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 없습니다
2권
3. 바람이 머무르는 곳
루베니오는 편히 잠드는 날이 드물었다. 가장 안락하고 편안해야 할 집이 그에게는 고통스럽고 괴롭기만 할 뿐이어서 그랬다. 몇 번 뒤척거리다가 결국 자는 걸 포기한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딱 저만큼만 가까웠으면 좋겠구나.”
별로 빽빽한 밤하늘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닿지 못할 별이 차라리 더 가까웠다. 저건 볼 수라도 있으니까.
그는 애타게 기다려도 바뀌지 않는 하늘 아래 있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잠이 안 올 때면 그는 늘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금빛 펜을 꺼내 들었다. 펜을 든 채 아무 말도 못 쓰고 한참 멈춰 있자 대롱대롱 위태롭게 걸렸던 잉크가 툭 떨어졌다. 하얀 종이 중앙에 번진 잉크 하나가 그 종이를 못 쓰게 만들었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익히 있는 일이라는 듯 다른 종이로 바꿨을 뿐이다.
「아버……」
더듬더듬 써 내려갔던 글자를 북북 지웠다. 보드라워야 할 그 단어가 칼에 긁혀 너덜너덜해졌다. 그 단어를 힘껏 긁어 낸 루베니오는 망가진 종이를 버리고 새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는 결국 똑같은 하얀 종이를 씁쓸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글자를 적어 내렸다.
「루베니오 세이아」
유일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이름이었다.
루베니오는 까맣게 쓴 이름을 한참 바라봤다.
“아가…….”
부른다 하여도 들어 줄 사람이 곁에 없지만 루베니오는 종종 그 아이를 불렀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 불러 줄 거라던 이름과 애칭은 몇 번 부르지 못했다. 그 이름을 불러 버리면 간신히 막아 왔던 것이 툭 터져 버려 모든 걸 망치게 될까 봐 할 수 없었다.
―니아! 이것 봐. 니네이나. 이 이름 예쁘지 않아? 딸을 낳거든 니아, 당신의 애칭을 따 ……라고 부르고 싶어.
아무 고민도 없이 마음껏 꿈꿀 수 있었던 그날들과는 대조적이게도. 그때의 루베니오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이름을 부르고 다녔다. 그때 그렇게 쉽게 부르지 말 걸 그랬다며 그는 후회했다. 그때 그렇게 잔뜩 불러 놓아 이제 기회가 영영 없을지도 몰랐다.
“꼭 들어 줬으면 했는데…… 네가 태어나 얼마나 기뻤는지를.”
니네이나가 태어난 날은 루베니오가 기억하는 가장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또한 숨이 막히도록 슬펐던 날이기도 했다.
로페니아가 죽고 니네이나가 태어났다. 그러나 딸의 탄생은 오로지 기쁨이었다. 루베니오는 로페니아의 죽음을 니네이나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탓을 해야 한다면 자신을 탓해야 했다. 니네이나의 탄생이 축복받지 못했다면 두 사람을 지키지 못한 루베니오의 탓이었다.
―아가야, 엄마를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루베니오는 그날도 그렇게 말했다. 눈만 간신히 뜬 아주 작은 생명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20년이 지났음에도 거기서 더 자라지 않으니 루베니오에게 그 애는 여전히 아가였다. 이제 성년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아직 아무것도 적지 못한 종이를 내려다보던 그가 다시 펜을 들고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아가야, 오늘은 무엇을 하며……」
루베니오가 니네이나에게 보내는 편지 중 대부분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었다. 잘 지내고 있다고도 잘 지내 왔다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늘 묻던 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루베니오는 매번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 편지를 그토록 오래 붙잡아 왔던 것이다. 아마 한밤중에 루베니오의 방문을 두들기는 집사만 없었다면 그 밤도 그렇게 보냈을 것이다.
똑똑. 흔하지 않은 한밤의 방문에 그는 들고 있던 펜을 조용히 내려놨다. 다 쓰지 못한 편지를 서랍 안에 잘 넣어 두고 집사의 입실을 허락했다.
“들어……”
루베니오의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열렸다.
“주인님!”
구르듯 안으로 뛰어들어 온 집사가 서둘러 달려와 루베니오 앞에 섰다.
“……무슨 일이지?”
“주인님! 별장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루베니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빼앗듯 집사의 손에서 편지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종이 세 장이 툭 떨어졌다. 루베니오는 가이사가 이렇게 꼼꼼하게 보고할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기뻐했다. 그러다가 금세 주저하기도 했다. 혹시 안 좋은 소식이 들어 있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그럼에도 얼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 떨어진 종이를 주워 살폈다.
그가 똑같은 그림 세 장을 눈에 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집사가 말했다.
“작은 주인님께서 주인님께 보낸 답장이라고 했습니다.”
루베니오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목덜미까지 소름이 올랐음에도 그는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는 법과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 같았다.
잠시 뒤 그의 눈동자만 좌우로 도록 굴러갔다. 곧 마법이 풀린 듯 숨을 쉴 수 있게 된 루베니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가…….”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날고 있는 새.
루베니오는 손을 부르르 떨면서도 그림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러나 한쪽 귀퉁이라도 우그러트릴까 봐 꼭 움켜쥘 수도 없었다. 두 손으로 그림을 붙잡고 오른쪽 엄지만 겨우 움직여 새의 날개를 쓸었다. 거친 종이의 질감은 흐릿하기만 했다. 그리고 만지면 만질수록 흐릿해졌다. 저 그림들에는 실체가 없었다. 만질 순 없으나 느낄 순 있는 무언가가 있을 뿐이다.
“넌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루베니오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의 딸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용서했다는 것을. 얽매여 있던 건 그였다.
“난 아직 빌지 못했는데.”
감지 못한 눈동자 위로 바르르 떨리던 눈물이 그제야 툭 떨어졌다. 보고 싶어 더는 견딜 수 없어서.
* * *
위험과 안전.
두 단어가 마구 떠올랐으나 지금의 그는 단지 위험하다는 이유로 더는 망설일 수가 없었다. 완벽히 안전해질 때가 과연 언제란 말인가? 아이가 낸 용기였고 아이가 준 기회였다. 그 애가 견뎌 왔을 시간을 생각하면 당장 가야 했다.
그는 정말 최소한의 준비만 갖춘 뒤 별장으로 달려갔다. 어디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가지 못했던 그 길이 무섭도록 길고 허무하게도 짧았다. 고작 며칠 쉴 틈 없이 말을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그 애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20년간 단 한 번도 찾아와 주지 못했다. 그것이 너무 미안하고 후회되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찢어발겨 자해한다고 해도 이보다는 고통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날…….’
니네이나의 용서는 루베니오에게 커다란 아픔이었다. 괜찮다는 그 마음이 역설적이게도 안 괜찮았다는 걸로 보였다. 루베니오는 그제야 제 딸이 그를 많이 기다려 왔음을 알았다. 그 아이가 못난 아버지를 20년이나 기다려 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 달라고 빌었는데 그 큰 그리움을 가뜩이나 힘겨운 몸에 담아 두고 있었다. 젖먹이 아이가 낯선 손에 놀라 엉엉 울다가 결국 체념했을 걸 생각하면 눈앞이 새빨개졌다.
생각해야 할 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기와 떨어졌던 날 이후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던 것들만 떠올랐다. 아기의 얼굴, 표정, 소리, 체온.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그 모습이 생생했다. 루베니오는 정말 쉬지 않고 말을 달렸지만 힘들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그냥 가슴이 아팠다. 괴로움은 강해지고 약해지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상상해 왔던 별장을 발견했을 때 터질 듯 쿵쾅거렸다.
루베니오가 낮은 담벼락을 멍하니 바라보며 스쳐 지나갈 때였다.
“아하하하.”
루베니오가 고삐를 힘껏 당겼다. 갑작스러운 정지 신호에 말이 앞다리를 들며 몸을 들썩였다. 웃음소리를 듣긴 했는데 들은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떤 목소리였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작았다. 울림이 깨끗했다는 기억만 겨우 날 뿐이었다. 그런데 루베니오는 뭐에 씌기라도 한 듯 제대로 서지도 않은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주인님!”
그는 말리며 쫓아오는 사람들의 말도 듣지 않고 정문의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담벼락 너머를 훔쳐보며 발이 꼬일 듯 위태롭게 걸었다.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고 곳곳을 마구잡이로 방황하던 그의 눈동자에 살짝 웃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하얗고 마른 아이였다. 기다란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눈동자가 예뻤으나 루베니오의 눈에는 끊길 듯 가느다란 체구가 알알이 박혔다.
‘아가.’
단번에 알았다. 저 아이가 그 아이임을.
루베니오는 무심코 담벼락을 손으로 짚었다. 벽에 막혀 더 다가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최대한 몸을 내밀고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을 바라봤다. 모래알을 한 움큼 씹은 듯 입안이 텁텁했다. 뜨거운 물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잠시…….”
그는 시커먼 손이 아이 앞을 막은 것에 흥분해 담벼락을 반쯤 뜯어 낸 뒤에야 그 아이 옆에 선 사람이 가이사라는 걸 알았다.
다른 쪽을 보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정면에서 본 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약간의 의아함과 경계심을 담고 당신 누구냐는 듯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피해 주지 못했다. 눈물이 날 만큼 예뻤고 심장이 저릴 만큼 사랑스러웠다.
―딸을 낳거든 니아, 당신의 애칭을 따 니나라고 부르고 싶어. 기쁨이라는 뜻이래.
그래서 처음 아기의 애칭을 짓던 날이 떠올랐다.
“아가…….”
감히 널 기쁨이라고 불러도 되겠니?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아가가 저기 있다고. 아가가 바로 앞에 있다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담벼락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 * *
반쯤 뜯긴 돌 조각이 흔들리면서 울린 진동에 얌전히 앉아 있던 노란 나비가 날아갔다. 나비의 날개가 잔상으로 맺혀 잠시 그 사람의 시야를 가렸다. 가까이 날아가는 나비가 그의 눈을 가린 건 아주 찰나였지만 나는 그때야 간신히 시간이 돌아온 것 같았다.
셋 중 유일하게 시간을 멈추지 않은 건 가이사였다. 유려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던 가이사가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여기는 어쩐 일……”
나는 무심코 그 팔을 붙잡았다. 손이 떨려 민들레 홀씨만큼이나 약했을 것이다. 힘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만큼 작은 몸짓이었다. 실없다고 쳐 버렸으면 그대로 날아갈 불안정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이사는 멈췄다. 그는 고개를 흘긋 돌려 그의 소매 끝을 아주 살짝 붙잡은 나와 내 손을 바라봤다. 눈이 불안정하게 깜빡거렸다. 조심스럽게 붙잡아 닿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가이사의 안쪽 손목과 손가락이 스칠 수도 있었다. 그가 몹시 싫어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술을 꾹 깨물고 그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이십니까?”
가이사는 그런 나를 그냥 놓아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말을 끝냈다. 달라진 거라면 가이사가 더는 그 사람 쪽으로 걸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 안도한 내가 살짝 한숨을 쉴 무렵 단조로운 목소리가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루베니오.”
숨이 덜컥 멎었다.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고개를 번쩍 들어 검은 모자를 쓴 남자를 바라봤다. 때마침 쌩 불어온 바람이 그의 모자를 훔쳐 달아나려 했다. 로브 끝에 달린 모자가 바람에 거세게 흔들리다가 가라앉았다. 단정했을 금빛 머리칼도 바람이 흩트려 놓았다.
―그분은 아름다운 금발과 주인님의 푸른 눈동자를 가지셨어요. 눈에 띄는 분이니 아주 멀리서도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많이 닮으셨어요.
언제 들은 건지도 모를 집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아니잖아.’
나는 마음속으로 강하게 반박했다. 그는 나와 닮지 않았다. 강직한 표정과 다정한 온기는 나에게 없는 것이었다. 굳이 꼽자면 루베니오에게서 물려받았을 푸른 눈이 유일하게 닮아 있었다. 그것 외에는 하나도 같지 않으니 많이 닮았다던 집사의 말은 거짓이었다. 아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거라던 말도 틀렸다. 이렇게 가까이 섰는데 아직도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만 보였다. 눈을 크게 뜰수록 시야는 점점 더 흐려졌다. 눈, 코, 입, 더 보고 싶은 곳이 많은데 볼 수 없었다.
“내…… 아가…….”
루베니오가 당장이라도 벽을 넘어올 것처럼 몸에 힘을 주며 애원했다.
그의 부름에 눈을 부릅떴다. 눈물이 아롱아롱 고여 앞이 너무 어두웠다. 맹인이 된 걸까 싶어 숨이 덜컥 흐트러졌다. 결국 떨어진 눈물이 시야를 맑게 했다. 동시에 걷잡을 수 없게 흐려지기도 했다. 루베니오를 본 순간부터 숨이 차오른 듯 어지럽던 머리가 뿌옇게 변했다. 자꾸만 뇌를 강타하는 두꺼운 망치질을 견디지 못한 내 가슴이 빠듯이 부풀다가 자꾸만 아래로, 그리고 또 아래로 떨어졌다.
“아가!”
그가 그의 가슴 높이였던 담벼락을 훌쩍 넘어 달려왔다. 그가 달려오는 사이 나는 가슴을 붙잡고 숨을 헐떡거렸다. 힘껏 달려오는 그의 얼굴이 처절하여 눈꺼풀이 더 무거워졌다.
‘가지 마요…… 제발…….’
한번 눈을 감으면 다시 떴을 때 그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잡아끄는 물살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감기는 눈동자가 그 순간 특히 미웠다.
* * *
“…….”
니네이나의 숨이 흐트러지는 순간부터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가이사의 팔이 정신을 잃고 늘어진 그녀를 안정적으로 받쳤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정신을 잃는 순간 잠깐 반짝였던 머리맡에 머물다가 더 아래로 내려왔다. 가쁘기는 하나 니네이나는 제대로 숨을 쉬고 있었다. 1분이 넘도록 그녀의 호흡에만 신경을 쓰던 가이사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힘이 다한 겁니다. 당신 탓이 아니라.”
가이사의 설명에도 루베니오의 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니네이나만 바라보며 우뚝 서 있던 루베니오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바라봤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뺨 위에서 반짝거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 줄 듯하다가 물러났다.
“이게…… 종종 있는 일인가?”
“…….”
가이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베니오는 두려움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아이가 아프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더 안 좋아졌다는 말이 아이에 대한 보고의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이 고통에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땅을 박박 긁어 손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괴로움과 가지 못하는 다리를 차라리 잘라 내고 싶다는 충동을 20년간 품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실은 미약했다. 눈앞에서 쓰러지는 모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건 정말 차라리 죽고 싶은 비통이었다. 가진 생명을 쏟아부어 줄 수만 있다면 심장을 찢어발겨서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좋았다.
“그런데 왜…… 내 아이는 왜……!”
자기 자식을 이렇게 두고 편히 살았을 아버지는 없었다. 루베니오의 삶에는 즐거움이 없었다. 그의 기쁨이 머나먼 곳에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루베니오는 오래도록 불면증을 앓아 왔다. 제대로 된 숙면을 스스로 방해하며 살았다. 그것이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해이기에 20년 동안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루베니오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했다. 원망스러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멀쩡했다. 경이로운 이 세계의 회복력은 단지 숙면을 방해받는 것 정도로는 사람을 망쳐 놓지 않았다. 타고나길 약했던 니네이나가 예외였을 뿐이다.
“왜 내 아이만 이렇게 아파야 하는 것인가? 왜 하필……!”
“편히 눕혀 둬야 합니다.”
가이사가 루베니오를 한 번 보고는 말했다.
눕혀야 한다는 말에 루베니오가 서둘러 일어났다. 루베니오를 따라 일어서려던 가이사가 멈칫하고 담벼락 바깥쪽을 바라봤다. 찰나였으나 시선이 느껴졌다. 가이사는 루베니오에게 받으라며 니네이나를 살짝 내밀었다.
“목을 팔뚝으로 받치고 조심히 안으셔야 합니다.”
“내가?”
“예.”
가이사가 아버지인 당신이 아니면 누가 하겠냐는 듯 루베니오를 바라봤다.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용인들이 몰려 있었으나 가이사는 굳이 루베니오를 골랐다.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루베니오가 그녀에게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 누군지 모를 시선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루베니오가 곁에 없었다면 가이사는 그 누구에게도 그녀를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그녀의 팔이 살짝 흔들리며 루베니오의 손을 쳤다.
“아가가 싫어할지도 모르는데…….”
맞닿은 체온에 깜짝 놀란 루베니오가 엉거주춤 팔을 내밀며 말했다.
가이사는 말이랑 행동이 다른 루베니오를 잠시 바라봤다. 그는 루베니오가 안정적으로 그녀를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 때가 되어서야 움직였다.
“안 그러실 겁니다.”
가이사가 속삭이듯 말하며 그녀의 목 뒤를 받쳤던 손을 빼냈다. 정말 루베니오가 싫었다면 그녀는 그런 얼굴로 루베니오를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가이사는 확신하며 조심스레 루베니오의 품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가이사의 손이 완전히 빠져나가자 그녀의 몸이 루베니오에게 폭 안겼다.
“……20년이나 지났는데.”
한 줌도 안 되었던 무게가 그대로였다. 루베니오는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아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 안에는 기쁘게 그를 맞아 주는 니네이나도 있었고, 그를 증오하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치는 니네이나도 있었다. 중간이 없는 극단적인 생각 중 빈도가 높은 건 당연 후자였다. 그러나 그 어떤 끔찍한 상상 중에도 이런 것은 없었다.
‘내가 너무 늦어 버려서……. 정말 미안하다, 아가야…….’
쉬운 사과로 들릴까 봐 듣지 못할 아이를 두고도 차마 입으로 말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루베니오가 딸을 다시 안아 볼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토록 희망했던 지금 이 순간 기쁨보다 슬픔이 너무나 컸다.
“큰 주인님, 아가씨의 방은 이쪽입니다.”
별장의 집사가 눈치 빠르게 끼어들며 니네이나를 안고 가만히 서 있는 루베니오를 안내했다. 니네이나를 눕혀야 한다는 생각이 든 루베니오는 서둘러 집사를 따라갔다.
가이사는 그런 루베니오의 뒤를 1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바짝 쫓아갔다.
“이 방입니다.”
매 순간 궁금했던 아이의 방이지만 루베니오는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하얀 침대로 곧바로 걸어갔다.
집사는 루베니오를 더 따라가려 하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안으로 들어간 건 세 사람이었다. 루베니오와 가이사, 그리고 니네이나.
루베니오가 몸을 낮추고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가 품었던 무게가 스치듯 사라졌다. 루베니오는 놓지 않고 가슴이 터지도록 꼭 끌어안아 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그녀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줬다.
“천사 같아.”
루베니오는 무너져 툭 주저앉으며 모은 두 손에 이마를 기댔다.
‘로페니아, 보고 있어? 우리 아기…….’
그가 본 건 열이 잔뜩 올라 제대로 울지도 못하던 얼굴뿐이었다. 차라리 엉엉 힘차게 우는 것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가진 숨이 미약했었다. 어쩌다 이름 모를 아기를 보게 되는 날이면 낯선 얼굴에 마지막으로 본 그 애를 빗대어 보며 상상했다. 저렇게 잠든 얼굴은 또 얼마나 천사 같을까 하고.
첫 옹알이, 뒤집기, 앉기, 걷기, 말하기…….
위가 아릿하고 가슴이 타들어 가고 목구멍이 먹먹했다. 딱 그 순간에만 볼 수 있었을 그것들이 아까워 매일 밤 사무쳤다. 잠든 손을 잡아 주고 잘 자라고 가슴을 도닥이고 어색한 자장가도 불러 주면서, 그 모든 순간 함께이고 싶었다. 정말 함께하고 싶었다.
“니아…… 아가가 너무 예뻐서…… 아주 많이…… 후회돼…….”
눈물이 폐로 흘러 숨통에 물이 차오른 것 같았다. 그는 몹시 슬펐다. 동시에 분노했다. 왜 하나뿐인 아가 옆을 지켜 주지 못했을까 하여서.
“가이사.”
루베니오가 깔깔한 목소리로 가이사를 불렀다. 루베니오의 시선은 여전히 니네이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말씀하세요.”
“내게 꼬리가 달렸나?”
루베니오는 무겁게 물으며 딸의 뺨을 살짝 만져 봤다. 말랑한 뺨 위에 말라붙었던 머리칼이 사르르 스치며 흘러내렸다. 20년 만에 만져 본 뺨이 얼마나 어여쁜지 몰랐다. 그러나 아기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속이 상했다. 좀 더 살이 붙어 있기만 했어도 겨우 손끝을 대어 보는 것으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루베니오는 앙상한 하얀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자연스레 창밖을 눈으로 훑었다.
“아까부터 시선을 느꼈다.”
“어느 쪽인지 애매합니다. 이미 잠복해 있었는지 달고 내려오셨는지.”
이제는 거의 지정석이라고 해도 좋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가이사가 일부러 열어 둔 창문을 흘깃 바라봤다. 꽤 교묘한 놈이었다. 시선은 느껴지는데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다. 간을 보듯 수면 위를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리는 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걸리면 잡힐 거라는 것을 아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이면 되는데 오지를 않네요.”
루베니오는 다시 니네이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잠든 아이를 다정하게 바라보던 루베니오가 그녀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아가……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구나.”
부드러우나 어딘가 음울한 목소리에 가이사의 고개가 루베니오 쪽으로 돌아갔다. 가이사는 니네이나 앞에서는 살기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려다가 금세 기세를 사그라트리는 루베니오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가이사는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가 신경 써야 할 건 니네이나를 절대 해치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불쾌하게도.”
가이사는 그 말 또한 조용히 흘려보냈다. 차가운 손이 따스해지기를 바라며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살짝 감싸 쥐는 루베니오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녹아 있었기에. 가이사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봤다. 정원에 심은 식물 때문에 숨을 곳이 많아 보였다. 성인 남자도 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울창한 수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옷의 단추를 뜯어 휙 던졌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단추가 덤불을 횡단으로 벤 뒤 나무에 꽂혔다.
쾅! 한차례 바람이 크게 일어난 자리에 흙먼지가 날렸다.
니네이나가 창문으로 밖을 보는 걸 좋아해서 정원사가 특히나 아껴 관리하던 정원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과 큰 소란에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사방을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
“누구냐!”
“나다.”
정원을 망친 범인이 뻔뻔하게도 대답했다.
“백작님……?”
가이사는 허망한 얼굴들을 무심히 보아 넘기며 정원 쪽을 가리켰다. 그녀를 안전한 방으로 옮겨 놨으니 이제 슬슬 쥐새끼를 몰아야 했다.
“주위를 수색해.”
가이사는 뿌리가 듬성듬성 뽑힌 수풀 쪽을 턱짓했다. 흙이 튀고 뿌리가 뽑힌 참혹한 광경에 잠시 말을 잃었던 기사들이 곧 가이사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시끄러운 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며 딸의 귀를 살짝 막고 있었던 루베니오는 소란이 가신 후 가이사를 돌아봤다.
“보였나?”
“그냥 감으로 던진 겁니다.”
“결과는?”
“실패.”
가이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루베니오는 거슬리던 시선 끝을 얼른 잡아채고 싶어 조바심이 일었다.
“조용히 숨어 있기만 하는 걸로 봐서는 감시가 목적이군. 그런데 나는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시선을 느꼈어. 내가 움직인다면 나를 따라올 것 같은가?”
“두 사람 중 누구를 지켜보는지 모르는 이상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률이 한쪽으로 쏠리는군요.”
가이사가 니네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따라오지 않는다면…….”
루베니오가 뒷말을 삼키며 니네이나를 내려다봤다. 그는 표정을 풀고 가렸던 니네이나의 귀에서 손도 치웠다.
“……아가는 언제 눈을 뜰까?”
“적어도 3시간은 더 잘 겁니다.”
“3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루베니오는 무심코 한숨을 쉬려다가 서글프게 입매를 흐렸다.
“아가야……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점점 더 욕심을 내게 되는구나.”
“…….”
“얼굴만 봐도 다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보고 싶은 게 늘어. 잠든 널 봤으니 눈을 뜨는 너도 보고 싶고…….”
혈색이 창백해서 그런지 잠든 니네이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만든 조각상 같았다. 숨을 쉬고 있으니 자고 있는 게 맞을 텐데도 어서 일어나 다시 한번 그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보여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꼭 끌어안아 보고 싶고…….”
아가가 눈을 떴을 때 허락을 받고 그러고 싶었다. 어릴 때 해 주지 못했으니 품에 두고 재워도 보고 싶었다.
‘니아, 당신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 아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자장가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로 만족해 준다면 목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불러 줄 수 있었다.
“잘 먹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루베니오는 이곳에 내려오면서 어떤 평민 부녀를 봤다. 거친 노동을 한 듯 땀을 닦으며 걸어오는 남자에게 여자아이 하나가 뛰어왔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작은 애였는데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 품에 매달려 뭐라고 종알거렸다. 남의 애가 새처럼 재잘거리는 걸 봐도 저렇게 예쁜데 아가가 저렇게 말하면 얼마나 예쁠까 싶어 눈을 떼지 못했다.
껄껄 웃던 남자는 아이를 안고 걸어가 빨간 사과 하나를 사 줬다. 커다란 사과를 먹는 게 힘든지 낑낑거리는 아이를 위해 사과를 쪼개 주고 넘어지지 않게 손을 붙잡아 줬다. 그 모습이 뭐가 그렇게 부럽던지 아무리 고개를 꺾어도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가는 몸이 안 좋아 사과 같은 건 먹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저기 저 시장에 있는 모든 사과를 다 모아 가져가고 싶었다.
“새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 다 데려가 주고 싶단다.”
푸른 바다도, 울창한 숲도, 거대한 대지도, 무엇 하나 제대로 느껴 본 게 없을 아이였다. 이 아이의 여행은 아주 어렸을 적 저택에서 별장으로 내려올 때가 다였다. 잘 지내냐는 안부 편지의 답장이 날아가는 새였으나 루베니오는 사실 그게 다가 아님을 알았다.
“동경했을 테지…… 너도 가고 싶어서.”
그 생각을 하면 억장이 무너졌다. 이렇게 먼 외지에 아이를 두고 어떻게 살아왔나 싶어서 가슴이 미어졌다. 혼자서는 이 별장 밖으로도 나갈 수 없는 아이가 얼마나 세상 밖이 궁금했을까? 닿고 싶으나 결국 닿지 못해 좌절했을 그 마음을 생각하며 속이 쓰려 목구멍까지 따가웠다.
“두 번 다시 널 두고 후회하지 않으마.”
루베니오는 다짐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적극적으로 딸을 지킬 용기였다. ‘안전’이라는 것에 치중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도 모르고 딸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스스로를 물러 터트리는 짓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이곳은 이미 들켰을 테지.”
루베니오가 여기 내려오기를 선택한 순간부터 니네이나의 거처는 바뀔 예정이었다. 몇 개의 리스트가 다다닥 떠올랐다. 여기서 가까운 곳도 있었고 수도 근처의 곳도 있었다.
“어디가 좋을까?”
“같이 가면 되잖습니까?”
가이사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루베니오도 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려웠다. 말로 달려도 며칠은 걸리는 곳을 느린 마차로 가려면 일주일은 넘게 걸릴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도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갔던 길이었다. 그때보다 사정이 결코 낫지 않은 지금은 더 위험했다. 그래서 루베니오는 감히 딸을 가까이 데려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가 이 근처로 내려와 같이 지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봤을 뿐이다. 그 사정을 뻔히 알 가이사가 저렇게 말한다면 루베니오 입장에서는 놀리는 거냐며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루베니오는 그저 조용히 물었다.
“생각한 방법이 있나?”
“날아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자네는 바람 정령과 계약이 되어 있지. 정령의 힘으로 날아가자는 말인가?”
“예.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이리저리 돌아가야 하는 육로보다는 일직선으로 날아갈 수 있는 하늘이 훨씬 빨랐다. 그러나 루베니오가 이 방법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정령사가 아무리 귀하다고 한들 루베니오 정도면 못 구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아가가 버틸 수 있을까? 멀미도 할 테고 바람도 찰 텐데.”
루베니오의 말에 가이사가 니네이나를 슬쩍 바라봤다.
“멀미는…… 재워서 해결하면 됩니다. 피곤하게 만든 다음에 기절하듯 잠들게 만드는 건 쉬울 겁니다.”
니네이나를 재우는 방법은 엄청나게 많았다. 지금도 계속 자고 있으니 말이다. 오히려 기절하지 않게 단순히 재우는 게 훨씬 어려울 터였다. 일어난 뒤에 속이 좀 울렁거릴 수는 있으나 멀쩡한 정신으로 데려가는 것보다는 훨씬 소모가 덜할 것이다.
“바람은? 정령의 실드는 공기가 통하는데.”
루베니오의 말에 가이사는 멈칫했다.
가이사에게도 바람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정령의 실드는 공기가 통하니 당연히 바람도 드나들 수 있었다. 날아가면서 생길 엄청난 바람을 도착할 때까지 완전히 막아 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최대한 겹겹이 둘러서 막아 볼 겁니다. 한 달만 전이었어도 절대 불가능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라…… 괜찮을 겁니다, 아마.”
가이사가 얼굴을 조금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확신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루베니오는 한숨이 흐를 것 같아서 손으로 입가를 쓸어내렸다.
“무리하게 멀리 이동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한가?”
“저쪽에서 위치를 아는 한 소모전이 계속될 겁니다. 루베니오, 당신이 뭔가를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심해질 텐데…… 지켜야 할 쪽은 터무니없이 약합니다.”
니네이나는 식재료 하나를 소홀히 해도 당장 목숨이 위태로울 사람이었다. 그러나 제발 좀 조심하라고 다그칠 수도 없었다. 스스로 몸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한계라서 정신적인 압박감은 최대한 줄여야 했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행동 하나하나를 통제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녀가 편안함을 느낄 공간이 없었다.
“기사를 풀었는데 아직도 잡히지 않습니다. 저런 것들의 접근을 사전에 방지할 좀 더 안전하고 확실한 보호처가 필요합니다. 당신이라면 공작이 모르는 재산도 있겠지요. 그중에는 집도 있을 테고.”
물론 여러 채 있었다. 그중에서도 지금 가장 강하게 떠오르는 건 수도 외곽에 있는 아담한 저택이었다. 아이가 열 살쯤이었을 때 커다란 나무에 걸린 그네를 잊지 못해 사 둔 것이었다. 만약 아이를 데려올 수 있다면 아이를 태우고 그네를 밀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봄이 되면 연분홍색 꽃이 만개해 그네를 흔들 때마다 꽃잎이 떨어지는 무척 사랑스러운 집이었다. 집이라는 걸 다시 만들 수 있다면 저런 곳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가가 허락해 줄지 모르겠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었다.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가가 붉어진 루베니오가 딸을 절절하게 바라봤다. 20년이나 오지 않은 주제에 이제 겨우 와서는 제발 따라와 달라고 말할 염치가 없었다.
“믿음도 주지 못했으면서 무작정 믿어 달라고 하는 꼴이잖나…….”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먹이는 루베니오의 모습은 정말 절실해 보였다. 꼭 잡은 손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누구나 안쓰러움을 느낄 만한 그 모습이 가이사에게는 별 감흥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안 하실 겁니까?”
가이사가 무심히 묻자 루베니오의 어깨가 움찔 들썩였다. 소매로 눈가를 툭툭 눌러 닦은 루베니오가 이제 조금 따뜻해진 니네이나의 손을 이불 아래로 넣었다.
“……일단 저것부터 치워 둬야겠지.”
루베니오가 언제 애달프게 울었냐는 듯 표정을 싹 굳히고 말했다. 염치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니네이나를 데려가고 싶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겠다는 겁니까?”
“아가의 허락이 우선이다.”
루베니오가 아가 허락 없이 그럴 리 있냐는 듯 정색했다.
“…….”
가이사는 루베니오가 이미 마음속으로 니네이나를 데려가는 상상을 백 번 이상 반복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굳이 필요한 말은 아닌 것 같아서 따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나를 미끼로 써 놈을 끌어내야겠다.”
루베니오가 가이사가 선 창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니네이나가 밖을 동경하며 바라봤을 창문이었다. 두 장정이 서자 더욱 좁아 보였다.
루베니오는 좁은 창턱을 손으로 짚어 봤다. 창턱을 누르고 어깨를 펴자 그가 차지하는 부피가 더 커졌다.
“……내려올 땐 못 느낀 시선을 이곳에 와 느끼셨다면 놈이 당신보다 먼저 내려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가이사가 어느새 많이 가까워진 루베니오를 슬쩍 피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불쾌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루베니오는 그런 가이사의 반응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몸을 벽 가까이 붙였다.
“내가 목표는 아니어도 떠나려는 모습을 보이면 잠깐의 동요쯤은 있겠지.”
“뭔가 반응을 보이면 범위를 좁힐 수 있을 겁니다.”
“나를 보고도 따라붙지 않고 숨는다면…….”
그렇다면 목표는 니네이나라는 뜻이었다. 잠시 거친 숨을 고른 루베니오가 가이사 못지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죽여라. 감히 내 아가를 감시한 놈이니.”
갑자기 결정한 일이었다. 게다가 대역까지 남겨 놓으며 조심했는데 꼬리가 붙은 걸 내내 몰랐을 리 없었다.
‘아가를 노리는 것이다. 매우 높은 확률로.’
분노한 탓에 이를 꽉 깨물었던 루베니오는 그 탓에 조금 늦게 발견했다. 니네이나를 노린 놈은 죽어 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가이사를 말이다.
“……가이사.”
의아함을 느낀 루베니오가 가이사를 조용히 불렀다. 무슨 일이냐고 돌아보는 가이사의 얼굴은 늘 그렇듯 무감각했다. 그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런 남자였다.
루베니오의 눈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어여쁜 니네이나를 부드러이 바라봤다가 가이사에게로 돌아왔다. 가이사에게 다시 닿았을 때, 그의 눈동자는 오싹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협조적이군.”
아버지의 감이 소리쳤다. 근처에 아가를 노리는 도둑놈이 있다고.
루베니오의 경계. 그것은 가이사에게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가이사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안전하게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약속을 지키려면 만전을 기하는 게 좋습니다.”
그에게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루베니오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 가이사의 말에는 허점이 없었다. 수상함을 감지하는 건 오로지 직감뿐이었다.
“몸이 워낙 약하시니.”
쐐기를 박는 말에 루베니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동요를 감추지 못한 그는 어느새 니네이나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가 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그것뿐이라고?”
“예.”
미세한 떨림도 없는 대답에 루베니오의 눈동자가 냉철하게 돌아왔다. 손등으로 니네이나의 뺨을 한차례 쓸어 본 루베니오가 의자를 끌어당겨 그녀의 앞에 편안히 앉았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 중 대부분이 울고 있는 모습이라네. 아가는 늘 울었거든. 젖을 먹여도 울고, 안아 달래도 울고, 잠을 자다가도 울고…….”
“…….”
“숨이 차 얼굴은 새빨개지고 머리는 열로 바글바글한데 울고 또 울었지.”
기운이 있으면 소리 내어 울었고 기력이 다하면 닭똥 같은 눈물만 떨어트렸다.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 얼굴이 언제 하얬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아파서 그런 걸 테지. 아기는 우는 것으로밖에 표현을 못 하니 말이야.”
그 옆에 있으면 루베니오도 울고 싶었다. 같이 울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슬픔을 달래 주고 아픔을 가져올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이 애의 눈물은 고통이었다. 그리고 괴로움이었지. 그래서 앞으로는 보고 싶지 않아.”
루베니오가 니네이나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부드러이 쓸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마주한 얼굴을 떠올렸다. 솜털 같은 머리칼이 보송보송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게 참 좋았다. 저 모습을 보려 지금껏 살아왔구나 싶을 정도로. 그는 딸을 만나고서야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전에는 짙은 안개 너머로 간신히 보였는데 지금은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옥의 썩은 절벽을 아등바등 기어올라 손을 턱 올렸을 때도 성취감은 없었다. 오직 단 하나만이 그를 기쁘게 했다. 그는 이제야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물이 물처럼 느껴지고 공기가 공기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이것은 기쁨이다. 이것이 기쁨이다.
‘나의 예쁜 아가야. 기쁘게 살아 주렴. 철없고 나쁜 애여도 좋으니 건강하렴. 너를 슬프게 하는 것과 너를 나쁘다고 하는 것들을 내가 모두 없앨 테니. 너는 그저 기쁘게…… 부디 머물러 주렴…….’
“웃는 얼굴로 살아 줬으면 해.”
루베니오가 니네이나의 손을 붙잡고 두 손을 모았다. 기도하며 눈을 감는 루베니오의 눈동자가 숨을 죽이는 귀신의 불꽃 같았다.
‘틀렸군.’
가이사는 깊이 침음했다.
* * *
루베니오가 믿는 건 가이사가 니네이나를 지키려고 한다는 단순한 상황뿐이었다. 그 외의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베니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든 결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우선순위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 그가 가이사를 그녀 옆에서 떨어트리려고 한다면 그건 공작을 잡은 뒤가 될 터였다. 그건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녀를 뺏길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며 언제든 그녀를 빼앗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빼앗는다고 표현하는 건 옳지 않았다. 니네이나는 가이사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이사와 루베니오 중 그녀를 보호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뽑자면 모두가 예외 없이 루베니오라고 할 것이다. 루베니오가 그녀의 친부였기 때문이다.
가이사는 그 사실에 조바심을 느꼈다. 그는 일전에 루베니오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었다. 약속을 어길 수는 없고 그녀의 옆에서 멀어질 수도 없으니 그는 골치가 아팠다. 남은 시간 동안 얌전히 굴며 어떻게든 니네이나와 루베니오의 호감을 사야 할 판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루베니오가 이미 파악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설마 제 딸을 ‘죽은 아버지의 흔적’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지만 그는 가이사의 속내를 의심하고 있었다. 혹시 가이사가 제 새끼의 손가락에 생채기라도 낸다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 것이다.
가이사는 그 점이 곤란했다. 그는 니네이나의 곁에 남아야 했다.
‘그런 약속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가이사는 루베니오에게 제일 처음 아무렇게나 해 준 약속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군.”
전용 의자에 앉아 있던 가이사가 고개를 돌렸다.
루베니오의 시선은 여전히 붙박이처럼 제자리였다.
“같은 말만 다섯 번째입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지 않으시는군요.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쥐새끼부터 처리해야겠다고 한 건 루베니오, 당신이었습니다.”
“……아가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지 않나. 손을 뺄 때 깰지도 모르고.”
루베니오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살짝 웃었다. 니네이나가 그를 붙잡아서 기분이 몹시 좋은 듯했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일 텐데도.
“여기 보이나? 아가의 엄지와 검지 말일세. 여전히 조그마한데 힘은 꽤 세진 것 같아.”
루베니오가 자랑했다.
“힘이…… 세졌다고 했습니까?”
“꽤나.”
루베니오의 눈이 유리창에 부딪친 하늘처럼 반짝거렸다. 얼음장처럼 굳은 눈동자 때문에 그의 눈을 ‘루브오(신성어로 얼음을 뜻함)’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깜짝 놀랄 광경이었다.
“……어릴 땐 어느 정도였던 겁니까?”
그러나 가이사가 놀란 건 이쪽이었다. 지금도 터무니없게 약한데 어릴 때는 어땠다는 말인가 싶었다.
“깃털 같았다네. 사랑스럽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었지.”
루베니오가 행복한 얼굴로 니네이나의 검지 손톱을 손끝으로 살살 만졌다. 동글동글 원을 그리며 즐기는 걸 보니 가만두었다가는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를 것 같았다.
가이사는 니네이나의 인형 중 가장 작은 걸 가지고 돌아왔다.
“이걸로 바꿔 놓으면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내 손만큼 따뜻하지 않을 텐데.”
루베니오가 마땅찮은 얼굴로 갈색 곰 인형을 흘긋거렸다.
그따위 곰 인형이 내 손만 하겠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성은 남아 있는지라 가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는 하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손을 꼼지락거려 인형의 팔을 니네이나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었다. 손을 빼내기가 싫어 미련을 두고 질질 끄는 게 가이사의 눈에 보였다.
“으응…….”
니네이나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살짝 틀자 두 남자가 동시에 움찔거렸다. 위기감과 당혹감이 엎치락뒤치락 싸웠다. 두 남자 모두 니네이나의 잠꼬대를 큰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관찰했다. 니네이나가 코를 작게 훌쩍일 때는 그들의 눈동자가 매우 거칠게 흔들렸으나 그녀는 인형을 꼭 쥐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이만…… 가지.”
혹시라도 작은 기척 하나가 그녀의 잠을 완전히 깨우게 될까 봐 루베니오는 발소리도 조심했다.
‘따로 암살 훈련을 받지는 않았을 텐데.’
루베니오의 검술 실력이 어떻든 간에 기척을 저 정도로 죽이는 건 암살자나 배우는 것이었다. 공작가의 후계인 그가 그런 걸 배웠을 리는 없으니 저건 그야말로 아버지의 힘이자 아버지의 의지였다.
가이사는 루베니오의 행동이 실로 놀랍다고 생각하며 그를 따라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주춤하고 말았다. 니네이나의 손이 침대 밖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뒤척거렸던 탓이었다. 소리는 물론 기척까지 완전히 죽이고 귀신처럼 걸어온 가이사가 니네이나의 손을 배꼽 위로 얌전히 올려놓았다.
“…….”
그 순간 갈무리하고 있던 날카로움이 그의 등을 찌를 것처럼 터졌으나 가이사라고 할지라도 등 뒤까지 볼 수는 없었다.
* * *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나기 시작한 건 니네이나의 방이 있는 복도를 완전히 빠져나온 후였다. 각자 방향은 달랐다. 루베니오는 이만 돌아가려는 것처럼 정문으로 갔고 가이사는 저택의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돌아가려는 행동을 보이는 루베니오를 보고 집사가 뛰쳐나왔다. 집사에게는 미리 말을 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이 극적으로 보였다.
“큰 주인님, 돌아가십니까?”
“그래.”
“아직…….”
충성스러운 중년의 집사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원래 루베니오를 모시던 사람이었다. 루베니오가 자기 사람들만 니네이나에게 붙이려 노력했으니 당연했다.
집사는 희게 질린 얼굴로 고민했다. 감히 사용인이 할 말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간 보아 왔던 주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누가? 누구를?
‘네가 날…….’
빠진 말이 빈틈을 채우지 못했는데 루베니오는 무릎이 휘청 꺾일 것만 같았다. 이대로 달음박질쳐 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금방 돌아갈 걸 아는데도 일순의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아직 할 말이 있는 듯 힘이 들어간 입술을 보다 못한 루베니오가 등을 돌려 말 위에 올랐다. 고삐를 쥔 손에 푸른 핏줄이 잔뜩 돋아 있었다. 더 듣고 싶으나 들을 수 없었다. 그 이상의 것을 알았다가는 한 걸음도 못 뗄 것 같았다. 이까짓 것도 참지 못하면서 무슨 일을 하겠냐고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껏 그러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더 들을 수 있다면 온 군중이 다 그에게 돌을 던지며 비웃어도 좋았다. 그러나 그리할 수는 없어서 루베니오는 앞만 바라봤다.
“이랴!”
“주인님!”
홀로 정문을 박차고 나가는 루베니오의 뒤를 그의 호위들이 따라붙었다. 눈을 시리게 만드는 금발이 거칠고 괴롭게 흔들렸다.
바스락. 나뭇잎이 흔들렸나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클라이맥스로 한창인 무대 위 대신 무대 밖을 살피던 가이사는 야트막한 숨도 놓치지 않았다. 옥상 난간에 한 발을 걸치고 있던 그가 엄청난 속도로 낙하했다. 찰나에 숨을 멈춰 더 이상 적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숨어 다니는 능력만은 칭찬할 만했다. 이대로 놓치면 찾을 길이 묘연했다.
‘할 수 없지.’
가이사는 검을 뽑아 휘둘렀다. 떨어지며 행한 것임에도 흔들림 없는 움직임이었다. 검 끝에서 번뜩인 백색 섬광이 매섭게 질주했다.
“……!”
소리라고 부르기에도 미약한 숨소리가 언뜻 들렸다. 놈이 그사이 달아날 수 있는 간격을 추론해 길게 베었기 때문에 상처가 없을 수는 없었다.
가이사의 머리카락이 크게 너울거렸다. 정령의 빛이 무섭도록 빠르게 떨어지는 그의 몸을 움켜쥐었다. 실타래 같은 빛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밑을 감쌌을 때 그는 투명한 바닥을 차고 도약했다.
쏜살처럼 뛰쳐나간 신형이 수풀 쌓인 곳에 도달했다. 두리번거리며 흔적을 쫓았다. 피를 흘리게 뒀으니 모든 걸 숨길 수는 없을 터였다.
선명한 핏자국을 쫓아가던 가이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죽었군.”
얕게 베었으니 그의 탓은 아니었다. 입안에 숨기고 온 독으로 자살한 것 같았다. 그는 놈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파리하게 질린 뺨에 반딧불이 같은 빛이 어렸다.
머리 주변으로 휘휘 회오리치던 마나의 속도가 빨라졌다.
쾅! 푸지직!
가이사가 몸을 물리기가 무섭게 놈의 뇌가 터졌다. 얼굴을 잃은 시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혹시 피나 뇌수가 묻진 않았나 살피던 그가 찝찝함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여튼 성격 나쁜 노인네였다. 머릿속을 헤집지 못하도록 인간의 뇌에 폭발 마법을 걸어 놓았다. 그러나 가이사 정도가 되면 터지려는 마법을 잠시 멈추고 읽어 낼 수 있었다. 감시자는 루베니오보다 먼저 내려왔다. 니네이나를 살피라는 명령을 받은 놈이었다.
그녀의 상태에 대한 보고가 이미 한 번 올라갔다. 루베니오가 내려왔다는 소식은 포함되지 않았다. 강도 높은 경비에 틈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예상 범위 안이다. 폭발 마법이 발동했다는 걸 저쪽 마법사가 눈치챘을 테니 시간은 얼마 안 남았겠으나…….’
미적거릴 시간은 없는 모양이었다.
가이사는 손을 꽉 움켜쥔 채 돌아섰다. 장갑을 뚫고 나온 눈부신 마나가 바람처럼 흔들렸다. 그건 가이사의 아버지인 레어노스의 마나였다. 레어노스가 행한 마법 중 가장 크고 강력한 건 가이사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죽기라도 할 것 같았습니까?’
이럴 때면 가이사는 종종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조금 어릴 때는 이 느낌이 좋아 일부러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죽음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가이사는 그게 참 야속했다. 슬픈 눈망울이 일그러진 마나를 바라보다가 깊이 침전했다.
바스락. 그러나 그의 눈은 금방 뜨였다. 시커먼 눈에 이채가 돌아 반짝거렸다. 니네이나의 방 쪽에서 그녀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니네이나의 움직임은 느렸다. 특유의 낑낑거림이 있어 알아채기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이불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는 중이었다. 분간하기 쉬운 움직임에 가이사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이불이 무겁기라도 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으나 그녀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얼른 돌아가서 하나뿐인 소중한 것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정문을 굳이 두고 벽을 밟아 오른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뭐 하는 거지?’
니네이나는 어딘가의 애벌레처럼 꾸물거리고 있었다.
* * *
“응? 웬 그림자가……?”
나는 갑자기 어두워진 것에 당황하다가 가이사를 발견했다.
“까, 깜짝이야!”
놀라 이불을 좀 더 끌어당겼다.
“놀랐잖아요!”
몇 발은 뒤늦은 반응이었다.
“느리군요.”
“뭐예요?”
무엇이 웃긴지 그의 입꼬리가 살짝 당겼다. 그는 창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추워서 깼는데 창문을 닫으러 가려니 힘들어서 차선책으로 이불을 선택한 겁니까? 도롱이처럼 돌돌 말아 머리만 감싸고?”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죠?”
“감입니다.”
“…….”
“죄송합니다. 창문을 닫지 않고 나간 건 제 불찰입니다.”
가이사가 웃으며 사과한다. 어느 포인트에 식겁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내 눈동자는 잘게 떨리며 방황했다.
“많이 추우셨습니까?”
심지어 그는 걱정하는 얼굴로 다가와 내 이마를 짚었다. 코를 훌쩍거리자 손수건을 뽑아 건네주기까지 했다. 그때 내 혼란은 절정에 이르렀다.
‘어, 어디 아픈가?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진짜 미치기라도 했나……?’
짐짓 괴팍한 의심은 코를 ‘팽!’ 하고 시원하게 풀면서도 이어졌다.
가이사가 부쩍 수상하게 구는 게 몹시 이상했다. 내 눈빛에 그는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꼭 쥐고 있던 손수건이 파르르 떨렸다.
“누가 손수건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아요?”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자꾸…… 웃잖아요.”
웃는 게 죄도 아닌데 말이 너무 날카롭게 나갔나 싶어 움찔했다. 그러나 내 잘못은 아니었다.
‘가이사가 웃는다니! 말도 안 되잖아!’
가이사는 사랑스러움이 철철 흐르는 메이아를 밀착 호위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던 부동의 남자였다. 메이아가 마법 정진에 기뻐하며 실수로 손을 잡았을 때에는 질색하며 보는 사람이 더 민망할 정도로 싸늘하게 굴던 사람이었다.
그래. 저 남자는 그 가이사였다. 그런데 왜 저렇게 변했단 말인가?
숲속의 작은 친구들처럼 잔털을 바짝 세웠다.
“기분이 좋아 그런 듯합니다. 최근 들어 좀…… 편안하니까요.”
가이사가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그의 손짓에서 나른함이 묻어 나왔다. 냉골에서 살다가 볕을 가득 쐰 짐승처럼 배불러 보였다. 어쩐지 측은했다. 이제 보니 정원 생활 체질이구먼! 날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니 뿔난 성정도 좀 나아진 게 분명했다.
‘이래서 도시는 안 돼…… 쯧쯧.’
도시에서 바쁘고 치열하게 살던 성격 나쁜 청년이 귀농해 아주 약간 훈훈한 청년으로 거듭났다는 믿음에 의심이 옅어졌다.
“음?”
어디선가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뭘 꺼내고 있는 거예요?”
“손수건입니다.”
“손수건이 거기 있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 그것보다 그거 제 손수건 아니에요?”
나는 가이사의 손에 잡힌 연하늘색 손수건을 가리켰다. 파란색 꽃 자수가 놓여 있고 레이스가 왕창 달린 것이었다.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내 물건은 하나같이 다 저랬다. 여리고 몰랑몰랑한 손수건이 가이사의 가슴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손수건을 챙긴 그가 태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왜 태연하게 대답하는 건데요? 주머니에는 왜 넣고!”
“흥분하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심호흡하세요.”
어처구니가 없어 소리치자 저딴 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그렇…… 이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해 보라는 것처럼 손짓하는 그를 따라 가슴을 부풀렸던 게 민망했다.
“당신 지금 나 놀려요?”
“당신에게 쓰일 테니 하나 챙겨 두는 겁니다. 비상용으로.”
화내지 말아 달라는 듯 부드럽고 무해한 말투였다.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바라보다가 흠칫 얼굴을 굳혔다.
“그거 뉘앙스가 이상하지 않아요? 비상 상황이 생길 것 같잖아요.”
그는 별거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코를 계속 훌쩍이셔서 챙겨 둔 겁니다. 감기약을 먹고 푹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 방금 일어났어요.”
“아플 때는 잘 자는 게 중요합니다.”
“감기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먹어 둬서 나쁠 건 없을 겁니다.”
가이사의 말이 맞았다. 허약한 몸에 감기라도 오면 큰일이니 전조 증상이 있을 때 바로 먹는 게 좋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좀 걷는 게 좋겠어요.”
가슴이 꽉 조여드는 흉통은 내게 익숙한 고통이었으나 오늘은 유독 심했다. 가슴에 비구름이 내린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십니까?”
그의 눈빛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늘 있는 일인걸요.”
“혹시 기분도 안 좋으십니까?”
“아니요, 기분은 괜찮아요.”
고개를 살짝 돌린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해 놓은 겁니까……? 궁금하여 참을 수가…….”
“응? 뭐라고 했어요?”
“별말 안 했습니다.”
그는 단번에 시치미를 떼며 내 옆에 붙었다.
“돌아오시는 모양입니다.”
그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바로 옆에 선 나도 겨우 들었으니 방음이 잘되는 방 밖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을 목소리였다.
도르륵.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루베니오는 내가 아직 자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안을 살펴보면 될 텐데 그럴 정신도 없는지 조심스럽게 연 문 사이로 허겁지겁 그가 들어왔다.
헉! 보스 몹이 나타났다!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딸이 깨어 있음에 그가 당황하고, 그의 얼굴을 본 내 눈에 격정이 일었다.
“아가야…….”
이번에도 먼저 말을 건 건 그였다. 혹시 내가 또 기절할까 걱정했는지 루베니오는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뜰 뿐 졸도하진 않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짧게 흔들리다가 방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도망칠 수 있는 문 앞에는 루베니오가 서 있으니 출구도 없었다.
“나는…….”
루베니오는 운을 떼며 한 발짝 내디뎠다. 경계심 많은 아기 동물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아주 느린 발걸음이었다.
“네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이 많은지 루베니오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숨을 헉 들이켜며 허리를 굽혔다.
“미안하다.”
떠오른 말이 우주의 별처럼 많은지 몰아치는 감정이 광활했다.
“모든 건 내 잘못이야.”
그는 깊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정말…… 미안하구나.”
무수한 별빛처럼 쏟아져 내리는 진심이 묵직했다. 무거워서 무너질 것 같았다.
“아가…… 나는…….”
“일단은……”
내 말에 눈물을 떨어트리던 루베니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세찬 소낙비처럼 흔들렸다.
“그 호칭부터 어떻게 좀…… 안 될까요?”
그래. 일단은 이것부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무 살 여자에게 ‘아가’는 좀 아니잖아!
“호칭?”
생각지 못한 말인지 루베니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아가……라니…… 저는 성인인걸요.”
그 말이 무얼 자극했는지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이 보름달처럼 차올라 뚝 떨어졌다.
“훌쩍 컸는데, 너무 자랐는데…… 알아주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아…… 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미안하다는 사과도 그만하시고요…… 울지도 마시고…….”
나는 어깨를 조금 움츠리고 다가섰다. 들고 있던 손수건을 내미는 팔이 부르르 떨렸다.
‘이놈의 팔이 또!’
코를 훌쩍일 때부터 알았지만, 몸 상태가 안 좋은지 팔을 위로 올리는 동작이 버거웠다. 내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그러나 루베니오의 눈에는 무얼 해도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 손끝을 조심스레 붙잡고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헉!”
‘코 푼 손수건인 거 깜빡했다!’
코 풀고 나서 돌돌 잘 말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모를 루베니오에게 미안해서 손가락으로 슬쩍 손수건을 밀었다.
루베니오의 뺨에 내 손가락이 닿았다. 그는 눈을 뜨고 그의 뺨을 매만지는 손가락을 바라봤다. 하얗고 자그만 손이 그의 눈에 이슬처럼 맺혔다. 새하얀 눈송이가 쌓여 만들어진 물기였다.
“미안하다. 미안해…….”
그의 어깨가 흐느끼며 떨렸다. 두 손으로 작은 손을 감싼 채 눈물짓는 그의 모습에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올해 성인이 된 딸이 있는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또한 애처로웠다. 아이처럼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매달려 우는 그가 가여웠다.
‘열여덟 살에 딸이 태어났다고 했나?’
그때의 그가 공작을 피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우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음이 자꾸만 먹먹해졌다.
“울지 마세요.”
팔을 살짝 벌려 루베니오를 끌어안았다. 수려하게 생긴 것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체격이 커서 두 팔을 활짝 벌려도 와락 끌어안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등을 쓸어 보자 루베니오가 움찔 몸을 굳히며 나를 바라봤다.
“아, 아버지…….”
입 밖으로 처음 내뱉어 보는 것처럼 그 말이 소름 끼치도록 어색했다. 나는 다른 세계 어딘가에 있을 친부를 떠올려 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루베니오의 얼굴만 보였다. 주르륵 흐른 눈물이 애처로웠다. 서투르게 감싸 안는 체온이 뜨거워서 내 눈에도 열이 고였다. 지금의 이 감정은 니네이나의 것일 텐데 내 감정과 분리되지 않았다. 먹먹한 그의 부정이 진심으로 가슴 아팠다.
* * *
나는 곧 열이 올라 침대에 누웠다. 운 건 루베니오였고 앓아누운 건 나였다. 쓸모없는 몸뚱이 같으니! 루베니오는 깜짝 놀랐으나 나는 이제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였다.
“아가, 아니…… 이 아이가 왜……?”
머리가 아파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그 말에 뺨이 어색하게 굳었다. 아가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더니 아이란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하루에 두 번 지적했다가는 저 서툰 남자가 좌절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감기입니다.”
다가와 내 머리를 짚어 보던 가이사가 단순한 감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가이사는 물론 루베니오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음침하게 늘어졌다. 굳이 말하자면 걱정이었으나 둘 다 감정의 농도가 높았다.
흠. 둘 다 걱정이 많은 타입이군. 잔소리꾼이 둘로 늘어난 건가? 가장 태연한 건 당사자인 나였다. 나는 최대한 덜 아프기 위해 가이사가 준 감기약도 열심히 먹고 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매번 누워 있으니 느는 건 이런 요령뿐이었다.
“다행히 약을 일찍 먹어서 며칠 푹 쉬면 나을 테지만 날아갈 수 있을지는…….”
“날아간다니요?”
내가 고개를 내밀고 묻자 두 남자가 앞다투어 속삭였다.
“너를…… 수도로 데려가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물론 네가 싫다고 하면 하지 않을 테지만…… 그편이 더 안전할 것 같아 네 의견을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루베니오는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 곁에 있으면 당신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루베니오를 이어 가이사가 말했다.
“내 곁에서 네가 편안할 수…….”
딸의 안전을 주장했던 아버지는 가이사의 말이 기뻤는지 눈을 조금 반짝이고 말았다.
“음…… 제가 수도에 있는 것이 저를 지키기 더 좋을 것 같다는 말이지요?”
“그래.”
“그렇습니다.”
안전과 안정. 둘 모두 좋은 이유였다.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도까지 어떻게 이동하겠다는 건지 궁금하네요. 날아간다는 건 뭐예요?”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바라봤다.
네가 먼저 말해.
해석하자면 그런 뜻이었다. 기세가 강렬한 건 루베니오였고 떠밀린 건 가이사였다.
“정령을 타고 날아갈 겁니다.”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지.”
자동차보다 비행기가 빠른 것과 비슷한 원리인 듯했다. 아무래도 장애물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었어요?”
“그동안은 네 몸이 안 좋아 쓸 수 없었어. 바람을 많이 맞아야 하니까.”
내 말이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으면서 왜 지금껏 안 했냐는 추궁으로 들렸는지 루베니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했다. 간곡하고 불쌍한 정도로 겁먹은 애원이었다.
“언제나 널 데려오고 싶었다. 네가 늘 보고 싶었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궁금했고 만나고 싶었지.”
루베니오는 내 물수건을 갈아 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주르륵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의 눈물 같았다.
“그럼에도 늦었구나.”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올 수 없었던 거라는 변명은 없었다. 죄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푹 수그러든 목덜미가 긴장으로 뻣뻣했다.
“그래도…… 기회를 주지 않으련?”
그럴 시간이 부디 허락되기를 바라고 희망하며 그가 눈을 맞췄다. 새파란 하늘 두 쪽이 갈라졌다가 맞닿는 기분이었다. 나는 루베니오의 눈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 별장은 수도에서 꽤 먼 것으로 아는데 굳이 그곳으로 향하는 위험을 감수할 만큼 루베니오의 제안이 매력적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의 위험성이 어느 정도인지와 수도에 갔을 때 얼마나 안전해질지를 따진 후에 결정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그렇게 결정짓고 말하려는데 나를 주시하던 금빛 속눈썹이 애처롭게 떨리는 걸 발견했다. 그가 무언가를 예감한 사람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네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어떤 말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
그리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니네이나…….”
어렵사리 부른 이름이 눈물처럼 뭉클했다. 미련이 매달려 질질 끌리기까지 했다.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실제로 괜찮지는 않은지 슬픔이 계속해서 녹아들었다. 싫다고 했다가는 다시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좋아요.”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말해 놓고 놀랐다. 그러나 정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환하게 펴지는 얼굴을 봐 버렸다.
“정말 괜찮겠니?”
“같이 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베니오의 눈이 또 한 번 크게 울렁거렸다.
“같이…… 나랑 같이 살아도 싫지 않아?”
“네.”
루베니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들고 있던 물수건을 부산스레 접으며 잇자국이 난 입술을 놓았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어딘가 멍한 얼굴이었다.
‘루베니오가 저런 캐릭터가 아닐 텐데……?’
입을 벌리고 물수건에 집중한 루베니오를 바라보는 가이사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내 시선도 저것과 다르지 않겠지.
원작 속 루베니오는 냉철한 사람이었다. 니네이나의 시신을 본 뒤에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울부짖었지만 그때뿐이었다. 말투도 저렇게 부드럽지 않았다. 어땠냐 하면 서늘한 편이었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했다. 절제에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알아채기는 어렵다고 했다.
‘엄청…… 쉬운데?’
나는 루베니오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 볼 수 있었다. 극심한 슬픔과 죄책감 뒤에 기쁨이 번쩍 솟았다.
‘친딸이라서 그런가……?’
메이아를 나쁘게 대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지금과 비교한다면 몹시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지금처럼 감정을 다 드러내며 어설프게 군 적은 없었다.
‘그런데 물수건으로 뭘 저렇게 꼬깃꼬깃…… 꼬깃꼬깃?’
열이 올라 헛것을 보는 건가 걱정하며 눈을 살짝 비볐다. 초점을 맞추고 다시 봐도 그것이 맞았다.
“뭘…… 접은 거예요?”
마침 다 접은 물수건을 내 이마 위에 올려 주려던 루베니오가 멈칫하며 눈치를 봤다.
“아…… 리본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걸로 접어 주마.”
그랬다. 저것은 리본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닌가 했는데 시력은 멀쩡했다.
“리본…….”
멍청히 그것을 바라보자 이게 아니라는 생각은 들었는지 루베니오가 물수건을 내려놨다.
“토끼나 꽃으로 바꿔 줄까?”
“……엄청 열심히 접지 않았어요, 그 리본?”
거의 5분 넘게 붙잡고 있던데 정말 괜찮겠냐고 묻자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아직 잊지는 않았어.”
“전에도 해 준 적 있어요?”
“……네가 아주 어릴 때. 해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었다.”
옛날 옛적 갓난아기 시절의 딸을 회상한 듯 그의 뺨이 부드럽게 풀렸다.
“이렇게라도 해 주면 아주 잠깐이라도 관심을 보였지. 그때는 아픈 걸 잊은 것 같아서…… 나는 계속 접고 접었단다. 네가 편히 잠들 때까지.”
열여덟 살의 손이 얼마나 야물다고 그런 짓을 했을까? 고작 5분만 해도 손이 퉁퉁 부었을 것이다. 저렇게 익숙해지기까지 얼마나…….
루베니오는 조금 구겨진 리본 끝을 바르게 펴며 쓰게 웃었다.
“나이가 찼으니 지금은 이런 거 안 좋아하겠구나. 다음에는 더 잘……”
“좋아해요.”
루베니오가 눈을 크게 떴다.
‘미련한 사람.’
망각은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했다. 괴롭고 힘든 기억은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묻어 두고 힘차게 내일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의 삶은 20년 동안 정지된 것 같았다. 바로 어제처럼 생생한 고통을 안고 사는 삶을 생지옥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짠 내 나…….’
이것은 인간의 도리였다. 잠깐의 수치스러움은 기꺼이 참기로 했다.
“좋아한다고요, 리본.”
다시 한번 확실히 말해 주자 그가 매우 기뻐하며 번잡하게 손을 움직였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차가운 물수건을 열 오른 머리 위에 내려놓았다. 수건으로 만든 하얀 리본을 이마에 올린 채 누운 내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방에 루베니오는 물론 가이사까지 있다는 점에서 수치스러움은 좀 더 커졌지만 의식의 흐름을 외면하는 것으로 견뎠다.
“예쁘구나…….”
루베니오가 젖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옆으로 치우며 울음을 누르고 웃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시울이 전혀 못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38세. 그는 아직 젊었다. 모든 걸 다 내려놓기에는 아까운 시간이었다.
‘애 있는 아버지가 저렇게 생겨도 되는 거야?’
속으로 투덜거리며 눈을 살짝 피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보고 있자니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열이야. 머리에 열이 올라서 그래.’
아프면 울 수도 있었다.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이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조금 울었다고 펄쩍거리며 놀랄 테니까 비켜 주는 거였다.
“떠나는 건 언제예요?”
고개를 비튼 채 잠긴 목소리를 감췄다. 감기 기운이 있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원할 때.”
“당장 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네 건강을 해칠 정도로 다급하지는 않아.”
정말인가? 원작에서 루베니오는 매우 바쁜 사람으로 나오는데 이상했다.
“그럼 당장 가요.”
“당장? 지금 바람을 맞으면 몸에 좋지 않을 텐데…….”
루베니오가 동의를 구하며 가이사를 바라봤다. 숨소리 하나 안 내고 정물처럼 앉아 있던 가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가 다 나은 뒤에 가는 게 좋을 겁니다.”
“소나의 방어막은 공기가 통한다고 했죠?”
“예.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바람을 완전히 차단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지붕이 뚫린 채 날아가는 비행기를 상상해 봤다. 간혹 영화에서 보면 그런 장면이 나왔다. 몰아치는 바람에 사람이 막 날아가고 그런 거. 안전장치는 있는 거겠지?
“그럼…… 추락의 위험이 있나요?”
“무서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재워서 데려갈 테니까요.”
“재워요? 수면제 같은 걸 먹나요?”
“약은 독해서 안 됩니다. 자연스럽게 잠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제가 잘 때 데려가겠다는 말씀인가요?”
“푹 주무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가이사 특유의 무표정 때문에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살벌하게 들렸다.
“괜찮은 거 맞죠? 영원히 재우겠다는 말은…… 아니죠?”
“잠시 주무시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을 겁니다.”
가이사가 그럴 리 있겠냐며 부드러이 고개를 저었다.
‘얌전히…… 편안하게 데리고 가겠다는 뜻이겠지?’
반쯤 남아 있는 의심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가자는 뜻은 아닙니다.”
가이사가 뒤늦게 뒤통수를 쳤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배신감에 눈을 크게 뜨자 그가 슬쩍 내 눈길을 피했다. 이 사람들 뭘 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한숨이 나오려 했다.
“날이 계속 추워지고 있잖아요.”
나는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뒤에 내린 결론이었다.
“겨울이 되면 못 갈지도 모르고…….”
내 속삭임에 루베니오와 가이사의 시선이 흔들렸다. 시름에 잠긴 눈동자에 목이 살짝 메어 왔다. 아직 가을인 지금은 단지 찬 바람일 뿐이지만 곧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그를 보내고 홀로 남아 겨울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해 겨울, 원작의 니네이나는 죽었다. 나는 원작에서처럼 순순히 죽어 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나 그래도 또 모르는 일이었다.
죽음은 무서운 일이었다. 생각하지 않을 순 없었다.
죽음. 죽음.
바라지 않기에 누구보다 깊이 생각했다.
‘가이사에 이어 루베니오의 등장도 원작보다 훨씬 빨라졌어. 둘 다 니네이나가 죽고 난 뒤에야 나타나는 인물인데.’
원작은 망가졌다. 나는 원작에서 운명 지은 최소한의 삶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루베니오가 공작이 되어야 살 확률도 높아지겠지. 원작처럼 그의 짐이 되어서는 안 돼.’
멈출 수 없었다.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나아가야 했다.
“지금 갈래요.”
번뜩 그 생각이 났다.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적어도 루베니오의 곁에서여야 한다고. 나는 그에게 해 줄 말이 있었다.
―헷갈리지 말고 꼭…… 그렇게 전해. 나는…… 자유로웠다고. 그러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원작 속 니네이나의 유언이 가슴 깊이 뿌리처럼 내렸다.
‘혹시, 만약에…… 내가 또…… 죽는다고 해도 당신은 죽지 말아요.’
죽음 뒤의 또 다른 죽음. 죽음이 거듭되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웠다.
“그래.”
루베니오는 목이 멘 목소리로 허락했다.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무슨 상상을 했는지 새파란 눈동자는 붉은 노을로 젖어 있었다.
* * *
결국 우리 세 사람은 오늘 밤 당장 수도로 떠나기로 했다. 루베니오는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고 가이사는 중요 임무를 위해 남아 있었다.
특명! 니네이나 잠재우기!
나를 재우는 게 이 두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다.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정도예요? 차라리 수면제를 먹는 건 어때요?”
“수면제도 못 이길 몸인데 영원히 못 깨어나시면 어쩝니까?”
“……그런 잔인한 소리를 무표정하게 하지 말아 줄래요?”
“다음부터는 더 조심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속삭이며 눈썹 끝을 축 늘어트렸다. 다른 얼굴 근육은 건드리지 않고 인위적으로 눈썹 근육만 재조정한 상태라 더 이상했다.
‘무표정하게 말하지 말랬다고 저러는 거야?’
지적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건만 막상 본인은 무엇이 문제인지, 아니, 문제가 있는 줄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냥…… 편하게 있어요.”
이러나저러나 똑같으니 한 사람이라도 편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가이사의 얼굴이 돌아왔다. 삶의 의지라고는 조금도 없는 거죽 같은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제게 손을 맡기시면 됩니다.”
“……잘라서 가져가면 안 돼요.”
“물론입니다.”
그는 쿠션 하나를 무릎 위에 올려 내 손을 편안하게 내려놨다.
“뭐 하는 거예요?”
“피를 보는 걸 싫어하십니까?”
피?
“저 피 날 예정이에요?”
똑똑한 손은 사고의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슬금슬금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손목 안 자르겠다고 했잖아!’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눈을 그는 무례할 정도로 빤히 관찰했다.
“겁도 많고 아픈 것도 싫어하면서…….”
싫어하면서, 그다음에는 뭔지 알려 줘야 하는데 그는 말을 삼켰다. 괜히 궁금하게!
“당신의 몸에서 피가 날 일은 없습니다.”
“그럼 누구…… 설마 당신?”
“눈 꼭 감으세요.”
감으라면서 기다려 주지도 않고 이불이 얼굴을 덮었다. 눈을 끔뻑 감았다가 뜨는 사이에 옆에서 철컥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설마 검을 꺼냈나 싶어 이불을 들추어 내리자 하얀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시뻘건 핏방울이 보였다. 가이사의 팔뚝에서 흐르는 피였다. 단죄하듯 그의 손목부터 팔뚝까지 기다란 선이 이어졌다. 벌겋게 벌어진 살갗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 내 손바닥에 고였다.
“괘, 괜찮아요?”
충격적인 장면에 굳어 버리자 시꺼먼 장갑을 낀 손이 다가와 이내 그 사실을 숨겼다.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왜……?”
“드래곤의 피입니다.”
달고 쓴 목소리에 눈앞을 가득 채운 장갑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가 구슬피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삼키고 또 삼키는 데 익숙한 목소리였으나 어딘가 가슴이 아렸다. 인간적인 연민 뒤로 끊임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드래곤이세요?”
“인간입니다.”
“방금 드래곤의 피라고…….”
“궁금하십니까?”
반사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드래곤의 피라니. 아무리 기억이 희미해도 이건 알았다. 원작에서는 드래곤의 ‘드’ 자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 세계에 드래곤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건 또 무슨 설정인가? 가이사의 중요한 비밀 같은데 알아보려니 무서웠다. 뭔가에 크게 휩쓸릴 것 같아서.
필사적인 도리질에 시야가 언뜻 트였다. 무심결에 도망치려던 손바닥을 누른 팔뚝이 고집스레 마지막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정말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아니…… 당신 팔뚝, 제게 닿았는데…… 억!”
하얀 이불이 펄럭거리며 정수리로 떨어졌다. 다시 차단된 시야에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이 인간이 진짜!’
나는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불을 걷어 냈다. 갑작스레 증가한 힘에 놀랄 틈도 없이 팔뚝을 붙잡고 파리하게 질린 가이사를 보고 말았다. 파르르 애처롭게 떨리는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젠가의 두려움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가 반사적으로 떠오른 것 같았다. 기계적으로 팔을 지혈하고 피 묻은 소매를 내리는 얼굴이 까마득한 절벽 같았다. 저렇게나 아름다운 얼굴인데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기분 나쁘셨습니까?”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그가 어느새 무표정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야 남의 피를 손으로 받는 그로테스크한 일을 당했으니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내려다본 내 얼굴이 찡그려졌다.
손바닥은 새하얬다. 시뻘겋게 벌어진 살 사이에서 흐르는 피를 분명 봤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가이사의 소매에 남아 있던 피 또한 사라진 후였다.
“아무것도…… 없네요.”
“실체가 없으니까요.”
모호한 말이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실재했다. 환상을 보지 않은 이상 확실했다.
‘그런데 실체가 없다…… 자기가 귀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어쩐지 오싹해서 설마 아니겠지 하며 물었다.
“당신은 살아 있잖아요. 그렇죠?”
“……예. 애석하게도.”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삶이 진심으로 마땅찮다는 얼굴이 눈앞이 번쩍했다. 누구는 살고 싶어 죽겠는데 말이다.
“당신 말이에요!”
침대 위를 벌떡 박차고 나온 내 눈이 일순 커졌다.
“뭐, 뭐지? 몸에 힘이 도는데요?”
온몸에 활력이 돌고 있었다. 태어나서 이 정도로 건강해 본 적이 없었다. 현대의 나를 포함해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남아돌아서 벽도 가뿐히 부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럴 겁니다. 그건……”
고개가 그를 향해 휙 돌아갔다. 기세가 사뭇 대단했는지 그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당신은 나의…… 구원이에요!”
유 아 마이 선샤인! 나의 신이시여, 미천한 배복은 태어나 처음으로 광명을 받았습니다. 감히 당신께 그딴 식으로 살 거면 그 생명 날 달라고 생각했던 건방진 마음을 용서하세요. 이제 오로지 당신을 믿으며 살아가겠나이다. 보탬과 숨김 없이 진실이 그랬다. 뺨과 입술은 물론 푸르던 손끝까지 혈색이 발긋했다.
“내가 이렇게 건강하다니! 이건 기적……”
“일시적인 겁니다.”
희망으로 빛나던 마음에 찬물이 쏟아졌다.
“그럼 그렇지…….”
‘내 인생이 이렇게 쉽게 펼 리가 없어!’
분노가 차올라 바닥을 쾅쾅 때렸다.
쿵덕쿵덕. 그 소리가 힘찼다.
‘내 손이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다니!’
분노도 잊고 기쁨이 찾아왔다. 신명 난 박자를 연달아 내려치려는데 손이 붙잡혀 버렸다.
“내구도는 그대로입니다.”
“그런 건 좀 빨리 말해 줘요.”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침대에 얌전히 앉았다. 감기 기운이 싹 사라지고 몸에 힘이 도는 게 기쁘기는 한데 방방 뛰어다닐 수가 없었다. 어디 부딪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사망인 건 똑같다니 말이다.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의 몸 상태와 제 몸 상태를 일시적으로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니! 그럴 수가! 이렇게 힘 넘치는 몸으로 어떻게 그렇게 정적으로 살 수가 있죠?”
진심으로 의아해 물었는데 가이사의 눈빛이 오묘했다.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그거냐는 것처럼.
“헉! 그럼 가이사가 지금 제 몸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거예요? 전 감기 기운까지 있었는데…… 괘,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럴 리 없다는 건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증상을 상세히 말해 봐요!”
“가슴 압박감으로 인한 답답증과 두통…… 목도 조금 따끔하고 팔다리는 물에 녹은 것처럼 흐느적거리는군요. 몸이 이렇게 무거운 것은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는 묵직할 가슴께를 눌러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게 살아 있는 사람의 몸 상태인가 의심스럽군요. 뿌연 머릿속 때문에 눈앞이 빙빙 돌아 바르게 서 있는 게 힘겨울 정도네요.”
“제 몸 상태가 맞……”
“힘들었겠네요.”
특유의 무감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완벽한 공감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가, 가이사야말로 힘들지 않아요? 여기 누울래요?”
울컥하는 마음이 스스로도 당황스러워서 말이 잘 안 나왔다. 허둥지둥 이불을 들추려고 하자 그가 나를 만류하며 고개를 저었다.
“참을 만합니다.”
“그렇게 서 있어도 괜찮겠어요? 그게 그렇게 참을 만한 고통은 아닐 텐데…….”
“내구도가 그대로인 건 제게도 해당하는 일입니다.”
“아…….”
그 말이 드디어 이해가 갔다. 힘 하나 없어 보이는 삐쩍 마른 내 몸에 비해 가이사의 몸은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훌륭했다. 상태만 정확하게 이전되는 거라면 더 건강한 몸이 잘 버티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가장 컸고 그다음이 미안함이었다. 내가 해방감을 느낀 만큼 그는 끔찍한 답답함을 껴안아야 했다. 본래 그의 몫이 아님에도. 그게 죄스러워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차츰 익숙해집니다.”
“……고통은 익숙해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는 고통도 무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걱정하지 말라는 부드러운 위로로 들리기도 했으며 스스로에게 보내는 자조 같기도 했다. 전자는 내게 후자는 그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일 터였다. 지금의 그는 내게 다정했고 남에게 차가웠으며 자신에게는 가혹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고통이 익숙해진 게 아니라 견디는 게 익숙해진 거예요.”
“글쎄요. 저는 고통과 무관한 삶을 살아왔던 게 아닙니다.”
“저보다 더요?”
“당신보다 더.”
“음…….”
“그래서 궁금해집니다. 전 정말 괜찮았던 건지, 괜찮았다고 믿은 건지.”
“그야 당연히 후자! ……아닐까요?”
하마터면 바보냐고 소리칠 뻔했다.
“……당신은 견디는 데 익숙해지셨습니까?”
“저요? 저는 등급 외랄까요……? 여전히 지독하던데요. 가이사가 지금 그렇게 서 있는 게 대단하다고 느껴지거든요.”
“그럼 가끔 바꿔 드리겠습니다.”
“네?”
새된 소리가 터졌다.
“제정신이에요? 고통을 자처하겠다는 말인 거 알아요?”
“가끔이란 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는 딴소리를 했다. 그가 고통을 가져가 주겠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 어버버거리던 나는 대답할 틈을 놓쳤다.
“아무리 그러셔도 자주는 안 됩니다. 몸에 무리가 가니까요.”
그는 아이를 타이르는 것 같은 어조로 부드러이 말했다.
‘아쉬움?’
약간이긴 하지만 분명 느꼈다. 이기적인 마음에 입안을 살짝 깨물고 정신을 차렸다.
“아…… 하긴. 피를 그렇게나 뽑아냈으니까요.”
“……무리가 되는 건 제 쪽이 아닙니다.”
“이번에도 제가 문제인가요?”
“드래곤의 피를 흡수하는 일이 평범한 인간에게 쉬울 리 없으니까요. 적정량과 적당한 기간을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원래도 움직임이 거의 없는 사람이어서 평소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그래도 느낌 탓인지 눈가가 피곤해 보였다. 이게 정말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흡수하는 일이 어렵다면 흡수시키는 일도 만만치 않게 힘든 거 아닐까? 무려 드래곤의 피라는데…… 다루는 일이 쉬울 리 없잖아. 또, 고작 흡수하는 게 힘들다면 체내에 품고 있는 그는 어떻다는 거지?
가이사는 참 이상했다. 그의 판단 기준은 많이 엇나가 있었다. 직접 물어봐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가이사에게 좋은 점이 없잖아요.”
“당신을 지키는 게 제 일입니다.”
“이게 그것과 상관이 있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제가 건강하게 만들어서 돌려드릴 테니까요.”
“맙소사…….”
직감은 말했다. 저 남자는 진짜라고. 그야말로 이 고통에서 나를 구원할 구원자라고. 그러나 이성은 말했다. 이건 아니라고.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라고 하나 그걸 다른 사람에게 짊어지게 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고.
‘그, 그래. 힘들더라도 내가 열심히 운동해서……는 개뿔.’
“아으…….”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활력은 여전했으니 정신의 문제였다. 틀렸다. 얕고 좁았던 이성의 경계선이 무너져 모래로 덮였다. 끝내 인간은 간사하고 이기적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는 내게 그가 다가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눈에 보이는 아무 옷깃이나 붙잡고 매달렸다.
“가, 가이사…….”
“말씀하세요.”
힘이 억셌다. 게다가 멱살잡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표정 변화 없이 오로지 걱정만 담고 나를 바라봤다. 그의 의도가 어떻든 눈빛은 자애로웠다. 그런 사람을 보며 나는 이성을 상실하고 눈을 번뜩였다. 오아시스를 만난 사막의 부랑자보다 황홀한 눈빛이었을 것이다.
“사랑해요.”
흑심 가득한 고백에 그의 눈이 짧게 떨리더니 곧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이사는 침착한 얼굴로 판단했다.
“피가 과했습니까? 아무래도 정신이 살짝…… 듯합니다.”
말은 차마 못 하지만 담백한 눈은 내가 미쳤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가이사…… 당신의 이름은 왜 가이사인가요? 혹시 개명할 생각 없어요? 천사로.”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을 속삭였다. 제정신이 맞는다면 평소 악마 보듯 봐 왔던 그에게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를 넘겨준 건 처음이라 살펴봐야겠습니다. 마땅한 실험 대상이 없어서.”
“가이사.”
나는 그를 붙잡고 흔들었다.
“멱살잡이는 상관없으나 그렇게 힘을 주면 손가락이 부러질 겁니다.”
“안아 줘도 돼요?”
그의 눈동자가 쿵 내려앉았다. 곧 평상심을 되찾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됩니다.”
이번에 놀란 건 나였다. 내가 먼저 말했지만 믿을 수 없어 두 눈이 동그래졌다.
“하세요. 원하신다면.”
그사이 침대 위 이불을 끄집어낸 가이사가 이불로 몸을 둥둥 감싸고 쿠션을 꽉 끌어안았다. 이 악문 얼굴이 곧 자신에게 터질 폭탄을 대비하는 것 같았다.
“안 하십니까?”
도롱이처럼 말린 그가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 충격적인 모습은 정신을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잡고 있던 멱살도 슬그미 놓아줬다.
“정신이 돌아왔습니까?”
“……네.”
가이사는 내 눈꺼풀을 비집어 동공을 확인하고 몸 여기저기를 체크한 뒤에야 동의했다.
“잠깐의 착란 증세였나 봅니다.”
“…….”
“괜찮아지셨다면 이제 다음 단계를 진행하도록 합시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요.”
가이사가 기계 같은 남자라 다행이었다. 내 추태에도 놀림이 없으니까 말이다. 미쳤다고 믿는 쪽이 더 뼈아팠으나.
“다음 단계가 있어요?”
“운동을 하시면 됩니다.”
의자에 나른히 기대어 누운 가이사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녹색 줄기가 넝쿨처럼 뻗쳐 내 몸을 감쌌다.
“끄앗!”
붕 떠오르는 몸에 놀랐으나 발바닥을 지탱하는 힘이 단단했다.
“걸어 보세요.”
“어떻게 걸으라는…… 되네요.”
천천히 걸어 봤다. 발이 땅에 닿아 넘어지기 전에 바람이 몸을 받쳐 줘서 걷는 데 무리가 없었다. 몸도 훨씬 가벼웠다.
“저항을 줄였습니다. 어디 부딪쳐 부러지거나 꺾일 일은 없을 겁니다.”
“……뼈가요?”
“예.”
오싹한 설명이었으나 모처럼 편하게 움직이는 몸에 기뻐하며 러닝 머신을 뛰듯 걸었다. 뭐랄까, 중력의 힘을 덜 받는 느낌이었다.
‘달에서 걸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운동선수들이 물속에서 재활 운동 하는 거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힘은 이쪽이 훨씬 덜 들지만.’
처음에는 사뿐히 걸었는데 이제 자신감이 붙어 속도가 빨라졌다.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리는 마나 줄기가 실제 불어오는 바람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엄청 시원해요!”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너울거리는 녹색 바람에 백금색 머리 타래가 섞여 들었다.
“그만.”
“네? 몇 분 안 된 것 같은데…….”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솔솔 불던 눈부신 녹색 바람이 투명하게 번져 사라졌다. 바닥으로 가볍게 안착한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봤다. 한때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몸의 자유가 지금은 이렇게 값지고 아까웠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이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누워서 쉬고 계시면 됩니다. 충분히 피곤할 테니.”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뛰기 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몸 상태는 내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제 몫의 피로를 느끼고 있나요?”
“신경 쓰이십니까?”
“그야 당연히…….”
질문이 질문으로 돌아왔다. 조금 곤혹스러웠다.
“제 걱정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곧 몸이 물먹은 듯 무거워질 테니까요.”
다시금 찾아올 고통을 떠올렸는지 몸이 굳어 버렸다. 그가 다가와 꼼짝 않고 서 있는 나를 천천히 눕혔다.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당신께도, 저에게도.”
속삭이는 말은 그의 혼잣말 같기도 했다. 그러나 다 들어 버려서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게 정말 좋은가요? 서로에게?”
“미리 풀어 놓으면 좋습니다. 들이닥치기 전에.”
가이사는 방금 전의 말을 모르는 체하며 말을 돌렸다. 그의 손이 팔 근육을 눌렀다. 어느 정도 힘이 적당한지 가늠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던 그는 손가락을 살짝 눌렀다가 떼어 내는 수준으로 마사지를 시작했다.
나도 더 말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대화를 차단하려 아래로 내리깐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이 지독한 침묵처럼.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이십니까?”
그런데 의외로 이 침묵을 먼저 깬 건 그였다. 한숨을 한 번 삼킨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이 아픈 게 신경 쓰이죠. 저 때문인데.”
“아픈 건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견딜 만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그 고통이 정당화되나요? 아무것도 아닌 게 되나요?”
“…….”
“당신 말이 맞아요. 저는 지금 제 몸 하나 추스르는 것도 힘들고 감히 당신 걱정할 주제도 안 돼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당신에게 의지하고 말아요. 당신은 강하니 괜찮겠지, 그런 이기심이 자꾸 든다고요.”
“곧장 나아가도 확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삶은.”
‘당신의’ 삶은.
그가 입속에서 삼킨 말이 자신을 배려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또 이렇게 속이 답답해졌다.
“무서워요. 당신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길까 봐.”
“당연하게 여기세요. 필요하면 쓰세요. 그게 왜 안 됩니까?”
“그야 당신은…….”
사람이잖아. 쓰고 버리면 되는 물건이 아니잖아.
그의 입술에서 탄식을 닮은 한숨이 터졌다. 일렁거리는 적색 눈이 나를 집어삼킬 기세로 노려봤다.
“쓰세요. 물건처럼. 갖다 버린다고 해도 당신께 피해가 될 일은 없습니다.”
거봐. 이러니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이 호의를 기억해 달라고 했으면 쉬웠을 텐데 그가 저렇게 말하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잔인했다. 타인인 나 또한 그런다면 누구도 그를 존중하지 않게 된다. 정말 물건처럼 그렇게 덩그러니 살아갈 것 같았다.
“제가 궁금하십니까?”
나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헛숨을 삼켰다. 그는 내가 무거운 주제는 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전에도 그랬듯 고개를 저으며 도망칠 것도 알았다. 서운하지 않았다. 원망스럽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딱 필요한 것들만 채우면 끝나는 것이니.
“네.”
그런데 무슨 생각이었을까? 고민하고 망설이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또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때마다 궁금할 것 같으니까…….”
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의 눈을 직시했다. 받은 게 있는데 계속 피하기만 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내 고통을 짊어져 준 만큼 나도 무거운 주제 하나쯤은 가슴속에 넣어 주고 싶었다. 때론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하니까. 내 고통을 느껴 봤다면 이걸 오지랖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지긋하고 악랄한 괴로움이었다. 아무 대가 없이 그것을 떠넘기면 체할 것 같았다.
“눈보라…….”
“네?”
뭐라고 했지? 그는 내 눈을 살짝 피하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신경 쓰이는 걸 어떻게 신경 안 쓴다고 말해요? 아니, 말은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마음은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거예요.”
“당신은 참 한결같네요. 하얀 참새 같습니다. 쉴 새 없이 뺙뺙뺙. 귀가 아프고 머리가 아픕니다.”
“내가 참새 같…… 뭐요?”
분개하며 달려드는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시리고 뜨거웠다.
“……별거 아닌 이야기입니다.”
그는 피곤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예요! 다 말해 줄 것처럼 굴더니! 허세였어요?”
분에 못 이긴 내가 침대를 팡팡 내려치며 성을 냈다. 갓 잡은 생선처럼 힘 좋게 팔딱거리는 손목을 그가 낚아챘다.
“조심히.”
타이르듯 말하고는 손목을 내려놓았다.
“허……!”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그는 종을 잡아 건넸다.
“저보다는 다른 사람이 나을 것 같습니다.”
“뭐가요? 이걸 대답해 줄 사람이 달리 있어요?”
“마사지 말입니다.”
“…….”
명백한 회피였다. 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두려워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저는 당신을 지키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가뜩이나 힘을 내려놓은 채라.”
그녀와 몸 상태를 바꿨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다른데요?”
“원래 할 수 있던 것을 100으로 환산하면 99정도입니다.”
“……뭐요?”
나는 방금 뭘 잘못 들었나 의심하며 귓바퀴를 털었다.
“이런 건 몸 상태와 크게 상관이 없으니 말입니다.”
놀리듯 우뚝 선 검지에 작은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반딧불이의 군락처럼 아름다웠으나 열이 확 뻗쳤다.
“혹시…… 싸우자는 건가요? 제가 지겠지만 한 대는 때려 주고 싶네요.”
지금은 가능할 것도 같았다.
“신경 쓰지 마시란 뜻입니다. 제게는 당신이 마음 쓸 가치가 없으니.”
“전에도 생각했는데…….”
남자가 한없이 가볍게 뱉은 말이 쿵 내려앉았다. 너무나 무거워 바닥이 꺼질 것만 같았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듣는 사람이 대신 슬퍼할 수밖에 없게 해요.”
씁쓸한 눈동자가 참 가여워 그를 바라봤다.
“저는…… 저에게는…….”
그가 작고 희미한 무언가를 털어 내려는 순간,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요동쳤다.
“아!”
먹먹한 가슴이 둘 중 누구의 고통인지 알 수 없었다. 스치며 흘러가던 두 개의 바람이 거센 몰아침을 견디지 못하고 역전하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뒤집힌 풍랑을 수습해 보려 했지만 이미 제자리를 찾아간 후였다.
* * *
“으…….”
니네이나는 작은 흐느낌도 다 내뱉지 못하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누적된 피로에 지쳐 잠이 든 것이다. 마사지와 따뜻한 물로 몸을 노글노글 풀어 놓고 돌려주려던 가이사의 계획이 무너졌다. 쉽게 쓸 수 있는 힘이 아닌데 낭떠러지를 만나 주저앉아 버린 탓이었다. 마음이 흔들리자 집중력도 흐트러졌다. 몸은 가벼워졌으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빳빳이 고정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는 정말 인간이 싫습니다.”
들어 줄 사람도 없는데 작게 고해했다.
“그래도 가장 싫은 건…….”
‘접니다.’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는 야트막한 밤이 훔쳐 가 버렸다. 그는 손을 뻗어 하얀 뺨을 만져 봤다. 가죽 장갑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접혔다. 옹송그린 손끝만 겨우 대고 속삭였다.
“소중한 건 귀한 곳에 쓰는 겁니다.”
좋은 꿈을 기원하듯 부드러우나 또 한편으로는 애잔했다.
달칵.
아비 짐승이 돌아와 거대한 울타리가 내려올 때까지 그는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들키기 바로 직전 아슬아슬하게 떨어졌음을 오로지 그만 알았다.
* * *
‘아이고, 내 몸뚱이야! 아파 죽겠다! 살려 줘!’
잠깐 고통이 사라졌다고 다시 찾아온 것들이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정말 숨이 할딱할딱 넘어갈 것만 같아서 팔다리를 거세게 버둥거렸다. 살려 달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때 시커먼 우주 속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아니라 통증이 그랬다. 가이사가 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빨리?’
고통스러워하니까 그가 도와주는 걸까?
“으잉?”
눈을 뜨니 온통 파랗고 푸르른 초원이 보였다. 너무나 뜬금없는 풍경에 나는 눈만 깜빡였다. 눈을 비비고 깜빡여도 탁 트인 시야는 바뀌지 않았다. 새털구름이 잔잔히 흐르는 아름다운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녹음이 무서울 정도로 한적했다. 한쪽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순한 양 몇 마리와 풀을 뜯는 말, 그 밖에도 작은 동물들이 많았다.
“이게 뭐람?”
주춤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곧 토끼를 품에 안고 앉아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무해한 동물들만 바글거리는 이곳에 나를 제외하면 그가 유일한 사람이었다. 고개를 든 소년이 커다란 눈망울에 나를 가득 담았다. 세 살이나 되었을까? 보호자 없이 홀로 앉아 있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나는 부랴부랴 달려가 아이 앞에 쭈그려 앉았다. 가이사의 힘을 빌렸을 때처럼 몸이 펄펄 나는 게 이상했다.
‘너는 누구니, 꼬마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
문득 부모님이 없는 아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떠오르는 말을 급히 취소하고 조심스레 눈을 맞췄다.
“……괜찮아?”
커다란 녹색 눈이 깜빡였다. 여느 집 아이 같지 않았다. 눈망울에 자르르 흐르는 빛이 신묘했다. 토끼를 놓아준 그가 안아 달라며 두 팔을 뻗었다. 당황스러움에 머뭇거리자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바라봤다. 고양잇과 짐승 같은 아몬드형 눈매. 집요할 정도로 빤한 시선. 한동안 옆에 머물러 준 어느 남자의 것과 닮았다.
‘이 시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나는 조심스레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애라 가볍긴 했으나 가뿐하게 들리는 게 이상했다. 파워 밸런스가 갑자기 무너진 느낌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무게감이 전혀 없는데? 깃털 같잖아…….’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한 팔을 떼어 내 볼을 꼬집어 봤다. 통증이 하나도 없었다.
“아하.”
꿈이었나 보다. 그래서 고통도 없고 아이도 가뿐히 들렸다.
“그럼 이건 자각몽이라는 소리인데…… 이 풀들은 뭐며 이 애는……?”
꿈인 건 아는데 세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애를 보고 넌 뭐냐고 할 수가 없었다. 하릴없이 입을 다문 사이 작은 손바닥이 다가왔다. 경계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냥 놔두었더니 엄마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아기처럼 두피를 파고들었다. 조물조물 무언가를 찾던 손바닥이 정수리에 닿았다. 눈을 지그시 감는 아이가 어린애치고는 성숙해 보였다.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랄까? 이 애는 분명 신분이 높을 거야. 아니, 꿈에서 신분이 있나? 그래도 귀티는 잘잘 흐르네. 누구 애인지 참 잘생겼다. 훌륭해.’
구애받지 않고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며 평화로운 오솔길을 걸었다. 파랗고 노란 꽃들을 지나쳐 붉은 열매를 발견할 때까지 아이는 조용했다. 마침내 그 지고한 눈이 떠졌다.
“고마워요.”
갑작스러운 인사가 의아했다.
“뭐가 고마워?”
“아직 말해 줄 수 없어요.”
아이는 방긋 웃었다. 말할 수 없다는 건지 말하기 싫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꿍꿍이를 감추는 것도 누구랑 꼭 닮았네.’
왜 하필 지금 또 가이사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무슨 꿍꿍이속이냐고 다그쳐 볼 생각이 안 들었다. 경계하기도 어려운 외양이었다. 일부러 꾸미기라도 한 것처럼.
“대신 바라는 것 한 가지를 들어줄게요.”
“뭐든 다 들어줄 수 있다는 것 같네.”
“그런 힘은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미약해서…….”
다 들어줄 수 없어 미안한지 아이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커다란 설움은 그 나이 같지 않았다.
“아니! 아니! 괜찮아. 울지 마!”
“당신은 참 상냥해요. 그게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요. 그 아이에게도 다정할 것 같아서.”
“아이라니?”
너도 아이면서? 의심하자 아이가 배시시 사랑스럽게도 웃었다. 애교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것처럼. 그 미소에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햇살이 미소 짓는 느낌이었다.
“요정인가?”
제법 현실성 있는 생각이었다. 꿈속이니 무엇이든 가능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날개를 찾아보던 나는 ‘풉!’ 하고 터지는 웃음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긴 해요.”
“그때?”
“그것도…… 아직 말해 줄 수 없어요.”
말하지 못하는 게 왜 그렇게 많으냐고 투덜거릴 수도 없게 눈가가 촉촉했다. 보드라운 마음을 할퀼 수 없었다.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원을 빌면 꿈에서 깨는 건가?’
이런 꿈이라도 꿈은 꿈이다. 아름다운 꿈보다는 잔혹하더라도 현실에서 살고 싶었다. 환상에 사로잡히기에는 내 정신이 강했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이것만이 진실한 바람이라고 믿었는데 구름에 쌓여 희끄무레해졌다.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기회를 주지 않으련?
그 자리를 애타는 목소리가 채웠다. 무의식의 발현일 꿈속이었다. 가장 염원하던 소망이 떠올라야 하는데 왜 루베니오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걸까? 이상하다. 참 이상하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음…… 좀 더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어. 걱정하지 않게…… 건강하게…….”
어려운 일이었다. 간신히 유지해 놓은 것으로도 벅찼다. 그러나 그는 물었다.
“빛과 어둠은 떼어 낼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 반짝이려 할수록 그림자가 드리울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그래도 빛이 반짝인다면.”
이해 못 할 말의 뜻을 물어야 하는데 입이 멋대로 지껄였다. 머리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가슴 언저리가 먼저 뜻을 받든 탓이었다.
‘어라? 이게 아닌데?’
다시 물어보려는데 안타까워하는 눈빛이 보였다. 아니, 자비로운 시선이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는 부모와 가장 닮아 있었다.
“그대에게 ……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의?’
듣지 못한 게 아니었다. 들었는데 기억 속에서 사그라졌다. 작은 손이 흔들렸다. 어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손짓에 숨이 확 트였다.
* * *
눈을 번쩍 뜨자 더 이상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그 애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하는 건 오로지 거대한 초원 같았던 그 눈동자뿐이었다.
「깨어나시면 두 번 두드리세요.」
정신은 없는데 글자가 읽혔다. 눈앞에 웬 종이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안은 어둠으로 차올라 있는데 종이 옆에는 초록색의 반짝이는 빛이 붙어 있어 헷갈릴 염려도 없었다. 눈에 훤히 띄었다.
“여긴 어디지?”
어쩐지 좀 추운 것 같아 몸을 뒤척거렸다. 막 손을 빼내어 위를 두드리려고 했는데 덜컥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장이 뚫렸다.
“으앗!”
몰아치는 강풍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깨어나셨습니까?”
가이사는 묻는 게 먼저였고 루베니오는 손을 내밀어 부축하는 게 먼저였다. 아기를 대하듯 목 뒤를 받치고 나를 조심히 일으킨 루베니오가 엉킨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흩날리는 머리칼을 챙길 새도 없이 두꺼운 담요가 머리 위에 떨어져 눈과 코를 빼놓고 이마와 입술까지 가렸다. 이게 대체 뭔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앉아 있는 곳이 좀 이상했다. 붉은 융단이 두툼하게 깔려 불편하지는 않은데 생긴 게 조금, 아니, 많이 이상했다. 나는 둥글게 재단된 모서리를 하나하나 바라봤다. 총 네 개였다. 가이사가 치워 놓은 뚜껑도 보였다. 이건 아무리 봐도 그거였다.
“관이잖아…….”
“나무 상자입니다. 답답하지 않도록 공기를 잘 둘러놓은.”
가이사가 뻔뻔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봐라. 저 루베니오가 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하고 있었다. 관이 맞는다는 뜻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관에 넣어 놓다니!’
가뜩이나 삶에 예민한 마음이 분개했으나 이게 화낼 일이 아님은 이성으로 알았다.
“……바람을 막으려면 이불보다는 이게 나았겠죠. 이해해요.”
“그렇습니다.”
‘그래요. 관이라도 괜찮아요. 숨도 잘 쉬었고…… 무엇보다 살아 있으면 됐죠.’
혹시나 비꼬는 것처럼 들릴까 봐 생각나는 말을 꾹 삼켰다. 고개를 밖으로 쭉 빼낸 나는 아래에서 발견하고 말았다.
“흐억! 소, 소나?”
네가 왜 거기에 있어? 정령은 눈을 찡긋거리며 인사했다.
사람 둘과 관 하나, 아니, 살아 있는 사람 셋을 데리고 이동하느라 몸이 길게 늘어나 있어 괴기스러웠다.
“예쁜데…… 무섭네요.”
“정령은 투명해서 아래가 다 보이니까요. 고소 공포증이 있습니까?”
“그거야 다들 어느 정도는…… 너무 놀라서 아래는 보지 못했지만요.”
“그럼 뭘 보고 놀라신 겁니까?”
가이사는 내가 놀란 이유를 높은 고도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보고도 몰라요?’
다시금 소나를 내려다보던 나는 순진한 눈망울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그 눈 또한 사람 머리만 하게 커져 있어서 누르면 터질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엄청나게 무섭다고 말해 주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
“목적지에는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돼.”
가이사와 루베니오가 차례로 말했다.
“몸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그러고 보니 목이 따끔거리던 게 사라졌다. 열도 안 나는 것 같았다.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건강하게 만들어 돌려주겠다던 가이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 봤자 유리 몸이지만.’
고질병이 된 흉통은 그대로라 가슴이 뻐근했으나 나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럼 이제 내려가겠습니다.”
가이사가 소나의 등으로 추정되는 것을 툭툭 두드렸다. 잘 늘어나는 젤리처럼 쭉 뻗어 있던 소나의 팔다리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관째로 나를 들었다.
“어지럽진 않니?”
“괜찮……”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거세게 흔들렸다.
“으헉!”
하마터면 관 밖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역시 목숨이 먼저야. 나는 그토록 싫어하던 관을 생명줄 붙잡듯 잡았다. 본래의 크기로 돌아온 소나가 내 어깨 위로 뿅 튀어나와 입고 있던 치맛자락을 붙잡고 인사했다.
‘너는 왜 또 여기에…… 응. 반가워. 반가운데…… 내가 널 반가워해도 될까?’
그것과 거의 동시에 심장과 내장만 두고 몸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
소리 없는 비명은 바람에 휩쓸렸다. 그래. 솔직히 놀이공원에서 타던 바이킹보다는 느렸다. 미칠 만큼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고도가 높아서 거의 1분 넘게 내려가는 중이었다. 끝이 안 보이는 수직 미끄럼틀을 탄 기분이었다.
“마음에 드니?”
“……내려가는 속도가요?”
엄청 마음에 안 들지만 입꼬리를 당겨 봤다. 루베니오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래를 가리키는 눈짓을 따라 내려다보자 하얀 저택이 보였다. 유럽 해안의 집들처럼 건축 양식이 독특했다. 바다 대신 숲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하나의 거대한 성처럼 건물 몇 채가 연결되어 있었다.
“조금 작지만…….”
루베니오의 말에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건물이 더 커 보였다.
‘작다고?’
의아해하는 나를 모르는지 그는 설렘이 묻어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분간 우리가 살…… 집이야.”
그가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에 걸린 그네를 가리켰다. 저기에 꼭 태워 보고 싶다는 듯이. 나는 비로소 그의 소망을 눈치챘다. 머무르고 싶다. 이곳에. 조금이라도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