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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냥꾼의 밤 (2)(4권) (7/13)

건강이 없습니다

4권

6. 사냥꾼의 밤 (2)

“어쩌지?”

나는 혼잡하게 뿌려진 페로몬 길을 맴맴 도는 개미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부드러운 러그 위를 맴맴 도는 행동에 피곤해져서 침대에 주저앉았지만 고민은 계속되었다.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헉!”

나는 재빨리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 박동이 위태로울 정도로 치솟았다. 맥동하는 심장 소리가 거의 울음소리만큼이나 컸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로 찌르르 울어서 배꼽 아래가 간지러웠다. 나는 배앓이를 하는 아이처럼 끙끙거리며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기대하는 발소리는 없었다. 대신 달칵거리는 쇳소리가 들렸다.

“뭐지?”

발코니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가 아까 문을 닫는 걸 보았으니 방금 열린 것일 텐데 더 이해가 안 됐다. 욕실에서는 계속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으니까.

“귀신?”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빙의도 있는데 귀신이라고 없을까 싶었다.

“가이사!”

두려워진 나는 천적을 피해 숲을 찾아든 새처럼 그를 찾았다.

“예.”

쏟아지는 물에 입이 막혀 나는 먹먹한 소리였다. 욕실 문도 살짝 열려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문틈 사이로 뿌연 수증기가 아롱아롱 맺혔다.

“가이사?”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무슨 빨래판 소리 같은 게 났다. 벅벅거리는. 이게 무슨 소리지?

“뭐 해요?”

“씻습니다.”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문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던 나는 우뚝 멈췄다.

‘이게 무슨 짓이야!’

하마터면 범죄를 저지를 뻔했다. 씻는 사람을 훔쳐보려고 하다니! 다행히 범행 전이었다. 나는 황급히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그러나 그 이상은 물러설 수 없었다. 발코니 문이 계속 열린 채였기 때문이다.

“계속 거기 있었어요?”

“예.”

역시 발코니 문을 연 범인은 가이사가 아니었다. 나도 당연히 아니었다. 이 방에는 그와 나밖에 없는데 그럼 누가 그걸 열었다는 말일까? 진짜 귀신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가, 가이사! 언제 나와요?”

나도 모르게 그를 재촉했다. 이 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문에 바싹 붙었다. 벅벅벅. 아까 들었던 빨래판에 옷을 문지르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거의 다 했습니다.”

북북!

“……뭐 하는 거예요? 이상한 소리가 자꾸 나는데.”

“이거 말씀입니까?”

북북북!

“네. 이거.”

“손으로 몸을 문지르는 소리입니다.”

북북북북! 이게 그런 소리라고? 나는 내 몸을 문질러 봤다. 슥슥거리는 소리밖에 안 났다. 물론 씻을 때도 저런 소리는 안 났다.

“대체 어떻게 문지르면 그런 소리가 나요?”

“딱히 특별한 방법은 아닙니다. 마음이 급해서 조금 세게 문지르는 정도인데 뭐가 이상합니까?”

북북! 다 씻었는지 물소리와 함께 빨래판 소리도 멈췄다.

“…….”

기분이 오묘했다. 문지르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가이사의 튼실한 팔뚝과 두툼한 허벅지가 연이어 뇌를 강타했다.

‘근육량의 문제였어…….’

가이사의 복근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얼핏 보이는 실루엣으로 유추해 봤을 때 그는 과히 근육의 가이사였다.

‘그래도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지?’

궁금해서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욕실 쪽을 향해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궁금한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허락 없이 보는 건……”

안 될 일이라고 설명해 주려던 때에 나는 마주치고 말았다. 귀신의 형상을!

“꺄아아아아! 가이사!”

목청 터져라 외치는 내 비명에 그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아마도 나신 그대로.

“왜 그러십니까?”

툭 하고 내 등을 받친 그가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저, 저, 저거 안 보여요?”

나는 둥둥 뜬 것을 가리키며 그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쓱 떠오른 어둠이 내 눈을 가리는 게 먼저였다.

“보기 좋은 꼴이 아닙니다.”

그는 내 턱을 앞으로 돌려놓고 바닥에 앉혀 놓은 뒤 다시 문을 닫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얼이 완전히 나간 나는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주인님?”

이번에는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내 비명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게…….”

내 방을 한 번 둘러본 하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나를 덮칠 것처럼 둥둥 떠올라 있던 이상한 천 자락이 사라진 후였다.

“뭐지? 헛것을 봤나?”

“벌레라도 나온 거예요?”

“아니…… 잘못 봤나 봐. 그만 나가 봐.”

가이사가 있는 걸 들킬 수는 없어서 서둘러 하녀들을 내쫓았다. 방에 나 홀로 남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 위로 시무룩한 얼굴의 정령이 나타났다.

“모나?”

가이사의 계약 정령 중 하나인 물의 정령 모나였다. 모나를 본 순간 나는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인어를 닮은 정령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뺨에 얼굴을 비볐다. 청량감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하게 번졌다.

“사과하는 거야?”

내가 묻자 작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옷을 갈아입은 가이사가 내 예상을 증명하며 욕실 밖으로 나왔다. 허공에 둥둥 떠 있던 튜닉이 그의 몸에 맵시 있게 달라붙었다. 아무래도 모나가 가이사의 옷을 들고 온 모양이었다. 실체화하지 않고.

“깜짝 놀랐잖아요!”

모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가이사를 나무라자 정령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미안함으로 다 죽어 가는 얼굴이 가엽게 파들거렸다.

“모, 모나, 너한테 한 말 아니야.”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지만 모나의 얼굴에서는 새 모이만 한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귀엽다…….’

우는 애를 보고 이런 생각이라니. 몹쓸 짓이었지만 안타깝고 말랑말랑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별로 안 놀랐어. 그냥 놀란 척만 한 거야.”

짐짓 담대한 척 주장하자 모나의 귀가 쫑긋 섰다. 정말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럼! 정말 재미있었어!”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기쁨으로 초롱초롱해졌다.

다행이다! 마음 풀렸구나!

“정정하는 게 좋을 텐데요. 진짜인 줄 알고 다음에 똑같은 장난을 칠 겁니다.”

가까이 다가온 가이사가 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저도 두 번은 안 놀라지 않을까요?”

“편하신 쪽으로.”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다 말리지 않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허술한 튜닉 사이로 쇄골이 살짝 보이는 게 그렇게 숨 막힐 수가 없었다.

“와! 모나도 나랑 같이 자는 거야?”

앙증한 정령이 뺨을 수줍게 붉히며 가이사를 힐긋 바라봤다. 그래도 되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도 모나와 함께 가이사를 바라봤다.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모나도 같이 자게 해 줘요. 제발……!’

애타는 시선이 둘이나 되니 한 번쯤 흔들릴 법도 한데 그는 냉랭했다.

“돌아가.”

시무룩하게 젖어 든 모나의 주위로 푸른빛이 투명하게 넘실거렸다.

“안 돼! 모나야!”

손을 뻗어 봤으나 흩어지는 정령에게는 닿을 수 없었다. 흐릿하게 웃은 모나가 잘 지내라는 듯 작은 손을 애처롭게 흔들었다. 그녀는 곧 완전히 사라졌다. 텅 빈 허공이 가슴 아파 허망하게 바라보자 그가 툭 내뱉었다.

“정령은 낮에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는 콕 집어 ‘낮’이라고 했다. 같이 자는 밤마다 정령을 불러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내 계획은 벌써 틀어 막히고 말았다.

“노는 건 낮에 하세요. 밤에는 주무셔야 합니다.”

“착한 어른은 밤에도 노는 법인데요.”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마땅찮아서 괜스레 툴툴거렸다. 물론 그는 꿈쩍도 안 했다.

“첫날 밤입니다.”

“콜록!”

엄청난 어휘 선택에 기침이 터졌다. 그의 손이 내 등 위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침대 쪽으로 밀었다.

“침대에 얌전히 누우세요.”

“콜록! 콜록! 콜록!”

개복치 같은 몸이 산소도 제대로 못 삼키고 기어코 사레들리고 말았다. 한차례 기침을 토해 낸 나는 입가를 쓱 닦으며 그를 추궁했다.

“노린 거죠!”

“노리다니요?”

그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하얀 얼굴 위로 흐트러지는 머리칼이 촉촉하게 반짝였다. 탐욕스러운 밤의 별자리 같았다.

“수, 순진한 척하지 마요! 더는 안 먹혀!”

“순진……?”

생각에 빠진 것처럼 눈가를 지그시 억누르던 그가 눈을 반짝 떴다. 터지는 홍염을 그대로 방치한 눈동자가 불꽃의 꼬리를 나른하게 떨구었다.

“그건 모르겠으나.”

가이사가 무덤덤했으나 언뜻 수줍어 보이는 자태로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부터 쓱 쓸어내리는데 내 시선이 저절로 그 큼직한 손을 따라갔다.

“아직 순결한 몸입니다.”

으아아아악!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펄떡거리는 손발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들거리다가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려 이불로 뛰어들었다. 하얀 이불을 이글루 삼아 그를 차단하자 그럭저럭 살 것 같았다. 그런데 그도 나를 따라 침대에 누워 버렸다.

“……!”

“하얀 애벌레 같습니다.”

성큼 다가온 기척이 이불째로 나를 감쌌다. 아니. 감싼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 누운 것에 좀 더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무게 때문에 침대가 살짝 기울었고 내 몸은 거기에 휘말려 그의 옆구리 옆에 밀착했다. 자연스레 뻗어 온 손이 가두듯 내 배꼽 언저리로 내려왔다.

“당신은 손과 발을 내놓고 자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가 이불을 슬쩍 들췄는지 발바닥에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화끈거리던 열이 빠져나가 시원했다.

“내가…… 그런 습관이 있어요?”

“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편해서 자꾸 꼼지락거립니다. 이불을 치워 보려고.”

“…….”

“손도 주세요.”

가슴 앞에 얌전히 모여 있던 두 손이 수갑에 묶여 당겨진 것처럼 끌려갔다.

“얼굴도.”

그의 손이 접촉 없이 이불만 끌어 내렸다. 숨기고 있던 얼굴이 빠져나왔지만 그는 뒤에 누워 있는 터라 다행히 어두컴컴한 창문만 보였다. 잠깐 안도하기가 무섭게 그의 얼굴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듯 얼굴을 미세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왜, 왜요!”

설마 또 키스하자는 걸까? 그날 얘기를 해야 하나? 나는 어쩌지? 받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뭐라고 하지? 별별 생각이 다 들어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똑바로 누우셔야 합니다.”

“……그것도 제 습관이에요?”

“굳이 말하자면 필수라고 해야 할 겁니다. 혈액 순환이 잘되어야 하니까.”

그렇지만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이 상태로 몸을 들썩거리면 부딪치지 않을까? 내가 이불만 붙잡고 꿈쩍도 안 하자 그의 얼굴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왜 그러십니까?”

“조금 떨어져 봐요.”

“…….”

짙은 눈썹 산이 가팔라졌다. 마땅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으나 그는 느릿느릿 물러났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돌아누웠다. 천장이 보였다. 이 자세가 정답인지 몸도 편안해졌다.

“이제 푹 주무시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은 조금도 편안하지 않았다! 푹 자라고? 이 상태로 대체 어떻게 푹 자란 말이야! 그의 멱살을 붙잡아 짤짤 흔들어 주고 싶었으나 내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한숨을 담아 감기던 시야에 그의 손이 걸렸다. 얇은 튜닉의 소매가 바투 비틀려 팔꿈치까지 맨살이 보였다.

“가이사는…… 이불 안 덮어요?”

“괜찮습니다.”

“새벽이 되면 더 쌀쌀해질 텐데요.”

“당신 이불을 빼앗을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게 뭐예요? 추워도 괜찮다는 거예요?”

“추위에는 어느 정도…….”

그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는 괜찮아도 내 마음이 불편했다.

“나랑 같이 나눠 덮든가요.”

헉! 이게 무슨 말이야! 대체 지금 무슨 망언을 지껄인 거니, 내 입아!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차단하는 이 이불이야말로 내 심장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래도 됩니까?”

당장이라도 말을 물리고만 싶은데 그가 덥석 붙잡는 게 빨랐다. 먼저 그러자고 해 놓고 차마 안 된다고 하기가 어려웠다. 가이사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이라 그런지 나른하고 어딘지 권태로운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감동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눈을 둥글게 뜨고 있었다. 감동이랄 게, ‘저 작은 것이 언제 저렇게 커서 이런 말도 하게 되었을까’라는 의미에 가까웠지만 감동은 감동이었다. 수분기가 촉촉한 윤기 어린 눈동자를 맞닥뜨리지 못한 나는 죄 없는 이불만 빠득빠득 뜯었다.

“한 입으로 두말은 안 해요.”

엉엉 울고만 싶은 속내와는 다르게 목소리는 당당하고 새침했다. 그를 피해 고개를 숙이자마자 울상이 번졌지만 그는 이불을 들추고 들어오느라 몰랐을 것이다. 심장이 자꾸만 콩닥콩닥 뛰었다.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꾹 누르면 달음박질치는 혈관이 돌아가는 물레방아만큼 쪼르르 흘러내렸다. 더운 피가 천 갈래 만 갈래 찢겨 세포 하나하나를 갉작거리는 감각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웠다. 괴롭고 간지러워 벅벅 긁고 싶은데 겉으로 드러난 피부를 아무리 문질러도 나아지지 않았다. 내장 어딘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간지러웠다. 두 눈을 꾹 감고 이 시간을 감내하는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불편해요.”

한계에 몰려 있던 뇌를 거치지 못한 말본새가 그를 긁고 지나쳤다. 아차 하고 눈을 번쩍 뜨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물거리는 그가 보였다. 내가 가이사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무던한 사람이니 별생각 안 할 거라고 지나쳤겠지. 나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간사한 인간이라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눈에 밟혀 보였다. 씁쓸하게 웃지도 울지도 못해서 뺨을 딱딱하게 굳히고 마는 무표정이 가슴 아팠다. 상처 주려던 게 아니었다. 불러서 못을 박고자 함이 아니었다. 나는 당신이…… 그런 얼굴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체……했나?”

나는 괜히 퉁퉁 튕겨 오르는 가슴을 억세게 두드렸다. 제발 얌전히 좀 있으라는 성화에 혈관은 주인의 애원을 무시한 채 쿵덕거렸다. 더 강하게 주먹을 쥐고 손을 높이 올렸다.

“그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채찍처럼 손목을 휘감아 그 자리에 멈춰 세웠다.

“속이 불편하십니까?”

“으응.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고기 위주의 식단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방장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그럴 것까지는…….”

“당분간 고기 종류는 자제하는 게 좋겠습니다.”

“…….”

말 한 번 잘못했다가 겨우 허락받았던 고기반찬을 빼앗겼다. 나는 반찬 투정에 목숨을 거는 어린아이는 아니었지만 그건 몇 개월 만에 허락받은 고기였다.

“잠깐 그런 걸 수도 있잖아요.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푹 주무세요.”

아직 방법이 있었다. 숙면을 취한 후 내 건강함을 증명해 보이는 것.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시각을 차단하자 청각과 촉각이 선명해졌다. 그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체온이 높은 몸에서 발산한 열이 뜨끈뜨끈하게 등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아주 조용한 숨소리와. 새근새근. 무자비하게 시린 남자도 숨소리는 아기 같았다. 보드랍게 갈라지고 흐트러지는 숨결에 가슴이 선덕거리고 포근해졌다.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비스듬히 누워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이슬비에 젖은 풀잎처럼 싱그럽던 눈매에 불꽃이 확 번졌다.

“아.”

그는 몹시 당황한 듯 입가를 어물거리며 눈을 슬쩍 피했다. 옅게 패였던 뺨이 도톰하게 부풀었다.

“안 자요?”

“잘 겁니다.”

“……불은 왜 안 꺼요?”

“신경 쓰이시면 끄겠습니다.”

사실 나는 조명이 있든 없든 잘 잤고 오히려 깜깜하면 더 신경 쓰일까 봐 일부러 불을 켜고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바라보는 걸 봤는데 불을 켜고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두워야 잘 잔대요.”

차마 신경 쓰인다고는 하지 못해 에둘러 말했다.

“끄겠습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싸한 어둠이 내려섰다. 눈이 적응할 시간이 없어서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재워 드릴까요?”

“또 영지 이야기 해 주려고요?”

“배를 도닥여 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혹은 손을 잡아 드린다거나.”

배를 도닥여 준다면 심장이 기어이 몸 밖으로 삐져나올 테고, 손을 잡아 준다면 손바닥에 땀이 끈적끈적 고일 터였다. 자각이라는 건 이래서 곤란했다. 그를 의식하게 만들어서.

“당신 목소리를 좋아해요.”

“그렇……습니까?”

생각지 못한 습격을 받은 것처럼 그의 말이 뚝뚝 끊겼다.

“해 봐요, 아무거나 재미있는 것으로.”

“…….”

보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함묵하며 꾹 다물어졌음을.

“옛날 옛날에…….”

설마 동화를 들려주려나 싶어 깜짝 놀랐다.

“시작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쓰여 있던데 그 뒤는 모르겠습니다. 경험이 미천합니다.”

“…….”

“단순히 제 목소리를 원하시는 거라면 생각나는 그대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날, 왜 제게 입맞춤을 허락하셨습니까?”

입술 사이로 찬 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입술 사이의 온기를 거침없이 찢어 벌리며.

“콜록! 콜록!”

숨을 학학거리며 덜컥거리는 복부를 커다란 손이 지그시 문질렀다. 진정하라는 의미만이 명확한 담백한 손길에도 나는 기겁하며 숨을 들썩였다.

“그러고 보면 몸은 순결한데 입술은 그날…… 빼앗겼습니다.”

“빼, 빼앗? 이봐요! 내가 언제 뺏었다고 그래요! 그날도 자기가 먼저…… 그랬잖아요!”

“나는 당신이 좋아 그랬습니다.”

쿠궁! 날벼락이 머리를 으깨고 뇌수가 범람했다. 찌릿찌릿하다 못해 지끈거리는 머리는 심장을 하나 더 달고 쿵쿵거렸다.

“닿고 싶고, 안고 싶고, 만져 보고 싶고, 핥아 보고 싶습니다. 물고 빨아 발갛게 퉁퉁 헐어 버리시면 제가 다시……”

“아, 안 돼!”

그만해! 그만 말하라고!

“뭐가 안 됩니까?”

그 재앙의 입술을 닫으라고!

“당신이 하려는 모든 말이요!”

“…….”

조물조물 잘도 말하던 입술이 조용해졌다. 한참 계속되는 침묵에 씩씩거리는 내 숨소리만 들렸다.

잠시 뒤 그가 내 손을 살짝 붙잡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오므라든 손가락 사이로 입술을 지그시 파묻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

어둠에 적응한 눈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가이사의 얼굴을 인식했다. 손가락 틈에 입술을 묻고 올려다보는 시선이 또렷했다. 칭찬이라도 하라는 것 같았다. 칭찬을 갈구하는 어린 짐승처럼 정답기는커녕 당장 칭찬하지 않으면 물어뜯겠다는 망나니처럼 사나웠으나 어쨌든 그런 뜻이었다. 순간 목구멍이 턱 막혔다.

“나…… 좋아해요?”

“…….”

“좋아하냐고.”

“…….”

고집스레 다문 입술은 숨은 쉴 수 있나 걱정스러울 만큼 빡빡했다. 그는 내가 물을 때마다 입술을 부드럽게 비빌 뿐 그 틈을 벌려 집어삼키지는 않았다.

“말…… 해도 되니까…….”

“좋아합니다.”

말을 할 줄 몰라 참은 게 아니라며 곧바로 내뱉는 말에 기운이 쭉 빠졌다.

“윽…….”

좋아한다는 게 뭔지는 알까 싶은 말간 얼굴이 보였다. 순진하고 어리숙한 얼굴에 그의 종족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틀림없이 맹수과라고 생각했는데.

“나하고만 하고 싶어요?”

“물고 빠는 거 말입니까?”

“……닿는 거. 손잡고 안고 그런 거.”

가느스름하게 접힌 눈이 못마땅하게 그르렁거리다가 툭 내뱉었다.

“같이 있으면 좋습니다. 뭘 하든지 간에.”

“…….”

“당신이 잠들면 저는 자지 않으려 했습니다. 열 밤밖에 안 되는데 그냥 흘려보내면 아깝습니다.”

“열 밤 내내 안 자려고 했단 말이에요?”

“아껴 쓸 겁니다. 그걸 다 채우면 모른 척하실 게 아닙니까?”

“모, 모른 척이라니요?”

가이사의 입술이 새침하게 당겨졌다. 말도 안 되지만 ‘흥! 그걸 몰라서 물어?’라는 환청이 들렸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몹시 신경 쓰이는데요.”

“…….”

“저기…… 가이사……. 그러니까…….”

복작복작 혼란스러운데 가장 큰 감정은 그것이었다. 책임질 게 있는데 귀찮다고 내버린 망나니가 된 기분. 그러나 억울해하기도 힘든 것이 그 말이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내가 은연중에 이 관계를 덮어 두려고 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떤 기쁨을 느끼든 어떤 설렘을 느끼든 상관없이. 나는 단순한 듯 복잡했고 이제 보니 그는 복잡한 듯 단순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잖아. 해야 할 게 많은 사람이잖아.’

무수한 변명이 구름에 잠긴 별처럼 흐리게 번쩍였다. 그런데 다 핑계였다. 내 상황이 모든 걸 용서할 수는 없었다. 나는 도망자였고 비겁자였다. 그토록 무서웠다면 필사적으로 도망가든가 최선을 다해 선을 그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풋감정이라고 스스로 달래며 잠깐의 유희를 즐기듯 가볍고 여상하게. 그가 주는 기쁨과 설렘은 내가 탐미하던 쾌락에 지나지 않았다.

“나도 좋아해요…….”

죄책감이 묻어난 말은 에라 모르겠다며 내던져 버린 게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솔직함이었다. 내 상황이 이러이러하니 이렇게 애매하게 지내자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일이 가이사를 힘들게 하고 있음을 깨달은 덕이었다. 내 방법이 옳지 않았음을 이제야 바보처럼 알아냈다. 내 마음 편하자고 그를 외면한 일은 도돌이표처럼 다시 돌아 거대한 송곳이 되었다.

“내가…… 미안해요.”

“무엇이 말입니까.”

“자꾸 모르는 척하려고 하고 당신 기만하고…… 그랬던 거.”

가이사는 바보가 아니었다. 눈치도 빨랐다. 내가 피하고 외면하려던 걸 다 알고 있었다. 상처 받았을까? 상처 받았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억장이 무너졌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이제 안 그러실 겁니까?”

그는 괜찮다 넘어가지 않았다. 사고를 친 아이를 어르듯 나직이 한마디 했다. 별거 아닌 그 말이 내 몸을 부서져라 때렸다. 내가 부서지지 않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안 그럴게요.”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해 주실 겁니까?”

“응. 모르는 척 안 할게요.”

“좋아한다고 다시 말해 보세요.”

“……좋아해요.”

그의 얼굴에 아주 잠깐 아이 같은 설렘이 번졌다. 눈을 접어 웃은 그가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쓸어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를 좋아해 준 인간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내가 낱낱이 까발려 놓은 그의 과거가 피투성이 속살을 가득 벌리고 철철 흘렀다. 그의 몸에서 흐른 피가 내 눈가에 녹진하게 굳어 녹아내렸다.

“아.”

내 입에서 새어 나온 부들대는 탁음에 약간이나마 기쁨을 띠었던 가이사의 얼굴이 갸우뚱 기울었다.

“제가 불쌍합니까?”

다 알겠다며 매끄럽게 올라가는 입술의 색이 흑백 세상을 영롱하게 채웠다.

“동정하셔도 됩니다.”

그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쥐고 살짝 훑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입술을 둥글게 모은 그가 숨결을 후후 흘려보내며 젖은 눈가를 달랬다.

“당신이 동정한 만큼 채워 넣으세요.”

내일 아침 붓기라도 할까 봐 살살 말려 주는 보드라움이 걷히지 않았는데 선언은 냉정했다.

“그럼 나도 나를 사랑할지 모르잖아.”

장난기 많은 아이처럼 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사나웠다.

“당신이 바라는 게 그거 아니었나? 나 혼자 충분히 나를 사랑하는 것. 당신이 필요 없도록.”

확실히 알았다. 그는 섣부른 동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혐오했다. 그럼에도 날이 바짝 서 번뜩대는 눈빛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두 손을 뻗어 염화처럼 뜨거운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피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사실 아직 못 믿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었나요?”

“믿었는데 사라지면 허망합니다. 그럴 바에는 계속 의심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한번 준 사탕을 계속 뺏은 건 나였다. 사탕 한 알을 소중히 쥐고 경계하는 것밖에 못 하는 그를 나무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내가 계속 말해 줄게요. 당신이 안심할 때까지.”

딱딱한 바윗덩이 같은 어깨는 무엇을 짊어져도 굳건할 것 같은데 그저 연약하게 끌려왔다.

“가이사.”

“…….”

“내가 해 줄게요. 당신이 좋아하는 거.”

힘껏 매달렸던 팔을 풀자 떠올랐던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푹신한 베개가 있어서 그대로 떨어져도 위험하지 않은데 그는 손을 뻗어 내 뒷목을 붙잡았다. 사실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지상으로 떨어지는 천사처럼 내게 맞추어 끌려온 입술에 먼저 입술을 포갰다. 뜨거운 입술 사이가 살짝 벌어져서 말캉한 틈을 가르는 것이 쉬웠다. 그 사이를 비틀어 깔짝거리자 굳은 듯 얼어 있던 혀뿌리가 야트막한 숨을 휘감고 나를 덮쳤다.

“흣……!”

화를 참듯 자근자근 깨무는 잇새에 입술이 짓무를 것 같았다. 아프지는 않아도 지레 겁이 나 도리질하자 가이사의 입술이 소리를 삼키며 더 깊게 맞물렸다. 그를 다 받아 주기가 벅찼다. 나는 힘껏 빨아들이다가도 숨이 차면 도리질 쳤다.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겨우 낸 틈을 비집기가 무섭게 그가 다시 부닥쳐 왔다. 통통한 산수유 열매 두 쌍이 무르익었다. 부푼 입술을 비비고 물면 젖은 소리가 났다. 계획에 없던 입맞춤이 두 번째. 여러모로 경건하지는 못한 밤이었다.

“건강해지면 뭘 하고 싶으십니까?”

불현 듯 입술을 떼어 낸 그가 물었다. 그 틈에 숨을 고르고 있던 나는 의아해졌다. 무슨 의도로 물은 걸까 해서.

“음…… 여행일까요?”

마음껏 돌아다닐 수 없는 상태가 지겨웠다. 고작 몇 달이었지만 평생 그렇게 살아온 듯 갑갑했다.

“여행…….”

그는 잊지 않으려 기억을 되새기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여행이 좋겠다. 같이 갈 수 있다면 더더욱.

“좋아해요.”

내 속삭임에 허공을 헤매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붉은 눈동자 위로 아름다운 빛이 드세게 산란했다. 타오르는 화염처럼 광활한 열기가 쏟아져 덴 듯 홧홧했다.

“다시 말씀하세요.”

번들거리는 입술을 조급하게 할짝인 그가 협박처럼 말했다.

“좋아해요, 가이사.”

나는 살고 싶다. 본래도 맹렬한 의지를 그가 더욱 타오르게 했다. 살고 싶다. 후회 없이. 누구도 아프지 않게. 나는 힘껏 매달렸다. 시커먼 그림자가 온몸을 뒤집어 삼켰다. 사신의 하늘도 나를 볼 수 없도록.

* * *

가이사가 본 니네이나는 한결같지 못했다. 그녀는 여러 면이 있는 주사위처럼 통통거렸다. 타르시를 대할 때와 루베니오를 대할 때가 달랐고, 메이아를 대할 때와 에브릴을 대할 때가 달랐다. 가이사, 그를 대할 때 역시. 보채고 닦달하니 우는 아이를 달래는 심정으로 원하는 바를 준 것일 것이다.

가이사는 그녀를 믿을 수 없었다. 천사를 지상에 묶어 두는 일은 본디 악마의 역할이었다. 그녀가 잠에 빠져들자 은밀하게 일어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잠든 그녀의 옷깃을 벌리는 것이었다. 이불을 살짝 내리고 입고 있던 잠옷의 단추를 세 개쯤 풀어 가슴께가 보이도록 젖혀 놓는 손길이 빠르고 정확했다. 그러나 군더더기 없는 손짓과는 다르게 시선 처리는 애매했다. 그는 하얗게 부푼 가슴이 살짝 보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에 짙은 경고음이 징 울렸다. 이건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미안합니다. 일부러 본 건 아닙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잠든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잠에 흠뻑 젖어 든 귀에는 닿을 리 없는 사과였다. 예상 밖의 실수로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꾹 누르며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그가 그녀의 목을 졸라 살해하려 한다고 착각할 만큼 오해하기 좋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바람의 칼날이 떠올랐다.

서걱! 그리고 떠오름과 거의 동시에 가이사의 손목을 깊게 베고 사라졌다. 동맥이 터진 손목에서 피가 줄줄 흘러 잠든 니네이나의 목덜미로 타고 흘렀다. 옷을 벌려 놓아 장애물이 없던 핏줄기는 가야 할 길을 아는 목동처럼 굽이쳐 그녀의 가슴 사이로 스며들었다.

쿵! 쿵! 잠이 들어 느리고 길게 뛰던 심장이 거칠게 헐떡거렸다.

“읏!”

고통을 느낀 듯 니네이나의 손끝이 잘게 떨렸지만 그가 수혈을 짚어 놓은 탓에 깨어나지는 못했다.

쿵! 쿵! 쿵! 쿵!

작은 심장이 그녀의 갈비뼈를 으스러트릴 기세로 터졌다. 욕심을 더 부리다간 정말 나약한 숨이 끊길지도 몰랐다.

“이걸론 턱없이 부족할 텐데.”

못마땅함에 그의 목소리는 어둡게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잡은 목을 놔주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하얀 가슴 사이를 파고들었던 짙고 붉은 길이 투명하게 옅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경련하며 파들거리던 손가락도 힘없이 오그라들었다.

“쯧.”

혀를 찬 가이사가 도톰하게 붉어진 그녀의 입술 아래를 살짝 눌렀다. 입술을 깨물고 있던 니네이나의 하얀 치아가 안으로 얌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몸을 지탱했다. 그는 빠르게 그녀의 잠옷 단추를 잠갔다. 피를 철철 흘리던 가이사의 손목이 어느새 아물었다. 그의 붉은 피로 젖었던 가슴도 질척임 없이 뽀송해졌다. 가이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그녀의 옆에 잠시 누웠다.

그는 아주 긴 여행을 하는 사람처럼 작은 오솔길 하나를 만들었다. 정수리에 돋아난 솜털 같은 머리카락, 반듯한 이마, 편안히 감긴 눈꺼풀, 그 위의 나풀대는 속눈썹, 앙증한 코, 색색대는 입술, 뽀얀 턱.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에 어떻게 이토록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걸까? 이제 겨우 한 번 봤는데. 아까워서 한 번밖에 보지 못했는데.

움직일 시간이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애틋함을 느꼈다. 두고 가려니 미치게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 일이 그녀의 시간을 더 연장해 주는 방법임을 알았다. 천사의 날개를 꺾어서 붙잡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능한 한 온전하기를 바랐다. 그녀의 것이라면 아주 작은 솜털 하나까지 유의미했다.

안온하게 머물 수 있기를. 오랫동안 웃을 수 있기를.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축복이 별자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이제는 붙잡을 시각이었다. 동이 터 오기 직전 붉은 여명 아래로 그림자가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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