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되찾아야 할 때 (1)
약속대로 칼리탄과 아실로는 세이아 저택에서 사흘간 머무르고 떠날 준비를 했다. 의외였던 건 둘이 같은 마차를 타고 떠난다는 점이었다. 호위를 둘로 나누는 게 꺼려져서는 아닐 테고. 아실로를 미워한다는 사실에 약간의 미안함을 품고 있는 칼리탄이 아실로를 방패로 삼겠다고 생각했을 리도 없는데. 더욱 의외였던 건 아실로가 칼리탄을 두고 먼저 마차에 훌쩍 올랐다는 것이다.
“황자님,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인사도 안 하고 떠나려는 아실로에게 살살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돌아오는 건 역시나 냉대였다. 쾅! 다소 사납게 마차의 문이 닫혔다. 나는 역시 저 황자님께 미움을 받고 있었다.
‘왜지?’
집주인인 루베니오가 바쁜 일정상 먼저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나는 의아함을 숨기고 맡은바 책임을 다해 끝까지 살갑게 웃어 주었다. 그나저나 아직 마차에 오르지 않은 칼리탄이 남아 있었다. 그는 닫힌 문을 조금 당황스럽게 바라봤다.
“말이라도 한 마리 빌려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꽤 괜찮은 제안이었는지 솔깃한 얼굴을 하면서도 칼리탄은 고개를 저었다. 칼리탄과 아실로 사이에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뭐야. 진짜 사이좋아진 건가?’
원작에서 아실로는 황후와 칼리탄 사이를 저울질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황후의 몰락에도 칼리탄의 비상에도 등 돌린 채 제도를 떠나 버렸다.
“그것보다 저 하녀를 내게 주는 건 어떤가?”
칼리탄이 메이아를 눈짓하며 말했다.
“하녀요?”
내 연기는 완벽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메이아를 바라봤다. 물론 속마음은 기대로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드디어 말랑말랑한 기류가 흐르는 건가! 그런데.
“헉.”
나는 밖으로 새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공손히 허리를 굽힌 메이아가 눈만 위로 치켜떠 칼리탄을 역적 놈 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메이아의 눈빛이 매우 불손했다. 미래의 연인을 바라보는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아니야. 틀려. 역적은 너야, 메이아. 황태자에게 향하기에는 매우 불순한 눈빛이라서 나는 은근슬쩍 메이아를 내 몸으로 가렸다. 그러자 ‘주인님이 나를 구해 주셨어!’라는 듯 반짝거리는 눈빛이 등에 꽂히는 게 느껴져 부담스러웠다.
“메이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하녀의 청각 마법은 제법 쓸 만해 보이더군.”
“청각 마법이요?”
메이아의 특기는 땅을 이용한 대지 마법이 아니었나?
“공격 마법도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세작으로 쓰면 알맞겠어.”
야 이 남주야, 너도 틀렸어! 여주를 사지로 보내려는 거냐! 맙소사. 이제 이게 어떻게 꼬였는지 알겠다. 메이아는 그동안 어떻게 알았는지 내게 정보를 물어다 주기 시작했다. 내가 그걸 칭찬했더니 메이아는 엿듣기 마법이라고 해도 좋은 청각 마법을 연마했고, 뜻하지 않은 재능을 발견한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주를 세작으로 쓰겠다니!
메이아처럼 겁 없는 애를 세작으로 보냈다가는 필시 죽어 돌아올 것이다.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기대하고 사흘이나 메이아를 빌려줬는데 왜 이 꼴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여주와 남주의 매력을 너무 과신한…… 설마? 결단코 부정하고 싶은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라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일단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빽 외쳤다.
“메이아는 안 돼요!”
“주인님…….”
내 말에 칼리탄은 눈썹을 들썩였고 메이아는 촉촉한 눈빛을 보냈다.
“이걸로 사흘은 끝이에요. 만족할 만한 사흘이 되셨기를 바랄게요.”
길게 늘여 봤자 내용은 이만 떠나라는 축객령이었다.
“신세를 졌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연락하도록 해.”
메이아와 나, 둘 중 어느 누구에게 남기는 것인지 모를 말을 마지막으로 칼리탄이 떠났다. 나는 황궁의 마차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메이아, 너 전하의 말을 엿들으려던 건 아니지?”
내가 숨 쉬지도 않고 물어보자 메이아가 눈을 크게 뜨고 억울하다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에요, 주인님! 황태자 전하께 그런 건 아니었고 다른 곳에서 쓰는 걸 그분이 우연히 보신 거예요.”
뭐야? 별거 아니잖아. 이걸 빌미로 칼리탄이 내 소원을 빼앗아 갈까 봐 일순 가슴이 섬뜩했는데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그래?”
“그럼요, 주인님. 제가 어떻게 감히 거짓을 고하겠어요?”
메이아의 눈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솔직하고 강인한 눈동자였다.
“사흘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고?”
“자세히 보지는 못했는데 아실로 황자님께서 종종 다녀가셨어요.”
사심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충직한 답변이었다. 아니, 너네 둘 사이에 말랑말랑한 기류는 없었냐고.
답답했지만 하녀와 황태자 사이를 그런 식으로 의심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이다.
“흐음…….”
적어도 메이아는 아무 감정이 없는 게 확실한데 칼리탄은 잘 모르겠다. 흥미를 느끼는 건 확실한데 칼리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둘이 사랑에 빠지는 걸 기대한 건 아니니까 조금 더 시일을 두고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침 드실 시간입니다.”
저 멀리서 걸어오던 가이사가 ‘밥 먹어라!’ 하며 나를 불렀다.
“오늘의 가이사는 꼭…….”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며 뚱하게 바라보는 거구의 사내에게 차마 엄마 같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훠이훠이. 나는 고개를 부르르 털어 거친 상념을 지워 냈다.
“벌써 20분이나 경과했습니다.”
내가 꾸물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가이사가 어서 가자며 나를 재촉했다.
“언제는 매일 시간을 지켰다는 것처럼 말하네요. 자느라 아침 거를 때가 더 많은데.”
“자는 건 괜찮습니다. 별것도 아닌 걸로 미뤄지는 게 싫은 겁니다.”
별것도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마차(특이 사항: 황족이 둘이나 타고 있는, 말 8마리가 끄는 거대한 황궁 마차)의 꼬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저 마차의 중요도가 내 아침보다 못하다니 어째 기분이 황송해지네요.”
겸손해져야 할 순간 같아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숙였다.
“갑시다.”
좀 갑시다, 가요! 그런 식으로 말하며 그가 맨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나와 같이 붙어 지내며 그는 맨손일 때가 늘었다. 씻고 나서도 꼬박꼬박 두꺼운 가죽 장갑을 덧씌우던 손은 붉은 기 없이 깨끗했다. 혹시 잘못 닿기라도 하면 병적으로 손을 씻어 내 내내 부르터 있던 손이 이제는 말끔했다. 서늘한 가이사의 체온이 바로 느껴져서 좋았지만 나는 괜스레 툴툴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가이사의 손은 날이 추워지니 소용없네요. 이제는 내가 내 체온을 나눠 주는 거예요.”
“그 말은 날이 따뜻했을 때에는 제 손이 좋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까지는 안 말했어요.”
“그렇게 들립니다.”
“자기 좋을 대로 듣기는. 그냥 가이사가 나 아플 때 이마 만져 주는 게 생각난 것뿐이거든요!”
부끄러워서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었다. 내가 보폭을 크게 벌리든 씩씩하고 힘차게 걷든 남자는 큰 무리 없이 쫓아왔다.
“계속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흘긋 돌아보자 바로 옆에 서서 걷고 있는 가이사가 보였다. 건조한 말투, 딱딱하게 굳은 뺨, 좀처럼 웃을 줄 모르는 입술. 그 모든 건 예전과 같았다. 나와 처음 만났던 과거의 가이사. 시간의 변화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 얼굴을 보는데 웃음이 피식 났다. 그를 형성하는 서늘함이 더 이상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가능한 한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오래 생각하던 가이사가 머뭇거림 없이 덧붙이는 말에 나는 서둘러 눈을 피했다. 혹시 내가 흘긋거린 걸 알아챌까 해서였다.
“뭘요?”
“아프지 마세요. 당신이 아프면 기분이 정말 별로입니다.”
날이 많이 싸늘해졌다. 따뜻한 가을볕은 여전했지만 북풍 냄새가 진해졌다. 나는 찬 바람이 휭 나뒹구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어느새 조금 말라 버린 잔디를 내려다봤다. 가이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왔다. 나는 내가 뭘 보든 신경 쓰지 않던 예전의 가이사를 또 잠시 떠올렸다. 곧이어 죽은 생선 같던 눈동자 위로 조금이나마 온기를 띠고 반짝거리게 된 눈망울이 떠올랐다.
“곧 겨울이 올 모양입니다.”
아. 겨울이 오는구나. 아침이라 유난히 서늘한 것이기를 바랐던 내 가슴이 선득하게 젖었다. 원작의 니네이나가 죽어 버린 그 계절을 상기하던 그때, 가이사가 말했다.
“오늘은 날이 유난히 쌀쌀합니다. 외출은 자제하시는 게 좋겠어요.”
“싫다. 이제 겨우 밖으로 나오는 건데.”
내색하지 않으며 불평을 터트리자 그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겼다.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날이 따스해지면 또 나오면 되니까.”
추운 겨울 놀이터에서 놀겠다고 떼쓰는 어린애를 달래는 얼굴이었다. 자상한 오빠 같기도 했다. 가이사가 나보다 연상임을 몰랐던 건 아니나 오늘은 그것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
나도 정말 그러고 싶었다. 날이 따스한 봄날, 푸른 잔디를 가볍게 밟으며 향긋한 풀 냄새와 편안한 봄볕 냄새를 만끽하고 싶었다. 누구보다 그것을 원하는 건 나일 것이다. 그러나 샘솟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응. 그렇죠.”
환하게 웃자 그의 눈빛이 멀리서 본 거대한 성운처럼 반짝였다. 좀 더 확실한 온기였다. 그래. 그거면 됐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식당에 앉았는데 웬일로 가이사도 식기를 같이 들었다.
“가이사도 같이 먹으려고요?”
“전에 한번 먹어 보니 나쁘지 않더군요. 앞으로는 같이 식사할까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내 연어 스테이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잘게 잘라 주려는 것 같아서 그대로 나뒀다.
“그럼 이건 내가…….”
나는 가이사 앞에 놓인 소고기 스테이크를 가져왔다. 누구는 소고기 주면서 나는 연어라니. 연어가 싫은 건 아니지만 내 기준으로 봤을 때는 소고기만 못했다.
“육고기는 당분간 금지입니다.”
연어를 썰던 가이사가 나이프를 세우며 눈을 서늘하게 떴다. 번뜩! 그의 손에 있는 한 웬만한 보검보다 가치 있을 나이프의 날이 선연하게 빛났다.
“……잘라 주겠다고요.”
체했다고 말 한 번 잘못했다가 고기를 금지당한 날이 떠올랐다.
“제가 잘라도 됩니다.”
“연어야말로 제가 자르면 되는데요. 질기지도 않고.”
“저는 잘라 주고 싶어서 자르는 겁니다.”
바보 아니야? 이쯤 되니 의심스러워서 가늘게 노려봐도 그는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뭘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저도 그래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하며 스테이크를 썰어 봤다. 오. 과연 성물이라는 게 대단해서 잘도 썰렸다. 전보다 확실히 속도가 빨랐다. 내가 웃으며 집중하자 그가 시선을 떼어 내는 게 느껴졌다. 나는 3초쯤 속으로 시간을 세다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웠던 나이프를 다시 비스듬히 내린 그가 연분홍색의 연어 스테이크 조각을 가지런하게 줄 세웠다. 성격만큼 깔끔한 마무리에 삐죽삐죽 썰어 놓은 스테이크가 살며시 부끄러워졌다.
‘다시 자를까? 끝에만 살짝 자르면 되겠는데.’
나는 다시 고기를 써는 것에 집중했다. 괜히 몇 번 더 날을 대자 조각이 너무 작아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잘게 썰려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실수…….”
이걸 어쩌나 싶어 그를 쳐다봤다. 한 손으로 턱을 괸 그가 비스듬히 몸을 비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저렇게 보고 있었지? 내가 그의 스테이크를 작게 썰기 전 이미 다 썰려 있던 연어들이 떠올랐다. 집중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시선 조각이 모서리가 둥근 별 모양으로 변해 뺨을 따닥따닥 때리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이건 그냥 치우고 다시……”
가이사는 아무 말 없이 포크를 뻗어 내가 반쯤 으깨 놓은 스테이크를 찍어 가져갔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될 작은 조각을 말없이 씹는 얼굴은 늘 그랬듯 무덤덤했다.
“그만 놀고 드세요. 식겠습니다.”
그의 팔이 엇갈리며 접시 두 개의 자리를 서로 맞바꿔 놓았다. 네 살배기 어린아이가 먹을 법한 고기 조각을 그는 하나하나 천천히 찍어 먹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치아가 맞닿았다 떨어지며 부지런히 고기를 물어 넘겼다.
미려한 남자는 명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처럼 생생했다. 나는 그를 조금 더 지켜보다가 연어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촉촉한 살코기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연어도 나쁘지 않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한 접시는 다 비워야 합니다.”
“이 정도쯤이야. 저 원래 잘 먹어요.”
나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이었다. 여기 와서 좀 못 먹기는 했지만 원래의 난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과식하지는 말고요.”
“가이사 그렇게 안 봤는데 갈수록 잔소리꾼이 되는 거 알아요?”
조용히 포크질 하던 그가 손을 우뚝 멈췄다.
“그렇군요. 갈수록 걱정이 늘어납니다.”
쯧쯧, 이걸 두고 안심할 수나 있겠어? 데리고 살 생각을 하니 골치가 아프군. 마음의 소리가 눈빛과 표정에 담겨 전달되었다. 누가 걱정하랬냐고 소리칠 수는 없었다. 나는 괜히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앞에 있는 샐러드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스테이크를 먹기 전에 덜어 먹고 남은 것이었다. 킬킬. 그를 놀릴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고기만 먹지 말고 채소도 좀 먹어요.”
나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의 앞 접시에 채소를 소복이 쌓았다. 남은 샐러드를 싹싹 긁어 얹어 놓으니 하얀 접시 위에 쌓인 채소 탑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편식은 나쁜 거예요, 가이사.”
잔소리에는 잔소리로 승부하는 게 최고였다.
“저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상대가 잔소리로 듣지 않으면 소용없겠으나.
“왜 말이 그렇게 되죠?”
덤덤하게 넘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다른 반응이라 나는 당황하여 물었다.
“그렇게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과연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데에는 가이사가 일인자였다.
“나는 지금 당신을 놀린 거란 말이에요. 좀 더 반응이 있어야죠.”
“……이를테면 어떤 걸 말입니까?”
“인상을 쓰고 채소를 노려본다든가?”
나는 이게 맞나 고민하면서도 턱을 새침하게 들었다. 그가 즉각 내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싸늘한 붉은 눈이 섬뜩한 기운을 머금고 수줍게 쌓아 놓은 채소 더미를 노려봤다.
“풉! 그건 살기가 지나치잖아요!”
나는 그 모습이 웃겨서 깔깔거렸다. 내 손이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찰싹 때리려 했다. 노려보는 것에 집중하던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내 손을 붙잡았다. 즉각 반응하는 몸짓이 소름 끼치도록 빨랐다. 눈이 마주쳤다. 냉랭한 눈동자가 시시각각 변했다. 너였어? 그렇게 말하듯 차츰 무심히 돌아가던 눈동자가 은은한 온기를 썼다. 사계절을 담은 붉은 노을을 빠르게 돌려 보는 기분이었다. 묘묘한 눈빛에는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쇠망치에 뒷머리를 후려 맞은 듯 뇌가 울렸다. 속절없이 끌려가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내 손…… 안 놔줘요?”
“아.”
손목을 움켜쥐었던 그가 나직한 신음과 함께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쓱 내려간 눈이 내 손목을 꼼꼼히 훑어보다가 곧 문제없다는 판단을 내리는 게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이미 확인했으면서 나한테 다시 물었다.
“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을 놔줬다. 허공에서 머뭇거리던 내 손은 잠시 뒤 얌전히 허벅지 위로 내려왔다. 세게 쥔 건 아니었다. 몸을 틀어 내는 것과 동시에 내 눈과 마주쳤고 내 손을 잡기 이전에 이미 힘이 풀렸으니까. 그런 사람이니 내 손목을 붙잡지 않으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굳이 손목을 붙잡았을까? 그도 나처럼 무언가에 홀리어 멈추지 못한 걸까? 팔랑거리는 나비를 무심코 따라가고 마는 어린애처럼 말이다.
‘으으. 이거 뭐야……?’
부끄러움이 물씬 밀려와 나를 물들이려 했다. 몸서리나도록 달콤한 감정이었다. 내가 쌓아 놓은 채소를 소처럼 해치우는 남자에게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렇게 있으면 계속 그를 흘긋거리다가 식사가 끝날 것 같았다. 나는 포크를 꼭 쥐고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했다. 그는 원래도 말이 많지 않으니 내가 입을 다물면 주변은 저절로 조용해졌다. 식사하는 소리 외에는 조용한 테이블이 불편하지 않고 따뜻했다. 무엇 하나 막힘없이 흐르던 시간 속에서 이상을 감지한 건 내가 먼저였다.
‘왜 이러지?’
코끝이 알싸하게 변하더니 열이 몽글몽글 모여 열꽃을 피우는 기분이 들었다.
‘가이사를 생각하느라 정말 체하기라도 했나? 가슴이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속이 울렁거리며 식도가 아릿해졌다. 나는 울컥 올라오는 느낌에 놀라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약간…….”
입술을 약간 열자 턱 바로 위 목구멍에서 일렁거리던 게 확 솟구쳤다.
“우웁!”
휘청 흔들린 내 몸이 테이블에 있던 포크를 툭 쳤다. 챙그랑! 떨어진 포크처럼 내 몸도 바닥에 나뒹굴려 할 때였다.
“니네이나!”
창백하게 질린 가이사가 내 몸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서럽고 괴로워 보여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손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독이구나.’
힘없이 이지러지는 내 손을 그가 꼭 붙잡았다.
“주인님!”
“의원을 불러와!”
소란이 척추를 까집고 골수로 흘렀다. 뇌는 물론 사지의 신경을 밟아 으스러트리는 감각에 속이 또 한 번 울렁거렸다. 고막이 물에 잠긴 것 같았다.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소리 대신 나는 너무 어지러워 뿌옇게 변한 시각에 의존했다. 시체처럼 허옇게 뜬 가이사의 얼굴이 입술을 벙긋거리며 소리쳤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외치니 들어 주는 것만이라도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깨진 조각처럼 연약한 표정은 이상하리만큼 잘 느껴졌다. 저런 얼굴은 처음인데 반갑지가 않네.
있잖아요, 나 하나만 더 부탁할게요. 슬퍼하지 말아요. ……미안해요.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내가 제대로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청각을 잃고 또 그렇게 시각마저 뺏겼다. 알량하나 지독하게 애틋했던 바람도 희끄무레해졌다.
* * *
참혹한 얼굴을 한 가이사에게 루베니오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죽을 줄은 몰라서 칼리탄에게 맡긴 소원을 처리하지 않은 게 한이었다. 한이 이렇게 큰데, 이승에 돌아가 귀신으로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눈을 떴다.
“…….”
다행히 지옥은 아니었다. 지옥이라면 이렇게 편하게 누워 있을 리 없으니까. 하긴, 아직 지옥에 갈 만큼 잘못된 일을 하지는 않았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천국에 가이사를 닮은 천사가 있다는 것이다. 옆에서 보나 앞에서 보나 가이사는 아주 잘생긴 악마 상이었다. 판타지 세계에 걸맞게 마왕이나 마신의 외모에 빗대면 딱인데, 천사라니. 혹시 이건 수호천사 같은 게 아닐까? 내 바뀐 취향을 반영해 준 천국의 호의라든가? 와. 내가 그렇게까지 착한 일을 많이 했던가? 그런데 저 천사는 천사 주제에 표정이 왜 저렇게 음침한 거야?
“아…….”
“기도가 많이 부었습니다. 아직 말하지 마세요.”
머리칼은 시커멓고 눈은 새빨갛고 피부는 하얀 악마 같은 천사가 말했다. 천국에서도 몸이 아픈가? 목구멍은 그렇다고 쳐도 눈이 퉁퉁 부어 따가웠다. 게다가 목도 말랐다.
“무……울…….”
내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탁한 목소리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몇 번 눈을 깜빡거리자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목이 마르십니까.”
응. 물부터 줘. 목이 너무 말라. 그런 의미를 가득 담아 그를 바라봤다. 천사가 아니고 진짜 가이사였다. 독을 먹고 죽은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와. 내 몸이 독을 이겨 내다니! 성물의 힘은 대단해!
나는 감탄하며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까딱할 수 있는 게 눈밖에 없었지만 묘한 기쁨이 흘렀다. 잘했다! 내 몸! 내가 스스로를 칭찬할 때 가이사는 물을 들고 음침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이 찻잔으로 쓸 법한 작은 잔이 내 입가에 스르르 기울어졌다. 쪼르르. 과연 가이사는 요령이 좋았다. 숙련된 손길로 잔을 기울이니 물이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입으로 쏙 들어왔다.
“쿨럭!”
그러나 나는 삼킬 수 없었다. 갈증이 거세 물 한 방울이 달게 느껴지는데도 까끌해진 목구멍으로는 잘 넘어가지 않았다. 입가로 주르륵 흐르는 물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물도 못 먹냐! 비루한 몸뚱이 같으니! 나는 아까까지 몸을 칭찬했던 걸 잊고 다시 내 몸을 욕하기 시작했다. 잔을 치운 가이사가 남아 있던 물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
내가 옅은 배신감을 느끼기 무섭게 그의 팔뚝이 내 머리 위를 짚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입술이 열로 뜨거운 내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쪼르르 흘러들어 오는 맑은 샘에 애가 탔다. 나는 바싹 마른 혀끝을 움직여 그를 환영했다. 좀 더 달라고 그의 입술을 야금야금 깨물고 재촉해도 그는 아주 천천히 흘려보냈다. 쩍쩍 갈라진 점막 위를 축축한 혀가 핥아 적셨다. 타는 듯한 갈증은 여전했지만 숨결에는 습기가 배어 나왔다.
쪽. 내가 힘을 주어 붙잡는 바람에 그의 입술이 빨리며 젖은 소리를 냈다.
더 줘. 애절한 눈빛을 읽은 그가 땀에 젖어 붙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
“더…….”
“이따 다시 드릴게요.”
나는 의구심을 잔뜩 실어 그를 바라봤다.
“약속합니다.”
굳은 절개와 딱딱한 신의에 나는 결국 조르는 걸 멈춰야 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한 번은 봐주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죽여도 됩니까?”
“컥!”
겨우 정신 차리자마자 무슨 소리야?
“타르시 세이아. 필시 그가 범인일 겁니다.”
섬뜩하도록 정적인 얼굴이 분노로 이글거리며 그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한 말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안 돼요.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됩니까.”
“고통…… 그냥 죽이면, 안…… 돼…….”
내가 원하는 만큼 괴롭혀 준 다음에 죽음이라는 안락을 허락할 것이다. 가이사가 멋대로 끝내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런데 숨이 자꾸 벅찼다. 졸음이 몰려왔다.
“안 돼요…….”
내가 이대로 잠들면 그가 떠날까 봐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힘이 없어 자꾸만 미끄러지는 내 손을 그가 단단히 맞잡아 줬다.
“……알았으니까 그만 말하세요.”
그는 내 배를 도닥거려 주며 예의 그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냥 자기에는 무척 신경 쓰이는 눈빛이었는데 눈꺼풀이 무거워서 깜빡 졸았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뜬 것 같은데 그가 다시 입을 맞추고 있었다. 먹이를 나르는 어미 새처럼 시원한 물만 주고 떠나려는 게 아쉬워서 몇 번 할짝거리자 움직임이 더 다정해졌다. 나는 몇 번을 자다가 깼고 그는 그런 내 옆을 지켜 주며 물을 주고 지친 내 손을 붙잡아 주었다.
그날, 세이아의 영지 중 한 곳에 멀리 내려가 있던 루베니오가 서둘러 돌아왔을 무렵에는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루베니오와 가이사가 나를 둘러싸고 앉아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하더군.”
“버섯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평소 버섯을 먹는 걸 많이 보았는데 그때까지는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랑이 버섯에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니까. 니네이나의 식단에는 당연히 올라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말해 두었고 흔한 버섯도 아니라서……. 이건 내 실수다. 설마 그런 걸 노릴 줄이야.”
랑이 버섯은 천공 바로 아래의 절벽에서만 자라는 버섯으로 10년에 1cm는 자랄까 말까 한 희귀한 버섯이었다. 그런 것에 알레르기가 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내 식사는 무엇보다 까다롭게 관리되지만 독 반응 검사로 사람마다 다른 알레르기까지 잡을 수는 없었다.
“그것 외에는 괜찮았나?”
“독은 확실히 없었습니다.”
그런데 독이 아니라니. 먹고 쓰러지는 사이 이건 필시 중독이라고 생각했는데. 알레르기로 대체 몇 번을 고생하는 건지 모르겠다.
“알고 있는 사람이 몇 없는 정보다.”
“간자가 있다는 소리입니까?”
“따로 짚이는 바가 있다.”
루베니오의 목소리가 얼음장같이 찼다. 꽁꽁 언 얼음물을 정수리 바로 위로 씌우는 냉기에 눈이 번쩍 떠졌다.
“니네이나!”
“괜찮으십니까?”
둘이 동시에 말을 걸었다.
“네. 살 만……하네요.”
나는 물을 바라며 주전자가 놓인 협탁을 바라봤다. 내 시선을 먼저 눈치챈 가이사가 잔에 물을 따라 마셨다. 그러고는 흠칫했다. 루베니오가 쟤 대체 뭐 하냐는 듯한 얼굴로 가이사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이 미친 자야……. 내가 얼굴을 가리고 모른 척하는 사이 루베니오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이 말랐나?”
“……아닙니다.”
찔리는 게 있을 가이사가 루베니오의 눈을 피하며 얌전히 눈빛을 아래로 떨구었다. 뭔가 찝찝한 게 있었는지 루베니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곰곰이 고심하는 눈동자가 정답을 찾아낼까 봐 두려웠다.
“물…….”
다급해진 내가 작게 웅얼거리자 루베니오가 가이사의 손에서 주전자를 강탈했다. 새 컵에 물을 담은 루베니오가 내게 물컵을 건네며 상냥히 웃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렴. 조심하는 게 좋다고 하더구나.”
“네.”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마시자 루베니오의 관심이 나에게로 기울었다. 살렸구나. 다행이다. 나는 안도하며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이제는 목도 조금 회복되어서 혼자서도 물을 잘 삼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짓인가요?”
루베니오와 가이사는 범인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경로로 이런 짓을 했는지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랑이 버섯은 네가 복용하는 알레초보다도 희귀한 것이라 사는 사람이 많지 않지. 타르시는 얼마 전 그것을 구입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증거도 되지 못했다. 타르시가 랑이 버섯을 먹으려고 샀다고 하면 그만이었고, 설령 내게 먹인 걸 들켰다고 해도 알레르기가 있는 걸 몰랐다고 하면 끝이었다.
‘교묘한 수법을 쓰네.’
그쪽도 눈 뜬 장님이 아닐 텐데 아무 짓도 안 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아무 계략이 없었다면 그것대로 수상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 맞을 줄은 몰랐지만.
“버섯 향이 독특한 편이라 두 번은 못 쓸 거예요.”
박하 향을 닮은 알싸한 냄새를 기억했다. 버섯 중에서도 향이 유난히 강한 편이라 두 번 당할 염려는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회복했잖아요.”
나는 표정이 풀리지 않는 그들에게 일부러 웃어 보였다. 내 기분이라고 썩 좋은 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인간성과 범죄에 대한 고리타분한 갈등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악의는 본래 악의로 보답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선물을 받았으니 이쪽도 선물을 보내 줘야겠네요.”
준비한 선물이라면 우리에게도 있었다. 답례를 해 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우선 길리안이 살아 있음을 황후에게 알려 주는 것으로 시작할까요?”
받은 만큼 돌려준다? 웃기는 소리였다. 몇 배로 돌려주든 한번 받은 건 뼈아플 뿐이다. 그나마 되갚음이 크면 분풀이가 되겠지만. 내 선물은 하나가 아니거든.
* * *
니네이나는 길리안을 한적한 집에 데려다 두었다. 평민들이 함께 모여 사는 마을의 말 그대로 평범한 집이었다. 니네이나는 가이사에게 길리안을 사용할 곳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를 그곳에 둘 생각이라고 했다. 좀 더 알맞은 순간이 올 거라고 말하며.
─생각보다 이르기는 하지만 지금이 적기네요. 아끼다 패가 쓰레기로 전락하면 안 되잖아요?
니네이나는 처음보다 일을 서둘렀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최대한 빠르게 이 일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냥 내게 맡기면 될 텐데.’
가이사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몸은 어느새 그녀의 의지대로 따라 주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타르시를 처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솟구쳤으나 그는 그녀의 말을 거역하기가 어려웠다. 웬만한 건 다 들어주고 싶다는 애틋함 때문이었다.
“…….”
눈에 띄지 않아 쓱 지나칠 만한 길목의 작은 집 지붕 위로 흉신이 내려앉았다. 어두운 밤에 보면 더 시커멓고 스산한 정수리가 음침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니네이나가 봤다면 사신이 온 줄 알겠다며 경악했을 표정이었다. 머릿속이 짜증으로 가득 차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스스로 만든 침묵이 불편하여 그는 짜증스레 발을 굴렀다. 집 문 앞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는 잠깐의 지체도 없이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콰직! 챙! 열쇠도 사용하지 않은 그의 손에 무식하게 뜯긴 문고리가 달랑거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쇠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에 놀랐는지 안에 있던 길리안은 주춤 일어나고 있었다.
“아으! 아아!”
가이사는 달아나려고 몸을 돌린 길리안의 뒷목을 순식간에 잡아챘다. 두꺼운 장갑을 낀 손이 길리안의 목을 졸랐다. 뿌드득. 목과 턱을 뼈가 부서질 것처럼 덜컥거렸다. 진득한 살기를 느낀 길리안이 실금하며 몸을 덜덜 떨었다.
퍽! 콰당탕! 더러움을 참지 못하고 길리안을 던져 버린 가이사가 방 안에서 이불을 가져와 길리안을 둘둘 싸맸다. 길리안을 등에 짊어진 가이사는 바람길을 이용해 황궁으로 향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음…… 적당히 화려하게!
얼굴을 가린 가이사는 니네이나의 말을 고심하며 황궁 터 바로 위의 하늘에 서 있었다. 사실 이런 고민을 하는 시간도 아까웠다. 가이사는 제 식대로 해치워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는 일부러 지상으로 접근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를 발견한 기사들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저놈 뭐야!”
“완전 미친놈 아니야! 황궁에 정면으로 쳐들어오다니!”
가이사는 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기사들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황후가 쉬고 있을 황후궁이 그의 목표였다. 마침 잘됐다. 황후궁 안에 황제가 같이 있는지 경비가 삼엄했다.
“후나.”
계약자의 의지를 들은 정령이 익살맞은 표정을 지은 채 본신(本身)으로 나타났다.
[ßʼn ßþĿĸ!]
거대한 화염 도마뱀은 신이 났는지 뾰롱뾰롱 소리를 내며 볼을 한껏 부풀렸다. 후나가 삼켰던 숨을 뱉어 내며 거대한 불꽃을 일으켰다.
“윽!”
열기를 피하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물러난 기사들 사이로 가이사의 신형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거대한 불꽃 회오리는 앞으로 쭉 뻗어 나가 황후궁을 집어삼키려 했다.
쾅! 오색찬란한 빛을 품은 황후궁의 투명한 보호 마법이 즉각 발동했다. 호승심이 돋은 후나가 발을 탕탕 구르며 즐거워했다. 정령이 날뛰기 시작하자 견고한 보호 마법의 수호진이 까득 맞물리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방어막을 즉각 내려치는 열기에 보호막에도 금이 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분노한 황제가 황후궁에서 뛰쳐나왔다. 황후도 그의 옆에 함께 있었다.
“피하셔야 합니다!”
가이사는 기사들이 두 황족을 피신시키기 전에 황후를 향해 길리안을 내던졌다. 그 순간 후나의 몸에서 기다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방으로 뻗친 불꽃은 화려한 불의 꽃이 되어 시야를 가렸다. 뜨거운 열기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던 사람들이 시야를 되찾았을 때 가이사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역도다! 당장 그 정령사를 찾아라!”
가이사는 거대한 나무 위에서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아! 아우우! 으아아아!”
소란에 정신을 차린 길리안이 황후와 황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황후가 즐겨 쓴다는 독특한 향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말의 의미는 전달되지 않았겠지만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은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저 미친 자가 내게 뭐라고 하는…… 너는, 설마!”
가이사는 황후가 길리안을 알아보는 것까지 확인하고 손가락을 ‘딱!’ 하며 튀겼다. 적당히 세게 불어온 바람이 아주 자연스럽게 길리안 품에 있던 서신을 떨어트렸다.
「도와주셔야겠습니다, 황후. 그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접지도 않은 짧은 서신이었다. 바람을 조종해 황후의 눈에 보이도록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황후의 낯이 표독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감히 그놈이 내게 어찌……!”
황후가 젖형제였던 길리안의 얼굴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길리안이 살아 있다. 길리안을 살릴 자는 황후의 ‘협력자’뿐이었다. 이건 니네이나가 생각한 두 가지 덫이었다. 하나는 황후의 협력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다른 하나는 물론 심증이 확실한 그 협력자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황후?”
황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그녀는 잽싸게 편지를 구겨 감추며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런 반응 또한 니네이나의 계산에 들어가 있었다. 질투심이 심한 황제에게 협력자의 존재를 들켜 준다면 니네이나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감히 폐하에 대한 휴, 흉측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차마 보시게 할 수 없어서…… 흐흑…….”
가련하게 울먹거리는 황후의 눈동자는 정수리 끝까지 오른 분노로 번들거렸다. 말이 도움이지 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황후는 제 살을 깎아 먹을 짓을 하는 타르시를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그것 역시 니네이나가 미리 안배를 깔아 두었다.
불명예스럽게 공작위를 빼앗긴 타르시의 광증이 심해졌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 참이었다. 미쳐 버린 타르시가 막 나간다면 이런 행동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니네이나는 황후와 타르시가 모종의 협력 관계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면 황후가 니네이나를 살해할 이유가 없었다. 아실로를 황태자로 올리고 싶은 황후가 타르시의 공작위 회복을 도와줄 건 자명했다. 루베니오는 황위를 누가 가지든 관심이 없는 자였으니 아실로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타르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협박은 악수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악수로 작용하게 만든 것이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황후의 분노는 협력자에게 향할 것이다. 협력자가 누구인지는 황후의 반응을 보아 곧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이사는 울먹거리는 황후를 감싸 안아 달래는 황제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황궁을 벗어났다. 가이사는 황궁의 추적을 유유히 따돌리고 세이아 저택으로 되돌아갔다. 세찬 바람이 그 순간의 상념을 불러왔다.
─슬퍼, 하지…… 쿨럭! 흐읍, 흐…….
─말하면 안 됩니다!
─미안……. 가, 이사…….
바로 오늘 아침 마주했던 끔찍한 참상이 떠오르자 날아가는 것처럼 가볍던 발걸음이 묵직해졌다. 그는 무거운 돌이 긴 줄에 하나둘 매달려 발에 연결되는 감각을 느꼈다. 만약 그녀가 그렇게 죽었다면 가이사는 또 홀로 남았을 것이다.
“…….”
레어노스가 죽었을 때처럼 또 그렇게 혼자 이 지긋지긋한 삶을.
가이사는 원래 혼자 살아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닐 때의 기억이 황홀한 푸른빛이라 다시 되돌아가는 게 두려웠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곳에 또 홀로 남을 걸 상상하자 아주 깊이 묻어 두었던 그의 고통이 손을 쭉 빼내어 발목을 붙잡았다. 그 손이 가슴뼈를 뭉개어 심장을 발라낼 것 같았다.
“헉!”
그는 악몽을 꾼 사람처럼 몸서리치며 눈을 홉떴다. 정수리를 찌릿하게 울리는 감각에 그는 벽을 짚고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심장을 강제로 쥐어 짜이던 그날의 악몽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제물이 되어 생체 실험을 당할 때의 고통이 날것 그대로 뇌를 찔렀다. 가이사의 정신은 고고하여 웬만한 정신 마법은 가볍게 튕겨 냈다. 그러나 가이사 스스로가 만드는 내부의 붕괴에는 너무도 취약했다. 니네이나는 그가 아직 잊지 못한 최악의 경험을 이끌어 내곤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몸을 떨며 그때의 고통을 되새김질했다. 뼈가 뜯기고 심장이 뽑히고 뭔지 모를 쇳덩이가 살을 찢어 내던 때.
“하…….”
가이사의 동공이 흐릿하게 풀렸다. 그는 어둠에 잠식된 인형처럼 멈추어 섰다. 그의 옷자락이 거센 바람에 하느작거렸으나 몸을 일깨우지는 못했다.
죽고 싶다. 그는 이럴 때 죽음을 갈구했다. 살아 있는 건 그에게 고통이며 괴로움이었다. 모든 걸 잊고 깨끗해질 수 있다면 망각의 샘에 스스로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토록 바란 것임에도 지금 이 순간 그는 망각을 잠시 주저했다.
─아픔을 이겨 내는 방법이요? 그런 게 따로 있다면 나도 알고 싶죠!
─그렇습니까?
─먼저 물어봤으면서 왜 관심 없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는 건데요!
─그냥 물어본 겁니다. 별 의미가 없는.
─으음…… 굳이 말하자면 좋아하는 걸 떠올려요. 맛있는 걸 먹는 행복한 기억이라든가.
통통 튀는 발랄한 목소리가 열기에 침식된 귓가를 울렸다. 그 목소리가 여기서 멈추고 싶은 그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행복한 기억? 내게 그런 게 있었던가?’
가이사의 기억이 물길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앞으로, 앞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학대당해 온 유년. 친부에게 팔려 노예가 된 날. 끔찍한 훈련. 살기 위한 도망. 지독하게 더러웠던 신전의 지하. 처음으로 죽음을 바랐던 순간.
레어노스. 폭음에 찢긴 고막처럼 지지직 끊기던 검은 기억에 잔잔한 초록빛 물방울 하나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아주 작은 물방울은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 레어노스와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날의 행복보다 훨씬 더 괴로웠던 다른 날이 떠올랐다. 레어노스의 소멸. 가이사를 살리기 위해 레어노스가 이 땅에서 사라진 날.
레어노스는 난색이자 한색이었다. 떠오르기에 따라 다르지만 가이사에게 더 강렬한 건 시체의 시린 체온이었다. 일렁대는 검은 물은 죽음의 강물처럼 범람해 그의 기억을 다 덮었다. 역시 행복한 기억 따위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좋아해요, 가이사.
수줍게 물든 뺨 위로 나부끼던 금빛을 기억했다. 그날 그녀의 머리칼은 조명을 받아 햇살처럼 반짝였다.
─내가 계속 말해 줄게요. 당신이 안심할 때까지.
조금 달랐던 따스한 온색의 체온과 선명하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 금색, 하얀색, 붉은색, 푸른색, 녹색……. 그녀가 가진 수많은 색(色)이 검게 물든 기억을 갈랐다. 주인을 닮아 화려한 물새처럼 통통 튀어 오른 색깔 구슬이 멈추어 있는 가이사를 채근했다.
─조심해요.
─저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이토록 쉬운 일에 그가 다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걱정해야 했다. 가이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또 어떤 것들이 손을 뻗을지 몰랐다. 그것들은 아주 하찮지만 니네이나는 그 하찮은 것들보다 약해서 조심해야 했다.
─그럼 걱정을 안 해요?
그런데 니네이나는 칼리탄과 아실로 따위의 검을 막았을 때도 그의 손을 걱정했다. 그런 사람이었다. 가이사는 그때도 괜찮았지만 그 손을 더 붙잡고 있고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프다고 하면 더 가엾게 여겨 줄까 봐 일부러 그랬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끝까지 걱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에게 그런 약속을 했다. 그제야 안심하며 발긋하게 펴지던 얼굴이 떠올랐다. 이렇게 서 있을 시간이 없는데. 가이사는 자신이 멍청했다고 생각하며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돌아갈 곳이 있는데 뭘 망설이며 이곳에서 시간을 뺏겼는지 모르겠다.
“살아 있다. 아직 이곳에.”
지금 달려가면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투덜거릴지도 몰랐다. 잠이 많은 사람이니 기다리다가 지쳐 새근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잠에 빠진 그 앙증한 얼굴은 그가 즐기는 몇 안 되는 취미 생활이 되었다. 그 시간을 놓칠까 봐 가이사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무겁게 그의 발목을 옥죄던 끈이 한 올 두 올 풀리어 저 멀리 날아갔다. 그렇게 가다가 문득 오늘 그녀를 위협한 하찮은 벌레가 생각났다. 오늘 낮에 그동안 그것을 죽이지 않은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으……! 이 분노는 두고두고 갚아 주어야 분이 풀릴까 말까예요!
죽이고 오는 건 금방이겠으나 시근덕거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싹 말려 죽일 거예요! 편하게 안 죽일 거라고!
잠시 고민하던 가이사는 꽤 괜찮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녀는 죽이지 말랬지, 고통을 주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우나.”
계약자의 부름에 고결한 땅의 정령이 눈을 치켜뜨고 나타났다. 까칠한 정령은 호랑이와 고양이의 특징을 반반 섞은 깜찍한 외향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가장 적당하겠지.”
우나는 그런 하찮은 걸 자신에게 시키느냐며 성을 냈지만 가이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불행을 선사하라.”
싸늘하게 굳었던 정령의 주둥이가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가이사는 우나를 더 바라보지 않고 돌아갈 곳을 향해 뛰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깨금발을 들고 창문가를 서성이는 니네이나를 발견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를 발견한 니네이나의 새초롬한 눈이 반가움으로 반짝였을 때, 그는 침몰하는 태양의 기분을 느꼈다. 지금 져도 또 새 아침을 맞이할 한낮의 싱그러움을.
* * *
‘가이사다!’
날이 어둡고 그림자가 멀어 자세히 볼 수 없었음에도 나는 확신했다. 오싹하도록 시커먼 것이 딱 가이사였다.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훌쩍 뛰어오른 그가 여유롭게 발코니로 내려섰다. 무슨 짓을 했는지 창문 아래를 지키던 기사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좋군요.”
살며시 웃은 가이사가 어딘가 다급한 몸짓으로 나를 안으로 데려갔다. 탁. 발코니 문이 가볍게 닫히자마자 그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 체취와 체온을 가득 느껴야 안심을 하겠다는 듯 한껏 부딪쳐 오는 그에게서는 옅은 바람 냄새가 났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응.”
잠시 고민하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답하며 뺨을 비벼 왔다. 바람을 오래 맞아서인지 그의 뺨은 차게 얼어 있었다.
“가이사?”
“죽지 마요, 니네이나.”
어딘지 안쓰럽게 젖은 목소리가 먹먹함을 담았다. 그의 등을 쓸어 주려던 내 손이 허공에서 움찔 멈춰 섰다. 그는 느끼지 못했는지, 무게를 실어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굴었다. 살갑고 보드라운 얼굴이 바로 옆에서 보였다.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크게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내 죽음을 예견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한 것뿐인지 편안한 얼굴이었다. 내 입꼬리가 서럽게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몸도 안 좋은데 왜 밖에 나와 계신 겁니까?”
한참 주인을 반기다가 떨어지는 강아지처럼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나는 얼른 두 팔을 뻗어 그의 등을 꼭 감쌌다.
“살려고 겉옷 꽁꽁 두른 거 안 보여요? 난 하나도 안 추웠어요.”
내 건강은 내가 챙긴다는 일념의 노력이 보였는지 그의 숨이 푸스스 흐트러졌다.
“누가 보면 당신 혼자 겨울인 줄 알겠습니다.”
“저는 겨울 싫어해요.”
“추워서?”
“추워서.”
그대로 돌려주자 그가 또 피식 웃는 게 느껴졌다. 웃음이 헤퍼졌는데 그게 참 보기 좋았다. 그래서 지금은 그를 놔줄 수가 없었다. 내 얼굴은 아직 수습이 안 되었기에.
“또 금방 봄이 올 겁니다.”
이 사람이 오늘 작정을 했나 보다. 처음에는 아파서 몰랐는데 조금 지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가이사가 말했듯 성물의 힘은 일시적이었다. 내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게 문제였는지 힘이 차츰 빠져나가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바로 멀쩡해진 건 이 세계 사람의 경이로운 회복력 덕분만은 아니었다. 성물의 힘을 반분 정도는 썼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불행하게도 그걸 증명하듯 지금도 그의 무게가 조금씩 힘겨워졌다. 확실히 성물을 막 먹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가이사가 말한 봄. 그것은 내게 가장 간절한 계절이었다. 그것을 맞이하는 게 내 목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저는 이제 그것을 압니다. 계절은 또 돌아옵니다. 그러니 아쉬워하지 마세요. 겨울은 금방 갈 테니까.”
말이 없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는 나를 달래려 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힘을 줬다. 아팠던 게 한두 번인가? 이번에도 이겨 내자. 부정적인 생각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벌써 다섯 번째 밤이네요.”
씩씩한 목소리에 귀가 아팠는지 가이사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그걸 세고 계셨습니까?”
“그럼 안 세어요? 다섯 밤이 또 지나면 이야기를 꼭 해 줘야 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손해 볼 일은 질색이야. 당신이라고 봐줄 줄 알아? 그런 의미를 담아 씩 웃자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아직 밤이 지나지 않았으니 여섯 밤이 남은 겁니다. 그리고 오늘 밤에 같이 잘지 말지는 아직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골이 난 아이 같았다. 귀엽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수식어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그래요? 그럼 이만 안녕할까요? 내일을 기약하며?”
“……이제 막 선택했습니다.”
그의 선택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픈 사람이 밤새 앓을까 봐 걱정되어서 오늘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는 내 핑계를 댔고 나는 그를 핑계 댔다.
“가이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래야죠. 그럼 이만 잘까요? 저 살짝 졸린데.”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하품이 슬금슬금 나왔다. 입가를 가리고 하품하자 그가 나를 침대로 데려갔다. 가이사는 베개를 팡팡 두드려 − 말이 팡팡이지 사실은 죽일 기세로 쾅쾅 때렸다 − 납작하게 만들고 나를 눕혔다. 이불을 끌어 올려 가슴 위까지 덮어 주고 손과 발을 빼내어 주는 행동이 익숙하고 노련했다.
“이상한 습관이 들 것 같은데…… 저 이제 가이사 없으면 허전해서 못 자는 거 아니에요?”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하긴. 제가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하는 어린애는 아니죠.”
“제가 없는 날이 없을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민망하게도 그는 정색하며 나를 빤히 보았다.
“그, 그런 거였어요?”
“예.”
“……계속 내 옆에 있어 주려고요? 아버지와의 약속이 끝나도?”
“당신이 그 옆을 허락하는 한은 언제나.”
“일 끝내고 빨리 떠나 버리고 싶다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그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여전히 한 사람인데 너무도 많은 게 달라져 버렸다. 애초에 내 계획과는 완전히 어긋난 일이었으나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바 있었다. 그러니 새삼 그를 밀어내려 하지는 않을 테고 내 감정에 충실할 테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그거 궁금하네요.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려고요? 그만 가라고 한다면?”
어떤 격렬한 반응이 나온 건 아니었다. 가이사는 눈꺼풀을 잔잔히 내리깔아 희번덕 빛나는 붉은 광월의 눈동자를 반쯤 감췄다.
“굳이 말로 듣고 싶다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반달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름달도 아닌 그 애매한 중간쯤으로 그의 눈가가 새큼하게 접혔다.
“아니요, 그냥 환상을 가진 채 살게 두세요.”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는 나를 칭찬하면서도 눈빛으로 나직이 경고했다.
와, 소름 돋는 것 봐. 닭털이라도 뽑은 것처럼 오소소 돋아난 살갗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나는 가이사가 무섭지 않았다. 말로는 저렇게 해도 실상 내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쯤은 그를 봐 온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가이사, 그럴 때는 솔직하게 말하는 거예요.”
“제 속마음을 말입니까?”
그의 얼굴이 다시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모략과 간계의 악마 같았다. 악마의 매혹적이고 잔인한 향이 사방으로 퍼지는 듯해 정신이 몽롱해졌다.
“아니, 그 장르 말고요.”
“장르?”
“피 튀기는 중상모략 말고 우리는 좀 더 달달한 걸 할 수 있잖아요.”
“이를테면?”
가이사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반듯하고 깨끗한 이마 위에 그만 주름이 잡힐 것 같아서 나는 와락 웃어 버렸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물어봐도 미주알고주알 알려 주기는 부끄러웠다. 나는 눈치가 없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눈을 감았다.
“다섯 밤 뒤에 약속한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이지, 가이사를 영원히 못 오게 하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똑똑. 시각이 되면 어김없이 창문을 두드리는 악마와의 밀회는 매혹적이었다. 당분간은 그만둘 마음이 없었다.
“그럼 잘 재워 드려야겠습니다. 그리워 보채실 수밖에 없도록.”
내 말이 그의 무엇을 자극했는지 배 위에 올라와 있던 그의 손이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딱히 뭘 한 건 아니었고 메트로놈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재깍재깍 도닥여 주는 것뿐이었지만 나는 그 손에 어린 열기를 읽었다.
“내가 당신을 찾도록 만드는 거겠죠.”
“그게 그거 아닙니까?”
“그렇지만 나는 이쪽이 좋은걸요.”
말하자면 가이사는 너무나 크고 위협적인 맹견이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아니어서 이렇게라도 말해 두지 않으면 너무도 쉽게 우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아직 내가 행복해야 자신도 행복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잘 몰랐다. 나를 불행하게 만든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가이사가 그런 걸 알 수 없기를 바랐다. 나 역시 그가 행복해야 행복할 수밖에 없는 몸이 되었으니까.
“당신이 찾을 수밖에 없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가이사는 오래 망설이지 않고 내 말을 따라 했다. 내 의견을 받아 준 게 고마워 환하게 웃자 그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동시에 마음도 하늘 위로 둥둥 떠올랐다. 나른한 고취감에 눈꺼풀이 저려 왔다. 이제 정말 잘 시간이었다.
“하품 그만하고 이제 주무세요.”
“으응. 그런데 그걸 안 물어봤네요. 부탁드린 일은 잘 끝낸 거예요?”
“잘 처리했습니다.”
“아니요, 이번에는 당신이 틀렸어요. 잘 끝냈냐는 건 당신이 무사하냐는 뜻이었어요.”
졸린 와중에도 장난스럽게 웃으며 눈을 떴다. 그의 손가락이 일어나지 말고 다시 감으라는 듯 내 눈가를 살짝 덮었다. 시린 손이 내 체온으로 데워지는 건 오래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저는…… 무사합니다.”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어색했는지 가이사의 손가락이 불안스레 까딱거리며 내 눈두덩을 살짝 눌렀다. 건반을 치는 것처럼 톡톡거리는 손가락에 잠기운이 몰려왔다.
“그럼 다 괜찮아요.”
잠이 들며 마지막으로 한 말은 그것이었다.
* * *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괜찮기는 뭐가 다 괜찮아! 내가 한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세상에! 황궁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미친놈이 있다니! 흉흉한 세상이라 큰일이에요!”
내 기분을 알 리 없는 메이아가 내 앞에 다과를 내려놓으며 조잘거렸다. 초코 냄새가 향긋한 버터 쿠키가 입안에서 바스스 흩어졌다. 이거 참 맛있는 건데…… 더 먹었다가는 체할 것 같았다.
“콜록!”
“어머, 주인님!”
메이아가 나에게 따뜻한 찻잔을 건네주며 수선을 떨었다. 나는 손짓으로 메이아를 밖으로 내보내고 가이사에게 소곤거렸다.
“불을 지르다니요?”
“제가 불의 정령과 계약했다는 걸 알고도 살아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니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알고도 살아 있는? 중간에 몹시 이상한 말을 들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일단 무시하고 넘어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불을 질러도 되는 거예요? 황궁에서 가이사를 찾아내려 난리라는데!”
“못 찾아낼 겁니다. 제가 한 짓도 아니고.”
“…….”
후나 주인은 당신이잖아, 이 뻔뻔한 사람아! 내가 그를 넋을 잃고 바라보자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조금의 반성도 없이 변명했다.
“화려하게 잘 처리했습니다.”
“적당히…… 화려하게가 제 부탁 아니었나요?”
“예. 적당히 화려하게 했습니다.”
어디가 적당히야!
“결과는 좋을 겁니다.”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들키지 않는 거 확실해요?”
“확실합니다.”
“당신 얼굴은 너무 눈에 띄는데.”
“얼굴 잘 가렸습니다. 아무도 못 봤을 겁니다.”
“그렇다면야…….”
그래.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는 아니었다. 가이사가 내 부탁을 들어주는 입장인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배은망덕하게 그를 추궁하지 않았나. 어딘가 모럴이 어긋난 기분이었지만 죽은 사람도 없다는데 심각하게 생각할 거 뭐 있나 싶었다.
생각해 보니 오히려 깨소금 맛이었다. 황후의 궁이 털리다니. 비싼 것도 틀림없이 많았을 텐데. 그게 다 샤사롯을 비롯한 멸문된 가문에서 뽑아낸 것일 테고.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의 손을 붙잡고 진심으로 말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겁니다.”
하고 싶지 않았다면 죽어도 안 했을 사람이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유야 어쨌든 나를 도와준 건 사실이잖아요. 나는 그게 고마운 거예요.”
가이사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내 간곡한 말을 굳이 쳐 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반응이 올 때까지 추이를 좀 지켜봐야겠네요.”
황후의 협력자가 타르시였다는 사실은 오늘 아침에 밝혀졌다. 황제와 함께 황제가 사용하는 본궁으로 피신한 황후가 다음 날 자고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제 그 같이 끔찍한 걸 보아서인지 흉흉한 꿈을 꿨어요. 전 아무래도 불길해요. 모든 일이 꼭 전대 세이아 공작인 타르시의 짓인 것만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요, 황후? 누구보다 타르시의 복권을 지지한 건 황후지 않소? 타르시가 무슨 이유로 황후를 해치려고 한단 말이오?
─그건…… 제가 아니라 폐하를 노린 걸지도 몰라요. 폐하께서 루베니오의 편을 든 것을 원망하면서!
오늘 아침 루베니오가 심어 놓은 간자에게서 들은 황제 부부의 대화는 이랬다. 타르시와의 긴밀한 사이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황후의 대답이 특히 압권이었다.
황후에게 타르시는 무서운 동반자도 친밀한 동반자도 아니었다. 예전이야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확실히 그랬다. 친밀하게 지내 왔다는 건 그만큼 서로에 대한 약점을 많이 쥐고 있다는 뜻이었고 어제의 일로 황후는 생각했을 것이다. 타르시를 확실히 죽여 그 입을 막아야겠다고. 그를 꺾으려면 타르시의 힘이 약해진 지금이 적기라고.
사실 루베니오도 황후에게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는 중립이었다. 칼리탄을 지지하지도 아실로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얼마 전 루베니오가 직접 아실로를 집에 초대한 일이 있었고 그때의 일이 약간이나마 황후에게 호감을 줬을 것이다. 아실로를 데려온 게 좋은 수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쯤 되자 나는 루베니오가 어디까지를 내다보고 그와 같은 결정을 한 것인지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
“황후는 타르시를 제거하려 들 게 틀림없어요. 공범자끼리 공멸할 수 있게 도와줘야겠네요.”
반면 타르시는 황후가 뜬금없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타르시가 황후의 약점을 얼마나 쥐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한 치열하게 다퉈 줬으면 했다. 그리하여 타르시의 손발이 다 잘리고 이어진 끈도 떨어져 더는 갈 곳 없는 고립된 신세가 되었을 때. 그때 내가 원하는 걸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것에 관하여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가이사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 상념을 깨웠다.
“무슨 일인데요?”
“어젯밤 제 독단으로 타르시에게 선물 하나를 더 보냈습니다.”
“가이사가요?”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가 선뜻 나섰다니 의외였다.
“별건 아니고 당신의 말을 좀 더 신빙성 있게 만들어 줄 선물을 보냈습니다.”
“제가 한 말이요?”
늘 그랬듯 오늘도 무덤덤한 가이사의 얼굴에서는 무언가를 읽어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그에게 한 말이 한두 마디였어야 가늠을 하지.
“타르시가 광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할 상태라면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타르시와 협력할 수 없다고 여길 테니까요.”
황후든 황제든 조금이라도 타르시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끈을 다 떨어지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미치광이 취급당하는 것만큼 고독한 게 있을까? 타르시처럼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우나를 보냈습니다.”
“우나? 가이사가 계약한 땅의 정령이라고 했나요? 그러고 보니 우나만 못 봤어요.”
“우나는 땅의 사념에서 태어난 정령입니다. 넷 중 가장 특이하고 특별합니다.”
“사념?”
“바람은 하늘로부터, 불은 태양으로부터, 물은 바다로부터, 흙은 땅으로부터 옵니다. 바람, 불, 물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은 유독 불순물이 많이 쌓입니다.”
가이사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느낌이 팍 왔다. 그가 혐오감을 담아 저런 얼굴을 할 때는 항상 인간과 관련 있었다.
“땅에 묻는 시체를 말하는 건가요?”
“꼭 인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긴. 짐승의 사체도 땅에서 썩으니까요.”
“육신은 땅으로 되돌아갑니다. 육신을 잃고 떠오르는 영혼 중 사념이 짙은 것은 땅의 기운을 받아 정령이 되기도 합니다. 물의 정령 중에도 간혹 그런 것이 있으나 땅의 정령은 빈도가 훨씬 더 높은 편입니다. 우나는 그중 하나입니다.”
정령의 탄생 설화라니.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정령서에 관심이 있어 자주 들여다보고는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실려 있지 않았어요. 이것도 가이사의 아버지께서 해 주신 말씀인가요?”
“제 정령은 모두 본디 아버지의 계약 정령입니다.”
정령은 물려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에 따라 자연 친화도가 다르고 맞는 정령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설령 피를 이은 혈육이라고 해도 다른 개체인 이상 정령의 계약을 물려받을 수는 없었다. 내가 본 정령서에 서술된 맥락은 그랬다. 검술 가문과는 다르게 정령 가문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럴 수가 있구나. 흔한 경우는 아니죠?”
나는 책에서 본 것과 다르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책보다 가이사가 아는 게 더 많았다. 누가 썼는지 모를 책보다 그를 더 신뢰하기도 했고.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역사가 기록된 순간부터 다 뒤져 봐도 …… 공유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삐이이이! 또 그 소음이었다. 정확히 목적어 부분이 빠졌다. 보호 마법뿐만이 아니라 비밀 유지 마법도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을 공유해요?”
“……입니다.”
가이사는 입술을 움직였으나 중요한 부분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이쯤 되니 오기가 생겼다. 가이사의 아버지라는 레어노스는 대체 무슨 이유로 내게 이런 마법을 걸어 놓은 걸까? 루베니오 이상으로 앞일을 내다보는 자임은 틀림없었다. 내가 가이사와 만나지 않는다면 이런 마법을 걸어 놓을 이유도 없을 테니까.
‘잠깐. 만나지 않는다면……?’
위화감이 물씬 풍겨 왔다. 원작에서 니네이나와 가이사는 만나지 않는다. 가이사의 등장은 니네이나의 죽음 이후였다. 그러나 내가 니네이나의 몸을 차지하면서 흐름이 달라졌고 가이사의 등장이 빨라졌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나비 효과가 일어나 이야기의 흐름은 크게 변했다. 전부 내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생길 리 없는 일이었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가정을 할 수 있었다. 하나. 니네이나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한 레어노스는 단순히 가이사의 약속 대상인 루베니오의 딸인 니네이나에게 마법을 걸어 놓았다. 그러나 이 마법은 원작의 니네이나가 죽으며 무용지물이 되었고 원작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과 상반되는 또 다른 가정.
레어노스는 내가 니네이나의 몸에 들어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다. 적어도 이 사실을 충족해야만 이런 마법을 걸어 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를 니네이나의 몸으로 들여보낸 자거나.
레어노스가 내가 이 몸을 차지할 걸 알고 마법을 걸어 둔 거라면 모든 게 매끄럽게 설명되었다. 그러나 그건 전자의 가정이여도 마찬가지였다. 이 보호 마법은 원작에도 있었으나 단순히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둘 중 어느 쪽이지?’
모르겠다. 주어진 힌트가 너무 적고 나는 레어노스라는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밖에 알지 못했다.
‘역시 전자인가? 후자의 가정은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걸…… 신?’
아니다. 말이 안 되는 걸 직접 경험한 게 나였다. 그렇게 따지자면 내가 니네이나의 몸에 들어온 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세계의 신은 실재(實在)했다.
‘레어노스가 신이라면?’
그거야말로 모든 수수께끼를 한 번에 풀 수 있는 열쇠였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온 자세한 이유까지는 모르겠으나 신이 아닌 이상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레어노스는 신인가요?”
나는 지체 않고 가이사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레어노스라는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이라면 소멸했을 리가요.”
가이사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아. 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었다. 신의 신명(神名)은 속이거나 숨길 수 없었다. 신의 이름은 그것 자체가 강대한 힘이고 권능을 모으는 잣대였다.
세상에 널리 퍼진 신의 이름 중 ‘레어노스’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잘못 짚은 걸로도 모자라 가이사의 안 좋은 기억을 불러일으킨 것 같아 미안했다. 아버지라고 여기던 존재의 죽음은 몇 번을 다시 떠올린다고 해도 아프고 괴로울 테니까.
“으음…… 미안해요.”
“이제는 괜찮습니다. 제게는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남아 있다? 레어노스와의 추억과 기억이 남아 괜찮다는 걸까? 가이사의 얼굴은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평온한 낯빛과 잔잔한 눈동자는 친인의 고통에 억눌린 사람 같지 않았다. 그래도 또 괴로운 얼굴을 할까 봐 마음이 아팠다. 한시바삐 그 주제를 벗어나려 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우나랑 타르시의 광증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
“우나가 타르시를 따라다니면 타르시는 꽤 괴로울 겁니다. 사념체 정령은 정령의 마음에 따라 기이한 일을 일으킵니다. 아마 불행해질 겁니다.”
“귀신에게 가위 눌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잠을 잘 못 잔다거나?”
“그 정도로 불행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가이사는 덤덤한 낯으로 가위를 깔보았다. 그, 그것도 꽤 괴롭지 않나? 자다가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이면 얼마나 괴롭고 무서운데! 아니야? 나만 그래? 끄떡도 않는 가이사의 기준에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됐다.
“그런데 가이사는 괜찮아요? 우나를 옆에 둬도?”
“정령이 계약자를 해치는 일은 잘 없습니다.”
“잘?”
그럼 가끔은 일어난다는 거야? 우나, 무서워…….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정령이 살짝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천하의 가이사를 해칠 수 있는 정령이라니. 대체 어떤 흉악하고 사악한 정령인지 상상이 안 되어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가이사는 그런 나를 흘긋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는 그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는데 나는 자존심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꼭 좀 그래 줘요.”
“예.”
담담한 대답이 꽤 믿음직스러웠다. 안전이 최고지. 실리주의가 최고야.
“가이사 같은 든든한 방패가 없을 타르시는 지금쯤 가위 눌림보다 극심한 고통을 격고 있겠네요?”
“그럴 겁니다. 제가 우나를 다시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오호.”
순간적으로 무척 좋은 생각이 났다. 타르시의 평소 친분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 * *
타르시 세이아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몹시 기이하고 불행한 이틀을 보냈다. 이상함을 처음 느낀 건 어제 새벽으로, 아주 거대하고 무거운 것이 몸을 누르는 느낌을 받았다. 일어나 살펴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그 꺼림칙한 무게는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나 무거운지 갈비뼈가 다 부서지는 것 같아 잠은 도저히 잘 수가 없었고 앉아 있으면 어깨가 무거워 자꾸 담이 오고 저렸다. 그렇다고 서 있는 게 나았던 것도 아니다. 온몸이 땅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한 발짝 한 발짝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으니까.
타르시는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 보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사람들을 불러 제 몸을 살펴보게 했다.
“달라진 것……이요?”
“그래. 내 몸에 뭔가 달라진 게 없느냐? 몸이 몹시 무거운 기분인데.”
타르시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일 리 없었다. 몇 사람에게 물어도 다 고개를 저었고 그들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타르시를 쳐다보았다. 가뜩이나 니네이나가 광증 어쩌고 해 버려서 짜증이 나는데 대놓고 저런 눈을 하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저것들 다 치워 버려! 감히 어디서 눈을 그 따위로 뜨는 것이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주인님!”
그날 하루만 해도 열 명이 넘는 사람이 조용히 사라졌다.
“몸이 안 좋으시면 의원을 부를까요?”
“그게 좋겠군. 몸에 뭔가 이상이 있는 게 분명해.”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많이도 수척해졌다. 주름진 피부는 퍼석거렸고 눈가는 시커멓게 내려앉았으며 얼굴에는 분노와 짜증이 가득했다.
“제가 보기에는 신경증이 아닐까 합니다.”
돌팔이 같은 의사가 내놓은 대답은 그게 다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신경증이라는 말에 타르시는 분노를 느꼈다. 이게 다 루베니오와 니네이나 탓이라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나 이게 어찌나 괴로운지 한 시간이 천근만근 무겁게도 흘렀다. 타르시는 몇 시간 견디지 못하고 의원을 불러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으…… 으윽!”
그런데 잠만 잤다 하면 악몽을 꾸었다. 타르시는 자신이 죽인 정적들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눈을 떠야 했다. 뼈와 살을 깎아 내는 고문은 꿈이라서 그런지 길고 아득했다. 다시는 잠들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타르시의 얼굴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안광이 시커멓고 붉어서 광인으로 여기기 딱 좋은 꼴이었다. 그러던 중 평소 타르시와 연이 있는 신관이 그가 머무는 별장에 놀러 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각하!”
호들갑을 떨며 다가온 신관은 타르시의 몸 곳곳을 살피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자네,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는가? 온몸이 무거워 누울 수도 일어설 수도 없네!”
“아무래도 금지된 마법에 걸리신 듯합니다.”
금지된 저주. 그것은 인간의 규율을 벗어난 흑마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내가 금지된 마법에 걸렸다고?”
타르시는 펄쩍 뛰며 몸을 살폈다.
“본다고 하여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저 정도 되는 신관은 그 음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죠. 아주 지독하고 끔찍한 종류로군요.”
눈을 가늘게 뜬 신관이 타르시의 어깨와 등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흑마법은 고대에 이미 명맥이 끊겼을 터.’
의심이 많은 타르시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이 부근입니다!”
그러나 신관의 손이 힘주어 그의 어깨를 누르는 순간 타르시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 순간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진 것이다. 이틀 만에 되찾은 가벼움에 그는 약하게 탄식하고 말았다.
“이게…….”
“설마 저를 못 믿으신 겁니까?”
신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타르시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견갑골을 뽑아 어깨를 무너트릴 것만 같은 거대한 무게감이 몸을 거세게 덮쳤다.
“어윽!”
신관이 혀를 쯧쯧 차며 앞으로 꽈당 넘어진 타르시를 부축했다.
“이대로 계시다가는 죽음의 강물을 넘어 신을 찾아뵙게 될 겁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는가?”
“정화의 의식을 하셔야지요.”
“그걸 하면 괜찮아지는 게 확실한가?”
“그럼요. 다만 대신관이 적어도 셋은 필요할 겁니다.”
신관은 마지막까지 정화의 의식을 꼭 치러야 한다고 당부하며 돌아갔다. 신관이 곁을 비우자마자 찾아든 끔찍한 무게감에 타르시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얕은 수작이군!”
타르시는 처음부터 신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저 신관은 입이 싸고 돈만 밝히는 주제에 모략에 능해 높은 자리에 오른 놈이었다. 필요에 의해 친분을 다지고 있지만 저런 것의 말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분명 잘못된 길로 그를 몰아가려는 놈들의 짓이었다. 니네이나와는 다르게 타르시는 적이 너무 많아 이 일이 누구의 짓이라고 딱 단정 짓기 어려웠으나 말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타르시는 검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폐하를 뵈어야겠다!”
타르시의 마차가 황궁 정문 앞에 선 건 그로부터 한나절 후의 이야기였다.
“이게 무슨 냄새지?”
하루 낮의 반이 지나 어둑해진 정문 앞에 선 마차는 얼룩덜룩한 진흙이 묻어 더럽고 기이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황궁 정문으로 오는 중 마차 전복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길을 비켜라! 타르시 세이아님이시다!”
“으윽……!”
그 사고로 허리가 나간 타르시는 들것에 실려 황궁의 치료소로 급하게 이송되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타르시의 계략은 하루 뒤로 미뤄졌다.
* * *
“타르시 님께서 공작님을 흑마법 사주 혐의로 고발하셨답니다!”
그 말은 들은 루베니오의 표정은 딱 그것이었다. 타르시가 늙어서 노망이라도 났나 의심하는 얼굴. 잠시 말이 없던 루베니오는 찻잔을 우아하게 내려놓으며 눈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지?”
헉! 미쳤다고 했다! 처음 듣는 딸 바보 아버지의 거친 언사에 나는 긴장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게…… 재판을 바란다고 합니다. 이미 대신관 셋이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고 황궁으로 입궁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공작님도 속히 오시라고 하셨답니다.”
말하는 시엘의 얼굴도 어리둥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흑마법이라니, 그게 어느 고리타분한 시절의 이야기인가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
루베니오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표정과 감정이 싹 빠져나가 서늘하게 변한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가 황제의 의도를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아버지, 저는 무서워요. 할아버지께서 정말 미치신 걸까요?”
나는 준비해 뒀던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살짝살짝 찍었다. 눈물은 묻어나지 않았으나 이 몸의 장점은 가녀림이었다. 연약한 척이 아주 잘 먹힐…… 응?
루베니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에서 혼자 놀던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부수고 자기가 부순 거 아니라고 딱 잡아뗐을 때, 그 부모가 지을 법한 눈빛이었다.
“지,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어떻게 내게 그럴 수가 있어! 충격이 컸던지라 지금의 경악은 진심이었다. 내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억울해하자 루베니오는 그때서야 아차 하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물론 아니다, 니네이나. 내가 어떻게 널 의심할 수 있을까!”
“하시던걸요! 제가 봤어요.”
“그럴 리가. 네가 잠시…… 착각한 거겠지.”
그러면서 다음으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가이사였다. 가이사는 차를 잘 마시다가 루베니오가 보내는 의심의 화살을 내 몫까지 연달아 맞게 되었다.
“…….”
그는 표정 하나 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무뚝뚝한 얼굴로 차를 마저 마셨다. 가히 철벽의 뻔뻔함이라 루베니오도 더는 우리를 의심하지 못하고 찝찝한 얼굴로 일어났다. 나와 가이사의 의자가 거의 동시에 드르륵 끌렸다.
“왜 일어나는 거지?”
일어난 건 가이사와 나 둘이었지만 루베니오는 가이사를 공기 취급하며 나만 바라봤다.
“아버지가 걱정돼요.”
내가 두 손을 모으며 애처롭게 속삭이자 그는 의심과 기쁨 사이에서 방황하며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고맙구나.”
루베니오가 눈동자를 기쁨으로 반짝이며 싱그럽게 웃었다. 나는 그의 반응에 힘입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럼……”
“하지만 네 걱정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나의 간절함이 그의 벽에 부딪혀 퉁 튕겨 나왔다. 나는 그걸 주워 다시 던졌다.
“아무래도 같이 가야 안심이 될 것 같아요.”
내 고집 역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루베니오는 나를 쉽사리 뿌리치지 못했고 시간은 촉박하게 흘렀다.
“공작님, 바로 가셔야 합니다.”
이걸 노렸구나. 그의 눈동자를 스치는 깨달음이 딱 그랬다.
“하아…….”
루베니오는 폐부 깊숙한 곳에 묻어 놨을 한숨을 꺼냈다.
“급하다면서요. 얼른 가요, 우리.”
내 채근에 루베니오는 앞장서서 걸어갔고 나와 가이사는 병아리 졸병처럼 루베니오의 뒤를 열심히 쫓았다. 앞으로 다가올 재판이 기대되었다. 알아서 선물을 받으러 행차하셨다니 고마울 따름이니까.
* * *
“……황제 폐하께서 본 안건의 심각함을 헤아려 재판을 허락하셨습니다.”
말이 참 장황하고 길지만 지금 저 황궁 시종이 하는 말의 결론은 그것이다. 타르시는 이러이러한 정황을 들어 루베니오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흑마법을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루베니오는 이러이러한 근거를 들어 억측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여 본 재판에서 시시비비를 가려 보자는 것이다.
이 황당한 재판에 모여든 구경꾼은 꽤 많았다. 엘리니움 제국을 지탱하는 가장 거대한 기둥이 양쪽으로 나뉜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이 재판으로 세이아의 체면이 구겨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가문의 체면을 중요시하던 타르시가 그 부분을 감수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몰려 있다는 걸 뜻했다.
‘제국 최고의 권신 가문이 콩가루 집안이 되어 버렸잖아?’
생각해 보니 세이아의 역사는 꽤 막장이 아닌가? 막장의 근원은 물론 타르시로부터 비롯했다. 그러게 쌍둥이 형의 아들을 왜 빼앗아서 자기 아들인 척 꾸민단 말인가? 아니, 뭐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하겠다. 아버지 잃은 조카를 거두는 건 귀족 사회에서 드문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아들 대접을 잘해 줬어야지. 며느리 가문은 왜 멸문시키고 하나뿐인 손녀는 왜 쫓아낸단 말인가? 모든 건 타르시의 죄였다. 앞으로 불러일으킬 모든 것들의 불씨 또한.
“타르시 세이아. 고발을 한 당사자니까 잘 알겠지. 그대가 먼저 말해 보라.”
권좌에 앉은 황제가 타르시를 향해 눈짓했다. 간밤에 허리를 다쳤다는 타르시는 안색이 좋지 않았는데, 평소 그를 미워하던 정적들도 안쓰러운 시선을 보낼 정도였다. 며칠 만에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불쌍한 척을 했다.
“노신의 허리가 좋지 않아 예를 바르게 갖출 수 없음이 송구하옵니다.”
황제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인 타르시가 몸을 돌려 루베니오를 노려봤다.
“천인공노할 놈! 신이 두렵지 않으냐!”
기선 제압을 할 생각이었는지 그는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노성을 질렀다.
“어제 낮 페브라스 대신관을 만났습니다. 페브라스 대신관은 제가 금지된 마법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유도 없이 몸이 아팠고 폐하를 뵈러 궁에 오는 동안에는 큰 사고가 나 목숨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저는 거듭한 불행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저를 음해하려는 모략이옵니다!”
다 죽어 가면서도 쩌렁쩌렁한 목소리에는 기백이 남아 재판장을 울렸다.
“…….”
루베니오는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듯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고막이 꽤 아플 텐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게 루베니오다웠다.
“세이아 공작.”
황제의 말에 루베니오와 타르시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바라보는 사람은 루베니오였다.
“예, 폐하.”
루베니오는 침착하게 대답했고 타르시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세이아 공작이라는 지위를 루베니오가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타르시 전대 공작의 나이가 예순을 넘긴 지 한참입니다. 이유 없이 몸이 아플 나이인 데다가 불명예스러운 지위 박탈로 인한 괴로움이 그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을 겁니다.”
노망이 나 미친 짓을 하고 있는데 황제라는 사람이 그 말을 믿고 이딴 재판을 벌이냐? 서늘하게 돌려 말했지만 결국은 그 뜻이었다.
“흠.”
눈치 빠른 황제는 루베니오의 심기가 좋지 않음을 알아채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이 일은 황제에게 나쁠 게 없었다. 둘이 싸워 조금이라도 세이아의 권세가 줄어들면 황제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타르시가 증거도 없이 공작을 모함하지는 않았을 터.”
“그렇습니다, 폐하. 노신을 시기한 자의 간계에 속지 마시고 신이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소서!”
타르시가 재판장 한쪽을 눈짓하자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대신관 페브라스, 대신관 아모체, 대신관 카사비올라 이상 3인을 증인으로 들이옵니다!”
하얀 성복을 입은 대신관 3인이 재판장으로 들어왔다.
“대신관 페브라스, 타르시가 흑마법에 걸렸다고 처음 알려 준 사람이 그대라지?”
황제의 시선이 이 일의 시발점인 페브라스에게로 향했다. 타르시와 페브라스가 눈짓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페브라스는 하여튼 뻔뻔한 사람이었다. 타르시를 배신할 생각이면서 말이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저는 그런 적이 없사옵니다.”
애당초 페브라스는 내 사주를 받고 타르시에게 말을 흘렸다. 그러나 페브라스는 그런 일이 전혀 없다는 것처럼 시치미를 뗐다. 타르시의 표정이 어떨까 싶어 내 눈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타르시는 동요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이미 다른 패를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페브라스의 신용도는 매우 떨어졌다. 이어서 대신관 아모체의 증언이 시작되었다.
“대신관 아모체, 타르시의 몸을 살펴보라. 그는 정말 흑마법에 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타르시 님의 몸에서는 어떤 불길한 기운도 느낄 수 없습니다.”
아모체는 페브라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세계의 신은 실재하나, 모순되게도 신의 말을 행하는 자는 인간이었다. 신전의 권력이 커질수록 탐욕을 부리는 신관이 나오기 마련이었고 그런 기회주의자들은 비열한 방법으로 출세한다.
페브라스와 아모체. 둘은 돈과 권력에 의해 쉽게 의견을 바꾸는 타락한 신관이었다. 나는 그 둘을 금광과 토지로 포섭했다.
“흐음.”
황제는 헛기침을 하며 타르시에게 눈짓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타르시에게는 믿을 만한 대신관이 있었다. 페브라스의 말에는 코웃음 치던 타르시가 이 재판을 열도록 결심하게 한 사람이었다. 어떤 외압에도 결코 굽히지 않고 신을 따르는 주신 라가니우스의 신실한 첫 번째 종. 대신관 카사비올라.
나는 재판 직전, 사람을 보내 그녀를 설득하려 시도해 봤으나 예상대로 통하지 않았다. 금광이나 토지 따위에 마음이 홀려 쉽게 내 뜻을 따라 준 앞선 두 신관과는 다르게 그녀에게 물질적인 건 의미가 없는 듯했다. 게다가 카사비올라는 우나의 사념체를 흐리게나마 읽어 낼 정도의 혜안(慧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 건 타르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간자의 말에 따르면 카사비올라가 타르시에게 흑마법이 걸렸다고 말해 준 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타르시에게는 흑마법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굳이 ‘금지된 마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사건의 심각성을 키우기 위함일 것이다.
타르시에게 필요한 건 루베니오의 평판을 깎는 일이었다. 공작위를 탐낸 루베니오가 한때는 아버지였던 타르시를 사악한 힘으로 죽이려고 했다는 단편적인 사실. 처음에는 황제를 만나 이야기하려는 수준이었을 사건의 크기가 이렇게 커진 건 카사비올라의 발언 때문이었다.
“대신관 카사비올라.”
나를 비롯해 이곳에 모인 사람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다.
“예.”
어린 소녀의 청명한 음색이 이권 다툼으로 과열된 재판장을 씻어 내렸다.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성녀 카사비올라. 원작에서도 잠깐 등장한 적 있는 인물이었다. 다정하고 맑은 성품의 소녀는 라가니우스 신이 예언을 내려 직접 간택한 대신관이었다. 인간의 더러움으로 자칫 타락할 수 있는 신전을 보호하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었고 저 어리고 영특한 소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신성을 섬기고 예찬하는 성결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단지 중립을 지킬 것이라는 게 내 예상이었다. 나와 타르시는 최소한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녀의 대답에 따라서 이 심리전의 양상이 크게 바뀔 수 있었다. 나는 잘 듣고 대비해야 했다.
“저는 신의 종. 나의 신께서 원하신 일을 이 땅에 구현하는 게 저의 사명입니다. 제 신의 이름에 맹세코 거짓을 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소녀의 몸에 신성이 깃들어 그 말이 조용하고 무겁게 울렸다. 보이지 않는 신의 천칭이 편안하게 감은 그녀의 두 눈가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소녀는 신의 재판관이 되어 다시 눈을 떴다. 카사비올라의 증언은 앞선 두 신관의 증언과는 그 무게가 다를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이 타르시의 노림수였다. 설령 두 신관이 어떻게 말하더라도 카사비올라 한 명만 제대로 증언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설마 타르시 따위를 위해 신의 이름을 들먹일 줄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카사비올라는 타르시의 비열함을 알아봤을 테니까.
“증언하라.”
“금지된 마법 같은 건 보지 못하였습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가이사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판도에 타르시의 얼굴도 격렬한 충격으로 물들었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