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제멋대로 다사다난
아침에 일어나니 가이사는 또 귀신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와 입맞춤을 나눈 기억은 있는데 그 뒤로는 머릿속이 하얬다. 설마 키스하다가 잠든 걸까?
‘그렇다면 최악이잖아, 나!’
그런 주제에 잠은 또 잘 잤는지 이상할 정도로 힘이 펄펄 솟았다. 어디까지나 하찮은 내 건강 기준에서 말이다.
“으으…….”
미안함에 끙끙거리자 내가 먹은 음식 접시를 치우던 사라가 나를 돌아봤다.
“아!”
그러고는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본 저택 정리가 끝났답니다. 큰 주인님께서는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방을 그쪽으로 옮기시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빨리?”
“전대 공작님이 사용하시던 방 위주로 정리를 끝냈다고 합니다.”
치우기 전에 한번 둘러보고 싶었는데 루베니오는 일 처리가 빨랐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문건을 그대로 두고 떠날 정도로 타르시가 멍청한 사람은 아닐 테니까.
“아버지는?”
“공작님께서는 오늘 새벽 라가 신전에 들어가셨답니다.”
라가 신전은 제국의 주신인 라가니우스의 신관들이 지내는 곳이었다.
“라가 신전? 거기는 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라도 이유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저은 사라가 메이아를 지그시 바라봤다. 넌 뭔가 알지 않느냐고 추궁하는 눈빛이었다.
“오늘 새벽 신전에 도둑이 들었다고 해요. 살짝 듣기로는 성물을 도둑맞았다고…….”
사라의 시선을 받은 메이아가 속삭였다. 사라가 모르는 걸 메이아는 어떻게 아는 거지? 가던 길에 몰래 엿들은 건가?
“살짝?”
“아침 수련 중에 공작님이 일찍 밖으로 나서시는 걸 보았거든요.”
“음…… 잘했어, 메이아.”
살짝이 아니라 엿들은 게 확실해 보였다. 내가 씩 웃으며 칭찬하자 눈치 빠른 그녀는 수줍게 볼을 붉히며 입을 꾹 닫는 시늉을 했다.
“제 입은 주인님께만 가벼워요.”
“응. 그것만 지키면 돼.”
“헤헤.”
칭찬에 면역력이 없는지 비비 꼬이는 몸이 스크루가 되어 사라질 것 같았다. 중요한 부분은 아니니 이쯤 하면 되었다. 진짜 들키지 말아야 할 문제였다면 루베니오가 어련히 보안에 신경 썼을 테니. 메이아가 알았다는 건 그가 은연중에 흘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떤 괴물이 신전에서 성물을 훔친 거지? 보안 마법이 덕지덕지 붙어 있을 텐데. 지키는 기사 수도 많고.”
“불경한 사람이에요! 빨리 잡혔으면 좋겠어요.”
신실한 메이아는 분노하여 씩씩거렸다.
“어쨌든 아버지가 안 계신단 말이지?”
나는 그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서둘러 일어섰다. 성물을 훔쳤으면 천벌을 받겠지, 뭐. 내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5분 뒤에 그 성물이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 괴물이, 당신이었어?
* * *
손바닥 위에 번쩍거리는 광물을 얹은 가이사가 뻔뻔하게 지껄였다.
“선물입니다.”
아니다.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으니 다시 한번 제대로 살펴봐야 했다.
“육각형의 하얗고 투명한 원석과 대천사의 금빛 날개를 형상화한 금장식. 크기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빛이 비칠 때면 무지갯빛이 오색찬연하게 일어나…… 손을 대면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손을 갖다 대니 정말 포근한 기운이 느껴진다. 책에서 읽은 성물 예례테티스의 설명 그대로였다. 원래대로라면 원작이 끝날 때까지 라가 신전 깊숙이 보관되어 있어야 할 예례테티스!
“마음에 드십니까?”
뭐? 마음에 드느냐고? 당신 지금 내 마음에 드느냐고 물은 거 맞아? 할 수 있다면 그의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고 싶다는 데자뷔가 일었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국보도 아니고 성물을 훔쳐요?”
“국보는 괜찮습니까?”
“당연히 안 되죠! 지금 그게 중요해요?”
“건강에 좋은 겁니다.”
“건강?”
예례테티스에 그런 기능이 있었나? 멈칫하자 그는 기회를 포착한 사냥꾼 같은 눈으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성력이 담겨 있다는 성물입니다. 기력 회복에는 이만한 게 없을 겁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성물을 짤랑짤랑 흔들었다. 그의 손에서 하찮게 흔들리는 쥐방울만 한 성물이 아름다운 빛깔을 번쩍이며 짤짤거렸다.
어때? 탐나지? 너 줄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성물로 장난치면 천벌 받아요, 가이사.”
“천벌?”
금장식에 부딪쳐 짤랑거리던 소리가 우뚝 멈췄다.
“이깟 걸 부수든 깨트리든 신은 참견하지 않을 겁니다.”
냉소 어린 입술이 서늘하게 비틀렸다. 정말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꽉 쥔 주먹 사이로 성물의 영롱한 빛줄기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사방을 비추는 성물은 신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음을 뜻하는 증표였다. 금속도 보석도 아닌 광물은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이례적인 것이었고 어떤 힘으로든 부서지지 않았다. 광역계 공격 마법을 연달아 맞아도 무사할 텐데 인간의 악력으로 부서질 리 없었다. 그러니 가이사는 헛된 일을 하는 것일 텐데 사르르 흩어져 반짝거리던 빛의 색이 변했다.
파삭! 그의 손아귀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성물의 비명처럼 짧고 강렬했다.
“뭐, 뭘 한 거예요?”
맙소사. 성물을 훔치는 걸로도 모자라 부수기라도 한 걸까? 나는 달려가 그의 손아귀를 억지로 벌렸다. 내 힘으로 벌어질 손은 아니었지만 그는 순순히 손바닥을 펴 안에 든 걸 보여 줬다.
“이게…… 뭐죠?”
예례테티스는 어디 가고 팔각형의 투명한 원석만 남았다. 예례테티스 중앙의 육각형과 닮았지만 황홀한 광채는 없었고 금색의 장식은 다 사라진 채였다.
“성물의 본래 모습입니다.”
“본래 모습이요? 책에서 설명하는 예례테티스의 모습은 아까처럼 금색 장식이 있는 건데요.”
“성물은 지상에 떨어진 신의 눈물방울입니다. 순수한 힘의 결정체에 다른 장식이 있을 리 없습니다. 화려한 장식은 일종의 눈속임입니다. 보는 것 외의 용도를 감추기 위한 가짜.”
“눈물……? 인어의 눈물이 진주가 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려나요?”
신은 대체 얼마나 크고 강건하시기에 눈물 한 방울이 이렇게 커다란지 모를 일이라며 잠시 주제에서 벗어난 생각이 들었다.
“껍질을 벗은 성물의 힘은 훨씬 더 강합니다.”
가이사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 위에 성물을 올려놓고 손을 꼭 쥐여 줬다. 손 안에 든 광물이 살아 있는 혈맥처럼 웅웅거리며 진동했다.
쿵! 한차례 맥동할 때면 포근한 기운이 손가락을 타고 전신에 퍼졌다. 손끝의 신경을 따라 번진 빛은 다이아몬드 가루처럼 반짝거리며 살갗 위를 맴돌았다. 햇살 아래 선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찬란함에 넋이 달아났다.
“드세요.”
“먹……으라고요? 이걸?”
가이사의 악력으로도 안 부서지는 광물을 어떻게 먹으라는 걸까? 씹히지 않을 텐데 그냥 삼켰다가는 필시 질식사할 것이다.
“선한 힘입니다. 악용하려는 게 아니라면 해치지 않습니다.”
“악용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천벌 비슷한 게 내릴 겁니다.”
“…….”
신의 힘을 사사로이 이용하는 게 악용이 아니면 뭘까? 그런 건 둘째로 치고서라도 잘못 깨물었다가는 이가 나갈 것 같았다. 역시 이건 아니었다.
“저를 믿고 드세요.”
“당신도 믿지 말라면서요?”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가이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씁쓸한 것도 같고 칭찬하는 것 같기도 하던 모호한 얼굴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할 수 없군요. 강제하는 수밖에.”
“가, 강제요? 잠깐! 왜 다가와요?”
거침없이 접근하는 그를 막으려 뒷걸음질을 쳤으나 그는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무례를 용서하시기를.”
“당신 응급 처치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 잠깐! 더 다가와 봐요! 강제로 하면 범죄야! 범죄라고!”
“범죄? 제가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습니까?”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무기질적인 눈빛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럼 됐군요.
눈가를 가린 시커먼 그림자와 찬란한 빛이 세력 싸움을 하며 범람했다. 이윽고 그림자가 이겼다. 가이사의 손이 내 턱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안 돼! 내 입에 뭘 넣으려는 거…… 응?
“제기랄.”
그는 짧게 욕하며 내 턱을 놔줬다.
“다, 당신 지금 욕했어요?”
“어떻게 해야 먹을 겁니까?”
내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도 하찮아서 조막만 한 걸 어쩌지는 못하고 인상만 찌푸리는 짐승 같았다. 결국 말뿐인 위협이라는 것이다.
“…….”
세상에. 이 남자 지금 뭘 한 거야? 내가…… 내가 그렇게 소중해? 가슴이 거친 질주를 시작했다. 정수리 끝까지 발갛게 변했을 것이다. 나는 혹독한 열병에 시달리는 중이니까. 헤실 풀려 버린 내 입술이 제멋대로 히죽거렸다.
“그거…… 먹을까요?”
그가 들고 있는 성물을 살짝 가리키자 가이사의 눈이 번뜩였다. 먹을까요? 라고 물었지 먹겠다고는 안 했는데 그가 벌린 내 입에 성물을 쏙 넣어 버렸다.
“……!”
쇳덩이를 입에 넣은 것처럼 느낌이 아주 나빴다. 불길함에 뱉어 내려고 하자 그가 검지로 입술을 꾹 눌렀다.
“뱉어 내면 안 됩니다. 부탁입니다.”
“…….”
다소 연약한 말에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3초쯤 그렇게 있었을까? 입안에서 구르던 광물이 끈적끈적하게 변했다. 심지어 맛도 먹기 좋게 변했다. 과육처럼 달고 상큼한 향기가 혀를 듬뿍 적셨다. 먹어도 괜찮다는 듯이.
“삼켜요.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그런 사정을 익히 짐작했는지 그는 차분히 눈을 맞췄다.
“…….”
저런 눈빛은 반칙이었다. 매번 믿지 말라고 하는 주제에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니까. 완전히 녹아 주스처럼 변한 성물을 꼴깍 삼켰다. 식도로 넘어가는 걸 느꼈는지 그는 내 턱을 위로 살짝 당겼다.
“입 벌려요.”
“머 더 아러고오(뭘 더 하려고요)?”
나도 참 나였다. 그냥 뿌리쳐도 될 텐데 다 받아 주고 있었다. 혀끝만 꼼지락거리며 말하자 의사 전달이 제대로 안 됐는지 그의 눈빛이 진해졌다. 피처럼 붉은 눈이 블랙홀에 휩쓸린 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에 그에오(왜 그래요)?”
내가 다시 묻자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뺨을 놓아주고 한 발 물러났다.
“잘 삼키셨네요. 착합니다.”
그러고는 쓱쓱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베니오가 종종 하던 짓이었는데 곁에서 보고 배운 모양이었다.
“…….”
당하는 나는 떫은 감을 삼킨 얼굴을 했을 테지만.
“한 달이나 갈까 싶은 당분간의 임시방편이지만 그동안은 몸이 편할 겁니다.”
그 말에 고개를 살짝 숙여 몸을 살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오늘 아침부터 몸 상태는 좋았기 때문에 활력이 살짝 도는 것 외에 차이점은 없었다.
튼튼! 건강! 우람! 두툼! 을 꿈꿨던 내 바람이 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서 있어도 힘이 덜 든다는 건 분명 좋은 점이었다.
“지금의 인간들은 알아내기 힘든 정보일 테니 성물이 어디로 갔는지 들킬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헉! 그러고 보니 성물을 훔친 건 가이사였지만 쓴 건 나였다. 말하자면 공범이고 들키면 사형이었다.
‘그래도 뭐.’
머리가 아파 왔으나 이미 먹어 보양식으로 삼은 걸 어쩔까? 상징물을 잃어버린 라가 신전에는 미안했지만 이미 써 버린 걸 뭐. 증거도 내 배 속으로 사라졌으니 완전 범죄였다. 미안하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내게 오는 피해는 없었다. 양심을 잃고 건강을 얻었다니 내게는 철저히 이득인 셈이었다. 훌륭한 계산 결과에 입가가 꿈틀댔다.
“흐흐흐.”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아. 내가 웃었어요?”
미안한 표정을 지으려 했는데 이상하네. 입가를 쓱 닦아 얼른 표정을 고쳤다.
“흠. 그런데 가이사는 이런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예요? 책에도 없는 정보인데.”
성물을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벌써 누군가의 배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고위 신관이나 황제 같은 권력자가 어떻게든 자기가 사용하려 했을 테니까. 단순히 건강 증진을 위한 거라면 그의 말대로 별 해악은 없는 것 같았고.
“……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알게 되었습니다.”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뭔가를 감추려고 에둘러 말한 것처럼 꺼림칙한 얼굴이었다.
“가이사의 아버지라는 분 말인데요. 인간이 아닌 거죠?”
힌트는 여러 번 있었다. 가이사는 아버지를 지칭할 때 ‘인간’이라고 표현하지 않았고 그가 싫어한다는 ‘인간’과 항상 차별점을 두었다.
─저를 좋아해 준 인간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확신을 얻은 건 어젯밤이었다. 가이사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해 준 건 분명해 보였는데 인간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으니까.
“제 아버지는 종말의 ……입니다.”
삐이이이이-! 찌르르 울리는 이명에 고막은 먹먹했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가이사의 입술은 흐릿했다.
“……종말의 뭐라고요? 잘 안 들렸어요.”
“종말의 ……입니다.”
삐이이이이! 애처롭게 울던 이명이 경고처럼 사나워졌다. 고막을 찌릿하게 만드는 세기에 눈가가 저절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내 입술은 분명 웃고 있을 것이다. 흐트러지는 정보 속에서 미지의 존재가 그렇게 감추던 비밀 하나를 건져 냈으니까. 이번에는 왜 기절시키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그 보호 마법이라는 걸 걸어 놓은 분은 가이사의 아버지죠?”
내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건 빗나갈 리 없는 정답이라고 믿기 때문에.
“예.”
무심코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가이사의 고갯짓이 우뚝 멈췄다. 그는 고개를 휙 내려 나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동자가 감미로운 선율처럼 찬미했다. 몹시 아름답고 선한 것을 바라보는 선망 어린 얼굴이었다. 아주 어린애나 할 법한.
“제 아버지를 기억하신 겁니까?”
신을 구원자라고 여기는 신도처럼 경건하고 뿌리 깊은 목소리였다.
“아니요.”
그런 그에게 이런 답변을 해 줘야 하는 내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게 기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레어노스라는 분은 제 기억에 없어요.”
가이사는 잠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내 사과에 애처로운 시선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보이지 않는 넝마 너머의 암흑으로 잔잔히 가라앉던 얼굴에 빛이 톡 번졌다. 무엇에 환희했는지 별빛처럼 반짝거리는 얼굴이 깊어졌다.
“아니요, 이제 괜찮습니다.”
그는 정말 괜찮아 보였다. 이제는 제법 적응이 되었는지 회복이 빨랐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죽었을 거라는 걸 예상하고 물은 말이었다.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열 살 때.”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건지도 몰랐다.
“가이사, 혹시 마법에 대해서도 잘 알아요?”
“제가 배운 건 꽤나 많습니다.”
“으음…… 시전자가 죽은 마법이 이렇게 강할 수 있나요?”
상식적인 질문이라 그는 잠시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내가 모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제법 친절하게 설명했다.
“마법은 의지의 발현입니다. 시전자가 죽어도 그가 남겨 놓은 의지에 의해 강력하게 발휘되기도 합니다. 신전의 보호 마법이 고대에서부터 이어진 것처럼.”
“그렇구나…….”
나는 뻔히 다 아는 얘기를 처음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그리고 아주 가볍게, 그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듯 물었다.
“시전자가 죽은 마법이 변하기도 하나요? 이를 테면 약해진다거나요.”
“아니요. 약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파쇄되는 경우는 있어도.”
죽은 사람의 마법도 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변동이 생길 수는 없었다. 그 마법을 지휘할 사람이 정말 죽었다면 말이다.
“아아. 역시…….”
그런데 참 이상하죠, 가이사? 나를 둘러싼 보호 마법은 분명 변하고 있는데. 오류를 수정하는 것처럼 매우 변칙적으로 즉각 임기응변을 하듯이. 아버지의 죽음을 겨우 떨쳐 낸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행여 기대했다가 크게 좌절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나는 어떤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레어노스는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존재하거나. 인간이 볼 수 없는 그 어딘가에서.
* * *
가이사는 레어노스의 죽음을 확신했다. 직접 보기라도 했는지 아주 강한 확신이었다. 나에게도 기억나느냐고 물어봤을 뿐 그의 행방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었다. 생각할수록 비밀이 많은 레어노스에 대해 궁금해졌지만 내가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가이사가 찾아내지 못한 정보를 내가 무슨 수로 얻을 수 있을까? 그 존재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할 생각이었다. 루베니오가 없는 지금이 적기였다.
“발밑 조심하세요.”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본 저택 지하의 도서관이었다. 타르시가 썼던 집무실은 텅텅 비어 건질 게 없었지만 도서관은 아직 치우지 않아서 그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지하에 책이 이렇게 많은데 공기가 깨끗하네요.”
“정화 마법을 사용했나 봅니다.”
“고서에는 먼지가 많을 텐데 대단…… 콜록!”
칭찬해 주기 무섭게 책 한 권을 펴자 먼지가 쏟아졌다. 쓸데없을 만큼 섬세한 기관지가 즉각 반응하며 기침을 토해 냈다.
“하나하나 다 정화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가이사는 내게서 책을 수거해 갔다.
“소나.”
그의 조용한 부름에 주먹만 한 초록빛이 마구 맴돌더니 귀여운 정령 하나가 튀어나왔다.
“소나야!”
“정화해.”
반가워하는 나와 명령부터 하는 가이사 사이에서 혼란이 왔는지 소나의 눈망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녀는 나와 가이사를 번갈아 보다가 내게 미안한 눈짓을 살짝 보내고는 그가 시킨 일부터 했다. 파닥거리는 요정의 날개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책 표면에 쏟아졌다. 뿌연 먼지가 먹구름처럼 모여 초록빛에 정화되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임무를 끝낸 소나가 내게 곧장 쪼르르 날아왔다.
“대단해!”
깨끗해진 책을 가리키며 감탄하자 소나가 양 뺨을 손으로 붙잡으며 부끄러워했다. 파닥거리는 날갯짓이 힘차서 위로 붕붕 떴다가 가라앉기도 했다.
“데리고 다니세요.”
그가 손짓하자 소나는 내 손등 위에 내려왔다.
“정말요?”
소나를 내 어깨 위에 올려 주자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마땅찮게 변했다.
“너무 오래 노는 건 안 됩니다.”
“왜요?”
“싫습니다.”
싫어? 뭐가 싫은데? 물어볼 틈도 없이 그는 휙 돌아 한쪽에 있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지정 좌석으로 삼았는지 편안하게 기대어 책까지 꺼냈다. 그의 손만 한 책이 어딘가 낯익었다. 스크래치를 방비하기 위함인지 덮개를 씌워 놔 표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크기가 딱 그거였다.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아기고양이 어쩌고저쩌고. 당장 저것을 뺏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어깨에 차가운 것이 툭 떨어졌다.
“앗!”
고개를 한껏 돌리자 내 어깨 위에서 히끅히끅 울고 있는 소나가 보였다. 닭똥 같은 눈물이 서럽게도 흘러내렸다. 가이사의 싫다는 말에 상처를 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주인과는 다르게 순수한 영혼이었다.
“…….”
애를 울리면 어떡해? 가이사 이 나쁜 사람아!
“책이 엄청 많네! 소나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큰 소리로 말하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살짝 들렸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하며 책장으로 다가갔다.
“먼지를 뒤집어써 먼지 덩이가 되고 말았을걸. 이것도 읽어야 하고 저것도 읽어야 하는데…….”
아무 책이나 연달아 가리키자 소나가 관심을 보이며 날아올랐다. ‘이거?’라고 묻듯 나를 돌아보는 얼굴이 앙증했다.
“응. 그거 다 필요해.”
먹구름이 그득하던 소나의 얼굴이 해맑게 펴졌다. 팔랑팔랑 날아간 정령은 날개를 힘껏 퍼덕여 최선을 다해 책을 깨끗하게 했다. 먼지 하나 없는 책을 사뿐히 들어 내 손 위에 올려 주는 건 덤이었다. 쌓인 두 권의 책 위로 소나가 수줍게 내려앉았다.
“저거랑 저것도.”
내 요구는 계속됐다. 소나는 기쁜 얼굴로 사방팔방 날아다니며 나에게 책을 물어 왔다. 내 주변에 책이 마구 쌓였지만 귀여우니 괜찮았다. 그러던 중 소나가 책장 맨 위에서 커다란 낡은 양피지 하나를 주워 왔다. 책만 가득한 공간에서 발견한 양피지가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족보?”
세이아의 것은 아니었다. 들어 본 적 없지만 화려한 이름들을 봤을 때 귀족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가이사, 세브너라는 가문 알아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만능의 가이사도 모르는 가문이었다.
“다른 나라의 가문인가?”
그때 소나가 손을 크게 벌리며 파닥거렸다.
“많다…… 이런 게 많다고?”
정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쁜 얼굴을 해 보였다.
“다 가져와 줄래?”
곧 먼지를 깨끗하게 걷어 낸 양피지 여럿이 날아왔다. 전부 다 다른 가문의 족보였다. 알폰소, 이르레스, 아가일, 마거, 조니트, 헤이야, 로이드…….
“로이드라고?”
오르도 로이드와 레이시 로이드. 로이드 가문의 족보는 거기서 끝났지만 나는 그들 사이에서 나온 아이를 알고 있었다. 메이아 로이드. 로이드는 원작의 여주인공인 메이아의 가문이었다.
“로이드 후작 가문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20년 전에 반역 가문으로 몰려 전원 처형당한 걸로 유명합니다.”
메이아의 부모님이 메이아를 타 죽은 것으로 위장해 그녀를 빼돌렸으니 살아남은 로이드가 한 사람 있기는 했다.
“20년 전에 멸문한 가문 족보가 왜 여기 방치되어 있는 걸까요?”
“학습 자료라고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부분이 있군요.”
제국의 귀족 가문과 그 특징에 대해서는 어릴 때 기본 교양으로 배웠다. 그러나 이 족보처럼 세세하게 구성원 전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요한 인물만을 뽑아 쓰는 거였다.
“눈에 잘 들어오도록 디자인되어 있지도 않고…… 대충 둘둘 말아 던져 놓은 것도 이상하네요. 버리려던 걸까요?”
“아무런 보관 마법 없이 위쪽에 대충 얹어 뒀던 걸 생각하면 버리려다가 까먹은 걸 수도 있겠습니다. 적어도 20년은 더 전에.”
멸문한 가문의 족보는 태워 버리는 게 관례였다. 낡은 정도로 봐도 그렇지만 아주 오래된 것임은 분명했다. 타르시가 사용하던 지하 도서관에서 나온 족보 여러 장. 단순한 우연일까, 생각하던 찰나에 소나가 마지막 양피지를 찾아 돌아왔다. 낡았을 뿐 멀쩡한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구겨지고 찢어진 것이었다.
[Ðŧĸ ĿŁØ đŊþ ßøŋʼnij!]
통통 튀어 오르는 물방울 화음처럼 청아한 목소리가 노래하듯 재잘거렸다.
“무슨 뜻이죠?”
“구석에 구겨져 있는 걸 자기가 찾았답니다.”
가이사의 해석이 맞는지 소나가 손뼉을 짝짝 치며 좋아했다. 계약한 정령에게서 훼손된 양피지를 건네받은 가이사의 눈빛이 변했다.
“샤사롯의 것입니다.”
“샤사롯?”
샤사롯 백작 가문을 상징하는 하얀 백합이 찢어져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로페니아 샤사롯. 우연인지 운명인지 이끌리듯 그 이름에 눈길이 닿았다.
“…….”
니네이나의 친모이자 이제는 죽고 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세이아로 남지 못하고 다시 샤사롯으로 돌아간 여자의 이름.
“괜찮으십니까?”
아득했던 세계가 그의 말에 돌아왔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요? 기억도 안 나는데.”
서늘하고 모진 말에도 그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그것보다 이게 수상하네요. 로이드와 샤사롯은 같은 날 같은 이유로 멸문당했어요. 황태자 칼리탄을 암살하려고 한 죄로.”
“이르레스나 마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확실히 알아봐야 알겠지만 족보의 가문들은 20년 전 반역죄로 멸문당한 가문들 같습니다. 아마도 로이드나 샤사롯 휘하 가문일 겁니다.”
“사실 이건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20년 전의 사건은 좀 수상하지 않나요? 황족은 원래 정적이 많다지만 어린 황태자를 죽일 이유가 이 가문들에 있었을까요?”
“때론 후계자가 있다는 것만으로 황권이 커지기도 합니다. 귀족파였던 로이드와 샤사롯이 황권을 경계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만…….”
이 사건은 원작에서도 아주 잠시 언급되고 지나갔는데 나는 그때도 어린 황태자를 죽이려는 이유가 빈약하다고 생각했다. 역모의 주역이 된 가문은 로이드였는데 당시 로이드 후작 부인은 메이아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굳이 위험하게 역모를 주도한다? 부족함 없이 화목하게 살던 부부가 첫 아이의 탄생을 앞두고? 적어도 원작에서 거론된 로이드 부부의 성향은 그렇지 않았다. 여주인공의 부모답게 선한 사람으로 묘사됐다. 황권 위협을 위해 어린아이를 죽일 사람들은 아니었다. 나는 이 장치가 예고된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식의 서사를 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설은 내게 현실이 되었고 그렇기에 단순한 맥거핀으로 볼 수 없었다. 망치에 깨져 움푹 들어간 바위처럼 인위적이라 손끝에 깔짝깔짝 걸렸다.
“흐음…….”
조각난 정보로 추론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 사건 이면에 타르시 전대 공작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지만 겨우 심증이었다. 조사해 볼 수 있는 건 몇 가지 있었다. 저 가문들이 정말 역모에 가담한 것이 맞는지와 그 사건으로 누가 이득을 취했는지. 그런데 만약 멸문한 샤사롯의 재산이 타르시에게로 흘렀다면, 나는 그에게서 되찾아 올 것이다.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세이아라는 성도, 한때 빛나던 샤사롯의 가문도. 그것이 이 몸을 차지한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우였다. 그나마도 걸어가는 길목, 그 지척에 있기에.
* * *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돌아갈 때였다.
“그 성물이라는 거 정말 신기하네요.”
뒤에 따라오는 하녀들이 있었기에 그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게 속삭였다. 몇 걸음 떨어져 있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유난히 좋은 청력은 내 말을 어렵지 않게 낚아챈 것 같았다.
“효과가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몇 방울 더 떨어져 있으면 구해 올 텐데 고작 한 방울이라 아쉽습니다.”
성물이 길가에 떨어진 돌이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데 어디 다치지는 않았어요? 가져오는 길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요령이 좋은 편입니다. 들킬 걱정도 안 하셔도 됩니다.”
“으음…….”
어떤 방식으로 훔쳐 온 거지? 괴도 가이사의 지난 새벽이 궁금했으나 그것보다는 만족감이 컸다. 신의 물방울이 어딘가에 또 떨어졌다면 내가 직접 앞장서서 나서고 싶을 정도였다.
“낮잠은 안 자도 되겠어요.”
몸을 조금이라도 쓰면 잠을 자서 체력을 보충해야 하는 단점이 있는 몸인데 지금은 펄펄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윽!”
내 기준으로 꽤 오래 걸었는데 아프지 않은 발바닥을 신기하게 보다가 그의 등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럼 나들이를 가시겠습니까?”
“나들이요?”
“여행은 어렵지만 나들이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돌아선 그가 손을 들어 내 얼굴을 살짝 가렸다.
“모자는 꼭 쓰는 게 좋겠으나.”
가을볕이 제아무리 따갑다고 해도 몸으로 한 번 막고 손으로 한 번 가린다면 모자는 이미 쓸모없을 텐데도.
* * *
이게 얼마 만의 제대로 된 외출이야! 구름 위를 두둥실 나는 기분이 들었다. 갑갑한 실내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이 너무 커서 다른 생각은 거의 안 들었다. 물론 위험에 대해 전혀 인지 못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르시라고 해도 몸이 약한 내가 갑자기 외출을 감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로 이동한다면 더더욱.
“도착했습니다.”
눈 한 번 질끈 감고 버티자 어느 건물 옥상에 내려설 수 있었다. 높이가 있는 건물이라서 아래가 잘 보였다. 현대의 수도만큼 사람이 빽빽하지는 않았지만 웅성거리는 활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거리는 잘 관리되어 깨끗했고 노랗고 빨갛고 파란 각양각색의 천막이 둥글고 귀여웠다. 고소한 빵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화려한 상점이 줄지어 있어 생각 이상으로 볼거리가 많았다.
“저쪽이 번화가인가 봐요!”
나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외쳤다.
“뛰면 안 됩니다.”
아이처럼 신이 나 내달리자 그가 쫓아오며 속삭였다. 말은 그래도 크게 말리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대신 그의 온기가 묵묵히 붙어 왔다. 언제든 잡아 줄 준비가 된 사람처럼.
“어디부터 가죠?”
“살롱에 가시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저쪽이 좋습니다. 평민 귀족 나뉘지 않고 섞여 있는 곳인데,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그쪽이 더 좋죠!”
상류층이 할 수 있는 건 몇 달간 질리도록 해 봤다. 화려한 드레스와 아름다운 장신구는 집 안에서도 구경한 것이어서 그런 것보다는 먹거리 쪽이 끌렸다. 가이사가 가리킨 길목은 알록달록한 상점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과일을 파는 과일 장수와 화분이 여럿 나와 있는 꽃 가게, 도자기로 만든 아기자기한 물건을 파는 상점까지. 종류는 다양했지만 가장 먼저 눈길이 간 건 나무 꼬챙이에 과일을 꽂아 파는 곳이었다. 시럽을 한 번 씌워서 반짝반짝 빛나는 때깔이 곱기도 했다.
“먹거리야말로 그 나라의 문화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보물…… 아.”
정신이 얼마나 나갔는지 돈을 챙겨 오는 걸 깜빡했다.
“가이사, 돈 좀 있어요?”
말해 놓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삥 뜯는 양아치의 전형적인 대사 같았다. 담 크게 가이사에게서 돈을 뜯어낼 사람이 있겠냐만.
“챙겨 왔습니다. 동화와 은화도.”
묵직한 주머니가 그의 허리에 걸려 짤랑거렸다.
“집에 가서 갚을게요.”
나는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직접 하실 겁니까?”
“네. 물건은 직접 사는 맛이 있어야죠.”
보통은 하녀를 데려와 하녀가 값을 치르게 했다. 귀족이 직접 돈을 치르는 건 체면 상하는 일이었다. 값을 치를 하녀 한 명 없이 빈곤한 가문이라는 뜻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니네이나 세이아로서 이곳을 찾은 게 아니었다. 자유롭든 방탕하든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딱딱하지 않겠습니까?”
“전혀요. 입에 넣으면 다 녹는 거예요.”
시럽을 끼얹은 과일이었지만 생긴 건 아이스바에 가까웠다. 조각내지 않고 큼직큼직하게 잘라 놔서 베어 먹는 맛이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계속 망설이자 손을 좀 더 내밀었다. 이제는 소화력이 꽤 좋아져 못 먹는 게 거의 없어진 나는 당당했다.
“하나만 드세요.”
그는 결국 동전 하나를 내 손바닥 위에 놓아 주며 어린아이 달래듯 충고했다. 나는 이미 돌아선 후라 그의 한숨은 허공으로 금방 흩어져 버렸다.
“이거 하나 줘.”
어느새 반말이 익숙해졌는지 존댓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당황하여 머뭇거리는 나를 흘긋 본 과일 장수가 큰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시럽이 손에 흐르지 않도록 종이로 감싼 꼬치가 내 손으로 넘어왔다. 나는 조금 감격하고 말았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직접 산 물건이었다. 발갛게 익은 과육을 탐스럽게 바라보는데 ‘아삭!’ 하는 소리가 나며 내가 들고 있던 과일에 구멍이 났다. 벌레 먹은 이파리처럼 반원 모양의 구멍이 난 과일 틈으로 가을볕이 쏟아졌다.
“……가이사?”
“독은 없지만 역시 좀 딱딱합니다. 꼭꼭 씹어 드세요.”
시럽이 묻어 끈적끈적한 입술을 촉촉하게 핥은 그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미를 본 건가?’
우연히 산 이런 것에 독이 들었을 리는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혹시나 그가 내 걸 일부러 빼앗아 먹어 놀린 게 아닐까 하던 생각을 머리 한구석으로 치웠다.
“당신은 만독불침이라도 돼요?”
“어느 정도 내성이 있습니다.”
“독에요?”
“예.”
황족도 아닌데 왜 독에 내성이 있지? 숲속에서 이것저것 주워 먹기라도 했나? 자세한 사정을 묻기가 어려워서 말을 돌렸다.
“가이사도 나 때문에 못 나왔을 텐데 어디 들를 데 없어요?”
“신작이 나왔을지 모르니 서점에 가야겠습니다.”
“신작이요?”
“이건 시리즈물입니다.”
그는 작은 책을 꺼내 흔들었다. 지하의 도서관에서 진중한 얼굴로 열독하던 책이었다.
“…….”
“잠시 신작이 나왔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그의 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붙잡아 당겼다. 지나가던 사람의 옷자락이 내 어깨를 붙잡은 손이랑 스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의 어깨는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부딪혔다.
“윽!”
바윗덩이에 부딪쳐 엉덩방아를 찧은 남자 하나가 이마를 감싸 쥐고 끙끙거렸다. 양쪽에서 사람이 뛰어와 나나 그 중 한 명은 부딪혀야 할 상황이었는데 내 쪽을 우선해 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타인과 접촉하게 된 그는 옷에 부딪힌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싸늘한 얼굴이었다. 달려온 남자의 잘못이기는 했다. 가이사의 시퍼런 눈길을 맞은 남자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먹이 사슬의 우위를 판단하고 재빠르게 도망친 처사가 꽤 현명하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불쾌합니다.”
아니라는 말은 안 하는 게 이 남자다워 살짝 웃음이 났다. 혐오를 가득 담아 서슬 퍼렇게 빛나는 눈이 짜증스럽게 감겼다. 화를 참듯 감은 채로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은 머지않아 사르르 휘어 올라갔다.
“사람이 많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다시 주의를 주곤 어깨를 잡아 줄 때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당겼다. 타인과의 접촉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앞장서서 길을 뚫어 주는 등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랬다. 단단하게 곧추선 견갑골의 윤곽만 보일 만큼.
온종일 쨍쨍한 가을볕이 드러난 뒷목과 새까만 재킷을 태웠다. 흐트러지는 빛의 향연에 아주 잠시 그의 등 위에 시커먼 날개가 돋아난 듯한 착시가 일었다. 하얗지는 않아도 그를 닮아 강건한 까만 날개.
* * *
나는 이것저것 꽤 많이 구입했는데 가이사는 빈손이었다. 그 이상한 신작이 나오지 않은 덕이었다. 답지 않게 육아 상식 코너에 버티고 서서는 점원을 지그시 압박하던 가이사는 결국 내 손에 끌려 나와야 했다.
“아버지가 벌써 돌아오신 건 아니겠죠?”
나와 가이사 그리고 하녀 몇 사람만 아는 비밀스러운 외출이었다. 다 끝난 다음에 들키는 건 상관없지만 도중에 들켰다가는 괜한 걱정만 살 것 같아서 살짝 초조해졌다.
“지금 가면 늦지 않을 겁니다. 마차를 이용하든 날아가든.”
혹시 정문을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나올 때는 하늘길을 이용했지만 돌아갈 때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으음. 어떻게 할까요? 정면으로 돌파할까요?”
마차를 이용하면 이 외출을 필히 들킬 테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루베니오에게는 이만큼 몸이 건강해졌다는 어필이 될 테고 적들에게는 혼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언제 나간 거지? 감시를 소홀히 한 건가? 무슨 수를 썼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것도 재미있겠어요.”
“중심가에 마차를 빌릴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수도의 파수꾼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거리가 수도의 번화가였다. 그 중심에는 가문의 인장이 없는 여러 대의 마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중심가다 보니 아무래도 넓은 골목이 많지만 건물 틈을 파고들어 가면 좁은 길목도 많았다. 알록달록한 상점과는 대조적으로 작고 큰 건물은 죄다 하얀색이라 가을의 창천과 색 조합이 알맞았다.
“여유롭네요.”
숲의 오솔길이라도 걷는 기분이었다. 기분에 취해 돌아보면 그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저를 잃어버리지만 마세요.”
이쪽저쪽 구경하느라 두리번거리는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그는 내 손을 꼭 잡아 붙들며 말했다. 헬륨 가스를 가득 넣어 통통 튕겨 오르는 풍선이 된 기분이었다. 저 높은 하늘 위로 빨갛게 부푸는 풍선의 끝은 그가 쥐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걱정할 게 없었다. 그는 절대 그 끝을 놓치지 않을 테니까.
“가이사가 꽉 잡고 있잖아요.”
“힘 조절이 힘듭니다. 다칠까 봐.”
“손잡는 것 정도는 괜찮아요.”
희희낙락한 나는 그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기분이 좋아 자꾸만 둥둥 떴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하아’ 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골이 아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터집니다, 내 두부는.”
손의 힘을 가늠하며 쥐락펴락하는 손아귀에 혈류가 흐르다가 끊기기를 반복했다. 하늘 조각이 푸른 파도가 되어 귓가로 몰려들었다. 고막을 먹먹하게 메운 수분에 귀가 완전히 멀고 말았다.
─내 두부는.
애정인지 집착인지 모를 소유격 하나가 미친 듯이 범람하여 귀청을 때리고 뼛속 깊이 파묻혔다. 무슨 두부? 경악하여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시종 무덤덤한 낯빛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자각하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부풀어 오르는 풍선이 되어 청명한 하늘을 염탐하는 내 꼴만 불긋했다.
“마, 마차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기 있습니다.”
괜히 말을 돌리려 두리번거린 게 무색하게 바로 앞에 마차들이 보였다.
“따로 타시고 싶은 마차가 있습니까? 아동용 파티 마차도 있습니다.”
다른 마차보다 조금 작은 알록달록한 마차가 보였다. 사라가 꾸민 내 전용 들것만큼 화려하고, 호박으로 만든 마차처럼 앙증했다. 그런데 아동용이라 몹시 작았다. 가이사 같은 거구가 타려면 필시 어깨를 잔뜩 움츠려야 할 것이다. 잔뜩 구겨 앉아 소형차를 모는 그의 모습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풉! 너무 안 어울려.”
“왜 웃습니까?”
남이야 자기를 보고 웃든 말든 그는 덤덤했다. 기쁨도 불쾌함도 없이 약간의 의문만 어린 눈동자가 말갛게 빛났다. 저럴 때는 순진한 소년 같아서 마구 놀려 먹고 싶었다.
“내가 저거 타자고 하면 탈 거예요?”
“탈 겁니다.”
“아하하하하!”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는 내 모습에 그가 고개를 두 번쯤 갸웃거렸다. 그는 정말 저 마차를 빌리려는지 주머니와 마부를 번갈아 봤다.
“타실 겁니까?”
다가오는 그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마부가 일어서며 물었다.
“됐어요, 됐어. 불편할 거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 발짝 걸어가려는 그를 붙잡아 말렸다.
“타고 싶은 게 아닙니까?”
“태우고 싶은 쪽에 가까웠는데…… 아! 혼자 저거 타고 오는 건 어때요?”
상상만 해도 웃겨서 웃음소리가 푸흐흐 흘렀다.
“혼자는 안 됩니다.”
안 된다는 이유야 내 안전 때문일 게 뻔했다. 너무 웃어서 눈꼬리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 너무 웃겨서 눈물 나. 가이사는 생일이 언제예요? 선물해 주고 싶네.”
“생일…….”
감정의 변화 없이 태만하던 눈꺼풀에 음영이 깊게 졌다. 오래 묻어 둬 기억나지 않는 것을 찾아 헤매는 것 같았다. 고민하던 그가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달싹거릴 때, 옆 건물의 유리창이 터졌다.
퍽! 와장창!
“뭐, 뭐야?”
거리가 꽤 있어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놀라서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게 됐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빠져나온 시커먼 복면의 남자가 당황하는 나를 스치듯 바라보고 지나쳤다.
“찾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다!”
무장한 남자 여럿이 그 남자를 뒤따라 나오며 소리쳤다. 여러 개의 발에 터진 유리 조각이 와작와작 밟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대낮에 술집에서 시비라도 붙었나?”
“평범한 술집 같아도 지하는 정보 길드입니다.”
그거 완전 클리셰잖아? 수도의 인기 술집 지하가 정보 길드인 거. 역시 원작이 소설이라서 그런지 판타지 세계관의 클리셰가 대부분 맞아떨어지는 편이었다.
‘정보 길드에 쫓기는 사람은 꼭 중요 인물이던데…….’
유리창을 깨면서 다쳤는지 붉은 피가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길을 가리키는 방향표처럼 말이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네. 가이사는요?”
“저도 괜찮습니다.”
“으응. 얼른 가요.”
그러나 이미 도망친 남자를 무슨 수로 찾을 수 있을까? 신경 끄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우리는 마차가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곳도 현대의 택시처럼 앞에 정차한 마차를 우선적으로 이용하는 게 관례였다.
가이사가 다가가자 마부는 창백하게 질렸다. 나는 마부의 심정을 백번 이해했다. 가이사는 인간을 싫어하는데, 그 감정을 숨겨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낄 때는 위압감이 폭력처럼 쏟아졌다. 실제로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게 아니더라도 짙은 살기와 혐오는 사람을 움츠리게 할 만했다.
“내가 직접 계산할래요.”
불쌍한 마부를 구원해 주기 위해 손을 내밀자 얌전하게 돌변한 그가 내 손 위에 주머니를 건네줬다.
“세이아 저택으로 가려고 하는데…….”
짤랑짤랑 동전을 세어 마부에게 건네줄 때였다.
“선객이 들었습니다.”
“선객이요?”
먼저 온 손님이 있나? 다른 걸 타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옆에서 으르렁대는 사나운 기세를 느끼고 멈칫했다. 냉랭하다 못해 싸늘한 눈빛이 저 하찮은 걸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들짐승 같았다.
“잠시 도움을 청하고 싶다.”
내가 탈 마차에 먼저 오른 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청아한 눈동자 밑으로 신이 공들여 빚어낸 얼굴이 보였다. 가이사 못지않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면역이 없다면 압도적인 오라에 소름이 끼쳤을 만큼.
“당신이 왜……!”
원작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도망자 칼리탄의 허벅지가 피로 붉게 젖어 있었다.
* * *
엘리니움의 백성이 황족을 믿고 따라야 한다면 엘리니움의 귀족은 황족을 지탱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일종의 충성 서약인데 당연하게도 철저히 지키는 귀족은 많지 않았다. 허울뿐인 구속이었으니까. 그런데 뭘 믿고 다친 몸으로 내게 도움을 청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순진한 귀족 영애라고 생각하여 당연히 도울 거라고 여겼나? 나는 그를 도울 생각이니 결론적으로 그에게는 나쁘지 않은 판단이 되었겠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꺼림칙했다.
마차에 탄 우리 세 사람은, 아니, 나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칼리탄을 태워 주기는 했는데 이 사건을 어떻게 이끌어야 유리할지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칼리탄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가이사는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차갑게 굳힌 채였다.
“치료가 급해 보이는데…… 독에 당하신 건가요?”
“내성이 있다. 가만히 둬도 상관없어.”
칼리탄은 숨이 차 색색거리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무슨 도움을 바라시는 건가요?”
“얼마 전 세이아의 공작이 바뀌었다지. 따로 작위 승계식을 열지 않았는데도 모두가 그 일로 입방정을 찧어 대더군.”
“그 일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죠?”
설마 황태자 살인 미수죄를 세이아와 연관시킬까 봐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그는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어디의 주인공이 다 그렇듯 주인공의 스펙을 가졌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면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게 살짝 거북해졌다.
“잠시 머무르게 해 주는 걸로 충분하다. 비공식적으로.”
경계했던 일은 아니지만 예상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원작에서처럼 칼리탄은 루베니오의 협력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 루베니오가 대놓고 나를 감싸고돌았으니, 내 도움을 통해 그와 접촉할 생각인 것 같았다.
‘원작에서도 메이아와 이런 식으로 시작하던가?’
처음에는 교차점으로 이용하려던 여자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 칼리탄에게 원하는 바가 있는 내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쫓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칼리탄은 원래 어렸을 때부터 무수한 암살 시도에 시달리던 사람이지만 오늘은 상처를 매달 만큼 큼직한(?) 사건이라는 게 거슬렸다. 괜히 휘말리는 건 사양이었다. 장사는 수지에 맞게 해야 뒤탈이 없으니까.
“루베니오가 귀찮은 걸 들였다고 걱정할 겁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는데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엄청난 발언이 들렸다. 짜증이 한가득 담긴 눈동자가 선연한 살기를 붉게 깔아 뒤틀렸다. 어둡고 진한 눈빛은 독에 전 핏덩이 같기도 했다.
“귀찮은 것?”
칼리탄은 산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목 끝까지 차오른 죽음에 익숙한 그는 가이사의 살기를 받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놓고 말하는 놈은 또 처음이다.”
칼리탄은 바라지 않겠지만 가이사의 태도에 분노보다는 흥미를 느낀다는 점이 부친인 황제와 닮아 있었다.
“가이사 아델만.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군.”
뭐래, 저 황태자가? 당연히 들어 봤겠지. 가이사는 작중 최강인데. 순간 빈정이 확 상했다. 내가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하자 칼리탄의 눈빛이 변했다.
“그 소문은 사실인가?”
차분한 남청색 눈이 냉철하게 빛났다. 숨을 꽉 잠기게 하는 시선이었지만 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뭔데, 그 소문이라는 게?
‘가이사는 알아요?’
‘모릅니다.’
눈으로 말해요 스킬에 레벨이 있다면 우리는 Level 7 정도는 가뿐히 찍었을 거다. 오고 가는 정다운 눈짓에 칼리탄은 확신 어린 얼굴을 했다.
“혼인 동맹인가?”
“뭔…… 동맹이요?”
너와 너. 칼리탄이 친절하게 시선으로 나와 가이사를 번갈아 가리켰다.
“…….”
어처구니가 없어 입만 헤 벌렸다. 나도 모르게 가이사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는데 그는 의외로 깊게 고심하고 있었다.
“후작이라는 지위는 있지만 동시에 공자였던 루베니오는 타르시의 눈치를 보느라 공작가의 기사단 외에는 따로 사병을 키우지 못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군사력이라고 할 정도로.”
그저 사실을 읊조리는 것처럼 덤덤한 말투에 이상하게 열이 받았다. 우리 아빠는 약점 같은 거 없거든! 천하무적이야! 주장하고 싶은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선대는 후계자의 개별 무력 집단을 가장 경계해. 네 아버지는 그런 의미에서 현명했다. 군권이 아니라 상권을 거머쥐었으니.”
“…….”
“벽 없는 성은 제아무리 홀로 고고해도 무너지기 십상이다. 루베니오도 그걸 알기에 스스로 검을 휘둘렀겠지. 그런 그가 이토록 갑작스레 타르시를 내칠 수 있게 된 건 가이사, 그대의 영향이 아닌가?”
창천을 반쯤 베어 먹은 구름이 입을 찢어 벌리는 것처럼 보였다. 배가 터져 죽어도 드넓은 청공을 다 삼키고야 말 얼굴이 역설적으로 청명했다.
‘또 욕심내네.’
조용히 묻고 있지만 결론은 그것이었다. 네가 그렇게 대단해? 나도 좀 보자. 가이사가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도 아닌데 자기가 뭐라고 이래라저래라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 보니 마음에 안 들었다.
“탐욕은 재앙을 부르고.”
내가 뭐라고 한마디 하기도 전에 내뱉는 가이사 때문에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다룰 수 없는 칼날은 그 목을 벱니다.
“다룰 수 없는 칼날은 그 목을 벱니다.”
내가 뒤에 이어질 말을 떠올린 것과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말했다.
─당신은 아닙니다.
“당신은 아닙니다.”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조소도 냉소도 없이 조용한 뇌까림은 원작의 대사와 완전히 합치했다. 가이사의 캐릭터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대사여서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이었다.
섣불리 그를 붙잡으려 들면 죽는다. 나는 그것이 누구도 감히 자신을 휘두르도록 두지 않겠다는 높은 프라이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뜻이 아니었다. 누구도 휘두를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정확했다. ‘휘두를 수 없다’와 ‘휘두르게 두지 않겠다’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몹시 무거운 검은 따로 방어하지 않아도 훔쳐 갈 수 없는 법이니까.
“나는 안 되고 루베니오는 된다는 뜻인가?”
옆에서 슬금슬금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한껏 불쾌해진 가이사가 뿜어내는 살기였다. 왜 자꾸 자기를 루베니오에게 갖다 붙이냐는 언짢음이 피곤함을 담아 이지러졌다.
“루베니오도 아닙니다.”
참아 보려던 그는 곧 빠드득 이 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오해가 몹시도 싫은 것 같았다.
‘왜! 루베니오가 어때서!’
의문의 1패를 모를 루베니오 대신 내가 다 상처 받고 있었다.
“그럼 뭐지? 의도하였든 아니든 너는 분명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루베니오의 세력이 불어나는 걸 황제가 경계할 만큼.”
그 쪼잔한 뱀 같은 황제가 그럴 줄 알았지. 겉으로는 잘해 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리저리 재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제는 아마 루베니오와 타르시의 소모전이 길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한 번 루베니오의 편을 들어 줬으니 이제 타르시의 편을 들어 줄 때도 됐고. 내가 칼리탄을 필요로 하는 건 그래서였다. 칼리탄은 적어도 박쥐처럼 이쪽저쪽 갈아타지는 않았다.
“가이사, 그대는……”
“설명하기 귀찮습니다.”
너와 말 섞기 싫으니 그만 닥치라는 어조였다. 저 말본새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구나……. 가이사의 사교성이 통렬하게 안타까웠다. 가이사가 대체 어떻게 귀족 지위를 유지해 왔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아마 공식적인 행사에 조금이라도 더 열성적으로 참여했다면 적이 수십 명은 쌓였을 것이다. 칼리탄도 이런 식으로 당하는 건 처음인지 눈에 차가운 분노가 어렸다. 쯧쯧. 저 황태자님은 가이사와 친해지긴 글렀다. 저 정도도 못 버텨서야. 그의 지위가 얼마나 높든, 숙여야 하는 건 칼리탄이었다. 원하는 게 있는 쪽은 칼리탄이니까. 가이사로서는 굳이 그의 말을 들어 줄 이유가 하등 없었다. 말 그대로 귀찮은 파리 하나가 윙윙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군.”
흔들림 하나 없이 냉랭하던 눈동자가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과연 남주라는 걸까? 적어도 황제 이상의 그릇과 배포는 가지고 있었다.
“가이사에게 차이셨네요.”
“차이…… 뭐?”
입으로 내뱉기 싫었는지 고고한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부탁할 상대가 틀렸어요. 세이아는 내 집이에요. 기회가 한 번 더 남았다는 뜻이죠.”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헛된 일에 힘을 쏟았다는 걸 깨닫고 벌어졌던 칼리탄의 입술에서 탄식 같은 웃음이 피식 빠져나왔다.
“실수였다. 설마 내가 줄을 잘못 섰을 줄이야.”
“줄타기가 중요한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셨어요.”
“사과하지.”
“그걸로 입을 싹 닦으시려는 건 아니겠죠?”
나 니네이나 세이아인데? 그런 의미로 자못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자 칼리탄의 미소가 깊어졌다.
“내가 어떻게 해야 영애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그는 차분하고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독에 당한 사람 같지 않게 단정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말로는 무슨 말이든 못 하겠어?
“우선 계약서부터 써 주시죠.”
나는 신체 포기 각서를 내미는 사채업자처럼 질 나쁘게 웃었다. 남주의 운명이 얼마나 끈끈할지 가늠해 보고 싶었기에.
* * *
「본 계약서는 니네이나 세이아(이하 갑)와 칼리탄 루크 그리아란 엘리니움(이하 을) 사이에 체결한 것으로 갑과 을은 신의와 성실로써 본 계약을 지킬 것을 다짐한다.
제1조
을은 본 계약서가 작성된 날로부터 3일간 세이아 저택에서 비공식적으로 머문다.
제2조
갑이 제1조를 선행하지 못한 경우 제3조, 제4조, 제5조는 무효 처리된다.
제3조
을은 그 대가로 갑의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
단, 갑의 소원은 을이 들어줄 수 있는 범위에 한한다.
을은 역량을 다해 갑의 소원을 이루어야 한다.
제4조
본 계약은 을이 갑이 만족할 수준으로 소원 하나를 이루어 주었을 때 만료되며, 갑은 이 시기를 “만족합니다.”라고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
제5조
만료되지 않을 시 본 계약은 을의 사망(호흡과 심장이 멈춘 상태로 규정) 전까지 유효하다.
제6조
본 계약서는 2부를 작성하여 갑과 을이 각각 1부씩 보관한다.
(갑) 니네이나 세이아
(을) 칼리탄 루크 그리아란 엘리니움」
나와 칼리탄은 작성한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썩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은데 칼리탄은 잔뜩 시달린 얼굴이었다. 가을바람에 머리칼은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마른 낙엽 하나가 볼품없이 붙은 부랑자 같다고나 할까? 생생하던 눈동자에 힘이 쭉 빠져 있었다. 혹시 안 하겠다고 물리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사인을 해서 넘겼다.
“을은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무리해서라도 갑의 소원을 이루어 준다, 라는 항목은 수정해 드렸잖아요.”
“그건 노예 계약이었다.”
“겨우 소원 하나 가지고 무슨 노예 계약씩이나요?”
“허점이 많은 계약서지. 소원의 범위가 어디까지 지속될지도 모르고.”
두루뭉술하게 소원이라고 표시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웬만하면 이 계약서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일이 잘 풀린다면 칼리탄은 공짜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거였다.
“전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소원을 안 빌 수도 있잖아요. 그럼 전하만 좋은 거예요.”
“그건 다른 의미로 무섭군. 평생 이 계약서를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니까.”
“고작 제 소원이 뭐가 그렇게 어렵겠어요? 제2조에 을이 들어줄 수 있는 범위에 한한다고 추가해 드렸잖아요.”
“소원이라…… 이건 아마 나만 들어줄 수 있는 것이겠지. 루베니오의 재산으로도 이룰 수 없는 것인가?”
“생각만큼 무리한 요구는 아닐 텐데요. 잘해 드릴게요.”
“…….”
“일단 사인부터 하고 생각해 봐요.”
방긋 웃으며 그가 사인해야 할 곳을 친절하게 짚어 주자 칼리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칼리탄은 꼭 귀신이라도 본 얼굴을 했다.
“오싹하군.”
겨우 이 정도로? 피식 웃은 나는 순식간에 태도를 달리했다.
“하기 싫음 말든가요.”
시정잡배처럼 껄렁껄렁하게 손을 흔들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약서에도 쓰여 있지 않나? 갑과 을이라고. 루베니오와의 접촉을 원하는 한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하.”
자기가 정말 손해 보는 계약이라는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종이에 펜을 갖다 대었다. 종이에 닿을 듯 말 듯 뭉글거리던 잉크가 긴 선을 유려하게 그었다.
“이것으로 되었나?”
사인을 끝낸 칼리탄이 질린 얼굴로 서류를 내밀었다. 루베니오와 대화의 장을 마련해 줄 시 소원 하나를 더 추가하겠다는 조건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가 건넨 종이를 받아 사인이 잘되었는지 살폈다. 간략한 계약서는 두 사람의 사인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흠흠. 환영합니다, 고객…… 아니, 전하.”
이미 세이아 저택 앞에 도착한 마차 문을 손수 열며 그를 환영했다.
“대체 무슨 소원을 빌려는 건지 기대하고 있겠다.”
칼리탄이 마차 밖으로 나서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좋은 계약을 따내지 못한 패배자의 얼굴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생각보다 심약한 사내가 아닐 수 없었다. 할 수 없다. 이쯤에서 당근을 줘서 달래는 수밖에.
“메이아.”
“예, 주인님!”
마중 나와 있던 메이아가 활기차게 대답하며 앞으로 나왔다. 칼리탄의 눈길이 스스럼없이 움직였다. 아무 생각 않고 그녀를 봤던 눈동자는 곧 살짝 흔들렸다. 메이아를 기억하는 게 분명했다.
‘자기를 못 알아보는 하녀는 처음이었겠지.’
흐흥. 어떠냐! 이게 바로 여주의 발랄함이다! 새끼를 자랑하는 어미 개가 된 심정으로 비죽 웃자 칼리탄의 얼굴에 경계가 서렸다. 그는 감시하듯 메이아를 쭉 훑었다. 이 존재는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간파하려는 속셈이었다. 메이아는 수줍게 웃으며 칼리탄의 눈길을 받아 내고 있었다.
“손님 모셔. 치료부터 받으셔야 할 것 같거든.”
“아…….”
쿠궁! 메이아의 얼굴이 세상의 절망을 맛본 듯 변했다.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제외한 다른 하녀들이 척척 걸어와 내 뒤에 섰다. 나는 자연스럽게 외투를 건네는 사라의 시중을 받다가 아직도 망연한 구렁텅이에 빠진 메이아를 돌아봤다.
“메이아?”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메이아가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서 나를 흘긋 돌아봤다. 칼리탄의 뒤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질질 끌리기까지 했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녀에게 등급은 없지만 가문의 일원을 모시는 하녀의 권위가 더 강했다. 칼리탄 정도 되는 손님이라면 또 다르지만 메이아는 그의 신분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저 얼굴이 기억 안 날 수가 있나?’
서러워 울렁거리는 눈동자에 희미한 죄책감이 솟았지만 그녀에게도 이쪽이 좋았다.
에비에비. 울먹거리는 강아지 상을 쫓아내기 위해 더 이상 메이아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루베니오는 언제 돌아오지?”
“저녁 만찬 때는 돌아오실 거예요.”
내 대답에 칼리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루베니오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건가?”
“손님을 굶길 수는 없으니까요.”
손님의 식사를 대접하는 건 주인의 도리였다. 뭘 더 도와주겠다는 게 아니니까 기대는 하지 마시죠. 선을 그어 말했는데도 칼리탄은 후련한 얼굴이었다.
“손님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칼리탄은 메이아를 따라가려다가 말고 가이사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시종 무덤덤하던 가이사가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흠칫 굳자 칼리탄의 손이 별 의미 없이 가이사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붉은 눈동자가 소름 끼치도록 잔잔하게 가라앉아 어깨에 내려앉은 우아한 손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흘긋. 금세 떨어지는 손길을 따라가는 얼굴에 잘 갈무리한 살의가 번뜩였다.
“가이사.”
걱정스레 그를 부르자 등골을 섬뜩하게 내달리던 눈꺼풀이 온순하게 가라앉았다. 사냥감을 향해 습관적으로 으르렁거리던 맹견 앞에 주인이 섰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괜찮아요?”
“재수 없는 놈이 들어온 날이니 재수 없는 날입니다. 재수 없게도.”
“…….”
그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재수 없다는 말을 세 번이나 했다. 어지간히 재수 없었나 보다.
“무슨 말을 했는데 그래요?”
“……별말 아니었습니다.”
“별말 아니면 말해 주지 그래요? 궁금한데.”
“자기와 비슷한 계약을 했냐고 물었습니다.”
“소원 계약?”
“예.”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지레 움찔했다. 몹시 말 되는 말이었다. 가이사의 상황을 생각하고 칼리탄에게 계약서를 내민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경우에는 ‘약속’이었으니 강제성이 더 떨어질 테지만.
“그런데 그게 다예요?”
“그게 다입니다.”
긴말이 오갈 시간은 아니었다. 비슷한 계약이라고 했으니 무슨 계약이었는지가 중요한 단서겠지. 그는 다 말해 주는 것 같으면서도 중요한 부분을 숨기고 있었다. 나는 그걸 눈치챘지만 꽉 다물린 입술은 한번 삼키고자 한 말을 토해 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생각 외로 그의 입술은 금방 열렸다.
“오늘 밤, 당신을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창백한 이마 위로 단아한 검은 머리칼이 곱슬곱슬 흘러내렸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그래서 작게 속삭이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지 말아 줬음 했다. 눈 둘 곳을 찾기 어려워서.
“아끼겠다면서요……?”
“쉽지 않군요. 초조해집니다. 몇 밤을 더 자야 당신과 가까워지는 겁니까?”
툭. 가볍게 내려놓은 발걸음에 흙더미가 일었다. 묻은 흙을 툭툭 턴 발이 미세한 경계를 밟고 내가 선 잔디 위로 올랐다.
“지금도 우리는 충분히 가까워요.”
“정정하겠습니다. 가장 가까이로.”
그는 버릇처럼 손을 살짝 뻗다가 주저했다. 손길의 목표는 내 머리카락 끝이었다. 먼저 닿지 못하고 멈춘 손가락 위로 바람이 몰아간 머리카락이 살랑 걸렸다. 그는 살짝 얹힌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짓이기며 침범당한 분노를 드러냈다.
“저녁은 내주었어도…….”
드물게 삭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옅은 정염이 아슬아슬한 실타래에 올라 타들어 왔다. 타다닥! 불꽃놀이를 하는 폭죽처럼 세차게 실 끝으로 치받았다. 끝에 매인 내 심장이 피하지 못하고 불꽃에 당해 으깨졌다.
“밤은 당분간 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지 말래도. 그런 말은, 제발. 요염한 눈동자는 기어이 내 뺨을 같은 색으로 물들이고 지나갔다.
* * *
일이 꼬여 아직 퇴근하지 못한 그 시각의 루베니오는 묘한 꺼림칙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불길함은…….”
말로 설명 안 될 종류였으나 그는 확실히 느꼈다. 무언가가 제 딸을 위협하고 있는 듯한 불안감을.
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똑똑. 그의 손이 문고리에 닿기 직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루베니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
시엘은 문을 두드리던 손을 그대로 뻗은 채로 잠깐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루베니오의 말에 표정을 바로 갈무리해 낸 일류 집사는 어떤 상황에서든 맡은바 소임을 다했다.
“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작은 주인님께서 칼리탄 황태자를 손님으로 들였습니다. 비공식적 방문이라고 하지만 비공개적 방문은 아니라서 알 사람은 금방 눈치챌 겁니다.”
“불길함의 정체가 이것이었던가……?”
“예?”
충직한 집사의 반문에도 루베니오의 찡그린 낯은 풀리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그의 손가락이 툭툭 문고리를 두드렸다. 소름 끼치도록 일정한 소음이 저녁의 스산한 복도로 자욱하게 깔렸다.
최근 타르시의 동향이 수상했다. 황제를 은밀히 찾은 정황도 포착할 수 있었다. 루베니오는 황제가 타르시와 자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세이아 가문의 세력 약화가 주목적일 것이다. 골칫거리였던 타르시를 루베니오로 쳐 낸 것은 좋은데 가만 보니 루베니오도 성가시기는 마찬가지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황제만 공작가를 경계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용하기에 따라 이 일은 꽤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루베니오는 니네이나에 한하여 그 누구보다도 감정적인 인물이었다. 실리보다는 감정이 앞서 이미 결과를 도출한 채 피해를 줄이는 방향을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역설의 남자였다.
“새끼 범이 무엇까지 사냥할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도 좋겠지.”
“그럼…….”
“하나 내 집이 사냥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보드랍고 안락한 깃털을 끌어모아 만든 둥지를 위협하는 것이 있다면 사지를 조각내어 처단할 것이다. 더러운 핏방울 하나 흐르지 못하도록.
* * *
서프라이즈! 오늘 저녁은 황태자 전하도 함께해요! ……가 될 리가 없지. 이미 다 듣고 왔는지 칼리탄을 보고도 루베니오는 눈 한 번 깜짝이지 않았다. 그건 내가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왜 아실로가 루베니오랑 같이 온 건데!
“오랜만입니다, 황태자 전하.”
잘못 본 게 아닐까 헛된 기대도 해 봤지만 저 연보라색 머리는 아실로가 맞았다.
“아실로? 황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만큼이나 놀랐을 칼리탄이 얼굴을 찌푸리며 루베니오를 돌아봤다.
“제가 모셔 왔습니다. 폐하께서 부탁하시더군요.”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루베니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실로를 데려왔단 말인가? 황제의 부탁은 그야말로 핑계였다. 원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이 시기에 아실로를 끌어들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칼리탄을 좋아하는 아실로야 좋다고 따라왔을 테지만. 지금도 안 그런 척하면서 칼리탄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칼리탄이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자 시무룩했고.
‘에구, 애기야. 형이랑 친해지고 싶어 죽겠어요?’
나는 다 이해한다는 흐뭇한 시선을 넌지시 보냈다.
“……뭐야?”
짧게 툴툴댄 아실로가 내 웃는 얼굴을 보고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러면서도 볼이 살짝 상기해 있었다. 하여튼 깜찍하고 귀여운 꼬맹이였다.
“오늘 외출했다고 들었다. 몸은 괜찮은 건가?”
부드럽고 달달한 부정이 가득한 눈빛이 상념을 일축했다. 뜻하지 않게 정답을 알게 됐다.
‘……아실로를 방패로 쓰려고 데려왔구나.’
황후는 호시탐탐 칼리탄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오늘 본 암살 시도도 그녀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와중에 그가 우리 집에 왔으니 휘말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칼리탄을 초대했으나 루베니오의 최우선은 언제나 딸의 안전에 입각해 있었다. 그가 아실로를 데려온 이유는 단순할 것이다. 루베니오의 영역에서 보호받는 칼리탄에게 황후가 허튼짓을 못 하도록 막는 것. 그리하여 2차 피해가 내게 오지 않게 하는 것. 단지 그뿐일 것이다. 황제의 총애하는 아들을 집에까지 불러들인 이유는.
‘대체…….’
아실로의 등장이 뜬금없고 황당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내 조건은 칼리탄이 이 저택에서 사흘간 머무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었으니까. 어린 동생의 견제를 생각해야 할 칼리탄은 반갑지 않겠지만 말이다.
“니네이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느라 루베니오의 말을 흘려듣고 말았다.
“아. 죄송해요. 배고파서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요. 오래 걸은 덕분인지 허기가 지네요.”
나는 얼른 그의 신경을 돌릴 만한 주제를 꺼냈다.
“어서 음식을 내와라.”
빨리빨리. 점잖은 루베니오답지 않은 손짓에 주변이 분주해졌다.
“이만 앉지요.”
더 이상의 논란은 생략하겠다는 것처럼 그는 싸늘히 말했다. 내게만 편파적으로 따스한 눈길을 보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칼리탄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내 옆자리에 앉던 루베니오가 무심코 탄식하며 나를 돌아봤다.
“식사 때 옆자리에 앉는 건 처음인 것 같구나.”
별거 아닌 일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빙그레 웃는 얼굴이 해맑기까지 했다. 루베니오는 내 무릎 위에 냅킨을 깔아 주고 즐거운 얼굴로 이것저것 챙겨 주기 시작했다. 피가 어디 안 가는지 똑같은 표정으로 얼굴을 싸늘히 굳힌 두 황족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만찬을 여는 애피타이저가 들어왔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올 사람이 따로 더 없을 텐…… 가이사?”
가이사였다. 루베니오도 놀랄 만큼 의외의 등장이었다. 긴 다리를 휘적휘적 움직여 내 앞으로 걸어온 그가 내 옆자리에 차분히 앉았다. 비어 있는 아실로의 옆자리는 한 번 보지도 않고 직진하는 게 그다웠다.
“오면 안 됩니까?”
여유롭게 식기를 받아 정리한 가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싫어하잖아, 당신? 가이사는 다른 사람과 식사하지 않는다. 나도 본 적 없, 그러고 보니 오늘 내 꼬치를 빼앗아 먹긴 했다.
“괜찮아요? 토할 것 같으면 내게 말해요.”
“손수건이라도 내밀어 주실 겁니까?”
“챙겨 온 게 없는데…… 냅킨이라도 줄게요.”
진지하게 말했는데 그는 살짝 웃는 것 같았다. 사실 웃는 게 맞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는데 생각만큼 불쾌한 것 같진 않아 다행이었다.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각자의 접시에 애피타이저를 덜어 놓았다. 와인과 과일 주스도 같이 제공되었는데 아실로와 나만 과일 주스였다. 노란색인 걸로 보아 오렌지 주스로 보였다.
‘이왕이면 포도 주스로 구색이라도 갖춰 줄 것이지.’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주스가 담긴 와인 잔을 살짝 만졌다. 표면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맨살을 축축하게 적셨다.
“…….”
그런데 다들 왜 나만 바라보는 거지?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어색해서 괜히 포크질이 빨라졌다. 아무도 보지 않은 채 식사에 열중하자 하나둘 식기를 드는 게 보였다.
‘그나저나 꽃밭이구나.’
연령도 성향도 각기 다른 미남이 넷이었다. 하나도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넷. 넷이서 식사하는 모습이 한 폭의 명화 같아서 소장하고 싶을 정도였다. 음흉한 사심은 절대 아니고 미를 사랑하는 인간의 도리로서 이건 남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갔다 왔으면 피곤할 텐데 오늘따라 활기가 도는군. 다르게 챙겨 준 게 있던가?”
나를 빤히 바라보던 루베니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일을 찾았다.
‘성물!’
나도 모르게 가이사를 쳐다봤다. 찔린 건 나뿐인지 뻔뻔한 가이사는 의아한 시선을 보내 올 뿐이었다. 신전의 재보를 차지한 건 미안했으나 탈이 날 정도로 죄책감이 심하지는 않았다. 성물은 신의 것이지 한낱 인간의 소유는 될 수 없었고 성물은 나를 허락했다는 느낌이 든 탓이었다. 덕분에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고 말없이 나오는 음식을 받아먹는데, 가이사가 대답했다.
“운동의 효과가 이제야 드러나나 봅니다.”
“콜록!”
입술에 침 한 번 바르지 않은 뻔뻔한 거짓말에 헛기침이 터졌다. 입을 가리고 삼키는 나를 흘긋 본 가이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완전하지는 않으나.”
그러나 내가 기침한 덕에 루베니오는 갑작스럽게 건강해진 나에 대한 의구심을 풀어낸 모양이었다.
“……죽여야겠다.”
음울하게 내리까는 음색이 귀에 콕콕 박혔다.
“뭘, 죽인다고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루베니오가 자신은 그런 적 없다는 듯 포근하게 웃었다.
“다음에는 나와도 같이 가 주겠니?”
니네이나의 건강에 관련해서는 실패만 거듭해야 했을 루베니오의 얼굴이 기쁨으로 번쩍였다. 북극의 오로라를 발라 묻힌 것처럼 따스한 빛깔이었다. 가랑비처럼 나긋나긋 젖어 오는 애정에 끌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미소가 깊어졌다.
“돌팔이 같은 놈들보다는 낫군.”
그러고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가이사를 께름칙하게 바라봤다. 몹시 마땅찮으나 도움이 된다니 인사치레는 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제가 가장 유용할 겁니다.”
“…….”
시선에 힘이 있었다면 붉은 사이렌처럼 쏟아지는 광열의 경고음은 가이사를 거칠게 긁어냈을 것이다.
“잘 아시다시피.”
루베니오가 쏘아 내는 얼어붙은 얼음 조각을 묵묵히 쳐 낸 가이사가 루베니오를 빤히 바라봤다. 필요성을 역설하는 말에 얼음장처럼 시린 눈동자는 잠시 가이사에게 머물다가 물러났다. 세상의 온갖 한을 끌어안은 루베니오의 시퍼런 귀기에 공기는 쩡 하니 얼어붙어 있었다.
꿀꺽! 다 씹지 못한 감자 조각이 식도로 넘어갔다. 놀란 가슴을 손으로 살짝 쓸자 루베니오의 눈길이 내게 닿았다.
“꼭꼭 씹어 먹어야지.”
루베니오는 봄처럼 향긋해진 음성으로 나를 타이르며 물을 건넸다.
“소름 끼치는군.”
아무렇지 않게 입가를 닦는 칼리탄을 훔쳐보는 아실로의 눈이 안타깝게 젖어 있었다. 누구보다 예민하게 칼리탄의 감정을 눈치챈 것이 저 아이였다. 포크를 내려놓은 칼리탄은 허탈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에 부러움에 가까운 질시가 씁쓸하게 맴돌다가 사라졌다. 고통을 삭이고 더 단단하게 벽을 쌓는 두 눈이 아득한 별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그야말로 제련되는 광석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공다운 매력이었다.
강직한 눈빛과 빛나는 매력에도 전혀 반응해 주지 않는 루베니오 대신 내가 손님 챙기기에 나섰다.
“황자님 나이에는 골고루 먹는 게 중요하대요. 생선은 멀어서 못 드시는 것 같은데…….”
형에게는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내던 꼬맹이가 무슨 꿍꿍이속이냐며 나를 노려봤다.
뭐긴? 널 도와주려는 거지.
“황태자 전하께서 좀 도와주시면 어떨까요?”
칼리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런 거야 시종을 쓰면 되는데 내가 굳이 말을 꺼낸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
아실로는 입을 꾹 다물고 접시를 내려다봤다. 긴장했는지 아이의 뺨이 굳어 있었다.
“전하가 황자님의 가장 가까운 분이시니까요.”
나는 웃으며 아실로를 바라봤다가 칼리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이 가장 가깝게 앉은 건 맞았다. 내 말의 의미는 그게 다가 아니었으나.
“…….”
잠시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던 칼리탄이 손을 뻗어 생선 접시를 붙잡았다. 칼리탄이 말없이 생선을 약간 덜어 아실로의 접시 위에 놓아 주자 아실로의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표정을 숨길 줄은 알아도 아이는 아이였다. 나는 재빨리 신호를 보냈다.
‘황자님, 제가 도와준 거 잊지 마요!’
생색내는 내 눈짓에 앙칼지게 올라갔던 아실로의 아몬드형 눈이 곧 내려왔다.
“많이 먹어라.”
영혼 없는 칼리탄의 한마디 덕이었다. 수줍어 어쩔 줄 모르는 소년이 된 아실로가 눈꼬리를 축 내리고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형님도 많이…… 드세요.”
아실로의 표정을 읽지 못하는 건 아닌지 칼리탄의 입술이 어색하게 달싹거렸다. 그의 사정이 아실로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으나 칼리탄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역시 지금 칼리탄에게 빚을 만들어 놓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아버지, 제가 황태자 전하를 초대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나는 루베니오가 내 말에 반응해 주기를 바랐다. 잠시 내 의향을 살피던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걸 깜빡할 뻔했구나.”
“소소한 놀이에 어울려 주셨거든요.”
“놀이?”
“으응. 아무튼 너무 감사해서 사흘간 저택에 머무르시는 게 어떠냐고 여쭤 봤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해 주셨어요.”
깜빡. 고민하는 눈가가 느른하게 내려앉았다가 떠졌다.
“제 아이가 전하께 신세를 졌나 봅니다.”
루베니오가 처음으로 칼리탄에게 온전한 시선을 준 순간이었다. 나는 잊지 않고 칼리탄에게 잔뜩 생색내는 얼굴을 해 보였다. 콧대를 세우는 내 눈짓에 칼리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무슨 꿍꿍이냐, 이 사탄아! 이렇게 외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라면 좀 더 점잖은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씩 웃고 말았고 칼리탄은 천천히 대답했다.
“약간의 재미쯤은 준 것 같더군.”
“무슨 놀이를 함께해 주신 건지 궁금하군요.”
루베니오의 관심은 오로지 그것이었다. 내가 말해 줄 것 같지 않자 대상을 바꾼 것이다.
“차차 들려줄 날이 오겠지.”
칼리탄이 아실로의 정수리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루베니오가 적선하듯 피식 냉소했다. 그저 대화를 나누는 것뿐인데도 살 떨리는 장면이었다.
‘고작 저런 주제로 어떻게 이런 분위기가 나오지?’
파지직 파지직 오가는 위압감을 견디기가 어려워서 고개를 돌리자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가이사가 보였다. 고래 싸움에 얻어터진 새우를 날름 삼키는 상어 같은 얼굴이었다.
“…….”
따스한 만찬장이 어째 흉계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 * *
똑똑. 그날 밤, 이제는 익숙해진 노크 소리가 긴장을 깨웠다. 사실 저건 ‘똑똑’보다는 ‘깽깽’에 가까웠다. 두꺼운 유리로 된 창문에 돌멩이가 날아드는 소리를 닮았다. 저 창을 두드릴 사람도 하나뿐이지만 저런 소리를 낼 사람도 하나뿐이었다. 나는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펴며 힘차게 돌아섰다.
“문 열어 놨는데 왜 안 들어와요?”
“그냥 들어가면 놀라시지 않습니까.”
오. 가이사에게도 그런 학습 능력이 있었구나! 나는 살짝 감탄하며 그를 바라봤다. 내가 열어 준 창문 사이로 슬쩍 들어오던 그가 잠시 의아한 낯을 했다가 가볍게 말했다.
“간만에 살 떨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당신이 그런 경험도 할 줄 알아요?”
그의 팔뚝을 팔꿈치로 톡 치며 친근하게 장난을 걸자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민했다. 버퍼링 20%, 37%, 53%…… 99%!
“……저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긴 버퍼링 상태에서 벗어난 그가 망설이며 받아쳤다. 다른 사람과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지 않아 사교성이 떨어진 남자가 어떻게 해야 정답인지 한참 고민하다가 내 장난질에 맞춰 준 것이었다. 정답을 힘껏 찾는 그 노력이 가상해 웃음이 피식 나왔다.
“무슨 일 있었어요?”
“루베니오가 갑자기 발코니 창가를 서성이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는 소리였다.
“이걸 들키면…… 가이사는 아버지의 손에 죽을지도…….”
웃으며 가이사에게 독화살을 날리는 루베니오를 상상하자 오싹해졌다.
“죽지는 않겠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이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조심해요, 가이사.”
나는 위로를 담아 그의 팔뚝을 애잔하게 두드렸다.
“당신만 조심하면 돼. 나는 들켜도 무사할 테니까.”
농담과 진심을 반쯤 섞은 내 말에 웃음기 하나 없는 건조한 시선이 돌아왔다.
“그게 유일한 위안입니다.”
그의 팔뚝을 쓱쓱 쓸어 주던 손짓이 우뚝 멈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망설이는데 그가 눈꺼풀을 내리감으며 속삭였다.
“루베니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시간에요? 또 집무실 내려가시나?”
“쉿. 이쪽을 지나……”
똑똑.
“니네이나?”
노크 소리와 동시에 들리는 말에 나와 가이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떻게 해!’
나는 온몸으로 소리치며 그를 돌아봤다.
‘당신 죽을걸! 살해당할 거야!’
멘탈이 박살 난 내 행동에 그는 도리어 침착해진 모양이었다. 강아지를 진정시킬 때처럼 손바닥을 내밀고 하품을 하는데 열이 터져 죽을 뻔했다.
‘장난해요? 나는 강아지가……’
똑똑 소리가 다시 들렸다.
“자니?”
오싹. 소름이 목덜미 위로 돋아났다. 솜털이 곤두서서 바람에 이지러지는 새싹처럼 흔들리는데 긴장이 너무 심해 정수리까지 쭈뼛거렸다. 내 방은 가이사와 루베니오의 방 사이에 끼어 있었다. 내가 본 저택으로 옮겨 가지 않아서 루베니오도 아직 이곳에 머무는 중이었는데, 이런 일을 대비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 대답이 없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문고리가 돌아가는 게 보였다.
‘잘 가요, 가이사…….’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최후를 상상했다.
끼익. 오늘따라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너머로 복도의 밝은 빛이 살짝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거기 서서 뭐 하는 걸까, 내 아이는?”
예상과 달리 살풋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버럭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눈이 번쩍 떠졌다.
“엥?”
가이사는 대체 어디로 숨었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새 도망쳤나?’
나는 루베니오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았다. 어디로 간 건지 그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루베니오도 다른 사람의 기척은 느끼지 못했는지 여상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내가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헤헤. 무슨 일 있어요?”
나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그를 찾으면서도 장단을 맞췄다.
“잘 자라는 인사나 할까 해서.”
루베니오가 커다란 방 안을 가로질러 왔다. 그 모습에 잠시 긴장했지만 내가 그랬듯 그도 가이사의 존재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아직 안 잤구나.”
“마침 자려던 참이었어요.”
“운동 효과가 이렇게 좋다니.”
피곤에 절어 있어야 할 내가 멀쩡히 서 있는 게 어지간히 놀라운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래도 이만 자렴. 푹 쉬어 줘야 해.”
나를 살펴보던 그가 다정하게 권유했다.
“네.”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걱정으로 좁혀졌던 루베니오의 미간이 풀렸다.
“그리고 부족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거라.”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들렀다는 루베니오의 말에 나는 모든 걸 알아채고 말았다.
‘칼리탄 이 사람, 그새 불었잖아!’
만찬장에서는 쉽게 말하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며 튕기더니 그새를 못 참고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친 게 분명했다. 뭐,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칼리탄이 루베니오와 나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지는 뻔한 것이었다. 만약 비밀 유지 조항을 계약서에 걸어 놨다고 해도 이 일은 결국 루베니오의 귀에 닿았을 것이다. 칼리탄이 루베니오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 준 뒤 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입단속을 부탁하면 됐을 테니까.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나는 일부러 ‘소원’이라는 표현을 썼다. 의심하고 고민할 루베니오의 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황태자 전하께 벌써 들으신 거예요?”
직설적으로 물어도 루베니오는 민망해하지 않았다. 나를 다 큰 성인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지켜 줘야 할 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부모가 어린 자녀의 하루 일과를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래. 네가 먼저 그 계약을 제안했다더군.”
루베니오의 다정한 눈이 꿍꿍이를 캐물으며 예리하게 빛났다. 대상이 내가 아니었다면 뼈를 발라내려 굴었을 테지만 무딘 칼날은 조금의 오싹함을 담아 진의를 샅샅이 훑어볼 뿐이었다.
‘그런데 칼리탄 이 사람 계약서까지 보여 준 거 아니야?’
루베니오라면 증거를 보이라는 식으로 나왔을 테고 칼리탄은 그걸 보여 줬을 것이다. 어렵지 않게 예상되는 상황에 이가 부드득 갈렸다.
‘사람이 신의가 있지. 내가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나는 이건 꼭 빚으로 달아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방긋 웃었다.
“별 의미 없어요.”
“계약서까지 쓰면서?”
“으음…… 제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황태자 전하는 좀 불쌍한 것 같다고.”
나는 철없는 아이처럼 조잘거렸다. 타인의 상처를 마구 긁어내는 행동이었지만 이렇게 해야 루베니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그냥 도와주기는 아까우니까 아무렇게나 소원을 건 거죠. 언젠가 쓸 수 있을 날이 오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한낱 유희였을 뿐이라는 듯 가벼운 손짓과 함께 쐐기를 박았다.
“저는 그냥 심심했을 뿐이에요. 그러던 와중 제가 할 수 있는 게 보였고 별거 아니어서 도와준 거죠.”
내 집에 사람 하나 초대해 주는 건 나한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딸이라면 어화둥둥 할 줄밖에 모르는 루베니오가 이 정도 행동을 막아설 리는 없을 테니까.
“너를 심심하게 만든 내 탓이다.”
그는 언제 의심했냐는 듯 잔잔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고작 이것으로 끝낼 사람은 아니라는 걸. 그는 당분간 주도면밀하게 내 주변을 살피려 들 것이다. 혹시 모르는 위험을 먼저 찾아내어 제거하려고 들겠지. 하지만 그는 지금 당장은 찾지 못할 것이다. 이 계약은 먼 훗날을 위한 안배였으니까.
“그럼 아버지도 제 소원을 들어줘요.”
“무엇이든.”
습관적으로 대답한 루베니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대답해 놓고 들어주지 못한 전례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기회를 포착한 내게는 그런 루베니오가 손쉬운 먹잇감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정말인가요?”
나는 두 손을 한껏 모으고 눈을 반짝였다. 딸 바보는 꼼짝 못 할 눈빛 공격이었다.
“으음…… 조금만 봐 다오.”
그가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며 살짝 웃었다. 나와 이렇게 지내는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을 보니 하려던 말이 불쑥 나오지 않았다. 겨우 이깟 말을 하는데 왠지 가슴이 살짝 먹먹해서 코가 시큰했다.
“오래오래…….”
“아가?”
내 미소가 살짝 옅었는지 그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쑥스럽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크게 외쳤다.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요!”
습윤한 감정을 부끄러움으로 대체했다.
“으으…… 제 소원 들어주실 거죠?”
실제로 민망해서 뺨이 화끈거렸다. 어린애나 할 법한 짓이었으니까. 그래도 그의 기쁨이 되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놀라 벌어졌던 루베니오의 입술이 다물리더니 함지박 미소를 품었다. 싱그럽게 빛나는 푸른 눈이 따스한 봄볕처럼 나를 품었다.
“그래.”
흔쾌히 끄떡이는 대답에 내 얼굴도 환하게 폈다. 가슴 한가득 맺힌 꽃봉오리가 하얗게 피어오르며 간질거렸다.
“같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자.”
“…….”
“니네이나.”
부드럽고 다정한 말에 화답하며 나는 계속 미소 짓고 있었다.
그가 손을 살짝 흔들며 내 방을 빠져나갈 때에도.
달칵. 문이 그의 그림자를 잘라 내었을 때에도.
뚜벅뚜벅. 복도를 걸어 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길게 이어질 때에도.
“…….”
그가 멀어져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을 때. 그제야 내게도 긴 그림자가 찾아왔다.
“왜 그러십니까?”
가이사의 멀뚱한 얼굴이 심각한 상황을 으깨 부수고 내 머릿속에 침투했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잔잔한 그의 얼굴에 맴돌던 상념이 흩어졌다.
“엇! 가이사 당신! 대체 어디 숨어 있었어요?”
“욕실에 있었습니다.”
살짝 열린 욕실 문이 보였다.
“저게 왜…… 방금 전에는 닫혀 있었는데?”
가이사를 찾으며 방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욕실 문 열리는 소리도 안 들렸는데…….”
“루베니오가 문을 열 때에 맞추어 욕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을 속이기는 쉽지 않아서 작은 소음도 주의해야 합니다.”
알려 준다고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가이사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루베니오는 수준급의 검사였다. 신체 능력이 범인보다는 월등하게 좋아 작은 소리 하나 놓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기척을 감지할 수준이었다.
“기척? 아버지는 그런 걸 눈치채지 않아요? 저야 당연히 모르지만.”
“죽은 척하면 됩니다.”
“…….”
루베니오가 죽은 사냥감은 건드리지 않는 곰이라도 된다는 말투였다.
“정확히는 숨을 쉬지 않으면 됩니다. 움직임 없이. 사물처럼 모든 걸 정지해서.”
“그래요……. 이해는 안 되지만 하여튼 굉장한 일이라는 거죠?”
“비천한 재주 중 하나입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뭐라고? 본인을 자랑하며 대단하다는 식으로 나올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도 잘 모르는 얼굴을 보니 가슴이 와르르 무너졌다.
“왜 자신을 깎아내려요?”
내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어서인지 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내가 왜 이러는지 고심하는 것 같았다.
“……깎아내린 게 아니라 말 그대로입니다. 정식 기사는 기척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건 암살자나 거리의 부랑배 같은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배우는 일종의…….”
뭐라고 빠르게 변명을 쏟아 내던 그가 내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어디서 저런 걸 배웠는지 알겠다. 전투 노예로 팔려 갔을 때 배웠다던 여러 가지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나도 배워 볼까요?”
당황하여 뻣뻣하던 입매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알 수 없다는 것처럼 느른하게 일그러졌다.
“살아남기 좋다면서요.”
그가 했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답답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 같은 분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어느 쪽이냐고 물으면 저는 가이사와 비슷한 부류로 얽히고 싶은데요.”
나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을 한 그를 끌어당겨 팔을 붙잡았다.
“건강하고.”
그리고 소매 속으로 손을 넣어 셔츠를 위로 올렸다. 탄탄한 근육 위로 팽팽하게 주름진 셔츠가 하얀 사슬처럼 위로 말렸다.
“튼튼하고.”
이렇게 되기까지의 일이 당신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걸 짐작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상흔 위에 계속 머물지는 말았으면 했다. 이렇게 되어서 할 수 있는 일도 분명 있을 테니까.
“단단하게.”
이어서 그의 팔꿈치를 둥글게 더듬었을 때 그의 손이 내 팔뚝을 붙잡았다.
“당신은…….”
그는 헐렁한 잠옷을 입은 내 팔뚝을 내가 그랬듯 살짝 만졌다. 몰랐는데 이게 은근히 간지러웠다. 하던 짓이 있어 가만히 내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어디까지 올라올지 두려울 정도였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불가능합니다.”
팔을 꾹 눌러 보던 그가 이미 틀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쩌적.
가이사는 충격으로 얼어붙은 나를 흘긋 내려다보며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괜히 힘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2차 충격에 숨도 쉬지 못하고 굳은 나를 모르는지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입술이 내 뺨 위를 아슬아슬 스쳐 지나갔다. 장애물에 걸리지 않고 매끄럽게 빠져나간 입술이 내 입술 바로 앞에 멈췄다.
“가만히 이 자리에 있어 주시면.”
어느새 내 턱을 쥔 따스한 체온 위로 차가운 숨결이 부스스 흩어졌다.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턱을 살짝 쓸어 내는 손가락이 거칠거칠했다.
“내가 물고 빨고 다 할 텐데.”
“……!”
받아치려 입을 벙긋거리자마자 그의 입술에 살짝 스쳤다. 그가 고개를 살랑살랑 젓자 맞닿은 입술이 부드럽게 비비 울었다. 묵묵한 눈가가 녹아내리는 달처럼 사르르 접히는 게 환상 같았다. 파르르 떨린 입술은 주인의 맹렬한 감정을 배반하고 꽉 다물렸다.
“그렇군요. 이건 키스하고 싶은 기분입니다.”
식욕이 돈 들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음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의 가슴을 손으로 살짝 밀었다. 그가 아쉬움으로 혀를 할짝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키스는 해요. 단, 내가 주도하는 거예요.”
마침 그의 뒤에 침대가 보여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었다. 보여 주고 싶었다. 그가 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할 거라는 걸. 일방적인 매달림을 가만 보고 있기에는 그를 향한 내 감정이 너무 가여우니까.
“…….”
그런데. 왜 안 밀리냐? 멋진 척 당당히 내뱉었던 말이 조각나 뺨 위로 파바박 꽂혔다. 동공이 격렬한 지진에 휘말리고 뺨은 붉어지는 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나는 물러서지 않고 그의 가슴을 꾸욱 밀었다. 뒤늦게 그가 내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앉을까요?”
“……알았으면 그런 건 좀 묻지 말고 해요.”
이를 북북 갈며 말하자 그는 내 희망대로 재앙의 입술을 얌전히 다물고 앉았다. 카리스마는 좀 떨어졌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나는 그를 한껏 내려다보며 그가 그랬듯 턱을 살짝 당겼다. 학습 효과가 있는지 이번에는 잘 따라왔다.
“날 당신 마음대로 다루고 싶어요?”
가이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가만히 새장 속에 앉아 당신이 주는 먹이만 기다리도록?”
내 말에 혹했는지 그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이것 봐. 이것 봐. 그릇된 욕망이 한가득이구먼.
“진짜 그거예요?”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닙니다.”
그가 그것도 썩 괜찮은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내 눈치를 보며 참는 것도 아주 잘 느껴졌다. 하여튼 보통 위험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문제점은 그 생각이 얼마나 나쁜 건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장르가 피폐물로 선회할 위기였다.
“나는 싫어요. 이미 너무 오래 했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하자 그가 혀를 짧게 찼다. 아쉽지만 정 그렇다면 물러나겠다는 얼굴이었다. 갱생의 여지는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내게 날 힘이 없다면 당신이 날개를 달아 주는 건 어때요?”
“달아나면 어쩝니까?”
너무나 즉답이어서 살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그의 본심인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생각 이상으로 날 좋아한다는 건 알겠다. 그러나 지금의 태도는 좋아하는 장난감을 힘껏 쥔 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연약한 장난감의 목이 뚝 분질러질지도 몰랐다. 내가 장난감이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나를 닮은 인형이 저 무지막지한 손에 쥐어진 헛된 상상이 돋아났다.
‘안 되지. 안 돼.’
나는 살짝 식은땀이 흐르려는 걸 모른 척하며 그의 뺨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안 달아나게 하면 되죠.”
“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 나름의 노력을 해 왔다는 건 알겠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기 고양이 어쩌고 책도 같은 맥락이었다.
“참고서가 틀려서 그래요. 나를 붙잡고 싶으면 내게 물어봐야죠.”
“아.”
붉은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숨이 순진하게 느껴졌다. 깨달음을 얻은 그가 맹렬하게 쏘아봤다. 반짝반짝한 시선까지는 기대 안 했으나 당장 내놓으라고 목을 짤짤 흔드는 눈빛에 간담이 서늘했다.
“사, 상냥하게 대해 주고 원하는 것도 도와주고.”
무표정의 가이사가 맞는지 그의 눈빛이 변칙적으로 변했다. 자기는 그런 적 없다는 듯 모른 척에 열중한 무구한 눈동자가 온기를 담아 빛났다.
그래. 순하다, 순해. 착해진 그의 머리를 살살 만져 주자 내 손에 뺨을 살짝 기대 왔다. 아래로 깔린 눈꺼풀 위를 반짝거리는 조명이 아름다웠다.
“마음이 기울어야 관계도 안전한 거예요, 가이사.”
흘긋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가는 도홧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근대던 입술을 늘어트린 그가 농염한 눈동자를 다시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테면 당신 말을 잘 들으라는 소리군요.”
“으음. 모든 말에 다 따라 줄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해요.”
내 말이 어려웠는지 어쩌라는 거냐며 그의 눈썹이 날카롭게 들썩였다. 나는 시커먼 눈썹을 손으로 살살 펴며 고개를 숙였다.
“중요한 건 서로 배려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은 나를 생각하고.”
“어렵습니다.”
“사실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만들었잖아요.”
그제야 만족했는지 그의 얼굴이 매끈하게 펴졌다. 나는 그의 말똥말똥한 눈을 바라보는 게 즐거워서 일부러 더 느긋하게 다가갔다.
쪽.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떼어 내자 그가 또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이미 당신을 좋아하는데, 이걸로 부족하다면 더 많이 좋아하게 만드는 수밖에……”
“당신을 유혹하라는 말씀이군요.”
“으응?”
그게 그렇게 되나? 잘도 말하던 내가 위기에 몰린 것처럼 머뭇하자 그가 순식간에 위를 점해 왔다. 나를 침대 위에 눕힌 그는 무릎만 대고 걸터앉아 있었다. 매끈한 허리를 따라 올라간 내 눈에 나른한 몸짓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그가 보였다. 중요한 일을 하기 전 옷매무새를 정리하듯 머리카락을 살짝 털어 냈다.
“그 책에서 본 걸 이제야 써먹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참고서는…… 음, 좀 괜찮은 것 같은데? 기지개를 펴는 고양잇과 짐승처럼 나른히 내려온 그가 내 뺨을 살짝 쥐고 웃었다. 다가오는 그를 기다리는 입술이 기대로 촉촉이 젖으려 했다.
“핫!”
안 돼! 정신 차려! 목숨을 위협을 받은 것과 비슷한 강도의 위기감이 뻗쳐 왔다.
“가, 가이사. 그 책 제대로 읽은 거 맞아요? 애니멀 테라피는 이런 게 아닐 텐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읽은 건 아가 시리즈가 아니니.”
“아가…… 아니 잠깐. 전체 연령가를 준수하는 책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성인이니까.”
목덜미를 향해 달려드는 그림자를 마지막으로 생각이 끊겼다. 우리가 만들어 낸 두 번째 밤이었다.
* * *
달게 자고 일어났는데 콕콕 찌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의 뺨이 아침 햇살을 받아 상아처럼 반짝였다.
“알폰소, 이르레스, 아가일, 마거, 조니트, 헤이야, 로이드, 샤사롯. 전부 20년 전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으로 멸문한 가문들입니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반쯤 잠에 헤매며 바라보는데 무어라 무어라 중얼거린 가이사가 하얀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주도한 가문인 로이드와 샤사롯을 제외하면 로이드와 샤사롯의 하위 가문입니다.”
“로이드와 샤사롯을 오래 보필해 온 가문 전체를 쳐 내면서 두 가문의 뿌리를 뽑았다는…….”
반쯤 졸고 있는데 뇌는 입력된 신호를 빠르게 해석하며 돌아갔다. 눈을 끔뻑거리며 중얼거리자 가이사가 신기한 세상을 관찰하는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졸다가 고개를 툭 떨구자 무감각한 눈에 호기심이 옅게 반짝였다.
‘고양이 장난감이 된 기분인데…….’
저건 대체 어떻게 되어 먹었기에 저렇게 졸면서 말하나, 궁금한 얼굴이었으나 놀라야 할 건 나였다.
“가이사는 언제 잠을 자는 거죠?”
내가 먼저 잠들었고 더 늦게 일어난 게 분명한데 저쪽은 쌩쌩하고 나는 비실거렸다. 그런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잠들기 전까지는 내내 내 곁에 있었던 가이사가 언제 이 많은 서류를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제 수면 시간은 적당합니다. 정보 길드에 의뢰한 걸 찾아온 것뿐이고.”
지하 도서관에서 미리 부탁해 둔 것이었다. 루베니오 모르게 일을 알아보려면 가이사를 통하는 것만큼 안전한 게 없었다.
“당신이 너무 많이 자는 게 아닙니까?”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가이사가 툭 하며 나를 건드렸다.
“아. 그런 문제…… 뭐예요?”
나는 납득하려던 게 자존심 상해 눈꼬리를 팍 치켜들었다. 또렷한 눈동자가 졸졸 쫓아다니며 날 관찰하는 게 느껴졌다. 나뭇가지로 쿡쿡 찔러 보며 생물의 상태를 살피는 실험자 같았다.
‘됐다. 됐어.’
하지 말라고 해도 그만둘 사람이 아니었고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결과가 빨리 나오네요?”
“보안 등급이 높아서 웃돈을 얹어 준 덕인 것 같습니다.”
“역시 돈이면 다 되는 세상…….”
잘못 짚은 거라면 돈을 길에 내다 버리는 것과 같을 테지만 시험해 볼 가치는 있었다. 이 세계의 나는 돈이 꽤 많은 편이고.
“나…… 얼마나 부자인 거죠?”
“당신은 루베니오의 유일한 직계이니 그의 자산은 곧 당신의 것이 되겠군요. 제국 제일의 부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
루베니오, 20년 동안 무척 애쓰셨구나. 이세계판 빌 게이츠쯤 되는 걸까? 엄청난 부자라는 설명인 건 알겠는데 실감은 안 났다.
“니네이나, 당신의 이름으로 된 재산도 꽤 많은 것으로 압니다. 르치테의 다이아몬드 광산, 도르올섬, 이지스의 방패라고 불리는 군함 여섯 척, 그리고…… 등 대부분 굵직한 것들입니다.”
무엇 무엇 읊어 주는데 내가 몰랐던 자산도 상당했다.
“군함? 나 군함도 있어요?”
“나라에 빌려주는 형태로 소유하고 있으나 실소유자는 당신입니다. 이지스 1호부터 6호까지는 당신의 명의로, 이지스 7호부터 12호까지는 루베니오의 명의로 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싸워라! 하면 싸워 주는 건 아니죠?”
“병사는 제국 소속입니다. 사병을 키워 태우지 않는 한 당신의 명령대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속 빈 강정이라는 소리잖아? 루베니오가 마음 편하게 내 명의로 돌려놓은 이유를 알겠다.
“아깝네요. 그런 거 한번 타 보고 싶었는데…….”
“저는 군함을 몰 줄 압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어필이었다. 처음에는 약 올리는 건가 싶었는데 나름 매력 발산이었던 모양이다. 건조한 눈이 나를 흘긋 살피는데 웃음이 픽 나왔다.
“가서 다 내리라고 한 다음 가이사가 모는 군함을 타도 되나요?”
“황실과의 계약 기간이 3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따로 연장하지 않으시면 가능합니다.”
“가이사는 대체…… 어떻게 나보다 더 잘 알죠?”
“돈을 쓰면 됩니다.”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뻔뻔스레 내가 들고 있는 종이 서류를 가리켰다.
“내 뒷조사를 했어요?”
“원하신다면 당신도 하셔도 됩니다. 열 살 이후의 정보는 찾기 쉬울 겁니다.”
“열 살 이전은요?”
“그건 보안 등급 X입니다.”
가이사가 준 서류에는 보안 등급 S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정보 길드의 보안 등급은 S가 제일 높은 거 아닌가요? 그 아래는 A, B, C, D라고 들었는데 X는 뭐죠?”
“정보를 찾을 수 없음. 즉, 불가능하다는 소리입니다.”
“…….”
서류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무려 S등급의 보안 정보를 구기려 하고 있었다. 잠깐, 이게 S라고?
“의뢰할 때는 분명 C급 정보라고 하지 않았어요?”
“단순히 하위 가문을 조사한 것은 그렇습니다. 20년이나 된 정보여서 그렇지 어려운 건은 아니었습니다. 등급이 높아진 건 이것 때문입니다.”
길리안 알폰소. 기다란 손가락이 가리킨 이름은 그것이었다. 놀랍게도 아래에 설명된 바에 따르면 이 사람은 아직 살아 있었다.
“알폰소는 멸문한 가문 중 하나잖아요. 모두 처형되었을 텐데 이 사람은 어떻게 멀쩡히 ‘알폰소’라는 성을 달고 살아 있는 거죠?”
“그가 최초의 고발자였기 때문입니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혈족의 잘못을 고해바쳐 본인만 살아남는 일은. 파멸이 예정되어 있다면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나 혈족 모두를 죽이는 일이니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특히 귀족 사회는 가문을 그런 식으로 등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다. 목숨을 보존해도 혈족의 배반자라고 불리며 은근히 배척받을 만큼. 그래서 이런 경우는 대부분 성을 바꾸고는 했다. 일반적으로 그런 일이 통용될 리는 없으나 역모 고발자쯤 되면 성을 바꾸겠다는 조건을 붙이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알폰소든 찰스든 이름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귀족 사회는 간사했다. 단지 성이 바뀐 것만으로 그 죄는 더는 없는 게 되기 때문이다. 참 이상한 규칙이긴 하나 그것이 귀족 사회였고 계속 그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성을 바꾸는 게 필수였다.
“왜 성을 그대로 유지한 거죠?”
“유지한 게 아닙니다. 바꾼 거죠.”
“바꿔요?”
“길리안 베테가 본래 이름입니다. 길리안은 알폰소의 사생아였던 것 같습니다.”
아아. 이제야 알겠다. 베테는 평민의 흔한 성 중 하나였다. 알폰소로 인정받지 못한 길리안이 혈족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건 당연했고 평민이라면 ‘알폰소’라는 성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참 희한한 일이네요. 멸문한 귀족가의 성을 왜 잇는 거죠?”
“가지지 못한 것에 집착하는 인간은 흔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처럼 가이사의 얼굴에 희미한 혐오가 들어찼다. 본래 귀족의 것이었던 성을 일개 평민이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뻔했다. 고발의 대가로 알폰소라는 성을 얻기를 바란 거겠지.
“바보 같은 사람이네요. 이미 허울밖에 안 남은 걸 가져 뭐 한다고? 나라면 다른 걸 빌었을 거예요.”
“예를 들자면 어떤 겁니까?”
“눈으로 볼 수 있는 유형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나았겠죠.”
“무형의 것은 값어치가 없는 겁니까?”
“반대예요. 이를테면…… 명성이나 감정 같은 거. 그건 함부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보이지 않으니 받을 수도 없어요. 처음부터 불공정 거래였단 소리죠.”
길리안이 갖고 싶었던 알폰소가 지금의 알폰소는 아닐 것이다. 성립할 수 없는 거래라는 게 맞겠지.
“무형은 곧 허상이에요. 정 그런 걸 가지고 싶다면 노력해서 쟁취해야 해요. 그래야만 내 것이 될 테니까.”
“이상적인 말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난 그냥 내가 믿고 싶은 걸 믿는 것뿐이니까.”
그저 내 생각일 뿐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쟁취라……. 마음에 드는 단어입니다.”
가볍게 으쓱거리던 어깨에 왠지 모를 오한이 돋았다.
“힉!”
돌아보자 혀를 핥으며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살피는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모른 척! 모른 척! 모른 척해야 해!’
다급하게 서류를 들고 읽었다. 머릿속이 경보로 가득 찼지만 눈알에 문자를 집어넣으려 애썼다. 오싹한 시선이 축축한 뱀의 혀처럼 뺨을 할짝거렸다. 뭐든 그의 눈길을 돌릴 것이 필요했다.
“봐요! 완전 당했잖아.”
반쯤 살았다는 심정으로 서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알폰소를 계승한 길리안에게 알폰소를 비롯한 여러 가문의 자산이 흘러갔다가 회수된 과정을 적은 것이었다. 아마도 길리안이 베테에서 알폰소가 된 것이 알폰소의 멸문보다 빨랐던 모양이다. 차례차례 다른 가문이 멸문당하며 마땅한 후계를 찾지 못한 재산이 결국 그에게까지 흘렀다가 여러 구실을 빌미로 나라에서 회수한 게 보였다. 가문이 사라진 길리안이 다시 평민으로 돌아간 것까지. 완전히 삼일천하였다. 힘없는 그에게서 손쉽게 뺏은 돈은 황제가…… 어라? 자금의 흐름이 이상해졌다.
“마테르 백작 부인?”
그런데 내가 이 이름을 어디서 들었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마테르 백작 부인은 현 황후 릴리스의 20년 전 신분입니다.”
“아! 그 불륜녀!”
나는 크게 소리쳤다가 입을 꽉 틀어막았다. 불륜녀 릴리스! 원작을 보며 내가 주구장창 욕했던 황후의 과거였다. 남주 칼리탄의 회상에 나오는 부분이었다. 마테르 백작 부인, 릴리스. 현 황후의 20년 전 신분은 그것이었다. 초야도 전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릴리스는 황후궁의 시녀장으로 들어와 황제와 바람을 피웠다. 제국법상 남녀 상관없이 재혼은 자유롭다. 그러나 제국법은 일부일처를 명시하고 있었다. 황제라고 해도 지엄한 법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이 한 건 더럽고 불쾌한 불륜이었다.
아실로는 릴리스와 황제가 정식 결혼 후 낳은 황자이기에 적통으로 인정받았지만 그 전에 태어났다면 사생아였다. 그럼에도 칼리탄의 모친 멜로리아는 약자였다. 황제는 외척을 경계하여 한미한 가문에서 황후를 뽑았고 멜로리아는 욕심 많은 황제의 바람대로 연약한 사람이었다. 황제가 릴리스를 사랑하였을 즈음에는 병으로 몸도 이미 많이 약해져 있었던 멜로리아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황제의 사랑을 믿고 제 세상처럼 휘젓고 다니는 여자를 상대하지 못했다. 갖은 모욕과 수모는 물론이고 릴리스는 당시 어렸던 칼리탄을 매우 심하게 괴롭혔다. 친모의 수모를 칼리탄이 지켜보게 하는 건 물론이고 멜로리아 앞에서 칼리탄을 심하게 매질하거나 학대하기도 했다. 결국 멜로리아는 자결했고 그녀의 죽음은 병사로 포장되어 묻혔다. 그러나 칼리탄은 그 모든 걸 지금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얌전하게 웅크려 있지만 그의 이빨은 언제든 릴리스의 목을 물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웠다. 오랜 세월 축적된 증오와 상처가 커서 진물이 메마르지 않았다.
‘그런데 릴리스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지?’
뭔가가 걸릴 듯 말 듯 아른거렸다. 일종의 촉이었다. 더러운 역사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불쾌감이 느껴졌다.
“정보 등급이 S인 게 너무 이상했어요. 알폰소에서 내쳐진 길리안이 알폰소를 고발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런 걸 토대로 추론해 낼 수 있는 건 하나였다.
“길리안은 황후의 사람인가요?”
심증이긴 하지만 나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황후의 측근이었던 건 맞습니다.”
“지금은 내쳐졌겠죠.”
“예, 황후의 젖동무라고 합니다.”
“유모의 아들인가 보네요.”
대충의 히스토리가 상상이 됐다. 하급 귀족가의 유모는 보통 평민이다. 유모는 친자식보다 귀족의 아이를 배불리게 먹이고 아껴 키우지만 유모가 어미 역할을 했다고 해서 귀족 아이의 엄마가 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유모와 귀족 아이는 엄연히 상하 관계가 존재했고 소꿉친구라고 할 수 있는 유모의 친자식 또한 진정한 친구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릴리스의 악행을 생각해 봤을 때 길리안은 릴리스에게 결코 소중한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길리안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지금 막 떠오르는 또 한 가지의 의문.
─조심해. 어머니가 널 노리니까.
그날 황후는 왜 내가 먹을 과일 접시에 독을 탔을까? 나와 황후의 접점은 전무하다고 봐도 좋았다. 심지어 그때는 칼리탄과의 접점도 전혀 없었다. 아직도 황후가 내 음식에 독을 탄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이게 그 실마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20년 전 황제가 마테르 백작 부인, 즉 지금의 황후에게 하사한 토지는 본래 멸문한 가문의 것이었다. 샤사롯의 곡창 지대를 비롯한 비옥한 땅이 모두 그녀에게로 흘렀다는 뜻이다. 샤사롯의 멸문으로 이득을 본 자. 그것이 지금의 황후였다. 이런 거대한 사건의 실마리도 작은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한에 의한 복수이거나 이익을 위한 의도적 살해. 둘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했다. 원한은 모르겠지만 이 일로 이익을 얻은 사람은 분명했다. 실패로 돌아갔다고는 해도 칼리탄이 죽을 뻔했고 재산도 늘었다. 우연이라는 순진한 발상 따위는 할 수 없었다. 황후 릴리스가 이 일에 깊게 연관되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길리안 알폰소……. 이 사람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압니다.”
가이사는 쉽게 대답했고 나는 그것이 살짝 의아했다.
“이 사건의 쉽고 빠른 열쇠는 당연히 길리안인데 황후가 따로 숨겨 두지 않았어요?”
“숨길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요.”
죽이진 않았어도 무슨 조치쯤은 취해 놓았다는 뜻이었다.
“궁금하네요. 무슨 짓을 해 놓은 건지.”
비밀이 크면 클수록 더 잔인한 몰골이지 않을까? 타인의 불행이자 참혹함이 어쩐지 우스웠다.
“상당히 빈곤하게 살고 있습니다. 기회를 봐서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아니요, 직접 가 보고 싶어요.”
가이사가 데려오는 건 위험 부담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띌지도 모르고.
“수도의 뒷골목입니다. 위험하고 위생 문제도…… 이미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주섬주섬 숄을 걸쳐 입는 나를 그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 계속 말씀하셔도 돼요.”
“제가 뭐라고 해도 갈 거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것과 다른 게 있다면 계속하겠습니다.”
“……가이사, 예리하네요.”
“하.”
기가 막혀 웃는 가이사를 보자 배시시 웃기도 어려워졌다. 나는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가이사가 아니어도 방법은 있었다. 그러나 그가 도와주었으면 했다.
“부탁할게요. 지금이 중요한 분기점 같거든요.”
“……아픕니다.”
“네?”
“골치가 아픕니다. 왜 하필 새인 겁니까? 유리구슬이라면 저만 아는 안전한 곳에 소중히 보관할 수 있을 텐데.”
안 그럴 거면서 또 음울한 얼굴을 했다. 아, 안 그럴 거라고 믿기는 하지만 아쉽다는 얼굴로 내 다리를 빤히 보는 시선을 느낄 때면 뼈마디까지 시렸다.
“그럼 톡톡 튀는 매력이 없을걸요.”
“그런 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죠. 생각해 보세요. 훨훨 날 수 있는 새가 스스로 내게 돌아올 때 느끼는 성취감과 기쁨을요.”
나는 숄에 눌린 머리를 손으로 빼내며 도전적으로 웃었다.
“그런 게 진정한 쟁취의 참맛 아니겠어요?”
내 마음을 원한다면 − 사실 이미 반쯤은 그에게 주긴 했으나 −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해야지. 그런 의미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스코트해 줄래요?”
손을 잡고 입술을 나누고 비밀을 공유해도 그의 눈빛은 대체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물건을 바라봐도 저것보다는 나을 무미건조함. 뭉툭한 쇳덩이를 갈아 만든 것 같은 시린 온도가 가끔 무섭도록 섬찟했다. 애를 쓰고 채워 놔도 순식간에 빠져나갈 밑 빠진 독 같았다. 그의 상처는 깊고 내 시간은 유한하다는 생각에 가끔 이렇게 손끝이 오므라들고 말았다. 이제 그만 잡아 줘도 되지 않을까, 몇 초쯤 그렇게 생각하며 버텼다.
“저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움찔, 하고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럴수록 턱을 더 당기고 철부지 아가씨처럼 도도하게 그를 마주했다.
“가끔 화도 납니다.”
“그건 누구나 그래요. 나도 그렇거든요.”
그 반응이 정상이었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건 결국 아무 관심도 없다는 것과 같았다. 욕심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면 사람은 언제나 통제력을 잃으니까.
나는 계속 웃었다. 할 수 있는 한 방긋 웃었다. 나는 괜찮다. 더하여 해치지 않겠다. 내 무해함을 강조하려 했다.
“그래도 당신은 웃는 게 어울립니다.”
그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내 손을 붙잡았다.
“저에게도 계속 웃어 주세요.”
경직되어 살짝 굳어 가던 내 뺨을 손으로 덧그리며 가이사치고는 애절한 얼굴을 했다. 서투른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색하게 펴지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럼요!”
나는 일부러 더 밝게 큰 소리로 외치며 그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가이사에게 나를 계속 웃게 할 기회를 줄게요.”
햇살이 그의 눈꺼풀 위로 희게 내려앉았다. 곧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고 선명한 붉은빛이 여명처럼 빛났다.
“이 한 줌의 손을 뿌리칠 수 없다는 건 몹시 이상한 기분입니다.”
그 눈은 아주 살짝, 그러나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는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을 포기하지 못하고 본래대로 돌아온 그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는 하고 가세요.”
“앗!”
보란 듯 종이 짤랑짤랑 흔들렸다.
“일어나셨어요, 주인님?”
“좋은 아침이에요, 주인님!”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어느새 사라진 가이사 대신 짹짹거리는 하녀 부대가 들어와 나를 낚아채 갔다.
* * *
아침 먹고 나니 금방 점심이라 점심까지 든든히 챙겨 먹은 뒤에 밖에 나오는 걸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길리안 알폰소가 있다는 수도의 뒷골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이사의 장담대로 골목은 더러웠다. 악취에 적응할 틈도 없이 새로운 시궁창이 발밑으로 흘렀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맞아?’
불평보다 걱정이 들었다. 가이사가 괜찮을까 하여서.
“당신 괜찮아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찌푸리지 않은 말끔한 얼굴이 그의 말에 힘을 더했다. 하기야 그의 결벽증은 인간에 한한 것이지 오물이나 악취 문제는 아니었다.
“저쪽입니다.”
가이사가 손으로 거리의 거지 중 한 명을 가리켰다. 그래도 황후의 젖동무라는데 생각 이상으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두 눈은 모두 뽑혀 텅 비었고 파리가 내려앉은 소매 밑으로 나온 손은 손가락이 모두 잘려 있었다. 이럴 거면 왜 살려 놨나 싶을 정도였다. 차라리 죽이는 것이 더 자비로울 처사였다.
“혹시 혀도 잘렸나요?”
“예. 말은 못 합니다.”
“청력은요? 귀는 멀쩡하죠?”
바로 튀어나온 말이 참 간사해서 쓴웃음이 살짝 나왔다. 저런 꼴을 보고도 의사소통에 대한 걱정부터 들다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습니다만 귀는 들릴 겁니다.”
저렇게까지 망가트려 놓았으니 굳이 죽이지 않았을 거다.
“한때 황제가 길리안과 황후의 관계를 의심했답니다. 저 모습은 그에 대한 황후의 대답입니다.”
“하. 참…… 가지가지 하네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저 몰골이 어딘가 익숙했다. 손목이 아니라 손가락을 하나하나 잘라 놓은 잔인함. 보통은 손목을 잘랐다. 손가락을 열 개나 자르려면 생각 이상으로 힘이 들고 귀찮으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타르시가 요르케에게 했던 짓이 딱 저랬다. 이것도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아무튼 대화를 좀 해 보고 싶은데 그전에 이걸 먼저 마셔야 해요.”
나는 품에 챙겨 온 병을 하나 꺼냈다. 드레스 룸에 몰래 숨겨 뒀던 걸 가져왔으니 그는 몰랐을 것이다.
“가로우 아닙니까?”
“맞아요.”
“그건 위험합니다. 잘못하면 부작용이 계속되는 걸 모릅니까?”
“알고 있는데요.”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하신, 하아…… 아무거나 먹지 마세요.”
그는 손을 뻗는 것만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걸 빼앗았다. 반항해 봐야 소용없을 거라서 나는 그냥 줘 버렸다. 상관없기도 하고.
“진통제로 쓰려는 게 아니에요.”
가로우는 강력한 진통제의 일종인데 약간의 부작용이 있었다. 시각과 청각의 이상. 눈은 흐릿하게 보이고 귀는 음색을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
“가이사는 아직 저를 모르시네요.”
혹시 내 목소리를 기억하기라도 하면 죽여서 입을 닫는 수밖에 없잖아?
“당연히 저 사람에게 써야죠.”
나는 길리안을 가리키며 웃었다. 목숨에 비하면 부작용은 싼값이니까.
“저는 당신의 그런 면을 참 좋아합니다.”
굳어 가만히 멈추어 있던 그가 다시 움직였다. 그는 재킷 사이로 손을 넣어 두꺼운 장갑 한 쌍을 꺼냈다. 장갑을 바꿔 끼고 주먹을 쥐자 뿌드득 하고 가죽이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분위기가 험상궂어졌다. 하늘 위를 기웃거리던 까마귀 떼도 가이사의 성질머리를 알았는지 까악까악 울며 도망갔다.
“어떤 면이요?”
“다른 사람에게 냉정한 점.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이기적이게.”
말을 끝낸 그가 약병 뚜껑을 열어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며 길리안에게 다가갔다.
“이기……적?”
욕이야 칭찬이야, 무슨 말이야?
“아아!”
짧은 시간 안에 무슨 짓을 당했는지 길리안은 짧은 비명만 남기고 허름한 집 안으로 내던져졌다. 나를 놓고 갈 수는 없었는지 가이사가 찝찝하다는 얼굴로 손짓하는 게 보였다. 수도의 뒷골목.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는 거리에 혼자 남는 건 어쩐지 오싹했다. 나는 서둘러 가이사를 향해 뛰어갔다.
「생존. 최대한 협조. 살려 주세요.」
길리안은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다급하게 글자들을 적었다. 손가락이 다 잘린 두 손으로 펜을 뭉뚝하게 쥐느라 속도가 느렸으나 이번이 처음인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같은 사람이 이미 한 번 이상 다녀간 적 있다는 듯 길리안의 대처는 빨랐다.
「릴리스 나쁘다. 나는 복수한다. 릴리스. 당신에게 다 말하겠다. 릴리스. 죽일 년. 망할…….」
길리안은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황후에 대한 욕을 종이 가득 적어 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도착적인 증세였다.
“……나를 기억해?”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렇게 말했다.
「기억합니다.」
종이에 적고도 부족한지 길리안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내가 누군데?”
「몰라. 모릅니다. 저는 정말 모릅 몰 몰라 몰라 몰라」
가뜩이나 삐뚤삐뚤하던 글자가 혼비백산 흩어졌다. 펜으로 종이를 찢어발긴 그가 머리를 쥐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 아아! 아아아악!”
온몸으로 악을 쓰는 비명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윽!”
내가 머리를 쥐고 괴로워하자 가이사가 다가와 내 귓가를 손으로 살짝 가렸다. 차가운 액체가 귓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털이 곤두서는 기분에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끔찍한 비명은 먹먹한 귀에 잠기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청력을 잃은 나는 당황했으나 길리안이 악을 쓰다 힘이 빠져 나가떨어지자 귀를 막았던 물은 곧 빠져나갔다. 내 어깨에 살그미 내려앉았던 모나가 무서운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차가워!’
물의 정령이 아니라 얼음의 정령이었나? 정신이 번쩍 드는 차가움에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모나.”
가이사가 정령을 나무라자 그녀는 내 옷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두려움보다는 가이사의 명령이 우선인지 정령은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은 얼굴로 꾸물거렸다. 모나가 가진 인어의 꼬리가 불안스레 탁탁거리며 내 가슴을 찰싹찰싹 때렸다. 쪼끄만 게 때려 봐야 아프지도 않았다.
“괜찮아요.”
내가 손가락으로 모나를 살짝 밀어 넣자 정령이 안심한 얼굴을 하며 내 손가락에 뺨을 비볐다.
‘거기가…… 안락하니?’
꼬리를 꾸물거리며 편안하게 앉은 모나를 가이사가 묘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눈썹을 모았다.
“돌아가.”
싸늘한 말에 반항할 새도 없이 모나는 세상에서 튕기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모나가 그의 말에 따르는 것보다 가이사가 마나를 끊어 내는 게 빨랐다는 뜻이었다. 정령의 눈물처럼 남은 물기가 아련하게 흘렀다.
“릴리스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지?”
에효, 한숨을 삼키며 다시 길리안에게 물었다. 길리안의 손이 다시 다급하게 움직였다. 길리안이 적어 낸 이야기는 예상한 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20년 전의 샤사롯과 로이드는 선대 황후를 돌보지 않고 불륜에 빠진 황제를 나무라며 칼리탄을 비호했다고 한다. 릴리스로서는 그런 그들이 눈엣가시 같았을 테고, 그녀는 결국 모략을 짜냈다. 로이드의 하위 가문인 알폰소의 사생아, 길리안을 이용하는 것으로 시작한 그녀의 계략은 길리안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을 냉대하던 고귀한 젖동무가 사근사근하게 속삭이는 감언이설에 홀린 길리안은 릴리스의 뜻대로 움직였다. 길리안은 릴리스의 도움을 받아 알폰소를 협박해 알폰소에 정식 입적했고 알폰소 내부에서 증거를 조작했다. 그의 입에서 로이드와 샤사롯을 비롯한 여러 가문의 이름이 나왔고 조작된 증거는 그들을 멸문시켰다. 릴리스는 만족하며 길리안의 편의를 봐줬으나 그걸 본 황제가 예상치 못하게 그들을 질투하면서 당황했을 것이다.
릴리스는 그녀의 충실한 종을 자처하던 길리안을 황제의 앞에서 고문했다. 그는 양 눈이 뽑히고 혀가 잘린 채로 깔깔거리는 황제의 옥음을 들었다. 방만한 황제와 릴리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길리안의 열 손가락을 자른 뒤 사냥개를 시켜 그의 생식기를 물어뜯게 했다. 이 세계인의 엄청난 회복력이 없었다면 길리안은 거기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곳 사람들의 회복력은 현대인과는 다르게 뛰어났고 길리안은 살아남았다.
웃긴 것은 길리안의 생사를 두고 황제와 릴리스가 내기를 했다는 것이다. 길리안이 살아남는 쪽에 건 황제는 즐거워하며 그를 수도의 가장 비천한 거리로 내던지게 했다. 릴리스는 길리안을 살려 놓은 게 찝찝했을 테지만 황제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황제의 관심이 끊기면 죽일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왜 아직 길리안이 살아 있는 걸까? 릴리스가 길리안을 잊어버려서? 손가락을 자른 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됐을 텐데 그 부분이 가장 이상했다. 릴리스가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이 드네요. 릴리스의 측근이 릴리스를 배신하고 길리안을 살려 놓은 게 아닐까, 하는.”
“뒤처리를 부탁할 만큼 신임하는 자였을 텐데요.”
“배신이야 밥 먹듯 일어나는걸요. 충분히 가능성 있어요.”
길리안에게 캐물어도 타르시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길리안은 황후 릴리스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협력자가 있었다는 사실만 알았다. 황제의 질투를 삭이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도 협력자겠지. 릴리스는 설마 황제가 그런 걸 좋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오래 함께 살아 알겠지만 적어도 그때는 황제의 취향을 몰랐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원작을 읽은 나 또한 황제에게 그런 잔인성이 있는지 몰랐다. 쉬쉬하는 소문도 없는 걸 보아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모를 것이다. 그런데도 릴리스가 믿었다면 황제를 잘 아는 사람이 그녀의 협력자라는 뜻이 됐다.
“타르시의 이름은 한 번도 안 나왔는데 묘하게 일치한단 말이죠. 여러 조건에서.”
타르시는 황제가 어렸을 적 학문을 수학한 스승들 중 하나였다. 고문을 즐기는 건 타르시의 성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타르시라면 황후의 눈을 충분히 가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심증밖에 없다는 거예요. 협력자가 누구인지 물으면 저렇게 발작을 하니 더 물어볼 수도 없고.”
“가로우는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내 말을 가만히 들어 주던 가이사가 문득 물었다.
“집에서요. 약재방에 직접 찾아가서 가져왔어요. 무더기로 쌓인 약초 중 이파리 하나만 가져왔으니까 티 나지는 않았…….”
잠깐. 가로우 같은 위험한 약물이 왜 그 약재방에 있었을까? 물론 세이아 정도의 가문이라면 독을 비롯한 다양한 약재를 취급했다. 독에 당할 때도 생각해야 했고 독을 쓸 때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약물은 아주 비밀스럽게 다루어졌다. 내 약을 짓는 약재방 같은 곳이 아니라.
게다가 이제 와 생각하니 약재의 이름이 하나하나 친절하게 적혀 있었던 것도 이상했다. 약재방을 쓰는 의원이라면 굳이 이름을 적어 두지 않아도 분간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그렇게 해 둔 걸까? 꼭 이것이 가로우이니 헷갈리지 말고 가져가라고 만들어 둔 친절한 안내문처럼. 내가 가로우를 필요로 할 걸 알았다는 걸까? 대체 누가?
* * *
“작은 주인님께서 길리안 알폰소를 찾아내신 모양입니다.”
정교하게 사각거리던 금펜이 완전히 멎었다. 루베니오는 우아한 손짓으로 금펜을 펜꽂이에 넣었다.
“생각보다 빠르군. 가이사의 짓인가?”
“아델만 백작님이 동행하셨다고 합니다.”
루베니오는 듣기 싫은 걸 흘려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바라봤다. 해가 쨍쨍한 낮이었다. 쓰레기들은 대충 치워 놨고 가이사가 따라갔다면 별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뭐가 이렇게 불안하고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르겠다. 루베니오는 니네이나와 관련한 일이라면 이렇게 겁이 많아졌다.
“왜 그냥 두시는 겁니까?”
주인의 의향을 직접 묻다니. 집사라면 듣지 않고도 의향을 파악해 주인을 만족시켜야 하는데.
시엘은 곧장 후회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주인님.”
루베니오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시엘을 돌아보지 않았다. 집사인 그가 기사의 예를 취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이 방에 없었다.
“요르케의 사생아를 보며 한 가지 배웠다.”
잔잔한 목소리에 방에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하찮은 사생아 따위가 주인에게 가르침을 줬다는 사실을 차마 들을 수가 없어 모두가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내가 서툴렀다. 아가에게 완롱물(玩弄物)부터 선물해 줬어야 하는데.”
점점 더 생기가 오르는 니네이나를 보며 루베니오는 후회했다.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게 해 줘야 했다고. 위험하다고 하여 무조건 철장 안에 가두고 꽃밭에 앉혀 두기만 했으니 그 애가 시름시름 앓았던 게 아닌가 하여 몹시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지금 루베니오의 행동은 사냥을 배우는 새끼 새에게 다 죽어 가는 사냥감을 물어다 주는 아비 새와 같았다. 귀하고 소중한 새끼 새를 상처 입힐 수 없을 만큼 약하지만 그래도 사냥감이었다. 아이의 입맛에 맞는다면 뭔들 못 할까? 돌아가야 해도 좋았고 쾌락 같은 복수가 없다고 해도 괜찮았다. 늙은 범의 목도 양보할 수 있었다. 발톱과 이빨은 물론 사지까지 잘라 한없이 연약해진 후라면. 그러나 그 전까지는 마땅히 아비 짐승의 몫이었다. 호시탐탐 주변을 노리는 천적에게 경고를 해 두는 것 또한 그랬다.
“가이사 혼자 남았을 때 전해라.”
고아한 서신이 시엘의 발아래에 툭 떨어졌다. 시엘은 두 손으로 서신을 공손히 받아 챙겼다.
* * *
“누가는 무슨. 너무 뻔하네요.”
나는 이마를 손으로 탁탁 때렸다.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가이사가 나를 두고 세 걸음 이상 떨어지는 걸 봤을 때부터 느낌이 싸하더니.”
어째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다고 했다. 누군가 나에게 거치적거릴 사람 전부를 치워 놓은 것처럼.
“아버지겠죠?”
말해 뭐 해? 가이사는 나보다 먼저 눈치챘는지 놀라지도 않았다. 나는 루베니오가 잘 짜 놓은 안전한 체스판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루베니오가 미움 받을 짓을 하는군요.”
가이사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자질했다. 지나가듯 툭 가볍게 말하기는 했지만 분명 이르는 거였다. 그 얼굴이 조금 우스웠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애초에 내 자만이었어요.”
루베니오의 눈을 속일 생각을 하다니. 속일 수 있을 거라고 믿다니.
“이건 내가 아버지를 앞서지 못한 탓이라고 할 수밖에요. 완전히 당했어요. 필패예요.”
루베니오는 머리가 엄청나게 좋았다. 그가 괜히 제국 제일의 부자가 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아버지인 줄 알고 타르시를 사랑했던 순종적인 청년 시절에야 타르시를 상대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루베니오가 하도 팔불출 짓만 해서 무심코 그의 저력을 얕본 내 실수였다.
“화 안 나십니까?”
“화를 어떻게 내겠어요? 서로 속였는데.”
“…….”
“저는 아버지를 속이려다가 실패했고, 아버지는…… 봐줬나 봐요. 내가 모르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디서부터였을까? 지하 도서관에 남아 있던 족보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루베니오는 내가 이 사실을 모르도록 철저히 함구할 수도 있었다. 족보를 치우거나 길리안을 치우거나. 기회는 여러 번이었을 텐데 내가 다 알도록 허술하게 판을 짜 놓은 건 들킬 걸 감수하고 내 안전을 지키겠다는 뜻이었다. 루베니오보다 못하다고 해도 그 지극한 부성애를 모를 정도는 아니라 화는 나지 않았다. 조금 허탈했을 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뭐 하고 있어요, 가이사?”
그는 살인 현장을 탐색하는 탐정만큼이나 스산한 얼굴로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물었다.
“루베니오처럼 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겁니까?”
등줄기로 소름이 쫙 내달렸다. 당신은 안 돼! 선이 있고 정도를 지킬 줄 아는 루베니오와는 다르게 가이사는 막가파였다.
“그 전에 그거…… 봐도 돼요?”
“안 됩니다.”
싫다는데 뺏기도 뭐하고 − 애초에 뺏을 능력도 없지만 − 당황스러웠다.
“가, 가이사는 제 편이 되어 줘야죠.”
“왜 그래야 합니까?”
“아버지의 방법이 싫은 건 아니지만 좋지도 않아요. 나를 도와준 가이사가 훨씬! 훨씬! 고마워요!”
“…….”
그는 눈을 묵묵하게 빛내며 빠르게 계산했다. 계산 결과가 만족스러웠는지 그는 그 즉시 수첩을 갈무리하여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어쩌실 작정입니까?”
그는 길리안을 눈짓했다.
“양보해 주셨으니 제가 잘 보관해야죠. 음…… 이것보다는 찾아오기 좋은 환경에.”
루베니오의 눈을 가리는 걸 백 번쯤 시도하면 한 번은 해내지 않을까? 조금 뒤떨어진다면 그만큼 더 노력하면 됐다.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나는 내 나름의 정성과 신의를 다할 뿐이었다.
* * *
길리안을 처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이 잘 닦이지 않아 불편할 겁니다.”
가이사가 겁을 줬던 게 무색하게 나는 꽤 잘 걸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근력이 부족한 마른 종아리가 땡땡 부푼 게 느껴졌으나 넘어지지 않았고 쓰러지지 않았다.
“건강하다는 건 참 좋네요…….”
꿈을 꾸듯 몽롱한 기분이었다. 두 손을 맞잡고 히죽히죽 웃고 말았다.
“안쓰럽습니다.”
나 지금 건강해서 기뻐하는 중인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가이사답지 않게 진심으로 가엾다는 눈빛이 내 마음을 촉촉하게 했다. 감동이 아니라 분노로.
“더워 죽겠네요, 갑자기.”
손부채질을 팔랑팔랑하며 그를 노려봤다. 무덤덤하던 그의 눈빛이 변했다.
“죽겠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나직한 경고의 말이 매섭고 차가워서 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그냥 말버릇인데…….”
“어떤 식으로든 기분이 별로입니다. 당신이 죽는다니까.”
감동해야 할 타이밍인가? 두 볼에 열이 살짝 오르는 게 느껴졌다.
“속도 울렁거리고 불쾌합니다.”
그의 손이 어색하게 가슴을 한 바퀴 쓸어내렸다.
“조심하세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그는 그 잠깐을 견뎌 내지 않았다.
“쾌락에 그 목적을 둔 분풀이는 끝이 없고 분노는 사람을 충동적으로 만듭니다.”
말로 조각난 붉은 경고가 캉캉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충동이 영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거 뭐지? 협박인가? 내가 죽으면 다른 곳에서 영원히 분풀이하겠다는?
“…….”
아까는 간지러워 입이 다물어졌다면 이번에는 황당해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예쁜 모양의 입술이 동그랗게 말리며 밖으로 쭉 튀어나왔다. 뽀뽀를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당신도 뺨은 말랑말랑하네요.”
“뭐 하는 겁니까?”
재미없게 그는 입술을 둥글게 말고서도 정확한 발음을 구사했다. 턱의 힘이 내 손보다 훨씬 세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말하고 보니 신기해져서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자 그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눈썹을 사납게 치켜세웠다. 그러고는 ‘저리 치워!’라며 싸늘하게 읊조릴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예.”
좋아한다는 건지 그렇지 않다는 건지. 얼굴이 진짜인지 말이 진짜인 건지. 우스운 의심이 들면서도 심장이 작게 콩콩거렸다. 나 여기 있다고 존재감을 알려 오는 작은 박동에 코끝이 애잔해졌다.
“있죠, 가이사.”
내 부름에 그의 앞머리가 간지럽게 흐트러졌다. 개구쟁이 아이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그가 또 멀뚱히 나를 바라봤다.
“내가 당신보다 오래 살 수는 없잖아요.”
달래듯 속삭여도 그의 눈은 대번 사나워졌다. 으르렁거리며 나를 내칠 것처럼 뻗어 온 손이 내 손을 치워 내기 전에 다시 그를 힘주어 붙잡았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해요. 당신의 수명은 이미 범인을 넘어선걸요.”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하여 마나의 축복을 받게 된 검사, 마법사, 정령사의 수명은 대폭 늘어난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당장 죽을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저는 오래 살아야 하고 당신도 오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불가능하다고.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고집스레 눈을 치뜬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인간은 죽어요. 그건 당연한 거고 나는……”
“저를 화나게 하지 마세요.”
참자. 참아. 나를 걱정해서 그런다잖아. 나를 좋아해서……는 무슨. 당신이 진짜 어린애인 줄 알아!
“날 화나게 하는 것도 당신이거든!”
소싯적 박치기 싸움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나는 힘차게 그의 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이번만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크게 뜬 게 보였다. 찰나의 순간 이마로 맞붙었다가는 내가 질 거라고 느낀 나는 비겁하게 그의 눈 쪽을 노렸다.
킬킬. 악마처럼 비소하며 전진하는 나를 그가 부릅뜬 눈으로 바라봤다. 우당탕! 마침 기울어진 마차에 어라? 하는 순간 우리 두 사람의 몸이 마차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쿵! 두 사람의 무게가 주는 충격을 견디지 못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며 울었다.
부딪친 이마가 얼얼했다. 무릎도 잘못 부딪쳤는지 살짝 아팠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상황을 살피다가 그림처럼 누워 있는 가이사를 발견했다. 그는 방금 명화에서 튀어나온 천사처럼 한 손을 이마에 댄 채 나른히 나를 내려다봤다. 누가 보면 여기를 마차 바닥이 아닌 잔디 바닥으로 착각할 자태였다.
“가이사! 뒤통수 안 깨졌어요?”
소리가 크게 났던 게 생각나서 서둘러 그의 정수리를 뒤져 봤다.
“당신은 아기 도깨비 같습니다.”
그의 검지가 혹이 난 내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아야!”
“왜 갑자기 뿔이 났습니까?”
“그거 농담이라고 한 거예요?”
어처구니가 없어 되묻자 그도 창피함을 아는지 내 눈을 피했다.
“……미안합니다.”
내 눈길을 버텨 내지 못하고 그가 먼저 시인해 왔다. 먼저 화낸 게 누구인지는 아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는 땅에 손 하나 대지 않고 순도 100% 복근의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미끈한 몸체가 나를 살짝 당겨 안았다.
“아기처럼 안지 마요.”
“아픕니까?”
내 툴툴거림과 그의 질문이 거의 동시에 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연약하게 혹이 난 이마를 배회하다가 떨어졌다. 그 모습이 어딘지 안쓰럽고 처연해서 나는 혀를 차면서도 그의 손을 붙잡았다.
“호 해 줄 줄 몰라요?”
“호?”
“혹이 났을 때는 그게 직방이에요.”
내 나름의 화해법인데 막상 뻔뻔하게 얼굴을 갖다 대려니 눈자위까지 열이 올랐다.
“한 번도 안 해 봤습니다.”
“그게 뭐 연습이 필요한 건가?”
짐짓 새침하게 말하자 그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렸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가 내 앞머리를 젖히고 이마를 살펴보는 게 느껴졌다.
“파란 뿔이 생겼습니다.”
“멍들었어요?”
“예.”
헉! 그럼 내 꼴이 좀 웃기지 않을까? 좀 당황하여 서둘러 머리칼을 가리려 했다.
“아직 안 했습니다.”
그런 내 손을 침착하게 거머쥔 남자가 입술을 살짝 내렸다. 그러고는 그의 입술이 얼마나 달게 말캉거리는지 알게 될 만큼 살갗을 보들보들 문질렀다. 그가 립스틱을 발랐다면 생겼을 붉은 순흔이 열꽃으로 치환됐다.
후. 잠깐 불고 말 줄 알았던 숨결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잠깐 멎었다 싶으면 또 부리나케 긁고 휘감고. 체온만 살짝 머금었을 숨결이 뜨겁고 화끈해서 살갗이 짓무르는 것 같았다. 차마 피할 수는 없었다. 내 이마를 살펴보는 눈이 진중하게 무거웠다. 나는 그가 왜 화를 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가만히 그의 뒷머리를 어루만졌다. 혹은 보이지 않아도 뿌리 깊은 곳에 났을 상처가 가여워서. 내 손길은 가이사보다 집요했을 것이다.
* * *
“나도 정령과 계약할 수 있어요?”
내 질문이 뜬금없게 느껴졌는지 마차에서 나를 내려 주던 가이사의 표정이 미묘했다. 아니, 갑작스러워 그런 게 아닌가?
“정령사가 되면 오래 살 수 있을까 해서요.”
지레 찔린 내가 변명조로 덧붙였다.
“자질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죽어요?”
답지 않게 말을 흐리기에 그가 할 말을 내가 대신 해 줬다. 전에 정령을 소환했다가는 마나 고갈로 죽을 거라던 말이 떠올랐다.
가이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말은 하지 마세요.”
또 싸울까 봐, 그리고 그의 얼굴이 우울해 보여서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제 성물을 먹었으니 괜찮은 거 아닌가요?”
“말씀드렸다시피 일시적인 겁니다. 흘려 둘 거라면 몇 방울 더 흘려 놨으면 좋았을 텐데요.”
뒷말의 거의 협박조였다. 눈앞에 신이 있다면 눈깔을 찔러서라도 눈물을 뜯어낼 기세였다.
“으응…… 그렇구나.”
“정령보다는 운동을 하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전에 만든 아령……으로.”
그의 눈이 일순 흐릿해졌다. 시선의 방향은 날 향하고 있는데 나를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 번뜩 떠오른 게 있는지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선명함이 죽은 흐리멍덩한 눈빛이 어딘가 위협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휠체어도 다 만들었는데 막상 쓰지를 못하네요. 아령은 깨질까 봐 못 쓰겠고.”
휠체어를 만든 장인을 그냥 뒀다가는 여러 쓸모없는 것들을 추가할 것 같아서 일단 가져왔다. 기껏 만든 물건이 아까웠으나 나는 되도록 그 휠체어를 창고 밖으로 꺼내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지금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게 최고로 좋으니까.
“쓸데없는 짓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은 이렇게 건강한데.”
두 손을 힘차게 휘두르며 씩씩하게 걷자 생각에 빠져 말이 없던 가이사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멀었습니다. 저 정도는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는 저택 앞마당을 가리켰다. 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였는데 이벤트라도 있는 건지 오늘따라 사람이 많았다. 하나같이 장승처럼 키가 커서 고개를 쭉 빼도 사람들이 둘러싼 안이 보이지 않았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깨금발로도 보이지 않아서 그를 향해 묻자 그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비켜라.”
“……!”
별로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내 시야를 막았던 기사들이 일순 창백한 얼굴로 가이사를 돌아봤다. 그들 중 몇몇 사람은 검 위에 손을 올려 두기도 했다. 가이사가 분명 무슨 짓을 한 것 같긴 한데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공포 정책을 펼친 폭군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유유히 앞장서서 길을 뚫었다. 사람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양쪽으로 갈라졌다.
‘가이사의 기적인가……?’
이렇게까지 해서 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길이 뚫려 있어서 지나가 봤다. 깊은 사람 동굴을 파고들자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챙! 챙!
아실로가 연보라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칼리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고목나무에 매미가 달려드는 꼴이라는 뜻이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가 꽤 험악했다. 한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고 방어에만 치중한 칼리탄의 행동에 아실로가 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어째서……! 어째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글쎄. 내가 어째서냐고 묻고 싶었다. 남의 집에서 이게 무슨 행패야! 아실로가 저러다가 다치기라도 해 봐라. 뱀 같은 황제가 가만히 있겠는가? 내 아들 얼굴이 왜 이러냐면서 아실로를 데려온 루베니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내가 또 그 꼴은 못 보지.
“두 분…… 콜록!”
챙! 챙챙! 쉽게 진정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실로는 이성을 잃은 것 같았고 칼리탄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런 아실로를 다 받아 주고 있었다. 아우. 여기 먼지 엄청 날린다. 입을 열자마자 모래를 훅 먹어서 입안이 까슬까슬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럭저럭요.”
내가 목을 쥐고 콜록거리자 가이사의 표정이 변했다.
“저것들을 멈추게 하면 됩니까?”
저것들이라니! 사람도 많은데 누가 들었을까 봐 무섭다!
“내가, 콜록! 콜록!”
모래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아실로가 땅을 디딘 발을 회전축 삼아 뛰어오르는 게 보였다. 어린애 주제에 엄청 날랬다. 일단 물러났다가 확성기라도 가져와야 하나 고민하는데 가이사가 바지춤에서 날카로운 단도 하나를 꺼냈다.
‘설마…… 아니지?’
그거 아니야. 아니야. 진짜 아니야! 나는 목을 쥔 채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가이사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나를 한 번 힐끔 봤다. 그런데 전혀 신뢰가 안 갔다. 그의 오른손에서 단도가 번뜩 빛난 탓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들키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이 가이사를 피해 꽤 멀리 떨어졌다고 해도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다.
“들키지 않기는요! 얼른 안 집어넣어요?”
나는 소곤거리며 그에게서 단도를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가 한숨을 쉬며 단도를 갈무리했다.
쯧. 그는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는 듯 혀를 찼다.
혀를 찰 건 나였다. 단도라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건데?
“뭘 하려던 거예요?”
“저것들이 당신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해는 무슨…… 아니, 해를 조금 끼친 건 맞지만 먼지 약간 날린 거예요!”
“당신은 먼지만 잘못 들이켜도 죽습니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럴듯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래도 무작정 죽이는 건 안 돼요.”
“당신을 해치려 하는데 왜 안 됩니까?”
그는 감정 없이 무딘 얼굴로 생각도 기계적으로 했다. 상황 고려 없이 본인이 믿는 단순한 인과 관계만 중요한 것이다. 턱까지 얼얼해질 정도로 소름이 내달렸으나 나는 침착하게 그의 눈을 마주했다.
“당신의 생각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어요. 첫째, 이건 죽을 만한 짓이 아니에요.”
가이사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고의가 아니잖아요. 날 해치려는 의도가 아니었어요.”
내가 집요히 바라보자 그는 특유의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툭 끄덕였다.
“둘째, 만약 저들이 한 짓이 정말 죽을 짓이라면 쉽게 죽이면 안 되죠. 내가 받은 고통을 되돌려 줘야지.”
이번 건 좀 마음에 들었는지 가이사의 반응이 조금 전보다 빨랐다.
“셋째, 내가 당한 짓에 대한 판단은 내가 하게 해 줘요. 그게 정말 날 위하는 거예요.”
가이사와 내 눈은 같은 감정을 가졌다. 서로에 대한 걱정이었다.
“날 위해 그렇게 해 줘요.”
다시 한번 간절히 속삭이자 뻣뻣한 그의 턱 위로 퍼런 핏줄이 잘게 떨렸다.
“……알겠습니다.”
나직한 바람처럼 대답한 가이사는 그대로 돌아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걸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굳건히 뻗은 검은 어깨 위를 날카로운 햇살이 꿰뚫었다. 부스스 흩어지던 햇빛 부스러기가 그대로 남은 아득한 순간이었다. 그의 존재감이 희미해졌고 나는 한순간 그를 보지 못했다. 가이사는 순간 이동이라도 했는지 말 그대로 쏜살같이 쏘아졌다. 그는 허벅지로 두 사람 사이를 갈랐고 두 손으로 달려드는 검날을 각각 하나씩 붙잡았다.
“집주인은 소란을 원하지 않습니다.”
달그락! 그의 손이 검날을 툭 밀었다. 뒤로 가볍게 밀린 칼리탄과 아실로가 멍한 얼굴로 가이사를 돌아봤다.
“지금…… 뭘 한 거지?”
칼리탄의 말이야말로 내가 할 소리였다.
“미쳤어! 제정신이에요?”
나는 얼른 달려가 맨손으로 쏟아지는 검을 붙잡은 가이사의 손을 살폈다. 두꺼운 가죽 장갑 덕분인지 베인 곳 없이 멀쩡했다. 그러나 화가 났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칼리탄을 돌아봤다.
“제 집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눈이 있으면 좀 보라고 모여 있는 사람들을 눈짓했다. 이 정도면 황제의 귀를 막는 게 불가능한 수준인데 대체 생각 없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피해를 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럴 생각이 없으면 뭐 해요! 이미 주셨는데!”
어른이 되어서 애랑 진검 싸움이라니. 그것도 감정 조절이 안 될 만큼 격하게. 이건 칼리탄의 잘못이 맞았다.
“……미안하군.”
칼리탄이 사과했으니 이번에는 아실로 차례였다.
“황자님은 본인의 위치를 모르고 계세요. 여기서 자칫 큰일이 일어난다면 누가 가장 피해를 볼 것 같나요?”
아실로는 황제의 익애를 한 몸에 받는 자식이었다. 그를 따라온 시종들이 전전긍긍하며 이쪽을 주시하는 게 보였다. 고집을 부린 건 아실로였겠지만 아이와 어른 사이의 문제라면 일의 책임은 어른에게 돌아갔다.
“…….”
똑똑한 아이니 금방 이해했는지 아실로는 분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형제 싸움은 돌아가서 하세요. 한 번만 더 이러시면 두 분 다 쫓아낼 테니까요!”
귀족의 사유지는 황족이라고 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화가 나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가이사가 그의 손을 꽉 쥔 내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가요, 가이사!”
나는 가이사의 손을 강하게 이끌며 두 황족을 그대로 두고 돌아섰다.
* * *
내 집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저택 곳곳에 내 눈과 귀가 깔려 있었으니까. 요약하자면 이런 이야기였다. 칼리탄을 찾아간 아실로가 칼리탄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고 칼리탄이 승낙했다. 아실로는 진검으로 가르쳐 달라고 고집을 부렸고 칼리탄은 싫다며 돌아섰다. 그 모습이 아실로에게 자극이 되었는지 그때부터 흥분해서 달려들었단다. 형제 싸움은 복잡하고도 단순해서 제삼자인 나는 들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추측해 볼 수는 있었다. 아실로는 자신이 칼리탄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했을 것이고, 칼리탄은 자꾸 말 걸며 친해지려고 하는 아실로가 싫었을 것이다. 황제 부부를 향한 칼리탄의 증오를 알 리 없는 아실로와 죄 없는 어린 동생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칼리탄.
아실로의 답답함과 칼리탄의 고뇌가 동시에 이해됐다. 두 사람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사이였다. 그래서 원작에서도 두 사람은 떨어져 지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원작에 없던 이 사건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가늠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어느 정도는 염두에 두고 대책을 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 안은 항상 바쁜 것 같습니다.”
가이사가 내 이마를 살짝 짚어 보며 말했다.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눈가가 뜨끈뜨끈한 게 느껴졌다.
“할 수 있는 게 생각하는 것밖에 없어서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오래 방치한 탓인지 미지근했다.
“식었네요. 목이 깔깔해서 뜨거운 걸 마시고 싶었는데.”
조금 귀찮긴 하지만 종을 흔들어 하녀를 부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먼저 손을 뻗은 가이사가 내가 종을 잡지 못하도록 손으로 종을 덮었다. 할리갈리 게임에서 진 것 같은 오묘한 패배감이 들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가이사의 어깨 옆으로 작은 불꽃이 번쩍 타올랐다. 입을 아앙 장난스럽게 벌린 도마뱀이 허공에 나타나 내 찻잔에 코를 비볐다.
“그건 먹지 마.”
가이사의 만류에도 킁킁거리며 탐색하는 아기 도마뱀이 귀여워서 살짝 웃음이 났다.
“찻잔도 먹어요?”
“후나는 못 먹는 게 없습니다. 식탐이 유독 강해서 간혹 이렇게 고집을 부리기도 합니다.”
가이사가 도마뱀의 뒷덜미를 붙잡아 떼어 냈다. 그의 손에 대롱대롱 걸린 도마뱀의 눈이 애처롭게 빛났다. 구해 줘! 나를 놓아 달라고 부탁해 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안 뜨거워요?”
도마뱀의 귀로 추정되는 관자놀이 양 끝이 붉은 불꽃에 휘감겨 있었다. 감정에 따라 들쭉날쭉 타오르는 불꽃이 귀엽기도 하고 살짝 무섭기도 했다.
“만져 보셔도 됩니다.”
내가 손을 살짝 내밀자 가이사가 내 손바닥 위에 도마뱀을 툭 내려놓았다. 장난기 많은 정령이 내 손바닥 위를 도도도 오가며 내 손가락을 앙앙 깨물었다. 불꽃 도마뱀이라고 해 봤자 아가였다. 간지럽기만 했다.
“으응. 정말 배고픈가 봐요.”
내가 후나의 머리를 살금살금 쓰다듬는 사이 가이사는 내 찻잔을 들어 후나의 꼬리 위에 올렸다. 꼬리의 불꽃이 화르르 켜졌다.
“얼마 전 오랜만에 먹을 걸 줬더니 더 그러는 모양입니다.”
“얘가 먹을 게 있으려나?”
찻잔도 먹는다지만 물건을 먹으라고 주기는 좀 그랬다.
“사탕 좋아하니?”
쓴 약 먹을 때 하나씩 챙겨 먹는 걸 꺼내 주자 붉은 혀가 날름 사탕을 휘감았다. 후나의 혀에 감긴 사탕이 물처럼 녹아내렸다. 똑똑 떨어지는 사탕물을 꿀꺽꿀꺽 빨아 먹은 후나가 입맛을 쩍 다시며 더 없냐는 듯 나를 올려다봤다.
“와! 신기해라!”
가이사가 적당히 데운 찻잔을 내게 건네주며 사탕 하나를 꺼내 천장으로 휙 던졌다. 휙 날아오른 후나가 사탕을 따라가 냠냠 먹어 삼키는 게 보였다.
“가이사의 정령은 하나같이 다 귀여워요.”
“외모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정령들은 다 이런 식으로 생겼습니다.”
가이사가 손가락을 들자 얌전히 내려앉은 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정령과의 계약은 친밀한 감정이 중요합니다.”
“무구한 얼굴은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예.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정령이라도 외모는 둥글고 체구는 자그맣습니다.”
“재앙이요? 상상이 안 가네요.”
외모가 다는 아니라지만 밥 먹고 나른하게 누워 졸고 있는 후나는 아주 순해 보였다.
“직접 계약하시게 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제 말의 뜻을.”
놀리는 건가?
“그건 평생 알지 못할 거라는 뜻인가요? 정령이랑 계약하면 마나 소진으로 죽을 거라면서요.”
“……아주 나중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눈이 또다시 허공을 흐릿하게 헤맸다. 가이사의 얼굴에서 내가 느낀 건 절대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손에 쥔 허망함이었다.
* * *
가이사는 왜 그런 얼굴을 했을까? 그가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 혼자 고심해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잠시 방에 홀로 앉아 있다가 늦은 저녁에 복도로 나왔다. 온종일 이것저것 고민하느라 뇌에 통각이 느껴질 지경이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똑똑.
“들어오렴.”
기다리고 있었는지 돌아오는 목소리가 빨랐다. 나는 기사가 열어 주는 문 사이로 들어갔다. 거대한 집무실 책상 위에 홀로 앉아 있는 루베니오의 양옆으로 서류가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다. 혼자 쓰는 책상이 왜 저렇게 큰지 한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거기 앉아라.”
루베니오가 앉아 있던 의자가 드르륵 끌리며 소리를 내었다. 꽤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제 발 저린 도둑과 잘못을 반성하는 아이, 그 중간 어딘가의 모습이 보였다. 길리안의 일이 지레 찔린 모양이었다.
“샤사롯을 복권시킬 생각이세요?”
나는 자리에 앉으며 여상하게 물었다. 소파 상석에 앉던 루베니오의 손가락이 주먹을 불끈 쥘 것처럼 움츠러들다가 팔걸이 위에 느슨히 놓였다.
“급하구나. 인사부터 해도 되는걸.”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은 루베니오가 내 앞에 차를 한 잔 따라 줬다. 내가 언제 올지도 예상했는지 혹은 내가 모르는 감시자가 있었는지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고요한 밤이다. 오늘은 뭘 하고 지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렴.”
루베니오는 손을 들어 직접 내 차를 먼저 따라 주고, 자신의 것을 정갈하게 따라 냈다. 따끈따끈한 찻잔은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가 만족할 때까지 별거 아닌 내 일상을 들려준 후에는 지끈거리던 이마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네가 니네이나 세이아-샤사롯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본래 네가 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지.”
자상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루베니오가 불쑥 말했다.
니네이나 세이아-샤사롯. 세이아와 샤사롯을 하나로 묶고 싶다는 뜻이었다. 단순히 로페니아를 향한 감정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루베니오의 눈은 이성적인 냉철함으로 잔잔히 반짝이고 있었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물론 다른 방법을 찾겠지.”
“우연이네요. 제 생각도 아버지와 같거든요.”
나는 이제 루베니오를 내 아버지로, 로페니아를 내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었다. 찾아드는 감정을 분리하여 생각하기보다는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루베니오를 소중히 생각하게 될수록, 죽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로페니아 생각도 났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생각할 때마다 이상하게 애틋했다. 그녀야말로 내게는 활자 위의 존재일 텐데도.
로페니아의 것을 되찾아 와야 이 감정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폐부에 짜고 아릿한 바닷물이 차오르는 그 갈증과 허덕임을 불사를 방법은 오직 이것이었다. 로페니아가 니네이나의 어머니로 존재하는 것. 사실 이 사건에서 나는 루베니오보다 오히려 더 감정적이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베니오가 입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래.”
약간의 떨림이 묻어나는 축축한 눈동자가 안개 먹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그는 곧 그걸 갈무리해 냈고 나 역시 밀려드는 감정을 깨끗하게 말려 머리 한쪽으로 내려놓았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길리안은 좋은 증인이 못 되잖아요.”
샤사롯을 복권시키는 건 루베니오와 나에게 무척 좋은 일이었다. 로페니아의 유일한 혈육인 내게 돌아올 부가적인 것들은 중요도로 따지자면 두 번째였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타르시를 고립시키는 것. 나와 루베니오는 이 일이 타르시가 벌인 짓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문제는 타르시를 배후라고 지목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길리안은 타르시의 존재를 몰랐고, 설령 안다고 해도 그런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 하는 말이라면 타르시 쪽에서 반박을 해 올 테니까. 요점은 타르시가 절대 도망가지 못할 증거로 그를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으음……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더 알고 계시는 게 있나요?”
“너에게 이런 걸 알려 줘도 될지 모르겠다.”
루베니오는 머쓱한 표정으로 입가를 가렸다. 민망함과 곤란함이 언뜻 보였다.
“말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일인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단지…….”
루베니오는 다시 망설였다.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차를 홀짝이거나 팔걸이를 툭툭 빠르게 치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야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애초에 네가 왜 그런 걸 고민했는지 모르겠구나.”
“네?”
“하아. 그러니까 증거는 말이다, 만들기 나름 아니겠니?”
한숨을 한 번 몰아쉰 루베니오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말했다.
“……!”
루베니오의 말을 들은 순간 깨달았다. 이런. 미친! 내가 지금까지 이런 순진한 사고를 하고 있었다니! 너무도 쉬운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렇다. 뭘 그렇게 순진하게 찾고 헤맸을까? 똑같이 돌려주면 될 일을. 빼도 박도 못 하도록 그 뒷목을 물어뜯을 조작된 증거로써.
“제가 바보였어요. 그런 좋은 방법을 두고!”
내 목소리는 흥분으로 색색거렸다. 그것이 좀 당황스러웠는지 루베니오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뺨을 파르르 떨었다. 떨떠름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소중한 딸에게 이런 모략을 가르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건 범죄가 아니라 삶의 지혜 같은 거니까요.”
“그……러니?”
“그럼요.”
여전히 굳은 얼굴을 펴지 못하는 루베니오를 바라보며 나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런 거라면 제게 아주 좋은 방법이 있어요.”
자물쇠 하나가 열리자 어디에도 쓸 수 없었던 열쇠가 또 다른 자물쇠의 주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