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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름다운 밤(3권) (5/13)

건강이 없습니다

3권

5. 아름다운 밤

“……축복이 무르익음에 번영과 영광이 그대들에게 깃들기를.”

개회사를 마친 황제가 악공들에게 손짓할 무렵이었다.

“폐하.”

작위는 후작이라도 공작가의 직계인 덕에 황족 다음으로 황제와 가까운 위치에 있던 루베니오가 황제를 불렀다.

“음?”

큰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힘이 있어 황제에게 닿기 충분했다.

“무슨 일이지, 후작?”

“제 하나뿐인 딸에게 첫 춤의 영광을 허락해 주소서.”

─감히 청하옵건대, 이 아이에게 첫 춤의 영광을 허락해 주소서.

원작과는 묘하게 달라진 말이었다.

“오! 후작의 독녀로군!”

“몸이 약해 데뷔가 늦었습니다.”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한 소녀는 이런 식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파티의 주최자에게 파티의 첫 춤을 청하는 것. 물론 황궁 무도회는 좀 달랐다. 공작가의 직계 정도가 아닌 이상 감히 황제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 전례가 거의 없는 일일 터였다. 황궁 무도회의 첫 춤은 본디 황제 부부의 것이었으니까.

“앞으로 나오게.”

“니네이나 세이아가 엘리니움의 태양을 뵈옵니다. 신의 눈길이 폐하의 곁에 깃드시기를.”

나는 무릎을 굽혀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한 나라를 이끄는 수장의 눈에는 과연 장엄함이 있어 그에 대한 내 평가가 썩 좋지 못함에도 긴장이 됐다.

“어여쁜 영애로군. 몸가짐이 바르고 곧아. 성정은 그대를 닮았겠어.”

“제게는 몹시 귀한 딸입니다.”

말 그대로 인사치레인 황제의 덕담에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흐음…….”

턱 주변을 매만지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웬 오한이……?’

묘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영애의 나이가 올해 몇 살이지?”

“스물입니다.”

“열일곱 정도로 보았거늘…… 벌써 성인이 되었는가?”

벌써?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살짝 눈치를 살피는 사이 황제의 시선이 나를 지나쳐 아실로 황자에게 돌아갔다.

“차이가 좀 나는군.”

“……!”

차이? 차이라고? 황제를 따라 고개를 돌린 터라 나는 황자의 눈을 정면으로 보게 됐다. 장밋빛 뺨을 가진 귀여운 소년 주제에 뭘 보냐는 듯 시선이 살쾡이 같았다.

‘설마 날 저 꼬맹이에게 붙여 주려는 건 아니겠지!’

루베니오가 한 걸음 앞서며 말했다.

“예. 올해 스무 살입니다.”

“흠…….”

다행히 황제가 생각하기에도 열세 살의 나이 차이는 과했는지 다른 말이 더 나오지는 않았다.

“허락하지. 그대의 답례를 기대하고 있겠네.”

“황공하옵니다.”

파티의 첫 춤을 받아 갔다면 그것에 대한 답례를 하는 게 예의였다.

‘원작에서 루베니오가 황제에게 뭘 줬더라?’

잘 기억나지 않아 고민하는데 루베니오의 하얀 손바닥이 보였다. 4분의 3박자의 경쾌한 왈츠가 부드러운 바람처럼 두 사람을 휘감았다.

“아름다운 레이디, 제게 첫 춤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메, 멘트 대단해! 자칫 느끼할 수도 있는 말인데, 미중년의 무게로 분위기를 압살한다는 게 저런 것인가 싶었다.

“영광이에요.”

나는 수줍은 아가씨처럼 그의 손을 붙잡고 비워진 홀로 나갔다.

“몸이 안 좋아지면 언제든 지체 없이 말하렴.”

“한 곡 정도는 괜찮아요.”

무조건 괜찮아야지. 황제 부부의 첫 무대를 빼앗았는데. 그런데도 그는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부담 가질 거 없다. 누구도 네게 뭐라고 하지 못할 테니.”

“으응. 저 이 춤 꼭 끝까지 추고 싶어요. 모두가 저를 주목하고 있잖아요.”

‘는 무슨. 생각보다 더 부담스럽다고! 으아아악!’

이대로 있다가는 시선 공포증이나 광장 공포증이 생길 것 같았지만 얼굴색은 태연했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

묘하게 잡아끄는 듯한 목소리였다.

“모두가 널 흠모하게 될 거다.”

그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로 당당히 걸어갔다. 조금 움츠러들었던 작은 어깨를 그를 따라 자유롭게 폈다. 마치 하얀 새의 날개처럼.

쿵당당. 쿵당당. 황제의 배려로 데뷔탕트에 쓰이는 왈츠가 들려왔다. 그동안 지겹도록 들은 리듬에 발을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뺨이 계속 찌릿거렸다. 좋은 의미를 담은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사람들이 다 쳐다봐요.”

첫 춤은 독무대라 주목도가 높았다.

“신경 쓰이니?”

아무래도요. 때마침 모욕받은 것처럼 얼굴을 불콰하게 붉힌 공작이 내 눈에 들어왔다. 도발이 성공했구나 싶어 진심으로 기쁘게 웃어 줄 수 있었다. 사르르 얄밉게 접히는 눈꼬리에 공작의 뺨이 파들파들 떨렸다. 오늘만 저 꼴을 몇 번째 보는지! 진심으로 유쾌했다. 발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내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루베니오였다.

“그래도 즐거워요.”

“잠깐의 즐거움이라도 느낀다면 충분해.”

“네.”

파니에로 부풀린 드레스가 빙글빙글 돌았다. 겹겹이 쌓인 꽃잎처럼 화려하게 돌아가는 드레스 아래로 붉은 바닥이 보였다. 오래 준비한 춤이었다. 몸에 밴 걸 실수할 정도로 미숙하지는 않았다. 춤은 갈수록 화려해지고 선율은 날아갈 듯 빨라졌다. 숨이 살짝 버거워졌을 때쯤 그가 말했다.

“잘 추는구나.”

거짓말. 못하는 건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하하!”

의심쩍어하는 내 눈길에 그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속삭였다.

“난 언제나 진심이란다.”

꿀이 또르르 떨어져 방울방울 고일 듯한 얼굴이었다.

“어머!”

“그 루브오(신성어로 얼음을 뜻함)가!”

얼음장처럼 굳은 눈동자 때문에 붙었다는 루베니오의 별명이 들려왔다. 나는 가장 빛나는 액세서리를 단 것과 다름없었다. 모두가 날 흠모하게 될 거라고 장담하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풀나풀 떠오른 드레스는 계속 우아하게 흔들렸다.

“와…….”

옅은 환호성이 들려 뺨이 뜨거워졌다.

“내 딸이 내 눈에만 예쁜 게 아니라 큰일이군.”

루베니오가 날 살짝 들었다가 쑥 내려오던 때라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만해야겠다.”

서늘하고 반듯한 얼굴이 개구쟁이처럼 짓궂게 웃었다. 그는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몸을 깊게 숙였다.

빰! 빰! 음악이 멈췄다. 젖힌 시야 끝에 보이는 샹들리에의 높이가 아찔했다.

“와아아아아!”

박수 소리에 맞추어 춤을 끝낸 그가 내 손을 놔주고 정중히 인사했다. 나도 너무 늦지 않게 마주 인사했다.

“이제……”

“후작님!”

뭐라고 말하려는 그의 말을 끊고 황궁 시종이 달려왔다. 극한으로 떨어진 냉한 시선이 시종을 쏘아봤다.

“급한…… 일이시랍니다.”

그에게 손짓하는 황제가 보였다.

“번잡하군. 정리를 좀 해야겠어.”

얕게 속삭인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왼쪽을 돌아봤다.

“가이사.”

아, 깜짝이야! 이 사람 언제 또 와 있었지?

“부탁하지. 아주 잠시만.”

“천천히 다녀오셔도 됩니다.”

“잠시면 충분해.”

말소리가 스타카토처럼 탁탁 튕기며 오갔다.

“…….”

가이사는 멀뚱히 침묵했다. 루베니오는 살갗이 아리도록 스산하게 표정을 굳혔지만 그는 재촉당하는 입장이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으마.”

내 손을 힘껏 붙잡았던 그가 빠져나갔다. 잠깐의 허전함을 아쉬워할 새도 없이 가이사가 내 손을 넘겨받았다.

빰! 빠빰!

“무도회가 다시 시작됩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자리를 홀로 독차지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화폭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냥 빠져나가기도 애매하고 서 있을 수도 없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그는 살짝 망설이는 듯하다가 내게 물었다. 평소처럼 건조했으면 거절이 쉬웠을 텐데 묵직한 시선이 느껴졌다.

“끝까지 출 자신은 없는데……. 아시다시피 체력 부족이라.”

어찌할까 망설이면서도 나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오밀조밀 엉기는 내 손가락에 그의 손아귀도 거세졌다.

“충분합니다.”

뭐가?

“앗!”

가이사가 내 몸을 살짝 들어 올렸다.

턱.

“헉!”

전무후무한 상태에 사람들이 숨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목각 인형을 다루는 인형술사처럼 몸을 움직였고 나는 그의 마리오네트처럼 흔들렸다.

“가, 가이사?”

“예.”

“이게 대체……?”

드레스 밑단이 핑그르르 자연스레 돌았다. 아주 멀리서 보면 완벽한 춤사위일 것이다. 내 발이 땅이 아니라 가이사의 구두 위에 있는 것만 빼면. 내가 힘이 빠졌을 때처럼 그는 이번에도 나를 발 위에 올려 두고 춤을 췄다. 가지런한 몸 선은 위화감을 삼켰으나 주변 분위기만 봐도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춤을 추다니.

“의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당신은 그것만으로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처럼 내 의지가 되어 움직여 주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 태도에 부끄러움은 내 몫이 되고 말았다.

“발 안 아파요?”

부끄러우니 당장 내려놓으라고 소리쳐도 부족한데 시선이 그의 발등에 꽂혔다. 구두에 굽이 거의 없어 다행이었다. 굽이 높은 구두였다면 그의 발가락뼈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 아픕니다.”

바보잖아!

“안 아프긴 뭐가 안 아파요? 빨리 내려놔요!”

“무사히 춤을 끝낼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으으.”

나도 바보였다. 낯이 화끈거려 죽겠는데 그를 밀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팔에 안심이 되는 게 이상했다. 그는 물 흐르듯 매끄럽고 유려하게 움직였다. 발이 그리는 궤도가 인어의 꼬리 같았다. 악단의 선율이 세이렌의 속삭임으로 변하고 호기심 어린 시선이 물거품처럼 희미해졌다. 단호히 나만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하나밖에 안 보는 걸까? 그가 점점 더 궁금해져서 주위의 소란쯤은 사라지고 마는 그런 춤사위였다. 아찔하고 화려한.

“와아아아아!”

결국 춤을 끝까지 다 췄다. 용기가 가상했는지 루베니오 때보다 환호성이 더 큰 것 같았다. 내가 이 무도회의 주인공이 된 건 확실해 보였다. 눈길을 확 끈 덕인지 호감을 비치는 눈동자가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다가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일일이 상대할 시간은 없었다.

“어, 얼른 가요.”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제국의 황태자, 칼리탄 엘리니움.

원작 「공녀 메이아」의 남자 주인공이 드디어 원작대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나는 칼리탄의 첫 등장 무대가 원작과 같기를 바랐다. 내 계획을 위해서. 원작에서도 딱 이 타이밍이었지, 아마? 두 주인공의 첫 만남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 * *

“여기는…… 아무도 없겠지?”

칼리탄이 나무 그림자 아래에 숨어 있을 때, 웬 여자 한 명이 나타났다. 입고 있는 드레스가 어딘가 익숙했다.

─메이아 세이아입니다.

루베니오가 데리고 온 양녀였다. 오늘의 황궁 무도회에서 황제 부부의 첫 춤을 빼앗은. 그녀는 발이 아픈지 구두를 매만지며 쩔쩔매고 있었다.

“으아아! 내 팔찌!”

그러다 분수 안에 팔찌라도 흘렸는지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뻗고 있었다. 드레스가 젖는 것도 문제였지만 분수 안이 생각보다 깊어 위험했다.

“조금만 더…… 어?”

그럴 줄 알았다. 여자의 몸이 확 기우는 게 보였다. 그는 어쩔까 하다가 모처럼 호의를 베풀기로 했다. 친해져서 나쁠 게 없는 인물이었고 매번 있는 불쾌한 행사도 그녀 덕에 오늘 하루 자유로웠으니까. 칼리탄은 아래로 미끄러지려는 그녀의 팔뚝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가, 감사합니다.”

“…….”

“저…… 잠깐만 붙잡아 주실래요? 소중한 팔찌라…….”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분수대 안에서 눈을 못 뗐다.

“좋을 대로 해.”

“감사합니다!”

밝고 힘찬 목소리였다. 풍랑에도 뒤집히지 않는 돛처럼. 황후라면 경박스럽다고 혀를 찼을 테지만 칼리탄은 그것이 오히려 신선하고 편안했다.

“아! 찾았어요!”

물속을 뒤적거리던 손이 위로 번쩍 들렸다. 튀어 오른 물방울과 함께 분수의 물 마법이 시간에 맞추어 발동했다.

땡! 땡! 땡! 자정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와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 이슬비처럼 은은하게 내리는 물을 맞으며 그들은 젖어 가는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풉! 아하하!”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린 메이아가 시원하고 슬픈 웃음을 터트릴 때까지.

“하하…… 하…….”

짧은 웃음소리는 금방 끊겼다. 그러나 그 여운은 오래도록 칼리탄의 귓가에서 타올랐다.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녹아든 목소리는 처음이어서.

* * *

니네이나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원작의 챕터 2 꽃 피는 봄날 바로 다음의 이야기였다. 황제는 어차피 죽고 황후는 악독하며 아실로 황자는 너무 어리다. 다음 황제는 칼리탄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내게 메이아와 칼리탄의 연결점은 중요했다. 가능하면 원작에서처럼 칼리탄이 메이아를 사랑해 주기를 바랐다. 메이아가 나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한 이후니까 말이다.

‘둘의 첫 만남 때 메이아가 웃음을 터트린 이유가 니네이나 때문이었지, 아마?’

원작에서 메이아는 그때 돌보던 말과 정원에서 뛰놀다가 니네이나에게 들켰던 날을 생각했다. 마정석을 함부로 썼다는 이유로 물에 흠뻑 젖어 혼났던 날이었다. 메이아는 니네이나를 사랑했다. 그날을 주인님과 친해진 계기라 믿으며 추억이라고 할 정도로. 그 시점은 니네이나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고 분수에서 건져 올린 것 또한 니네이나가 준 팔찌였다.

‘참사랑이다, 진짜…….’

원작의 니네이나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지만 메이아와 나의 접점은 원작과 닮았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첫 구원이자 마지막 구원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목숨을 살려 줬고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본래의 성별로 살 수 있게 해 줬으며 마법까지 배울 수 있게 해 줬다.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원동력은 메이아 같은 성격의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나를 위한 철저한 방패로 삼기 위해 시작한 일일지라도 피해를 준 것도 아니었다. 도와주기만 했지. 메이아가 날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계속 나를 위해 노력해 줘, 메이아.’

시종에게 내가 찾고 있다는 말을 전달받았는지 메이아가 다가오고 있었다.

“찾으셨어요, 주인님?”

“응.”

나는 메이아에게 찰싹 달라붙어 귓가에 속삭였다. 발간 뺨에 수줍음이 어렸다.

“주인님…… 왜 그러시는……?”

“달빛 분수 알아?”

“예? 아, 알아요!”

“쉿.”

“……쉿.”

나는 내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는 메이아를 흡족히 바라보며 다시 귓가에 속살거렸다.

“그 옆에 흰 꽃이 예쁘던데. 그게 지금 보고 싶어.”

“네, 제가 금방 따 올게요.”

메이아는 발걸음을 죽인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말했다. 눈치가 빨라서 참 좋았다.

“응. 그리고…….”

“네.”

“……분수 안에 손 좀 넣어 봐.”

“예?”

“손을…… 씻고 꽃을 따라고.”

어처구니없는 부탁에도 충실한 눈은 반짝거렸다.

“네. 깨끗한 손으로 따 오겠습니다.”

알아서 오해해 주니 참 다행이었다.

“수심이 깊으니까 손을 너무 쑥 집어넣지는 말고. 네가 다치면 안 되니까.”

“주인님…….”

혹시나 해서 덧붙인 말에 메이아가 감동 어린 눈빛을 했다. 순진한 어린애를 이용하는 기분이라 가슴이 살짝 떨렸다.

“얼른 다녀올게요.”

메이아가 출발했다. 이 정도로 원작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건 알았다. 최대한 비슷하게 해 보려고 했지만 허점이 많았다. 그러나 칼리탄이 달빛 분수 앞에서의 첫 만남 때 메이아를 보고 한눈에 반한 건 아니었다. 그녀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작용했을 뿐이지. 그는 메이아의 밝고 당당한 마음에 이끌렸으니 자주 만나게 해 준다면 무언가 반응이 올 게 틀림없었다.

‘자, 그럼 이제 계획대로 잘되는지 발코니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응?’

가이사가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와 메이아가 속살거린 말을 다 들은 것 같았다. 분명 엄청 작게 말했는데.

“음…… 다 들었어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못 들었나?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저, 조금 쉬고 싶은데…….”

“집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요. 발코니에서 조금만 쉬면 돼요. 모처럼 나왔는데 느긋하게 있고 싶어요. 저 발코니가 좋겠어요.”

“그쪽에는 선객이 있습니다.”

“선객이요? 누구……?”

이미 근처에 다 왔기에 실루엣이 보였다. 배꼽쯤에나 닿을 만한 체구였다. 그리고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연보라색 머리카락.

‘아니! 얘가 왜 여기에?’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몇 분 전에도 나와 눈이 마주친 아실로 황자였으니까.

‘어쩌지? 여기서밖에 안 보일 텐데.’

발코니에서 홀로 쉬고 싶다면 커튼을 쳐 표시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발코니 커튼은 활짝 젖혀져 있었다. 선객이 있다고 하더라도 들어가는 데 문제는 없었다.

“그냥 들어갈래요. 이 발코니가 좋아요.”

그는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어 줬다. 끼익. 유리문이 긁히는 소리에 아실로가 뒤를 돌아봤다. 들키면 안 되는 걸 보인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얼굴이었다.

‘좀 위험해 보이는데?’

아실로는 발뒤꿈치를 들어 양팔을 난간 위에 올린 채였다. 고개를 한껏 꺾은 게 문제였는지 중심축이 무너진 게 보였다.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들어온 사람을 주시하던 아실로가 뒤로 주춤 물러나려다가 다리를 삐끗했다.

“어! 조심해요!”

딱 그럴 것 같아서 미리 손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의 팔을 붙잡았으니 이제 지탱만 하면 되는데 이상했다.

‘왜 내 몸도 넘어가지?’

내 몸의 상태를 간과했다. 최근 좋아졌다고 해도 그 몸이 그 몸인데. 빌어먹을 유리 몸. 20kg이나 나갈까 의심스러운 작은 체구를 못 이겨 냈다. 정사각형의 바닥 타일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대로라면 아이를 끌어안고 구를 판이었다. 그것도 아이의 몸 위에서.

‘그럼 황족 시해죄?’

찰나의 순간일 텐데 정말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아실로 황자를 가장 사랑한다는 황제의 분노한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다리 근육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억!’

종아리 근육이 땅기는 느낌이 났다. 풀썩. 쾅이 아니라 풀썩이었다. 눈을 살그미 뜨니 무서운 얼굴을 한 가이사가 보였다. 황제의 분노한 얼굴을 상상했을 때보다 몇만 배 이상은 더 대단했다.

“어…… 고맙습니다.”

넉넉한 팔이 나와 아실로를 동시에 지탱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날 지탱하고 있었는데 아실로가 내 위에 있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

“괜찮으십……”

“괜찮으니까 이거 놔.”

아실로는 몸을 비틀어 내 위에서 벗어났다.

“…….”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니까?”

그에 잠시 말이 끊겼던 가이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며. 그러자 아실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민망한지 볼을 발갛게 붉히면서도 눈꼬리는 더 뾰족해졌다. 아실로가 엄청난 얼굴로 가이사를 노려봤다.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이어지는 가이사의 완벽한 무시.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는 황자로 태어난 아실로에게는 처음일 것이다.

“어, 저…… 가이사?”

“예.”

화르르. 젖살이 뽀얀 얼굴이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다. 나는 저기 좀 보라고 가이사에게 눈짓했으나 그는 눈 한 번 까딱하지 않았다. 내 다리를 유심히 보던 가이사가 물었다.

“다리를 다치셨습니까?”

“다리요?”

다리에 힘을 주자 종아리가 땅땅해졌다. 발가락이 비틀리도록 쥐가 나는 감각이었다.

“아야!”

바람이 쌩하고 불어왔다. 무도회장 쪽에서 의자 두 개가 날아와 내 앞에 놓였다. 이것도 정령 마법인가?

“여기 앉으세요.”

“아니…… 그걸 그렇게 가져와도 되는 거예요……?”

“네.”

진짜?

“하.”

가이사가 너무도 당당하여 혹할 뻔했는데 때마침 조소해 준 아실로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역시 황궁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이사는 아실로가 팔짱 끼고 우리를 노려보든 말든 의자 위에 나를 앉히느라 바빴다. 그는 의자 두 개를 붙여 내 양쪽 다리까지 척척 내려놓았다. 아실로가 입술을 질끈 깨무는 게 보였다. 얼굴은 거의 홍당무였다.

“저…… 여기서 뵙네요.”

아직 어린아이라서 일방적으로 무시받게 두기가 어려웠다.

“흥.”

무난한 말에도 아실로는 날카롭게 반응하며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자기도 무시해 주겠다는 듯 발코니 한쪽으로 쫑쫑 걸어가는 발걸음에 성이 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이사는 아실로의 존재 자체를 배제한 것 같았다. 아실로를 정물 취급하며 일절 반응을 하지 않았다.

“니네이나!”

아직 열어 놓은 발코니 문 너머로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루베니오였다.

“어디 다쳤니?”

“근육이 놀란 모양입니다. 심각한 상태는 아닌데 당분간 통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루베니오는 내게 물었는데 가이사가 대답했다.

“어쩌다가?”

“아……”

“무거운 걸 함부로 들어 올리려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대답할 타이밍을 가로채였다.

“조심했어야지.”

루베니오가 내 머리를 문지르며 다정하게 타일렀다.

“…….”

뭔가 대화가 이상했다. 루베니오는 내게 묻고 가이사는 대답하고 나는 타일러졌다. 셋이 다 따로 노는데 대화가 됐다.

“두부가 터지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두부?”

대화는 또 이상한 방면으로 흘렀다. 가이사가 내게 말했는데 루베니오가 반응했다.

“전에 영애께서 자기 몸은 두부 같다고 두부 인형으로 생각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니네이나가?”

“예.”

“나는 새의 속 깃털만큼이나 연약하다고만 생각해 왔는데…….”

오고 가는 대화는 루베니오와 가이사 사이에서 일어나는데 둘 다 내게 말하듯 나를 바라봤다.

“훌륭한 비유다. 뽀얗고 몽실몽실한 것이 딱 두부 같구나.”

“…….”

멀찍이 서 있던 아실로의 뾰족한 눈매가 묘하게 변했다. 세상에 더없는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아이가 피식 입꼬리를 비트는 순간 낯이 뜨거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수치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애칭으로 ‘두부’라고 부르면 어떻겠습니까?”

“두부?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 애의 애칭은…… 잠깐. 네가 왜 그런 것에 관심을 두는……”

“두 분 다 그만하세요…….”

열이 너무 올라 눈동자까지 시큰거렸다. 옷소매를 잡아당기자 놀란 얼굴의 두 남자가 얼굴을 살펴 왔다.

“두부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럼 좋겠냐?

당신이 직접 스스로를 두부라고 지칭하지 않았습니까?

제기랄. 눈으로 오간 대화는 그녀의 패배였다.

“두부라고 하여 속상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영양가가 풍부해 건강에 좋고 부드러운 식감과 담백한 맛이 맛있는……”

맛? 맛 같은 소리 하네!

“두부의 맛이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

가이사는 반쯤 울먹이는 내 얼굴을 모르는 체하며 한발 물러섰다. 루베니오가 등판했다.

“전에 갓 만든 남부의 전통 두부를 본 적이 있다. 하얗고 몽실몽실한 게 너를 닮았어.”

“…….”

“음…… 보고 있으면 따뜻하고 편안해지는 느낌이 닮았고. 두부는……”

으아아아악! 두부! 두부! 두부! 두부는 이제 그만둬!

소리는 못 지르고 이마만 의자 위에 처박았다. 누가 저 두부 얘기 좀 끝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그 소리가 들렸다.

땡! 땡! 땡! 자정을 알리는 시계탑 소리. 항시 같은 시간에 열리는 무도회의 첫 춤이 끝난 후면 얼마의 간격을 두고 언제나 이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헉!”

두부 때문에 잠시 잊었던 발코니를 찾은 목적이 떠올랐다. 발코니 너머로 시선을 던지니 과연 분수대의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메이아랑 칼리탄은?’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팔찌를 분수대에 빠트리지 못한 게 영향을 주었는지 두 사람은 물을 맞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서 있었다. 어찌 되었든 만나서 무언가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가만히 서 있던 칼리탄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고개를 꾸벅 숙인 메이아가 그곳으로 쪼르르 달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더니 뭘 따기 시작했다.

하얀 들꽃. 메이아는 손톱만 한 볼품없는 작은 들꽃을 열심히도 땄다. 계속 땄다. 한참 땄다. 칼리탄이 뒤돌아 걸어가는데도. 망할 들꽃 같으니.

“…….”

내 고개가 저절로 가이사에게로 슬쩍 돌아갔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움직이다가 조금 들렸는지 가이사의 가슴 주머니 위로 볼록 튀어나온 손거울의 끝이 얄망궂었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손거울을 살짝 밀어 가슴 주머니 안으로 감췄다. 한번 줬으니 뺏어 가지 말라는 듯.

“전하! 후작님!”

그때 황제의 수석 시종이 뛰어들어 오더니 아실로와 루베니오를 불렀다. 난간 가까이 서 있던 아실로가 고개를 휙 돌리고 얼굴을 와락 구겼다.

‘어라? 쟤…… 계속 저 밑을 보고 있었나?’

시종이 채근했다.

“황자 전하, 어서 가셔야 합니다.”

“…….”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실로는 나를 쏘아보며 나갔다.

‘아니, 나를 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아이를 구해 주려다가 다친 죄밖에 없는 것 같은데.

“후작님께서도요. 아실로 황자님을 찾아오시겠다고 무턱대고 나가시더니 왜 여기 계신…….”

루베니오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분노와 귀찮음 같은 단순한 감정 하나 없이 무기질적인 파란 눈동자가 매끄러운 유리알처럼 서늘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시종의 말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가, 셔야…… 합니다.”

황제의 수석 시종이면 품계가 높은 사람일 텐데 겁을 먹은 것처럼 혈색이 창백했다. 그러면서도 할 말 다 하기는 했으나. 이거 아무래도 상황을 보니 루베니오가 아실로를 핑계로 대고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예상 외로 아실로가 나와 같이 있어서 일찍 들켰고. 땡땡이치다 걸린 느낌인데?

“다녀오세요.”

그가 시종에게 뭐라고 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저는 여기서 가만히 쉬고 있을게요. 가이사도 있고.”

“……금방 오마.”

머뭇거리던 그가 얼굴을 한차례 쓸며 말했다.

“얼굴은 펴고 다녀오세요. 주름 생기겠어요.”

“생길 때도 되었지.”

“전 잘생긴 아버지가 좋던데.”

괜스레 농담을 덧붙이자 그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밖에 나간 그가 다녀오겠다며 유리문 너머에서 손을 살살 흔들었다. 그게 좋았다. 저런 얼굴이 어울렸다. 누누이 말하지만 짐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늘 고마우니까. 두부만 빼고.

“에효…… 물을 맞아야 했는데.”

계획이 조금 빗나가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분위기만 살펴도 좋았다. 어디에 덫을 놓으면 좋을지 이것저것 찔러 보는 것만으로도 경우의 수가 늘어나니까.

“그래. 이렇게 물이…… 물이?”

초미세 안개 미스트를 분사한 것처럼 아주 작은 물방울이 손등에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두 손에 파란빛을 품고 있던 정령이 화들짝 놀라며 가이사의 뒤로 물러났다.

“인어…….”

“정령입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가이사가 칼같이 반박해 왔지만 아무리 봐도 인어였다. 정령의 푸른 꼬리가 파닥파닥 움직이며 허공을 탁탁 쳤다. 소나보다도 더 부끄러움이 많은 정령 같았다.

“갑자기 정령은 왜요?”

“물을 맞아야 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건…… 설마, 그 얘기만 듣고 꺼낸 거예요?”

“안 됩니까?”

“아니, 안 될 건 없지만…….”

능력 낭비 아닌가? 아무튼 귀여워서 좋았다. 귀여운 건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니까.

“얘도 이름이 있나요?”

“모나입니다.”

가이사의 소개에 모나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했다.

‘귀여워…….’

손을 살짝 흔들자 손가락 다섯 개가 다 붙어 있다는 게 더 놀라운 손가락을 꼬물거려 마주 손인사도 했다. 심장에 해로운 인사법이다. 정령들이 하나같이 다 주인을 안 닮았다.

“다른 정령도 더 있어요?”

“땅 속성의 우나까지 총 넷입니다.”

4대 속성을 다 다루는 정령사. 정령술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그게 놀라운 일인 건 알았다.

“그런데 다 ‘나’ 자 돌림이네요. 소나, 후나, 모나, 우나까지.”

“부르기 쉽게 지었을 겁니다.”

“가이사가 지은 이름 아닌가요?”

“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들입니다. 정령들이 저런 이름을 좋아하기에.”

정령의 이름을 계약자가 아닌 사람이 지어 줄 수도 있나? 명명은 가이사가 하고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미리 지어 놓은 것일 수도 있었다. 몇 명의 정령과 계약할지 알고 넷이나 다 지어 놨는지는 몰라도.

“그런데 정령이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알아요? 표정을 살펴서?”

“대화를 통해서입니다.”

그런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표정을 읽겠냐는 듯한 얼굴이 시니컬했다. 하긴. 가이사는 그렇게 섬세한 사람이 아니…… 뭐?

“대화요? 정령이랑 대화가 된다고요?”

“예.”

“어, 어떻게요?”

가이사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자 빛이 반짝거리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밤의 요정, 아니, 몽마 같았다. 매료를 목적으로 한 신비로운 빛이었다.

[ÆŒ غ œŧ ʼnðħ.]

물거품이 보르르 올라가는 소리를 닮았다. 외국어와는 달랐다. 언어 체계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상했다. 혼자만의 추측으로는 돌고래의 초음파를 더 닮은 것 같았다.

[ĿĦ IJĿ ŀĸĸ ijÐ?]

처음 듣는 정령의 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œð.]

그의 대답에 모나는 살짝 다가와 니네이나의 손등 위에 앉았다. 파닥거리는 꼬리에서 물의 정령 특유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뭐, 뭐라고 한 거예요?”

“그녀가 너를 만지고 싶어 한다. 그럼 저 손등 위에 올라가 봐도 되나요? 아마도.”

뭐라고 정의하기 어렵던 신비로운 소리를 건조한 목소리가 해석했다.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목소리 색이 달랐다. 언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대화가 통하는 건 분명해 보였다.

“책에는 이런 능력 안 나왔는데…….”

“책? 정령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희귀한 능력이라.”

원작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알아서 오해해 줘서 다행이었다.

“그렇군요. 엄청 신기한 능력…… 아!”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이사의 팔을 바싹 끌어당겼다.

“…….”

머지않아 불어온 바람이 내 속삭임을 지웠다.

“예.”

“정말요? 그렇게 해 줄 수 있어요?”

“어렵지 않습니다.”

“가이사…… 당신은 제 빛이에요.”

유 아 마이 선샤인. 갑작스러운 고백에 그는 내 이마를 조용히 짚어 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 피를 너무 많이 드렸을 때와 같은 증상이군요. 괜찮으신 겁니까?”

“…….”

그는 심각했고 나는 민망했다. 발코니에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가까이 붙어 있는 두 개의 그림자가 다정한 한 쌍의 연인처럼 보였다. 그의 손가락이 스치듯 흘러내리며 내 콧잔등을 살짝 건드렸다. 맨손이었다. 불쾌함 하나 없이 걱정만 그득 담은 눈빛이 보였다. 그는 나를 만지는 것에 불쾌함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심장이 ‘퉁!’ 하고 내려앉았다가 튕겨 올랐다.

* * *

몇 분 흐르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여기 계세요, 주인님?”

메이아였다. 아마도 이곳 위치는 시종들 중 누군가가 알려 주었을 것이다.

“들어와.”

엄지손톱만 한 들꽃을 한 아름 품은 얼굴이 보였다. 건강하고 해맑은. 뛰어온 것인지 얼굴이 약간 상기해 있었는데 그 빛깔이 노을이 내려앉은 듯하였다. 주홍빛 얼굴과 하얀 꽃이 싱그럽게 어울려서 올망졸망 모인 하얀 치아가 눈부셨다.

“손 깨끗이 씻고 땄어요.”

메이아가 어디서 하얀 리본까지 구해 예쁘게 묶은 들꽃을 건넸다. 진하지는 않아도 기분 좋은 꽃 내음이 솔솔 올라왔다.

“고마워.”

“마음에 드세요?”

“응.”

화려한 꽃에 비해 향기와 생김새가 볼품없을지는 몰라도 풋풋한 숲의 향이 좋았다. 비에 젖은 산책로를 걸으며 피톤치드를 흠뻑 마시는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메이아.”

“네.”

“여기서 보면 분수대 쪽이 보이더라. 그래서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말이야…….”

저 선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거짓말이 참 어려웠다. 완전 계획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해맑은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저를 지켜보고 계셨어요?”

“어? 으응.”

감시나 관찰에 가까웠지만 지켜본 건 맞았다.

“아아, 그러셨군요.”

뺨을 감싸 쥔 메이아가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눈을 착 내리깔았다. 거대한 주홍빛 태양 아래의 들판 같다고나 할까? 외모에 비해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눈동자가 그런 신비로운 색으로 빛났다.

“흠. 그래서 말인데, 황태자 전하와는……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황태자 전하요?”

황태자는 예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께에 엘리니움 황가를 상징하는 푸른 독수리가 크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걸 봤으면 누구나 그의 신분을 짐작했을 것이다.

“아까 대화 나누지 않았어? 분수대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아! ……음, 그분이 전하셨나요?”

“가슴에 달린 푸른 독수리를 보지 못했니?”

“밤이라 깜깜하기도 하고…….”

무도회와 분수의 조명이 환해서 그 정도로 식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급한 일이 있다 보니…….”

역시. 빌어먹을 들꽃이 문제였다. 내가 시킨 일에 충실하느라 미래의 남편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걸요.”

“……그 얼굴이 기억 안 나고 그런 얼굴이 아닐 텐데.”

남자 주인공의 법칙에 따라 칼리탄은 매우 잘생겼다.

‘조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던데 어떻게 그걸 기억 못 하지?’

그때, 메이아가 기묘한 입소리를 내며 가이사를 흘긋 쳐다봤다.

“아.”

우리 둘 사이에 묘한 눈길이 오갔다. 하기야 가이사와 루베니오를 계속 보다 보면 남자의 미모에 무뎌질 만도 했다.

“들꽃을 찾고 있다고 했더니 어디에 피었는지 알려 주셨어요. 친절한 분이셨어요.”

“그게 끝이야?”

“……?”

뭐가 더 있어야 하냐고 쓴 얼굴이 순진하게 갸우뚱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때를 묻히는 것 같아 양심이 가려웠다. 나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얹고 북북 긁는데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가이사가 불현듯 벌떡 일어났다.

“까,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요?”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꽃다발을 빼앗겼다. 그는 V 자 모양으로 파인 내 가슴 부분을 빤히 바라봤다. 가슴 사이의 골이 살짝 보이는데 그런 시선은 몹시 부끄러웠다.

“왜 그래요?”

드레스를 살짝 올리려 하자 그가 손을 붙잡아 말렸다. 어라? 그의 얼굴이 가슴 쪽으로 바짝 붙었다. 아래로 내리깐 눈동자가 내 가슴을 담았다. 그의 뺨에 서린 온기가 가슴 위를 적시는 것 같았다. 왜, 왜 이러는데! 까만 머리칼이 턱 아래를 간질였다. 푹 젖어 오는 나무 냄새에 심장이 팔딱거렸다.

“주인님! 몸에 발진이 생겼어요!”

“알레르기 반응입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굳어 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갈비뼈가 부풀며 가슴이 솟았지만 그가 얼굴을 치워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저 꽃 때문인 것 같군요.”

딱히 꽃 알레르기라고 할 건 없었는데 저 꽃의 성분 중 하나가 유독 몸에 안 맞았던 것 같았다.

“증세가 더 심해지기 전에 돌아가야 합니다.”

“벌써요?”

아직 할 게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이 핑그르르 돌았다. 툭. 테이블을 잘못 미는 바람에 꽃다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인님!”

“가서 마차를 준비시켜.”

“네!”

달려가는 메이아의 발이 꽃다발을 짓밟았다. 그 정도로 경황이 없는 모양이었다. 터져 하얗게 날리는 꽃가루 탓인지 학학거리는 숨소리가 가빠졌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멀리 날아가는 꽃잎이 하나둘 사라졌다.

“흐으…….”

마취한 것처럼 입술이 얼얼했다. 아이처럼 침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아는데 삼킬 수가 없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주고 나를 아이처럼 안아 올렸다.

“기도가 붓는 모양입니다.”

가이사는 더 지체하지 않고 문을 활짝 열었다.

빰! 빰!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화려하게 울리는 현악기의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했다. 어지러워 흔들리는 시야에 아실로가 걸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그는 발코니로 통하는 문 바로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만 벙긋거렸지만 짧은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실로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니네이나!”

루베니오가 달려왔다. 그의 비명에 가뜩이나 많던 눈동자가 굴린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걸을 수 없으니 아이처럼 안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바람처럼 빠르게 흔들리는 시야로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들꽃이 아닐 수 없었다.

* * *

“시작은 찬란하였으나 끝은 참담하리라…….”

어찌 되었든 퇴장을 반쯤 죽어 가며 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데뷔 무대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기는 하겠다만.

─모두가 널 흠모하게 될 거다.

다정히 속삭이던 루베니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잘난 남자 둘을 양옆에 끼고 다녔으니 흠모……는 무슨.

‘내가 한 게 없잖아!’

아아. 계획은 분명 찬란했는데 이번에도 몸뚱이가 문제였다. 조금 쉬다가 공작을 적당히 자극한 후 황제나 황태자의 관심을 살짝 끄는 것까지가 내 계획이었는데! 알레르기 쇼크라니!

“후우…….”

“왜 그러고 계십니까?”

“가이사? 언제 왔어요?”

그가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오다니 의외였다.

“한숨 소리가 크게 들리기에.”

“옆방에까지 들릴 정도였어요?”

“예. 뭔가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그냥……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엉망이 된 기분이라.”

그동안 얼마나 야심 차게 그날을 준비했던가? 드레스, 구두, 장신구, 춤, 파트너. 하나하나 다 신경 써 가며 주의했는데 이 꼴이라니. 시작이 얼마나 좋았든 끝이 이런 식이면 실패였다.

“위로가 필요하십니까?”

꼴이 우울해 보였는지 그가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위로해 주려고요? 어떻게?”

“사실…… 저는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닙니다.”

풉. 먼저 물었으면서 곤란해하는 기색에 웃음이 살짝 나왔다.

“가이사가 말주변이 없는 거야 이미 알죠. 몸으로 하는 건 곁눈질 몇 번으로 배우면서.”

춤을 눈으로 배워 따라 했던 걸 떠올리며 한 말이었다.

“그럼 잘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뭘요? 저랑 춤이라도 출 거예요?”

“달밤의 무도회는 낭만적이지만 지금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낭만…… 지금 낭만이라고 했어요?”

당신이?

“뭔가 잘못됐습니까?”

“아니. 의외라서 그렇죠.”

밤의 마력일까? 이렇게 짙고 어두운 밤이면 사람은 감성적이 된다는데 그도 그럴지도.

“당신은 종종 저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말하십니다.”

까만 머리칼이 그대로 밤에 녹아들 듯하였다.

“저는 아직 저를 알려 드린 적이 없는데.”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는 척한다고 뭐라 하는 걸까?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망설일 때. 그는 결 좋은 머리칼을 부스스 흩트리며 성큼 다가왔다. 아래로 늘어진 침대 휘장이 그의 턱 위를 잘라 얼굴을 가렸다. 무릎이 살짝 구부러들고 몸을 굽힌 그가 휘장 아래로 들어섰다. 조명을 등진 얼굴은 훨씬 더 깜깜하여 두려울 정도였다.

“겁이 나 도망가실까 염려되어.”

꽉 짓밟아 낮아진 목소리가 이질적이었다. 수면에서 흔들리는 달빛처럼 차갑고 유유했다. 그의 무릎에 눌려 와르르 구겨지는 침대 시트를 보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어, 어디를 들어오는 거예요?”

상체에 하얀 셔츠만 걸치고 있던 그가 단추를 하나씩 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탈것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탈것?”

“저는 몸밖에 사용할 줄 모른다고 하셨잖습니까.”

“내가요?”

“예. 성인이면……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세요.”

성인. 모양이 예쁜 입술을 넘나드는 숨결이 야릇했다. 그 희뿌연 잔상이 안개처럼 스며들어 그녀에게 뻗쳤다.

“무, 무슨 책임을 지라는 말씀인데요? 내가 뭘 어쨌다고…….”

엉덩이 걸음으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등에 침대 헤드가 닿았다. 뒤는 막히고 앞은 이리의 안광이 번쩍였다. 도망갈 곳을 잃은 피식자가 사냥꾼의 눈빛에 달달 떨며 목덜미를 내놓은 꼴이었다. 손을 덥석 잡혔다.

“피부가 너무 보드라워서 잘못 손대면 짓무를 것 같습니다.”

천천히 깍지를 낀 그가 거칠거칠한 손바닥을 슬쩍슬쩍 비볐다.

“이렇게 만지면 따가울 것 같고.”

손가락 바로 아래의 울퉁불퉁 튀어나온 곳. 손금이 거칠게 파여 우둘투둘한 손바닥뼈에 살갗이 쓸렸다. 검을 오래 붙잡아 굳은살이 딱딱했다.

“으…….”

질척한 마찰감에 귓불 아래가 서늘해졌다. 그의 말처럼 굉장히 따갑고 위험한 기분이었다. 언제나처럼 고작 손 하나가 닿았을 뿐인데. 그러나 그는 그 이상 오지는 않았다. 위기감을 느꼈던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안도와 또 다른 감정이 물에 내려앉은 색색의 꽃잎처럼 뒤섞여 무엇인지 건져 낼 수 없었다. 나는 손을 살짝 빼려 했다.

“위로라면서요?”

단단한 손끝이 내 손등을 꾹 눌러 왔다. 놓아주지 않았다.

“손을 붙잡는 게 일반적인 위로 아닙니까?”

아픈 사람 손을 붙잡고 위로하는 걸 말하는 것 같았다.

‘누가 이런 식으로 야하게 위로한다고?’

혹시나 혼자 그렇게 느낀 걸까 봐 말은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몸 안쪽이 후끈했다. 열이 배어 맺히는 기분이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손바닥 따가우니까 그만해요.”

비비적거리던 손바닥이 잠잠해졌다. 그가 손을 놓아주었을 때에는 손바닥뼈 위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에게 당신만큼 보드라운 부분은 없습니다.”

“나만큼 나약한 부분이 없는 거겠죠.”

“신체의 허약함은 당신의 흠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야 좀 위로 같았다. 물론 이 유리 몸 따위는 엄청난 결점이었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기분이 나아졌다.

“전에는 한심한 표정으로 봤잖아요. 내가 몸을 잘 못 가눌 때마다.”

“그럼 지금부터 정정하겠습니다. 당신은 한심하지 않습니다.”

“…….”

“저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그의 손이 흰 손목을 타고 올랐다. 손가락 다섯 개가 가는 손목 하나를 넉넉히 휘감고 살짝 젖혔다. 붉어진 손바닥이 보였다. 숨겨 둔 민낯을 보인 듯 부끄러웠다. 감추려 했지만 그는 억센 갈대 같았다. 한번 물면 놓아주지 않는 짐승 같기도 했다.

“제가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입술이 물에 푼 붉은 물감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피가 샘솟았다. 꽃송이처럼 붉어진 내 피부 위로 그보다 더 붉은 혀가 지나쳤다.

“아!”

눈을 내리감았던 그가 시선을 들었다. 가장 강렬한 붉은빛. 평소 담고 있던 그늘진 죽음이 아니라 타오르는 불꽃의 색이었다. 입술을 살짝 벌린 남자에게서 악마의 향기가 났다. 연기를 잔뜩 쐰 것처럼 목이 얼얼했다. 매캐하고 혼탁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붉은 혀를 또 몇 번 허락하고 말았다. 가이사는 짐승이 상처를 핥듯 그 자리를 혀끝을 세워 문질렀다.

“하, 하지…… 읏!”

손가락이 움츠러들어 그의 얼굴을 할퀴었다. 동그랗게 깎은 손톱은 그의 얼굴에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

“그만해요…….”

나는 열상을 입은 손바닥을 뿌리쳤다. 가이사도 이번에는 순순히 놔줬다.

“제 위로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눈꼬리를 착 내리깔아 까만 속눈썹이 흐렸다. 빛 하나 못 들어가게 촘촘한 그 사이로 가늘어지는 눈이 보였다. 지독히 야한, 꿈이었다.

* * *

아픈 날은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오늘은 흉흉하기까지 했다.

“왜 이런 꿈을……?”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꿈에서 실컷 들은 목소리가 지근거리에서 들렸다.

“……가이사.”

“예, 말씀하세요.”

쭈물쭈물. 그의 손에 붙잡힌 내 손이 찰떡처럼 뭉개졌다. 왜 그런 악몽을 꿨는지 알 것 같았다. 다 이 남자 때문이잖아!

“내 손은 왜 주무르고 있어요? 손을…… 당하는 꿈 꿨잖아요.”

결벽증 가이사가 할짝이라니! 할짝이라니! 그 꿈이 너무 당황스럽고 이해도 안 돼서 말이 좀 험하게 나간 것 같았다.

‘그게 가이사 때문은 아니지 않나?’

뒤늦게 움찔한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혈액 순환 마사지 중입니다.”

그는 눈치 따위는 없는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내 손을 주무르는 데 열중했다. 쭈물쭈물. 주물주물. 안마기에 손을 집어넣은 것 같았다. 성능도 최고급이라 움직임이 변칙적이었고 시원하게 잘 만졌다.

“내내 이러고 있었어요?”

“예.”

“……안 힘들어요?”

“예.”

“고마워요…….”

위해 준 건데 달리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아까 듣지 못했습니다.”

“뭘요?”

“무엇을 당하는 꿈을 꾸셨는지.”

“……잡아먹히는 꿈.”

그 꿈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꿈속에서 그는 포식자였고 나는 피식자였으니까.

“쫓기다가 물렸고 도망치려다가 뜯겼어요…….”

“그렇게 험한 꿈을 꾸셨단 말입니까?”

꿈을 험하게 만든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을 피했다. 서늘한 손이 내 손목을 살짝 붙잡았다. 계속 손바닥을 주무르던 손이 위로 이동하자 어깨가 움찔 굳었다. 그의 엄지가 붉은 피가 흐를 요골동맥(앞팔의 바깥쪽을 통하는 동맥으로 보통 맥을 짚는 동맥)을 지그시 눌렀다.

“심호흡하셔야 합니다.”

“…….”

“어서요.”

어린아이처럼 따라 하는 게 싫어 고집부리는 게 더 유치했다. 머뭇머뭇 따라 하자 머릿속이 좀 차분하게 진정됐다.

“착하십니다.”

간신히 편 얼굴이 또다시 와작 일그러졌다. 정말 사람 기분 묘하게 만드는 데 뭐 있는 말투였다.

“지금 몇 시예요?”

“저녁 7시입니다.”

“7시라면…… 설마, 하루가 벌써 지났어요?”

“자정의 시계 소리를 들으셨으니 날이 바뀐 건 아닙니다. 쓰러지신 후 19시간쯤 지났겠군요.”

“내 소중한 하루가 또 이렇게 가다니……. 하루하루가 금싸라기 같거늘. 아니, 금싸라기 따위보다 몇억 배는 소중한데!”

“중간에 잠깐 깨어나셨는데 아프던 중이라 기억 못 하시나 봅니다.”

“응? 내가 그랬어요?”

“네. 약도 드시고 하셨습니다. 숨 쉬는 것도 이제 괜찮지 않습니까?”

이곳은 약이 워낙 좋아 알레르기 반응은 금방 가라앉았다. 내일부터는 다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래. 할 일에나 집중하자. 그 이상한 꿈에는 의미 두지 말고.’

무도회는 기절로 끝났지만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떡밥을 여러 곳에 던져 놓았으니 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면 됐다.

* * *

다음 날 밥을 먹고 낮잠 자는 새처럼 꾸벅이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점심때였다.

“이래선 안 돼. 바깥 공기 좀 쐬어야겠어. 정원 산책을 나가자!”

문 옆에서 대기하던 사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원 산책을 나가시려고요?”

“응. 바람 좀 쐬어야지. 안에만 있으니까 계속 잠만 자잖아.”

“……알겠습니다.”

내 건강이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사라는 더 말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하녀들을 소집하는 사라의 얼굴에서 비장미가 흘렀다.

“어서 ‘그것’을 준비해!”

그것?

“예! 하녀장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것의 정체를 모르는 건 나뿐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하녀들이 페로몬 길을 따라 나가는 개미 떼 같았다.

잠시 후 쪼르르 나갔던 그녀들이 다시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들의 어깨 위에서 연분홍색의 리본이 덩실덩실 흔들렸다. 보석과 리본으로 장식한 화려한 들것이었다.

“……또 그거야?”

아니, 잠깐. 그사이 뭐가 더 늘었다.

“이건 또 뭐야?”

“주인님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저희가 직접 자수를 놓은 것이에요.”

메이아가 수줍은 얼굴을 하고 굽이쳐 흐르는 은실을 가리켰다. 참, 쓸데없이 고퀄리티였다. 소담하게 핀 장미처럼 빛나는 ‘니네이나 세이아 님의 전용 들것’이라는 글귀에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 탈 거니까.

“이제 혼자 걸어갈 수 있어.”

“그, 그런…….”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하녀들은 갈팡질팡하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주인님, 이것을 타고 나가시면 밖에서 더 오래 노실 수 있지 않을까요?”

메이아가 한 걸음 우아하게 걸어와 조곤조곤 설득을 시도했다. 물론 내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이었다.

“안 타.”

“…….”

시무룩. 메이아의 고개가 푹 수그러들었다. 태양을 잃어버린 해바라기 같았다. 그러고 있으니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양심에 찔리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며 머뭇거리는 사이 문밖에 커다란 인영이 드리웠다. 내가 ‘탈것’을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가이사였다.

기웃. 그가 고개를 문틈으로 내밀고 특유의 무감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를 타시겠습니까?”

“깜짝 놀랐잖아요! 다, 당신은 그놈의 탈것 소리 좀 그만해요!”

꿈자리가 사납다고! 반사적으로 도피처를 찾는 내게 손짓 하나가 살랑이며 다가왔다.

“주인님! 어서 여기로 오세요!”

“그래! ……어?”

척척척. 오르다 보니 들것에 올라가는 사다리였다.

“……?”

정신을 차리니 나는 그 눈부신 분홍빛 위에 앉아 있었다.

“자, 어서 출발해요!”

어안이 벙벙해서 혼곤한 시선에도 메이아는 해맑게 웃으며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시녀 군단이 잘 훈련된 개미 떼처럼 커다란 먹이, 아니, 나를 옮겼다.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설마 메이아가…….’

이곳은 지옥의 개미굴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주인님!”

넋을 놓고 끌려오다 보니 어느새 정원이 보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것에서 벗어나야 했다. 가이사가 자신이 에스코트하겠다는 듯 손을 척 뻗었다.

“잡고 내리세요.”

호의를 거부할 수는 없어서 또 붙잡고 내렸다.

“……고마워요.”

불퉁한 얼굴을 하면서도 꼬박꼬박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 게 우스운지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는 얇게 접힌 눈꼬리를 흘긋거리다가 앞으로 척척 씩씩하게 걸었다. 실패를 거듭해도 도무지 포기하는 법이 없는 정원 산책이 다시 시작되었다.

“오늘은…… 헉, 다…… 돌아볼 수 있을 것, 흐어…… 같, 같아……요.”

“……쉬었다가 가시죠.”

“아니, 헉……. 괜찮, 헉…….”

“두 글자에 한 번씩 헉헉거리십니다. 쉬었다가 하세요.”

손이 없으면 이로. 말이 안 되면 행동으로. 나는 고개를 두 번 저었다.

“몰아치기만 하는 것보다 새로운 걸 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효과적? 내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무슨 효과요?”

“재미가 있으면 더 오래할 수 있습니다. 쉽게 지치는 건 재미가 없어서입니다.”

“……체력 때문이 아니고요?”

“아닙니다.”

옛날에는 그의 말에 거짓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믿음이 흔들렸다. 무뚝뚝한 나무인 줄 알았는데 요령 좋은 여우인 것이다. 그는 원하는 바를 위해서라면 거짓이든 위장이든, 설령 더한 것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하는 놀이 같은 건 어떻습니까?”

그러나 그 솜씨가 교묘해서 덫의 존재를 숨기는 게 능했다. 점점 더 헷갈렸다.

“놀이요? 고무줄놀이 같은 거 말이에요?”

“무엇이든.”

“아! 땅따먹기 할까요?”

“그게 무엇입니까?”

“균형 감각과 근력을 동시에 올려 줄 운동이요.”

어릴 때 꽤 잘하던 놀이였다. 좋아하기도 했고.

“우선 그림을 이렇게 그리고.”

돌을 하나 잡아 발판을 그렸다. 하녀들은 자신들이 하겠다고 나섰지만 사방치기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내 몫이 되었다.

“숫자를 쓰고.”

1~8까지의 수를 순서에 맞게 쓰고 위에 ‘하늘’을 적었다.

“게임 방법은…….”

어린아이들의 놀이이니 규칙은 어렵지 않았다. 한 번에 잘 알아들은 게 맞는지 가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한번 해 볼래요?”

들고 있던 돌을 그에게 건네줬다. 아이들의 놀이라며 시시해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뜻 받았다.

“손이 땅에 닿으면 안 되고 줄 밟는 것도 실격……”

퍽! 그가 던진 돌은 정확히 1번 땅 중앙에 내리꽂혔다. 딱 돌의 반분만큼 깊게.

“……이에요.”

“예.”

돌을 자기 기준으로 뽑기 쉽게 만들어 놓은 그가 유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쉬이이잉 지나갔다.

“손 닦아 드릴게요.”

“예쁜 돌을 찾아왔어요.”

하녀들이 오순도순 모여 내 손을 닦아 주고 하얀 돌멩이 하나를 쥐여 줬다. 그가 반쯤 하였을 거라고 생각하고 돌아봤는데 그는 처음 그 자리에 있었다.

“왜 아직 출발 안 했어요?”

“다녀왔습니다. 두 번째 칸에 바로 하면 됩니까?”

숫자 1을 반으로 토막 낸 자리에는 돌이 없었다.

‘언제 다녀왔지?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이번에는 잘 지켜봐야겠다.

“네. 순서대로 계속하면 돼요. 줄을 밟으면 교대고요.”

“알겠습니다.”

그 후 가이사의 독무대가 펼쳐졌다. 투다다닥. 투다다닥. 그는 속기사의 키보드 위에서 춤추는 손가락 같았다. 큰 힘을 들이는 것 같진 않은데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속도였다.

나는 가이사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1등이네요.”

“감사합니다.”

좋겠다. 1등이라서.

등을 돌려 하녀들을 바라봤다.

“혹시 하고 싶은 사람 있어?”

“저희요?”

“응. 편하게.”

메이아를 비롯한 3명의 하녀가 손을 들었다.

“그럼 우리끼리 2등 쟁탈전을 해 볼까?”

1등은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남자에게 빼앗겼지만 2등만큼은 내주지 않겠다. 종주국(?) 국민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자, 게임을 시작하지!

몸 생각은 못 하고 야욕으로 가득 찬 내가 야심만만하게 돌을 던졌을 때였다.

“주인님!”

엄청난 고함 소리에 완벽을 추구했던 발끝 각도가 꺾였다.

삐끗.

“사, 살았다!”

몸뚱이가 드디어 홀로 고비를 넘겼다. 들고 있던 반대쪽 발을 내린 덕이었다. 비실비실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강아지가 첫걸음마를 뗀 기분이었다. 제 새끼 돌보듯 기쁨에 찬 얼굴로 다리를 내려다보던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해냈……!”

소리를 왈칵 지르기 전에 민망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흠.”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하며 괜히 사방을 돌아봤다.

“…….”

기이한 적막감이 흘렀다. 평소라면 한두 마디 했을 응원 부대가 조용했다. 머쓱하고 부끄럽기만 한 응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느낌이 이상했다.

“실격이군요.”

이상한 곳에서 고지식한 남자가 야박하게 발밑을 가리켰다.

“실격이요?”

당당하게 선 두 발이 보였다. 심지어 한 발은 완벽하게 선을 뭉개 놨다.

“…….”

하녀들이 측은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껏 게임인데 별의별 감정이 다 들었다. 민망하고 화나고 부끄럽고.

“주인님!”

벼락같던 고함이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웠다.

“왜……! 가 아니고 무슨 일인데?”

하마터면 짐승처럼 절규할 뻔했으나 인간의 교양이 그걸 막았다. 헐레벌떡 뛰어온 집사 라일이 다급히 저택 안쪽을 가리켰다.

“어서 들어가셔야 합니다.”

가까이 온 그가 이제 와 작게 속삭였다. 은밀하고 다급한 말에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밖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더 있겠다는 철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안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황제 폐하께서 라즈리 저택에 티타임 초대장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라즈리 저택은 내가 공식적으로 머무른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실제 머무는 곳은 전혀 다르니 일종의 눈속임이었다.

“오늘 오후의 티파티입니다.”

“오늘? 무슨 일로?”

“그런 것까지 자세하게 쓰여 있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정식 초대장을 본 건 아니기에…….”

그럼 어떻게 알았냐는 바보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루베니오의 사람이 따로 집사에게 언질을 준 것이라고 예상할 뿐이었다. 나는 흙이 묻은 치맛자락을 흘긋 봤다. 간만에 부린 마음의 사치는 여기까지였다.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

“옷…… 아. 잠옷 말씀이십니까?”

라일의 시선이 내 옷자락으로 향했다.

“잠옷? 드레스가 아니고?”

“드레스라니요?”

우리 둘은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멈췄던 발길을 떼며 내가 먼저 물었다.

“입궁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낮잠을 주무시려는 게 아닙니까?”

“……폐하께서 보내신 초대장이라며?”

“예. 그래서 거절 답신 정도는 직접 쓰셔야 합니다. 너무 늦지 않게.”

나는 발걸음을 뚝 멈췄다.

“왜 거절해야 하는데?”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내 눈빛에 라일의 얼굴에는 점차 경악이 번져 갔다.

“몸이 안 좋으시니……”

“오늘은 좋아. 방금 전까지 놀고 있었잖아.”

“…….”

“설마 멀쩡한 몸으로 폐하의 부름을 거절하라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귀족의 올바른 도리가 아니잖아?”

루베니오는 출타 중이다. 그가 없는 한 이 집의 모든 것은 그의 유일한 후계인 내 통제하였다.

“주인님…….”

“다들 뭐 하고 섰어? 얼른 준비해.”

어릴 때부터 이 몸을 모셔 온 충실한 집사는 주인의 의지를 막지 못했다. 유일하게 나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한 남자만 내 행동을 의아해했다.

“오후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모습이 너무 태연해 보인 것 같았다. 마치 황제의 초대를 예상하였다는 듯이.

* * *

“……!”

몇 번 겪어 보니 비행의 두려움은 줄어들……지는 않았고, 비명을 참는 요령은 생겼다. 공포는 피부 위까지 겹겹이 쌓였다가 마차 소파 가죽에 엉덩이가 닿는 순간 차차 가라앉고는 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바람에 날려 머리가 헝클어지는 건 막을 수 없어서 메이아가 머리 전담으로 마차에 같이 탔다.

“넌…… 괜찮아?”

메이아의 눈동자가 햇볕에 잘 익은 벼처럼 춤을 췄다.

‘주인님이 저를 걱정해 주시고 있어요!’

그대로 읽히는 눈동자가 부담스럽다.

“저는 튼튼해요!”

“그런 문제가…… 아니, 아니야.”

한마디 더 꺼냈다가는 메이아가 저대로 마차 지붕을 뚫고 어딘가로 날아갈 것 같았다. 붕붕 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였는지 헤헤 웃는 소리가 났다.

“머리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그냥 한쪽으로 묶어 줘.”

“음…… 그럼 이런 스타일은 어떠세요?”

단정한 손끝이 그림 하나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책의 표지였다.

「아가씨와 하녀의 은밀한 우정」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엄청난 것을 보고 말았다.

“이렇게 할까요?”

메이아가 가리키는 건 「아가씨와 하녀의 은밀한 우정」의 아가씨 그림이었다. 금발과 푸른 눈의 아가씨.

“……반 묶음으로 하자.”

메이아는 잠시 시무룩하다가 곧 열정적으로 머리를 살짝 땋아 반 정도만 묶었다. 귀족은 같은 장신구를 연속으로 하는 일이 드물지만 내 옆머리에는 전과 같은 머리꽂이를 꽂았다.

“연지만 살짝 덧바를게요.”

메이아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가이사와 눈이 마주쳤다. 무덤덤한 붉은빛이 노을처럼 타오르고 있어 순간 가슴이 철렁, 하고 크게 요동쳤다.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 밀밀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많은 것이 집약되어 손끝에 질척거리는 것이 밸 듯했다.

‘대체 왜 저렇게 보지?’

헷갈릴 정도로 야릇한 시선이었다. 연인에게나 던질 법하게 달콤했고 동시에 위험하고 음험한 색을 짙게 풍겼다. 그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깊게 들이켰다가 깊게 내뱉는 숨에 가슴이 오르내렸다. 탄탄한 가슴에 조끼 사이로 언뜻 보이는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살며시 가라앉았다.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눈꺼풀이 눈동자 위로 사르르 감기는 것까지 완벽한 환상 같았다.

그가 눈을 감자 겨우 속박에서 벗어났다. 기름 성분을 덧발라 미끄러운 입술이 뜨겁게 간질거렸다. 습관처럼 자꾸만 비비는 입술을 이로 잘끈 깨물다가 그와 또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손을 쓱 뻗었다.

“위험합니다.”

까만 가죽 장갑이 아주 크게 클로즈업되었다가 뒤로 빠졌다. 길목에 뱀 허물 같은 장갑 한쪽을 놓아둔 그가 기어이 입술에 손을 얹었다. 서늘한 손끝이 입술을 그려 치아에 물린 입술을 건져 냈다. 갓 이가 난 애처럼 잇몸이 간지러웠다. 나는 습관처럼 또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가 질책하는 눈초리에 당황해 입술을 벌렸다.

“……물릴 수도 없고.”

그 소리에 그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갈이요? 지금 나한테 재갈 물려 놓는다고 했어요?”

“그런 건 입안이 상하니 안 물립니다.”

재갈은 안 물린다는데, 이유가 저따위였다.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을 써도 입안이 다 헐 텐데 그러다 음식을 못 삼키겠다고 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강제로 먹일 수도 없고.”

“…….”

“강제로 먹이는 방법이야 있지만 당신에게 쓰기는 적절치 않은……”

“그런 건 다른 인간에게도 쓰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

저 침묵은 몹시 불편했다. 답은 부정이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니 침묵으로 대신하겠다는 것 같고. 내가 가느다란 눈으로 쏘아보자 그는 잠시 난감해하더니 물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진심으로 모르는 눈치에 도리어 내가 망설여졌다. 나는 어느 정도 이 세상과 타협하고 있었다. 잔인한 형벌이 존재하고 고문법이 성문으로 명시된 이곳에. 스스로 놀랄 만큼 그 과정은 쉬웠다. 그러나 가끔 그 괴리감이 머릿속을 아찔하게 조였다.

“……아니요. 아무것도.”

“제가 또 손가락을 물리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의 손이 또 슬쩍 다가와 치고, 빠졌다.

“물지 마세요. 입술에 잇자국이 남습니다.”

연분홍색 입술연지 자국이 그을려 햇볕 냄새가 나는 손 위에서 두 장의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눈에 띄게.”

그의 목소리가 낮고 은근하여 더듬거리며 목소리를 만들려던 혀뿌리가 얼어붙었다.

“으음…… 가이사는…….”

“실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얼굴을 찌푸린 그가 팔로 몸을 지탱해 옆으로 이동했다. 순식간에 허벅지가 붙을 정도로 가깝게 접근한 그가 신속히 내 몸을 안아 들었다.

쏙. 깊은 품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무섭게 충격이 덮쳤다.

쿵! 뇌가 뒤흔들리는 느낌은 그다음이었다. 뒷목이 뻣뻣하게 당긴 후 남은 여진이 등골을 타고 전신으로 스몄다.

“……!”

가이사의 가슴이 뺨 바로 옆에 있었다. 나는 남자의 허벅지 위에 아이처럼 앉은 꼴이 부끄러워 서둘러 내려왔다. 얼얼함에 숨죽여 몸을 기댄 사이 창밖에서 소란이 들렸다.

“마차를 어떻게 모는 거야!”

퍽! 퍽! 뭔가를 후려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났다.

“아아악! 잘못, 흐아악! 살려 주십시오, 주인님!”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상대편 마부의 등짝이 다 터져 있었다. 진액처럼 질질 흐르는 붉은 피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가해자는 금발의 귀족이었다. 그의 잔인한 성정을 나타내듯 뾰족한 송곳이 박힌 채찍에는 인간의 피와 살점이 말라붙어 흉물스러웠다. 그의 기사로 보이는 자들은 그 꼴이 익숙한 것처럼 무표정했다.

“거기 너! 너도 당장 내려와!”

순식간에 자기 쪽 하인을 엉망으로 만든 귀족이 내가 타고 온 마차의 마부를 가리켰다.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 뒷목이 징 울렸다. 남의 집 가솔에게까지 행패를 부리려는 꼴이 가당찮았다.

“주인님…….”

마부가 겁먹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내리지 말고 그대로 있어.”

귀족 남성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관찰하는 시선이었다. 나는 눈을 재빨리 굴려 마차의 문장을 확인했다. 남자가 어느 가문 소속인지 알아보려 한 것이다. 고결과 자유를 상징하는 푸른 장미와 하얀 새. 눈이 저절로 게슴츠레 떠졌다. 우습게도 그는 ‘세이아’였다. 두 마차는 같은 문장을 품고 있었다.

“…….”

두 세이아 사이에서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흠. 어린 게…….”

남자는 다시 성노하려는 듯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개망나니 아니야?”

나는 선수를 쳤다.

“뭐, 뭐, 개망나니?”

푸르르. 투레질을 하는 말처럼 고개를 털던 그가 삿대질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얼굴은 하나도 안 닮았는데 그 꼴은 친애하는 조부님과 닮은 것도 같았다.

“그래. 촌에서 살던 네가 뭘 알겠냐? 어른을 봤으면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는 상식도……!”

“출발해. 교양 없는 이와는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들고 온 부채를 차르르 우아하게 편 나는 생물학적 작은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자를 폄하하며 마부에게 눈짓했다.

“예, 주인님.”

입꼬리를 씰룩 움직인 마부가 신나게 마차를 출발시켰다.

“너 거기 안 서? 감히 네가 나를 앞질러 가?”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레퍼토리가 뻔했다. 먼저 온 사람은 나였다. 그런데 굳이 이 좁은 길목에서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뻗대는 것이다. 마차를 한쪽에 대고 비켜 주려면 그냥 같이 지나가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릴 텐데도 그랬다. 삼촌인 그가 조카인 내 뒤꽁무니를 따라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귀족들의 자존심이란 그렇게 한심한 구석이 있었다. 알고 싶지도 공감하고 싶지도 않지만 더러워 피하는 것도 옳지 않았다. 이건 딸인 나를 통해 장남이자 후계인 루베니오에게 거는 기 싸움이었다. 내가 여기서 물러난다면 사람들은 단순히 조카의 양보로 보지 않고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해 루베니오가 한 수 물러난 것으로 볼 것이다.

‘그런 치욕을 안겨 줄 거 같아? 그런 꼴은 절대 못 보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타이밍도 웃겼다. 우연이라는 말을 믿는 건 멍청이나 할 짓이었다.

“주인님, 마차가 계속 따라와요. 이대로라면 또 부딪히겠어요.”

메이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가를 기웃거렸다.

“날려 버려.”

“예. 날려…… 예?”

나는 부채에 살짝 가린 눈을 싸늘하게 내리떴다.

“아…… 예!”

메이아의 손에 갈색의 마나가 모였다. 땅의 지형만 살짝 바꿔도 달려오는 마차에는 큰 충격이 갈 테니 초보 마법사인 그녀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법이 채 다 완성되기도 전에 바람이 크게 몰아쳤다.

“으아아아아!”

푸른 소용돌이에 휘말린 세이아 가문의 마차가 맑은 하늘 위로 거꾸로 솟구쳤다. 나의 작은아버지는 마차에 매달려 흔들리는 중이었다.

“…….”

나와 메이아의 시선이 동시에 가이사에게로 향했다.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여기에 그밖에 없었다.

“있는 줄 몰랐던 버러지야 그냥 둔다지만 보인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집에 들어온 벌레를 아무 거리낌도 없이 손으로 눌러 죽일 때의 눈이었다. 통쾌한 마음이 든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인간을 진심으로 벌레와 동등하게 여기는 눈빛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니네이나 세이아!”

깃발처럼 너울거리던 작은아버지, 요르케가 무려 내 이름을 불렀다. 가이사의 눈매가 우그러진 철제문처럼 날이 섰다.

“루베니오가 내쳐지는 날 네 살가죽을 찢어 그 입에 처넣…… 아아아악!”

하늘 높이 뜨고도 기가 살아 고래고래 소리치던 그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죽이라고는 안 했는데.”

“슬슬 진심으로 거슬려서.”

뭐가, 왜 거슬린다는 건지 모르겠어서 입안이 바짝 말랐다.

“바닥에 내려 줘요.”

나는 아찔한 시야를 바로잡으며 가이사에게 부탁했다.

“철퍽.”

그 상황에도 따로 주문을 넣어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점점 땅으로 가까워졌다. 마차가 먼저 떨어지고 그 위로 요르케가 내동댕이쳐졌다. 철퍽.

“윽!”

꿱. 단말마의 비명만 내지른 그의 위에 지금껏 준비하고 있던 메이아의 고운 마법이 떨어졌다. 토닥토닥. 땅을 다져 그에게 흙 이불을 덮어 준 메이아가 수줍게 나를 돌아봤다.

“……그래. 잘했어.”

성난 얼굴로 당장 흙을 치우라 버둥대는 꼴이 보였다. 주제도 모르고 지껄인 말에 비하면 약소한 처우가 아닌가? 생각 없이 저지른 일도 아니었다. 만약 이 일이 문제가 되면 어떻게 대처할지는 이미 다 생각해 놓았다. 혹시 모를 문제 상황을 차곡차곡 짚어 본 뒤에야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풉!”

남의 불행에 기뻐하는 건 죄라는데 이상할 정도로 저 꼴이 통쾌했다.

* * *

마차는 황성 입구에 도착했다. 요르케가 행동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쯤에서 그 일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공작을 잡기 위한 덫.

“밖에 가서 알레초를 좀 사 올래?”

“알레초요? 어디 안 좋으세요?”

알레초는 진통 기능을 가진 약재로 내가 상시 복용하는 약에는 이 약초가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효과가 빠르고 즉각적인 데다가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는데,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귀한 약재라 부르는 게 값이었다.

“아니. 쓰임새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과다 복용은 좋지 않았다. 메이아는 그것이 의아한 눈치였지만 내 말에 토를 달 수는 없었는지 내가 건네는 약값을 얌전히 받아 마차에 올랐다.

메이아는 맛있는 간식을 달아 놓은 일종의 쥐덫이었다. 공작은 나 홀로 나온 것을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황제가 초대했다는 것도 알겠지. 그럼 당연한 수순으로 내 뒤를 캐려고 할 것이고 내가 메이아에게 시킨 일을 궁금해할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까는 하나의 포석이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장 시종이 나타나 나를 안내했다. 옆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가이사가 내 손 위에 작은 구슬 하나를 올렸다.

“이게 뭐예요?”

“부적입니다.”

“부적?”

“위험을 막아 주는 부적.”

신이 실존하는 세계다. 이 세계에서 부적 같은 것은 사술로 여겼고 그냥 미신이었다.

‘이런 것도 믿나?’

꽤 의외였으나 그는 뜻밖에도 진지했다.

“빌려드리는 겁니다.”

“소중한 거예요?”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제 손을 타 버려서.”

나는 손바닥을 펴 엄지손톱만 한 작은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보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었다. 옅은 초록색 구슬이 햇살을 머금고 손바닥 위로 빛을 퍼트렸다.

‘초록색…….’

꽤 익숙한 색이었다. 루베니오를 생각하며 기절할 때마다 본 그 초록빛을 닮았다. 잎사귀 여러 개가 손바닥에 맺힌 듯한 기이한 잔상이 느껴졌다.

“깨트리지만 않으면 별일 없을 겁니다.”

“당신이 그런 말 하면 좀 무섭던데…… 깨트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당신은 몹시 화가 날까요?”

“저는……”

그의 시선이 높다란 하늘로 올랐다. 쨍쨍 쏟아지는 태양을 품은 파란 하늘이 눈동자 한 폭에 담겼다.

“무척…… 슬플 겁니다.”

“…….”

그 모습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나는 다시 손바닥을 오므려 그 빛을 감췄다.

“소중히 쓰고 돌려줄게요. 당신의 유리구슬을 깨트리지도 않고.”

“…….”

어딘가 침전해 있던 그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계속 제 옆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 아니, 죽어서도.”

높낮이가 거의 없는 서늘한 목소리는 불어오는 바람처럼 오싹했다. 냉풍인지 열풍인지 모를 것에 어깨가 살짝 떨렸다. 체온이 오래 스며들어 구슬은 뜨거웠다. 나는 그것을 꾹 움켜쥐며 가볍게 웃었다.

“순장이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말하네요. 유리구슬을 무슨 사람처럼.”

“반대입니다.”

“반대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이 깨지면 저를 그것 옆에 묻겠습니다.”

이 남자, 무슨 엄청난 말을 하는 거야?

“제가 지금 가이사의 목숨을 들고 있는 셈이네요.”

“예.”

“저에게 당신의 목숨을 맡겼어요.”

“예.”

“……왜죠?”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그의 목적은 나를 ‘지키는 것’에 국한될 텐데 지금은 그 이상의 것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만 해도 그랬다. 무도회 날 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가이사, 공작에게 정령을 붙여 감시해 줄 수 있어요? 정령이 실체화하지 않으면 정령사 외의 사람 눈에는 안 띄잖아요.

─그러겠습니다.

공작이 알레초의 행방을 역추적하고 있음을 알려 준 것도 가이사의 정령이었다. 나는 그에게 얻은 정보로 지금의 덫을 팠다. 처음에는 기뻐서, 그 후에는 알레르기가 터져서 잠시 잊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왜 나를 도와주는 걸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당신이 그것을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상하네요. 제가 바라는 건 다 들어줄 것처럼 구는 게.”

“들어드릴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당신을 해하는 종류가 아니라면.”

“…….”

“당신이 저를 다시 살아가게 했으니까.”

가이사의 눈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핏빛 웅덩이가 하늘처럼 포근해지는 기현상이 소용돌이처럼 빙글거렸다. 나는 그런 걸 해 준 적이 없었다. 대체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당신은 가이사 아델만인데. 원작 소설 내에서도 그만큼 무심한 사람이 없었다.

“가이사는 인간을 싫어하잖아요?”

“말했을 텐데요? 당신은 싫지 않다고.”

“…….”

“당신을 보고 있으면 편안합니다. 그리고 때론 즐겁습니다.”

숨이 확 벅차오르며 뺨이 화끈했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게 세상은 너무나도 단조롭습니다. 지루하고 지긋지긋합니다. 나는 언제나…… 죽고 싶었습니다.”

나는 계속 그가 궁금해지고 만다. 당신은 대체 왜 그렇게 사고할 수밖에 없는가 하여서.

“그러나 나에게는 계속 살아가야 할, 이 지독한 삶을 가능한 한 연장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살아가는 데 이유가 필요한 사람 같은 거 나는 몰랐다. 나는 끊임없이 삶을 갈구한, 그와 정반대의 사람이니까.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내게 너무 어렵고 무거운……

“니네이나.”

나는 아직 그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그는 나를 다 아는 사람처럼 시기적절하게 내 생각을 끊어 냈다. 그에게 불린 이름이 각인처럼 가슴에 새겨져 불탔다. 활활 타오르는 붉은빛에 나는 곧 집어삼켜질지도 몰랐다.

“당신이 있으면 이런 내 삶도 편안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 그동안의 삶은 뭘까? 지옥이었다는 걸까? 불행이었다는 걸까? 왜? 당신은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건데? 왜 지독히 쓸쓸해 보이는 건데? 끊임없는 의문이 거대한 활자의 파편처럼 쪼개어져 머릿속을 맴돌았다.

“당신을 돕는 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일 겁니다. 내게는 충분하고도 차고 넘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나는 어느새 발을 멈추고 서 있어서 그가 다가오는 걸 그냥 허용하고 말았다.

“저는 아주 유용한 도구입니다. 힘이 센 검이 될 수도 있고 우직한 방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짝 다가선 그가 내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매만졌다. 손바닥에 백금색 머리칼을 담뿍 품고는 그것을 뺨에 비비는 일련의 행위가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경건했다. 금욕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단정한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이 깨끗했다. 더 이상 내가 역겹지 않다고, 온몸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 같았다.

“허락하겠습니다. 당신이 날 사용하는 걸.”

“…….”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참 유용한 패였다. 저런 터무니없는 이유로 마음껏 휘둘리겠다는데 사양할 게 뭐가 있을까? 덥석 받아 버리면 될 것을. 그런데 내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어요.”

“정령은 마음에 드는 자를 계약자로 삼습니다. 내 의지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마음에 든다는 말인가요?”

“마음에 든다……. 겨우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당신은 내게 유일하니까.”

“……못 믿겠어요, 그런 말.”

당신의 절박함 따위 나는 모른다. 그러니 믿지도 않겠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끊임없이 의심하라고.”

“저를 쓰는 게 두렵습니까?”

“…….”

“몇 번이든 휘두르세요. 끊임없이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당신이 볼 손해는 없으니까.”

그럼 당신은? 당신에게는 뭐가 남는데? 아. 모르겠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나를 뒤흔들고 혼란스럽게 하는지.

“저는 당신 곁에 머물 겁니다. 언제나.”

햇볕이 살그미 내려와 내 머리칼을 태웠다. 반짝반짝 맴도는 햇살에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벅찬 황홀감으로 차올랐다. 그의 가슴이 다시 편안하게 가라앉는다는 점이 지독히 두렵고, 뜨거웠다. 심장의 혈액이 용암으로 변해 버린 것처럼.

“니네이나 세이아 님?”

그때,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을 깨부수는 소리가 있었다. 황궁에서 정신을 팔고 있었다는 생각에 나는 그를 두고 후다닥 달려가려 했다.

“잊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입니다.”

후덥지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어 뜨거웠다. 그가 황제의 티파티에 초대되지 않았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일 만큼. 거세게 몰아닥치는 황궁의 칼바람이 발긋한 뺨을 빠르게 씻어 냈다. 나는 지금 그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 * *

“니네이나 세이아가 엘리니움의 태양과 여명을 뵙습니다. 무궁한 영광과 영예로 드높으시길.”

태양은 황제를 칭하는 말이고 여명은 황제의 자식을 뜻했다.

“앉아도 좋다.”

“감읍하옵니다.”

상석에는 황제가 앉아 있었고 내 앞에는 아실로 황자가 앉아 있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아실로를 자극하면 황제가 나설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날 그렇게 가서 놀랐지. 그래, 영애의 몸은 좀 어떤가?”

떠오르는 흑역사에 민낯이 벗겨진 기분이었으나 타인이 눈치챌 만한 동요는 드러내지 않았다.

“좋은 날 불민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터라…… 실수가 있었습니다.”

“몸이 아픈 건 영애의 탓이 아니지. 안 그런가, 황자?”

어허. 그는 짐짓 안타깝다는 것처럼 신음하며 아실로를 불렀다.

“……그렇습니다, 폐하.”

“하하. 황자가 이렇다네. 사적인 자리에서는 아비라 불러도 되건만 이렇게 격식을 차려서 간혹 날 섭섭하게 하지.”

황제는 다정히 웃으며 올해 일곱 살이 된 황자의 손에 쿠키 하나를 직접 쥐여 줬다. 그 엄청난 익애에도 아실로 황자는 뚱한 얼굴이었다.

‘싫어한다. 쟤…… 저 쿠키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

사사로이 아버지라고 해도 그는 황제였다. 차마 황제가 하사한 쿠키를 버리지는 못하고 우물우물 씹는 볼이 도토리를 베어 문 다람쥐처럼 포실했다.

“영애는 몸이 좋지 않아 딱딱한 음식은 좋지 않다고 들어 부드러운 과일을 준비했네. 차와 편히 들게.”

“황송합니다, 폐하.”

금장을 넣어 눈부시게 화려한 접시에 가득 담긴 과일들이 보였다. 딱 그녀 앞에만 있는 접시였다. 따로 준비한 음식이라니. 부담스러워 체할 것 같았다.

‘드라마 같은 거 보면 꼭 이런 데에 장난질을 하던데.’

황제가 나를 죽일 이유는 없지만 또 몰랐다. 삼엄한 황성 안이라고 해도 공작의 수족이 한둘은 있을 테니까. 그래도 일단 먹는 척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포크를 들었다.

“폐하, 루베니오 세이아 후작께서 오셨습니다.”

“오! 어서 오라!”

황제가 루베니오를 환영하며 일어섰다. 달콤한 과육이 금빛 포크에서 흘러 또르르 떨어졌다.

“매정한 인사가 아닌가. 내가 부를 때는 바쁘다고 차일피일 미루더니 딸이 왔다고 바로 찾아오는군.”

“송구합니다.”

하고자 한다면 혓바닥을 유려히 굴려 황제의 비위를 맞출 수도 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 모습이 원래 루베니오의 성격인지 황제도 기분 상한 얼굴은 아니었다. 황제는 뱀과 같다. 여느 황제처럼 성정이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나 자존심보다는 실리가 우선이었다. 황제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두 번 들리고 나서야 루베니오는 내 옆자리에 착석할 수 있었다.

“둘이 그렇게 있으니 보기 좋군.”

“폐하와 황자님께서도 그러십니다.”

“하하하. 루브오(신성어로 얼음을 뜻함)라고 불리는 공작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오늘처럼 기분 좋은 티파티는…… 큼!”

“괜찮으십니까, 폐하?”

황제의 헛기침 한 번에 시종장이 달려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이가 드는 모양인지 지금처럼 목이 깔깔할 때가 있다네.”

지금이야 헛기침 정도겠지만 곧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그 증세가 심해질 것이다. 황제는 ‘조용한 암’이라고 불리는 폐암 환자였으니까. 회복력이 뛰어난 세계라고 해도 외과적 치료 기술은 더뎠다. 이 세계는 암 환자가 극히 드문 대신 치료 방법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자가 면역력으로 이겨 내지 않는 이상은.

폐암은 초기 증상이 거의 없다. 증상이 나타났을 때쯤에는 이미 병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회복력에만 의지할 수 없을 정도겠지.

“저…….”

나는 소리 높여 말하다가 주저하는 척 망설였다.

“음? 괜찮으니 편히 말해 보게.”

“저는 여행가를 불러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취미가 있답니다. 그때 한 여행가가 목이 건조하거나 마를 때는 해조류를 먹으면 좋다고 말해 주었어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 황제의 병은 얼마나 얕은 증상이든 아는 척하지 않는 게 예의였기 때문이다. 책을 잡으려면 잡을 수 있고 모르는 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이까짓 작은 실수로 이 시간을 망치기에는 황제는 너무 간사한 인간이었다.

“실제로 제가 효과를 봤기 때문에 폐하께 그것을 꼭 바치고 싶습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황제를 존경하는 소녀처럼 간절히 눈을 반짝였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이 말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가느다랗게 접힌 눈이 오싹하게 관찰해 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얼굴로 방싯거렸다.

“해조류라…….”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중증 암 환자들에게 식습관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병을 다 치료할 수는 없어도 이 세계 인간의 경이로운 회복력을 생각한다면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 살아나든 그대로 죽든, 나에게 황제의 생사는 중요하지 않다. 가능하다면 증상이 발발하는 시기를 조금 늦추고 싶을 뿐이었다. 공작과의 마찰에서 황제는 루베니오의 편을 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지금 황궁 사업 자금난에 시달리는 중이었으니까.

“최근 제 상선에 좋은 해조류가 들어왔는데 그걸 바치겠습니다.”

루베니오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루베니오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황제는 그에게 너그러웠고 자연스레 내게도 그랬다.

“허허. 기특한 생각이로다. 후작이 직접 거래하는 물건이라면 그 품질을 믿을 만하지. 영애의 충성이 짐의 복이구나.”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소녀는 매우 기뻐요! 라는 의미로 느껴지도록 볼의 근육을 최대한 당겼다. 마주 웃던 황제의 눈알이 비켜 갔을 때에는 하도 올려붙인 뺨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때마침 상선 이야기가 나왔으니…….”

황제의 관심이 그쪽으로 돌아섰다. 루베니오가 일부러 상선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다. 루베니오와 황제는 계속 나라의 경제에 대해 상의하며 그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끼어들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나 필요성은 부족했다.

나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듣지 못한 척을 하며 포크를 기울였다. 쇠가 하얀 접시 위에 소리 없는 빗금을 그렸다. 잘 갈린 금색 포크가 무른 과일 하나를 찌르려는 찰나에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끼익. 무례할 정도로 커다란 소리는 황제가 익애하는 자식에게서 났다.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황제의 용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펴졌다.

“이런. 지루했느냐?”

어린애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건 힘든 일이었다. 아실로는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젓지도 않았다. 그냥 뚱하게 황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노, 노골적이다!’

얼굴에 ‘나 지금 매우 지루함’이라고 쓴 것 같았다. 아실로가 아니면 누가 감히 황제 앞에서 저렇게 굴 수 있을까? 아실로는 황제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황제 또한 그 무례함을 나무라지 않고 물고 빠는 시선으로 막냇자식을 어화둥둥 했다.

“하하. 영애가 들었다는 탐험가의 신비로운 이야기를 황자에게도 들려주지 않겠나?”

“영광입니다.”

나와 아실로는 바로 옆의 테이블로 이동했다.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 작은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시야가 탁 트여 행동을 관찰하기에는 좋았다. 양쪽으로 나뉜 테이블을 보고 이렇게 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야?”

아실로는 커다란 의자 위에 폴짝 뛰어 앉으며 말했다. 바닥에도 안 닿는 짧은 다리로 폴짝거리면서 저렇게 말해 봐야 하나도 안 무서웠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우선 시치미를 뗐다. 기본 전술이었지만 소황제께서는 마땅찮은 기색을 내뿜으며 한껏 야멸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의 비밀이 궁금하면 널 찾으라고 했잖아.”

간담이 서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폈다. 큰 소리는 아니어서 누가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시종들은 몇 걸음 물러나 있었으니까.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요. 저는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없는걸요.”

진실이었다.

‘황태자, 비밀, 황궁, 초대.’

단어로 끊어서 전달한 말을 확대 해석한 건 아실로였다.

“하. 그럼 이제 와 이쪽에 붙겠다는 건가? 값진 걸 알아보는 혜안의 공자라고 말만 많더니.”

값진 걸 알아보는 혜안의 공자. 오글거리고 쓸데없이 길지만 그것 또한 루베니오의 별칭이었다. 그가 산 땅덩어리가 줄줄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고 그가 투자한 상권이 터지면서 붙은 것이었다.

“천하의 루베니오도 별거 아니군.”

아실로가 심술궂은 얼굴로 덧붙였다. 고작 일곱 살짜리의 도발이었다. 이까짓 것에 넘어가기에는 내 나이……는 무슨. 제대로 열 받았다.

‘가족 욕에 나이가 어디 있어! 가족 욕은 반칙인 거 몰라? 어디 한번 유치하게 굴어 봐? 그럼 네 아버지는 뭐가 그렇게 잘났어? 응?’

타다다 불판 위의 옥수수처럼 튀어 오른 말들이 목구멍에서 팝콘이 되어 후두두 터졌다.

“콜록! 흠! 흠!”

그 기침 같은 유치함을 참느라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 기분 나쁜가 보지?”

어휴. 황제만 바로 옆에 없었어도 어른의 인자함을 보여 주는 것인데. 일곱 살이라서 참는다. 황자여서가 아니라.

“황자님은 형님을 좋아하시죠?”

“뭐, 뭐, 뭐?”

그는 말을 세 번이나 더듬으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척 솔직한 반응에 나도 잠깐 놀라고 황제와 루베니오도 돌아봤다.

헤실. 니네이나는 방긋 웃으며 루베니오에게 손을 살짝 흔들었다.

‘나는 몰라요. 쟤 혼자 저래요.’

목숨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팔불출 아버지는 그답게 화답했다. 루베니오는 혼자서만 세상이 싱그럽고 환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풀잎이 한가득 피어올라 흔들리는 환영을 12번쯤 보았을 때 황자님이 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렇게 알기 쉬워서야. 생각보다 순진한 황자님이었다. 제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눈칫밥 먹고 자란 기억이 없을 테니 서투른 구석이 많았다.

“어머나. 발코니에서 황태자 전하를 보고 계신 게 아니었어요? 그때 표정이…… 사랑에 푹 빠진 것 같던걸요?”

거짓말이었다. 어두워서 고개 숙인 황자의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책에서 본 정보로 대략 유추했을 뿐이다. 전부터 마음에 걸렸다. 칼리탄은 왜 아실로를 살려 줬으며 아실로는 왜 칼리탄에게 저항 한 번 하지 않았는지.

“사, 사랑?”

“사랑이 아니면 우애라고 할까요? 아.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동생이 형님을 흠모하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사랑을 노래하는 음유 시인만큼이나 무해하게 속삭였다.

“너…… 생각만큼 멍청하네.”

그래. 멍청한 얼굴 같아 보이…… 이게 아니라, 뭐? 하하. 어린 녀석이 열 받게 하는 건 가이사 못지않았다. 나는 머리 한구석을 사용해 꼬맹이 황자에게 알밤을 놓는 상상을 하며 웃었다.

“황태자랑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을걸.”

“…….”

지그시. 물끄러미. 빤히. 나는 갑자기 태도를 달리해서 심각한 얼굴로 아실로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는데?”

“황자님은 다른 사람 생각이 중요하신가요?”

“뭐?”

“듣다 보니 이상해서요. 꼭 다른 사람 생각을 황자님 생각처럼 말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지금 나한테 내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감히?”

치기 어린 눈동자가 무서울 정도로 싸늘했다. 용의 새끼는 새끼라도 용이었다. 발톱이 다 자라지 못했음에도 분위기를 압도하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내 입꼬리가 스르르 매끄럽게 올라갔다.

“제가 생각나서요.”

“…….”

“저는 어릴 때 한 사람을 무척 미워했어요. 밉다 밉다 하다 보니 나중에는 그게 진짜 미운 건지 그렇게 믿어 와 그런 건지 헷갈리더라고요. 후회했을 때에는 이미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준 후더라고요.”

“…….”

“음. 별 뜻은 없어요. 그냥 그랬다는 이야기니까요.”

정말 별 뜻 없었다. 나는 아실로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으니까. 담백한 표정에서 읽어 낼 건 없었던 듯 아실로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재미없는 이야기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 최악이지.”

자비 없는 말이 송곳처럼 가슴을 콕콕 찔렀다. 성인인 나야 그냥 넘어간다지만 황자 또래의 아이라면 울음을 왕왕 터트릴지도 몰랐다. 못되게 굴면 친구를 못 사귄다고 말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괜한 오지랖일 뿐이니.

“다음에는 전문 이야기꾼을 데리고 올까요?”

“다음?”

재미없는 이야기나 해 놓고 또 올 생각이냐는 얼굴에 양심이 살짝 찔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짙게 웃고 말았다.

“나를 이용한 목적이 뭐지?”

아실로를 이용해 황성에 발을 들인 건 사실이었다. 아실로가 관심 가질 만한 단어를 이용해 황성에 초대하게 했으니까. 황제의 익애를 받는 황자가 황제에게 부탁해 티파티를 열 거라는 것도 내 예상 안이었다. 나는 어린 황자의 부름을 눈속임으로 두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당신의 부름이 가장 의심받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 저를 더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황자님.

“…….”

막힘없이 나온 말에 차를 마시던 아실로가 멈칫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뜻밖이야.”

“무엇이요?”

“그냥 웃고 넘어갈 줄 알았거든. 난 어린애니까.”

다른 어른들이 종종 그랬던 것 같았다. 아이라고 상황을 전혀 모르는 게 아님에도.

“혹시…… ‘애어른’이라는 말 아세요?”

“애…… 뭐?”

일부러 한국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아실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모르세요?”

“…….”

알 리가 없지. 모르는 눈치기는 한데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입술을 깨무는 게 귀여웠다.

‘이럴 때는 또 어린애 같네.’

깨물깨물. 한참 입술을 괴롭히고 나서야 아실로가 턱을 오만하게 치켜들었다.

“설명해 봐.”

빨개진 볼이 귀여워서 웃음이 풉 터질 것 같았으나 필사적으로 참았다. 웃었다가는 저 도도한 황자님께서 길길이 날뛰며 황족을 모욕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동방의 말이에요.”

“이스타국을 말하는 거야? 내가 모르는 이스타의 말은 없어.”

과연. 황자의 선행 학습은 남달랐다. 순간 움찔했던 나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유유히 거짓말을 이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도 잘 모르는 고어(古語)예요. 저도 떠돌이 탐험가에게 들은 말이라…….”

“그래서 무슨 뜻인데.”

“나이는 어려도 어른과 같은 품격이 있다는 뜻이죠.”

“흠…….”

어린애에게 거짓말이나 일삼는 사기꾼에게 홀랑 넘어간 황자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분명 보았다. 아실로의 양 뺨이 씰룩거리는 걸.

“황자님은 충분히 격식 높은 대화를 나눌 만한 상대라는 거죠. 숨김없이.”

“내 말동무가 되기를 청하는 건가?”

“예?”

“황족의 말동무는 황성에서 황족과 같이 생활하지. 너와 난 성별이 다르지만 내 말동무가 황성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구석진 성 하나쯤은 가능할 테니까.”

황족의 말동무. 내가 황성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거라고 착각해서. 그러나 달랐다. 나는 황성에 들를 핑계가 필요한 것이지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음…… 그냥 친구가 아닐까요?”

“친구?”

“여느 집처럼 말이에요.”

“……혈통의 고귀함이 다른데 어떻게 여느 집처럼 지내란 말이지? 황제에게 친구는 존재할 수 없듯 황족도 그렇다. 직계라면 더더욱. 내게 그런 사사로운 건 필요하지 않아.”

일곱 살짜리가 또박또박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눈을 감고 말만 듣는다면 그의 나이를 착각할 것 같았다.

“그럼 놀 줄 모르세요?”

“놀…… 그런 건 필요 없어.”

“모르신다는 거죠?”

“…….”

“생각해 보세요, 황자님. 폐하께서도 가끔 신분을 감추고 잠행을 나가시잖아요. 백성의 삶을 돌아보는 건 중요한 일이랍니다.”

“그딴 걸로?”

아실로는 잔뜩 미심쩍은 얼굴을 하며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카랑거렸다.

“배움에 귀천이 있나요?”

“중요도는 있을 수 있지.”

“사교성을 기르는 건 충분히 중요……”

“아까부터 말을 돌리고 있군.”

아실로가 말을 잘라 내며 표정을 굳혔다.

“나는 이미 대가를 지불했으니 우습게 굴지 말고 네가 내야 할 것을 내놔.”

장난질을 그만하라는 말에 조금 억울해졌다.

“이런 곳에서요?”

사람들 많은 곳에서 황태자의 비밀을 발설해도 정말 괜찮겠어요? 작은 소리로 대화하면 둘만 들을 수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황성이었다. 낮말도 밤말도 다 사람이 들었다. 가이사만큼 청력이 뛰어난 사람이 온실 속 화초로 자란 귀족 아가씨와 어린 황자의 대화에 귀 기울일, 그 작은 확률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했다. 비밀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혼자 알기를 원할 것이고, 비밀을 지키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새어 나가게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

황자의 연보라색 속눈썹이 포옥 가라앉았다. 그는 화를 참는 것처럼 씨근덕거리더니 속았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다음으로 미루는 건 또 내 도움이 필요해서겠지. 계속 공짜로 도와 달라는 건가?”

“재미있는 이야기꾼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해.”

“그럼 또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귀한 영애에게 험한 말까지 해야 하나?”

“…….”

나는 입을 턱 다물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당황스러워서.

‘험한 말을 할 줄은…… 알고?’

황성에서 자란 아실로가 진짜 험한 말이나 제대로 알까 싶었다. 어쨌거나 아이가 화가 났다는 표현이라는 건 알아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조금 억울했다. 말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돌려 말하려는 것뿐이었다. 머리 좋은 황자라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이야기로. 그러나 어린 황제께서 성격이 급하시니 할 수 없었다. 나는 의자를 살짝 밀어 아실로 가까이에 붙어 앉았다.

“귀에 먼지가 묻으셨네요.”

“…….”

기껏 야심 차게 꾸민 말인데 그가 너무도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봐서 살짝 민망할 뻔했다. 어쨌든 착실히 아실로에게 접근한 나는 작은 귓가에 나긋이 속삭였다.

“형은 동생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해요.”

칼리탄이 아실로를 끝내 살려 주는 이유는 아마 그것일 것이다. 칼리탄에게 황제와 황후는 더러운 불륜 남녀이자 원수였으나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실로는 그저 태어났을 뿐이었으니까.

“…….”

나는 눈동자가 살짝 젖어 드는 황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린 황자에게 해를 입힐 악인은 못 되었으나 그렇다고 정을 주는 것도 곤란했다. 귀여운 것에 약한 나는 연보라색 머리칼의 작은 아이에게 조금 홀릴 것 같았으니까.

옆으로 비켜 간 시야에 정원 입구를 서성거리는 갈색 머리의 하녀가 보였다. 메이아였다. 그리고 그녀가 든 바구니에는 내가 구해 오라고 시킨 알레초가 들어 있을 것이다. 원하는 건 구했고 시간도 충분히 끌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다음에도 또 이야기를 들려드려도 될까요?”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협박인가 싶어 살짝 당황스러웠다. 어렵지 않게 획득한 정보였으나 그에게는 충분했을 텐데.

“그때 내가 널 부르지 않았다면 포크로 접시를 밀 생각이었지?”

“…….”

그 꺼림칙한 과일 접시를 말하는 듯했다. 나름 행동을 조심하며 각을 잰 건데 티가 난 모양이었다.

“조심해. 어머니가 널 노리니까.”

아실로는 스치듯 속삭이며 옆으로 지나쳤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 여전히 화사하고 화려한 과일 접시가 보였다. 맹독을 머금은 것일수록 더 아름답게 우짖고 더 화려하게 꾸몄다. 하나 이해가 안 되는 점은 황후의 이유였다.

‘무슨 이득이 있다고 나를 노리지?’

원작에서 황후와 공작은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나는 그들의 교착이 칼리탄과 메이아의 관계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했다. 황후는 칼리탄을 제거하고 싶어 했고 공작은 메이아를 제거하고 싶어 했으니 쌍방의 이해가 맞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공작이야 당연히 날 제거하고 싶어 할 테고 황후도 칼리탄을 제거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나와 칼리탄 사이에는 접점이 없었다. 나는 원작에서의 황후와 공작의 관계가 메이아와 칼리탄 사이의 접점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공작과 황후는 이미 이득을 주고받는 밀접한 사이인 것일까?

죽음. 그 어둡고 매캐한 검은 연기가 발밑에 자욱이 깔렸다. 가이사를 처음 본 날, 암살 마법을 마주한 순간에도 죽음이라는 건 현실감이 살짝 떨어졌다. 그런데 지금은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혹시 만약 내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저 과일을 하나라도 먹었다면 어땠을까 하여서. 또다시 이른 죽음이 그 존재를 드러내며 발목에 차올랐다.

소름이 하나둘, 빠르게 돋아났다. 오돌토돌 닭살이 서늘하게 올라온 팔을 멍하니 바라보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빠드득. 힘이 들어간 손톱이 무언가를 강하게 긁었다. 가이사가 내게 준 유리구슬이었다. 유리구슬의 표면에 공포에 질린 내 얼굴이 비쳤다. 그건 이제 니네이나의 얼굴이 아니라 내 얼굴이었다. 이곳은 게임이나 이야기 따위가 아니라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 * *

혹시 황제 앞에서 실수라도 할까 봐 나는 먼저 황제의 정원을 나왔다. 루베니오는 즉각 나를 따라 나오려 했으나 황제의 손에 붙잡혀 버렸다. 다행이었다. 그에게 이런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슨 일 있었습니까?”

입구 기둥을 쥐고 가만히 숨을 삼키는데 가이사가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죽을 뻔했다고 할까요……?”

“똑바로 말해 보세요. 무슨 일……”

“몸이 아니라 마음이. 문득 무서워서.”

“……누가 당신을 두렵게 했습니까?”

잇새에 눌리고 밟혀 아득바득 뭉개진 음색이 낮게 그르렁거렸다. 침착하지만 사나웠다. 무미건조한 그와 어울리지 않아 웃음이 살짝 났다.

“가이사, 세상 모든 사람이 적으로 보일 때를 알아요? 이 사람도 나를 해칠 것 같고 저 사람도 나를 해칠 것 같고. 전부가 의심스러울 때.”

혹시나 해서 조심했다지만 정말 그 과일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식도가 꿀렁거리며 목을 자꾸만 조여 위까지 아릿할 만큼.

“압니다.”

“……알아요?”

“예. 그럴 때는 방법이 있습니다. 의심스러운 전부를 제거하면 됩니다.”

피식. 웃음이 샜다. 황궁 사람 전부를 죽이기라도 하라는 말일까?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복잡하던 머리가 맑아졌다. 손안에 쥔 유리구슬이 눈에 밟혀 다시 웃을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 것이었다.

“잘 썼어요, 당신의 유리구슬.”

경도가 단단하여 내 손톱 가지고는 흠 하나 나지 않았다.

“가끔 빌려드리겠습니다.”

그의 손이 구슬을 채어 갔는데 잠시 눈을 깜빡였다가 뜬 사이 구슬은 그의 손바닥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사이 숨긴 걸까? 범인은 흉내도 내지 못할 속도였지만 가이사였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것보다, 나 그 말 생각해 봤어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당신을 쓰라는 말. 생각해 보니 내가 뭘 가릴 처지가 아니더라고요.”

그의 말처럼 한두 번 시험하는 용도로 써도 내게는 엄청난 이득인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니까.

“당신이 먼저 한 말이니까 지켜요.”

“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여전한 무미건조함이었다. 그 덤덤한 대답에 눈가가 시큰했다.

“맹세해요. 내가 당신을 쓰게 해 주겠다고.”

“맹세합니다.”

“…….”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계속 이 사람이 ‘타인’일 수 있을까 하여서. 타인이라고 생각하면 미안했고 정을 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무거워서. 무거운 바윗덩이로 찧은 연약한 이파리처럼 즙이 날 것 같았다.

“루베니오가 옵니다.”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가이사가 작게 속삭였다. 나는 서둘러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럼 우선 공작을 유인해 주세요. 나를 죽이러 오도록.”

경악하는 눈동자에 비친 잔흔은 그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다.

* * *

돌아오는 길의 루베니오는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에게 말하지 않고 티파티에 왔고 붙여 둔 눈과 귀에게 요르케와의 소란도 들었을 텐데 조용했다. 그가 먼저 이 주제를 꺼내 들 것 같진 않아서 결국 내가 먼저 화두를 던졌다.

“황제 폐하의 약속에 늦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좀 썼어요. 연약한 저는 겁이 났거든요.”

나는 일을 벌일 때 짜 둔 계획을 차근차근 말해 주려 했다. 루베니오는 이런 조언이 없어도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겠지만 ‘사고 치는 딸’은 좀 곤란하니까.

“먼저 사고를 낸 건 작은아버지 쪽이니 할 말 없을……”

“작은아버지?”

우뚝 멈춰 선 루베니오의 눈동자가 어두웠다. 언뜻 냉소적인 얼굴을 하고 있던 그가 잠시 뒤 표정을 풀고 내게 마저 걸어왔다.

“작든 크든 네게 다른 아버지는 없다.”

사이 안 좋은 이복형제라고는 하나 엄연히 족보에 존재하는 그의 동생이었다. 그러나 이런 건 그냥 정론일 뿐이었다. 더 소중한 걸 위해서라면 거칠 것 없이 내던질 수 있는.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이름이나 작위로.”

요르케나 자작으로 부르라는 말이었다. 남처럼. 루베니오에게는 그들이 이미 남인지도 몰랐다.

“네.”

“착하구나.”

쓰윽. 쓰담쓰담. 그는 아주 어린 아이를 대하듯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토닥토닥 두드리는 손짓을 보아하니 이 행위를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언제까지 토닥이실 건가요?”

“네가 괜찮다면…… 두 번 정도만 더.”

단호했으나 눈치를 보느라 살그미 내뱉은 말이었다. 우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그는 기어코 두 번을 마저 채우고 손을 내려 주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지금쯤 가이사는 내 부탁대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메이아가 가져온 알레초로 내 흔적을 남기는 것. 일부러 내가 실제로 지내는 저택의 위치도 드러나게 해 두었다. 그 정도 미끼는 과감하게 던져 줘야 그들이 꼬일 것이므로. 그러나 루베니오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반대하고 나설 게 뻔했기 때문이다.

“부탁?”

‘어서! 어서!’

반색하며 부탁을 해 달라고 눈빛으로 채근하는 사람을 보니 몰래 숨겨 놓은 사실이 양심에 찔렸다. 지금쯤 공작이 이 알레초의 행방을 찾고 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공작을 유인하여 몰아넣는 것이다. 여우를 사냥하려면 먼저 여우굴을 파야 하는 법이니까. 우선은 루베니오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어야 했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마시고 저랑 같이 있어 주세요.”

루베니오의 입술이 감동이라도 한 듯 바르르 떨렸다. 아, 양심이 또 찔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건 이따 저녁에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러렴.”

푸른 눈동자가 기쁨으로 물들고 그 짙어진 빛을 밤이 다시 가리었다. 그러나 그 짧은 빛을 쫓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또한 불완전했다.

* * *

모두가 잠들고 풀벌레 우는 소리만 이지러지는 새벽녘. 그런 까마득한 밤에도 남아 움직이는 탐욕이 있었다. 컴컴한 저택 안 유일하게 불이 켜진 그곳에서 작은 숨소리를 닮은 은밀한 대화가 흘렀다. 세이아 공작과 그의 차남 요르케 세이아였다.

“알아봤나?”

“예, 아버지. 확실합니다.”

요르케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장남에 비해 신중하지 못한 차남을 잘 아는 공작은 쉽사리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이 일이 실패하면 네게 벌을 줄 것이니 잘 생각해 보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 문제가 하나…….”

망설이던 요르케가 이실직고했다.

“무엇이냐?”

“루베니오와 그 딸이 거주하는 저택을 알아내긴 하였는데…….”

“하였는데?”

“그……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루베니오의 딸과 다니는 하녀가 알레초를 사서 가는 걸 확인하고 그 뒤를 쫓았는데 마차의 행방이 좀 이상합니다. 저택 여러 곳을 순차적으로 들렀는데 안까지는 보이지 않아 어느 곳에서 내린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르케가 공연히 니네이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건 아니었다. 여러 의도가 있었고 그중의 하나가 운 좋게 걸렸다.

“눈속임을 썼단 말이군.”

“예. 총 여섯 곳입니다.”

“확실하겠지?”

“예. 그 뒤에 더 이상 마차가 나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사실 공작은 알레초의 행방을 계속 쫓고 있었다. 그 약재는 니네이나의 치료약에 필히 들어가는 것이었고 대체할 것이 없었다. 알레초를 살 수 있는 재력가가 많지 않아 그 일은 어렵지 않았고, 알레초의 행방을 역추적한다면 니네이나가 지내는 곳이 나올 것이었다. 매번 그 수법이 교묘해 꼬리를 놓쳤지만 이번에는 요르케가 잘해 주었다.

니네이나, 그녀는 아버지처럼 치밀하지 못했다. 물정 모르는 어린 여자아이니 당연했다. 요르케의 행동으로 멀미가 났거나 두통이 생겨 고통을 참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뒤늦게 루베니오가 손을 쓴 것 같지만 꼬리조차 잡기 힘들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섯을 한 번에 치는 게 좋을까, 순차적으로 치는 게 좋을까? 전자라면 놓치지 않을 것이고 후자라면 확실히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암살자를 어디에 몇 명이나 보낼 것인가? 공작은 그 경우의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아버지, 오늘 일은…….”

둘째가 바라는 게 있는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첫째에 비하면 떨어지는 놈이기는 하나 그 역시 공작이 가르친 아들이었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만한 멍청이는 아니었다.

‘선을 넘은 놈을 언제까지 봐줄 필요는 없겠지.’

감히 베풀어 준 은혜도 모르고 주인을 무는 사냥개는 기름에 튀겨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네게 암살대를 내주겠다.”

“저, 정말이십니까?”

“데리고 가 목을 잘라 오너라. 루베니오에게 보낼 선물로.”

“루베니오가 아니라…… 니네이나를요?”

요르케는 조금 실망하는 눈치였다. 요르케는 루베니오의 목숨에 더 흥미가 있어 보였다. 제 형을 죽여야 자신이 후계자가 될 테니. 공작은 그런 아들이 썩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따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래.”

“하지만 바로 죽이기는 아깝지 않습니까? 인질로 두고 괴롭혀 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요르케는 고문 서적을 즐겨 읽는 고문광이었다. 그는 오늘 감히 자신을 모욕한 니네이나를 괴롭혀 줄 생각에 들뜬 듯 안광을 빛냈다. 히죽 웃는 입꼬리가 피를 마신 이리처럼 야비했다.

“그건 네 고문을 견딜 몸이 못 돼. 손발톱이라도 하나 뽑았다가는 그 자리에서 절명할 거다. 세상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곱게 자랐으니.”

“그렇게 약한 장난감이라니! 아직 가져 본 적 없습니다. 제게 주십시오! 잘 타일러 가르치겠습니다!”

“시간을 끌다가 일을 그르칠 셈이냐!”

공작의 노성에 비로소 요르케가 잠잠해졌다. 그는 겁먹은 아들에게 다가가 그 귓가에 아들이 가장 원하는 달콤한 말을 퍼부었다.

“이런 방법은 괜찮겠군. 맹독을 바른 가시 검으로 그 몸을 헤집는 게 어떻겠느냐? 내장을 질질 흘리며 죽도록. 하는 김에 그 반반한 낯짝을 갈기갈기 찢어 주는 것도 좋겠지. 입에 가시 검을 처넣고 죽은 꼴을 보면 루베니오가 얼마나 놀라겠느냐?”

“아아…… 아버지…….”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지 요르케는 손발을 부들부들 떨며 기뻐했다. 요르케는 루베니오와 다르게 자립심이 거의 없었다. 맹목적으로 공작을 따르는 꼭두각시.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해결해 놓는 루베니오와는 다르게 하나하나 알려 줘야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그 점이 더 매력적일 때도 있었다.

“어린것을 죽여야 짐승이 가장 비통해하는 법이지.”

“잔인할수록 그 슬픔은 커져 폐인이 될 겁니다!”

“이제야 내 아들답구나.”

공작은 환희하는 아들의 턱을 개의 턱주가리 쓰다듬듯 툭툭 매만졌다.

* * *

“……라고 했다는군요.”

대단히 충격적인 고백을 한 뒤 잠에 든 니네이나 대신 가이사가 설명을 맡았다. 가이사가 공작에게 심어 둔 정령의 말을 다 번역했을 때 루베니오의 얼굴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평소 가이사가 부리는 모습만 봐도 알겠지만 정령은 인간의 말을 다 알아들었다. 그 체계가 생각보다 정교해서 공작과 요르케의 말은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루베니오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공포가 아닌 분노로 창백했다.

“어떻게 이 사실을 나에게 말하지 않고……!”

루베니오의 언성이 높아지자 가이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다급하게 눈짓했다.

“니네이나가 깨겠습니다.”

겨우 곤히 잠들었는데 또 깨어나 자지 않겠다고 고집이라도 부리면 곤란했다. 가이사는 갈수록 니네이나에게 약해져서 그녀의 의지를 거스르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녀의 몸은 조금이라도 소홀히 관리하면 금방 병이 났다. 그런데 니네이나는 계속 그 약한 몸을 붙잡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니 그는 골치가 아팠다. 가이사는 니네이나가 깨질까 부러질까 조심조심하며 제대로 만지지도 못한 채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잠이 깰까 걱정하는 시선이 그녀의 얼굴과 눈가를 분주히 더듬었다. 루베니오의 부푼 가슴이 살짝 가라앉았다. 가이사는 그가 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모나.”

실체화하지 않아 눈에 보이지 않던 정령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이만 돌아가.”

모나는 헐레벌떡 달려와 긴 말을 읊었으나 칭찬 한 번 듣지 못했다.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을 했으나 곧 파란 몸체는 공기에 잠겨 물거품이 되었다.

그때, 팔 하나가 쑥 뻗어 오더니 털썩 떨어졌다.

“뭐, 뭐래요? 다 내 말대로…… 됐……죠?”

깜빡 졸고 있던 니네이나였다.

‘또 깼군.’

가이사는 곧장 입술을 비집을 것 같은 한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봤다. 존 탓에 험한 말을 듣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또한 이왕이면 계속 졸아 줬으면 했다.

“……졸든지 말하든지 하나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졸지 말고 말하지 말고 제발 그냥 푹 쉬라는 뜻이었다. 알아듣지 못한 니네이나는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으응. 저 멀쩡해요. 이런 중요한 순간에 잠 따위에 질 수는 없어요. 잠은 나중에도 충분…….”

음냐음냐. 입술을 몇 번 다신 그녀의 눈은 곱게 감겨 있었다.

“먹는 꿈이라도 꾸는 겁니까?”

가이사는 아주 조용히 물었다.

“…….”

이미 잠들었는지 그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가이사는 그녀의 코 가까이에 손가락을 대어 숨을 잘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의 시선이 쓱싹쓱싹 그녀를 핥았다. 오늘도 내 유리구슬은 흠 하나 가지 않고 무사하군, 이라는 의미의 흡족함이 입가에 작게 어렸다. 이 상태로 보전하여 계속 곁에 둘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좀 더 이 평화로움을 즐기고 싶은데 아까부터 뺨이 꽤 따가웠다. 색색 살갗에 부딪치는 숨결이 달콤하여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이대로라면 뒤에서 자신을 쏘아보는 아비 짐승에게 물릴 것 같았다. 가이사는 이불만 살짝 올려 니네이나를 덮어 주고 돌아섰다.

“언제부터 이 사실을 숨겼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싸늘한 눈길이 날아왔다. 니네이나는 결코 상상도 못 할 루베니오의 참모습이었다.

“공작에게 정령을 붙여 두었던 것 말입니까?”

“그래.”

“이미 짐작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황궁 무도회 때부터 생긴 사실을 왜 지금껏 내게 말하지 않았지?”

파티장 뒤의 발코니에 둘만 남았을 때 그녀는 가이사에게 정령을 공작에게 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그녀가 가이사의 입을 통해 공작을 감시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루베니오의 눈을 피하는 것도 쉬웠다. 두 사람은 원래 붙어 지내는 일이 잦았고 루베니오는 위화감을 감지하지 못했다. 오직 가이사만이 니네이나를 새롭게 보았다. 그녀는 꼭 모든 걸 예상한 사람처럼 굴었다. 정확히는 미래를 아는 사람 같았다. 공작이 알레초를 역추적하여 이 집을 알아내리라는 것도, 요르케가 접근한 이유도, 어떻게 하면 공작의 암살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지도.

공작의 암살대. 그녀가 이런 계획을 세운 주된 목적이었다. 귀찮은 암살대부터 제거해야 공작을 치기 쉽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조심성이 많은 공작은 꼬리에 꼬리를 물리는 방식으로 암살대의 아지트를 감췄고 웬만해서는 그 꼬리 끝도 잡혀 주지 않았다.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을 때면 늘 잡혀도 상관없는 버리는 패만 보내기 때문이었다. 암살대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그 아지트를 알아내야 하는데 그곳을 아는 이를 보내지 않으니 공작을 직접 털지 않는 한은 오리무중이었다. 알레초를 실은 마차가 여섯 개나 되는 저택을 돌게 한 것도 그래서였다. 최대한 많은 수의 암살자를 한 번에 처리해 버리기 위해서. 하여 공작의 피를 말리고 그 목에 단검을 드리우기 위해서. 암살대를 불러들일 수 있는 건 오직 공작뿐이라는 점을 그녀가 보기 좋게 이용했고 공작은 그녀의 실을 따라 움직이는 마리오네트가 되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니네이나의 사고방식이었다. 공작위 후계자의 유일한 자식이라고는 하나 몸이 아픈 사람이었다. 어찌 교육은 받았다고는 해도 말 그대로 곱게 큰 사람인데 세운 계획을 하나씩 차근차근 끌어가는 솜씨가 풋내기 같지 않았다. 루베니오가 화를 내는 것도 그래서였다. 아무래도 아비 짐승께서는 이 모든 일의 배후로 가이사를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가이사는 그 나름대로 억울했다. 니네이나의 목숨을 노리는 공작이 슬슬 거슬리기는 했으나 바로 해치우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공작을 제거한 루베니오가 다음으로 신경 쓸 상대는 그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그도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감정을 루베니오가 이해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 공감하지 못한다. 당연히 이해도 받을 수 없고 알게 되는 순간 길길이 날뛰며 내쫓을 기회를 호시탐탐 엿볼 것이다. 루베니오는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적인데 경악스러울 만큼 눈치도 빨랐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1급 경보가 시끄럽게 삑삑 울었다. 가이사는 말을 신중히 골라야 했다.

“그녀의…… 부탁이었습니다.”

“그럼 다시 묻지. 너는 언제부터 내 아이의 부탁 같은 걸 들어주게 되었나?”

‘내 아이’라고, 루베니오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그 표정이 엄청나게 흉흉해서 니네이나가 깨어 있었다면 담이 큰 그녀도 겁을 먹었을 것이다.

“처음부터입니다. 당신의 아이니까요.”

가이사의 입술은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그는 바싹 마른 입으로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고 그 묘한 뉘앙스에 루베니오도 움찔하고 말았다.

“뭐……?”

가이사는 숨을 한차례 삼켰다.

─제 아버지도?

─저를 왜 자꾸 루베니오와 엮는지 모르겠군요. 다른 이들과 똑같이 역겹습니다.

가이사는 언젠가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말로 다 표현 못 할 만큼 역겹고 불쾌하여 속까지 느글거렸으나 저 덫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당신의 아이라서 그랬습니다.”

당신의 아이! 아이! 아이! 당신 아이 맞는다고! 누가 뺏는대? 건조하고 투박해서 그렇지 의미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의미지?”

“제가 당신을……”

─똑같이 역겹습니다.

곧장 떠오르는 말이 입 밖으로 여행할 것 같아서 그는 즉각 입을 다물었다.

“존중……합니다.”

차마 친애한다고는 못 하고 최대한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일명 ‘나는 당신 딸이 아니라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 작전이었다. 가이사에게도 루베니오에게도 힘겹고 역겨운 작전에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

“…….”

“미쳤나?”

“안타깝게도 제정신입니다.”

‘속이 안 좋군.’

‘나도 역겹습니다.’

씁쓰레해진 속내가 차디찬 바람이 되어 휭 불어왔다. 날것의 냄새를 품고.

일그러져 있던 가이사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일면에는 살았다는 기색이 언뜻 보였다.

“움직입니다.”

저택 주변으로 수상한 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공작에게 흘린 정보에는 이 저택도 포함되어 있었다. 니네이나가 루베니오에게 했던 부탁 중 하나였다. 여섯 개의 저택 중 진짜를 포함할 것. 완벽히 속여 넘기기 위해서는 진짜를 일부는 섞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래야 저들이 니네이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신들의 생각이 맞았다고 안심하며 불나방이 되어 달려들 테니까. 6분의 1로 나뉘어 위험 부담이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그들이 니네이나 곁을 서성거리는 건 루베니오의 신경을 자극했다.

“일단…… 저것들부터 처리하지.”

“예.”

활짝 열린 창문으로 스며들던 달밤의 음산한 그림자가 꼬챙이에 엮이듯 하나둘 찔려 사라졌다.

“으아아아악!”

가이사에게는 극적인 덫 탈출과 다름없는 밤의 시작이었다. 그의 검은 군더더기 없이 움직였다. 멀리 도망가려는 것은 다리를 잘라 시간을 벌고 가로막는 것은 머리를 베어 넘겼다. 하나둘 떨어지는 시체에서 비린내가 났다. 불쾌했으나 그는 다시 달려갔다. 죽이고 제거해야 조금이라도 그녀의 불안감이 줄어들 테니까.

그는 소중한 유리구슬의 몸도 마음도 편안하기를 바랐다. 두려움에 떠는 창백한 얼굴보다는 종알거리는 반짝임이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서. 그가 처음 본 아름다운 인간이라서.

* * *

어둠이 흘러간 자리에는 다시 태양이 떠올랐다. 간밤의 흔적을 모두 지우는 찬란한 아침이었다.

“으음…….”

쿨쿨 한참 잘 자고 있던 나는 눈부심을 느끼고 깼다. 따스한 아침의 햇살을 반기는 편이나 잠을 깨는 건 원하지 않았다.

‘햇살 때문에 눈부시잖아. 일어나서 커튼을 다시 치고 잘까? 그냥 참고 잘…… 햇살?’

눈이 번쩍 떠졌다.

“자,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가 얼마나 잔 거지?”

갓난아기도 아니고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잠에 지다니! 수험생 시절 하룻밤 새우는 것 정도는 끄떡없던 팔팔한 몸이 아니라지만 분명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버티던 중이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일어나셨어요, 주인님?”

가냘픈 복근으로 낑낑거리며 일어나는 소란을 들었는지 하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가이사는?”

“두 분 모두 저택에 계세요. 주인님께서 찾아뵙기를 바란다고 말씀 올릴까요?”

“어? 응…….”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막내인 메이아가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다.

‘이상하다? 하루가 지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꼭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공작이 중간에 암살대를 보내는 걸 취소한 건가?’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모르겠다.

“푹 주무셨나 봐요?”

“……그래.”

근심과 걱정이 많았는데 어떻게 잘 자기는 했다. 일만 벌여 놓고 수습은 다른 사람에게 맡긴 꼴이라 낯이 홧홧했다.

“원래도 좋으시지만 오늘따라 피부가 더 촉촉한 것 같아요.”

그런 주인의 마음도 모르고 내 피부는 사라의 말처럼 반질반질했다. 한낮이 되도록 깨어나지 않고 푹 잔 덕이었다. 어제 이것저것 머리를 굴리고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피곤했으니까. 이 유리 몸으로 버티기에는 극심히.

“후…….”

그러나 그 고민도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자 뿌연 연기처럼 날아올랐다. 온몸이 나른해지고 노곤하게 풀렸다. 방금 일어났는데 활동은 아무것도 못 한 채 다시 졸리다니.

‘이번에는 잠들 수 없어! 생각! 생각을 정리…….’

두 눈을 부릅뜨고 버티려던 나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 * *

하녀들은 익숙한 듯 움직이며 니네이나의 몸을 쪼물거렸다.

“잠드셨습니다.”

얼굴 주위를 맴도는 손 그림자에도 백금색 속눈썹은 얌전히 감겨 있었다.

“양치.”

사라의 구호에 맞추어 하녀들이 움직였다. 쓱싹쓱싹. 숙련도 max의 손짓에 하얀 이가 뽀득뽀득 빛났다.

“머리.”

결이 좋은 머리칼에 장미 향이 나는 향유가 듬뿍 뿌려졌다.

“몸.”

여러 개의 손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몸 하나를 쪼물거리는 건 꿈에 나올까 무서운 풍경이었지만 니네이나는 그 와중에도 잘 잤다.

“세수.”

이번에는 사라가 직접 나섰다. 부드러운 손짓으로 눈곱을 뽁뽁 떼어 내고 피부를 문질러 닦자 ‘온몸에서 빛이 나요. 아침의 주인님.’ 버전이 완성되었다.

“침대로 모셔서 말리자.”

“예! 하녀장님!”

이제야 겨우 기본적인 준비를 끝냈다. 사라는 하녀들을 지휘하며 부지런을 떨었다.

“오늘은 아가씨께서 공작가에 입성하시는 중요한 날이다. 준비에 특히 소홀함이 없어야 해!”

“예!”

니네이나가 이 저택에서 맞는 아침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하녀들은 니네이나의 새로운 아침이 더 편안해지기를 바라며 꼼꼼히 손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잠시 뒤, 니네이나는 침대에서 다시 눈을 떴다.

* * *

“……또 여기?”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몸 상태가 달랐다. 방금 로션을 바른 듯 피부가 적당한 수분과 유분을 머금어 촉촉했고 입안에서는 상쾌한 민트 향이 폴폴 올라왔다. 씻기고 양치하는 와중에 한 번도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좌절감이 들었다.

‘어떻게 되어 먹은 거야, 이 몸뚱이……? 감각이라는 게 없는 거니?’

이게 다 단순히 빠르게 움직이는 것에 국한되지 않은 하녀들의 스킬 때문이었지만 이럴 때의 나는 종종 기분이 이상해졌다.

“일어나셨어요, 주인님?”

아까도 들은 말이었다.

“좋은 오후예요!”

“뭐? 벌써 오후라고?”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하녀들의 말을 흘려듣다가 헐레벌떡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자 과연 하늘 가운데에 뜬 해가 보였다.

“……아버지는? 가이사는?”

말하고 나니 또 데자뷔를 느꼈다.

‘이게 무슨 지옥의 루프물(특정 시간대가 반복되는 상황에 처한 작품)도 아니고.’

자고 밥만 먹어도 시간이 금방 사라졌다.

“곧 오실 거예요. 다시 들르겠다고 하셨거든요.”

“오셨는데 난 계속 자고 있었던 거야?”

“네.”

“깨우…… 아니야.”

내가 깨우라고 했어도 그들이 깨우지 말라고 했을 게 뻔했다. 괜스레 초조해진 나는 창가를 두 발짝 정도 서성거렸다. 그때 타이밍 좋게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먼저 보인 건 가이사였다.

“편안하게 주무……”

“가이사!”

나는 호다다다 달려갔다. 속 터지게 느렸지만 나름의 최대 속력이었다. 가이사가 오묘한 얼굴로 나를 지켜봤다.

‘달려오는 건가? 저게?’

대충 그런 의미인 것 같았으나 지금의 나에게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어요? 암살자가 안 왔나요?”

“왔습니다.”

“헉!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해요? 암살자들은 잡았나요? 아지트의 위치는 불게 했어요? 빨리 불게 한 다음에 아지트를 바로 쳐야 놓치지 않고 암살대를 완전히 무너트릴 수 있는데!”

“숨 쉬면서 말하셔도 됩니다.”

“허억…… 허억…….”

잠깐 뛰고 말을 쏟아 낸 것만으로 숨이 가빴다. 그는 내가 호흡을 다 고르도록 기다린 후에 대답했다.

“여섯 곳 모두 사병을 배치해 뒀습니다. 그곳에 온 암살자는 대부분 잡았고 도망치는 놈들을 추적하여 아지트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본거지가 있더군요.”

“그래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공작이 암살대를 이용해 죽이는 건 주로 그의 정적들이었다. 공작이 지시한 암살은 황도 내에서 빈번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본거지도 황성과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평범한 주점으로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지하 깊숙이 연결된 통로가 있더군요.”

“그거 참…….”

평범한 주점의 지하가 본거지라니. 암살 길드의 클리셰라면 클리셰일 것이다.

“그들은 정리했습니다.”

“아…….”

정리. 그 단어가 묘하게 오싹했다. 나는 솜털까지 곤두선 목 뒤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사람이 죽었다. 내가 죽이자고 계획했다. 내 계획으로 사람이 죽었다.

‘그게 뭐?’

침전했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황궁에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이건 이제 내게 현실이 되었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인데 가만히 앉아 당할 멍청이가 어디 있을까? 최소한 나는 절대 아니었다. 이대로 가라앉아 있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잘 해결했네요. 다행이에요.”

“왜……?”

“네? 왜라니요?”

“아니요. 아닙니다.”

커다란 손 하나가 주저하며 허공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궁금하게. 왜 하려다가 말아요?”

“그것보다 루베니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부탁이라고 들었는데.”

그는 문을 활짝 열며 나를 돌아봤다.

“…….”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열린 문 너머로 걸어갔다. 공작의 암살대가 사라졌다. 그는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잊지 말아야 했다. 이빨 없는 호랑이에게는 숨겨 둔 발톱이 남아 있다는 것을.

* * *

가이사와 메이아가 저택의 정보를 다 뿌려 수습할 수 없게 만든 뒤에야 나는 루베니오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다. 그리고 잘 시간을 훌쩍 넘겨 반쯤 조는 나에게 차마 화내지 못하는 루베니오에게 뻔뻔하게 두 번째 부탁을 했다. 원래 우리가 있어야 할 공작 가의 저택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것.

“저기 계십니다.”

루베니오는 저택 정문 앞에 있었다. 그의 옆에는 거대한 흑마 하나와 마차 하나가 있었는데 출발 준비를 해 놓은 것 같았다. 그는 생각에 푹 잠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심사가 꽤나 복잡해 보였다. 발소리를 죽일 능력은 없어서 그냥 걸어갔더니 그가 먼저 눈치채고 돌아보았다.

“잘 잤니?”

“네. 간밤에 소란스럽지 않았어요? 너무 푹 자서 얼떨떨해요.”

“번잡스럽게 구는 것들이 많아 걱정이었는데 바람이 창문을 타고 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구나.”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어려운 부탁을 해서일까? 그게 아니면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서일까? 그 얼굴을 뻔뻔하게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따사로운 햇살에 적응한 몸은 작은 바람 한 자락에도 슬피 울 것 같았다.

“저 그네는 떼어 가야겠다.”

한참 말이 없던 루베니오가 먼저 입을 뗐다. 그가 유독 아끼던 하얀 그네가 보였다. 그는 내가 저곳에 앉아 있는 걸 좋아했다.

“겨울이 오면 추울 테니 두꺼운 털가죽을 깔고.”

“눈을 소복소복 맞으며 그네를 타도 즐겁겠어요. 앙상한 가지 위에 눈꽃이 쌓이면 꽤 예쁘니까요.”

“그곳에서도 원하는 건 뭐든 해도 좋다.”

그곳이라고 하면 어디를 말하는 걸까? 그가 나고 자란 저택? 로페니아가 죽은 그곳? 내가 잠시 머무르고 쫓겨나야 했던 그 땅? 루베니오가 어떤 마음으로 이 집을 골랐는지 알면서도 다시 공작저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에게는 좋은 기억보다 아픈 기억이 더 많을 곳이었다. 아내를 잃고 딸을 보내고.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끝을 맞이하기로 되었던 그 땅.

루베니오에게는 결코 좋을 수 없는 그 공간을 바라며 눈이 부시지만 또 그만큼 무거운 왕관을 내민 건 나였다. 죄책감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돌아가야 했다. 왕도를 잃은 왕은 그 정통성을 잃어 패배자로 불리기 마련이었으니까. 원작과는 다르게 요르케 같은 놈이 날뛰는 것 또한 그런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공작의 암살대를 제거했다면 거주지를 드러낼 때도 되었다. 언제까지 숨어 다닐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얻는 것이 있으니까. 이제 와 그만두자는 말은 못 한다. 하지 않을 것이다.

“세이아 저택으로 돌아가나요?”

“원하는 것이라면.”

다정한 얼굴에 표정은 거의 없었다. 애정 어린 감정에 원망이나 지탄은 묻어 있지 않아 가슴에 뜨거운 물이 왈칵 샘솟았다.

“원해요.”

“……그래.”

루베니오의 손이 옆구리 쪽으로 다가와 몸을 훌쩍 들었다.

“어?”

안장에 엉덩이가 닿았다.

“높아서 불편한가?”

그는 고개를 갸웃대면서도 내려 주려 하지는 않았다.

‘거리가 멀지 않고 말을 모는 사람이 따로 있다지만 이 몸이 승마를 버틸 수 있으려나?’

그가 마차가 아닌 말을 선택한 이유는 전혀 짐작 가지 않았다. 단지 그가 양보해 준 만큼 나도 맞춰 주고 싶었다.

“혹시 그런 속담 들어 보셨어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거.”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지?”

“전에 말씀드렸죠? 여행가의 이야기를 좋아했다고.”

“괜한 걱정을 했군. 네가 어디 가서 눈치 볼 애는 아닌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말 위로 훌쩍 올라탔다. 잠깐 흔들렸던 말은 곧 안정적으로 자세를 잡고 출발했다.

“제 걱정을 하신 거예요?”

“안 할 수는 없었지.”

“…….”

“조금이었다.”

단호하나 간곡하게 그는 다시금 속삭였다.

“저 마차는 뭐예요?”

“가다가 힘이 들지도 모르니까. 그럼 마차에 옮겨 타도 돼.”

“말에 태운 이유가 따로 있어요?”

“글쎄…… 굳이 말하자면 로망이겠군.”

“로망?”

“한 번쯤 널 이렇게 태워 보고 싶었다.”

“…….”

“고삐를 같이 붙잡고 산들바람을 맞으며 걷고 싶었지. 도시의 건조한 소음도 풀잎처럼 느껴질 테니까.”

루베니오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문과였을 게 틀림없었다.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는 걸 보니.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앞에 보이는 도시의 정경도 그의 말처럼 마냥 삭막한 게 아니었고. 다각다각. 눈을 감고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그런다고 말발굽 소리가 수풀 소리로 변하지는 않았지만 눈을 감고 맞는 바람이 상쾌하긴 했다.

공기가 서늘해질 때면 뜨거운 체온이 다가와 시린 어깨를 감쌌다. 열이 높은 루베니오가 내뿜는 체온이 붉은 난로의 빛처럼 타올랐다. 이 길은 여행보다는 행군을 닮았다. 조금의 틈도 없이 기사들이 빽빽하게 주위를 에워쌌고 사람들은 이게 뭔가 하며 창밖을 내다봤다. 내가 거리를 구경할 수 있도록 앞만 조금 트여 있었다. 과연 신중한 루베니오. 매우 몹시 엄청나게 신중했다. 수십에 이르는 기사들과 루베니오를 번갈아 바라보자 그가 머쓱한 얼굴을 했다.

“금방 도착할 거야.”

그리고 정말 금방이었다.

* * *

“정문을 열어라!”

큰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푸른 지붕이 보였다. 자유의 하얀 새와 고결의 푸른 장미가 뒤엉킨 세이아의 문장을 그대로 표현한 대저택이었다.

덜컹. 대문은 두꺼운 철문 소리를 내며 열렸다. 겉으로 보아서는 새하얀 상아를 깎아 만든 것 같은데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입구를 지나치는데 안쪽에 사람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루베니오!”

「주의! 세이아 저택의 보스 몹이 등장하였습니다!」

깜짝이야! 이런 알림이 울릴 것 같은 풍경이 닥쳐들어 간담이 서늘해졌다. 들어가자마자 최종 보스가 등장하다니.

‘보스 몹답게 표정도 엄청난…… 응?’

그런데 생각과는 좀 달랐다.

“니네이나!”

달려온 공작이 말고삐를 덥석 붙잡으며 소리쳤다. 순간 잘못 들었나 의심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계획이 엉망이 된 걸 알고 분노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소식 들었다. 입을 찢어 놔도 시원치 않을 불한당이 아니냐! 그래, 어디 다친 곳은 없고?”

공작은 아끼는 손녀를 걱정하는 할아버지처럼 굴었다.

‘이게 대체 뭐지?’

나는 그의 완벽한 연기에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아이가 놀라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옮겨 왔습니다.”

훌쩍 뛰어내린 루베니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집보다 좋은 환경이 어디 있겠느냐? 잘 왔다.”

공작은 옳다며 맞장구쳤다.

‘당신 누구야? 공작 아니지?’

나는 무심코 뿜을 뻔한 속내를 삼킨 뒤에야 속사정을 이해했다. 그는 이대로 무너질 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손녀가 해를 입을 뻔하고 돌아왔는데 무사하다는 것에 화를 내며 마중하는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본인이 범인이어도 뻔히 의심 살 행동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뻔뻔함이 보였다.

‘태세 전환이 박쥐급이네. 화가 많이 났을 텐데…….’

자상하게 웃는 얼굴이 정말 그럴듯해서 소름이 잔뜩 돋았다.

“이리 오렴.”

혼란스러워하는 나와는 다르게 루베니오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저게 바로 포커페이스구나 하며 감탄하는 순간 몸이 땅으로 안전하게 내려졌다. 루베니오가 안심이라는 듯 내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 주었다. 커다란 손이 그림자를 만들어 뜨거운 해가 범접하지 못했다.

“이 일은 폐하께 고해 제대로 그 진상을 조사할 생각입니다.”

루베니오는 서늘하게 응수했으나 나는 눈치챘다. 뭐, 이 정도 문제쯤은 예상했던 바였다. 공작은 아마 증거를 남겨 두지 않았을 터였다. 꼬리 자르기를 빠르게 했거나.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고작 이 한 번으로 공작을 완벽히 제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기세를 꺾어 저런 식으로 나오도록 한 것만 해도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빙긋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목 바로 밑에 검이 찔러 들어오는 착각이 일었지만 말이다.

“아비 된 도리로 아들의 걱정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지. 내가 돕겠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면 맡겼지 공작은 아니었다. 완전 범죄는 어려웠다. 그 와중에 깊이 숨겨 둔 증거를 빼돌리려 들 게 뻔했다.

“이 일은 제가 해결합니다.”

루베니오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자 공작의 뺨이 움푹 스산하게 파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착각?”

“그럴 필요도 없다. 진범은 이미 잡았으니.”

공작이 음험한 속내를 감추며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은 또 순식간에 바뀌었다. 야차 같은 얼굴을 한 그가 벼락처럼 소리쳤다.

“끌고 와!”

일그러진 낯빛이 증오와 분노로 번뜩거리며 그제야 벌건 속내를 드러냈다. 서슬이 퍼런 눈동자에 숨이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입꼬리를 비틀어 오래도록 나를 쏘아본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인 둘이 하얀 천으로 휘감은 것을 끌고 있었다. 그것은 바닥에 질질 끌려왔으나 살아 있는 듯 사지를 꿈틀대었다. 그것만으로도 끔찍한데 하얀 천의 반 이상이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천에 가리어서도 충분히 잔혹한 광경에 내가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공작이 직접 그 천을 들추었다.

“윽!”

목구멍에서 새된 소리가 터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내 앞을 누군가 등으로 막았으나 충격적인 장면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았다. 터진 피를 한가득 머금은 벌건 입. 하얀 치아도 온통 피범벅이라 짐승을 잡아먹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눈알 하나가 없고 혀도 없었다. 뻥 뚫려 허전한 눈과 터질 것처럼 부풀어 그 역시 제대로 된 꼴이 아닌 반대쪽 눈이 외눈박이 마수 같았다. 손가락 열 개가 다 잘려 겨우 남은 한 마디가 거미의 다리처럼 꿈틀거렸고 여기저기 찢기고 터진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러 흙바닥을 적셨다. 자욱이 번지는 비릿한 피 냄새에 속이 울렁거리고 헛구역질이 솟았다.

“속이 안 좋으면 그냥 토해도 됩니다.”

뒤에 서 있던 가이사가 나를 살짝 붙잡아 당기며 말했다. 여차하면 안아 들어 자리를 옮기겠다는 태도였다.

“고운 화원에서 자란 내 어린 손녀가 보기에는 험한 광경인 걸 잊었구나.”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맑은 하늘과 어울리지 않게 기괴했다.

“걱정 마라. 무도한 놈은 이 할아버지가 네 대신 혼쭐을 내 주마.”

하인에게서 채찍을 받아 든 공작이 그것을 휘둘렀다.

“우으! 우으으!”

혀를 잘린 입이 벙긋거리며 무어라 호소했지만 채찍은 가차 없이 휘둘러져 그의 뺨을 쳤다.

“감히 제 형을 질투해서 조카를 죽이려 들어? 루베니오가 잘못되면 네가 후계자가 될 줄 알았더냐!”

쫘악! 쫘악! 보기 괴로운 광경이었지만 나는 말리려 드는 가이사를 비집어 그 꼴을 지켜봤다. 날아오르는 채찍 끝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낯익었다. 뾰족한 날붙이 몇 개를 달아 인간의 살점을 찢는 채찍. 요르케를 처음 봤을 때 그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공작은 본래 요르케의 것으로 요르케를 벌했다.

“집안을 우습게 만들어? 짐승을 잘못 거둔 탓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감히! 감히!”

내 눈에는 공작이 그런 식으로 분풀이를 하는 걸로 보였다. 자기 죄를 아들에게 뒤집어씌우고 그 분노를 그런 식으로 표출했다. 이건 요르케에게 향하는 벌이 아니었다. 나와 루베니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번듯한 공작가의 차남도 수장인 그의 심기를 거스른 이상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경고.

“할아버지.”

휘날리는 피와 돼지 멱따는 비명이 겨우 멈췄다.

“증거는 찾으셨나요?”

나는 말간 눈을 들어 공작을 마주 보며 또박또박 물었다.

“증거?”

“저 사람이 저를 죽이려 했다는 증거요. 귀족은 심판 없이 벌하지 않는다고 배웠어요.”

“물론 그렇지만 집안 관리는 내 몫이지. 이 정도의 작은 소란이 폐하께 누가 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내 목숨을 위협한 일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사소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기실 실제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갓 성년을 넘긴 아무 힘도 없는 어린애일 테니까. 아버지가 루베니오가 아니었다면, 뒤에 ‘세이아’라는 성을 달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정도는 더했겠지. 오직 혼자였다면 공작의 말처럼 하잘것없는 목숨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니네이나 세이아였다. 누구도 결코 무시 못 할 루베니오의 익애를 한 몸에 받는.

“그러니까 저 사람이 절 죽이려 했다는 증거가 있다는 뜻이겠죠?”

“…….”

생긋 웃는 말에 공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제야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듯했다.

“아! 제가 너무 당연한 것을 여쭸네요. 폐하도 지키시는 나라의 법을 공신 가문의 수장인 할아버지께서 지키지 않으실 리 없지요. 한때는 저 사람도 할아버지의 아들이었을 텐데.”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꼬리 자르기를 한 거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정식 재판에서 요르케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할 시 공작은 무고한 아들을 핍박한 게 되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증거는 이미 충분하다. 요르케가 암살대를 몰래 키워 왔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중죄야. 즉결 심판도 당연하지.”

입꼬리가 푸들푸들 떨리긴 했지만 그건 금이 간 공작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증거 조작은 진작 문제없이 처리한 뒤 요르케를 보낸 게 분명했다. 이 일로 공작까지 쳐 내는 건 이미 포기했던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악착같이 가져갈 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혹시 할아버지가 실수……하시는 건 아닐까 해서 무척 걱정되었어요.”

“괜한 걱정을 했구나.”

“네. 이해해 주실 거죠? 다 할아버지를 걱정해서 그랬어요.”

“물론 다 이해한다.”

한없이 자상한 얼굴을 꾸민 백발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저 꼴을 더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더니 지금은 어서 안 꺼지고 뭐 하냐는 눈치였다.

“그런데…….”

나는 시간을 더 끌었다. 공작의 얼굴이 짜증으로 살짝 험상궂어졌다.

“저도 직접 보고 싶어요.”

“무엇을 보고 싶단 말이지?”

“증거요. 눈으로 볼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말씀이시잖아요.”

“…….”

“이미 가지고 계신 거 저도 좀 봐도 되죠?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힘드세요?”

“그럴 리가. 곧 내주마.”

뿌드득 이 가는 소리가 사나웠다. 나이도 많이 드셨는데 저러다가 이 다 부러지시겠다. 아끼셔야지. 아직 할 말 더 남았는데.

“저…….”

다시 말을 길게 끌자 공작이 들고 있던 채찍을 내팽개치며 뒤돌아봤다. 이쪽으로 날아오는 채찍을 보아 일부러 그런 것 같았다. 다행히 비켜 갔지만 휙 울리는 바람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꺄아! 제, 제가 귀찮게 굴어 화나신 거예요?”

겁먹어 오들오들 떨리는 목소리를 내자 그가 아차 하는 게 보였다.

“실수였다. 뭐든 말해 보거라.”

공작은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왔는지 간신히 말투만 상냥한 말을 뱉어 냈다. 얼굴까지는 이제 어떻게 더 안 되는 듯했다.

“오늘 안으로 가능하실까요?”

나는 여우처럼 살랑살랑 웃으며 공작을 농락했다. 울컥한 게 보였으나 당장 있다고 말한 걸 안 내놓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래. 곧 갖다주지.”

‘이만 꺼져!’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제 손으로 조작한 가짜 증거를 고스란히 넘겨줘야 할 공작의 속내를 생각하니 아주 깨소금 맛이었다. 그러나 아직 부족했다. 그가 지금껏 해 온 짓은 겨우 이것으로 사면할 만한 게 아니었다.

“가능한 한 빨리요. 얼른 보고 싶어서.”

지독하게 해사한 얼굴로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볼게요.”

나는 손까지 살랑살랑 흔든 뒤에야 그곳에서 멀어졌다. 등 뒤에서 요르케의 비명 소리가 지지배배 울렸다.

* * *

대귀족의 저택은 황궁의 구조와 흡사했다. 거대한 정문을 넘으면 여러 개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수가 많고 거리가 멀었다. 담으로 구분 지으면 다른 집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가장 큰 본 저택은 공작과 공작 부인이 사용하고, 두 번째로 큰 제1 별택은 가문의 후계자가 사용했다. 나머지 저택들은 직계냐 방계냐에 따라 각자 주인이 정해지고는 했다.

루베니오와 내가 지낼 곳은 세이아가의 제1 별택이었다. 본 저택과 거리가 엄청 떨어진 건 아니지만 저택째로 나뉘어 있어서 사는 공간은 분리되어 있었다. 호랑이 굴속인 건 매한가지지만 그렇게 따지면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적을 집에 들인 꼴이니.

“여기가 네 방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인형이 차곡차곡 정리된 장이었다. 원목으로 짠 장은 모서리가 둥글었고 장식한 것들도 하나같이 다 앙증맞고 알록달록했다. 오르골로 추정되는 보석함과 천장에 달린 모빌 같은 것들을 한참 바라봤다. 이곳은 바로 얼마 전까지의 루베니오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다.

“……아기 방이네요.”

“20년 만에 방을 갑자기 바꾸면 위화감이 들지. 침대는 바꿔 놓았다. 가구도 다 새것이고. 차차 원하는 대로 바꾸면 돼.”

루베니오에게 이 계획을 알려 준 게 바로 전날이었다. 이곳에서 지내기로 결정한 건 불과 몇 시간 전일 것이다. 그의 말대로 공작의 주의를 끌지 않게 조심해야 했을 테니 방을 바꾸지 못한 건 당연했다. 이곳은 루베니오가 가슴에 묻고 살아온 ‘니네이나의 방’이었으니까.

“뭔가 불편한 점이 있다면 바로……”

“아니요, 불편하지는 않아요.”

이 나이 먹고 인형 무더기와 방을 같이 쓰려니 낯부끄러워 그랬다.

“그런데 계속 여기 계시려고요?”

“이사 온 첫날이니까.”

“예정에 없던 이사잖아요. 저…… 집사가 저런 얼굴 하는 거 처음 봐요.”

형보다 시니컬한 구석이 있던 루베니오의 집사, 시엘이 안절부절못하며 문가를 서성였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루베니오의 일정은 본래도 빡빡했다. 몇 시간을 빼는 것도 힘들 정도로.

“하등 중요하지 않은 일이구나.”

그가 싸늘히 손짓하자 밖에 서 있던 기사들이 문을 닫았다. 시엘의 창백한 얼굴이 문틈으로 사라졌다.

덜컹. 완벽한 단절. 어떤 급한 일이라도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저…… 피곤한데요…….”

그 말에 루베니오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잠만 자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민망해 죽겠지만 이 방법뿐이었다.

“아까부터 졸렸어요. 말 타고 왔더니 힘든 것 같아요.”

“미안하다. 미처 몰랐어.”

“괜찮아요.”

“재워 줄까?”

“아니요.”

“…….”

차마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저렇게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서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추방하는 수밖에.

스윽. 내 손끝이 조용히 문을 가리켰다. 딸에게 내쫓겨 슬퍼진 아비 짐승이 부하들을 얼마나 살벌하게 노려볼지는 모르고. 그리고 나는 진짜 잠들었다. 또 잤다.

* * *

니네이나는 잘 자는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집을 떠나지 못하던 루베니오는 그녀가 낮잠에 푹 빠졌다는 보고를 세 번 넘게 받고 나서야 급한 볼일을 보러 떠났다. 일은 그가 떠난 후에 터졌다.

* * *

“아흣! 흐…… 우으…… 헉!”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나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혼자 깨어났다. 매캐한 연기를 잔뜩 마신 것처럼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웠다. 뒤척거리다가 이불을 말기라도 했는지 목에 두꺼운 천이 감겨 있어 숨이 더 막히는 것 같았다.

“아…… 머리 아파.”

골이 쪼개질 듯 울렸다. 잠시 잊었다고 생각했던 충격이 꿈이 되어 나타났다. 멀쩡하게 굴었지만 내면은 그게 아니었다. 고문으로 인간의 신체가 잘린 그 벌건 몸을 보고 멀쩡히 잘 수 있었을까? 끔찍한 꿈을 꿨다.

“후우…….”

억눌렀던 메스꺼움이 올라와 숨결에 피비린내가 묻어났다. 할 수 없이 일어나 양치도 하고 세수도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울 수도 없었다. 등에 닿는 시트가 이상하게 소름 끼쳤다. 평범한 이불인데 그게 마치 요르케를 싸고 있던 흰 천처럼 느껴졌다. 불안한 표정으로 일어나 서성거리던 나는 발코니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왜 나오십니까?”

“아악!”

바로 옆에서 들린 말에 온몸의 힘이 풀렸다. 귀를 막고 털썩 주저앉은 내 앞으로 다시 그림자가 졌다.

“괜찮으십니까?”

내 방 바로 옆이 또 가이사의 방이 된 모양이었다. 격식보다는 내 안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선택이었다.

“놀랐잖아요!”

너무 놀라서 부끄럽게도 눈물까지 찔끔 났다.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무릎으로 눈가를 콕콕 찔러 눈물방울을 지웠다.

“울었습니까?”

그러나 고개를 드는 순간 들켰다. 눈가가 붉어져 있기라도 한지 그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그런 건 그냥 모르는 척해 주는 게 예의예요.”

“예. 그런데 왜 우십니까?”

“모르는 척하는 거라니까요.”

“다음부터는 그러겠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거 아니에요? 당신이라면 다음에도 또 그럴 것 같아.”

“안 그러겠습니다.”

정말 안 그럴지, 다음에도 그럴지 어떻게 알까? 믿음은 안 갔다. 그런데 안심은 되는 게 이상했다. 훌쩍거리는 소리만 조용한 밤공기를 울렸다.

그는 이 상황이 난감한 것 같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고민하던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이거 드릴까요?”

노란색 사탕 한 알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이런 걸 들고 다녀요?”

“친교의 기본은 음식을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서 따로 준비했습니다.”

“그런 건 또 언제 배운 거예요?”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건조한 목소리에서는 사람의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이사의 행동은 차라리 사람 냄새가 나는 향수를 뿌리는 것에 가까웠으나 나에게는 테라피 같은 효과가 있었다.

“레몬 맛인가?”

어린애도 아니니 사탕 같은 걸로 달래지 말라고 한 소리 하고 싶었으나 오랜만에 보는 단것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 맛이 그 맛이라지만 달콤함을 알아서 더 먹고 싶었다. 동그란 사탕 한 알이 입으로 쏙 들어갔다. 그런데 맛이 좀 이상했다. 혀끝이 아리도록 달 줄 알았는데 단맛은 잠깐이고 맹맹했다. 그렇다고 역겨운 맛은 또 아니지만 미지근한 얼음을 굴려 먹는 것 같았다.

“이게 뭐예요?”

“나무의 수액을 굳힌 겁니다.”

“아하.”

풀 냄새가 솔솔 올라온다고 했더니 그래서였다.

‘고로쇠 물 같은 건가 보지?’

전에 먹어 본 고로쇠 물의 맛이 딱 이랬다. 이온 음료 같기도 하고 그냥 맹물 같기도 하고. 단맛이 살짝 있어 먹기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맛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몸에 좋은 거예요?”

“예.”

뺨이 불룩불룩 튀어나오도록 좌우 번갈아 가며 열심히 먹었다. 전에는 대충 굴려 먹었다면 이번에는 좀 더 호전적이었다. 혀로 입안 이리저리로 동그란 알을 굴려 넣었다. 까득, 힘을 주어 깨물려는데 뺨에 서늘한 손이 닿았다.

“깨 먹지 말고.”

힘을 풀라는 뜻인지 그는 뺨을 살며시 문질렀다.

“빨아 드세요.”

턱이 저절로 벌어졌다. 하마터면 입안에 든 것을 놓칠 뻔했다. 천천히 흡수해야 효과적인 종류인 것으로 추측되었다.

“아, 알았어요.”

그래. 그건 알겠다.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야하게 말해야 할 문제일까? 가끔 그가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다.

‘내가 가이사에게 유독 예민한 걸지도…… 도대체 왜?’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불룩 튀어나온 그의 바지 주머니를 발견했다. 안에 든 건 작은 책 같았다. 모서리가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자 조금씩 제목이 보였다.

“겁 많은 아기…….”

그다음이 뭐지?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그가 직접 책을 꺼내 줬다.

「겁 많은 아기 고양이와 친해지기」

“겁 많은 아기 고양이와 친해지기라는 책입니다.”

눈으로 봐서 아는데 그걸 또 굳이 목소리로 읊었다.

“살금살금 기본 접근법과 장난감으로 놀아 주기 부분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고양이 키워, 잠깐. 그거 줘 봐요.”

그는 순순히 그 책을 넘겨줬다. 하얀 장모종의 아기 고양이가 도도하게 바라보는 표지를 넘기자 곧바로 1장이 보였다.

「1장. 살금살금 기본 접근법. 1단계. 먹이로 유혹하기!」

어디서 많이 본 전술이 떡하니 보였다.

“이걸 어디에 써먹죠?”

“당신에게 씁니다.”

“…….”

혹시나 해서 물으면 역시나였고 이 남자는 숨길 생각도 안 했다.

“제가…… 언제부터 고양이였죠?”

화를 눌러 참고 최대한 차분히 말했다.

“살랑살랑 베이비 1판도 사서 읽었지만 여러모로 지금의 상태와는 합치하지 않았습니다.”

개떡 같은 말이 돌아왔다.

“전 아기가 아니니까 그렇죠!”

“성인 여성을 유혹하는 방법에 관한 책도 물론 있었습니다. 이런…….”

시뻘건 책 하나가 등장했다.

「아가씨와 기사의 야릇한 열아홉 밤」

제목도 제목이지만 이건 표지가…….

「삐! 전체 이용가를 준수할 수 없어 모자이크 처리됩니다. 유후-」

이런 알람이 울려야 할 것 같았다.

‘어, 어떻게 저런 포즈가?’

목을 꺾어 보며 무심코 몸으로 따라 하려다가 그 꼴을 그에게 들켰다. 귀와 목은 물론이고 얼굴까지 온톤 그 시뻘건 색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으아아아! 뭘 보여 주는 거예요!”

“성인이면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생각만큼 내용이 어렵지도 않……”

“부끄럽잖아요!”

“역시 아기 고양이가 제일 적당……”

“그것도 그만둬요!”

누가 저 입을 막아 주든가 내 귀를 막아 줬으면 좋겠다. 민망하고 낯 뜨거워 접시 물에 코 박고 이 수치심을 잊고 싶은 심정인데 사부작사부작 책을 정리하는 소리는 침착했다.

“제가 틀렸습니까?”

이건 반칙이었다.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여 놓고 기운 없이 속삭이는 건. 잘 몰라 그랬다고 변명할 생각 말라고 해야 하는데, 눈을 뜨자 책이 싹 사라지고, 가이사의 뒤로 달밤이 보였다. 대체 어디로 치웠는지 주머니도 더 이상 불룩하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싫어하면 치워 준다. 모르니까 배운다. 그에게는 단순히 이게 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화를 내면 야박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아니요, 뭐…… 틀렸다는 건 아니에요.”

잠깐. 틀린 건 맞지 않나? 말하고 나서 아차 했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이었다. 흐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어 구름처럼 뭉게뭉게 흘렀다. 그의 표정이 살짝, 아주 살짝 밝아졌다.

“그렇다고 맞는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말 한마디에 다시 돌아갔다.

“어렵습니다.”

“원래 인간관계가 가장 어려운 법이래요.”

“다른 사람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두꺼운 허벅지에 치인 화분 하나가 빙그르르 굴렀다. 파르르 떨리는 붉은색 꽃을 바르게 세우려 손을 뻗었다.

“말씀을 주세요.”

딱딱한 말투에 손이 삐끗할 뻔했다. 간신히 화분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이 한가득 찼다.

“니네이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본래 그렇게 쓰라고 정해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숨이 콱 막혔다. 온몸이 긴장으로 조여들고 갈비뼈가 빡빡하게 움츠러들었다. 지끈.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 오는 것을 느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투에 날이 서 있었다. 조급한 듯 템포도 빨랐고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어떻게 해야 날 믿을 거냐는 말입니다.”

흡사 으르렁이었다. 아니, 하울링인가? 동료를 부르듯 그르렁거리는 호소에 가슴이 섬뜩했다. 동시에 찌릿했다. 갈구하는 시선이 나를 향하는 점에서. 그가 날 바라고 또한 찾고 있었다. 그건 몹시 기이한 느낌이었다. 몹시 아찔하고 자극적이라는 말 외에는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복잡한 심리였다. 가슴이 세차게 뛰고 근육이 긴장으로 뻣뻣…… 뻣뻣?

“저……, 말 끊어서 미안한데요. 저 좀 일으켜 줄래요?”

“…….”

“쥐가 났는지 종아리가 너무 아파요…….”

“…….”

지금 이 분위기는 쥐가 나 비비 꼬인 내 발가락 같았다.

“미안해요…….”

통증을 참는 작은 목소리에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놀란 듯 표정이 허물어진 그가 내 옆구리 아래로 손을 넣어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앗!”

발이 지면에 닿자마자 전율이 찌르르 올랐다.

“으앗! 으으…… 아!”

의자에 앉을 때도 온 소란을 다 떨었다. 나를 의자에 앉혀 두고 무릎을 굽힌 그가 종아리에 손을 댔다.

“꺄아!”

찌릿함을 참지 못하고 거의 무릎 반사처럼 발이 나갔다. 가이사의 얼굴 쪽으로. 대참사를 예견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쪼물. 쪼물쪼물.

“으응?”

눈을 뜨자 가이사의 한쪽 무릎 위에 얌전히 올라가 있는 발이 보였다. 분명 그의 얼굴로 향하는 걸 보았는데 대체 어떻게 저기 안착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길쭉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말랑한 종아리 근육을 꾹 눌렀다. 찌릿. 발바닥까지 전격이 올랐다.

“힉!”

묘한 소리에 가이사의 손짓이 멈췄다.

“자, 잠깐만요.”

“아프십니까?”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그 부분을 꾹 눌렀다.

“으, 하흣!”

나는 갓 잡은 생선처럼 펄떡거렸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발바닥만 버둥대며 그의 허벅지를 여러 번 쳤다. 한차례의 발버둥이 지나고 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는 내 종아리에 다시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가 바윗덩이 같았다.

“제, 제가 할게요.”

소란을 떤 게 민망해서 얼른 발을 빼 왔다. 손으로 몇 번 쪼물거리자 종아리는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

“이제 괜찮아요.”

“…….”

“가이사?”

“……아, 예.”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기계는 고장이라도 난다지만 인간 기계인 그는 그런 것도 없었는데. 그리고 귀도 묘하게 붉었다. 밤이라 색채를 착각한 게 아니라 실제로 붉었다.

‘그런데 왜…… 내 귀도 뜨겁지?’

그는 천천히 일어섰고 나는 앞에 우뚝 멈춰 선 밤그림자에 집어삼켜질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훔치고 빼앗는 포악한 밤의 초승달이 입꼬리처럼 푸르게 휘었다. 마치 우리 둘을 내려다보며 웃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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