 오래되어 가이사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인간의 수명쯤은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가이사가 죽을 때쯤이면 심장도 효력을 다해 자연히 소멸할 것이다.

가이사의 수명과 드래곤 하트의 남은 시간을 간단히 산출해 보던 레어노스는 지난 1000년 동안 새로운 순리를 정리했다. 가이사는 그저 잠들어 있었지만 레어노스는 그의 옆에 머물며 긴 시간에 걸쳐 드래곤 하트를 전해 주었다. 가이사가 눈을 뜰 때쯤 이제 그 심장은 완벽히 가이사의 것이 되었다. 인간은 심장이 없으면 살 수 없고 드래곤은 심장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심장을 완전히 잃었다는 건 곧 레어노스의 소멸을 뜻했다.

“차라리 날 죽여. 나는 죽고 싶다고 했잖아.”

죽은 드래곤의 비늘은 1000년 사이 메말라 볼품없이 변했다. 동공의 초점이 흐려서 가이사는 어떻게 해야 레어노스의 눈과 맞닿을 수 있는지를 몰랐다. 레어노스의 소멸을 예감한 가이사가 주춤 일어나 레어노스의 사체 쪽으로 내달렸다.

─나는 이미 너무 오래 살았어. 아름다운 것도 많이 보았지.

그의 인사는 길지 않았다. 1000년의 꿈에 함께 머물며 필요한 지식과 마음은 모두 꿈으로 전달했다. 그렇기에 가이사는 잘 알았다. 지금이라도 레어노스가 가이사의 몸을 빼앗으면 그는 다시 살 수 있다는 걸.

─살아가라. 살아가거라, 가이사.

가이사의 생각을 읽은 레어노스가 애달프게 속삭였다.

‘살고 싶지 않아.’

가이사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삶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부짖었다.

─가이사.

레어노스는 멋대로 떠넘긴 이름을 달게 부르며 피식 가벼운 척 웃었다.

─이런 나도 못 해 본 게 있다. 나는 유희를 나가지 않는 별종이었거든.

드래곤의 유희란 인간인 척 모습을 바꿔 인간 사회에서 사는 것을 뜻했다. 레어노스는 자연에 머무는 걸 좋아해서 인간 세상으로 나가지 않았다.

─황제, 귀족, 기사. 다른 동족들은 다 하는 걸 나는 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이라도 해! 난 살기 싫다고 했잖아!”

가이사는 뛰어가며 외쳤다. 열 살이라고 해도 그의 신체는 이미 웬만한 성인보다 뛰어났다. 그런데 아무리 달려도 레어노스는 멀어지기만 했다.

─건방지긴. 아버지한테 말본새가 그게 뭐냐? 내가 새로 태어나게 한 거나 다름없는데.

레어노스는 조금 아쉬운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소멸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계급이 중요하다지? 너도 이왕 사는 거 귀한 인간으로 살아 봐.

일종의 동기 부여였다. 레어노스는 인도자가 되어 가이사가 살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귀하게 살며 아름다운 것을 눈에 담으면 가이사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해서였다.

“필요 없…… 레어노스!”

이윽고 그의 사체에서 하얀 빛이 돋아났다. 성결한 빛은 그의 녹색 빛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켜 그의 존재를 멸하려 들었다.

─내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르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잠깐! ……아버지!”

이런 걸 원하는 거라면 해 줄 테니까 아직 가지 마. 가이사의 마음을 읽은 듯 점차 기력을 잃던 녹음이 환하게 빛났다.

─내 아들아.

그 어떤 것보다 맑은 푸름으로 영롱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가이사를 다독거렸다. 가이사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터졌다. 1000년의 꿈을 함께한 존재였다. 이제 그가 없으면 살 수 없었다. 아무리 달려도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가이사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이럴 거면 차라리 같이 죽어.”

─하하. 사납기는.

부드럽게 웃어넘긴 레어노스가 마지막을 기념하는 것처럼 지독히 달게 물었다.

─정말 살고 싶지 않아?

“…….”

가이사의 입이 턱 다물렸다. 레어노스가 그의 마음속으로 맹렬히 말을 걸고 있었다. 한 번만이라도 마음껏 살아 보라고 소원했다. 가이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삶은 지옥인데 또다시 자신을 그 암흑으로 내던지려는 레어노스를. 레어노스는 가이사의 마음을 모두 읽었다.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흐려진 마음이 점점 더 희미해졌다.

─아름다운 걸 눈에 가득 담고 돌아오도록 해. 다시 만나는 날, 무엇이 가장 아름다웠냐고 물어볼 테니.

레어노스는 가이사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다음을 기약하며 그가 살아 주기를 바랐다.

“이해할 수 없어. 나는……. 그래도 가지 마…….”

눈부신 섬광이 차근차근 먹어 삼키던 레어노스의 몸체를 모두 뒤덮었다.

“아버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유언을 남긴 채 소멸했다. 기묘하게 박동하던 심장에서는 더 이상 그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존재가 사라졌음을 완전히 인식한 순간, 푸른 공간은 사라지고 가이사는 황폐한 터 위에 남았다. 짙은 어둠이 내려와서도 어린 그림자는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그를 죽였다.’

가이사는 후회했다. 정말 살고 싶지 않느냐고 묻던 레어노스에게 더 강경하게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나는 살고 싶었나?’

아니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헉!”

가슴의 비명에 숨이 콱 조여들었다. 허덕거리는 손이 목을 아득바득 긁었지만 호흡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만 말했어도! 내가 죽인 거야. 내가 죽였어.’

그는 단 한 번도 삶을 바라지 않았는데 왜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까?

‘왜 살아 있을까? 내가 죽고 그가 살았어야 했는데.’

낮과 밤이 세 번 바뀌도록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은 채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 소년의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드래곤의 심장을 계승한 몸이라고 해도 열 살밖에 안 된 인간의 몸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자리에 있으면 레어노스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레어노스는 소멸했다. 연결된 공명이 끊겼다는 건 가이사가 가장 잘 알았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윽……!”

어린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자 그의 몸에 걸린 보호 마법이 최초로 발동했다. 녹색의 마나가 강렬하게 번쩍였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각각 불, 물, 흙, 바람을 상징하는 정령의 빛이 그 안에서 움텄다. 가이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레어노스의 심장에 묶인 계약 정령들이었다.

─얘는 우나, 성질이 좀 까다롭지. 소나가 첫째고, 모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고…….

두서없이 설명하던 꿈속의 레어노스가 떠올랐다. 레어노스가 가장 처음 전달한 지식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레어노스는 완벽한 훈육자가 되어 갔지만 그때는 어설프게 정령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인간인 가이사에게 맞추어 초록색 머리칼의 청년으로 변해 있던 레어노스가 애틋하고 쑥스럽게 웃으며 했던 말이 있었다.

─잘 부탁해.

가이사는 지금에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내게 한 말이 아니었다.’

그 부탁은 가이사가 아닌 정령들에게 했던 것이었다. 소나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모나가 가이사의 입술 안으로 차가운 물을 흘려 넣을 때, 우나와 후나는 가이사가 먹을 만한 걸 구해 왔다. 아직 가이사의 힘이 미약해 정령들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들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가이사는 또 혼자 남아 아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청명하게 빛나는 맑은 하늘은 아름다웠으나 그 어떤 감흥도 줄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는 노예 때도 건방졌다. 맞아도 말투를 바꾸지 않았다. 가이사는 죽더라도 그런 놈들에게 존대하고 싶지 않았다. 비싼 값의 노예라 맞아 죽을 때까지 때리지는 않았고 결국 이긴 건 가이사였다. 몇 번 써 본 적 없는 존댓말이 어색했지만 그는 입술을 몇 번 우물거리며 연습했다.

“아버지…….”

이렇게 말하면 드디어 그렇게 불러 주는 거냐고 웃어넘기는 레어노스가 보일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단지 그가 남긴 몇 마디 말이 가이사를 움직였다.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걸 잔뜩 보고 돌아오라던 레어노스의 당부가 유일한 목표였다. 그러나 가이사는 아름다운 것을 알지 못했다. 높은 창공도 살랑거리는 나뭇잎도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었다. 바삭 말라 퇴색하는 빛을 붙잡지 못하는 허망함만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나마 기억하는 아름다움은 레어노스에게서 비롯했다.

“아.”

그때서야 깨달았다. 레어노스가 지닌 만 년의 기억. 가이사는 그걸 다 전수받지 못했다. 그가 받은 건 지극히 일부였다.

‘내가 아직 모르는 레어노스의 흔적을 찾아내면 어떨까?’

가이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살아갈 방향이 정해졌다. 그는 레어노스의 삶을 쫓으려 했다. 그러나 그 흐릿한 미소마저 오래갈 수는 없었다.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뛰어가던 발은 길목을 헤매며 멈췄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당신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인간인 가이사가 드래곤의 삶을 쫓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종족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하여야…….”

가이사는 그 사실에 절망하고 괴로워했다. 아득히 가라앉은 작은 어깨 위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인간은 계급이 중요하다지? 너도 이왕 사는 거 귀한 인간으로 살아 봐.

그때 힌트라도 주듯 레어노스가 남긴 다른 유언이 떠올랐다. 이 모든 상황을 예지한 레어노스의 안배였다.

“…….”

가이사는 지독한 고통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배제하던 인간의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그러나 그는 스스로 지옥으로 되돌아갔다. 집을 각인해 맞아 죽을 걸 알면서도 되돌아가는 개처럼 보이지 않는 목줄에 질질 끌려갔다. 그런 세상밖에 몰랐기에 그가 갈 수 있는 길은 지옥도뿐이었다.

“잠깐. 아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인간이 살지 않는 숲에서 내려온 아이가 신기했는지 금발의 남자가 가이사에게 관심을 보였다. 몹시 아름다운 남자였다. 화려한 금발과 반짝이는 푸른 눈의 사내는 가이사의 창백한 혈색을 살핀 뒤 곧장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안장에서 다급히 뛰어내려왔다.

“어디가 아픈 거지?”

남자는 ‘아픈 아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안타까운 눈을 하고 가이사를 보며 다른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가이사는 그런 남자에게서 조금이나마 레어노스를 느꼈다. 가이사를 미성숙 개체라고 칭하며 조심스러워하던 레어노스를 말이다. 레어노스를 느낄 수 있게 해 줬으니 충분했다. 가이사는 선언하듯 말했다.

“약속해. 당신은 해치지 않겠어.”

“…….”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발언에도 남자는 황당해하지 않았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만해(萬海)의 푸름으로 가이사를 살펴봤다.

“나를 도와줘. 그럼 내가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줄 만한 약속을 해 줄 테니까.”

남자, 아니 루베니오와 가이사의 첫 만남이었다.

* * *

루베니오가 가진 재능 중 가장 빛나는 건 대상의 진귀함을 알아본다는 혜안(慧眼)이었다. 그리고 가이사는 루베니오가 알아본 진귀한 것 중 하나였다.

“루베니오는 허황한 말이라며 저를 비웃지 않았습니다. 제 부탁대로 저를 귀족이 되게 해 줬습니다.”

“그럼 약속이라는 게……?”

조용히 듣고 있던 니네이나가 가이사를 향해 물었다.

“맞습니다. 그 대가는 당신을 지키는 것. 제가 처음 당신을 찾아온 이유가 되었습니다.”

가이사와 루베니오의 인연은 니네이나로부터 시작됐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루베니오가 어린 가이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테고, 가이사 또한 루베니오에게서 레어노스를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때 루베니오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에 와서는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가이사는 진심으로 아찔해졌다. 니네이나가 아니었다면 가이사는 레어노스의 유언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평생을 허무하게 떠돌다가 지쳐 빈손으로 나가떨어지고 그의 마지막 말조차 지켜 내지 못한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다가…….

‘그리고 끝내 죽었겠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난하고 참담한 노력이 동반됨은 당연했다. 아름다운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겠지. 레어노스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끝의 끝까지 발버둥 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레어노스의 그 지극한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결국 죽었을 것이다. 여전히 인간은 증오스럽고 삶은 버거웠으니까.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감도 오지 않았으니까. 유의미할 무엇도 읽어 내지 못했을 테니까.

세상의 무엇도 그를 기쁘게 하는 게 없었다. 만물은 불결했고 육신은 지쳤다. 그는 열 살의 나이로 1000년의 꿈을 꾸었고 세월의 흐름은 그에게 고독했다. 그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잊어버린 자였다. 삶을 갈구해야 할 이유를 지워 버린 자였다. 나약함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단지 삶을 바라지 않던 자신을 관철했을 것이다.

‘그래,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러나 이제는 실현될 리 없는 가정이었다. 그는 그녀를 만났고 이렇게 된 이상 놓아줄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그와 함께 있어 줘야 했다. 그래야만 가슴을 선득하게 적시는 불안감과 묻어 둔 포악함이 고개를 들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제……. 내게도 이제야…….’

보통 사람은 사는 동안 몇 번이나 만날 기회였다. 어떤 이는 태어남과 동시에 맺을 인연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 바스러진 낡은 뿌리만 남게 돼서야 만났다.

‘나도 한 번쯤은…… 안식해도 된다고……. 이 세상이 편안해도 된다고…….’

생존을 위해 쉼 없이 달려야 했던 남자가 피투성이의 몸으로 간신히 이룬 삶이었다. 생존이 아닌 삶을 바라게 한 사람이었다. 가이사는 이제 니네이나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신은 제가 찾은 유일함입니다. 소중하고 귀중한.”

가이사는 몸을 당겨 니네이나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애처로운 숨이 내려앉았을 때 그의 머리칼도 사르르 흩어져 그녀의 턱을 간질였다.

“제게 걸린 레어노스의 마법 때문인가요?”

“예, 당신이 아니면 영원히 몰랐을 아버지의 흔적이었습니다.”

니네이나는 드래곤 하트에 계약된 정령들과 그 의미가 달랐다. 가이사가 증명해 낸 약속이었다. 그는 이제 아름다운 것을 찾았냐는 레어노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흐음…….”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당겨 말하던 가이사의 얼굴이 움찔 굳었다. 니네이나가 새초롬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기 때문이다. 가이사는 몰랐다. 방금 전의 발언이 니네이나가 아버지의 흔적이기 때문에 그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는 고백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그렇다는 말이죠?”

잘 생각해. 당신은 잘 생각해야 할 거야. 가이사에게 니네이나의 난제가 주어졌다. 이번 문제를 잘 풀지 않으면 그는 지금 당장 이 방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보금자리를 빼앗길 거라는 위기감에 잘 감춰 둔 송곳니가 으르렁거리며 튀어나올 뻔했다. 그는 쿵쿵 험악하게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무시하며 말을 골랐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가이사는 관계에 서툴렀다. 열 살 이전의 그에게는 인간관계라고 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레어노스는 꿈속의 환상과 다름없었다. 인간 사회에 나와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홀로 모두를 배제했으니 이럴 때면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니네이나가 빌라면 빌 수 있었고 기라면 길 수 있었다. 어릴 때는 맞아 죽어도 안 하던 짓이었지만 니네이나에게는 그렇게 해 줄 수 있었다. 이걸 다 말하면 그녀는 화를 풀어 줄까? 그것만이 오로지 중요했다.

“당신이 나를 내칠까 봐 두렵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뭐든 해 줄 수 있고 뭐든 맞추어 줄 수 있는데 왜 화를 내는 겁니까?”

그러니까, 다 할 테니까, 제발 그러지 마.

덤덤한 목소리가 아이처럼 웅크려 덜덜 떨었다.

“말해 주지 않으면 모릅니다.”

가이사는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몇 번 핥았다. 속이 상했다. 좀 더 능숙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시렸다. 가이사는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슬퍼하는 얼굴과 즐거워하는 얼굴을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 내는 것이 어려웠다.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하며 배워야 할 사회화 습득이 덜 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동족을 모릅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고, 그렇다고 드래곤인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나와 일치하는 존재는 없고 이식받은 드래곤 하트는 인간을 동족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이질감이 그를 고독하게 했다. 만물이 북적북적 모여도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 사실이 불편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이사는 니네이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왜…… 그의 말에 슬퍼하는지.

“미안합니다. 당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가이사는 이렇게밖에 말해 줄 수 없었다. 그의 솔직한 대답은 니네이나의 마음을 무너트렸다. 슬픈 파도가 하얀 방파제를 뒤집고 지각을 에워쌌다. 발 디딜 땅 하나 없는 곳에서 속절없이 잠겨 또 그렇게 허덕거려야 했다. 니네이나는 신중하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니네이나는 가이사와 달랐다. 그녀는 그의 마음이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그깟 게 뭐라고. 그의 시작이 어떠했는지가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단순히 흔적 보전을 위한 것이었다면 니네이나의 의지를 존중할 이유가 없었다. 말 그대로 달랑 들고 날라 안전한 곳에 보관하면 되었다. 시시때때로 감상하며 관상조처럼 보관할 수도 있었다.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더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니네이나가 새처럼 자유롭기를 바란다고 하니 그녀의 뜻에 따라 주려고 했다. 그녀는 그가 노력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도, 저렇게 속삭여 오는 것도, 다 그녀를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가이사는 저를 좋아하나요?”

“좋아합니다.”

“저의 어떤 점이 좋아요?”

가이사는 경계하는 얼굴을 했다. 대답을 잘못하면 또 그녀가 화내지 않을까 걱정했다. 니네이나는 쓰리고 아팠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편안하게 말해도 돼요. 나는 가이사에게 화나지 않았어요.”

그녀의 손이 어설프게 시트를 그러쥐는 손을 파고들어 깍지를 끼었다.

“제가 계속 당신 옆에 있어도 됩니까?”

“네. 가이사의 대답이 무엇이든 간에.”

니네이나의 대답에 비로소 가이사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손이…… 작습니다.”

참 뜬금없는 시작이었지만 니네이나는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쥐면 따뜻하고 말랑하고 보드라워서 당신의 손을 만지면 저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녀의 손끝을 툭툭 눌러 보던 가이사가 그의 손바닥 안으로 그녀의 손가락 전부를 삼켰다.

“당신에게서는 싫은 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자장가가 되고 당신의 품은 그늘이 되고 당신의 행동은 즐거움이 됩니다. 그저 그걸 바라보는 게 좋습니다.”

흐리게나마 웃고 있던 그의 입가가 찡그려졌다.

“인간은 말합니다. 힘은 달고 돈은 배부르다고. 본디 욕심이 많은 자들은 탐욕을 그칠 길이 없어 가진 후에는 더 아름다운 것을 탐하는 법이라고.”

예술과 문화의 꽃은 전쟁이 없는 평화기에 피어났다.

“그런데 저는 왜 계속 제자리에 머물렀던 겁니까?”

그의 전쟁은 끝났다.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상처를 입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피워 내지 못했다. 태어났을 적에는 있었을 씨앗이 뿌리 끝까지 썩어 소생하지 못했다. 완전히 망가지고, 부서지고. 야트막했던 희망의 불씨는 어둠에 침몰하여 깜깜한 밤이 도래했다.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냥 그렇게 되어 버린 겁니다.”

“가이사…….”

“괴로움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

“그럼에도, 이런 내게도 기회가 있다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어린 날 접었던 꿈과 희망, 세상의 온갖 밝은 것들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걸.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녀가 그의 손을 붙잡고 있음에 다시 또 살아갈 희망을 되찾고 말았다. 지독한 기쁨이 되어. 사실 가이사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이 감정을 ‘좋아함’이라고 정의했지만 그게 맞는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혹시 매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무거운 바윗덩이가 되어 가느다란 양어깨를 누르며.

그에게 니네이나는 태초의 감정이었고 감동이었다. 가이사는 어쩌면 자신이 인간을 좋아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지금은 불편함이 되었고 더 나아가 괴로움이 되었다. 자신의 이런 점이 부족함이라면 니네이나를 충족하지 못할 게 아닌가? 그가 해 줄 수 없는 걸 그녀가 바라 온다면 그는 고갈한 샘을 애타게 퍼 올리며 영원한 목마름을 그녀에게 선사해야 했다. 니네이나의 갈증은 그의 고통이 될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샘을 끌어올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의 샘이 아니라고 해도, 그에게는 그녀가 이미 그의 샘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그의 모자람이 되어 그녀를 괴롭게 하는 거라면, 그는 이번에야말로 최후의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죽는 것.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쉽고 덜 무거웠으니까.

“이런 건 당신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까?”

가이사는 지금의 자신이 레어노스와의 약속마저 저버리는 생각을 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는 아득한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갈수록 창백해졌고 지쳐 뜨거운 숨결은 가녀린 새처럼 헐떡였다. 그럼에도 정답을 알 수 없었다.

“나로는…… 부족해?”

죽는 건 두렵지 않다. 그러나 그로 인해 올 망각은 무서웠다. 차츰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니네이나가 ‘헉!’ 하며 숨을 뱉어 냈다.

“충분해요. 차고 넘치도록 충분해.”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매다가 두 팔을 벌려 그의 머리를 감쌌다.

“당신이 내게서 받아 간 만큼 나는 당신에게 받고 있어요.”

너에게만 이 관계가 소중할 줄 알았냐며 슬퍼하는 눈동자가 맺힌 이슬처럼 그렁거렸다. 깊은 안도로 그의 숨은 저 밑까지 꺼졌다.

“…….”

그의 입술은 한층 더 신중해져서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안도를 담은 한숨이 또 길게 번졌다. 그녀는 결코 모를 것이다. 방금 전 그녀의 대답이 그의 생과 사를 갈라놨다는 걸. 그는 그녀의 대답으로 살아 봐도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 느끼는 수많은 것들을 말로 표현할 재주가 없습니다. 차라리 보여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똑똑해요.”

“예, 당신은 똑똑합니다.”

짐짓 새침하게 말하던 니네이나에게 그는 진지하게 맞장구쳤다.

“……흠. 당신이 말로 다 하지 못해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에요. 나는 눈치도 빠르고 당신 마음도 잘 읽으니까.”

“제가 부족해서 당신이 내 몫까지 해야 합니까?”

“아니죠. 가이사는 몸으로 하는 걸 잘하잖아요. 나는 말로 하는 걸 더 잘하고. 서로 잘하는 걸 해요. 가이사가 몸으로 표현하면 해석은 내가……!”

그는 갈증의 해소를 위해 입술을 깨물다가 그녀의 목덜미를 빨았다.

“으……!”

성난 짐승처럼 세차게 들이빠는 점막에 살덩이가 꽃처럼 붉어졌다.

“아, 윽!”

니네이나가 도리질하며 신음하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입술을 떼어 냈다. 저질러 놓고 겁을 먹은 것처럼 떠는 남자의 모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연약했다. 그는 니네이나의 눈치를 보며 발개진 목덜미를 살폈다.

“아픕니까……?”

“괜찮아요.”

그녀는 다시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가 하얀 목덜미에 남긴 순흔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가이사가 그것을 바라보는 새 다가온 손길이 그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그리고 입술로 쭉 미끄러졌다. 장난을 치듯 입술을 꾹 누르던 손은 더 아래로 내려가 그의 턱을 살짝 당겨 들었다.

“당신만 괜찮아요.”

“저……만?”

“응. 다른 사람은 다 안 되지만 가이사한테는 허락할게요.”

싱긋 웃으며 내리는 특혜가 달콤하게 귓가를 간질였다. 힘주어 벅벅 긁어내고 싶다가도 해를 입힐까 봐 주저하게 됐다. 그는 지금의 감정을 보관하고 싶었다. 소중히 품어 그만 볼 수 있는 안전한 곳에 놓아두고 싶었다. 힘이 들어가려던 손아귀를 펴 낸 그가 순종적인 아이처럼 눈꼬리를 유순히 내렸다. 옅은 키스 마크는 그녀가 그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증거 같았다. 갑작스레 찾아든 만족감과 미안함 사이를 오가는 그에게 달콤한 목소리가 닿았다.

“가이사랑 함께 있으면 그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이야기?”

“천둥새와 하늘새 사이에서도 새끼가 태어난다는 거 알아요?”

천둥새는 육류를 즐기는 맹금류였고 하늘새는 초식만 하는 최약체 조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둥새는 하늘새를 즐겨 먹었다. 그런 둘 사이에서 어떻게 새끼가 태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실제로 있는 일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응. 천둥새는 포식자고 하늘새는 피식자죠. 둘은 종이 달라요. 그래도 번식을 하죠. 천둥새는 짝으로 점한 하늘새를 절대 잡아먹지 않아요.”

가이사는 그 사실을 흥미로워한 인간 중 하나가 이미 짝지를 이룬 천둥새와 하늘새를 가두고 한 실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먹이를 주지 않은 채 둘만 가둬 둬도 천둥새는 하늘새를 먹지 않는다. 오히려 제 몸을 쪼아 먹이려 했다. 그러나 하늘새는 육식을 전혀 못 하는 새였고 상대적으로 약했다. 먹이를 먹지 않고서는 오래 버틸 수 없는 하늘새가 먼저 죽어도 천둥새는 하늘새의 사체를 먹지 않는다. 그 옆을 지키며 구슬프게 울다가 함께 죽어 갈 뿐이었다. 그건 짝을 하나밖에 두지 않는 천둥새의 본능 탓이었다.

“온갖 새를 다 잡아먹고 다니는 하늘의 흉악범도 짝짓기 상대는 먹지 않아요.”

아. 가이사는 그제야 니네이나가 전달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이사는 원래 단 하나뿐인 존재예요. 어디에도 완전히 합치하는 개체는 없죠.”

그녀는 이다지도 맑았다. 이러니까 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달래지 않아도 그는 그녀를 해칠 수 없었다. 아마 니네이나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상처를 염려해 필사적으로 설득하는 마음이 달았다. 지독한 단맛에 식욕이 돋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가이사도 동족이 아니라서 어쩐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요. 가이사가 인간이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가이사도 날 안 먹을 거잖아요?”

가이사는 순진한 눈을 반짝이는 니네이나를 보며 ‘먹는다’의 정의를 잠시 고민했다.

“……저는 원래 식인은 하지 않습니다.”

약간의 틈을 두고 그가 대답했다. 그 미묘한 시선을 느끼지 못한 니네이나가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유가 그렇다는 거죠.”

“그럼 당신은 제 교미 상대가 되어 주는 겁니까?”

“교, 교, 뭐, 뭐요?”

“비유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양 뺨을 붉게 붉힌 니네이나를 나른하게 감상하던 그가 뻔뻔스레 말했다. 자기가 한 말이 있는 니네이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혼란스러워했다.

“짐승이든 인간이든 본디 날것의 본능이 가장 앞서는 법입니다. 이를 테면 교미 같은 짝짓기 본능을 행한 수컷은 암컷 앞에서 가장 얌전……”

니네이나는 재앙의 입술이 더한 사고를 치기 전에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나보다 1004년이나 일찍 태어났으면서. 도둑이네요, 가이사.”

그런 식으로 나이를 지적받을 줄은 몰랐던 가이사의 눈썹이 일순 크게 꿈틀거렸다. 이건 기분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와 다르지 않은 절박함이었다. 가이사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제 나이는 스물네 살이 맞습니다. 육체의 성장은 1000년간 완벽히 정지되어 있었고 아직 젊습니다.”

그는 정색하고 호소했다. 니네이나가 늙었다고 차 버릴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육체의 강건함이 문제 될까 염려하시는 거라면 몸으로 증명하겠습니다.”

“뭐, 뭘 증명하겠다고 그, 그래요!”

무슨 상상을 했는지 얼굴이 딸기처럼 변한 니네이나가 입술을 새초롬하게 적시며 그의 몸을 한차례 훑었다. 봄바람 같은 설렘과 야릇한 떨림이 묻은 눈길이 묘했다.

‘싫어…… 아니, 좋아하는 건가?’

의문을 품은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들어 입술로 물었다. 그녀를 시험하는 악마의 뱀처럼 축축한 혀가 손바닥뼈를 뜨겁게 가로질렀다.

“으…… 홀리지 마요.”

하아. 남자의 달뜬 숨결이 손가락 틈의 여린 살까지 번졌다.

“들어주기 싫은 부탁입니다.”

믿기 어려울 만큼 단호한 대답에 니네이나의 눈이 커졌다. 이제 그녀에게 그의 거절은 낯설었다.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간신히 글자 하나를 만들었다.

“왜……?”

“홀려 놓으면 제게서 눈을 못 뗄 게 아닙니까?”

가엽도록 순진한 물음에 가늘게 뜬 눈동자가 붉은 광월의 달빛처럼 요사스럽게 번졌다.

“지금처럼.”

지금이 무척 마음에 들어. 그렇게 말하듯 흉포한 낯을 감춘 남자가 배부르게 웃었다. 반달로 접힌 눈에서 말 그대로 눈을 떼지 못하던 니네이나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깃들었다.

“그만 빨, 아, 아니…… 손가락은 이제 그만…….”

“놓아드릴까요?”

그는 선선히 손을 놓아줬다. 그러나 그만큼 바싹 붙어 그녀의 체향을 흠뻑 들이켰다.

“그럼 이제 어디를 핥으면 됩니까?”

“무, 무슨…….”

“핥고 빨아도 된다고 하신 건 당신입니다.”

“제가요?”

당최 처음 듣는 말에 그녀가 어리둥절하자 그는 기억해 보라는 듯 달콤히 웃었다.

“몸으로 표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마음을? 물고 빠는 것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겁니다.”

“…….”

“저는 당신이라면 어디든 기쁘게 핥을 수 있습니다.”

탐욕의 독을 머금은 혀가 다가올 먹이를 기대하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무표정하다 못해 금욕적으로 보이는 흰 얼굴에 붉은 기가 감도니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요요한 눈가가 그녀의 몸을 차츰 핥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에 온몸이 왈칵 젖어 드는 것 같았다.

“그, 그런데!”

니네이나는 반쯤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너무 몰았나?’

닳고 닳아 수치나 부끄러움쯤은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 그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가이사는 아쉬워하면서도 어린 연인을 위해 자제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필사적인 화제 전환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담백하게 돌아간 그의 눈빛에 그녀가 안도하는 것까지 그는 다 지켜보았다.

“무엇이 말입니까?”

“가이사의 아버지요. 가이사와 1000년 동안 함께 있었다고 했는데, 그럼 제게 마법은 언제 걸었다는 거죠?”

“저도 그것이 의아합니다. 분명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데.”

“자느라 몰랐던 거 아니에요?”

하나의 심장을 공유한다는 건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전달받을 수 있는 기억에 한계가 있다고는 하나 떨어짐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가이사는 자신의 육체와 레어노스의 정신이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정말 떨어진 적이 없다면 소멸한 레어노스가 어떻게 니네이나에게 마법을 걸었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납득하고 말았다.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일을 복잡하게 몰아 니네이나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겨 주느니 의혹을 아예 제거해 버리는 쪽을 택했다. 무의식적인 우선시였다. 레어노스와의 과거보다 현재의 삶을, 그리고 니네이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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