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폭풍인지 고요인지
관으로 똘똘 말아 감췄다지만 감기 기운이 돌던 중의 이동이었다. 그것이 역시 문제가 되었는지 새집에 도착하자마자 편도가 땡땡 부었다. 무서울 정도로 열이 올랐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헤맸다. 아픈 와중에도 꿈을 꿨다. 한 편의 영화처럼 웅장하고 무거운 꿈이었다.
원작「공녀 메이아」챕터 2. 꽃 피는 봄날의 한 장면.
내가 특히 인상 깊게 보았던 구절이었다.
* * *
“주인님! 그만하세요, 주인님…….”
점잖게 앉아 있던 그가 만류하는 손길에는 귀신 같은 얼굴을 했다.
“소란하게 굴지 말고 불을 지펴라. 날이 추워 온기가 돌지 않는 것이니.”
루베니오는 실성을 했는지 헛소리를 해 댔다. 언제나 굳건하게 버텼던 그가 무너지자 오래도록 그를 모셔 온 이들의 얼굴에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물줄기가 찬기에 얼어 뺨이 시큰거렸다. 그는 언 손으로 눈가를 쓱 닦으며 다시 딸의 몸을 주무르는 것에 집중했다.
“뭐 하고 서 있는 것이냐! 장작을 패지 않고.”
싸늘한 일갈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따르지 않으면 당장 목을 잘라 낼 것처럼 그 낯이 흉흉했다. 그를 오래 모신 집사도 움직이지 못했는데 작고 어린 노예 하나가 기어와 엎드렸다.
“온기가 돌면 시체가 부패할 겁니다.”
이 겨울 딸의 말동무가 되어 줬다는 노예였다. 그의 시선 한 자락 관심 한 올 받지 못할 하찮은 것이었다.
“니네이나가 아꼈던 노예라기에 가만히 놔두었더니 감히 주제도 모르고…….”
“항상!”
노예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비통하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쇠 긁힌 음색으로 애절하게 고하였다.
“큰 주인님을 보고 싶어 하셨어요. 아픈 모습이 아니라 어여쁜 얼굴을 보여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
사특한 세 치 혀를 한 치씩 잘라 다시는 놀리지 못하도록 해 줘야 하는데 그의 시선은 힘없이 떨어졌다. 덜덜 떨리는 손이 창백한 뺨을 천천히 쓸었다. 훌쩍 자라 어머니를 많이 닮게 되었다. 아기 때 모습은 지금도 눈에 훤한데 딱 한 번 본 이 얼굴은 아직 낯설었다. 겨우 한 번 봤는데. 이제야 다시 만났는데. 다들 이 아이를 보내라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아이를 보낼 수 있을까? 그가 어떻게?
“아가씨의 유언입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어깻죽지가 굳었다. 뻣뻣한 고개를 돌리자 자신이 마치 니네이나라도 된다는 듯 두 손을 꼭 모은 노예가 보였다.
“새처럼 살았다고. 새장 속 새가 아니라 저 하늘 위의 새였다고. 그래서 자유로웠다고.”
감히 누구 앞에서 그딴 흉내를 내는 거냐고 화를 내야 했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망아지 같은 것에게 벌을 내려야 했다. 단지 말을 전한 것뿐이라도 저것은 그리해선 안 됐다. 지금의 그에게는 자비도 여유도 없었다. 전부를 잃었는데 무엇을 위해 그리해 준단 말인가?
그런데 벨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저것에게 마지막 말을 맡겼기에. 딸이 가장 믿고 의지했던 게 하필 저것이라서. 딸의 유언을 들고 온 것이라서. 다른 짓이라도 했다가는 떠나는 마지막이 편안하지 않을까 봐서. 그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가…….”
부디 그곳에서라도 편안하기를.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아무 걱정 없이 떠나기를.
관을 부여 쥔 손끝이 하얗게 말라 갔다.
* * *
같은 꿈이 반복됐다. 오래된 영화 한 편을 연이어 재생한 것처럼 노이즈가 질척거렸다. 내가 갇힌 꿈속에서 그는 절망하고 좌절하며 포기해 갔다. 악몽이었다. 얼마나 지독했는지 열과 슬픔에 몰려 쏟은 눈물로 베개가 마를 새가 없었다.
“으으…… 으흑…….”
그러나 간간이 현실로 되돌아와 눈을 뜨게 됐다.
“아가…….”
기도하듯 내 손을 붙잡고 웅얼거리는 루베니오의 모습이 보였다. 루베니오는 내가 못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가야, 내 아가, 쉴 새 없이 불러 대며 내 곁을 지켰다.
나는 끔찍한 열탕에 끓으며 그 슬픈 얼굴을 지켜봤다. 절규하던 꿈이랑은 다른 눈빛이었다. 희망으로 반짝거리는 푸른 눈이 삶과 싸우는 나를 다독였다. 꼬박 며칠을 그렇게 꿈과 현실을 번갈아 오가며 나는 마치 진짜 니네이나가 된 것처럼 아주 천천히 그의 절규에 반응했다.
“죽지…… 마! 안 돼…… 그 사람을, 살려, 줘……요…….”
루베니오는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찾아와 물수건을 올려 주었다. 아파서 마음이 약해졌는지 그 진심이 나를 부추겼다.
“아버지…….”
어느새 나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정이 담뿍한 눈동자에 끌려 점점 더 그를 진짜 아버지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아픔으로 몽롱한 머리가 재배열되며 그를 끊임없이 인식한다.
“아버지…….”
그래.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기왕 여기서 이렇게 살게 된 거 누구보다 진심일 저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도. 나도 한 명쯤은 소중한 사람을 만들어야 더욱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아버지…… 안 돼요, 아버지…….”
“루베니오가 보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눈을 뜬 현실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건 가이사였다. 그는 옆에 가만히 서서 장갑 낀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아 주곤 했다.
“흐…… 흐으…….”
괴로워서 울렁거리는데 어떻게 해야 편안해지는지를 몰랐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끙끙거리면 그는 몹시 고심하는 눈으로 나를 살피다가 내 손을 꾹꾹 지압해 주곤 했다. 가이사는 여린 깃털을 대하는 보드라운 손길로 내 손을 주무르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뒤집힌 속을 가라앉히고 조금이나마 열을 잠재워 주는 서늘한 손길이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별거 아닌 그 말이 진심처럼 느껴져서 아픈 와중에도 몹시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그렇게 아픈 내 근처를 맴돌며 그 요령 없는 눈짓과 몸짓으로 나를 위해 주곤 했다.
시간이 흘렀다. 악랄한 꿈도 지긋지긋하게 버티는 내게 지쳐 찬찬히 멀어졌다.
“후우…….”
며칠을 앓고야 정신이 살짝 돌아왔다.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 있을 수는 없다. 그가 나를 지켜 주겠다면 나는 나를 지킬 그 사람을 지켜 줘야 했다.
“메이어는 지금 어디 있어?”
첫 패는 역시 그녀가 좋겠다.
* * *
나를 오래 돌봐 온 하녀장 사라와 하녀 몇은 몰래 이곳에 왔지만 예상대로 메이아는 함께 따라 올라오지 못했다.
“그 애가 마음에 들어요. 하녀로 삼으면 어떨까요?”
“하녀?”
“알고 계시잖아요? 그 애가 여자라는 거.”
그녀를 다시 불러들이는 일은 쉬웠다. 뭘 하나 더 못 해 줘서 안달인 루베니오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자 즉각 그녀의 처우가 결정되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뭘? 네가 여자라는 거?”
“네…….”
“울대뼈가 없잖아. 얼굴도 문제지만. 난 왜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채는지가 더 놀랍던데?”
원작의 여주인공 보정이 아니었더라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메이아의 남장은 어설펐다. 가려도 여주의 모습이 보인다고 할까?
“그동안 고생 많았겠다. 다른 성별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어떠니? 내 하녀가 되면 네가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왜 제게,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죠?”
날 좋아하니까 쉽게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무뿌리 같은 강직함이 있었다.
“네가 마음에 드니까.”
나는 진실만을 말했다. 대나무처럼 시원하게 꼿꼿한 성품이 나를 만족시킨 건 사실이었으니까.
“네가 계속 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
봄의 첫 잎사귀처럼 보드랍고 나긋나긋하게 웃었다. 강한 힘이 없다는 건 그만큼 무해하다는 뜻이다. 모성애나 부성애 같은 아가페적 사랑과 헌신은 그 여림에서 비롯했다.
메이아는 약한 것에 약하고 강한 것에 강한 사람이었다. 약함에 매력이 있다면 나는 치명적으로 매혹적인 사람일 테다.
“네가 나를 지켜.”
“……!”
설마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는지 따스한 갈색 눈이 충격으로 홉떠졌다. 그녀는 잠시 허둥거리더니 다시 내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메이아가 원작의 니네이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곧 죽을 것 같은 아슬아슬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싫으니?”
연약하게 웃으며 살짝 상처 받은 얼굴을 했다. 힘이 풀린 것처럼 메이아의 두 다리가 꺾였다.
“……원래 이름은 메이아예요. 이 메이아는 앞으로 주인님을 위해 살겠어요.”
“메이어든 메이아든 네 전부를 다 내게 줘.”
나는 자존심밖에 안 남은 연약한 아이처럼 고집을 부렸다.
“맹세……할게요, 주인님.”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는 손을 머리 옆에 두고 몸을 한껏 낮췄다. 손과 발의 사지 모두를 내준 충성 맹세에 비로소 입술이 흡족히 올라갔다. 패는 손아귀에 잡혔다. 제련하여 마땅히 쓸 곳은 역시 그곳이었다.
* * *
메이아는 하녀가 되어 내 옆에서 보필하게 됐다.
“메이아가 마법에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가르쳐 보면 어떨까요?”
평민이 마법을 배우는 건 쉽지 않은 기회였지만 은근히 말을 흘려 선생을 붙이는 건 내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메이아는 그렇게 공들여 제련되고 있었다. 신분을 하녀로 상승시킨 건 노예보다 하녀가 쓸모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굳이 마법까지 가르친 것 역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슬슬 그쪽도 생각…… 콜록!”
“괜찮으세요, 주인님?”
밖에서 기침 소리를 들었는지 메이아가 문을 두드렸다.
“으응. 들어와.”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뛰어온 그녀는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물 한 잔만 줄래?”
“네! 따뜻하게 데워서 드릴게요.”
메이아의 손에서 초급 온열 마법이 나왔다. 선생을 붙여 가르치기 시작했더니 차를 끓여 주겠다며 저걸 제일 먼저 배워 왔다.
“적당히 데웠으니 식히지 않고 그냥 드셔도 될 거예요.”
나는 메이아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차를 호로록 마셨다. 온기가 도니 좀 살 것 같았다.
“…….”
“몸이 또 안 좋으세요? 안색이…… 의원을 불러올까요?”
“아니. 이제 열은 거의 다 떨어졌어.”
눈치 빠른 메이아는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혼자 생각하고 싶다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진짜 움직여야 했다. 문제는 원작 「공녀 메이아」에서 루베니오가 썼던 방법을 어떻게 쓸지였다. 원작에서 루베니오는 공작의 다혈질적이고 오만한 성정을 이용하여 주도권을 잡았다. 그는 무작정 메이아를 도와주지 않고 일종의 거래를 제시했다. 메이아의 노예 신분을 풀어 주고 공녀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대신 미끼가 되게 했다. 그녀를 데뷔시켜 공작의 눈에 띄도록 만들었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정한 부녀 행세를 했다.
공작은 루베니오의 ‘딸’에게 예민하게 반응했다. 니네이나가 죽은 것에 대한 원망과 반항심을 루베니오가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 인형이나 다름없던 아들이 자신에게 반항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미천한 노예 출신 여자를 공작가로 들인 것 또한. 메이아의 출신 때문에 사람들의 구설에 오른 것이 자신의 위신을 깎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루베니오는 공작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메이아를 파티에 종종 내보냈고 그녀를 아끼는 척했다. 화가 난 공작이 메이아를 암살하려다가 실수를 범할 때까지. 물론 생각 없이 미끼만 잘랑잘랑 흔든 건 아니었다. 그는 메이아를 훈련하고 그녀가 죽거나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 왔다.
‘메이아가 받은 위협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생각해 보면 루베니오도 꽤 냉정하단 말이야. 철저히 보호했다고 해도 최전방에 밀어 넣은 건데.’
루베니오에게 메이아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딸의 유언을 전해 주고 딸의 마지막을 지켜 준. 그러나 그의 고마움이란 건 겨우 그 정도였다. 애초에 그의 입장에서는 고용한 노예 소녀가 마땅한 일을 한 것이었다. 공작가의 후계가 노예 소녀에게 고마워했다고 한들 얼마만큼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단지 메이아를 통해 자신의 만족을 채운 걸지도 모른다.
‘성장하는 메이아의 어깨 위에 니네이나의 모습을 얹고 그 자리에 그녀가 있기를 꿈꾸며.’
그를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위험 부담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했고 메이아도 동의한 일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그저 생각할 때마다 슬퍼졌다. 살아가야 할 이유를 그런 식으로밖에 만들지 못하고 끝내 그 유예 기간에조차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그 마음이.
‘원작의 니네이나도 아버지의 자살 같은 건 바라지 않았을 텐데.’
견딜 수 없는 생지옥을 걷다가 끝내 스스로 생의 끝에 올라선 절망을 생각할 때면 가슴 언저리가 뜨거웠다. 그를 그렇게 만든 공작이 밉고 짐밖에 안 된 니네……
“아!”
“괜찮으세요, 주인님?”
“으응. 가끔 이렇게 머리가 불쑥불쑥 아프네. 생각을 너무 많이 했나?”
그것이었다. 매번 강제로 기절하기 직전에 보는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녹색 불꽃.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반복되니 모르는 척하려야 그럴 수가 없었다. 저 불꽃은 분명 내가 루베니오에 대해 생각할 때만 찾아왔다. 그를 걱정하고 내가 니네이나를 동일시하는 것처럼 생각…….
“동일시?”
맞아. 딱 그거였다. 니네이나처럼 루베니오를 안타까워할 때!
“읏!”
깨달음을 얻은 순간 다시 초록빛 섬광이 스치며 머리가 아찔해졌다.
“주인님!”
기절하고 싶지 않아 눈을 홉뜨자 더 이상 강제할 수 없는 것처럼 아름다운 녹색 빛이 서글프게 멀어졌다. 이게 대체 뭐지? 나는 다시 루베니오에 대해 생각했다.
‘아버지. 루베니오는 내 아버지야. 그리고 나는 니네……’
지끈.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아악!”
엄청나게 아픈 건 아닌데 짜증 나는 감각이었다. 쥐가 난 것처럼 얼얼했다. 그러나 이 고통은 내게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깊이 잊고 있던 기억을 자극하며. 그러나 문제는 그게 뭔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감각을 기억하며 앞으로 계속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아, 머리 울려…….”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 여기 편히 누우세요.”
메이아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불렀다.
“거, 거기?”
“네. 여기.”
톡톡. 굳은살이 박인 작은 손이 허벅지 위를 두 번 두드렸다.
‘여기 누우세요, 주인님!’
쏟아지는 별빛을 품에 안은 눈동자가 그렇게 빛났다. 아기를 대하듯 주인의 머리를 차근차근 매만져 주고 싶다는 잘못된 욕망이 보였다. 그렇다. 저것은 그릇된 욕망이었다.
“쿠션 가져와.”
무릎베개 같은 걸 하겠냐? 쿠션이나 줘. 메이아는 잠시 비 맞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하더니 왜인지 발간 볼을 감싸고 입술을 씰룩였다.
“예, 주인님…….”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수줍은 음색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내가 고개를 팩 돌리고 그 꼴을 외면하자 입술을 꼭 깨문 얼굴에 홍조가 더 크게 번졌다. 이유 모를 이상한 취향이었다. 그릇된 욕망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충실한 하녀 역할을 수행 중인 그녀는 폭신폭신한 쿠션 하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 위에 덜렁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나는 달라.”
“예?”
“…….”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메이아가 햇빛에 그을린 작은 손으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 주고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눌러 주는 손길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 메이아가 작게 웃음 지을 때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달라.’
아픈 것밖에 할 줄 몰랐던 그 애와는 다르다. 폐가 되지도, 짐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직접 잡아다가 그 목을 바칠 것이다. 그 사람에게. 그것이 내가 살 방도니까.
* * *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면 기동력을 확보해야 했다. 정원을 다 도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저질 체력으로는 생각한 어느 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정원 산책을 36번 시도한 끝에 42번 기절했다. 그리고 드디어 인정했다. 이 몸으로는 저 넓은 정원을 다 돌 수 없음을.
“휠체어…… 휠체어가 필요해!”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인간은 문명인이었다. 문명인의 이기를 제대로 사용한다면 힘이 없든 체력이 약하든 다 방법이 있었다.
“휠체어라니요? 그런 건 처음 들어 봅니다만.”
“바퀴 달린 의자라고 생각하면 간편해. 마차의 바퀴를 의자 밑에 단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 생겼어.”
나는 마차를 제작하는 장인을 불러 휠체어 제작을 의뢰했다. 루베니오가 추천해 준 자였다.
“이 그림은…….”
내 그림 실력은 썩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아서 포인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흉측한 디자인이 있나! 이보시오, 장인. 우리 주인님께서는 섬세한 심미안을 가지신 분이라…….”
사라의 호들갑에 그 흉측한 디자인을 그린 나는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것도 달지 마!”
“주인님?”
“보석이든 리본이든 하나만 달아 봐. 그림 그대로 만들어서 가져오라고!”
“이 그림 그대로…….”
처음 휠체어에 대해 들었을 때보다 장인의 난색이 짙어졌다.
“무조건 그대로!”
나는 씩씩거리며 그대로만 만들어 오라고 주장했다. 이틀 뒤, 소식이 왔다.
“마차 장인이 앓아누웠다고 합니다.”
마차 장인의 전령사는 가이사였다.
“뭐? 왜요?”
“당신의 그림을 보는 순간 영감이 솟구쳤는데 그림 그대로 만들라는 한계를 두셔서 몹시 괴로워하는 모양입니다.”
그가 예술의 가치도 모르는 한심한 이를 보듯 혀를 쯧쯧 찼다.
“예술인의 고질병이죠.”
그딴 병이 어디 있어! 마음 같아서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참았다.
“어떻게 할까요?”
“……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제작해 달라고 해 주세요.”
“예. 그래도 시일은 꽤 걸릴 겁니다.”
“마차에 비하면 간단한 작업 아닌가요?”
“당신이 탈 것이니 안전성에도 각별히 신중해야 하니까요.”
시간이 별로 없는데 맞는 말이라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우선 체력을 더 기르는 수밖에요.”
“탈것이 필요하시다면 제 위에 올라타게 해 드리겠습니다.”
깜빡. 내 귀로 들은 걸 의심하며 귓가를 슥슥 문질렀다.
“지금 뭐라고……?”
“저를 타시라 하였습니다.”
가이사를 탄다. 그의 몸 위에 올라탄다. 그의 위에 올라타…….
“으아아악!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가 답지 않게 고개를 갸웃 귀엽게 까딱거리며 다가왔다. 내면이 강퍅하다는 건 알지만 아름다운 얼굴 때문인지 심장이 철렁였다. 고개를 숙이자 까만 머리칼이 우수수 떨어져 깊은 음영을 만들었다.
“흥분하셨습니까?”
또 미묘한 뉘앙스의 말을 하는 주제에 대체 왜 그런 얼굴이냐는 순진한 얼굴이 보였다. 그렇다. 아마도 가이사는 그런 쪽으로는 순진할 게 틀림없었다.
‘무조건 동정일 테니까!’
결벽증인 그가 뭘 제대로 알 수나 있었을까? 보기도 전에 역겹다며 고개를 돌렸을 게 틀림없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혼자 북 치고 장구 쳤다는 민망함이 몰려왔다.
“그럼 저를 타시겠……”
“그 말, 말! 말 좀 하지 말아요!”
까만 눈썹이 기이한 각도로 좁아들었다. 알쏭달쏭.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 집에 와서는 더욱 착한 척 요망을 떠는 남자는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입을 착실히 다물었다. 힘이 꼭 들어간 입술이 붉은 꽃송이처럼 오밀조밀 모였다. 그 꼴이 또 내밀한 안쪽을 깊숙이 찔렀다.
‘재앙의 입술이로다.’
나는 속으로 한탄하며 심호흡했다.
“후…….”
가이사가 입을 다물자 좀 살 것 같았다. 난색과 한색이 뒤범벅되어 차다 뜨겁다 했던 머릿속도 잔잔해졌다. 그제야 그의 말을 알 것 같았다.
“진짜 말처럼 태워 주겠다는 건 아니겠고…… 이동할 때 도와주겠다는 말이죠?”
가이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척 가리켰다. 말을 해도 되겠냐는 느낌이었다.
“……네. 이제 말해도 돼요.”
“저를 타……”
뺨이 화르륵 타올랐다.
“그 말은 빼고.”
나는 한 번만 더 같은 소리를 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의미를 그득그득 담아 그를 노려봤다. 눈치는 있는지 그가 말을 끊어 냈다.
“전용 휠체어가 되겠습니다.”
휠체어. 발음이 어려웠는지 단정한 발음이 처음으로 어눌해졌다. 그런데 뭐? 전용 휠체어?
“누가 전용으로 삼아 준대요?”
나는 입꼬리를 픽 올리며 질 나쁘게 웃었다. 킬킬킬. 그런 소리가 날 것 같은 얼굴일 텐데 그는 그냥 고요히 바라봤다. 농담이 통하지 않으니 민망하기만 하고 뺨에 자꾸 열이 올랐다.
“가이사는 바퀴도 없고 의자도 아닌데요.”
속이 쓰려 뱉는 날이 선 말에도 담담한 시선이었다. 사람 참 열 받게 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요. 가이사가 그걸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에요? 제 손끝만 닿아도 죽을 것처럼 굴면서.”
우리 두 사람은 장시간 접촉한 적이 없었다. 쓰러지면 그가 익숙하게 받아 내기는 했지만 그럴 때의 그는 늘 눕힐 곳을 찾았다. 장시간 움직일 용도로 휠체어를 고안한 내게 가이사 휠체어는 필요 없었다.
“앞으로 노력하면 됩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시키는 게 낫겠어요. 더 빠를 거…… 아. 이 생각을 왜 안 했죠?”
“…….”
“해결됐네요. 휠체어가 안 되면 사람에게 안겨 다니면 되겠어요. 안아 주는 사람이 힘들 테니 몇 명씩 바꿔 가면 되고요.”
“평범한 사람은 당신을 한 시간도 안고 다닐 수 없습니다. 무겁습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내려다봤다. 최근 살이 좀 찌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무척 마른 체형이었다. 성인 여성이고, 살과 뼈가 있을 곳에는 다 붙었으니 물론 만만찮은 무게였지만 단정 짓는 말에 열이 확 올랐다.
“당신만큼 튼튼한 성인 남자들 중 구하면 돼요. 노동력을 쓴 만큼 대가는 크게 지불할 테니 지원자는 많겠죠.”
“그들은 위험합니다.”
설마 가이사가 남자는 다 늑대다, 이런 말을 하려는 건가 싶어 눈을 부릅떴다.
“훈련된 암살자가 잠입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는 무슨. 그럼 그렇지.
“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도 못 믿습니다. 제게 안기세요.”
재앙의 입술이 또 재앙을 일으켰다. 저런 무미건조한 말에 반응하고 싶지 않은데 목덜미에 불쑥 소름이 돋았다. 서늘한 목소리가 어딘지 오싹하고 음산해서 아마 착각한 것이겠지만.
“저도 제 안전을 아무에게나 맡기고 싶지는 않은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가이사를 제 전용으로 삼는 건 무리예요.”
그가 했던 대로 묘한 뉘앙스가 느껴지도록 말했으나 못 알아챈 눈치였다. 거목 같은 남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열 받아.’
혼자 씩씩대는 꼴이 우습고 유치했다. 워낙 무미건조하고 단단해서. 이곳에서 눈을 뜬 지 얼마 안 되어 만난 그의 호의가 변함없이 곁을 지켜서. 열이 옴팡 올라 열꽃이 피었을 때 가장 많이 눈을 마주쳐 준 게 이 남자라서. 이상하게 그 눈에 호의와 걱정이 가득해서. 그에게 자꾸 투정을 부리게 됐다. 내 곁을 지켜 주던 선명한 목소리와 강인한 손길이 아주 오랫동안 남아 지금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음에도.
“또 저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사람은 이기적이라 응석을 받아 주면 투정쟁이가 됐다. 지금도 봐라. 보여 주겠다는 듯 살짝 다가와 머리카락을 살랑 흔드는 그의 몸짓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머쓱해져서 그의 손가락이 닿지 않게 조심하며 고개를 틀었다.
“저를 걱정한 거예요. 당신이 떨어트릴까 봐.”
“그럴 리가.”
눈꼬리를 얼음에 묻어 싸늘히 굳힌 듯 그에게서 냉기가 뚝뚝 흘렀다.
“내가 널 어떻게 떨어트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얼굴이 와작 일그러져 있었다. 칼처럼 날카로워 가슴을 찌르는 말본새도 문제였지만 더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
“바, 반말? 지금 나한테 반말했어요?”
“안 했습니다.”
“했는데?”
“잘못 들으신 겁니다.”
“…….”
멍하니 올려다봐도 그의 얼굴에는 빈틈 하나 없었다. 쓸데없이 강직한 포커페이스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잘못 들었나?”
내가 느끼기로는 그의 존댓말은 존중이 아니라 거리를 두는 것에 가까웠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런 남자가 새삼 친근하게 나를 ‘너’라고 지칭할 리 없었다.
“귀에 문제가 있나?”
“의원을 부를까요?”
그는 내 혼잣말에도 성실히 반응했다.
“아니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다행입니다.”
소름 끼치도록 뻔뻔한 반응에 나는 진심으로 귀의 건강이 의심스러워졌다. 미심쩍어하는 나를 흘긋 본 그가 지나가는 식으로 말했다.
“그럼 연습을 해 보겠습니다.”
“아. 그래요. 연습…… 연습?”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에 끌려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반문했다. 그는 코끝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안는 연습 말입니다. 자주 안아야 거부감이 안 들 테니까요.”
“제가 언제 그 일을 허락했던가요?”
“꼭 그 일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의 일을 생각하면 연습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
“저는 맨손으로 당신을 안는 것에 익숙해질 겁니다.”
정원 산책 중 기절한 걸 그가 일일이 옮겨 줬을 테니 그의 말이 옳았다.
“당신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목덜미에 뺨을 기대게 될 겁니다.”
또 뉘앙스가 이상했지만 이번에는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다.
“……걱정을 하느라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지 않고.”
같잖은. 걱정이라는 단어에 앞서 그 말을 씹어뱉는 것 같았다. 하도 작아 잘 들리지는 않았다.
‘설마 같잖다고까지 했겠어? 아니지. 저 남자라면 능히 하고도 남지…….’
그를 계속 의심할 때였다. 머리 위에 드리운 그림자에 햇빛이 사라졌다.
“옷을 벗어도 되겠습니까?”
“……?”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목을 까딱거렸다. 갸웃. 갸웃. 갸웃. 갸웃. 목 운동을 너무 가열차게 해서 등세모근이 찌르르 울렸다.
“어쩌죠?”
그러고는 심각한 얼굴로 속삭였다.
“자꾸 헛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귀가 잘못된 게 틀림없나 봐요. 가이사가 옷을 벗겠다 어쩐다 하는 말이 들리지 뭐예요. 이 정도면 환청 아닌가요?”
“…….”
그가 몹시 미적지근한 눈빛을 보냈다. 말문이 턱 막혀 혼란스럽다는 느낌이었다.
“의원이 아니라 신관을 불러야 하나?”
“의원이든 신관이든 안 부르셔도 됩니다.”
“왜요?”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아니, 가이사가 옷을 벗어도 되냐고 했다니까요.”
“예. 제대로 들으셨어요.”
“…….”
자. 생각해 보자. 미혼 남녀 사이에 옷을 벗어도 되겠냐고 묻는 게 어떤 의미인지. 으음. 아니다. 가이사니까 ‘평범한’ 미혼 남녀 사이라는 전제는 불순했다. 결벽증이 있는 미혼 남성이 미혼 여성에게 옷을 벗어도 되냐고 물었다. 본인의 약점이나 다름없는 맨살을 드러내겠다고.
“그렇다면…….”
깨달았다는 말투에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로 그것이라는 듯이.
짤랑짤랑 짤랑 짤랑짤랑.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종을 마구 흔들었다.
“메이아! 집사! 가이사가 이상해! 당장 의원 불…… 읍!”
혀에 뻣뻣한 가죽이 닿았다. 약간의 온기를 머금은 둔탁한 것이 혀끝을 지그시 눌렀다.
“소리 지르면 다칩니다.”
소리 지르면 죽습니다. 공포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느른한 음색에 턱이 뚝 떨어졌다.
“목에 핏대가 섰군요.”
나는 가죽 장갑에 휩싸인 그의 엄지를 문 채 쩌저적 굳어 버렸다.
“무슨 일……!”
때마침 문이 벌컥 열려 그 참상을 하녀 넷에게 들켰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의 엄지를 뺄 생각은 못 하고 눈빛으로 의사를 전했다.
“어머. 어머.”
사라를 비롯한 하녀 넷이 저들끼리 손을 짝짝 맞추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그 꼴을 보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손가락을 입속에서 빼냈다. 입술에 젖어 질척해진 장갑이 투명하게 빛났다.
“실례했습니다, 주인님.”
하녀장인 사라가 우아하게 인사하며 문을 닫았다. 흥분으로 콧김을 슝슝 내뱉는 얼굴이 문 사이로 사라졌다.
달칵. 동요 없이 정직하게 돌아가는 문고리가 얼마나 냉정한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놀라셨습니까?”
그가 내 입가를 손수건으로 가볍게 닦아 주며 물었다.
“꿈인가……?”
“현실입니다.”
꿈이든 현실이든 얄미운 말투인 건 분명했다. 멍하니 흔들리던 나는 불꽃에 화르르 타올랐다.
“지, 지금 뭐……!”
“쉿. 흥분치 마세요.”
“내가 안 흥분하게 생겼어요?”
네가 이 입에 손가락을 처넣지 않았느냐! 그런 의미로 손가락과 입술을 번갈아 보았다.
“급한 마음에…… 죄송합니다.”
놀랍게도 그는 정말 반성하는 얼굴이었다.
“손바닥으로 막으면 숨이 끊길 것 같아서…… 다음에는 다른 방식으로 막겠습니다.”
입을 막겠다는 건지 나를 막겠다는 건지. 막는다면 대체 무슨 방식으로 막겠다는 건지. 의문이 퐁퐁 솟았으나 궁금하기도 했고 안 궁금하기도 했다. 절정까지 강제로 몰렸다가 뚝 떨어진 듯한 탈력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단단히 세운 쿠션에 풀썩 기대자 그가 물을 한 컵 내밀었다.
“마시고 진정하세요.”
미지근한 물이 천천히 흘러들어 왔다. 잠깐 소리를 질렀다고 그새 얼얼했다. 정말 놀랍게도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입을 막았던 모양이다. 인정했다. 그리고 그 정도는 용서할 수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네. 그렇지만 다음에는 아무리 급해도 손가락으로 막지 마세요.”
하지 말라는 말은 안 했다. 그가 막지 않았다면 목구멍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테니까.
“더 안전한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옷을 벗겠다는 말은 대체 뭐예요?”
“적응 훈련입니다. 과도한 자극을 한 번에 주어 차차 민감도를 낮추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글쎄. 끔찍한 스트레스를 주어 스트레스에 익숙해지겠다는 말로 들렸다.
“그러니까…… 옷을 벗고 날 끌어안으려 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니, 부끄럽지는 않아요?”
남자든 여자든 서로 다른 성끼리는 어지간히 친숙한 사이가 아니면 벗은 몸을 보이지 않는다.
“상체만 벗을 생각이었습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
목까지 단단히 걸어 잠근 의복이 보였다. 반질거리는 단추 하나가 금욕적으로 보였다.
‘저것을 푼다고?’
어쩌다 닿으면 바윗덩이처럼 단단한 신체가 느껴졌다. 벗고 덤벼들겠다고 하니 - 의미 그대로 안겠다는 것뿐이지만 - 심장이 펄떡거렸다.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할 수 있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이 와중에도 성적 긴장감을 느낄 줄이야. 그것도 저 목석같은 남자한테. 연애 세포라고는 전무할 멋모르는 결벽증 남자한테.
‘자존심 상해.’
내 뺨이 뾰로통하게 부풀었다. 그를 불만스레 노려보게 됐다.
“벗을까요?”
그의 문제는 저것이다. 그는 자신을 너무 막 대했다. 벗는 순간 끔찍한 경험이 기다릴 걸 알면서도 자신을 함부로 대했다. 내 목이 상할까 봐 그토록 싫어하는 신체 접촉을, 그것도 입안을 더듬은 것과는 상반됐다.
“장갑이나 벗어 봐요.”
“…….”
“옷은 말고요.”
슬쩍 단추 주위를 맴돌던 손이 내려왔다. 옷을 벗는 것보다 장갑이 더 싫은지 얼굴을 찌푸렸지만 검지 끝을 문 입술이 지긋지긋한 까만 장갑을 벗겨 냈다.
“손 주세요.”
손 줘. 손. 훈련된 강아지에게 하는 것처럼 손바닥을 가까이 내밀었다. 먼저 휙 잡는 것보다는 그가 먼저 다가오게 하는 게 덜 위협적이었다. 덩치는 산만 한데 비에 잔뜩 젖은 데다가 무서운 이들에게 쫓긴 유기견 같았다. 경계를 멈추지 못한 눈동자가 부산스레 흔들리더니 질끈 감겼다.
‘보모가 된 기분인데?’
역할이 반전되었다. 평소 보모 역을 자처하는 건 가이사였는데 지금은 반대였다. 나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지 않았다. 언젠가 보았던 「나의 작은 동물 친구! 기초 상식편!」을 떠올리며 별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휘휘 돌렸다. 가만히 기다려 주면 경계를 풀고 먼저 다가온다고 했던가? 진짜 그랬다. 서늘한 물방울 같은 촉감이 손끝에 툭 떨어지자 솔직히 조금 으쓱했다. ‘내 생각이 맞았어!’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겨우 한 번에 기뻐하지는 않았다. 나는 식은땀이 차게 식어 지문이 다 닳은 듯 미끄러운 손끝을 쥐지도 않고 가만히 받치고만 있었다. 손끝을 간지럽게 기어오른 손이 마침내 내 손바닥 전체를 덮었다. 내 손을 다 덮고도 넉넉히 남는 큰 손에서 흐르는 냉기가 적당히 시원했다.
“잘했어요.”
톡톡. 건반처럼 연주하는 손끝이 단단한 손금을 약하게 긁었다. 움푹 팬 곳에 하얀 손끝이 쏙 말려들어 가자 긴장으로 뻣뻣한 목에 핏대가 푸르게 섰다. 파리한 낯으로 선 그는 마치 정지한 것 같았다.
나는 차근차근 벌어진 손 틈을 파고들었다. 나뭇가지에 엉킨 바람처럼 가볍게. 그래서 더 끈끈하고 차지게. 손가락을 엮었다.
“윽…….”
꽉 억눌린 입술에서 신음이 살짝 흘렀다. 깍지를 낀 채로 그의 손등을 꼭 붙잡자 갓 잡은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는 몸이 느껴졌다.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처럼 그의 목덜미까지 열기가 맺혔다. 나는 건조한 얼굴이 불안정하게 떨리는 걸 모른 척하며 일부러 더 밝게 웃었다.
“봐요. 아무 일도 없죠?”
죽은 생선처럼 흐릿하던 가이사의 동공이 호수 위에 물방울을 흩뿌린 것처럼 흔들렸다.
“당신은 괜찮아요.”
방울처럼 맑고 햇살처럼 포근한 목소리로 노력했다. 듣기 나쁘지 않았는지, 혹은 단순히 세뇌되었는지 찌푸린 미간이 평평해졌다.
“오늘은 손 씻기 금지.”
평온했던 그의 얼굴이 바로 와장창 구겨졌다.
“싫어요?”
“위생의 문제가…….”
“하루쯤 손 안 씻는다고 안 죽어요.”
“……알겠습니다.”
맞잡은 손보다 손을 못 씻게 된 사실이 더 신경 쓰였는지 그는 다른 생각에 골똘히 빠졌다. 내 눈이 어떻게 된 걸까? 저 산만 한 거구가 의외로 귀여웠다. 저토록 싫어하면서 고분고분 그러겠다고 하는 것이 특히 그랬다. 나는 생각에 빠진 그를 흘긋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얼굴을 붉혔다. 손발에 힘이 빠져 덜덜 떨렸고 가슴에 뜨거운 불꽃이 번졌다. 이게 뭐지? 그가 잡은 손을 완전히 의식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바람은 멈추지 않고 불어왔다.
* * *
루베니오가 돌아온 건 그로부터 몇 시간 흐른 뒤였다. 갑갑함을 못 견딘 니네이나는 정원에 나와 있었고 루베니오가 이 집을 고른 이유 중 하나인 그네에 앉아 있었다. 그 그네는 오직 그녀와 그녀가 허락한 사람만 앉을 수 있었다. 주인의 지엄한 명이 있어 누구도 감히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그네였다. 그 사실을 모르는 니네이나는 다리를 팔랑팔랑 흔들며 여유롭게 햇살을 즐겼다.
루베니오는 아주 멀리서부터 딸이 그네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혹시 꼬리가 붙을까 봐 몇 중으로 경계해 가며 이곳을 찾아온 그는 그제야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빙긋 웃었다. 서둘러 다가가고 싶다가도 저 풍경을 흐트러트릴까 봐 가만히 멈춰 서게 됐다. 밝은 햇살 아래 나부끼는 머리칼과 볕이 너무 따갑지 않도록 가려 주는 나무 그림자. 창백한 뺨도 그곳에서만큼은 조금 온유해진 것 같았다. 불순물 하나가 섞여 있더라도. 불순물이라 하면 그녀의 옆에 앉아 머리칼을 빗질하는 가이사였다. 그가 뭐라고 작게 속삭이자 백금색 머리카락이 크게 출렁거리며 푸른 눈 두 쌍이 마주쳤다.
* * *
“아! 오셨어요?”
드디어 왔군! 나는 속으로만 음흉하게 간계를 세우며 해맑은 척 그를 반겼다.
“다녀왔어.”
딸도 하나 있고 나이도 38세인 아저씨가 분명한데 얼굴이 쓸데없이 환했다. 눈이 멀 것 같은 표정에 나는 괜스레 볼을 긁적거렸다.
“날이 서늘한데 괜찮았나?”
가이사를 향한 말투가 내게 향할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건조하고 냉한 사람이 둘이나 모이니 보는 것만으로 추웠다.
‘춥다. 추워.’
날이 서늘한 건 주고받는 눈빛만으로도 기온을 뚝뚝 떨어트리는 그들 탓이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그녀가 루베니오의 마중을 나오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가이사는 혹시 루베니오에게 손이 닿을까 봐 얼른 맨손을 내리며 건조하게 응수했다. 옜다. 원하는 말을 해 줄 테니 썩 꺼져라. 그런 느낌이 났다. 루베니오라고 모를 리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간 것 같았다.
“나를 기다렸니?”
반은 붉고 반은 푸른 남자는 내게만큼은 난색이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무엇이든 말해 보렴.”
“밖에 나가고 싶어요.”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뭐든 들어줄 것처럼 굴던 얼굴도 굳었고 루베니오를 피해 차근차근 다시 시작하던 가이사의 빗질도 멈췄다.
“파티장도 가 보고 싶고.”
나는 그런 반응을 보며 짐짓 새침하게 턱 끝을 들었다. 어른들의 사정 같은 건 아무것도 모른 채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시, 심장 떨려……!’
속마음이 어떻든 나는 뾰로통한 얼굴을 고수했다. 얼른 들어주지 않고 뭐 하냐는 얼굴에 루베니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아가의 건강이…….”
당황하니까 ‘아가’라는 말이 또 튀어나왔다. 아버지에게는 자식이 영원토록 아기라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다.
‘20년 동안 안 좋았는데 건강은 무슨, 새삼스럽게.’
그러나 이 말은 입으로 내뱉지 않았다.
“때가 되면 데뷔탕트라는 걸 한다고 책에서 읽었어요. 제가 데뷔하지 못한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한 번쯤은…….”
목소리가 애처롭게 젖어 들었다. 나는 젖지 않은 눈가를 손으로 콕콕 찍으면서도 절절매는 루베니오를 흘긋거렸다.
“아니에요. 괜한 말을 했어요. 이렇게 평생 살아도 괜찮아요.”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건 분명한데 생각보다 단단했다.
‘이래도 안 넘어온단 말이지?’
힘을 줘 발갛게 변한 코로 보란 듯 훌쩍거렸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이곳을 들키지 않고 파티장에만 살짝 가 보면 어떨까 하여서…….”
내 계획은 이랬다. 파티장에서 예고 없이 데뷔를 치르고 그 모습을 공작에게 보여 준다. 공작의 화를 돋우기 위해 사람들 많은 곳에서 말도 몇 방 날려 준다. 공작이 이성을 잃고 씩씩댈 때까지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미끼를 써서 대어를 낚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딱 한 번으로 해결하지는 못할 테니까.’
성질이 더러워도 공작은 공작이었다. 괜히 그 자리를 오래 지킨 게 아니라서 쓸데없이 눈치가 빨랐다. 미꾸라지가 분탕질하듯 그의 기분을 흙탕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공작을 잡아다 내 아버지에게 바칠 생각이었다.
“안 돼. 널 위험하게 할 수는 없다.”
차근차근 내 계획에 대해 자세히 생각하는데 루베니오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과거에 메이아를 미끼로 썼던 만큼 루베니오도 내 생각을 간파했을 것이다. 일부러 미끼를 자처한 것까지는 모를 것이나 이 방법이 생각 이상으로 효율적이라는 건 공작을 오래 봐 온 그가 더 잘 알았다. 그러나 루베니오의 부정은 빨랐고 생각 이상으로 단호했다.
“…….”
“다른 걸 들어주마.”
나를 달랠 생각인지 루베니오는 부드러운 어조로 내 손을 붙잡았다.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얼굴이 한없이 온유했다. 그러나 피 한 방울 안 떨어질 얼굴이었다. 딸에게 마냥 약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딸의 안전이 중요하다는 뜻일 테지만.
“저는 새처럼 살고 싶어요.”
그 말에 내가 선물한 푸른 그림을 떠올렸는지 루베니오의 파란 눈동자가 쏟아지는 소낙비 같았다.
“자유롭고 싶어요.”
멈추지 않고 속삭이자 루베니오의 표정이 왈칵 괴롭게 일그러졌다.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다……”
“지금 하고 싶어요.”
사실 내 행동에는 모순이 있었다. 나는 가장 우선시해 왔던 생존을 스스로 비틀고 있었다. 루베니오가 공작이 되어야 내가 안전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스스로 미끼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는 건 궁극의 목표를 위반하는 행동이었다. 즉, 생존에 앞선 다른 목표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루베니오를 살리고 싶었다. 그를 위협하는 공작에게는 살심을 느꼈다. 진심으로 공작이 죽었으면 좋겠다. 가능한 한 비참하고 잔인하게 그 목숨이 다하기를 바랐다. 단순히 나를 도와준 루베니오에게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라기에는 깊고 아득했다. 내 머리 한쪽에 니네이나가 살아 그녀의 감정이 전이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웃기게도 그 위화감을 다 느끼면서도 말을 철회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마음이 그랬다. 나는 두 가지 모두를 다 가질 테니까.
이 계획은 그러기 위해 짠 커다란 덫이었다. 공작이라는 짐승을 잡기 위한 사냥꾼의 덫.
“안 되나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루베니오의 협조가 필요했다. 내 조름에 그는 연거푸 마른 숨을 삼켰다.
“조심할게요.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들킬 생각이 만만이지만 나는 달게 웃음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처럼 보이기를 바라면서.
“파티장에는 아, 아, 아빠……의 손을 잡고 들어갈래요.”
아빠. 매끄럽지 않은 발음이 팔뚝에 돋은 소름처럼 우둘투둘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안 넘어오는 건 아니겠지? 당신 루베니오잖아? 나는 몰래 부릅떠 젖게 만든 눈으로 그의 반응을 살폈다. 굳은 얼굴은 화가 나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 뭐라고……?”
“으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데뷔하는 소녀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저는 늦은 편이니까 제 손을 잡고 도와주세요, 아빠…….”
나는 당신을 지킬 테니 당신은 날 지켜 줘요. 그런 마음을 한 움큼 간절히 담아 손을 붙잡았다.
“…….”
나는 종종 그가 참 알기 쉽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짐작되지 않았다. 잠잠히 가라앉은 얼굴은 아주 오래된 옛것 사이를 헤매는 듯하였다. 책에서 보았던 파티장의 루베니오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옆자리를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있다는 걸 강조하며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선을 그었다.
원작의 메이아라고 해서 달랐던 건 아니다. 그는 그녀를 아끼는 다정한 양부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지만, 옆자리는 허락하지 않았다. 가이사에게 보호를 부탁하고 그 자리를 그로 대신 채웠다. 부족함 없는 예법 스승,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 값비싼 장신구 등. 루베니오는 노예 소녀를 화려하게 치장하여 누구도 그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만들면서도 손을 맞잡아 주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이었다. 가까이 있는 것 같아도 멀고 매일 봐도 흐릿한.
그때, 루베니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모두가 널 흠모할 거란다.”
루베니오가 힘을 주자 공기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손이 맞잡아 포개졌다. 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약속했다. 최고의 데뷔를 선물하겠다고.
‘1단계 성공!’
그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불끈 암팡지게 쥐었다. 틈틈이 빗질하던 가이사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접혔다.
‘헉! 봤나?’
그러나 기묘하게 평화로운 꽃바람은 차별 없이 공평하게 스쳐 울었다.
* * *
1단계를 넘었다고 안심하기는 일렀다. 이 몸이라면 파티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픽 쓰러질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정원 산책은 이곳이 워낙 넓어 어쩔 수 없었다지만 파티장에서까지 픽픽 쓰러져 일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건강. 건강. 건강만이 살길이야!’
이 몸에 들어오고 건강 예찬론자가 된 나는 착실히 건강 10계명을 지켰다. 어떤 쓰디쓴 보약도 몸에 좋다면 거부하지 않았고 몸을 혹사하지 않는 수준의 운동 커리큘럼도 착실히 지키는 모범생이었다. 그럼에도 확실하지 않았다. 파티에 나갔으면 적어도 춤 한두 곡은 출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할 테니까.
“춤을…… 배우는 것도 문제인데.”
그런 걱정을 할 때쯤, 루베니오는 훌륭한 춤 선생을 붙여 주었다. 그래서 최근 운동은 춤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종아리가 퉁퉁 붓고 발바닥이 얼얼했으나 어떻게든 한 곡은 출 수 있었다. 춤춘 후 체력이 방전되어 기절하듯 잠들어야 하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래도 예후는 긍정적이었다. 갈수록 몸이 나빠졌다는 원작의 서사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나는 춤과 잠을 번갈아 노닐며 하루를 보냈다. 누가 보면 춤꾼이라고 착각할 패턴이 반복되었다.
“허억. 허억…….”
그러나 어디에나 빛은 있었다. 드디어 춤을 추고 바로 기절하지 않는 데 성공했다. 나는 거친 숨을 가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멋지세요, 주인님!”
“아름다워요!”
우유 빛깔 주인님을 외쳐 줄 응원 부대가 오늘도 잔뜩 와 있었다. 그들의 조련력에 홀린 나는 손을 살짝 흔들 뻔했다. 잠시 살랑거리던 손끝이 춤 선생의 오묘한 시선을 느끼고 내려갔다.
“잠시 나가 있어.”
나는 괜히 그들을 내쫓았다. 응원단장의 지휘하에 부대 전체가 문밖으로 쪼르르 밀려 나갔다.
“……왜, 왜요?”
그러고서 나는 제 발 저린 도둑 티를 냈다. 루베니오가 붙여 준 훌륭한 춤 선생의 정체는 가이사였다. 내 존재를 숨기고 있으니 그보다 적당한 사람을 찾을 수 없어 그랬다.
“그냥 봤습니다. 시선을 끌기에.”
내 손끝이 시선을 끌 만큼 한심해 보였나?
“그런데 가이사는 어떻게 그렇게 춤을 추는 거예요? 저랑은 피부가 닿는 걸 연습했다지만 다른 사람과는 아니잖아요.”
메이아와 첫 춤을 춘 건 가이사였다. 그때 그가 얼마나 두껍고 단단한 장갑을 착용했는지는 5줄 넘게 장황히 서술되어 있었다. 매번 그런 식이었을까?
“직접 춤을 춰야 할 일은 없었습니다.”
“네?”
“눈으로 보고 배웠습니다.”
따로 뭘 가르친 적은 없는데 눈으로 보고 금방 따라 하는 아이를 보고 아이의 천재성을 짐작했다는 어느 부모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가이사는 어린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된 남자였다. 몇 살 때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인간 중에는 최연소라고 했다.
“당연히 천재겠구나…….”
새삼 달라 보여서 놀랐다.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옆에 있어 익숙해지고 친숙해진 탓에 잠시 잊었다. 그는 원래부터 천재였는데.
“재능이 참 무서워요. 건강에도 재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 재능?”
눈동자가 희번덕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만. 당신이야말로 건강에 재능 있는 사람 아니에요? 너무할 정도로 튼튼하잖아요!”
가이사는 사람 기죽이는 신체 능력으로 의도치 않게 나를 도발한 전적이 여럿 있었다. 그가 천재라면 나는 아마 점수를 매길 수 없는 낙제생일 것이다. 가장 잘하고 싶은 분야의 천재는 범재도 되지 못한 사람을 분노케 했다. 그가 미운 건 아닌데 질투가 끓어 어쩔 줄 모르겠다고 할까? 슬프고 분해서 벌떡 일어섰다.
“다시 해요.”
“벌써 말입니까? 조금 더 쉬시는 게 좋을 텐데요.”
“재능이 없다고 무너져 있는 건 성격에 안 맞아요. 격차가 벌어진 만큼 힘껏 쫓아가야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얼마나 좋아지든 범인의 기준을 넘어선 그와 비교하면 하찮을 수밖에 없다. 물이 한 방울이든 두 방울이든, 혹은 웅덩이만 하든 호수만 하든, 끝없는 바다에는 묻히고 말 테니까. 그러나 바다를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의 현상만 보면 어떨까? 물 한 방울과 물웅덩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걸 보려 했다.
“다리가 떨립니다.”
“괜찮아요.”
내 다리는 그냥 새끼 사슴도 아니고 병든 새끼 사슴의 다리 같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심한 작태에 놀라는 사이 그는 한숨을 한 번 푹 쉬고는 나를 살짝 들어 올렸다. 내 두 발이 그의 구두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어?”
“서 있는 것만 하셔도 충분합니다.”
특유의 무덤덤한 눈동자가 너무 가까웠다. 그의 발 위에 올라서도 까마득히 높은 얼굴이었으나 납작한 신발을 신고 서 있을 때와는 느낌이 또 달랐다. 몽글거리고 따뜻한 기운이 손끝에 맺혀 그와 맞잡은 손바닥이 따갑고 가려웠다. 긁어내고 싶은데 그가 눈치챌까 봐 손끝만 조몰락거렸다.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가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어라? 하는 사이에 드레스 밑단이 자르르 흘렀다.
“당신은 그저 편안하게.”
그가 눈짓하자 피아노 건반 소리가 잔잔히 울려왔다. 쿵당당. 쿵당당. 산뜻한 왈츠 소리에 맞추어 누구보다도 무미건조하게 그가 움직였다. 선율은 아름답고 몸 선도 그윽했으나 차가운 바다에 빨려 드는 것 같았다. 아득한 깊이감이 덮쳐 왔다.
“당신은 제 아버지를…….”
그를 가족처럼 여기는 마음이 생겼음에도 나는 아직도 루베니오를 아버지라고 의식적으로 부르는 게 살짝 낯설었다. 누구와든 그 말을 할 때면 눈을 맞추지 못했다. 나는 시선을 피한 채 말을 맺었다.
“좋아하나요?”
우뚝.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던 가이사의 움직임이 멈췄다. 무척 불쾌한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아닙니다.”
흡사 미쳤냐는 느낌이어서 나는 어리둥절했다.
“가이사는 그 사람의 말만 듣잖아요. 그래서 제게도 처음부터 헌신적이었고.”
“저는 루베니오의 말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
“그럼……?”
“당신의 말이면 모를까요.”
지나가듯 툭 던진 말에 가슴 한쪽이 봄의 왈츠처럼 너울거렸다. 사람이라면 그 동요에 휩쓸려 같이 흔들릴 법도 한데 그는 안 그랬다.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뜨겁고 딱딱한 눈은 그 말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의미 없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내 말이면 듣겠다는 말인데.
“아버지의 사람 아니에요?”
“누구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건 불쾌합니다.”
“아. 난…… 그런 의미는…….”
“그래도 원하신다면 당신의 것은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차차 유혹하듯 서늘한 손이 내 뺨을 부드러이 감쌌다. 그의 엄지가 입가를 묘하게 훑었다. 속눈썹 한 올이 묻어 나왔다. 의미 없이 단지 붙어 있는 걸 떼어 준 손짓이었을 것이다. 잠시 머문 손은 그렇게 미련 없이 떨어졌다.
“사람은 싫고…….”
목구멍이 꽉 조여서 쉰 목소리가 내 입을 타고 흘렀다. 헛기침을 두 번 뱉은 나는 언제 긴장했냐는 듯 새침한 얼굴을 했다.
“‘것’이라고 취급받는 건 괜찮아요?”
“무엇이든 ‘인간’보다는 나을 겁니다.”
가이사는 가축이나 물건보다 인간 취급이 더 싫다는 것처럼 눈빛이 서늘했다. 아슬아슬 걷던 빙판이 깨져 얼음 호수 밑으로 빨려 들었다. 공간을 흠뻑 적시는 냉기에 ‘아, 그가 이런 사람이었지.’ 하고 되새겼다. 그러나 나는 그 환멸에 찬 시선에도 기죽지 않았다.
“저랑은 생각이 다르네요. 난 내가 인간인 게 좋아요.”
그의 눈이 문득 맞잡은 손으로 흘러들었다. 새삼 닿은 부위가 끔찍한 것처럼. 나는 움찔 피하려는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발악하며 내던질 수 있음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견디려는 듯 심호흡했다. 나는 그 흔들림을 낱낱이 삼켰다.
“인간…… 싫어해요?”
핏방울 같은 적색 눈이 흔들렸다. 나는 가이사의 혐오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것이 꽤 놀라워서 그가 얼마나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조금 뒤에 알았다.
“…….”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을 낚아채서가 아니었다. 단지 왜 인간을 싫어하는지 떠올린 것만으로 질려 버린 듯했다. 새하얗게 뜬 귀신 같은 형상에 억겁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는 말 알아요?”
나는 일부러 발랄한 목소리를 내 그를 끌어당겼다.
“…….”
상념에서 깨어 나온 그가 눈을 멍하니 들었다.
“사람마다 특색이 달라서 100명의 사람을 모아 물어도 같은 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가 답하지 않아도 나는 혼자 재잘거렸다.
“인간만큼 동족을 괴롭히는 동물도 없을 텐데, 인간 혐오쯤이 뭐 별거인가요?”
“…….”
“당신이 얼마나 많은 이를 어느 정도로 끔찍이 생각하든 난 나만 안 싫어하면 돼요.”
구름이 한 번 흘러 햇빛이 쫙 내리쳤다. 번쩍이는 햇빛을 머리에 두른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도 싫어요?”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오만함이라고 해도 좋았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그의 대답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요. 당신은…… 싫지 않습니다.”
그는 나보다 한참 뒤늦게 예상 답안을 알아챘다. 좋아하냐고 물었으면 쉽사리 응답하지 못했겠지만 싫어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빙그르르 돌아 춤을 마무리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선생님.”
후들거리는 다리로도 흐트러짐 없이 인사를 끝냈다. 얼른 쉬고 싶어서 소파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 덥고 힘드네요. 시원한 거 먹고 싶다.”
가이사의 몫으로 나온 얼음이 든 오렌지 주스가 탐났다. 내 몫인 레몬차 따위는 됐고 얼음이나 서걱서걱 씹고 싶었다. 욕망을 담아 빤히 바라보자 홀로 시간을 정지한 채 우뚝 서 있던 그가 다가왔다.
“드세요. 아직 입도 대지 않은 겁니다.”
“어? 정말요?”
차가워서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선선히 컵을 내밀었다. 내 얼굴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해사하게 피어났을 것이다.
뿅! 내가 막 컵을 잡으려 할 때 작은 불꽃이 퐁 터지며 붉은 정령 하나가 나타났다. 아기 도마뱀처럼 생긴 정령이었다.
“어? 얘는 누구예요?”
“후나입니다.”
“후나? 바람의 정령은 아닌 것 같은데요……?”
“불의 정령입니다.”
“다른 속성의 정령과도 계약할 수 있나요?”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요. 소나만큼 잘 다룰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은 정령이었다. 그는 책 속 서술만으로도 압도적이었는데 인제 보니 그게 최선을 다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이 남자의 최대 전력은 어디까지지?’
하지만 어떤 능력이 더 있냐고 추궁하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나는 궁금증 하나를 삼키며 정령을 가리켰다.
“어…… 그런데 얘는 왜요?”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그가 손을 까딱하자 아기 도마뱀 정령이 입을 쩍 벌리더니 불꽃을 후 내뿜었다. 조그만 입에서 정령보다 커다란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컵을 잡은 손은 하나도 안 뜨거웠지만 잔잔한 주스 수면 위에 거품이 보글보글 일었다.
“하하. 지금 주스가…… 끓고 있는 건가요?”
“뜨거우니까 조심히 드세요.”
그는 얄밉도록 다정한 말을 하며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장난하냐! 시원한 거 마시고 싶다고 했잖아!’
당장 컵을 내던지며 성을 내고 싶었지만 또랑또랑한 눈망울 한 쌍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때? 맛있어?’
잔뜩 기대한 눈동자가 그리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귀엽고 앙증맞은 것에 약했다. 울 수도 없고 물릴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뜨끈한 주스를 후후 불어 마셨다. 맛은…… 그래. 용암으로 만든 오렌지 요구르트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뜨겁네요…….”
“끓였으니까요.”
그가 정령을 돌려보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속이 끓고 목이 끓었다. 후끈후끈한 게 건강에는 좋을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요. 좋은 쪽으로 생각하죠, 뭐.”
에효. 숨 한 번 내쉬고 뜨거워 느글거리는 주스를 삼켰다. 정령이 벌써 돌아갔음에도 바닥을 다 드러낼 때까지 끊임없이.
“흐어…….”
혀가 괴로워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엄청 맛없는 죽 한 그릇을 비운 기분이었다. 역겨움 탓인지 포만감 탓인지 잠이 슬쩍 왔다.
“몸을 너무 많이 움직였는지 살짝 졸리네요.”
“많이 졸리신 것 같습니다.”
“으응…….”
어디선가 얄미운 말이 들렸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뺨에 닿는 시선이 뜨끈뜨끈했다.
* * *
니네이나는 컵을 꼭 붙잡고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
주스를 홀짝홀짝 삼키는 니네이나를 예술품 보듯 관람하던 가이사는 손을 쓱 뻗어 컵을 빼냈다. 기우뚱 기울어진 몸은 그가 내민 쿠션에 안착했다. 잠에 빠져 색색 내쉬는 숨이 달았다. 하나뿐인 소중한 유리구슬을 보는 시선이 언뜻 황홀했다. 가이사에게 니네이나는 낯설고 이상한 생물이었다. 처음에는 이토록 약한 주제에 살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게 다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그는 생경한 경험을 꽤 많이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가만히 잠든 그녀를 지켜보는 일이 생각만큼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단순히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흔적인 덕일까? 그것도 물론 좋지만 니네이나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자기 한 몸도 못 챙기는 주제에 은근히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이 가당치 않아 더욱 묘했다. 그런 걸 느낄 때면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마음이라는 존재가 흔들렸다. 벽을 쾅쾅 두드리는 쇠망치 같기도 했다. 저 조막만 한 손이 우습게도 아주 강력한 쇳덩이가 되곤 했다. 그러면서 하고자 하는 건 어찌나 많은지 작은 머리를 쉬지 않고 돌려 댔다. 이번에도 무슨 일을 꾸미는 것 같은데 지켜보고 있으면 심심하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가이사는 가능한 한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랐다.
가이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녀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일 텐데 활발하게 쫑쫑거리는 걸 말리지 못했다. 그 모든 것이 창공 같은 푸른색 눈을 더욱 반짝이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끔 그녀의 눈이 얼마나 더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눈빛을 지켜 주고 싶다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도 해 버렸다. 루베니오와의 약속은 그가 준 도움에 대한 부채이자 대가일 뿐이어서 서둘러 끝내고 싶은 귀찮은 일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그것이 가이사의 유일한 즐거움이 되었다. 우습게도 이 일이 홀로 지쳐 버린 가이사를 휴식하게 했다. 그는 눈의 깜빡임조차 잊고 그림처럼 앉아 아주 조용히 니네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님, 라일입니다.”
그러나 얼마 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잠시 허물어졌던 얼굴도 단단한 금속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 * *
“으음…….”
눈을 떴더니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가이사가 보인다. 신은 공평하여 얄궂은 성격과 아름다운 얼굴을 주었으니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고 좋았다. 매끄러운 턱에 고여 있던 시선이 날카로운 콧대에 머물렀다가 섬세한 눈가에 정착했다. 보통 사람의 표정에 비하면 차게 식은 편이지만 요즘에는 가끔 온기도 띠곤 했다. 누에가 죽음과 맞바꿔 뽑아낸 검은 비단실처럼 한 올 한 올 윤택한 속눈썹과 칙칙한 적색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데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주인님?”
“아. 들어와.”
집사 라일이 문을 활짝 열었다. 끝까지 열어젖혀 고정하는 것이 평소와는 뭔가 달랐다. 흡족한 얼굴로 위풍당당 걸어오는 라일의 뒤로 상자를 든 하인 여럿이 뒤따랐다.
“그게 뭐야?”
“큰 주인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선물?”
라일의 옆으로 그와 똑같은 집사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섰다. 같은 옷을 입어서가 아니라 두 사람은 확실히 닮아 있었다.
“제 동생입니다.”
“시엘 스프리스입니다. 루베니오님의 가택 집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라일 스프리스와 시엘 스프리스. 형제가 나란히 집사로 일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라일도 원래는 아……버지의 집사였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딸에게 형 쪽을 보낸 것이 의외라면 의외고 그답다면 그다웠다.
“보내셨다는 선물은 뭐야?”
“직접 보시겠습니까?”
집사들의 손짓에 하인들이 상자 여럿을 척척 열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를 보고 귀금속이 들어 있으리라 예상하기는 했다.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번쩍번쩍했다. 이게 다 돈인데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너무 좋아하는 티는 못 내고 소파 팔걸이만 꽉 움켜쥐었다.
루베니오는 돈이 많다. 그의 자금력은 공작에게 물려받은 재산 덕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재산에 비하면 물려받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바로 투기의 신, 땅 부자였다. 노른자 땅에서 캐낸 광물로 추정되는 아기 주먹만 한 광물이 특히 눈에 띄었다.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닌데 새빨간 불꽃의 색에 눈이 아릿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황홀히 바라보게 되었다.
“드래곤 하트(dragon heart)입니다.”
우지끈! 퍽!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뭉툭한 무언가가 머리 위로 날아왔다. 북부의 숲에서만 난다는 흑단목에 어린 송아지 가죽을 붙이고 금을 섞어 황금 장미를 수놓은…… 딱 이 소파 팔걸이 같은데? 정체를 파악하기 무섭게 부러진 소파 팔걸이가 낙하했다. 반응까지 지독히 형편없는 몸으로 이제 와 피하기는 늦어서 어깨만 움츠렸다. 그러나 반쯤은 예상한 대로 그것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림자가 더 크게 져 너울거렸다. 벽면에 비친 그림자가 인간을 잡아먹으려고 찾아온 오후 6시의 괴물 같아서 목덜미가 스산해졌다.
“가이사?”
이름을 부르자 그의 고개가 꺾였다. 질기게 달군 쇳덩이 같은 시선이 인두처럼 끔찍하게 달라붙어 살갗이 다 짓무르도록 태웠다. 베인 듯 터진 듯 따가운 뺨을 감싸자 무기질적인 시선이 변했다.
“다쳤습니까?”
뺨을 스치는 서늘한 손끝에 피가 배어 나온 건 아니었다. 괜히 유난을 떤 것 같아 민망했다.
“아니요. 방금 피부가 찌릿거렸는데…… 착각인가 봐요.”
그렇게 말하며 부러져서도 우아한 팔걸이를 바라봤다. 도끼로는 자를 수도 없다는 단단한 각목을 움켜쥔 손등이 창백했다.
“그런데 그거 지금 맨손으로 부러트린 거예요?”
“아.”
어딘가에 홀로 서 길을 헤매던 얼굴이 황망함에 젖었다.
“마음에 들던 소파였는데.”
안타깝다는 듯 말하자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짙어졌다. 나는 그 모습을 면밀히 관찰했다. 가이사가 이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문제가 된 건…… 드래곤이려나?
드래곤 하트. 그는 분명 보석의 이름에 반응했다. 평범한 광물에 특별한 힘이 있어 보이지는 않으니 이름 자체에 반응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드래곤의 피와 드래곤의 하트. 가이사와 ‘드래곤’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그는 그 입으로 직접 자신은 드래곤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팔걸이를 내려놓은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같은 것으로 다시……”
“주문 제작한 물건이라 같은 것은 구할 수 없습니다.”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의 라일이 톡 쏴붙였다.
“……변상하겠습니다.”
“들었지? 가이사 앞으로 값 달아 놔. 하나뿐이라는 희소성도 톡톡히 쳐서.”
“알겠습니다, 주인님.”
사양하는 법이 없는 새침함을 집사가 잘 키운 아이 보듯 흐뭇하게 바라봤다. 살짝 민망했다.
“가까이서 볼래.”
하얀 장갑을 낀 라일이 남색 벨벳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거센 불길 같은 시선 하나가 쫓아왔다. 가이사였다. 역시 이 보석에 관심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흐음?’
나는 그 사실을 모르는 체하며 붉은 광물을 살짝 만졌다. 막눈이라 봐도 모르겠다.
“진짜 심장이라는 건 아니지?”
“예. 루비인데 그 정도 캐럿의 보석에는 이름이 붙기 마련이니까요.”
집사의 말에 가이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정확히는 그의 발언을 혐오하는 것 같았다. 보석에 ‘드래곤 하트’라는 이명을 붙인 게 몹시 불쾌한 것 같았다. 그럼 바꾸면 되지.
“하필 심장이 뭐야? 누가 붙인 이름인데?”
“보석의 이명은 보통 가공한 이의 몫입니다.”
“이제 내가 주인이니 내 마음이지. 이제부터 이건 그냥 ‘레드’야.”
“예?”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집사가 당황했다. 귀한 보석의 이명으로 단 두 글자의 단순한 단어를 붙여 놨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내 마음이었다.
“왜? 별로야? ‘태양의 눈물’이나 ‘불꽃의 인페르노’ 뭐 이런 것만 해야 돼?”
“아, 아닙니다. 훌륭한 작명 실력이십니다. 이름까지 지어 주시며 아껴 주신 걸 알면 큰 주인님께서도 흡족해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거…… 이거…… 끙! 으윽!”
내 손가락은 광물을 집어 올리지 못하고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든 들어 보려 노력하는 주인의 비통한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던 몇 명이 촉촉한 눈을 하고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젠장! 이까짓 거…… 이까짓…….
“그건 마법으로……”
라일이 무어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뽁!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보석이 가볍게 뽑혀 나왔다.
“고정되어 있었을 텐데…….”
라일은 의아한 눈치였다.
“여기 있습니다.”
가이사는 오로지 나만 봤다. 누가 보면 충직한 사람인 줄 알 정도로 곧게.
“아, 고마워요.”
중간에 마법이 풀린 것인지 가이사가 힘으로 뽑은 것인지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보면 둘 다 말이 안 됐다. 고가의 보석에 건 마법은 해제 마법을 걸지 않는 한 풀리지 않게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힘이 없다지만 들썩거리지도 않은 걸 봐서는 마법은 유효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마법은 아무리 힘이 강하다고 해도 힘만으로 파괴할 순 없었다.
그럼 무엇일까? 가이사가 스스로 마법을 해체했다는 쪽이 가장 설득력이 높았다. 그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일까? 마법 생물이라고 알려진 드래곤에 대해 민감하다는 점이 다시 떠오른다. 이 남자…… 대체 정체가 뭐야?
“근육이 놀랄 수 있으니 너무 세게 쥐지는 마시고 이렇게.”
얼이 빠져서 그를 보는 사이 그는 어떻게 하면 손목에 무리가 안 가게 무게를 분산할 수 있는지 따져서 손 모양도 잡아 줬다.
“가이사. 당신…….”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통 이렇게 말을 바꾸면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이었는지 궁금해해야 하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내게 보석을 쥐여 주는 것에만 집중한 옆모습은 악마인지 천사인지 알 수 없게 유려했다. 당신은 대체 뭘까?
나는 더 묻지 않고 보석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뼈가 덜렁이는 약해 빠진 손목에 시큰한 느낌이 들었으나 나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것을 들 수 있었다.
“오…….”
아령을 들듯 부들부들 떨며 보석을 위아래로 살짝 까딱거리자 누군가 짝짝짝 박수까지 쳤다. 깔짝깔짝 들리던 박수 소리가 잦아들 때쯤 나는 치마 위에 광물을 툭 내려놓으며 손목을 털었다.
“후…….”
“훌륭하십니다.”
집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또 예의 그 흐뭇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이거 어디에 쓰지? 너무 무거워서 하고 다닐 순 없잖아.”
“운동할 때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침 무게도 적당하고.”
가공사가 이름까지 지은 귀한 보석이라면서?
“설마 지금…… 농담한 건가요?”
아. 말하고 보니 그랬다. 웃어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물론 진담입니다.”
“운동 기구라니……!”
집사가 흥분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래. 당신이 생각해도 참 어이없겠지.’
라일이 붉어진 얼굴을 가이사를 향해 번쩍 들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뭐요?
“쥐기 쉽게 이런 모양으로 가공하면 어떨까 하는데.”
“오오!”
그들은 그림까지 그리며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여기에 이런 장식을 다는 건 어떻습니까?”
형을 멀뚱히 지켜보던 시엘이 조언을 툭 던졌다.
‘집사 동생 당신마저……!’
그래. 기대한 사람이 멍청했다. 그들의 행동에는 이골이 났는데도.
“그럼 주인님, 곧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하겠습니다.”
“……레드를 어떤 운동 기구로 만들지에 대한 보고서 말이야?”
“활용 방안이나 구체적인 디자인도 함께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
반쯤 해탈한 정신이 생각했다. 어차피 받은 건데 운동 기구든 뭐든 쓰임이 있으면 좋은 게 아니겠냐고. 그래. 이딴 몸으로 뭘 하겠어? 크흑.
‘사는 게 뭔지…… 참 쓰다. 써.’
배신당한 사람처럼 꿈틀대는 내 마음도 모르고 셋은 내내 속닥거렸다.
“이건 뭐야?”
말을 돌리자 잠시 딴 세계에 빠져 있던 집사가 본분으로 돌아왔다.
“파티 초대장입니다. 원하시는 파티를 고르시면 그때에 맞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려 합니다.”
장신구가 한가득 배달 온 이유가 그래서였다. 까마귀 둥지처럼 온통 반짝거려서 저것들 중 필요한 걸 고를 체력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으음.”
작은 함에 가득 든 초대장을 하나씩 넘겨 봤다.
“이건 제자리에 돌려놓겠습니다. 떨어트리셨다가 발이라도 찧으면 안 되니.”
가이사는 보석만 쏙 건져 갔다. 보석함에서 마법의 이음새가 다시 맞물리는 소리가 종이 스치는 소리에 삼켜졌다.
* * *
나는 드레스와 장신구를 다 정해 놓고 아직 어느 파티에 참석할 것인지를 못 정하고 있었다. 경우가 좀 특별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데뷔탕트라고 정해진 파티일에 데뷔탕트를 치를 수 있는 건 17세의 소녀였다. 나는 아파서 그 시일을 놓쳤는데, 그럴 경우 정해진 데뷔탕트일이 아니라 따로 무도회 데뷔를 해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데뷔 같지 않은 데뷔가 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리고 반대로 홀로 주인공이 되어 주목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둘을 가르는 건 얼마나 주목도를 높이는지에 달렸다. 물론 루베니오의 힘이라면 초라한 데뷔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보내 준 초대장 중 어느 것을 선택하든 그는 파티 주최자를 씹어 삼키고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황궁 무도회.
황궁에서 주최하는 무도회는 공작이라도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른 무도회를 골랐다면 루베니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파티에 공작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궁 무도회는 달랐다. 그곳에 참석하면 공작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루베니오가 준 초대장에는 애석하게도 황궁 무도회만 쏙 빠져 있었다. 초대장을 구하지 못한 건 절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내 눈을 가리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루베니오에게는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생각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밑장 빼기에 그냥 당할 줄 알아요?’
당장 초대장 전부를 다 물렸다. 제 발 저린 루베니오가 안달복달하며 찾아올 때까지.
* * *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니 미안하구나. 조만간 보테크 후작의 별장에서 무도회가 열리는데 그곳은 어떨까? 푸른 호수가 무척 낭만적인 곳이지.”
“저만을 위한 파티를 열어 주시기는 힘들겠죠?”
방긋 웃는 딸의 얼굴에 반짝 튕겨 올랐던 눈동자가 침전했다.
“안 되나요?”
안 되고말고.
세이아 가문에서 주관하는 파티에, 그것도 후계자인 루베니오의 하나뿐인 딸의 데뷔에 수장인 공작이 안 온다면 어떨까? 격식을 아무리 갖춘들 구설수에 오를 것이다. 내 데뷔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말에 따르라는 공작의 협박이 필연적으로 따라올 테니 이것도 루베니오의 선택지에서는 제외될 것이다. 나도 루베니오가 직접 파티를 열어 주기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괜히 공작의 위세에만 힘을 실어 주는 꼴이니. 원하는 건 황궁 무도회 단 하나였다.
“지금은 일이 바빠서…….”
그는 우선 바쁘다는 핑계를 대었다. 숨기고 감추는 게 어찌나 능한지 원작을 알지 못했다면 금세 속아 넘어갈 애절함이었다.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그때라도 괜찮다면 열어 주마.”
그때라면 공작을 제거한 후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으응. 괜찮아요.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에요. 저는 이번 달에 꼭 파티장에 가 보고 싶은걸요.”
진심이었기에 안절부절못하는 그에게 넉넉하게 웃어 줄 수 있었다. 뭐든 들어주겠다고 했으면서 한 번 거절해야 했던 그의 마음이 안 좋은 건 분명했다. 이쪽도 일종의 밑장 빼기였다.
“그럼 가장 화려한 무도회에서 데뷔할래요.”
나는 최대한 환하게 웃었다. 기대를 한껏 담은 내 미소가 그를 무찌르도록.
“그래. 당연히 가장 화려한 무도회에서 데뷔를…….”
맞장구를 쳐 주던 루베니오의 눈동자가 머뭇거리며 떨렸다.
“황궁 무도회.”
바라는 건 오직 그거 하나인 것처럼 들뜬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황궁…… 무도회 말이니?”
“네.”
비 맞은 고양이를 상상하며 반짝반짝 애처롭게 눈을 빛내자 그는 힘없이 스러졌다.
“안 되나요, 아빠?”
“윽…….”
나는 작게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루베니오를 잔인할 정도로 압박했다. 반짝반짝. 두 눈을 짙게 빛내자 루베니오의 유려한 뺨이 파르르 요동쳤다.
“아빠…… 내가 아빠가 맞긴 한데…….”
그는 바보처럼 중얼거리며 얼굴을 서서히 붉혔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버틴다.
“칫.”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허락에 무심코 뱉은 진심이 그를 눈뜨게 했다.
“니네이나?”
아차 싶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부릅떴다. 연약한 눈자위가 시린 바람에 부딪혀 금세 촉촉해졌다.
“딱 한 번뿐인 데뷔일인데…… 그래도 아버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황궁 무도회에 가고 싶지만 아버지를 위해 참겠다며 눈에 그렁그렁한 아쉬움을 애써 삼키는 연기가 완벽했다.
“니, 니네이나…….”
결사 항전하는 내 모습에 그는 침통해졌다.
“저토록 가고 싶다는데 그냥 보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녀의 2차 기 싸움을 무심히 관찰하던 가이사가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의견을 냈다. 옳지! 잘한다! 나는 웬일로 짝짜꿍이 맞는 그를 열심히 응원했다.
“당신이 이곳을 드나들 때처럼만 하면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곳에 올 때 루베니오는 하늘을 이용했다. 땅에서 볼 수 없을 만큼 고공에서 접근하니 들킬 염려가 없었다.
“사람 많은 무도회장에서 직접 뭔가를 할 리도 없고 예상치 못한 등장에 대비할 수 있을 리도 없습니다.”
가이사는 내 눈동자를 찬찬히 바라보며 속삭였다.
“또…… 제가 항상 옆에 있을 테니.”
흔들리던 루베니오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아버지의 눈에는 저놈이나 이놈이나 다 같은 짐승인가 보다.
악수로다, 짐승아. ……아름다운 푸른 눈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 *
타협은 쉽지 않았다. 과정이 참 길었다. 이것저것 지난했다. 그래도 결론을 말하자면 어쨌거나 허락이었다. 나는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가이사와 루베니오 사이에 끼어 다니겠다는 약속을 단단히 하고.
─곁에서 떨어지지 말렴.
루베니오는 가이사를 경계하며 그렇게 말했지만 결국 그런 의미였다. 샌드위치가 되라는 말. 그때 가장 이상했던 건 가이사였다. 그땐 급해서 미처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가 남을 이유 없이 도와주는 인물이었던가? 이건 꼭 캐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내 편을 들어 줬어요?”
직구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을 법한데, 가이사는 뺨의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편입니다.”
그는 신의 신실한 종처럼 말했다. 차가운 얼굴로 우두커니 서서.
“…….”
아무래도 레어노스에 대해 물어보던 그때 뭘 잘못 먹은 게 분명했다. 단단히 체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도 잊고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내 손이 왜 여기에……?”
나는 가이사의 배 바로 위 허공에서 시계 방향으로 빙글빙글 도는 내 손의 움직임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소화가 좀 되어야 할 것 같아서요.”
“만져도 됩니다.”
그러나 가장 기이한 건 역시 그였다. 이런 식의 태도는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됐다. 물지 않느냐는 물음이 뒤따라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저는 개가 아닙니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당신이 저를 개자식처럼 본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냥 감입니다. 눈빛이 그러할진대 모를 리 없죠.”
개자식. 이걸 욕설로 치부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선뜻 결론이 나지 않았다.
“개자…… 흠,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 했어요.”
“당신의 기준에서 볼 때 제가 얼마나 위험하고 쓰레기 같은지 알겠습니다.”
“네? 아니, 갑자기 왜 그렇게 된 거죠?”
“제가 당신을 도울 리 없다고 믿으시니까요.”
그의 싸늘한 얼굴 어디에서도 상처 받은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며 덤덤히 고할 뿐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감정을 가진 나는 몹시 찔렸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내 눈빛에 상처 받았어요?”
“새삼스럽게 그렇지는 않습니다.”
새삼스럽지 않다는 말에 상처 받은 건 나였다. 정확히 말하면 상처는 아니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께름칙함이다. 괜한 사람을 괄시하고 모욕한 것 같은 죄책감. 그 감정이 몸서리나게 싫고 미안해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안해요, 함부로 생각해서.”
“이제 제가 당신을 위한다는 걸 믿어 주실 겁니까?”
“으응?”
뭔가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덫을 판 사냥꾼에게 걸린 토끼가 된 기분. 무어라 설명하기 복잡한 찝찝함 말이다. 이상했다. 덫은 내가 파고 있었는데.
“아직 아닙니까?”
가이사는 답지도 않게 시무룩한 척을 했다. 전에 당한 게 있어 이제 나는 그에 대해 좀 알았다. 가이사는 필요가 있다면 얼마든지 그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걸 아는데도 데미지가 컸다. 죄책감을 마구 자극당해서 뒷목이 얼얼했다.
“아니, 믿어요…….”
소리는 작고 뒤는 질질 끌렸으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썩 만족스럽지는 않으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몰겠다는 사냥꾼의 눈초리였다.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네? 뭐가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왜 편을 들어 줬냐고 물으셨던.”
그걸 이제야? 내 황당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표정에 별 변화가 없었다.
“전에는 좀 더 무시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당신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가이사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그의 얼굴 위에 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얼굴 탓인지 밤의 쓸쓸한 정경도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를 고독하게 보이게 했다. 나는 그런 남자를 괜스레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무섭도록 솔직하네요.”
“예.”
짙게 물든 붉은 눈동자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알고 있었는데 곧바로 저렇게 말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후…….”
사람 열 받게 하는 말투에 속이 또 끓는 걸까? 지글지글한 이마를 손등으로 식히자 그가 걱정스러운 낯을 하고 다가왔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고양이가 쥐를 걱정하는 꼴이었다.
“이건 혼자 있으면 낫는 병이에요.”
“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까?”
“예.”
그를 따라 하며 단호하게 말했더니 그는 그럼 쉬라며 나갔다.
“원하는 대로 됐는데 왜 열을 받을까?”
최근 감정의 높낮이가 들쭉날쭉했다. 이리 튀었다가 저리 튀었다가 했다. 이마를 툭툭 짚으며 왜 그럴까 골똘히 생각할 때였다.
“다 생각하셨습니까?”
그가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시계를 올려다보니 이제 겨우 30분 지났다.
“싸우자는 건가?”
“아닙니다.”
“귀는 밝아서…….”
소곤거리는 혼잣말도 다 알아들었다.
“다음부터는 모르는 척하겠습니다.”
그게 더 기분 나쁘거든! 음침하게 뭐 하는 짓이에요! 빽 소리치고 싶었지만 성대를 위해 참았다. 이 저택은 경비가 허술하지 않은 곳이었다. 곳곳에 배치된 기사나 복도를 지나다니는 하녀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문밖에 서 있지 말고 일단 들어와요.”
문이 조용히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30분 내도록 거기 서 있었던 건 아니죠?”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했고 정확히 30분이 흐른 뒤 노크 소리가 났지만 그래도 설마 했다.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죠!”
“…….”
“모르겠다는 얼굴 하지 말아요!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에요?”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조금 전에도 느꼈지만 뭘 해도 무덤덤한 남자에게 혼자 화내려니 혼자서만 난리 치는 것 같았다.
“……왜 거기 그렇게 서서 기다렸어요?”
“근처에 있어야 안심이 됩니다.”
분위기가 야릇했지만 속으면 안 된다. 그는 나를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일 테니까.
“옆방이잖아요. 밤에도 거기서 자면서.”
“체력 보충은 중요한 일이지만 일정 시간 이상 할 필요는 없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있어야 좋습니다.”
그를 멀뚱히 세워 두고 내가 느낄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서 있으면 다리 안 아파요?”
“괜찮습니다.”
“보는 내가 아프니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아요.”
“예.”
군말 없이 고분고분 따라 주는 건 좋은데 명령처럼 말하지 않으면 안 들었다. 그가 자꾸 사람 성격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명령보다는 부탁이 낫고 부탁보다는 배려가 낫다는 게 내 신조인데.
“앞으로는 방에 가 있어요.”
“또 쫓아내실 겁니까?”
주인만 쫄래쫄래 찾는 강아지도 아니고 이 남자가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새삼 분리 불안이 생긴 것도 아닐 텐데 요즘 왜 그래요? 생각해 보니 진짜 이상하네. 근래에 진짜 한 번도 안 떨어진 것 같아.”
가이사는 수면과 식욕을 비롯한 필요조건과 몸을 씻는 시간 같은 특수 조건만 충족하면 그 외의 시간은 늘 내 근처에 있었다. 그림자처럼 맴맴맴.
“분리 불안입니다.”
“……하나도 안 불안한 얼굴인데요.”
“적응 훈련입니다.”
“…….”
가이사는 하나가 안 통하자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똑같은 패턴으로 다른 걸 내놓았다. 추운 겨울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것 같았던 지난날의 서늘한 침묵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인데 인간이 이렇게 간사했다. 나아지면 더 나은 걸 추구하고 쉬고 있어도 더 잘 쉬고 싶었다.
“매일 손잡고 있잖아요. 춤추면서.”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진도를 더 나갈 때가 됐습니다.”
“지…… 진도요? 무슨 진도?”
우리 사이에 진도는 무슨! 놀라 혀를 깨물 뻔했다.
“조금만 더 하면 표식도 영구적으로 새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표식이라면…… 바람의 정령을 부를 때 필요하다던 그거 말인가요? 새길 때 맨살을 접촉해야만 했던?”
소나라고 이름을 부르면 정령이 소환되어 표식을 다시 새겨야 하기 때문에 말하는 데 조심해야 했다. 그는 그 행동을 지금껏 끔찍하게 생각해 오지 않았던가?
“맞습니다.”
“어…… 그건 좋네요. 손 닿는 건 많이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불쾌할 거 아니에요?”
“…….”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뭐라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그걸 하면 절 죽이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제 안 죽입니다.”
“이제? 그 말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전에도 나 안 죽이기로 했잖아요!”
“……안 죽입니다.”
“정말?”
“예.”
그 뒤로도 몇 번 더 찔러서 절대 안 죽인다는 확답을 받아 냈다.
‘나 진짜 안 죽여?’
‘그렇다니까!’
대강 이런 대화가 핑퐁핑퐁 몇 분간 오갔다. 말은 누가 못 해? 그래도 지긋지긋해하지 않고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걸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건데요? 표식을 영구적으로 새기려면.”
“그건……”
“아! 잠깐만요! 그 전에, 나한테 그런 걸 영구적으로 줘도 돼요?”
“괜찮습니다.”
“와…… 이 호구!”
“호……구……?”
이 세계에 없는 말이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게 뭐냐고 물어 오는 눈빛을 어색하게 피했다.
“아니. 잠깐 말이 헛나왔어요. 취소예요.”
그런데 진짜 호구였다. 판타지가 난무하는 이 세계에서도 정령술은 귀한 재능이었다. 그런 걸 남한테 덥석, 그것도 영구적으로 주겠다니.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지?’
전혀 그런 것에 빗댈 남자가 아닌데 가련한 소쩍새 같았다.
“설치가 가능하니 해제도 제 재량입니다.”
“아.”
마냥 호구는 아니었구나 싶어 다행스러웠다.
“흘려 넣은 걸 주워 담을 순 없으니 의미가 퇴색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지만.”
“그 방법이라는 게 뭔데 그래요?”
“점막 접촉을 통한 체액 전달입니다.”
참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이 들려올 것 같은 얼굴로 가이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던졌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뇌가 살짝 돌아 해석이 안 되는 건가 하고.
‘점막 접촉…… 체액 전달……?’
가감 없이 객관적인 부분만 담은 간결한 설명법이었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도록. 아니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직접 물어보는 게 먼저였다.
“점막이라면?”
“일반적으로 구강이나 생식…… 읍!”
나는 허튼소리가 더 나오기 전에 그 입을 막았다.
‘점막 접촉이 그렇다면 체액……은?’
체액 전달. 체액이란 무엇이냐? 체액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던 얼굴이 펑 터졌다.
“쓰러지실 것 같습니까?”
열이 올라 벌겋게 상기한 귀는 그의 말을 대강 흘렸다.
“여기로 쓰러지세요.”
친절하게도 쓰러지면 머리가 닿을 곳에 쿠션 하나가 쓱 밀려왔다.
“내가 지금 그걸 쓰겠어요?”
가감 없는 속내에 그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쿠션은 치우지 않는 작태에 머리가 빙글 돌았다.
‘흥분하지 말자. 나만 손해야.’
가이사는 순진한 어린애 같은 사고를 했는지도 모른다.
‘키스나 성관…… 흠, 이건 아니고. 그래. 인공호흡 같은 거겠지.’
치료 혹은 보호를 위한 마땅한 행위. 그것을 제안한 것에 잘못은 없었다. 강제로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열 낼 필요가 전혀 없는데 왜 이렇게 뜨겁지?’
방 안은 쾌적한 실온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더웠다.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거죠?”
“예.”
역시 지금 당장 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접촉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가능한 선택지가 늘어난다는 것이지.
“이제 진도를 나가도 됩니까?”
할딱거리던 숨이 안정 궤도를 찾자 가이사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물어 왔다.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기다란 손가락이 그가 입은 옷의 가장 위 단추에 걸려 있었다. 목 끝까지 채운 금욕적인 인상이 흐트러졌다.
“자, 잠깐! 그 단추 풀면 두고 봐요!”
나는 빽까지는 아니고 성대를 생각해 삑 소리쳤다. 그의 손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내려왔다.
“사람 참 그렇게 안 봤는데…… 성격이 왜 그렇게 급해요?”
“그게 아니라 더워서 그랬습니다.”
엥? 화르르! 얼굴에 불이 활활 붙었다. 장작도 안 넣었는데 잘도 탔다.
“이상하게 좀 덥습니다.”
“그, 그렇죠?”
혼자 더운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이 됐다.
“날이 추워져서 난방을 세게 했나?”
“아닙니다. 방의 온도는 그대로입니다.”
“…….”
“열이 오른 건 제 몸이고.”
사실 그대로를 직시하는 얼굴에 다른 감정은 없다. 없다. 없는 거 아는데 왜 우리 둘 다 열이 올랐을까요?
─열이 오른 건 제 몸이고.
그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자꾸 맴돌아 도무지 잠재울 수 없었다.
“당신도 더우십니까?”
뜨거운 얼굴을 가만히 식히고 있는데 그가 눈치 없이 다가왔다. 퍼뜩 고개를 들자 아직도 단추 언저리를 맴도는 손이 보였다.
“그 단추 말고 소매 단추만 풀어…… 흠, 소매 단추를 푸는 건 어때요?”
급하게 말리려다가 또 명령처럼 말했다는 걸 알았다. 정정하긴 했어도 가이사는 기분 나쁜 티조차 내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푼 소매 단추에 소매가 아래로 털썩 내려왔다. 흔들리는 하얀 셔츠 사이로 핏줄이 선명한 손목이 두드러졌다.
“흠, 손까지는 했으니까 오늘은 손목에 도전해 보죠. 벗은 몸을 다 맞닿겠다는 당신의 방법은 너무 과격한 것 같아요.”
“예.”
최근 가이사가 거부의 말을 하는 것을 거의 못 들었다. 그는 이번에도 순순히 겉옷을 벗고 소매도 걷었다. 뼈대와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팔 같았다. 체지방량이 대체 몇 퍼센트인지 팔도 흉곽처럼 근육이 불끈했다. 근육이 잡혀 홈이 꽉 팬 팔뚝에 손을 살짝 가져다 대자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봐요. 천천히 하길 잘했죠?”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이는데 초조한 기색이었다. 말도 없어졌고.
“상처가 꽤 많네요.”
팔꿈치 바로 위까지만 걷었는데 눈에 띄는 상처가 손 한쪽을 넘었다.
“이것도 치료받은 겁니다, 아버지께.”
“그…… 레어노스라는 분 말인가요?”
“네. 이미 아물어 상흔만 남은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럼 저런 상처가 얼마나 더 많았다는 건가 싶어 아득해졌다. 내 아연실색한 얼굴을 봤는지 그가 소매를 살짝 당겼다.
“흉하니 눈에 담지 마세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오래된 상처 같은데.”
몸은 자라도 한번 남은 상처는 자라지 않았다. 당시에는 깊었던 듯 자국이 선명했지만 세월에 따라 무뎌진 흔적이 보였다. 이곳에 떨어지기 전에 크게 넘어져 비슷한 상처가 있었기에 잘 알았다.
“열 살? 아마 그때쯤일 겁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무얼 하고 돌아다녔기에? 가이사의 과거는 원작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남은 흔적들로 치열했겠구나,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퍼런 핏줄 위를 섬세한 악기 다루듯 가볍게 눌렀던 손가락을 떼고 이번에는 조금 힘 있게 손바닥 전체를 붙여 보았다. 부르르 떨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피하고 싶었는지 손가락이 약하게 꿈틀거렸다. 하도 단단해서 겉가죽만 조금 눌릴 뿐 그 아래 근육에는 흠집 하나 자국 하나 남기지 못하는데도 그는 힘들어했다.
“그만할까요?”
“아니, 요. 괜찮……습니다.”
가이사 특유의 단정하던 숨결이 흐트러졌다. 초조한 듯 눈은 빠르게 깜빡거렸고 시선은 길을 잃고 허공을 헤맸다. 붉게 물든 눈가가 촉촉한 물기로 번드르르해서 내 마음이 다 아팠다. 그는 지금 본인의 몸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긴장 상태였다. 우리 둘 중 지켜 주는 쪽은 언제나 그였는데 이번에는 내가 그 역할을 해 주고 싶었다. 나는 가이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팔 전체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뱀이 기어가는 땅처럼 팔뚝이 진동했다.
“윽!”
그는 어깨를 살짝 떨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연약하게 변한 눈 위로 내 얼굴이 보였다.
“다른 것에 집중해 봐요. 아이의 울음을 가장 쉽게 그치게 하는 법도 그거거든요. 관심을 돌리는 거. 생각보다 효과적일걸요.”
“예. 그렇게…… 흣……! 예.”
횡설수설 변칙적인 숨소리가 가빴다. 호흡을 후후 조절하는 숨결은 냉기에 바싹 말라 있었다. 온기를 나눠 주듯 따스한 손이 예민한 안쪽 살로 들어갔다. 그가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게 보였다. 주사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으레 그러듯 정신을 차리면 그의 눈은 내 손이 흐르는 곳으로 돌아왔다.
“오늘 햇살이 좋죠? 날씨도 좋고.”
“으으…… 예. 날씨가…… 좋습니다.”
날씨에는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가이사, 이쪽 좀 봐 볼래요? 내 귀 말인데요. 뚫려 있는 것 같아요?”
고개를 젖히며 말하자 시선이 쏠렸다.
“귀? 귓불 아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손은 여전히 팔 언저리를 같은 강도로 맴도는데 숨소리가 확실히 차분해졌다.
“네. 어렸을 때 귀걸이를 할 수 있도록 뚫었다는데 오래 안 해서 지금은 막힌 것 같아요.”
“그렇군요.”
“막혔을까요?”
“글쎄요. 자세히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뚫려 있었으면 좋겠어요. 귀걸이, 좋아하거든요.”
“……귀찌를 하시면 될 것을요.”
“귀찌 말고 귀걸이요. 귀찌는 예쁜 게 잘 안 나와요.”
“주문 제작을 하면 됩니다.”
아. 부르주아 마인드를 잊을 뻔했다.
“거기, 선물 상자 중에 귀걸이도 몇 개 있던데 그거 해 줄래요?”
루베니오가 보낸 장신구들 중에는 귀걸이도 더러 있었다. 단두대에 팔을 올려놓은 것처럼 파르르 떨던 이는 내가 가리키는 곳으로 반대쪽 팔을 쭉 뻗었다. 덜컥거리며 열리는 상자들은 복작복작 부딪쳐 소란스러웠다. 무엇이든 깔끔히 해내던 그를 생각해 볼 때 현 상태는 긴장 중이겠지만 신음을 삼키지도 못하던 때보다는 나았다.
“어! 저 그거요! 초록색!”
“이 에메랄드 말입니까? 무겁지 않겠습니까?”
“잠깐만 걸 건데요. 귀걸이는 화려한 게 예뻐요.”
손가락을 튕겨 침을 빼낸 그가 가까이 다가오다가 멈칫했다. 팔도 붙잡혀 있고 귀걸이를 걸려면 귀에도 닿아야 했다. 여기도 살. 저기도 살. 이게 바로 살 지옥이었다. 맨살 지옥. 모르긴 몰라도 화염지옥이나 얼음 지옥보다도 그에게는 더 끔찍한 공간일 것이다.
“…….”
나는 섣불리 재촉하지 않았다. 가이사는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지 몇 번 심호흡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깊고 차가운 숨이 뿌리 끝까지 처박혔다가 간당간당 빠져나왔다. 귀 끝에 시린 손가락이 서리와 같이 내려앉았다.
스윽. 쓱.
“읏!”
귓불의 구멍을 찾으며 이리저리 뒤적거리는 손길이 간지러워서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반사적으로 붙잡은 팔에 힘을 더하자 몸이 더 가까이 붙었다. 정지 신호를 본 차처럼 그는 또 움찔했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요.”
여기서 변칙을 주는 건 위험했다. 규칙적으로 토닥거리자 그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막혔어요?”
“아프십니까?”
서로 다른 물음에 웃음이 킥킥 터졌다. 그가 왜 웃느냐는 듯 바라봐서 더 웃겼다.
“아니요. 간지러워서요.”
“괜찮을 것 같습니다. 거의 다 된 것 같아요.”
쑤욱, 하고 귀가 꿰뚫렸다. 처음에는 조금 뻐걱거리더니 끝에 가서는 매끄럽게 밀려들었다.
그는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떨어졌다.
“알죠, 귀걸이는 한 쌍인 거?”
한쪽 귀를 뚫었으니 이어서 나는 반대쪽 귀를 내밀었다. 옅은 허탈함이 그의 얼굴 위에 낱낱이 떠올랐다.
[고난이도 미션! 니네이나의 귀에 귀걸이를 걸어 주자! 달성도: 50%]
그런 알림이 그의 머릿속에 뽀르르 들릴 것이다.
“그럼 반대쪽도.”
그는 이제 팔에 대한 건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신중히 반대쪽 귀를 꿰뚫는 손길이 이어졌다. 귀걸이가 양쪽 귀 아래에서 차랑차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언뜻 감돌았다.
‘흡족해한다, 흡족해해!’
조각 퍼즐을 다 맞췄을 때와 비슷한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어때요?”
“예쁩니다.”
“…….”
귀걸이를 물은 게 아니라 그의 팔에 대해 한 말이었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뺨이 살짝 화끈거렸다.
“이제 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몰랐는데 말을…… 되게 잘하네요.”
너 말은 참 잘하는구나, 라는 비꼼이었다.
“그렇습니까?”
못 알아듣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척하는 건지 내 비꼼은 이번에도 벽에 맞아 퉁 튕겨 나왔다.
“그리고 누가 허락한대요?”
“안 됩니까?”
“네.”
“그럼 다음에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그는 시무룩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어라? 이게 아닌데?
“……다음에도 안 돼요.”
“사뭇 바뀌는 게 마음입니다. 단언하지 마세요.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싸늘한 눈가가 거짓말처럼 살짝 접혔다가 금방 풀어졌다. 눈을 끔뻑 다시 떴을 때는 흔적도 없었다. 눈밭에 사는 눈 귀신처럼 감쪽같았다. 보지 말아야 할 걸 본 기분이었다.
“연습하니 좀 어때요? 나아졌어요?”
나는 괜히 말을 돌렸다. 일부러 그랬다는 걸 눈치챘을까?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계속 듣고 있다가는 뭐가 됐든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나아졌습니다. 지금도 팔을 붙잡고 계시니까요.”
“그러고 보니…….”
처음 만졌을 때는 추운 날 오래 내놓은 상자처럼 서늘했는데 지금은 따끈따끈했다. 체온이 전염되어 그랬다. 손을 떼어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이 조금 더 짙은 색의 피부 위에서 어색하게 들썩였다.
“저랑은 그렇죠. 다른 사람과는 어때요? 이렇게 팔을 잡았다고 생각하면.”
“역겹습니다.”
“…….”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군요.”
더 재고 고민할 것도 없다는 즉답이었다.
“제 아버지도?”
“저를 왜 자꾸 루베니오와 엮는지 모르겠군요. 다른 이들과 똑같이 역겹습니다.”
“역겹…….”
역겹다니! 우리 아빠 어디가 어때서! 다정하고 착실하잖아! 사람이 딸에게는 영 맹탕이라 이런저런 삽질을 좀 했다지만 역겨울 정도는 아니라고!
‘아니, 내가 왜 화가 나는지 모르겠네?’
머리가 또 지끈거렸다. 그런데 서서히 민감도는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역치가 높아진다고 해야 할까? 그러지 말라는 신호는 들어오는데 기절할 것처럼 초록빛 섬광이 번쩍거리지는 않았다. 몸이 차차 적응하는 걸까?
“여하튼 루베니오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습니다.”
예외는 하나뿐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다른 생각이 싹 사라졌다. 머리가 필사적으로 돌아갔다.
“그럼 가이사의 아버지는 어때요?”
“그분은…….”
뭐라고 할까? 가슴이 살짝 뛰었다.
“상관없습니다.”
“그래요?”
다행이었다. 기쁨과 묘한 찝찝함이 동시에 느껴졌는데 살았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예. 인간이……”
채 듣기도 전에 방심하지 말라는 것처럼 초록빛 섬광이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번쩍였다. 창천에서 퍼붓는 초록빛 너울이 너무도 강력해서 귀가 순식간에 멀었다.
“……까요.”
털썩. 그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뇌의 퓨즈가 끊기듯 정신이 암흑에 삼켜졌다.
* * *
허구한 날 기절이니 정신이 뚝 끊겼다가 돌아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랜 잠에서 깨 기지개를 켠 눈꺼풀이 스르르 밀려 올라갔다. 어두컴컴한 흑색 세상에서 빛줄기가 자르르 흘렀다. 촛불이 아롱아롱 맺힌 금발이었다.
“몸은 좀 어떠니?”
“괜찮아요. 푹 잔 기분이에요.”
“그래.”
무심코 뻗어 오던 손이 이마 위에서 움찔했다. 나는 머뭇거림을 담아 떨리는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따뜻한 손길이 이마 위를 맴돌며 머리카락을 쓸었다.
“왜 불도 안 켜고 계세요?”
“눈이 부시면 안 되니까.”
루베니오가 사근사근 귓바퀴를 그리는 손을 그림으로 떠올릴 만큼 덧대었을 때 침대 조명이 반짝 들어왔다.
“로페니아도 에메랄드를 좋아했다.”
기절할 때까지 치렁치렁 달려 있던 귀걸이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에메랄드 귀걸이는 아마도 저기 저 협탁 위의 상자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딱히…… 그 보석이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에요.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지.”
나는 반짝이는 보석의 물결이 눈에 꽂히던 순간을 괜스레 변명했다.
“그렇구나.”
“……그래도 괜찮아요?”
“무엇이?”
루베니오는 로페니아 샤사롯을 사랑했다. 그리고 로페니아는 그들의 딸을 낳다가 죽었다. 한 목숨을 희생하고 한 목숨이 살았다. 대신할 값어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닮지 않아도…….”
아름다운 푸른빛이 파도 위의 달빛처럼 넘실거렸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이윽고 일그러져 그 틈을 좁혔다.
“아니. 아니다.”
“…….”
“상관없어.”
벅차오른 숨이 루베니오의 갈비뼈를 팽팽히 부풀리는 게 보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를 숨죽여 삼키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네게서 로페니아의 모습을 본 건 사실이지만…… 그건 네가 우리 딸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너로 대체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 한마디의 말에 내포했던 모든 걸 그는 다 깨달은 것 같았다. 밤이라 감성적이 된 걸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말렴.”
조곤조곤 달콤하게 퍼붓는 목소리가 노랫가락 같았다.
“어떤 수식어도 하등 중요하지 않다.”
듣고 있자면 지독히 단 벌꿀 내음에 눈이 멀고 목이 막혀 콱 질식해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넌 그냥 내 딸이야.”
루베니오는 아플까 봐 조심조심 그렇게 내 손등을 도닥였다. 알고 있다. 그는 잘나고 똑똑한 딸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어머니를 닮아 뻥 뚫린 자리를 대신 채워 주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니네이나는 그냥 딸이다. 소중하고 어여뻐서 자기 목숨도 아무렇지 않게 내던질 수 있는 예쁜 딸. 한번쯤 그 다정한 부성을 눈과 귀로 가득 담아 보고 싶었다.
“어머니 얘기 계속해 줘요.”
알려 달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눈치를 봤다. 나는 행여 이 이야기가 내 뜻과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봐 걱정했다.
“알아요. 나는 그냥 나예요.”
“누구도 널 대체할 수 없듯 네 어머니 또한 그러해.”
순간 메이아가 떠올랐다. 이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혼란했다. 못난 마음이 응석받이가 될 텐데도 그는 다정스레 다독였다.
“내 기쁨은 온전히 이곳에 있다.”
하루 내내 얼굴만 봐도 좋을 거라는 듯 그가 시선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언제나 시간이 빠듯해. 그 외의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지.”
나는 그늘 없이 기쁨으로 충만한 그의 눈동자에 안심하고 말았다.
“우리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들려주마.”
음성이 졸린 눈가에 나붓이 떨어져 생각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어머니 유품…… 저도 가지고 싶어요…….”
잠결에 속삭이듯 흐린 말에 그의 눈동자가 굳었다. 뭐야? 나 방금 뭐라고 했지? 이건…… 흑역사다……. 흑역사라고! 젠장! 망할 밤의 감성. 이제 진짜 가족 같은 느낌이 종종 들 때도 있고, 루베니오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지만 왜 저런 말을 했지? 부끄럽고 민망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뭐라 지껄인 건지. 졸려서 아무 말이나 흐르는 대로 술술 내뱉은 게 틀림없었다. 당장 그의 입을 막아야 했다! 민망해 접시에 코 박고 죽을 판이니.
“……그때 처음 태동을 느꼈지. 나는 네 발이 무척 작을 거라고 했고 네 어머니……”
“저, 저기!”
“……?”
무례하게 말을 끊었어도 시선이 보드라웠다.
‘굴러라! 머리!’
듣기 힘겨워 끊어 내기는 했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 음…… 아! 황궁 무도회에 가면 황태자 전하도 뵐 수 있나요?”
무도회에 가면 왕자님도 계세요? 오글거리지만 데뷔를 기대하는 소녀다운 말을 쥐어짜려니 이런 것밖에 생각이 안 났다.
“…….”
그런데 루베니오의 표정이 어두웠다. 차갑고 삭막한 뺨에서 시림이 묻어났다. 순간 말문이 막힌 것처럼 굳어 있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봄볕처럼 누그러졌다.
“그럼. 원한다면 황태자 전하께 네 두 번째 춤을 부탁하마.”
“아, 아니요. 그냥 잠깐 궁금했어요. 관심 없어요, 전하에게는.”
말을 조금 더듬은 탓인지 그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신뢰성이 떨어진 듯했다.
‘헉! 지뢰 밟았다!’
그가 쓴 물을 꾸역꾸역 삼킨 뒤에야 그 생각이 났다. 하도 오래전의 일이고 원작에서도 샤사롯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아 잊고 있었다. 루베니오와 황태자 칼리탄은 악연이었다. 누가 먼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역사가 그랬다. 때는 20년 전, 니네이나가 아직 로페니아의 배 속에 있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반역 가문 샤사롯. 로페니아의 출신 가문인 샤사롯은 당시 5세였던 황태자 칼리탄을 살해하려 했다는 역모 죄를 저질렀다. 그 일로 충격을 받은 로페니아가 니네이나를 조산하다가 죽었다. 어린 칼리탄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만 그 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야 했던 루베니오의 입장에서는 좋게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칼리탄이 황제가 되었을 때 루베니오는 이미 자살한 후여서…… 원작에서는 엮일 일이 별로 없었지만…….’
그것도 참 그렇다. 칼리탄은 원작 「공녀 메이아」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즉, 메이아의 남친이었다. 그런데도 칼리탄이 고난을 당할 때 루베니오는 그의 방문을 거절했다. 악감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뜻이었다.
‘아, 어쩌지……? 칼리탄이 황제가 될 텐데! 괜히 밉보이면 안 좋잖아.’
루베니오는 아직 젊었다. 자살만 하지 않는다면 칼리탄과 오래 봐야 했다.
‘그래. 지금부터 잘하면 돼.’
내가 굳이 메이아를 불러 신분을 높여 주고 마법을 가르쳐 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황태자 칼리탄. 메이아는 훌륭한 연결 고리가 되어 줘야 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메이아와 칼리탄도 시작은 악연이었다. 샤샤롯이 처형당했던 역모에 메이아의 가문인 로이드도 엮여 있었고, 그 역모의 주된 내용은 황태자 칼리탄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니까.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로미오? 줄리엣?”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숙이고 말을 삼켰다. 예민한 주제가 떠오르는데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까 하여서.
“음…… 아버지는 황성도 자주 다니실 테니 황족분들도 자주 보시겠네요?”
“그분들이 궁금하니?”
헉! 긴장한 폐가 쪼그라들었으나 그는 역정 내는 얼굴은 아니었다.
“제가 별장에서 본 역사서가 생각나서요. 역대 황제 중 칭송받는 분들은 어릴 때부터 뛰어나셨다는데…… 지금의 황족분들은 어떠세요?”
황태자는 황제가 될 것 같나요? 이렇게 묻는 건 너무나 위험한 발언이라 두루뭉술하게 돌렸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황제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세상에 태양이 둘일 순 없으니 황태자라고 해도 자신이 황제가 될 거라고 쉽게 말해선 안 됐다. 자칫 역모로 몰릴 수 있으니까. 당연히 누가 황제가 될 것인지 추측하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꼭 내게 물어야 한다.”
고심하던 그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끝? 좀 더 단속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착하구나.”
“……?”
어느 부분이? 잘한 게 없는데 칭찬받았다. 설마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건가?
‘너무 허술하잖아!’
황당해하는 눈빛에도 머리를 살근살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했다.
“폐하의 자식은 두 사람 뿐이지.”
루베니오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단속을 해 놓고 문제 될 소지가 많은 말들을 단지 딸이 궁금해한다는 이유로 알려 줬다. 태연한 얼굴에서 이 일이 밝혀져도 수습하기 어렵지 않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나는 그에게 폐가 될 만한 실수 따위 절대 하지 않을 테지만.
“황태자 칼리탄은 선대 황후의 첫 아이니 승계 서열상 차기 황제에 가장 가깝고.”
이름도 막 부른다.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내 새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실로 황자는 현 황후의 유일한 자식이며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니.”
황제는 지금의 황후를 총애했다. 칼리탄의 어머니인 선대 황후를 그저 황후로서 대했다면 현 황후는 사랑했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낳은 아이가 어여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칼리탄과 아실로가 열일곱 살 차이 나는 이복형제라는 것.
“아실로 전하는 이제 겨우 일곱 살이라고 들었는데요.”
“폐하의 나이가 45세시다. 건강하신 편이기도 하고. 10년쯤 뒤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10년 뒤의 황제는 55세. 그의 말대로 죽기에는 이른 나이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30년 이상을 버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황제가 곧 죽을 거라는 걸.
“가장 사랑하는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으실까요?”
“난 아이가 하나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조금 웃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를 덜 사랑할 수 있는 것인지.”
“……폐하의 차별은 이미 유명하다던걸요?”
루베니오는 한 번 말을 삼키려다가도 내가 계속 궁금한 눈빛을 보내자 입을 열었다.
“인간은 간사하고 부모는 이기적이지. 황제라고 해도 같다. 부모는 제 아이에게 모든 걸 주고 싶어 하는 법이니. 하물며 목숨이 걸려서야. 눈이 멀 거다.”
결국 칼리탄보다 아실로가 황위에 더 가까울 거라는 말이었다. 루베니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황제의 마음은 분명 아실로에게 있었다. 칼리탄을 내치지 않은 건 말 그대로 아직 아실로가 어리기 때문이다. 아실로가 조금 더 장성하면 황제는 태자 자리를 바꾸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칼리탄은 제거되겠지. 권력을 위해 사람 목숨 몇 뺏는 것쯤은 우스운 세상이다. 목숨이 걸렸다는 건 그런 의미다.
“으음…….”
“왜 그러니?”
“그럼 황태자 전하가 좀 가엽지 않나 해서요. 그…… 내쳐지는 거잖아요. 아버지에게.”
황제가 곧 죽을 테니 황태자에게 줄을 서라고 직접 알려 주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우선 넌지시 그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했다.
“그래, 가엽구나.”
루베니오의 눈에 꿀이 철철 흐르는 시냇물이 담겨 있었다. 막힘없이 흘러와 단내를 폴폴 풍겼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손을 꼭 붙잡고 항시 시선을 맞췄다. 그러나 많은 걸 내포한 말이었다. 아니. 무의미한 말이었다. 그냥 지나다니는 길에 거지가 하나 있는데 딸이 그 거지를 가엽다고 하자 동전 몇 개를 기꺼이 주는 것에 가까웠다. 당연히 거지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가엽든 불쌍하든 괴로워하든, 죽든.
루베니오는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그에게 유의미한 것은 오직 니네이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절실히 알 것 같았다. 그는 딸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의 세상은 너무도 좁았다. 딸이 죽으면 세상과 맞잡은 손을 가뿐히 놓을 그 모습이 선연했다. 절망스럽게도.
* * *
시간이 흘러 그날이 왔다. 황궁 무도회가 열리는 날.
“눈을 감고 한숨 주무시면 다 해결되어 있을 거예요.”
하녀장 사라가 안대를 올려 빛을 가려 주었다.
“주인님?”
잠시 뒤 사라가 나를 깨웠다. 체감상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일어나서 본 모습이 놀라웠다.
“화장까지 되어 있잖아?”
원래도 피부가 나쁜 편은 아니지만 분을 발라 창백한 모습을 감췄다. 볼은 화사했고 입술은 연분홍빛으로 촉촉했다. 눈 화장을 세게 하지 않아도 촘촘한 속눈썹 덕에 눈매가 파묻히지 않았다. 한 듯 안 한 듯 연한 화장이었지만 얼굴에 생기를 그려 넣은 것만으로도 그럴듯했다.
“이제 드레스만 입으시면 됩니다.”
사라가 뿌듯한 얼굴로 손뼉을 짝짝 쳤다. 하녀 여럿이 커다란 상자 몇을 가져와 주르륵 나열했다.
‘드레스만, 이라고 하지 않았나?’
사라의 기준에는 그 ‘드레스’라는 것에 갖은 옵션이 다 포함된 모양이었다.
“코르셋을 착용하신다면 태가 더 날 테지만 두꺼운 숄을 두를 테니 가벼운 파니에만 준비했어요.”
코르셋이라는 게 은근히 무겁고 불편해서 유리 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파니에도 다양한데 그중 내가 입을 수 있는 건 샤 스커트처럼 살랑거리는 천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가벼운 것이었다. 드레스는 상체는 가볍게 붙고 하체는 자연스레 떨어지는 종류였다. 가슴이 V 자로 살짝 파여 있었고 그 중앙에서 블루 다이아몬드가 다채롭게 빛났다.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면 드레스가 무거워질 테니 은사로 은은하게 수놓아 단조롭지 않게 했다.
‘무겁지 않게 만들면서도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을 다 붙잡으려 노력한 장인 정신이 돋보이네…….’
수는 다 직접 놓았을 테니 만든 이가 얼마나 고생스러웠을지 대충이나마 짐작이 갔다.
“밤이라 바람이 쌀쌀해요.”
새하얀 털에 회색 털이 살짝씩 박힌 털로만 된 숄이었다. 장신구를 골라 착용하고 거울을 보니 더 그럴듯했다.
“그런데 신발은?”
나는 아직 발바닥이 닿는 부분이 폭신폭신한 실내용 뮬을 신고 있었다.
“구두는 불편하잖아요. 도착해서 신으셔도 늦지 않을 거예요.”
어딘지 의기양양한 얼굴의 메이아가 하얀 나무 상자 하나를 품에 소중히 안으며 속삭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거나 화장 수정 등을 위해 하녀 한 명은 주인이 찾을 때까지 준비한 대기실에서 머물렀다. 오늘 그 역할을 수행할 하녀가 신출내기인 메이아였다. 그녀의 전투 능력을 고려한 선별이었다. 다른 의도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경거망동하지 말고 주인님을 잘 지키도록 하렴.”
“네, 하녀장님! 주인님을 꼭 지킬게요!”
“…….”
저기요? 6세 아동 돌보듯 말하지 말아 줄래요? 듣는 유리 몸 슬프거든! 하녀들이 재잘거리며 위풍당당 행진하는 메이아를 배웅했다.
“가시지요, 주인님.”
문을 활짝 연 그녀가 에스코트하듯 손짓했다. 메이드복을 입고도 얼굴이 얼마나 반짝반짝한지 해맑음에 후광이 번쩍였다.
‘칼리탄과 메이아의 첫 만남이 어떨지…….’
방관자와 설계자, 그 사이의 어디쯤. 미안하지만 마냥 조력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우선순위는 이미 정해졌기에. 더 간절하고 더 소중한 것이.
* * *
내 간사한 마음을 질책이라도 하듯 복도의 열어 둔 창문에서 찬 바람이 휭 불었다. 두꺼운 숄을 걸쳤어도 그 싸늘함에 어깨가 시렸다. 움츠린 어깨로 숄이 미끄러졌다. 그때 바람이 한 번 더 휭 불어와 숄을 반쯤 벗겨 냈다. 허리 아래로 미끄러지는 숄을 붙잡으려는데 나보다 빨리 옷을 추스르는 손길이 있었다. 두껍고 묵직한 검은 장갑. 보드라운 털과는 상반되는 그것이 숄을 추슬러 어깨 위에 살짝 걸쳐 줬다.
“오늘…….”
낮고 건조한 목소리에 담긴 희미한 떨림이 간지러웠다. 피를 적셔 만든 듯한 선홍의 눈이 빠듯할 만큼 크게 내 모습을 담았다. 평소 칙칙하다고 생각했던 죽어 버린 눈이 기묘하게 맑았다.
“아름답습니다.”
그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표현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그의 아버지였다. 아주 소중한 존재라 허락해 주는 단어라는 듯 요요하게 빛나던 단어를 내게도 썼다. 당신,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왜 내게 이러는 건데? 평소처럼 새침하게 받아칠 수가 없었다. 그 붉은 눈을 통해 보이는 내가 낯설고 일렁대는 눈동자가 어색해서 자꾸만 갈증이 일었다.
“지금 이 감정이 무척…… 혼란스러울 정도로.”
당신 건조한 사람이잖아. 목석이잖아. 왜 감정을 담고 말하는 거야? 왜 그렇게…… 보는데? 마구 따지고 싶을 만큼 나도 혼란스러웠다.
“아. 이걸 미리 드리지 못했습니다.”
작은 머리핀이었다. 에메랄드가 박힌.
“그게 뭐예요?”
“루베니오가 대신 전달해 달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전에 부탁했던 로페니아의 유품이라고.”
아. 흑역사의 밤이 떠올랐다.
“머리 묶으시기 전에 전해 달라고 제게 맡겼는데…….”
그는 흘긋 내 뒤에 선 하녀들을 바라봤다.
“제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으응. 괜찮아요. 지금 해도.”
“그럼…… 제가 해 드려도 됩니까?”
그는 굳은 결심을 한 사람처럼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빠드득. 그의 손바닥에서 울리는 가죽 주름 소리가 소름 끼쳤다. 그가 폭력을 행사할 거라고 생각해서 무서운 게 아니었다. 장갑과 셔츠 사이로 흘긋 드러난 팔뚝에 핏줄이 소소소 올라오는 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박혔다.
“살살…… 해요.”
또다시 갈증이 일었다. 시원한 물이라도 한 움큼 삼키고 싶은데 그가 성큼 다가왔다. 커다란 모닥불이 잔잔히 번져 불꼬리 하나가 내 가슴 위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화끈한 홍염 줄기가 심장을 우지끈 움켜쥐었다.
쿵! 쿵! 쿵!
가이사는 귀가 엄청 좋아 보이던데. 혹시 이 소리를 들으면 어쩌지? 초조해서 허리를 뒤쪽으로 살짝 꺾었다.
툭. 그런데 하필 벽 쪽이라 뒤쪽이 완벽히 막혀 버렸다. 아마도 다른 의미의 긴장으로 내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듯한 그가 장갑을 벗고 손을 뻗었다. 열이 오른 손가락이 귓가를 타고 올랐다.
“여기에 하면 됩니까?”
아. 이런 거라면 허락하지 말 걸 그랬다. 어쩔 수 없는 스침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너무 간지러웠다.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며 허리를 굽힌 그의 가슴께에 부딪혔다. 여긴 또 왜 이렇게 단단해? 순간 호기심이 들었는지 뇌를 거치지 않은 행동이 나왔다.
툭. 툭. 단단해서 감촉도 못 느낄 것 같은데 그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물러났다. 휘몰아치는 은빛 꽃잎 위에 푸른빛 에메랄드. 접촉의 목적이었던 머리핀도 다시 멀어졌다.
“……찌르지 마세요.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헉! 역겨워요?”
“당신은 역겹지 않습니다.”
“언제는 토할 것 같다고 했으면서.”
“이제 안 그럽니다.”
“지금도 그렇거든요.”
나도 모르게 툴툴거리게 됐다.
“보세요.”
커다란 손이 성큼 뻗어 와 내 귀를 가렸다. 물에 빠진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저는 이제…… 좋아합니다.”
한차례 쓰다듬는 뜨거운 체온 뒤로 시린 금속이 파고들었다.
“읏!”
내 신음성에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뜨겁다 차가우니 놀랄 수밖에 없잖아. 이런 반응을 보이게 만든 게 원망스러워서 살짝 노려보자 그는 달아나듯 손을 쏙 빼 버렸다. 덜렁. 제대로 꽂지 못한 머리핀이 귀 옆에서 흔들렸다.
“……미안합니다. 처음이라.”
그는 서투른 손짓을 변명하며 다시 손을 뻗었다. 덜렁.
“……?”
이게 뭐지? 왜 이렇게 못하는 건데?
“너무 살살 꽂았어요.”
“아플까 봐…….”
에효. 누구를 탓할까? 두부 인형으로 대해 달라는 내 부탁을 이렇게 충실히 지켜 주는데. 나는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잠시 움찔하며 파르르 떨리는 손등을 내가 계속 붙잡고 있자 그가 침착하게 눈을 맞춰 왔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힘을 줘 바싹 당겼다. 셔츠 아래에서 근육이 팽팽하게 부푸는 게 보였다. 그가 하도 만지작거려 데워진 머리핀이 귀 옆에 안정적으로 꽂혔다.
“이제 됐어요.”
몸을 휙 틀어 계단으로 향했다. 곧장 느긋한 그의 발걸음 소리가 지척에 따라붙었다. 내가 어딜 향해도 쫓아올 수 있다는 것처럼 느리고 나른한 걸음걸이였다. 내 발걸음만 도망치듯 빨라졌다.
* * *
루베니오는 급한 일을 처리하고 있는지 밖에서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선뜻 부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가 먼저 나를 돌아봤다.
“니네이나!”
약간의 흥분이 섞여 숨소리가 거친 목소리였다. 상기한 뺨의 루베니오가 성큼 다가와 내 앞에 섰다.
‘우리 아가가 언제 이렇게 커서 벌써 데뷔라니. 오. 사랑스럽고 예쁜 내 아가. 지상에 내려온 고결하고 고매한 아기 천사 같구나.’
정도의 엄청난 눈빛 세례였다.
‘해석하고 싶지 않은데 머릿속으로 저절로 흘러들어 와…….’
그가 소리 내어 속삭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눈빛으로 광광거리는 저 소리를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부끄러워 죽어 버릴 것이다.
“으응…… 출발할까요?”
황홀하게 젖어 있던 루베니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슬픔, 괴로움, 그리고 차가움. 형용 못 할 여러 감정이 뒤섞여 그 색은 이미 한참 전에 바랬다. 아마도 로페니아의 유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갈무리해 냈다. 그의 눈에 다시 기쁨이 차차 차올랐다.
“니네이나.”
무언가에 이끌려 고개가 스르륵 돌아갔다. 무도회에 맞추어 예복을 입은 루베니오가 보였다. 고요히 요동치는 푸른 눈. 담담하고 강건한 빛에 힘이 났다.
“아름답구나.”
다 큰 딸에게 건네는 찬사는 절절한 아버지의 마음을 가득 품고 있어서 부끄럽고 민망했다.
“손을.”
그는 바람에 부딪혀 나부끼는 황금빛을 눈망울에 별자리처럼 담고 길을 밝힌다.
“네…….”
빛이 맺혀 지독히 환했다.
* * *
“으아아악!”
“꺄아아아!”
이하 생략. 고공을 활용한 은밀한 이동 과정은 지금의 이 비명 두 번으로 간추릴 수 있었다. 여차여차해서…….
“주, 죽을 뻔…….”
하여튼 도착했다. 황궁에.
“심호흡하세요.”
중간에 갈아탄 마차에 몸을 싣고부터는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후우우우웅. 영혼이 몸을 이탈하는 소리가 들렸다.
“니네이나는 어떻지?”
“맥박이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는 안심이 안 되었는지 루베니오가 담요를 주워 내 가슴께까지 올리고 토닥였다.
“여유롭게 도착했으니 조금 쉬어도 되겠지.”
“아, 안 돼!”
뭐 때문에 일찍부터 서둘렀는데 진저리 나는 몸뚱이 때문에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읏차!”
다리를 위로 치켜들어 반동을 이용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후후. 이제 나도 이 정도쯤은…….’
빈약한 건강을 스스로만 관대하게 생각하는 사이 눈 두 쌍이 내게 닿았다.
“……?”
“……?”
내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두 남자였다.
“아…… 저, 황궁이 궁금해서요. 주변을 산책해도 될까요?”
“그랬다가는 본 무도회 시작 전에 쓰러지실 겁니다.”
굉장히 현실적인 말이라 순간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조금만요.”
“할 수 없지요. 제게 안…….”
시종 무덤덤하던 남자가 갑자기 표정을 싹 굳히더니 입을 다물었다. 가이사의 뒤로 시커먼 악마의 불꽃에 활활 타오르는 루베니오가 보였다. 희번덕한 안광의 푸른 섬광이 소드 마스터급이었다.
“…….”
잠시 폭풍을 가라앉히기 위한 침묵이 소요되었다.
“아버지에게 오렴.”
딸과 눈이 마주친 그가 널따란 품을 벌리며 사르르 수줍게 웃었다. 흑과 백. 악마와 천사. 이 정도면 거의 이중인격이었다. 하여튼 그런 과정을 거치어 나는 일차적으로 루베니오의 다리를 빌렸다.
“저기, 저쪽으로 갈래요!”
원하는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중요한 날 겨우 달밤에 산책하겠다고 나선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 저, 저기 분수가!”
입으로 속을 살짝 가리며 소리치는 말투가 사뭇 어색했으나 그걸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빛 분수 말이구나.”
그렇다. 달빛 분수. 보름달이 뜨면 수면에 달을 담은 것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원작에서도 이 장소는 꽤 중요하게 나왔다. 무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공간이었으니까.
“우, 우와! 예쁘다!”
분수 앞에 도착했으니 감탄하는 척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역시나 인위적이었다. 밤에도 찬란한 분수가 아름다웠으나 혼자 괜히 찔렸기 때문에.
‘이쯤이면 되겠지?’
루베니오 몰래 손을 마구 흔들어 일부러 느슨하게 하고 온 팔찌를 분수대 안에 빠트렸다. 첨벙! 후후. 이 팔찌가 칼리탄과 메이아를 연결해 주겠지. 그럼 나는 칼리탄을 이용해 루베니오의 입지를……
“응?”
팔찌가 분수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나비처럼 우아하고 벌만큼 빠르게 손 하나가 분수로 뛰어들었다. 팔랑팔랑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이 달빛에 반짝여 아름답게 빛났다.
“이걸 떨어트리셨습니다.”
옴팡 젖은 장갑을 낀 손이 푸른 팔찌를 내밀었다. 누구 것인지 뻔히 알 텐데 됐다고 사양할 수도 없었다.
“……고마워요. 나 때문에 장갑이 다 젖었네요.”
“여분이 있습니다.”
“…….”
가이사는 젖은 장갑을 쓱 벗어 새 장갑을 스윽 끼고는 다시 완벽한 상태로 돌아갔다. 뭐랄까……. 고마운데 조금 얄미웠다.
[띠링! 1차 시도 실패! 실패! 실패!]
이렇게 쉬운 계획을 처음부터 망치다니. 할 수 없지. 조금 눈치를 보다가 돌아갈 때쯤 다시 시도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계획을 짜면서 어딘가 휑한 바람을 3분쯤 맞고 있었다.
“바람이 좀 쌀쌀하네요.”
이 말은 즉, 이만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지금 안으로 들어가면 시간이 맞겠어.”
“그 전에 신발부터 신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 이르지 않겠니?”
루베니오가 손에 힘을 꼭 줬다.
‘설마. 무도회 입구까지 이러고 가자는 건 아니겠지?’
수치사다. 그건 분명 수치사일 것이다!
“어, 얼른 신어 보고 싶어요.”
나는 열심히 루베니오의 옷깃을 당겼다.
그는 좀 아쉬운 것 같았지만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우직! 우지직! 그때 어디선가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먼저 대기실로 들어간 메이아 대신 구두를 가지고 있던 가이사로부터 들리는 구두의 다잉 메시지였다. 우직! 우지지직!
‘범인은 가이사! 가이사 아델만이 나를 죽였어!’
그가 요상한 각도로 구두를 꺾을 때마다 참혹한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어여쁜 새 구두가 무참히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 됐습니다.”
겉의 반짝함은 잃지 않았는데 영혼이 너덜너덜해진 새 구두가 보였다.
“뭘…… 하신 건지?”
“길을 들였습니다. 구두 따위로 상처가 남으면 안 되니까요.”
철컹! 예쁜 구두가 목줄에 꿰여 노예처럼 끌려가는 환상이 보였지만 아닐 것이다.
“음, 그러니까…… 새 구두가 불편할까 봐 늘려 주신 거죠?”
“예. 신어 보세요.”
언제 또 장갑을 벗었는지 그는 맨손이었다. 맨손의 가이사가 내게 다가왔다. 텁!
“내가 하지.”
나이스 블록!
[띠링! 부성애 Lv. 999 아비 짐승이 맨손의 가이사를 제압하였습니다.]
싸늘한 눈빛 한 방으로 가이사에게서 구두를 빼앗은 루베니오가 한 손으로 조심조심 구두를 신겨 주었다. 그의 팔 한쪽은 나를 안는 데 쓰였기 때문에 남은 구두 하나는 가이사의 손에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붙은 두 사람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맨발을 바라봤다. 뜨거운 눈빛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더니, 눈꼬리를 착 가라앉힌 중년답지 않은 금발의 귀공자가 보였다. 달밤의 눈꽃이 사르르 흩날리는 미모에 고개가 반대쪽으로 휙 돌아갔다. 만만치 않은 흑발의 냉미남이 대기하고 있었다. 숨을 앗아 갈 듯 달콤한 백합향이 올라왔다.
‘꽃밭이다…….’
한 명은 이 몸뚱이의 친부였고 한 명은 싸늘한 결벽증남이었지만 눈을 둘 곳이 없었다. 폭!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동안 작업을 끝낸 남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돼! 분수가 멀어진다!’
루베니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분수의 모습에 애가 탔다. 이때를 대비해 손에 아무렇게나 쥐고 있던 거울이 툭 떨어졌다.
‘좋아. 수풀에 떨어져서 안 깨졌어. 밤이라 어둡겠지만 거울에 빛이 반사될 테니 찾을 수는 있……’
회심의 미소를 짓는 얼굴을 불길한 그림자가 집어삼켰다.
“거울이 떨어졌습니다.”
“…….”
이 남자가 또! 그만 좀 주우라고!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서 말이 안 나왔다. 침묵을 의아하게 여긴 가이사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거울을 내 손에 조심히 밀어 넣으려 했다.
‘에잇!’
툭. 거울이 다시 떨어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두 쌍. 가이사에 이어 루베니오도 나를 바라봤다.
“가지고 있기 싫어졌어요. 버릴래요.”
고개를 새침하게 돌리며 오만방자한 소황제를 흉내 냈다. 보석이 박힌 건 아니었고 하녀들이 놓은 수가 아기자기하게 예쁜 것이었다. 스윽. 뽁뽁뽁.
“……?”
거울을 주운 가이사가 표면을 쓱쓱 열심히 닦더니 그걸 제 주머니 안으로 쏙 밀어 넣었다.
“그건, 왜……?”
“수집입니다.”
“수집?”
“품번 제112호입니다.”
품번은 뭐고 수집은 또 뭐지? 그에게 거울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나? 잘 모르겠지만 그가 거울을 다시 내놓지 않을 거라는 건 알겠다.
가이사의 입꼬리가 위로 살짝 꺾였다가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쯧.”
루베니오는 선수를 빼앗겼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이사의 주머니를 물끄러미 보는 그의 얼굴에 옅은 부러움이 감돌았다. 저런 걸 왜 부러워하지? 루베니오는 내 신발을 물끄러미 보더니 내려 주지 않고 걸음을 휙 옮겨 버렸다.
“앗!”
주변을 서둘러 둘러봤지만 루베니오의 걸음이 빨라 분수에서 많이 멀어져 있었다.
‘……내가 졌다. 졌어.’
나는 분수대 옆의 하얀 들꽃을 보며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야심 차게 세워 온 첫 번째 계획은 괜히 거울 하나만 잃고 실패였다.
* * *
루베니오가 무도회 입구까지 나를 안고 간 것은 아니었다. 물론 거의 입구까지 가긴 했다. 필사적으로 말려 멈추기는 했지만.
‘으아아아아! 사람 많잖아!’
무도회장 입장 순서는 지위가 낮을수록 빨리 하는 게 예의였다. 루베니오의 공식적 지위는 세이아 후작. 보통의 공작 후계가 단승 백작 작위를 받는 것에 반해 그는 한 단계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엘리니움 제국의 상권을 움켜쥔 대부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후작과 공작의 수는 많지 않으니 입구에 귀족들이 많이 몰려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무도회장을 지키는 기사와 시종들의 시선이 뜨거웠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루베니오가 평소 사람을 멀리하기 때문일까? 곁에 선 나를 향하는 시선이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괜히 그의 손을 더 꽉 잡게 되었다.
“명단 확인해.”
“따로 적힌 게 없습니다.”
“사람 보내서 알아 오면 되잖아……!”
시종 몇이 루베니오의 눈치를 보며 수군거렸다. 파티장에 참석한 이의 얼굴을 모두 외울 수는 없을 테지만 루베니오 정도의 인물은 달랐다. 고위 귀족과 그들의 파트너에게는 신분을 묻지 않는 게 관례였다. 중요한 사람의 얼굴은 황궁 시종으로서 마땅히 외워야 하는 일이었다.
“니네이나.”
“네, 네?”
“붉은 융단을 보렴. 붉은 장미 무늬가 새겨져 있구나.”
“아…….”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가 나중에야 이해했다. 긴장을 풀어 주고자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단단한 등이 시야를 차단해 다른 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게 됐다.
“가이사 아델만 백작님께서 입장하시옵니다!”
입장은 가이사가 먼저 했다. 앞을 봐야 할 그는 입장하는 대신 뒤돌아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만 멀어져도 걱정스럽다는 것처럼.
‘이따 봐요.’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내 인사에 그의 눈가가 희미하게 접혔다.
‘방금…… 웃은 건가?’
문이 활짝 열렸다가 닫힐 때쯤 누군가의 손이 맞잡아 왔다. 루베니오였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머리 한구석에 가이사의 미소가 맴맴 돌았지만 우선은 눈앞의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무도회에 온 게 싫지 않으세요?”
“그럴 리가. 너와의 무엇이든……”
둥글게 뜬 눈이 한 겹 접은 바다처럼 반짝였다.
“나의 기쁨일진대.”
내 정체를 알아냈는지 눈을 부릅뜬 시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루베니오 세이아 후작님과 그분의 따님이신 니네이나 세이아 영애께서 입장하시옵니다!”
달칵. 돌아가는 황금빛 문고리가 어지러웠다.
“…….”
묘한 침묵이 느껴졌다. 저 멀리 빛나는 샹들리에의 높이가 아찔해서 이곳저곳 눈을 돌려도 호기심 어린 시선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단 하나의 우직한 것을 마주했다. 가이사는 표표히 사람들을 가르며 걸어왔다.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얼굴에 그와 나를 번갈아 보는 시선이 늘어났다.
“아델만 백작이 모처럼 참가한 게…….”
“그는 루베니오와 친분이 있잖아요. 혹시…….”
뭐라고 하는 거지? 나와 그를 두고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살짝 신경 쓰였다.
“지금 봤습니다.”
“네?”
이따 보자는 말에 대한 대답인가? 대뜸 말한 그는 그 후 아무 말 없이 그냥 옆에만 서 있었다.
“……?”
양옆을 잘난 남자 둘로 채운 나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이 한층 강해졌다.
“타르시 세이아 공작 각하께서 입장하시옵니다!”
왔다. 퉁. 퉁. 퉁. 지팡이로 융단을 짚는 소리가 났다. 아들에게 실권을 이미 많이 빼앗긴 공작에게 남은 건 그를 지키는 호위단과 암살단, 그리고 신체에 겹겹이 걸어 놓은 보호 마법이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고대 흑마법에 필적할 정도로 지독히도 걸어 놓은 통에 보통의 방법으로는 공작을 죽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죽어 줘야만 했다.
“너는…….”
입장과 동시에 루베니오에게로 향했던 그의 시선이 멈칫 굳어졌다.
“할아버지?”
밝고 명랑하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루베니오의 옷소매를 당겼다.
“내 할아버지예요?”
“……그래.”
그래는 무슨! 이런 부분에서도 다 맞다 해 주는 탓에 뺨이 미세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치마를 살짝 들고 공작에게 다가갔다. 쪼르르 쫓아오는 거대한 산이 두 개였다.
“안녕하세요, 니네이나 세이아입니다.”
배운 대로 우아하고 정답게 인사했다.
“모르테우스 신의 눈 안에 깃들이시기를.”
뺨이 옴폭 패이도록 흐드러지게 웃으며 건네는 축복이 묘할 것이다. 모르테우스는 자비와 징벌의 신. 보통 때는 신의 자비를 청하는 말로 들릴 테지만 그와 나 사이의 악감정을 생각하면 다르다. 과연 공작. 눈치가 빨라서 입꼬리가 푸들푸들 떨렸다.
‘겨우 이 정도로 뭘?’
그러나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는 놀라움과 불쾌감을 걷고 반가움을 띠었다.
“니네이나가 아니더냐! 몸은 좀 어떻지? 너무 오랜만이라 몰라볼 뻔했군.”
“많이 나아졌어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오래, 머물렀잖아요. 덕분에.”
“허허. 늙은이가 한 게 뭐 있다고 공치사를 할까. 나는 단지……”
“아니에요!”
헤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능청스레 말을 끊었다.
“다 할아버지 덕분인걸요. 그렇죠, 아빠?”
루베니오의 팔에 매달리자 웅성임은 거세지고 공작의 눈동자는 더 싸늘해졌다.
“……그렇구나.”
루베니오는 공작에게는 시선 한 줌 주지 않고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의도치 않게 머리꽂이를 건드렸다.
“옛일이 생각나는군.”
그러자 공작이 다가와 내 머리꽂이를 건드리려 했다.
찰싹! 그 순간 루베니오는 무도회장의 모두가 다 들을 정도로 세게 공작의 손을 쳐 냈다. 그리고 나를 감싸 그의 뒤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함부로 건드리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루베니오!”
공작이 작게 소리쳤다. 나는 루베니오의 뒤에서 은근히 미소 지었다. 분노로 시뻘게진 얼굴이 욕심 많은 그와 잘 어울렸다.
“아이가 낯을 많이 가립니다. 안에서만 자란 터라.”
“낯을 가려? 할아버지에게도 말이냐?”
그렇게 형편없는 물건이냐는 듯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찼다.
“제 아이입니다.”
새파란 불꽃이 번졌다. 섬뜩할 정도로 시린 분노였다. 두 사람의 서슬 퍼런 대치에 좌중이 다시 술렁거렸다.
“아빠…….”
나는 겁먹은 아이처럼 루베니오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공작을 흘긋흘긋 바라보면서. 내 도발에 공작의 입꼬리가 느리나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래. 내가 실수할 뻔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것이라.”
나도 쉬울 거라는 기대는 안 했다.
“좀 더 친해지면 되는걸요. 앞으로 자주 봬요.”
나는 낯을 하나도 안 가리는 사람처럼 밝게 웃으며 루베니오의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닮았군.”
“누구와 닮았는데요?”
공작이 한 걸음 다가와 무릎을 구부렸다. 눈높이를 맞추는 다정한 할아버지처럼.
“자식의 팔자는 부모를 따라가는 법이지.”
“…….”
“너도 그렇게 죽고 싶으냐?”
빙긋. 공작은 아주 상냥하게 웃으며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뿌연 숨결에서 차갑고 매캐한 향이 났다. 타들어 간 잿더미처럼 까맣고 아교처럼 척척한 시커먼 점액질의 냄새.
‘와 씨, 소름.’
솔직히 잠깐 겁먹었지만 공작이 착각한 게 있었다. 루베니오도 그렇고 공작도 그렇고. 나를 너무 어리게만 보는데 나는 협박한다고 지레 겁부터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할아버지.”
나는 그의 옷소매를 마구 당겨 셔츠를 구겨 버렸다. 공작은 단정하지 못한 걸 못 참는 강박증이 있었다. 하인이 실수로 침대 시트를 약간 틀어지게 잡아 놓으면 피가 터지도록 매질할 정도였다. 구겨진 셔츠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어둠에 삼켜진 들짐승의 안광 같았다.
“죽는 데…… 순서 없잖아요?”
“…….”
“아, 목이 말라서 이만.”
사르르 눈웃음을 치고 변덕스러운 나비처럼 팔랑팔랑 걸음을 옮겼다.
‘와 씨, 소름! 소름!’
공작의 시선은 파바박 박히는 열렬한 것은 아니었다. 물안개처럼 아주 천천히 내려와 목을 조이려 했다. 그러나 공작은 역시 도발에 약하다. 아마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껏 저 자리를 지키지 못했겠지. 방금, 그리고 메이아 때를 생각해 보면 공작은 ‘루베니오의 아이’가 역린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너도 그렇게 죽고 싶으냐?
공작이 흘린 말이 머릿속에서 연거푸 재생됐다.
그렇게 죽고 싶으냐. 이상한 말이었다. 부모 중 죽은 이인 로페니아처럼 죽고 싶으냐는 말일 텐데 그럼 더 이해가 안 됐다. 그녀는 니네이나를 낳다가 죽었다. 어쩌면 출신 가문인 샤사롯의 역모와도 연관 지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니. 보통은 ‘네 엄마처럼’ 죽고 싶으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 말은 마치 로페니아의 죽음에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시인하는 것 같지 않나? 겨우 말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과한 추론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낌새가 수상했다. 공작이 로페니아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을 열어 두는 건 나쁘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시옵니다!”
달밤의 무도회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