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햇살 아래에
루베니오가 공작이 되어 실권을 가져올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 현 공작이 죽어 그 자리를 자연스레 계승하는 방법. 둘, 원로회의 승인을 받아 현 공작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빼앗는 방법. 그러나 실제로 그에게 주어진 건 외길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공작은 죽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루베니오는 공작을 죽일 준비를 했다. 공작은 아들의 반항을 그 즉시 눈치챘다. 어떤 협박도 없었다.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공작은 손녀에게 건 암살 마법을 발동시키라고 지시했다.
「기존의 암살 마법은 모두 제거함. 앞으로 더 지켜보겠음.」
가이사가 보내온 첫 편지의 내용이었다.
루베니오가 가이사에게 니네이나를 지켜 주는 대신 공작을 죽이라고 말했다면 상황 정리는 훨씬 빨랐을 것이다. 그러나 니네이나가 암살 마법에 당해 죽어 버렸을 테니 모든 건 허사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베니오의 도박은 성공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완전무결하게 승리하려면 장기전이 될 것이다.
루베니오는 가이사가 보내온 짧은 쪽지를 보고서야 며칠간 지치지 않고 뛰어 대던 심장을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루베니오는 며칠간 그 편지를 품에 넣고 살았다. 거기에는 니네이나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얼 했는지 적혀 있지 않았으나 루베니오는 홀로 상상하곤 했다. 젖먹이 아가가 어떻게 자라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를.
공작의 협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루베니오가 어떻게 행동하든 그는 니네이나를 죽이려 할 테니 말이다. 한번 고삐가 풀리자 열망하게 됐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다.
“아가야, 넌 언제나 먼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네가 너무…… 가깝구나.”
루베니오는 지금 당장 딸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 중요한 시점에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장기전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에 신중해야 했다. 한 시간이라도 대응이 늦는다면 걷잡을 수 없을지 모르는데 이런 와중에 먼 별장까지 갈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아픈 딸에게 여기까지 와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도 울어 헐어 버린 속앓이가 거미줄처럼 늘어져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것도 내 용기가 부족해서인가?”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용기를 내어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한 결과가 이것일 텐데 결국 달라지는 건 없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찾아가는 건 그의 욕심이 아닌지 조금 두려웠다.
‘잘 지내고 있는 아이에게 얼굴 한 번도 내비치지 못했던 아버지가 20년 만에 나타나 한번 안아 보자고 한다면…… 좋아할 리가 없겠지.’
루베니오는 안아 보지 못해도 좋았다.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볼 수 있다면, 아니, 자라난 그 아이를 눈으로 직접 담아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러나 그 작은 소망마저 이기적인 욕심인 듯해 두려워졌다.
“편지를 다시 써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의 침울한 기색을 더는 볼 수 없었던 집사가 조심스레 간언했다.
“편지?”
“예. 보내지 않으신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니네이나가 어려 글을 읽지 못할 땐 날마다 꼬박꼬박 잊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녀가 철이 들고 나이가 들어 그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횟수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니네이나가 읽지 않고 버린 편지가 루베니오의 마음을 깎아 냈기 때문은 아니었다. 루베니오는 그의 편지를 받은 딸의 표정이 좋지 못하였다는 보고를 견딜 수 없었다. 혹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아 눌러쓴 그 편지가 그 아이에게는 독일까 봐 그는 더 이상 보낼 수 없었다. 설령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애끓음에 사무친다 하여도 말이다.
“편지라 하여 반기겠는가? 오히려 우습기만 하지.”
“…….”
“얼굴 대신 매번 편지라니. 난 이미 그 애에게…… 너무 많은 죄를 지었어.”
어쩌면 평생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나름의 각오를 다져 왔다.
“사랑 많은 아이로 키우고 싶었네.”
“주인님…….”
“사랑을 듬뿍 받아 사랑받는 법을 아는 아이. 그래서 어디서나 사랑받는 그런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했지.”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시절이었다. 그때의 그는 공작의 물건이라는 것에 만족하며 살았다. 공작이 소개해 준 여자를 불만 없이 아내로 맞이했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졌으나 두려움은 없었다. 사랑 많은 아이로 자라게 하겠다고 아내 앞에서 큰소리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평범한 부부처럼 부른 배를 끌어안고 태어날 아이를 기대했다. 아이의 작은 신발을 손수 짓고 아기가 쓸 요람을 고르고 갓난아기가 쓸 수 없는 장난감까지 모두 구입했다. 봄볕같이 따스하고 새털처럼 보드라웠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철모르고 마냥 행복했던 때가 그에게도 있었다.
하여 용서할 수 없었다. 그 행복을 세상에서 가장 커다랗고 귀한 것이라 여기던 그에게서 모든 걸 박탈해 간 자를.
“…….”
루베니오의 악문 턱이 부르르 떨렸다. 눈시울이 울컥 붉어져 핏발이 성성한 눈은 20년 묵은 한으로 혼탁했다. 좌절하고 울부짖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던 그 모습을 20년간 지켜봐야 했던 루베니오의 배복은 분노로 흉흉한 눈을 두려워하기보다 안타까워했다.
한 발짝 다가간 집사가 루베니오의 책상에서 깃펜과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그래도 한번 보내 보시지요.”
집사는 알았다. 루베니오가 니네이나에게 보낼 편지지를 손수 골라 책상 한편에 둔다는 것과 그러고도 보내지 못해 혼자 앓는다는 것을.
“그리움은 닿는 것이라 했습니다.”
새하얀 편지지를 담은 눈동자가 흐릿하게 떨렸다. 먹구름으로 그늘진 파란 눈이었다.
니네이나와 닮은 파란 눈.
* * *
최근 내 식단에는 가이사가 많은 관여를 하게 되었다. 그가 나를 위한 보양식을 잡아 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반나절 정도 밖에 나갔던 그는 묵직한 것들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벌써 이레째였다. 그가 잡아 온 것이 내 식사로 올라온 것이.
“알 같은 게 톡톡 터지네…….”
나는 묽은 수프를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하나의 규칙이 있었다. 내가 그 음식을 다 먹은 뒤에야 가이사가 식재료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이었다. 물론 내 멋대로 정한 규칙이었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상대했다면 그가 압승이었을 것이나 여러모로 적절치 못해 그는 늘 내게 져 줘야 했다. 이 몸의 식사 시간은 남들의 딱 세 배만큼이나 길었다. 가만히 보고 있기에는 지루한 시간이지만 그는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맛은 괜찮은 것 같은데……. 이거 많이 잡아 왔어요?”
식사 시간이 긴 것에는 내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탓도 있었다. 이렇게 먹으면 먹으면서 소화가 되는 기분이었다.
“입으로 힘을 다 쓰시는군요.”
“소화 중이에요.”
묘한 시선이 흘기듯 나를 바라봤다.
“당신이 먹는 양이라면 두 번 더 먹을 정도는 될 겁니다.”
“아니, 제가 아니라 당신 말이에요. 당신도 먹어 보는 게 어때요? 혼자 먹기 미안해서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권한 적은 없었다. 그가 다른 사람과 식사하는 걸 견디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내 말은 이따 가이사 혼자 이 식재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어 보라는 뜻이었다.
“…….”
딱히 쓸모없는 말인 것 같았는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의 침묵을 오래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지금 먹고 있는 게 궁금했다. 맛이 꽤 괜찮았다.
“이게 뭐지?”
“…….”
“뭐예요?”
“…….”
그는 귀찮아하면서도 암묵적인 규칙을 지켰다. 기껏 힘을 내어 먹는데 무엇인지 알려 줘 의욕을 저하시킬 필요는 없다는 태도였다.
“이번에는 뭐예요?”
식사를 다 끝낸 나는 숟가락을 반듯하게 내려놓았다. 드디어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러나 그 감정은 얼마 가지 않았다.
“수유돔의 정기가 모인 방광입니다.”
“정기요? 방광에……?”
“예.”
가이사의 말에 내 얼굴은 저절로 일그러졌다. 그동안 가이사가 쓸개즙, 애, 발바닥, 생식기 등 갖가지 존재의 갖가지 부위를 가져다줬으나 방광은 또 처음이다.
‘아무리 그래도 방광은 좀…….’
뺨이 핼쑥해져 급히 입을 가렸다.
“읍!”
다행히 비위가 약한 편은 아니라 참을 수 있었지만 하마터면 1시간 투자해 먹은 걸 토해 낼 뻔했다.
“수유돔은 뭐예요?”
속이 진정하자마자 또 물었다.
가이사는 귀찮은 얼굴을 하고서 책 읊듯 줄줄 말했다.
“늪에 서식하는 몸길이 5m, 너비 1m 정도의 거대한 파충류로 잡식성이나 주로 잡아먹는 건…….”
막힘없이 말하다가 뜸을 들였다.
“……설마 인간을 먹어요?”
“모르겠군요. 보통 저보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긴 합니다.”
입을 가리고 빈 접시를 내려다봤다. 내가 토하면 가이사도 손해였다.
“거긴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니 영애가 먹은 개체는 안 그랬을 겁니다.”
“고마워요. 퍽 위로가 되네요.”
나는 힘이 풀려 팔을 떨어트렸다.
“그럴 거면서 왜 매번 물어보는 겁니까?”
“뭐가 제 몸을 건강하게 해 주는지 알아야죠. 매번 당신에게 부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효과가 좋다면 어떤 해괴한 것이라도 먹을 수 있어요. 속이 좋은 건 아니지만 얼마든지 또 먹을 수 있다고요.”
삶에 비하면 이깟 것은 별거 아니었다. 광대처럼 재잘거려 소화하고 이상한 것을 보양식으로 삼고. 뭐가 대수겠어?
“눈가에 눈물이 아롱거리는데 당신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강렬한 의지 때문이죠.”
눈물을 쓱 담으며 짐짓 웅장하게 말했다.
그는 이번에도 웃어 주지 않았다. 한 번쯤 웃겨 보고 싶다는 유치한 승부욕이 들었다.
“다음에 또 구하려면 식재료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기억해야 해서 묻고 또 묻는 거예요.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그런 것쯤은…….”
그는 눈가를 찌푸리며 뭐라고 말하려다가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네? 뭐라고 했어요?”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를 다 알아들을 순 없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분명 뭐라고 했는데요?”
“…….”
“말하기 싫으면 됐어요. 그것보다 저 좀 봐 주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핑그르르 돌았다. 보통 옷을 갈아입고나 할 행동이지만 그는 내 옷차림이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를 살폈다.
“저 많이 건강해졌나요?”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빨리 알려 줬으면 좋겠다. 그는 일종의 건강 측정기였다. 꽤 훌륭한 성능을 가진!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쯤 목소리가 들려올 때가 되었는데도.
“왜요? 별로예요?”
“산드레고 같습니다.”
“산드레고가 뭔데요?”
“생기를 주식으로 삼는 악마입니다.”
“……제가 악마라는 거예요?”
마음이 와장창 일그러졌다.
“지금 나 놀려요?”
“놀리려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좀 감탄스럽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단기간에 나아질 수 있나 하여서.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당신은 역시…… 산드레고 같습니다.”
얼굴 근육이 시시각각 변했다. 기뻐해야 할지 야차처럼 분노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하루가 지나면 수명이 하루 깎여야 하는데 도리어 하루 늘어나는 기분이 듭니다. 분명 얼마 남지 않았을진대…….”
마지막 말은 살생부처럼 음산했다.
“그, 그래서 뭔데요? 괜찮다는 거예요?”
“저는 당신만큼 나약한 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확답할 수 없다는 듯 그는 뜸을 들였다.
“왜 혼자만 알아요?”
몸을 바싹 붙여 은근한 협박을 가하자 질색한 그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던져 줬다.
“건강해지셨습니다.”
“그래요?”
방금 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고 방긋 웃었다. 몸이 조금만 더 좋았어도 방방 뛰어다녔을 것이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발가락을 꿈실거리며 요상한 탭댄스까지 췄다. 발이 슬리퍼에서 비쭉 빠져나왔다.
“어?”
발 한쪽을 바닥에서 떼어 내며 슬리퍼를 제대로 신으려 했다. 하지만 복부에 힘이 거의 없는 몸은 중심을 잡지 못했다.
“어라? 어어?”
그는 휘청 넘어가는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가 우당탕 소리를 낼 정도로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턱! 그의 손은 내가 완전히 넘어가지 않게 붙잡았다.
“아…… 고마워요.”
“대체…….”
그는 몹시 나무라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안 그래도 싸늘한 얼굴이 위에서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니 등골이 오싹했다.
‘또 만지게 해서 화났나?’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사이 딱딱한 얼굴은 본래의 빛으로 돌아갔다.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네?”
“몹시 귀찮습니다.”
“아……. 정말 미안하네요.”
그럼 그렇지! 귀찮다는 말에는 면역이 됐지만 그래도 아주 얄미워 죽겠다.
그는 내 뾰로통한 시선을 대충 흘리며 무릎을 굽혔다.
“슬리퍼 다시 신겨 드릴 테니 가만히 있으세요.”
가이사의 손이 한 곳을 지정했다. 어깨를 툭툭 치며 여기만 붙잡으라 했다. 그곳에 살그미 손을 내렸다. 옷 위에 달린 견장 때문에 체온이 느껴지지 않을 위치였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얇아 부러질 것 같은 발목을 살짝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가이사.”
“예.”
“미안한데 한 가지만 말해도 돼요?”
“뭡니까?”
“저는 왜 이것도 힘들죠?”
“…….”
그는 후들후들 떨리는 내 다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처구니가 없죠? 저도 알아요.”
그 눈빛을 정확히 해석해 낸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지쳐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나조차 애처롭다.
그는 혀를 쯧 차며 재빨리 슬리퍼를 발에 신겼다.
“이러고도 운동하자는 말은 매번 잘도 하…….”
말을 하다 말고 놀라 크게 뜬 눈이 커튼처럼 흘러내린 백금색 머리칼을 담았다. 붉은 눈이 나를 마주하며 깊게 요동쳤다. 가느다란 머리 타래가 그의 뺨을 스르르 스치는 게 보였다.
“얼어붙은 동토 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새하얀 태양 같…….”
그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눈을 홉떴다.
“으헉!”
기이한 기합 소리와 함께 굽혔던 허리를 폈다. 이 사람 왜 저렇게 넋이 나갔어! 역겨움이 너무 컸나?
“괜찮아요?”
늘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꽂으며 굳어진 그의 안색을 살폈다.
“하다 하다 이젠 머리칼 공격이라니…… 이번에도 고의는 아니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내가 그의 결벽증에 대해 아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토록 진저리를 쳤으니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에 빠진 건 그였다. 그는 귀 뒤에 꽂혀서도 굽이쳐 흐르는 머리칼을 다소 얼빠진 얼굴로 바라봤다.
“흉물스러워야 하는데…….”
“뭐요?”
“저는 인간의 육체에서 아무런 촉각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는 건 감정뿐입니다.”
그것이 역겨움이라는 듯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손에 잡힌 종이처럼 구깃구깃한 얼굴이 괴로워 미치겠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허둥지둥했다. 나는 이 상황이 심각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흉물…… 저기요. 제가 지금 다 듣고 있거든요! 기분 나쁘니까 부디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해 줄래요?”
그의 곁에서 서둘러 물러났다.
“지금…… 기분 나쁜 게 맞습니까?”
“왜 또 시비예요?”
“흉물스럽다는 말을 듣고도 머리카락이 닿지 않도록 피해 주는 거잖습니까.”
“그, 그게 뭐요!”
지레 찔려 쏘아붙였다. 그는 방금 전의 내 말이 인위적인 연기라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당신은 날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펴며 입가를 가렸다.
“왜요……? 토할 것 같아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여기서 토를 하면 곤란했다.
“욕실은 저쪽…… 헉!”
“…….”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성큼 다가왔다.
“왜, 왜 그래요……?”
손가락에 엉겨 있는 머리칼에 오싹한 시선이 닿았다.
“주인이라고 닮기라도 한 것인지 딱 당신 같은 색입니다. 볕에 태우면 바스라질 것 같고 움켜쥐면 무너질 것 같은 그저 그것뿐인 색.”
지금 나 쫄 때가 아니라 기분 나빠해야 할 타이밍 맞지? 한마디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그가 다시 주도권을 가로챘다.
“저는 ‘그날’ 이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군요.”
“그날이요? 뭐가 처음인데요?”
“이거, 제가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내 머리칼을 가리키며 물었다. 완전히 자기만의 페이스였지만 그것이 놀라워 휘말렸다.
“진심이에요?”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야 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도 없지만…….”
그가 자의로 사람을 만진다고 할 줄은 몰랐다.
“혹시 아까의 충격이 너무 커서 잠시 다른 인격이 된 거예요?”
떠오르는 질문을 뇌에 보관하지 않고 그대로 내뱉었다. 그러고 나서 꽤 흡족해졌다. 그럴듯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
가이사가 특유의 무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음. 까칠하고 쌀쌀맞은 데다가 두 눈에 온기가 조금도 서려 있지 않은 걸 보니 가이사가 맞긴 한데…….”
그는 지금도 분명 쓸모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여 대답하지 않은 것일 터였다.
“싫으십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머리칼 몇 번 만지는 게 뭐가 대수일까?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일 테니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내 허락에 그는 즉시 장갑을 벗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뻗어 오기만 했다.
“아직 닿지도 않았잖아요.”
그는 만지지도 않은 주제에 역겨워 죽겠다는 얼굴로 머리카락을 노려봤다.
“만질 거예요, 말 거예요?”
“곧 결정할 겁니다.”
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또 뚫어져라 죄 없는 내 머리칼을 노려봤다.
‘태우겠네. 태우겠어.’
나는 주먹으로 허리를 퉁퉁 두드리며 물었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면 앉아도 될까요? 제가 아까부터 다리가 후들거려서.”
“…….”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형편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는 더 서 있지 못하고 푹 꺾여 버릴 것 같았다.
한숨을 삼킨 그가 벗었던 장갑을 다시 끼고 어서 가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은 뭐예요? 제가 고작 코앞에 있는 침대로 가다가 넘어지기라도 할 것 같다는 듯 보시는데요, 저기 세 걸음이면 되거든요! 여기만 걸어 다녀서 걸음 수도 외웠어요.”
“왜 제게 계속 말을 걸어 주시는 겁니까?”
그가 과묵해서 나는 필연적으로 말이 많아졌다.
“뭐요? 그럼 같이 있는데 대화 한마디를 못 해요?”
“오해하셨습니다.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라 신기해서 그럽니다. 보통은 제게 말을 걸지 않습니다.”
“……가이사, 친구 없죠?”
“없습니다.”
그게 왜 필요한지도 모르고 마땅한 쓸모도 찾지 못했겠지. 하여 그것이 당당하며 슬프지도 않겠지.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농담인 듯 진담인 듯 툭툭 내뱉는 건 그래서였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인간임에도 그가 관계를 맺는 걸 뿌리 끝까지 혐오하며 거기에 질식해 있었기에. 가만히 있으면 나 또한 숨이 막힐 정도로 침묵이 싸늘했기에.
내가 견딜 수 없어 그렇게 했다. 단순히 불편한 게 다라면 가이사를 부르지 않으면 될 일이라는 모순을 알면서도.
“내가 자꾸 말을 걸면 당신도 대답해 주고 싶지 않을까 해서요.”
“왜 제게 신경 쓰십니까?”
“내 관심이 싫어요?”
“……신경 쓰입니다.”
“싫지는 않고요?”
“…….”
꽉 다문 입은 무어라 대답이 없었다. 얼룩진 눈동자는 스스로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흥.”
바보였다.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몸을 휙 돌렸다. 갓난애의 걸음처럼 위태위태해 걱정되는지 그는 바짝 붙어 따라왔다.
“으아아…….”
가까스로 침대에 도착한 나는 팔다리를 쭉 폈다. 정확히 세 걸음이었다.
“누우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럴 때는 눈치가 빠른 게 피곤했다.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가이사는 나를 걱정해 누우라고 권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혹시 또 움직여 닿을까 봐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하여튼 못됐어.”
“제가……”
“혼잣말이거든요!”
후후. 이번에는 내가 말 끊었…… 억!
나 왜 이렇게 유치해졌지? 몸도 보란 듯 휙 돌아누워 있었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가이사,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니잖아요.”
먼저 대꾸하면 지는 거라는 유치한 논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싫어하면서도 눕는다. 왜입니까?”
글쎄.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건 아니었다. 싫어하니까 조심해 주는 건 일종의 배려였다. 그는 아픈 사람이니까. 마음이.
“그렇게 상냥한 마음은 아닌데요.”
모르는 척 툴툴거리자 그는 관찰하는 걸 그만두고 다시 장갑을 벗었다. 아득한 눈은 까마득한 절벽을 마주한 것 같았다. 하겠다고 했지만 막상 도전하려니 또 혐오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에효.”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가 몇 번이나 구해 줬으니 갚을 뿐이다. 침대 위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나무 빗을 주워 그에게 내밀었다.
“도구를 써 볼래요?”
“도구?”
그는 크게 경계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맨손이라는 걸 모르는 건지 맨손이라도 내가 함부로 잡지 않을 걸 아는 건지. 용맹하고 사나운 맹수를 길들인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나는 그에게 닿지 않게 주의하며 빗을 내려놓았다.
“목적을 둬 보는 거예요. 우선은 빗질을 위해 만진다고 생각하는 거죠.”
“……작습니다.”
빗이 작다는 건가? 내가 쓰기 알맞은 작은 빗이 나무 특유의 시원한 향을 내며 그에게 들러붙었다.
‘보통의 결벽증 환자라면 다른 사람 손이 닿은 물건도 꺼리기 마련인데 말이지.’
어색해해서 그렇지 빗의 촉감을 끔찍해하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베개 하나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만지겠습니다.”
먼저 말한 주제에 싫어 죽는 어조에 웃음이 픽 나올 뻔했으나 참았다. 이제는 그에게도 익숙할 감은 눈가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르르. 빗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픈 사람의 것 같지 않게 매끄러운 머리칼은 어디 하나 걸리는 곳이 없었다.
“…….”
아마 그가 가장 약해지는 순간일 것이다. 궁금해하지 않으려, 지켜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남의 상처를 유희거리로 삼고 싶지 않아서.
“저를 믿습니까?”
“뜬금없이요?”
“눈을 감는다는 건 그 사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음…… 저는 딱히 그런 의도가 있는 건 아닌데요.”
“믿지 마세요, 아무것도.”
살갗이 얼얼하게 아리도록 뼈아픈 목소리였다. 참담한 배신을 겪어 본 사람의 것. 가벼운 참견 한마디 하지 않으려 떠오르는 말들을 삼켰다.
“응. 믿지 않아요.”
끊임없이 의심할 것이다. 그가 한 ‘약속’ 하나에 기대어 모든 걸 판단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
그 후, 그는 말이 없었다. 손만 고요히 남아 여러 번 빗질했다.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리는 손짓이 어딘가 애달팠다.
잠시 뒤,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의 손 같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톡 건드렸다. 호수 위에 물방울이 뽀르르 솟아날 때처럼 아주 짧은 접촉이었다.
“……!”
화들짝 놀란 가이사가 그 즉시 손을 물리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토할 것 같아요?”
역겹다는 말의 임팩트가 컸는지 나는 매번 같은 걸 물었다. 이 정도면 거의 자동 반사 수준의 습관이었다.
“기분이……”
“역겨워요?”
“…….”
그는 무어라 벙긋거렸다.
똑똑. 노크 소리에 작은 함의가 파묻혔다.
“주인님, 편지가 왔습니다.”
짧은 순간, 나는 멈칫했다. 무심코 그쪽으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붙잡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닿을까 봐.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벗어 놓은 장갑을 다시 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뒤에야 나도 움직였다.
“들어와.”
집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편지라니?”
“여기 있습니다.”
그러곤 냉큼 자리를 벗어났다.
집사는 가이사가 사람을 물리는 이유가 내 신변 보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나 재빨랐다. 그러나 볼일이 끝난 건 가이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저는 이만……”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편지를 쥔 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마음이 이상하게 서러웠다.
“……왜 우십니까?”
그는 쥐었던 문고리를 놓고 다가왔다.
가이사의 보호는 완전무결한 것이었다. 어떤 흠결도 어떤 상처도 그가 용납하지 않았다. 울다 지쳐 쓰러지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편지…….”
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걸어갔다. 거의 쓰는 일이 없었던 책장의 맨 아래 서랍이었다. 몹시 가볍게 만든 책장 서랍이 벌컥 열렸다. 내 뒤를 따라왔던 그가 책장 서랍 안을 빼곡히 채운 다수의 편지를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루베니오 세이아」
정갈하게 쓴 글씨체와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어느 것은 낡았고 어느 것은 빳빳한 걸 보니 세월의 차이가 있는 것들이었다. 양이 좀 많기는 했으나 20년의 세월에 걸쳐 보냈다면 이상하진 않았다. 발신자가 아버지이니 딱히 위협이나 스토킹처럼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가이사는 문제 될 것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울었다. 정신과 몸의 괴리에 어디서 빗물이라도 떨어지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뺨에 물 자국이 남아 주르륵 미끄러졌다.
“조심 좀……”
“저 대체 왜 울죠……?”
이해할 수 없어 편지 더미를 멍하니 바라봤다. 손안의 편지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그리워 우는 게 아닙니까?”
“그리워요? 왜요?”
“보지 못해서 그리움이 쌓인 것일 테죠.”
장갑 낀 그의 손이 붉은 눈가를 닦았다. 그칠 생각이 없는지 줄줄 흐른 눈물은 그가 닦기도 전에 떨어져 가이사의 드러난 손목을 아주 살짝 적셨다.
“윽!”
머릿속에 초록빛 섬광이 번쩍였다. 죽음과도 같은 아득한 노도가 시야를 잠식했다.
* * *
그 순간 가이사가 본 건 희미한 초록빛이었다. 그것이 니네이나를 감쌌다. 그녀는 빛에 휩싸여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는 눈을 번뜩 빛내며 그녀를 감싸는 빛을 살폈다.
“보호 마법?”
정확히 무엇을 보호하기 위해 발동한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보호 마법 특유의 따스함이 깃들어 있어 그 정체를 짐작했을 뿐이다. 날 선 경계는 수그러졌으나 누가 그녀에게 이런 걸 걸어 놓았는지 알 수 없어 그는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산들바람 같았던 마나가 번져 가이사의 얼굴을 다정히 쓸었다. 그러곤 니네이나의 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찰나였으나 가이사는 이 마나를 느낀 즉시 주인의 정체를 알아챘다. 레어노스. 가이사의 아버지가 사용하는 마나였다.
가이사의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버지…….”
니네이나는 몸을 둥글게 말며 웅얼거렸다.
혼란스러운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가이사는 묻고 싶었다. 가이사도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 이게 대체 뭡니까?’
이 시간 선에 존재할 리 없는 그의 아버지께. 또 닿지 않을 그 말을 이렇게라도.
가이사의 아버지는 14년 전에 소멸했다. 그것은 곧 죽음이었다. 가이사는 아버지가 소멸한 날의 일을 단 하루도 잊은 적 없었다.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날인데. 그래서 더욱이 이 상황이 이상했다. 레어노스는 죽기 직전까지 가이사와 함께였다. 그가 만약 니네이나와 연이 닿았다면 이제 고작 스무 살인 그녀와의 인연을 가이사가 모를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언제나 함께였으니까.
그러나 니네이나에게 걸린 보호 마법은 레어노스의 것이 맞았다. 14년이 지났어도 가이사가 아버지의 마나를 잊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니네이나의 몸속에서 나온 보호 마법은 척 봐도 상당한 급의 마법이었다. 가이사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저 정도의 고위 마법을 걸 수도 없을 터였다. 마법을 걸기 위해서는 일정 조건이 필요한데 고위 마법일수록 필요한 조건이 많아졌다. 니네이나에게 걸린 건 적어도 대상자에게 한 번 이상은 접촉해야 걸 수 있는 정도의 마법이었다. 그런 걸 가이사의 아버지가 대체 언제 무슨 연유로 걸어 놨단 말인가? 하지만 물어볼 사람이 아무 데도 없었다. 니네이나는 보호 마법이 발동한 것과 동시에 꿈에 휩쓸려 쓰러졌고 그의 아버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가이사는 그대로 걸어가 니네이나를 침대 위에 눕혀 두고 그녀의 머리맡에 손을 올렸다. 그가 손을 뻗는 순간 녹색 마나가 크게 일렁거리며 튀어나왔다. 녹색의 빛무리는 밤의 은하수처럼 넘실거리며 니네이나의 머리 위를 감쌌다. 더 접근하면 공격받을 게 분명했다. 공격적으로 변한 레어노스의 마법에 가이사의 얼굴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제 아버지의 냉대를 참을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살아가라. 살아가거라, 가이사.
그가 남긴 유언이 떠올랐다. 그것은 곧 아직까지 그가 생명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가이사는 레어노스의 유언이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레어노스를 죽이면서까지 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 말이다.
가이사는 레어노스가 소멸하던 날 자신이 죽고 레어노스가 살기를 바랐다. 만약 그게 안 된다면 차라리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선택권은 레어노스에게만 존재했고 그는 소멸당하는 대가로 스스로 보듬은 아이를 살렸다. 그게 열 살의 가이사였다. 레어노스가 살린 어린 목숨. 가이사는 죽고자 하였는데 레어노스는 살라고 했다. 그렇게 산 목숨이었다.
무얼 대가로 한 목숨인데 스스로 끊을 수 있을까? 스스로 끊어서도 안 되고 의미 없이 죽어서도 안 됐다. 그래서 가이사는 어렵고 위험한 곳을 찾았다. 언젠가는 그곳이 그의 목숨을 끊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막상 죽을 위기가 닥치면 또 아득바득 발버둥 치며 살아나려 했다. 가이사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고 싶어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이 쓸모없는 삶을 이어 가려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목숨을 손아귀에 쥐어 바람 앞에 흔들었더니 어느새 몸이 훌쩍 자라 있었다. 웬만한 위험은 성인이 된 가이사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죽으려면 좀 더 어릴 때 일찍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살아 있을까? 이것은 죽지 못한 것일까, 죽지 않은 것일까? 해답은 모르나 가이사는 지금도 이렇게 살아 있었다. 레어노스의 마지막 말대로.
가이사의 눈이 오래전의 기억에서 벗어나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물어도 이미 죽은 레어노스는 대답해 줄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빛에 초조함이 어렸다. 막 기절한 그녀가 당장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레어노스가 손수 걸어 놓은 마법을 그의 손으로 헤집을 순 없었다.
마나가 니네이나의 머리 위를 맴도는 걸 보면 레어노스가 지키는 건 니네이나의 정신이었다. 정신을 보호하는 마법은 보통 대상의 기억에 관련한 게 많았다. 억지로 파훼하면 보호 대상인 니네이나의 정신이 으깨져 터질 터였다. 그러니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니네이나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
“영애…… 제발…….”
가이사가 나약한 목소리를 내며 니네이나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손이 니네이나의 젖은 뺨 위로 늘어진 머리칼을 살짝 넘겼다. 어쩔 수 없이 손끝이 니네이나의 뺨에 닿았으나 가이사는 자각하지 못했다. 가이사는 눈물짓다 기절한 니네이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는 아이 같은 얼굴을 했다.
“…….”
그러나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기억을 봉인하는 종류의 보호 마법이 맞는다면 그녀의 기억을 신뢰할 수 없었다. 가이사는 언제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돌아오는 건 지긋지긋한 침묵뿐이었다. 일렁거리던 눈동자가 꺼진 불꽃처럼 힘을 잃어 갔다. 바라는 대답은 결코 들려오지 않는다. 그것이 가이사가 빛을 잃은 이유였다.
* * *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가득 쌓인 편지를 바라보는 니네이나가 되는 꿈을. 오로지 니네이나 세이아가 되는 꿈을. 꿈속의 나는 니네이나였다.
「루베니오 세이아」
그 편지들에는 늘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이름이 적힌 자리도 항상 같았다. 위아래 좌우 오차가 없는 그 간격이 하루를 간신히 나고 매일을 참아도 달라지지 않는 일상 같았다. 편지는 와도 그 사람은 오지 않는다. 그래서 편지로 전하는 안부 따위는 필요 없다고 했다.
그 편지들은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애걸복걸하는 건 이쪽이 아니라며 빈정거릴 수 있는 이유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달려가 그 사람의 발아래에 매달릴까 봐 매번 읽지 않고 서랍에 처박아야 했다. 그러나 가능하면 했을 것이다. 먼저 그 사람에게 달려가 제발 보아 달라고 매달렸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서랍에 넣은 건 그 사람의 발아래로 달려갈 형편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찾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지면 정말 비참할 테니까.
갈 수 없으니 먼저 오지 않으면 볼 수 없었다. 그 사람도 그 사실을 뻔히 알 텐데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하녀의 어린 딸이 정원사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보게 되었다. 집사는 그 사람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나는 눈앞에 한 번이라도 나타나면 그리해 주겠다며 어깃장을 놓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아, 아버지…….
가뜩이나 사람이 붐비는 별장에서 사람들 눈을 피해 그 사람을 불러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그 사람이 저 말을 듣고 싶을까 하여 연습해 두었다고 하면 될 테지만 누가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에게 말을 전할까 봐 두려웠다. 그럼 또 편지만 보내고 오지 않을까 봐.
―언젠가 그 사람이 찾아오면 사람들 많은 곳에서 소리 내어 편지를 읽을 거야. 그럼 부끄러워 다시는 그런 짓 못 할 테니까.
그 사람은 점잖은 사람이라고 집사가 알려 준 게 생각나 혼잣말로 그 사람을 협박하곤 했다.
찾아오면 이렇게 해 버릴 거다.
찾아오지 않으면 이렇게 해 버릴 거다.
그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건 그 편지뿐이니 내가 하는 협박도 대부분 편지와 관련한 것이었다.
나는 종종 후회했다. 대체 뭐라고 써 보내는 것일까 궁금해서 서랍 문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늘 읽지 못했다. 소중히 지켜 왔던 이 규칙이 망가지면 정말 그 사람을 영원히 못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루베니오 세이아」
편지 겉면에 적힌 그 사람의 이름만 읽고 또 읽었다. 매번 같은 편지지에 같은 글씨체, 그리고 같은 자리.
―조금씩 다르면 더 재미있잖아. 이건 여기가 다르고 이건 여기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종이의 바램 정도를 제외하곤 지독스레 같았다. 나는 서랍 안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금세 신경질을 냈다.
―……재미없어.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편지들을 날짜순으로 가지런히 놓아두는 손길이 정말 신경질이었을까? 나는 울지 않기 위해 이미 다 정리한 서랍 안을 괜스레 또 휘저었다가 다시 정리하고는 했다.
―주인님, 계속 이러시면 큰 주인님이 걱정하십니다.
어릴 때 집사는 저런 식으로 나를 달랬다. 식사를 거를 때나 날이 찬 날 창문을 열어 놨을 때 항상 같은 말을 들었다.
―그 말도 이제 지겨워. 늘 똑같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은 안 와.
―그건…… 큰 주인님께도 사정이 있으셔서…….
―됐어! 그 사람 얘기는 내 앞에서 꺼내지 말랬잖아!
와장창! 힘없이 던진 베개가 그 사람이 보냈다는 유리 화병을 깨트렸다.
‘아…… 마음에 들었는데.’
이불에 휘감긴 작은 몸뚱이가 바르르 경련했다.
나는 하녀들이 깨진 유리 조각을 다 치워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때까지 이불을 치우지 않았다. 줄줄 흐른 눈물이 베개를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이 우시면 큰 주인님이 슬퍼하세요.
―주인님이 아프면 큰 주인님도 마음이 아프세요.
―주인님이…… 큰 주인님이…….
거짓말. 다 거짓말이었다. 울든 아프든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이렇게 해도 안 오나 싶어 호수에도 뛰어들어 보고 창문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못된 장난도 쳤다. 그래도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내가 좀 더 자랐을 무렵에는 자주 오던 편지도 뜸해졌다.
―흥! 허울뿐인 딸은 이제 잊은 모양이지?
그녀는 기세 좋게 서랍을 열었다.
―이딴 편지! 나도 이제 필요 없어! 다 태워 버릴 거니……까…….
태워 버리려고 한 움큼 집었는데 종이 여기저기에 구김이 가 있었다. 그걸 본 내 얼굴이 서럽고 가엽게 일그러졌다는 걸 그 사람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나는 그 편지들이 다시 반듯해지도록 손으로 몇 번이나 누르고 누르다가 지쳐 책장 앞에서 쓰러졌다.
―아이고! 주인님!
―당장 의원부터 부르게!
나는 주위를 부산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다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어디에도 처음 보는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흐으…… 나 아파…… 아프다고…….
‘왜 안 와……? 나 진짜 죽는데…….’
그 사람은 반짝이는 금발과 나와 똑 닮은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무척 훤칠한 사람이라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실 거라고 집사가 말해 줬다. 그러나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던 그 사람은 언제나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러겠지.’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계속 기다렸을 뿐.
꿈속의 나는 그랬다. 단 한 번, 딱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흐으…… 으으…….”
온통 서럽고 아프기만 한 꿈이었다. 꿈에서도 결국 그 얼굴 한 번 보지 못하였기에.
* * *
꿈은 보통 삼인칭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는 또 다른 나를 ‘나’라고 자각한 채 꿈을 꾸는 게 보통이었다. 이번에 내가 꾼 꿈이 그랬다. 배우가 긴 드라마에 동화한 것처럼 니네이나를 ‘나’라고 또렷하게 인지했다. 젖은 천을 피부로 느끼며 ‘나’와 니네이나가 다시 분리됐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다.
“으…… 축축해.”
잠든 상태로도 편안히 숨 쉬지 못했는지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두운 커튼을 쳐 놔서 밤인지 낮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문 앞에서 하녀 한 명이 졸고 있는 걸 봐서는 밤인 것 같았다.
“아…… 눈 아파…….”
사실 눈이 아픈 게 아니었다. 누가 뇌를 뿌리째 뽑아 간 듯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역시 가장 아픈 건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가슴 한구석이었다. 먹먹하게 젖어 찌릿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장면은 책에서도 본 적 없는데…….”
니네이나 세이아는 결국 여주인공을 위한 조연일 뿐이었다. 메이아와 함께일 때가 아니면 등장하지 않았다. 하물며 니네이나의 어린 시절이라니. 메이아의 메인 스토리에 필요한 루베니오와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서사였다.
‘저 서랍 안에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너무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책장 가장 아래 서랍을 바라봤다. 니네이나가 루베니오의 편지를 어딘가에 처박아 둔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저렇게 가까운 곳에 소중히 보관했다는 건 몰랐다. 그런데 그 편지를 본 순간 이상하게 저기만 보였다. 저기로 달려가야 할 것 같았다.
‘동화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몸에 들어와 이 몸의 기억을 흡수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단순히 몸에 저장된 기억을 보는 느낌이 아니었다. 모든 감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꼭 직접 겪었던 일인 것처럼.
“내가 장자야? 호접지몽이게?”
나는 먼저 말해 놓고 움찔했다. 내가 니네이나의 꿈을 꾼 것인지, 니네이나가 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 이 몸에서 깨어난 이후로 니네이나와 나의 인격을 단 한 번도 동일시해 보지 못했던 나는 처음으로 이 상황이 의심스러워졌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하여서.
“음?”
그때, 문 앞에서 졸고 있던 하녀가 뒤척거렸다. 졸려서 오락가락하는 것인지 ‘저게 누구냐’라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하녀는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헛! 주, 주인님!”
손등으로 입가를 슥 닦은 하녀가 도도도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세상에! 눈이 왜 이러세요?”
“자고 일어났더니 이래.”
자면서 칭얼칭얼 펑펑 운 탓이었지만 울었다는 걸 말하기가 부끄러워 모른 척했다.
“차가운 걸로 좀 식혀야겠는데…… 그랬다가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쩌죠? 집사님이랑 상의해 봐야겠어요.”
하녀는 현실적인 고민을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눈가가 조금 붉어진 걸로 야단을 떠는 게 부끄러워 고개를 저었다.
“두면 나아.”
“그래도…… 얼음 말고 찬 수건이라도 가져올게요.”
“그것보다는 커튼 좀 열어 줄래? 답답해서.”
일어났을 때부터 기분이 무척 저조했다. 우울하고 슬펐다. 아파 짜증이 난 것은 아니었다. 젖은 솜이 가슴 위에 얹혀 먹먹히 누르는 듯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높은 산 위에 오른 듯 공기가 희박해져 숨이 거칠어지고 귀에는 이명 소리가 들렸다.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머리를 손으로 꾹꾹 짚으며 한숨을 참았다.
‘이 몸뚱이가 또…… 고민도 하지 말라는 거야?’
숨이 막혀 너무나 괴로웠다. 산소를 더 깊이 빨아들이려 입을 벌리고 색색거렸지만 답답한 가슴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 단순한 꿈이겠지. 몸이 기억하는 거야. 내가 아니라.’
그만 타협하자는 듯 단순히 인정해 버렸다. 그 순간, 초록빛이 어른거리더니 가슴이 생동감으로 부풀었다. 봄의 햇살을 흠뻑 맞는 나비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나지, 뭐긴 뭐야?’
그러나 이내 술렁거리던 가슴이 잠잠해졌다. 제삼자가 개입한 것처럼 혼란은 빠르게 사라졌다.
“후우…….”
나는 순식간에 맑게 갠 머릿속을 의심하지 못하고 진한 허탈감에 늘어졌다. 아까 숨을 제대로 못 쉰 후유증 때문인지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파르르 경련하는 손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저 책장 아래 서랍을 바라봤다. 저 서랍 안 어딘가에 어제 도착한 루베니오의 편지가 있을 터였다.
‘읽어 보긴 해야겠는데.’
그의 편지를 생각하기 무섭게 눈물이 찔끔 흘렀다. 부어 있던 눈가에 물기가 맺히자 따가웠다. 소매를 당겨 눈가를 툭툭 닦아 내며 창문 밖을 바라봤다. 밤인 줄 알았는데 보이는 풍경은 새벽이었다. 동터 오는 붉은 해가 뜨거웠다.
“주인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배고파.”
“백작님이 나가신 지 꽤 되었으니 곧 돌아오실 텐데…… 많이 시장하세요?”
가이사가 안 보이는 건 내 보양식을 구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지금도 먹고 나중에도 먹으면 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좋다는 온갖 약재를 들이부으며 간신히 되찾은 소화 능력이지만 아직 위도 쪼끄맣고 소화력도 좋지 않아 아기들처럼 여러 번 나눠 먹는 게 좋았다.
“그럼요. 주인님은 다 드실 수 있으세요. 그렇게 준비할게요.”
하녀는 다정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기를 대하는 것 같은 온유한 시선이 영 떨떠름했지만 지적하진 않았다.
“아! 나 식사 다 하면 메이어를 내 방으로 보내 줘.”
“네.”
하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 방을 나갔다.
* * *
이 세계는 목검으로 바위를 베어 내는 강자가 득실거렸다. 현대에선 그 누구도 하기 힘들 일이었다. 이런 차이가 벌어지는 건 각 차원에 속한 인간의 능력치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현대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검기를 일으키거나 마법을 쓰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회복력도 빨랐다. 겉이 살짝 찢어진 상처는 하루 만에 나았고 부러진 뼈는 느려도 일주일 안이면 붙는단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도 이 몸은 개복치인데 이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개미의 더듬이 정도도 안 될 나약함일 터였다.
“주인님,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내려왔습니다!”
그러니 지금 저렇게 메이아가 안절부절못하고 나를 지켜보는 것도 당연했다. 메이아는 내가 준 시계의 모래가 아래로 다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외쳤지만 나는 더 하고 싶었다.
“한 번 더 돌려.”
“주인님!”
메이아가 제발 그만하라는 애원을 담아 울먹거렸다.
나는 지금 ‘혼자 가만히 서 있기 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몸이 이리저리 흔들릴 정도로 다리가 형편없이 떨려 보는 사람은 위태롭겠지만 나름 괜찮은 상태였다.
“네가 안 돌리면 내가…… 버텨야 하는 시간이…… 길어질 뿐이야.”
“흐윽…….”
메이아는 그 즉시 모래시계를 허겁지겁 돌렸다. 손에 땀이 좀 났는지 하마터면 모래시계가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후우.”
다시 침대에 누운 건 그런 식으로 모래시계를 네 번 돌린 후였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1분 정도가 걸린다는 걸 생각하면 나는 무려 4분이나 꼼짝 않고 버틴 것이다. 옆에 놓아뒀던 물을 달게 마시자 좀 살 것 같았다. 운동 후의 진한 허탈감이 기분을 좋게 했다.
“주인님, 정말 괜찮으세요?”
흘긋 고개를 들어 울먹거리는 메이아를 바라봤다. 남장을 하고 있지만 여주인공의 특별함은 숨길 수 없는지 무척 귀여운 얼굴이었다. 책에서는 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초급 마법사로 나와서 가이사의 도움을 받기 일쑤였는데 생활 노동으로 단련한 근육이 군데군데 있어 니네이나가 된 나보다는 수억 배 강해 보였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눈 밑이 깨끗하네.’
하루에 4시간밖에 못 잔다는 게 꽤 가혹한 형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메이아는 멀쩡해 보였다. 물론 겉으로만 티가 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체력이 꽤 좋단 말이지…… 부럽게…….’
메이아의 건강한 피부와 군데군데 붙은 근육이 부러워 죽겠다.
‘잘 훈련하면 쓸 만할 것 같은데. 일단 나에 대한 충성심도 높아 보이고…… 좀 더 시험해 볼까?’
4분 운동하고 침대에 누워 배 이상은 쉬었다. 이제 움직여도 되겠지! 옆에 놓인 종을 찾아 흔들었다. 사람들이 금세 들어왔다.
“정원에 나가고 싶어.”
경악이 물살을 타고 나를 제외한 모두를 뒤덮었다.
“주인님! 전에도 나가셨다가 쓰러지셨잖아요.”
“날씨가 추워서 안 돼요.”
잔소리가 쏟아졌다. 서로 이야기하겠다고 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는데 머리 세 개 달린 지옥의 케르베로스들 같았다.
‘까, 깜짝이야!’
하마터면 그들의 기세에 밀릴 뻔했다.
‘할 수 없지.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건만.’
나는 눈을 싸늘하게 깔고 그들을 노려봤다.
“…….”
신경질 어린 눈빛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팔짱을 척 끼고 - 다리도 꼬려다가 한 번 휘청거려 실패했다 - 고개를 팩 돌렸다.
“저 장미 앞에 천을 깔아 줘. 저 꽃을 바라보며 낮잠을 잘 거야.”
최대한 오만하고 차갑게 명령하자 그들의 눈망울이 울먹울먹 흔들렸다. 살짝만 건드려도 오열을 터트릴 기세였다.
“저, 저희가 주인님의 마음도 모르고…….”
“뭐 해! 당장 안 움직이고!”
최대한 침착하게 다급히 움직이는 그들을 바라봤다. 저 사람들은 내가 새침하고 오만하게 고집을 부리면 다 들어주고는 했다. 꼭 그게 내 마지막 바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말이다.
‘곧 죽을 사람처럼 보니 부담스러워 죽겠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는 게 껄끄럽긴 했지만 효과는 좋았다. 곧 내가 가리킨 장미 덤불 아래에 푹신한 이불이 겹겹이 깔렸고 들것이 준비되어 들어왔다. 그런데 들것이 좀 이상했다.
“이게…… 뭐지?”
“주인님의 권위에 맞는 아름다운 것으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하녀장 사라가 몹시 흐뭇해하며 답했다. 그녀가 우아하게 손바닥을 두 번 짝짝 치자 사라의 양옆에 서 있던 린지와 리아가 연분홍색 꽃잎을 뿌렸다.
파방팡! 날아오른 꽃잎이 공단 리본과 보석들로 장식한 들것을 덮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 켁! 쿨럭!”
아니,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주인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성대가 기침을 토해 내며 내 비명을 죄다 삼켰다.
“주인님!”
“어서 여기에 앉아 쉬셔요!”
‘안 돼! 날 거기로 데려가지 마!’
손발을 부들부들 떨며 반항했으나 내 엉덩이는 아름답게 장식한 들것에 안착했다. 에메랄드로 추정되는 거대한 녹색 보석이 은은히 번쩍였다.
“아. 이건 집사님께서 특별히 내주신 겁니다. 주인님의 들것을 장식하려면 최상급 에메랄드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요.”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그들이 술술 털어놓았다. 이 보석은 무엇이고 이 천은 어디의 특산물이며 장인 몇이 새롭게 만들었다, 줄기차게 설명하는 그들의 말을 흘려들었다. 신경 써 봐야 정신 건강에 해가 될 뿐이었다. 쉴 새 없이 번쩍거리는 보석의 빛을 외면하며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휠체어…… 휠체어가 보고 싶어.’
저것에 실려 얼마나 수치스러웠던가? 그런데 이제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진짜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훌쩍. 서러움에 코가 막혔다.
“주인님, 제가 잡아 드릴 테니 조심해서 천천히 누우세요. 베개를 고정해 놨으니 여기를 베고 누우시면 된답니다.”
“…….”
씨름하다가는 나가지도 못하겠다. 나는 모든 걸 혼자 감내하며 눈을 부릅떴다.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노려보는 눈에 메이아가 당황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하는 얼굴로 내가 지정해 준 방석 위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넌 여기 남아서 저 모래시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지켜봐. 나중에 써먹을 거니까.”
어떤 쓸모없는 명령이라도 주인의 명령이기에 들을 것인가? 그동안 써 왔던 작은 모래시계의 100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모래시계를 뒤이어 가리켰다. 몸이 좀 건강해지면 저걸 쓰겠다고 벌써부터 준비해 둔 것이었다.
메이아를 포함한 하녀들이 울컥한 얼굴을 했다. 그들은 눈으로 나의 크고도 찬란하며 담대하기까지 한 꿈을 응원했다.
“네! 제가 잘 지켜볼게요!”
메이아가 맡겨만 달라는 듯 씩씩하게 대답했다. 메이아의 눈이 투지에 불타올랐다.
“…….”
그렇게 위대한 꿈처럼 보지 말라고!
기분이 썼다. 나는 메이아에게 두꺼운 방석을 빌려줬다. 잠이 솔솔 오도록 부드러운 러그를 딸려 보내기도 했다. 내가 없는 새 저기서 자든 말든 상관없었다. 편히 쉰다면 어려울 때 도운 주인의 호의를 감사하게 여길 것이고 버틴다면 내가 또 다른 길을 열어 줄지도 몰랐다.
‘그런데 쟤는 몇 시간이 되도록 저렇게 있을 것 같긴 해. 무릎 나가는 건 아니겠지? 얼마 만에 돌아와야 하려나?’
나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리다가 새침하게 덧붙였다.
“모래시계가 부담스러워할 테니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지는 말고.”
“……아.”
아무래도 메이아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메이아는 인형을 아기라고 부르며 안고 다니는 어린 동생을 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순수함을 지켜 주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그러게 주인님께 강아지 한 마리 키우시게 하자고 했잖아요.”
“맞아요! 주인님이 안 그런 척하면서 작고 아장아장한 애들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요?”
“기억 안 나? 털 때문에 안 됐던 거잖아!”
그건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인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싸워 댔다.
“…….”
잘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분위기는 간파했다. 수치심에 뺨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자연이 살아 있다고 믿는 어린애가 된 것 같아 민망했다.
“그럴게요.”
맑은 눈동자가 그녀를 다정히 바라보며 포근하게 접혔다. 해처럼 밝은 얼굴. 원작에서 그녀는 종종 태양에 비교되고는 했다.
니네이나가 얼음에 삼켜진 바스러진 이파리라면 메이아는 죽은 잎도 싱그럽게 할 태양이었다. 해맑고 정다운 눈빛은 냉정하게 선을 긋는 나를 오로지 지고지순하게 바라봤다. 그 끈질긴 정(情)이 애달파서 원작의 니네이나가 왜 결국 메이아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고 말았다. 무해해서 소름이 오싹하게 돋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먼저 피해 버렸다.
* * *
내가 정원을 찾은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메이아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고 하나는 루베니오의 편지를 읽어 보기 위함이었다.
“혼자 있을 거야. 주위가 부산하면 낮잠을 잘 수 없으니까.”
볕 아래에 홀로 남아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며 루베니오의 편지를 꺼냈다.
“…….”
편지를 보는 순간 마음속 한구석이 아릿하게 떨리며 눈동자가 시큰해졌다. 햇볕을 쬐면 기분이 좋아 슬픔이 덜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루베니오 세이아’라는 이름이 감정의 키워드가 된 것처럼 울컥 솟아났다.
“그만큼 루베니오가 니네이나에게 중요했다는 뜻일까?”
겨우 그의 손길 한 번 닿은 게 다일 이깟 편지 하나에도 몸서리칠 만큼 강렬한 슬픔이 몰려들었다.
언젠가는 꼭 읽어 봐야 할 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편지를 뒤집었다. 편지 위에 찍힌 밀랍을 막 떼어 내려 할 때였다.
“주인님!”
집사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뛰어오는 게 보였다. 집사의 뒤를 따라오던 기사 몇이 순식간에 집사를 앞지르며 검을 뽑는 것도 보였다.
스릉!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으면 생각하기에 앞서 정령의 이름을 부르셔야 합니다. 약간의 망설임이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니까요.
어느 날 들었던 가이사의 충고가 머릿속에 번개처럼 꽂혔다. 반사적으로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소나!”
탕!
무언가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으나 소나의 실드에 부딪쳐 떨어진 건 아니었다. 새까만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연달아 날아오른 비수를 가볍게 붙잡았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가이사가 소나의 실드보다 먼저 나를 지킨 것이었다.
“헉!”
나도 모르게 혀를 깨물었다. 소나 소환의 의미가 없어졌다. 이로서 그는 또 표식을 심어야 하는데 말이다. 접촉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가이사가 화난 얼굴을 하거나 역겨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볼 줄 알았다.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묵직한 주머니를 내 발아래에 내려놓으며 무심히 살폈다.
그의 시선이 짤막하게 나를 스쳤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열망 어린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분노나 역겨움은 없었다.
처음 보는 과일이 그가 던져 놓은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뒹굴 굴렀다.
‘과일? 복숭아처럼 생겼는데?’
팔을 뻗어 도망가는 과일을 붙잡았다.
“으아아악!”
그 순간 비명 소리가 무참히 울렸다. 그러나 내가 고개를 드는 동시에 사라졌다.
‘어미 새?’
어디서 난 건지 모를 밧줄로 언제 잡은 건지 모를 암살자를 꽁꽁 묶어 밧줄 도롱이로 만드는 그를 보니 그것이 생각이 났다. 그가 알았다면 쓸데없다며 침묵으로 일관했을 시답잖은 생각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천적으로부터의 보호와 먹잇감 사냥을 모두 훌륭히 해내는 어미 새 같다고. 그렇다면 나는 그가 지키는 거대한 둥지 안에 서식하는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그 둥지를 만든 건…….’
아직 읽지 못한 편지가 손에서 바스락거렸다. 자결하지 못하도록 암살자를 단단히 묶어 놓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또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보는 그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그는 암살자를 휙 밀어 집사의 품에 떠넘겨 버렸다.
“으억!”
중년의 집사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꽁꽁 묶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암살자를 수습했다.
“끌고 가서 가둬. 심문은 내가 직접 할 테니.”
집사는 내 호위에 관련한 것이라면 가이사의 말에 따르라는 명령을 루베니오에게 받은 바가 있다고 했다. 집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났다.
“예.”
가이사가 나타나면 사용인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집사를 따라가려 했다.
“잠깐.”
그는 마지막으로 떠나려는 어린 하녀 하나를 불러 세웠다.
“필요한 게 있으세요?”
“접시와 포크.”
어린 하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이사와 그가 가져온 과일을 번갈아 봤다. 이윽고 순진한 눈이 별처럼 거세게 반짝였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입술에 힘을 준 하녀는 고개만 꾸벅 숙이고 선배 하녀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어린 하녀가 뭐라고 말하자 선배 하녀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가이사는 그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내게 다가갔다.
‘심문…….’
심장이 아직도 쿵쿵거렸다. 방금 전의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심문이라니. 고문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인간을?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적’에게 잡힌다면 같은 일을 당하겠지. 정신을 차리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생각하지 마.’
파리하게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해를 못 보는 사람은 우울하대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냥 넘기면 될 텐데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봤다. 투명한 막에 그가 비쳐 들었다.
“한겨울의 나뭇가지 같습니다.”
그는 불쑥 말했다.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특유의 시적 표현이 우스웠다.
“잎을 잃은 나무에 눈이 소복이 쌓이면 꽤 예쁘겠죠?”
아무 말이나 했다. 의식적으로 주의를 돌리자 쿵쾅거리는 심장이 잠잠해졌다. 그는 평소처럼 무시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예.”
그게 다였다. 그러나 예쁘냐는 물음에 동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피식. 어이없게도 기분이 풀렸다.
“종종 여기서 낮잠을 자야겠어요!”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
갑작스러운 행동에 바짝 다가왔던 가이사가 눈을 크게 뜨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혹시 닿기라도 할까 봐 허겁지겁 물러나는 것이 겁먹은 초식 동물 같았다.
“놀랐어요?”
장난꾸러기처럼 짓궂게 웃었다. 가이사가 당연한 수순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는 화도 못 냈다. 내가 곧장 뒷목을 쥐고 끙끙거렸기 때문이다.
“으으…… 그런데, 저 목에 담 온 것 같아요.”
“……반응이 참 느리십니다.”
그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도 살펴보려는 듯 내 머리칼을 들어 한쪽으로 넘겼다.
“이제 머리카락은 괜찮아요?”
“장갑 끼고 있습니다.”
그는 차가운 어조로 말하며 그에겐 한 줌밖에 안 될 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피부가 하얘서 장갑 자국이 까맣게 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그의 진지함이 웃겨서 웃음이 까르르 터졌다.
“이제 물감을 끼얹은 것처럼 발갛습니다.”
뭐지? 별다른 의도는 없어 보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만지겠습니다.”
아. 저놈의 화법이 문제였다. 주무르다. 안마하다. 살피다. 다른 동사도 많은데 만지겠다가 뭐야?
“부러질지도…….”
그때 뭉친 근육에 막 힘을 가하려던 그가 멈칫하곤 중얼거렸다.
“부, 부러져요?”
“약하게 해 보겠습니다.”
“잠깐! 안 돼요! 목이 부러지면 죽는다고!”
그는 내 반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혈 자리를 살짝 눌렀다. 가이사의 손에 목이 잡혀 마음껏 발버둥 치지도 못했다. 깽깽거리는 새끼 동물처럼 낑낑거리니 피식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지금 나 비웃었지! 목이 붙잡혀서 전처럼 소리칠 수가 없었다.
“어미가 목을 물고 이동시킬 때 얌전히 늘어져 삐약삐약 우는 어린것들 같습니다.”
시비다! 분명 시비 걸고 있어! 목을 만지게 했다고 삐뚤어진 게 틀림없잖아!
“사, 살살 해 줘요…….”
그러나 나는 겁을 한껏 먹은 상태였다. 내 비굴한 속삭임에 그의 손짓이 더 약해졌다.
“쥐었다는 느낌도 안 납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내가 긴장해서 그렇지 그가 세게 붙잡은 건 결코 아니었다. 힘이 들어간 어깨를 풀자 그의 손이 부드럽게 내 목을 주물렀다.
“으음…….”
경계심으로 삐죽 솟아 있던 눈꼬리가 나른하게 내려왔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가죽 장갑이 우그러지며 소리를 냈는데 나는 그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왜 괜히 겁 줘요? 잘하시는데.”
“처음입니다만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처음? 능숙하신데요?”
“비슷한 일이라면 자주 해 본 적 있습니다.”
“비슷한 일?”
“좀 더 힘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이, 이를테면?”
짐승의 목을 꺾어 버리는 일 같은 거?
“…….”
아. 이 남자가 또 오싹한 침묵을 택했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기껏 한쪽으로 모아 놓은 머리칼이 아래로 스르르 떨어졌다.
“가만히 계세요.”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나와 거리를 뒀다.
스윽. 스윽. 안마가 꽤 시원해서 기분이 풀렸다. 나는 곧 다른 것으로 관심을 돌렸다.
“실드가 쳐 있는데 가이사는 어떻게 들어와요?”
“저와 계약한 정령이 저를 거부하지 않는 건 당연합니다.”
“아하.”
나는 손을 살짝 뻗었다. 새를 키우는 친구가 이런 식으로 부르는 걸 봤기 때문이다.
‘새가 아니라 정령인데…… 실례인가?’
살짝 걱정했지만 소나는 내 행동이 기분 나쁘지 않은 듯 포르르 내려와 손가락 위에 앉았다.
“깃털이 내려앉은 것 같아요.”
“실체화했다고 무게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그는 시큰둥하게 말하며 내 목을 놔줬다.
“과연 요정님…….”
“정령입니다.”
그는 정정해 줬지만 그의 목소리는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흘러나갔다.
“귀여워! 너무 깜찍해!”
그는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고 나를 그냥 놔두었다. 무시보다는 방치라는 느낌이었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쩜 이렇게 완벽한 생물이 있을 수 있을까?”
귀엽고 예쁜 건 참 좋았다.
* * *
가이사의 시선이 아득한 먼 곳을 향했다.
니네이나는 소나를 조심히 붙잡고 뺨을 비비적거리며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종소리처럼 낭랑한 음색이 묘한 파동처럼 번져 와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가이사, 이 애는 소나라고 해.
아버지의 정령을 넘겨받았던 순간이다. 그가 죽어 가던 순간이다. 그 끔찍한 기억을 환히 웃는 그녀의 얼굴이 덮었다. 주홍을 잃은 백열의 태양. 가이사는 그녀를 그렇게 생각했다. 시리도록 희게 빛나서 창백한 건지 반짝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 알겠다. 그녀는 눈보라 같았다. 눈보라처럼 새하얗게 쏟아지는 존재였다. 가이사는 다시 정의한 사실이 꺼림칙했다. 그녀의 목을 주무르느라 생긴 마찰열이 손바닥을 뜨겁게 달궜다.
“…….”
체온. 그 증오스럽고 끔찍한 것들. 그는 남은 흔적을 바스러트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처음 느껴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니네이나에게서 느끼는 생의 열망이 그랬다. 저렇게 하찮고 나약한 생명력으로 살고자 하며 생의 의지를 피력하는 게 두려웠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트릴 영원불멸의 무한한 존재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곧 죽을 저 여자에게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는 햇볕을 다이아몬드 조각처럼 모아 놓은 호수 같았다. 깊고 푸르러 사정을 두지 않고 그를 적시려 했다.
─이왕 사는 거 아름다운 걸 눈에 가득 담고 돌아오도록 해. 다시 만나는 날 무엇이 가장 아름다웠냐고 물어볼 테니.
가이사는 죽어 돌아가는 날 레어노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찾아다녔다. 아버지의 목숨을 대가로 살아남았기에, 태어나서 유일하게 따뜻했던 그가 곁에 없었다. 혼자서는 레어노스가 그토록 바랐던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를 죽이면서까지 나는 왜 살아가야 하는가?’
그는 끊임없이 삶을 고민했다.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생의 불꽃을 태우는 여자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저 따위 몸으로 어떻게 저런 눈을 할까?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햇볕이 들지 않는 차가운 지하에서 죽어 가던 어린 가이사는 오로지 죽음만 생각했다. 레어노스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던 날도 그랬다.
─당연히 살고 싶죠! 오래오래 건강하게!
가이사는 니네이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삶에서 무엇을 찾아내야 당신처럼 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살아왔으나 그런 걸 가져 보지는 못했다. 레어노스는 버팀목이었으나 삶의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그의 유언이 있으니 살았을 뿐이다. 살고자 하는 열망은 가지지 못했다.
‘혹시 당신은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가이사는 얼마 전 니네이나에게서 아버지의 마력을 보았다. 오늘은 그것을 꼭 물어보고 싶었다.
“접시랑 포크 가져왔어요!”
인간. 인간. 인간. 인간!
시상이 깨지고 그는 다시 끔찍한 현실에 내던져졌다.
* * *
“어?”
어린 하녀가 헐레벌떡 뛰어와 그에게 피크닉 바구니 하나를 건네주는 게 보였다.
“감사합니다!”
가이사가 그걸 받자 두 주먹을 한 번 꽉 쥔 하녀는 다시 쫑쫑 뛰어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바구니를 든 채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게 뭐예요?”
바구니 틈으로 알록달록한 동그라미가 보였다.
“마카롱!”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나도 줘! 나도 줘!
“……알겠으니 그만 삐약거리세요. 정신 사납습니다.”
“삐, 삐약이라고요?”
그는 내 손바닥 위에 가지고 있던 걸 툭 떨어트려 주었다. 묵직한 무게에 손이 아래로 살짝 떨어졌다.
“이게 뭐예요? 너무 무거운데…….”
“도자기로 만든 모형입니다.”
“…….”
눈동자가 절로 싸늘해졌다. 왜 먹을 걸로 장난쳐!
나는 아직 마카롱 같은 음식은 먹지 못하고 있었다. 수프 같은 소화가 잘되는 음식만 허락됐기 때문이다. 좀 더 적응하면 달콤한 간식거리들이 허락될지 모르나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달라고 한 걸 드렸는데 왜 그러십니까?”
그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마카롱 같은 위대한 디저트를 모르다니 불쌍한 사람 같으니!
“먹을 것인 줄 알았어요.”
“다른 걸 드리겠습니다.”
“다른…… 헉!”
그는 큰 손과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연분홍빛 접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다.
“소나.”
내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정령이 뽀르르 날아갔다.
그는 바닥에 놓은 주머니를 뒤져 안에서 나온 과일을 휙 던졌다. 정령과 계약자 사이에는 때론 말이 필요 없었다.
소나의 눈동자가 매섭게 반짝였다.
쇄애액! 바람이 불더니 소나의 두 팔이 낫 모양으로 바뀌었다.
투둑. 툭! 가이사가 든 접시 위에 소나가 조각낸 과일이 반듯이 놓였다.
소나는 팔을 원래대로 바꾸며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와…….”
나는 나도 모르게 손뼉을 짝짝 치며 환호했다.
파다닥. 파닥. 파다다닥. 정령의 날갯짓 소리가 빨라졌다.
내게 칭찬받은 소나가 고개를 슬쩍 들어 기대에 찬 얼굴로 가이사를 바라봤다.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것 같았다.
“돌아가.”
차가운 말에 소나의 눈이 울먹울먹 흔들리더니 고개가 팩 돌아갔다. 정령의 몸은 투명해져 녹아내리며 사라졌다.
‘어떡해! 삐쳤나 봐! 그런데 너무 귀엽다…….’
심장을 폭격하는 귀여움에 손발이 떨려 이불을 가득 움켜쥐어야 했다.
“무른 과일이라 괜찮을 겁니다.”
그는 토끼 모양 포크 손잡이를 내게 돌려주며 말했다. 딱딱한 얼굴과 앙증맞은 토끼 모양 포크가 지독스럽게 어울리지 않았다.
‘왠지 서둘러 가져와야 할 것만 같아.’
손을 뻗어 냉큼 포크를 받았다. 그는 소나가 먹기 좋게 자른 과일이 담긴 접시를 내 앞에 놔줬다.
“이거 오늘 치예요?”
“…….”
“이건 평범하니까 그냥 말해 줘요. 막 내장이나 그런 건 아니잖아요.”
“…….”
그는 니네이나의 설득에도 그게 뭔지 알려 주지 않았다.
“생긴 게 복숭아 같기도 하고…… 평범한 과일 맞죠?”
“몸에 좋은 겁니다.”
“……그래요. 몸에 좋으면 됐죠.”
더 물어보지 않고 천천히 과일을 씹었다. 앞니로 살짝 눌러도 곧바로 뭉크러졌다.
‘맛있어!’
엄청 달콤했다. 오랜만에 먹는 단맛에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한 번에 많이 넣고 대충 삼키면 안 좋으니까 이로 아주 작게 잘라 먹었다. 오물오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씹는데 옆에서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내 입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이사도 먹고 싶어요?”
너무 야박하게 나만 먹었나 싶어서 살짝 민망했다. 먹던 걸 꿀꺽 삼키고 다시 물었다.
“포크로 먹어서 깨끗한데 하나 먹을래요?”
“……많이 드세요.”
뭐지? 그는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초조함을 느끼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쪽저쪽 굴러가던 눈동자가 내 손 위에 고정됐다.
“그 편지, 계속 쥐고만 있을 겁니까?”
“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손은 루베니오의 편지를 우그러트리고 있었다. 포크가 힘없이 떨어졌다.
“다 먹고 읽으려고요.”
다시 과일을 해치우는 데 전념했다.
가이사의 손끝이 장갑 안에서 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장갑을 끼지 않았다면 그의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을지도 몰랐다.
“아까부터 이상하네요. 왜 그래요?”
그는 햇살을 맞으며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기억이…….”
“네?”
“아니요. 얼른 드세요.”
뭔가 이상한데 다 먹기 전에는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더 씹은 뒤 포크를 내려놓자 어둡고 칙칙하던 가이사의 얼굴에 빛이 번졌다.
어후! 눈부셔! 봄볕 같은 생기의 가이사라니 적응이 안 됐다. 손으로 그 얼굴을 살짝 가렸는데 그는 접시를 휙 치우고 성큼 다가왔다.
“맛있게 드셨습니까?”
“……?”
내 기억상 그가 이런 걸 물은 건 처음이었다.
“네. 맛있었어요.”
“다행입니다.”
“……?”
“고심해서 고른 겁니다.”
그는 건조한 어조로 생색냈다.
‘뭐지?’
평소와 몹시 다른 그의 행동에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이런 비유가 맞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꼭 구애하는 짐승 같았다. 맛있는 먹이를 내려놓고 원하는 대답을 기다리는 짐승 말이다.
“뭐…… 원하시는 거 있으세요?”
떠오르는 생각에 당황하며 물었다. 그가 그럴 리 없는데, 하면서도 생각해 낸 비유가 딱 맞아 보였다.
“그럼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
가이사가 눈을 번뜩 빛내며 말했다. 시선에 힘이 있다면 이미 나를 뚫고 갈기갈기 찢고도 남았을 것이다.
“……무슨 질문인데 그래요?”
매우 부담스러웠다. 그가 팔을 앞쪽으로 놓으며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레어노스를 알고 있습니까?”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키스 직전의 연인처럼.
코앞에서 보이는 가이사의 얼굴에 살짝 긴장했다. 낯선 사람끼리 마땅히 지켜야 할 거리를 무시한 그가 훅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예고도 없는 침범에 가슴이 조금 떨렸다. 공포든 무엇이든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새까만 속눈썹이 애절하게 떨리며 간청했다. 어서 대답해 달라고.
“……일단 좀 떨어지죠. 말하다가 입술이 닿을 것 같네요.”
나는 엉덩이를 뒤로 꿈실꿈실 물리며 말했다.
“아…….”
그런데 가이사의 행동이 석연치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역겨워 죽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화다닥 피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괴이한 거리를 유지하며 졸졸 쫓아왔다. 내 말을 뒤늦게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레어노스’라는 존재가 가이사에게 매우 중요한 모양이었다.
“그 이름은 들어 본 적 없어요.”
그러나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다. 고심해 봤지만 레어노스라는 이름은 정말 처음 들어 봤다.
“그렇습니까?”
다시 죽은 눈으로 돌아간 그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특징은 없어요? 이름만 듣고서는 모르겠는데요.”
책 속 등장인물의 이름 전부를 기억할 순 없었지만 특징을 포함한다면 범위가 넓어질 수는 있었다. 그가 굳이 묻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고 되도록 알아봐 주고 싶었다.
“특징…… 매우 아름답습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름답다고요?”
“네.”
가이사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객관적인 기준 맞죠?”
“예. 누구나 한 번 보면 뒤돌아볼 정도입니다. 무척 눈에 띄는 분입니다.”
“성별은요?”
“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있다고?’
무심코 나갈 뻔했던 실례되는 말을 삼켰다. 누구나 당연히 아버지는 있었다. 그건 인간 같지 않은 가이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의외였던 건 가이사가 아버지를 소중히 생각하는 얼굴을 했기 때문이었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에게 사랑받은 사람이 절망에 집어삼켜진 눈을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과 닮았나요?”
가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자 관계라면 당연히 물을 수 있는 부분인데 그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노기와 혐오마저 스쳤다.
그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안 닮았습니다. 그분은 제 양아버지입니다.”
“아…….”
“눈동자와 머리칼은 모두 녹색이고 굉장히 자애로운 분입니다.”
“그래요…… 당신 말처럼 안 닮았네요.”
‘특히 자애롭다는 부분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맞장구치며 나를 따라 했다.
이것 역시 놀라운 반응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알았냐는 듯 약간의 치기까지 어린 눈동자였다. 가이사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반응이 좀 이상하지 않아?’
아버지가 무척 아름답다고 찬양하지만 아버지가 저와 닮았다는 건 인정하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만큼 자기 자신을 혐오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버지의 존재에 빗대지 못하는 것이다.
‘……바보잖아. 아버지는 자애롭다면서? 퍽이나 좋아하겠다.’
간단한 추론에 마음이 어두워졌다.
“……나이는요?”
“동안이라 나이는 중요치 않습니다. 어려 보입니다.”
“정확히 얼마나요?”
“무척.”
“…….”
정리하자면 레어노스라는 남자는 녹색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무척 어려 보이고 아름다운 가이사의 양아버지라는 것이다.
‘……이런 걸로 어떻게 찾아!’
그가 말해 준 객관적인 정보는 머리칼과 눈동자에 대한 것이 다였다. 그러나 그를 채근할 수도 없었다. 친부가 아닌 양아버지이기에 그가 정보를 모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사정은 잘 모르나 그의 어떤 상처도 섣불리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딱 봐도 진물로 뒤범벅되어 있을 그의 과거사를 신경 쓸 여유가 내게는 없었다.
“으음…….”
받은 정보를 토대로 머리를 굴렸다.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가이사의 과거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 안 나십니까? 저한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제발 알고 있다고 말해 달라는 가이사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생각했지만 답이 안 나왔다. 모른다는 건 잘못이 아니었다. 단지 가이사의 체념이 될 뿐이었다.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가이사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이 말이 진실임을 깨달은 것이다.
“……미안해요.”
살짝 망설이다가 말했다. 원래의 니네이나라면 알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기 때문이다. 내 사과가 의외였는지 그의 눈동자가 아주 짧게 흔들렸다. 그리고 잠잠해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닙니다.”
“네?”
그의 입꼬리가 당겼다. 슬퍼 흐려진 미소였다.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에서는 슬픔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이사는 혼자 슬퍼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처럼.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더는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을 것이고 또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무어라 위로를 건넨다고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가이사에게 나는 지극히 타인이었다. 그는 그의 얄팍한 세계에 이방인을 결코 들여보내지 않을 터였다.
나는 뭐라고 말을 거는 걸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다.
‘편지…….’
내게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가이사의 ‘아버지’라는 말에 자극을 받은 건지 편지 봉투에서 편지가 흘러나왔다. 저지른 뒤 놀라서 허겁지겁 다시 넣으려고 했으나 편지는 아래로 툭 떨어져 벌어졌다. 더 이상 보지 않으려 했지만 짧은 편지는 순식간에 읽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아가, 잘 지내니? 밥은 잘 먹고, 더 아픈 곳은 없니? 네가 많이 보고 싶구나. 미안하다.」
여러 번 눌러쓰고 머뭇거려서 진하게 번진 잉크가 군데군데 보였다.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하고 싶은 말만 줄줄 늘어놓은 편지였다. 공작가의 후계자가 쓸 편지는 결단코 아니었다. 이건 루베니오에게 이 편지가 매우 어려운 것이었음을 뜻했다. 뭐라고 적어야 할지,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수백 번 망설인 감정이 점점이 흐른 잉크에 녹아 있었다. 루베니오는 겨우 저 몇 마디를 쓰기 위해서 흑색 잉크에 수천 번 마음을 찍었을 것이다.
‘이게 뭐라고…….’
꿈에서 보고 느꼈던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격동했다. 그 형편없는 편지를 비웃어 주고 싶었다. 우아하고 정숙한 사람이라던 루베니오가 딸아이에게는 겨우 이런 거나 보낸다고 소리쳐 알려 주고 싶었다. 미친 사람처럼 울며 아주 크게 외치고 싶었다. 이 비웃음이 그에게 닿도록 말이다. 왜인지 자꾸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눈가를 적신 눈물이 바닷물이 되어 차오를 때를 기다리듯 쉴 새 없이 주르륵거렸다. 형편없기는 지금의 내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말해 주고 싶었다. 똑같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자고.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 사람을…….’
그때, 두꺼운 망치가 머리를 쾅 내려치는 느낌을 받았다.
“악!”
찰나의 비명에 가이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쿵!’ 하고 울리는 감각에 머리가 쪼개져 뇌수가 흐를 듯했다. 나는 벌린 입술을 다물지도 못하고 옆으로 휘청거렸다.
“흐…… 아……!”
벌어진 입술에서는 가냘픈 숨결만 흐를 뿐 신음도 제대로 뱉지 못했다.
* * *
“…….”
그때의 가이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정물처럼 앉아 있고 싶었다. 푸른 하늘, 밝은 태양, 흔들리는 잎사귀, 나무 아래 진 그림자, 지저귀는 새. 그분이 보라고 한 그것들을 가만히 눈에 담는 것만이 그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몇 번을 봐도 결국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그분이 대신 보아 달라고 부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니네이나가 계속 그를 움직이게 했다. 가이사는 가만히 있기를 바라는데 그녀가 그를 채근했다. 어서 달려와 도우라고. 그럼 가이사는 또 지극한 고독을 깨고 달려가 쓰러지는 니네이나를 품에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의 아버지가 부탁한 또 다른 할 일이었다.
“괜찮으십…….”
두근. 두근. 심장이 짧게 박동했다. 이상을 감지한 가이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통으로 찡그린 얼굴 위로 따스한 녹색 마나가 맴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레어노스의 것이었다.
마나는 아이에게 해롭지 않은 장난만 치는 요정처럼 아주 짧은 순간 그의 눈에 깃들었다가 다시 니네이나의 안으로 사라졌다.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처럼 얄궂었다.
“……음?”
니네이나는 금세 눈을 떴다. 말간 눈동자였다. 머리는 맑아졌고 감정은 정리가 됐다는 듯. 니네이나는 입가를 살짝 닦은 후 눈가도 닦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톡톡.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너무 차가워 눈송이 같았지만 니네이나는 이상을 감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반응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그의 눈에는 모든 게 이상했다. 조잡하게 꾸며 놓은 상황을 오로지 그녀 혼자만 눈치채지 못했다. 그 상황 자체가 머릿속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처럼.
“내가 왜 울었지?”
그녀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혼잣말하며 편지를 다시 내려다봤다. 멍한 시선이 짧게 흔들리다가 고요히 파묻혔다.
그는 그것이 평화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보호 마법의 존재 이유. 그것에 생각이 미친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그는 다급히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
“지금……”
“네?”
“지금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생각이요?”
가이사는 순진하게 되묻는 니네이나를 보며 입 안쪽 살을 무참히 깨물었다. 스스로 해를 입히지 않으면 그녀의 어깨를 부러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니네이나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날갯짓이 지독하게 느렸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가이사는 니네이나의 어깨를 살짝 붙잡았던 손을 떼어 내 바닥에 고정했다. 바닥에 깔린 천이 쥐어뜯겨 우그러진 후 너덜거릴 때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니네이나는 절박하게 움켜쥔 가이사의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한참 뒤 니네이나가 말했다.
“……슬프다는 생각이었나?”
“슬픔? 이유가 뭡니까?”
“이 편지를 봐서 그런 게 아닐까요?”
니네이나가 편지 안은 보지 않고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가이사는 번뜩 깨달았다. 저번 상황 역시 같았다는 걸.
니네이나가 루베니오의 편지를 볼 때 레어노스의 마나가 반응했다. 그것은 레어노스의 보호 마법이 감추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뭔가 이상한 걸 느끼지는 않았습니까? 아주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다거나 생각하지 못한 게 떠오른 것 같다거나…… 작은 위화감이라도 좋습니다.”
“음…… 슬펐는데 안 슬픈 것 같다는 걸까요? 어? 그런데 왜 모르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니네이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감정이 일시에 소거됐는데 그 사실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심각함을 느끼지 못한 얼굴이었다.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군요.”
“저 어디 안 좋아요?”
제 몸은 살뜰히 챙기는 니네이나가 금세 표정을 굳히고 물어왔다.
“머리에 잠깐 손을 대어도 됩니까?”
“그러세요.”
니네이나는 가이사를 경계하지 않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는 맨손으로 아주 천천히 접근했다. 깊이 들어가지 않고 경계부만 훑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이사가 니네이나의 머리에 접근하기도 전에 레어노스의 마나가 불쑥 치솟아 위협을 가했다. 파지직! 밀밀한 녹색 불꽃이 그의 손바닥을 태웠다.
가이사는 살짝 붉어진 손가락을 보며 급히 니네이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괴로웠습니까?”
“전혀요.”
니네이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보호 마법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고통을 느끼기 전에 과민 반응하며 통제한 것이었다.
가이사는 이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며 으르렁거리는 레어노스의 마나를 바라보다가 포기했다. 포기하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그에게도 아직 남은 게 있으니까.
“당신뿐이군요.”
“네?”
가이사가 니네이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내 아버지의 흔적.’
발견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니네이나는 지상에 남은 단 하나뿐인 것이었다. 마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설령 지금의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는 분명 레어노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레어노스의 흔적은 삶에 아무 목적이 없던 그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제공했다. 그 사실은 가이사에게 더없이 중요했다.
“더 드세요.”
가이사가 다정한 미소를 걸친 채 니네이나에게 천혜의 과일 하나를 내밀었다.
니네이나가 떨리는 눈으로 가이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미쳤어요?”
그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소름 돋은 팔을 북북 문질렀다.
니네이나의 반응에 그의 얼굴이 지독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무심히 물었다.
“제 아버지를 흉내 내어 본 건데 별로입니까?”
“네.”
“하지 않는 쪽이 좋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가이사는 참고하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가이사가 다정한 척이라니. 소름 돋아 죽을 뻔했다. 이 나약한 몸으로도 자다가 벌떡 깨어날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물론 다정히 웃는 가이사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건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강하게 다가왔던 위화감을 떠올리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에비 에비. 이런 건 생각하는 게 아니야.’
그러는 사이 그는 하녀가 놓고 간 바구니를 뒤져 포크를 하나 더 꺼냈다. 그의 손이 던진 과일이 위로 확 떠올랐다. 그의 손이 쥔 포크가 대체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 수 없었다. 볼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더니 예쁘게 자른 과일이 접시 위로 떨어졌다. 소나가 했던 것보다 더 신속하고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와…… 헙!”
소나에게 해 준 것처럼 감탄하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또 가이사의 다정한 얼굴을 봐야 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몹시 다행스럽게도 가이사는 평상시의 무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하지 말라고 했던 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드세요.”
“또 먹어요?”
“그래야 건강해집니다.”
갑자기 내 건강에 협조적으로 나오는 가이사가 수상했지만 그러려니 넘겼다. 손해 볼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레어노스라는 사람 때문인가?’
가이사는 어떤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이사의 아버지와 내가 아는 사이라는 것 같은 오해 말이다. 그걸로 그의 비호가 이어진다면 굳이 꼬집어 진실을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얌전히 과일을 받아먹었다.
“포크로 자를 수 있으면서 왜 소나를 시킨 거예요?”
“직접 하기 귀찮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딘가 나른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늘 아래 늘어져 있어서인지 묘하게 편안해 보이고 고요한 얼굴이었다.
나는 가이사가 살짝만 움직여도 불끈 잡히는 허벅지 근육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몸은 어떻게 유지하는 거죠?”
말하던 도중 눈에 불꽃이 튀었다. 허약해 빠진 몸으로 살아가게 됐다. 만약 가이사가 타고난 것이라는 말을 했다가는 뺨을 한 대 쳐 주고 싶을 것 같았다.
“운동은 귀찮지 않습니다.”
“아…… 남에게 해 주는 게 귀찮을 뿐이군요.”
다행히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진심으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예.”
가이사의 대답을 들은 뒤 이상함을 느꼈다. 그가 남에게 하는 모든 일을 귀찮아 한다는 깨달음이 웃을 일은 아니었다. 최근 그가 위하는 남은 대부분도 아니고 무조건 나 하나였기 때문이다.
‘즉, 내가 귀찮다는 거야? ……당신 아버지는 자애롭다면서 당신은 왜 그렇지요?’
몹시 실례될 생각을 속으로 마음껏 했다. 자애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서 왜 성격 파탄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그의 아버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걸 보면 아낌받은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역시…… 레어노스라는 사람은 돌아가신 걸까? 내게 아버지에 대해 묻는다는 건 직접 물어볼 아버지가 없어서잖아?’
더 깊이 생각하면 어떤 식으로든 그를 동정해 버릴 것 같았다. 주제 전환이 시급해!
“그래서 이 과일은 뭐예요?”
“그라고르의 거미줄입니다.”
“……뭐요?”
“그라고르의 거미…….”
거미. 시커먼 몸통에 시커먼 다리가 여러 개 달린 생물체.
“읍!”
나는 입을 막고 컥컥거렸다. 가이사가 내게 식재료를 가져다주는 건 그가 줄여 놓은 니네이나의 수명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그 시간이 끝나면 가이사가 더는 이 일을 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가이사가 가져오는 식재료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효과 좋은 식재료를 찾는다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해 둬야 그가 없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마 거미줄이라는 대답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파충류의 방광을 먹었을 때보다 지독하고 아득했다.
‘내장이나 장기는 어떻게든 참았지만 거미의 거미줄이라니! 난 벌레가 세상에서 제일 싫단 말이야!’
이번에야말로 진짜 먹고 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이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컥컥거리는 내게 달려왔다.
“호흡하세요. 토하시면 안 됩니다.”
“지, 지금 당장 토할 것 같은데 어떻게……”
“몸에 엄청 좋은 겁니다!”
그의 다급한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요?’
말은 더 잇지 못하고 눈으로 말했다.
그는 애잔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심호흡하세요. 숨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는 겁니다.”
그의 말대로 천천히 호흡했다. 열 번쯤 반복하자 속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를 나무 아래 기대어 앉혀 놓은 그가 빛의 속도로 달려가 물을 공수해 왔다.
“당신은 계속 살아 있어야 해.”
어딘가 숨이 막힌 듯 서럽고 단호한 그 말을 나는 ‘약속’과 관련지으며 그냥 넘겼다.
그는 컵을 살짝 들어 내가 놀라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물을 흘려 넣었다. 능숙한 간호 실력이었다. 그동안 왜 이렇게 안 해 줬는지 원망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고마워요…….”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이사의 말에 눈가가 일그러졌다. 감동받아 그런 게 아니라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몸 좋아졌나요?”
어서 보라고 힘없는 검지로 내 몸을 콕콕 가리켰다.
‘내가 거미줄까지 먹었는데!’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를 살폈다.
“토악질이 올라와 체력이 깎인 것 같지만 확실히 먹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 그래요?”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먹였던 어떤 것보다 효과가 좋습니다.”
가이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활기가 돌고 있어요.”
“흐으…….”
잘 참아 왔지만 오늘은 무척 서러웠다. 대체 무슨 죄를 얼마나 졌다고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걸까? 누구나 극도로 무서워하고 혐오하는 게 하나쯤은 있는데 나에겐 벌레가 그랬다. 어릴 적 겪은 일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 거미줄인데! 아니야…… 그래도 건강이 좋아졌다고 하잖아.’
진정하려 해 봤지만 공포와 혐오는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았다. 건강을 위해 거미줄까지 먹어야 하는 신세가 비참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그 비참함을 지켜보고 있던 그가 내 눈가를 기계적으로 닦아 줬다.
“울지 마세요. 체력이 떨어집니다.”
“……어떻게 안 울어요! 과일이라고 했잖아요.”
“절벽에서만 얻을 수 있어서 천혜의 과일이라고 불립니다.”
“그래 봤자 거미…… 으흑…….”
“걱정하지 마세요. 이상한 게 아닙니다. 다들 없어서 못 먹는 거고 바닷새의 집이랑 같은 겁니다.”
“바닷새의 집이요?”
“바닷새는 해초로 집을 만듭니다. 식감과 맛이 뛰어나 사람들이 종종 찾습니다.”
제비집이랑 비슷하게 들렸다. 익숙하지는 않으나 들어 본 적은 있는 먹거리에 눈물도 찔끔 들어갔다. 그러나 잠시 뒤 다시 눈물이 터졌다.
“집을 빼앗았어요? 그거 엄청 나쁜 거라던데…….”
“집을 빼앗은 게 아니라 주렁주렁 걸린 걸 가져온 겁니다. 천적을 피하기 위해 알이랑 헷갈리게 만든 가짜 알입니다.”
그는 설명을 줄줄 늘어놓으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라고르의 천척은 피카로스였다. 번개 구름 위에서 잔다는 피카로스와 아득한 절벽 위에서만 생활하는 그라고르는 상공의 동지이며 영역 다툼을 하는 천적이었다. 그라고르는 호시탐탐 알을 노리는 피카로스를 막기 위해 거미줄로 가짜 알을 만드는데 맛이 달고 모양이 과일과 같아 천혜의 과일로 불렸다. 공기에 풍화해 굳은 겉을 깎아 먹는 방법이 과일을 먹는 것과 비슷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 과일로 착각하고는 했다.
“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해.”
음산한 목소리가 톡 튀어나왔다.
“무슨 말씀……”
“흐어어엉!”
나는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당황한 그가 내 주변에서 손가락을 쭈뼛거렸다. 눈가를 살짝만 건드려도 폭포수 같은 눈물이 터질 것 같았나 보다.
“내가 제일 불쌍해! 거미줄인지 과일인지 그런 거나 먹어야 하는 내가 제일 불쌍…… 크헉!”
급격한 흥분에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을 느꼈다. 나는 가슴을 쥐고 이불 위로 툭 쓰러졌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컥컥거리는 내 눈가에서 젖은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봐! 내 말이 맞지? 내가 제일 불쌍하잖아!
“진정하세요.”
가이사는 차분하게 나를 달랬다. 하지만 옆에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웠다. 나는 괜히 또 분개하며 죄 없는 가이사에게 눈꼬리를 세웠다. 아니, 생각해 보니 죄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 일의 발단은 그가 살기를 뿜어내 내 수명을 줄인 것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분노로 이성이 흐려졌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내가 거미줄을 먹었다고!’
내 분노가 가이사에게로 향하던 그때 그가 마법의 말을 내뱉었다.
“건강해지고 계십니다.”
괴팍하게 일그러졌던 얼굴이 순한 양처럼 펴졌다.
‘정말?’
가이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네. 앞으로 더 건강해지실 겁니다.”
그는 내가 얌전해진 사이 나를 바르게 눕혔다. 이불을 덮어 주고 배를 토닥였다.
“주무세요. 소화가 잘되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배 마사지까지 척척 해내는 가이사가 의심스러웠지만 나를 위해 주는 일이라 지적할 구석이 없었다.
“크흥.”
코가 훌쩍거렸다. 눈꺼풀을 닫자 축축하게 고였던 눈가가 접히며 눈물 한 방울이 바르르 떨어졌다.
‘이게 다 체력인데.’
나는 눈물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꾹 감았다. 여러 일을 겪으며 체력을 소진했는지 나는 금세 잠에 빠졌다.
* * *
가이사는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며 어르고 달래느라 진이 다 빠졌다. 그래도 그는 지금 즐거웠다.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가 생겼으니까.
“좋아질 겁니다.”
그는 잠든 니네이나의 배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했다. 그건 예고였다.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반드시 살리고야 말겠다는. 그는 소중한 것을 두 번 잃고 싶지 않았다.
잠시 뒤, 꽃잎 한 장이 니네이나의 뺨 위로 떨어졌다. 바람을 타고 흘러내린 꽃잎은 곧이어 작은 코를 간질였지만 그녀는 느끼지 못한 듯 일어나지 않았다. 작은 바람에 꽃잎은 들썩거렸다. 그러나 저 멀리 날아갈 시원한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가이사는 니네이나의 뺨 위에서 살랑거리며 노는 꽃잎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피부에 가죽 장갑이 스치지 않도록 손끝을 세운 가이사가 조심스레 꽃잎을 떼어 냈다.
“으음…….”
눈가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느낀 듯 니네이나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지쳐 잠든 그녀가 고작 이 정도로 깨어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배를 살짝 토닥여 줬다.
니네이나의 입술이 방긋 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 덕에 버려지거나 짓이겨지지 않고 살아남은 꽃잎 한 장은 여전히 가이사의 손가락 사이에 갇혀 있었다. 그는 이불 아래로 손을 넣어 니네이나를 이불째 안아 들었다.
성큼성큼 걸어가자 한쪽에서 대기 중이던 집사가 발걸음 소리를 낮추고 종종 달려왔다.
“더 안 계셔도 되겠습니까? 저기서 낮잠을 주무시겠다고 하셨는데…….”
집사가 잠든 니네이나의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실바람처럼 조그만 목소리였지만 가이사가 알아듣긴 충분했다.
“2시간 정도 있었던 걸로 해 둬라. 어차피 그 안에는 못 깨어나실 테니.”
“……예. 날이 쌀쌀해져 안으로 모신 걸로 말을 맞춰 두겠습니다.”
가이사는 꾸벅 고개 숙인 집사의 정수리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집사를 지나쳤다. 니네이나를 밖에서 2시간 재워 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런 엄폐물도 없는 곳이라 습격받기 쉽다는 것도 문제지만 날이 선선해져 바람이 분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운이 좋다면 목이 조금 건조한 걸로 끝나겠지만 보통은 감기, 운이 나쁘다면 폐렴까지 올지도 몰랐다. 밖에 나가고 싶다면 30분 이상을 넘기지 않는 게 좋았다. 이제 그에게 니네이나는 손끝에서 살짝 미끄러지기만 해도 깨질 소중한 유리구슬과 다름없었다. 니네이나의 몸으로 도박할 생각이 없는 그는 그녀를 방 안으로 데리고 갔다.
“어?”
문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난 메이아가 들어오는 가이사와 니네이나를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메이아를 향해서는 약간의 눈짓도 주지 않은 가이사가 니네이나의 침대로 곧장 직행했다. 눈치 빠른 하녀가 달려가 이불을 들추고 니네이나가 쓰는 베개를 잘 정리했다.
가이사는 하녀가 들어 올린 이불 속으로 니네이나를 내려 줬다. 목 뒤를 안전하게 받쳤던 손을 빼내려는데 가이사의 손가락에서 아까 놓아둔 꽃잎 한 장이 떨어졌다. 그냥 두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해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인데 여기까지 따라온 모양이다. 그의 머릿속에 장미 덤불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니네이나가 떠올랐다.
‘이따위 것을…….’
숨이 차 가까이는 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손을 뻗었던 의미 없던 몸짓까지 말이다.
“꽃 좀 꺾어 와.”
가이사의 말에 뒤에 서 있던 하녀들의 눈이 커졌다. 무슨 꽃을 얼마나 가져오라는 말인가 싶어 다시 물으려는데 메이아가 앞으로 나서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제가 다녀올게요.”
눈치 빠른 노예는 가이사가 정원의 꽃을 말한다는 걸 알았다. 꽃을 바라보며 낮잠 잘 거라던 니네이나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메이아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쪼르르 뛰어가자 하녀장인 사라가 옆에 선 하녀 둘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메이아를 따라가라는 사라의 신호에 리아와 린지도 방을 나갔다. 그렇기에 그 모습을 목격한 건 사라 한 사람뿐이었다.
“이걸로 만족하세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테니.”
니네이나의 얼굴 옆으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그녀의 손을 조심히 붙잡은 가이사가 자그만 손가락을 벌려 그 안에 꽃잎 한 장을 밀어 넣었다.
연분홍색 꽃잎 한 장을 하얀 손바닥에 묻고 다섯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리는 일련의 동작이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다. 그 후 가이사는 니네이나를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칼을 쓸었다. 내리비추는 햇살 때문인지 차가운 광물의 표면 같았던 눈동자가 따스해 보였다. 시커먼 손과 새하얀 손이 대비되어 악마의 손에 떨어진 천사 같기도 했다.
사라의 정신을 깨우기라도 하듯 햇볕에 널어 둔 백금색 머리카락이 사르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니네이나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정리한 가이사가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갈 때까지 사라는 굳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사라는 정신을 차렸다. 꼭 꿈을 꾼 것만 같았다.
* * *
내가 잠에서 깨자마자 한 일은 찌뿌둥한 몸을 쭉 펴는 것이었다.
“으허어어억!”
괴상한 소리가 나긴 했지만 깍지 낀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쭉 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웬일로 스트레칭이 이렇게 잘되지? 활력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
몸이 달라질 이유라면 가이사가 준 음식밖에 없었다. 식물도 아닌데 햇볕 좀 받았다고 이렇게 된 건 아닐 테니 말이다.
‘그, 그래. 이렇게 효과가 좋다면 거미줄도…….’
기뻐하던 마음이 창백해졌다. 벌레를 혐오하는 나에겐 거미의 거미줄이 대왕 파충류의 방광보다 거대한 장벽이었다.
―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심하게 달래던 가이사의 말이 떠올랐다. 침착한 목소리여서 그런지 예상 외로 잘 통했다.
‘알…… 알…… 계란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가이사의 말을 열 번쯤 되뇌며 거미줄이 알이 되는 상상을 했다. 끔찍한 과정이었다. 거미줄이 아니고 계란을 먹은 거라고 독하게 세뇌하는데 손가락 사이로 뭔가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꽃잎?”
이불 위에 떨어진 꽃잎을 가만히 바라봤다.
“화병에서 떨어진 모양이에요.”
“으억!”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괜찮으세요?”
문 앞에 앉아 있던 사라가 벌떡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갑자기 말을 꺼내 나를 놀라게 한 메이아를 노려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찮아.”
그 말을 듣고 보니 방 안에 못 보던 화병이 있는 게 보였다. 정원에서 본 장미가 가득 담긴 화병이었다.
나는 방 안에 있는 메이아와 사라를 보고 상황을 짐작했다. 방에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 후 잠들었으니 메이아는 나가지 못했을 것이고, 사라는 메이아를 못 믿어 함께 있었던 모양이다. 사라는 메이아의 신분이 노예이기 때문에 잠든 내 곁에 두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게 좀 웃긴다고 생각했다.
‘잠든 나나 일어난 나나 똑같이 무력하지 않을까?’
메이아가 그럴 마음을 먹는다면 소리 질러 도움을 청할 틈도 없을 확률이 높았다.
‘……생각할수록 비참하네. 운동 잘하는 편이었는데.’
도움 안 될 생각은 그만두고 떨어진 꽃잎을 주웠다. 그냥 버리면 될 텐데 아직 싱싱한 꽃잎을 버리기는 아까웠다. 침대 옆 서랍을 열어 가장 위에 있는 책에 꽃잎을 넣었다. 서랍을 닫고 돌아보니 어두운 창밖이 보였다.
“벌써 밤이야?”
“네. 밖에서 주무셔서 날이 더 쌀쌀해지기 전에 안으로 모셨어요.”
“누가?”
“백작님이요.”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 가이사에게 곤욕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 있는데?”
“……주인님을 공격한 사람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사라는 되도록 자극적인 단어를 피하며 설명했다.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렸다. 암살자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루베니오가 편지를 보낸 걸 상대방도 눈치챘을 테니 그런 식으로 화풀이하는 것일 터였다.
‘성격 나쁜 할아버지 같으니.’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약간의 상황을 파악해 두는 것이면 만족했다. 아예 몰라서는 안 되지만 너무 깊이 아는 것도 피하는 게 좋았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림 그릴 거야.”
“그림이요?”
“응.”
“……주인님의 그림 도구를 찾아오겠습니다.”
사라는 메이아를 한 번 매섭게 노려본 뒤 방 밖으로 나갔다. 내가 사라를 보며 말한 의도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정해 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메이아를 바라보려다가 움찔했다. 메이아가 오매불망 주인을 기다린 강아지처럼 순한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주인님이 시키신 일에 대해 보고를 드릴까요?”
“……그래.”
“모래시계의 상태는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래가 간혹 걸리면 약간의 오차가 발생하지만 대부분 정해진 시간 내에 떨어졌습니다. 더 정확한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더 고운 모래 입자를 넣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인님의 말씀대로 30분 간격으로 눈을 떠 그것을 확인했고 열다섯 번의 실험 모두……”
“잠깐! 열다섯 번? 너 나 잘 때도 계속 그러고 있었어?”
“네.”
메이아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애네…….’
떨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는 메이아의 눈에서 총명함이 느껴졌다. 언제든 반짝거릴 준비가 되어 있는 원석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메이아가 너무 고지식하다는 것 정도였다.
‘충실해서 좋기는 한데…… 요령이 없나? 나중에 남주가 여주 부려 먹었다고 쫓아오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메이아는 이미 나에게 호의적인 것 같았다. 시험도 통과 불통을 나누자면 통이었다. 확신이 더 필요했지만.
메이아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사라가 먼저 돌아왔다.
“주인님, 가져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자 사라는 내 앞에 종이와 물감을 놓아두고 물러났다. 그런데 종이가 너무 컸다.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몸으로 집중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은 고작 5분에서 10분 정도일 것이다.
‘잘라야겠다.’
책상 위를 둘러보다가 은으로 만든 페이퍼 나이프를 들었다. 페이퍼 나이프라지만 날이 어느 정도 있는 물건이었다.
“주인님…… 그건 왜……?”
메이아와 사라가 안절부절못하며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특히 메이아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개만 쭉 빼고 있었다. 한두 살 애도 아닌데 쓰라고 놔둔 페이퍼 나이프 하나 들었다고 뭐 그리 야단인지 알 수 없었다.
“너무 큰 것 같아 잘라 내려고.”
그렇게 말하며 종이 위에 나이프 날을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내리그어 잘라 내려고 했다.
“……?”
나이프가 지나간 흔적만 남을 뿐 깔끔하게 잘라지지 않았다. 그래. 나이프가 좀 무디기는 했다. 화선지 또한 질감이 종이보다는 질긴 천에 가까웠다. 보통의 성인 여성이 잘라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놈의 몸뚱이가 또!’
이유를 깨달은 나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했다. 자칫하다가는 그대로 나이프를 놓치거나 손가락을 벨 것 같았다.
“그런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때 메이아가 공손히 말하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래요. 이런 것까지 주인님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라가 처음으로 메이아의 말을 반기며 거들었다.
‘하려고 해도 못 하는 거겠지.’
모른 척해 주는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창피했다.
“그래, 그럼.”
메이아가 다가와 페이퍼 나이프를 받았다.
“어느 정도로 자를까요?”
“이 편지 봉투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어떤 걸 그리시려고요?”
사라가 나무 팔레트에 물감을 짜며 물었다.
“하늘을 나는 새.”
사라의 손이 살짝 미끄러지며 새하얀 물감이 팔레트 위에 번졌다. 편지를 봤으니 답장을 보내는 게 예의였다. 그동안은 보지 않아 무시했다고 해도 이번에는 읽었으니 상황이 달랐다.
나는 편지를 읽기 전부터 루베니오에게 답장을 보낼 생각을 했다. 지금의 나에게는 루베니오의 비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몇 걸음 걷는 것으로 지치는 몸은 일을 할 수 없었고 하루에 드는 약값과 치료비를 생각하면 어지간한 능력으로는 감당이 안 됐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내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루베니오가 주지 못해 안달일 거라는 건 알았다. 난 이제 니네이나였으니까.
게다가 루베니오를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 감정들이 니네이나의 몸에 들어왔기에 생긴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것처럼 생생하여 무시할 수 없었다. 낯선 듯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입이 잘되는 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네이나와 나를 분리해 생각하지 않으면 수상한 두통이 심해졌다.
니네이나의 기억을 들추다 보면 몰라야 하는 진실을 알아내지 말라는 것처럼 압박이 거세졌다. 특히 루베니오와 관련한 기억이 그랬다. 이건 니네이나의 감정이 옮으며 느끼는 통증일까?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니네이나가 되어서 지금 느끼는 감정을 단순한 동정심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팔레트 이쪽으로 돌려 줘. 하늘부터 칠할 거니까.”
그릴 곳을 살펴보다가 붓을 들었다. 원하는 그림은 그리기 어렵지 않았다. 하늘과 새가 다였다. 새는 좀 어렵더라도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할 하늘은 쉬우니 쉽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아직 어린 아이들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런데 나는 붓을 들고 종종 망설였다.
나는 반쯤 그린 새의 날개를 가리키며 사라에게 물었다.
“이거 새처럼 보여?”
“네. 아주 예쁜 하얀 새네요.”
내 그림 실력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굳이 편을 가르자면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리려는 그림의 주제가 쉬워 무엇을 그렸는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내 눈에도 그건 새처럼 보였다. 그래도 굳이 또 메이아에게 또 물었다.
“넌 어때?”
“음…….”
“왜? 이상해?”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닌데…….”
당황한 메이아가 손을 저으며 망설였다.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조금…… 주인님을 닮은 것 같아서요.”
“나를……?”
메이아의 말은 나보다는 니네이나의 생각을 읽은 듯 날카로웠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없었다. 메이아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어디가 닮았는데?”
메이아는 그림을 빤히 바라보며 3초쯤 고민했다. 저렇게 오래 볼 만한 그림이 아니었는데 메이아의 눈은 몹시 진지했다.
“하얀 것일까요?”
그럼 그렇지. 내놓은 대답은 허무했다. 여주인공이라도 사람의 생각을 읽지는 못했다.
“새를 파랗게 칠하면 나랑 안 닮게 되는 거야?”
“구름도 주인님을 닮았으니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냥 하늘까지 다 닮았다고 하는 건 어때?”
황당함이 넉넉한 목소리에 노예인 그녀는 머쓱해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저건 새가 아니라 주인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요.”
“그냥?”
“네. 그냥…… 그랬습니다.”
메이아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리고 뭔가를 삼키듯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그냥 하는 말인가?’
시기가 좋았다. 미뤄 둔 걸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참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어? 특히 신분제 말이야. 다 같은 사람인데 누군 귀족이고 누군 노예라니.”
고귀한 자와 천한 자로 나뉘는 사회였다. 신분에 따라 가질 수 있는 직업과 직위도 한정적이었다.
“새처럼 함께 날아도 누구는 꼬리가 걸려 땅에 처박히게 되지.”
하얀 물감을 묻힌 붓이 화폭 위를 철썩 내리찍었다. 희뿌옇게 번지는 질척한 물감이 새의 날개보다는 터진 몸뚱이 같아 보였다.
“어떻게 생각해?”
정확히 메이아를 보며 물었다.
“……조금도 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저는 신분이 가장 낮은 노예니까요.”
메이아 옆에 서 있던 사라가 감히 어디서 삿된 말이냐며 눈치를 줬으나 그녀는 하고자 하는 말을 삼키지는 않았다. 이 세계에서 메이아의 사상은 꽤 위험한 것이었다. 여주인공이 아니라면 그녀는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까? 귀족인 내게 혁명가는 적이나 마찬가지인데. 나는 이곳에서 얻은 지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 위치에 만족하고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인님을 보필하고 싶어요. 저는 더는, 정말 더는, 그 이상의 다른 걸 바라지 않아요.”
애석한 말이었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찬연하게 피어났을 봄일 텐데. 그걸 내가 어떻게 믿겠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메이아의 호소가 진심으로 느껴졌고 거듭 묻는 걸로는 결과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흐음, 그건 됐고. 심부름이나 좀 다녀와 줄래?”
“시키실 일이 있습니까?”
“전에 주문해 놓은 보석이 보고 싶어졌어. 네가 값을 치르고 와.”
일정 예산 이상 사용해야 해서 대충 구색을 맞춰 둔 물건이었다. 그냥 두면 알아서 손에 들어올 물건이지만 굳이 콕 집어 메이아를 가리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라.”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선 하녀장을 불렀다. 당연했다. 노예에게 그런 중대한 일을 시키는 주인은 없었으니까.
“저 노예에게 보석값을 줘서 지금 내보내.”
“……예, 주인님.”
“하인들이 사용하는 신분패도 주렴. 그게 있어야 물건을 받아 올 수 있을 테니.”
신분패와 돈. 가지고 나간다면 부유한 평민으로 살 수 있는 기회였다. 평범한 노예라면 혹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는 제안. 일종의 시험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주인님.”
사라는 말대꾸를 하는 대신 말없이 그것들을 내줬고 메이아는 그 길로 심부름을 떠났다. 집 두어 채는 살 수 있을 거금을 몸에 꽁꽁 감추는 태도가 비장했다. 돌아선 등은 생각 이상으로 작았다. 여자라 그런지 남성복의 품이 크다는 느낌이었다.
‘메이아라면 돌아오겠지.’
저 애의 무엇을 안다고 이토록 확신하는 걸까? 사람의 마음을 시험해 보는 주제에 우스웠다. 나는 그 등을 오래 좇지 않았다. 화폭으로 시선을 돌려 그림에 집중했다. 얼추 그린 한쪽 날개 옆에 다른 쪽 날개도 그리니 조금 더 나아진 것 같았다.
루베니오의 편지를 읽었을 때 이 그림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딸의 삶을 궁금해해 온 아버지에게 가야 할 답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새처럼 훨훨 날며 살았으니 걱정할 것도 미안할 것도 없다는 니네이나의 대답이었다.
―「미안하다.」
편지 말미에 적힌 글씨는 얼마나 힘을 줬는지 모양이 엉망이었다. 편지 앞면에 고민도 없이 썼을 그의 이름과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진하게 말라붙은 그의 글씨는 본래의 유려함을 지우고 새까맣게 탔다. 펜촉이 아니라 잿더미가 내려앉은 듯했다. 입술에 힘이 꾹 들어갔다.
“다시 그릴래.”
“예?”
“마음에 안 들어. 종이 하나 더 줘.”
그림에 10분 이상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금세 마음을 바꿨다. 형편없는 편지에 대한 답장이니 똑같이 형편없어도 될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몇백 통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보내기에는 그림이 너무 초라했다. 내가 루베니오의 편지를 보고 그의 심리를 읽었듯 루베니오도 이 그림을 보고 흐트러진 심기를 알아챌 것 같았다.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 것인데 그림이 이상하면 잘 못 지낸다는 대답이 될까 봐 싫었다.
새의 날개를 조각하는 붓질이 섬세해지고 그만큼 시간은 또 흘렀다. 나는 손목이 아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불쌍하고…… 고마운 사람이니까.’
이유는 단지 그것이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붓을 놓았을 때에는 같은 그림 세 장이 창가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메이아는 그 그림이 다 마르기 전에 심부름을 끝내고 돌아왔다.
* * *
어느 날 아침, 가이사는 다소 거칠게 내 방문을 열었다. 두 손으로 민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며 그의 모습을 드러냈다.
“뛰어왔어요?”
내가 먼저 그를 부르는 일이 잘 없어서 놀란 모양이었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는 문을 붙잡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어…… 아, 안 들어와요?”
나는 당황하며 버벅거렸지만 문은 야속하게 닫혔다.
쿵! 똑똑! 문이 닫힌 직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간격을 생각하면 범인은 한 사람뿐이었다.
“……들어와요.”
대체 이 과정이 왜 필요한가 싶었지만 그냥 포기해 버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가이사가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나는 앉아 있던 침대 위에서 조심스레 내려왔다. 창가로 총총 걸어가 햇볕에 말린 그림 세 장을 들고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 잘 마른 세 장의 그림은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셋 중 뭐가 나아요?”
“…….”
그는 똑같은 그림 세 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구름이 조금 둥글다거나 모났다거나 하는 등의 미세한 차이는 있었으나 그 외에는 찍어 만든 듯 똑같은 그림이었다. 그는 구름과 새의 배치조차 똑같은 그림 세 장을 두고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기색이었다. 그, 그래도 자세히 보면 아주 살짝 달랐다.
“당신이 가장 냉정하게 평가해 줄 것 같아서요.”
“…….”
“실례되는 말이었나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분은 썩 좋지 않으나 당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얼굴이었다. 최근 나만큼이나 내 건강에 집착하게 된 그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괜한 것에 신경 써 가뜩이나 희박한 체력을 깎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굴…… 표정…….’
그러나 신경 쓰지 말래서 더 신경 쓰였다.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잠시 고민하던 가이사가 눈가를 접으며 생긋 웃었다. 소년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산뜻한 미소였다. 그와 지독하게 안 어울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네, 신경 안 쓸게요.”
나는 얼굴을 싹 바꾸고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잘하셨습니다.”
가이사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목표를 이뤘으니 굳이 미소를 유지할 필요 없다는 얼굴이었다.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제가 놀란다는 걸 알고.”
“통하는 걸 사용하는 게 잘못됐습니까?”
영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자기 얼굴을 유용하게 쓰겠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문제는 매번 소름 끼쳐서 넘어가는 나에게 있었다.
‘진짜 소름 돋는단 말이야! 가면 쓴 것 같아서.’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끼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셋 중 하나를 고르면 되는 겁니까?”
“아…… 네! 가장 건강해 보이는 것으로 골라 주세요.”
본래 목적을 상기한 나는 다시 그림을 내밀며 말했다.
“건강…….”
하늘을 나는 새의 그림에서 건강을 찾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난제였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어떤 대답도 정답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훌륭한 대답을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건강하면 가이사가 아니었던가!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여쭤 봐도 됩니까?”
“답장이에요.”
“답장? 루베니오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입니까?”
“네. 아버……지는 안목이 좋은 듯하니 아무거나 보낼 수가 없어서요.”
루베니오가 딸에게 보내는 건 온갖 진귀한 것들이었다. 좋다는 것들 중에서도 추리고 추린 것이니 당연했다. 그가 보내는 물건들만 봐서도 그렇지만 루베니오의 현재 위치를 생각해 볼 때 그가 어느 정도 예술에 대한 감이 있다는 건 분명했다. 일류 명작들만 봐 오던 그에게 줄 그림이라고 생각하니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보낼 수가 없었다.
“무엇을 보내도 똑같을 겁니다.”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가이사는 잘 보라며 그림 위에 한 마리씩 있는 세 마리의 새를 콕콕콕 연달아 가리켰다.
“새의 날개가 우람해 튼튼하고…….”
우람하다와 튼튼하다. 모두 내가 좋아할 말이었다. 내 몸은 자연스럽게 그를 따랐다.
‘우람! 튼튼! 그다음은요?’
그는 시간을 살짝 끌었다. 그리고 내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할 말을 보탰다.
“셋 다 건강해 보이니까요.”
크리티컬! 완벽한 한 방에 머리에 열이 잔뜩 올랐다. 과한 흥분으로 호흡이 가빠졌다.
“기분 좋으십니까?”
“네.”
“그럼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네?”
“3개 다 보내기로 결정하신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달리 더 해야 할 게 있습니까?”
없었다. 편지를 쓸 것도 아니니 이대로 편지 봉투에 담아 보내기만 하면 끝이었다.
“빨리 보내면 더 빨리 답장이 돌아올 겁니다.”
내가 망설이자 가이사가 설득조로 말했다.
‘답장?’
루베니오에게 답장을 보낼 생각만 했지 또 답장이 돌아올 거라는 건 생각 못 했다.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가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누른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속이 뒤집히고 울컥 솟아나는 감정이 불편했다. 빨리 이것을 끝내고 싶다가도 좀 더 붙잡아 두고 싶어져 혼란스러웠다.
‘답장이 무섭다고 안 보낼 것도 아니잖아. 언젠가 보낼 거면 그냥 보내는 게 제일 나아.’
책상으로 씩씩하게 걸어가 그림 세 장을 편지 봉투에 넣었다. 밀랍을 녹여 도장을 찍는 건 가이사가 도와줬다.
그는 밀봉한 편지를 내게 주지 않고 어딘가로 가져가려 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가이사를 보고 놀란 내가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쫑쫑거렸다. 졸졸 따라가는 기척에 가이사가 나를 돌아봤다. 내 시선은 그가 손에 쥔 편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가 내 손바닥 위에 편지를 내려 주며 물었다.
“인사하실 겁니까?”
“……편지한테요?”
“잘 보내기 위한 방법이라고 배웠습니다.”
가이사의 생각은 절대 아닐 귀여운 방법이었다. 배웠다면 가르친 자가 있을 것이고 그는 가이사의 스승이거나 부모일 것이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의 빤히 보는 시선에 등 떠밀려 손을 살짝 흔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곧장 창피함이 밀려왔다. 어린애도 아니고 편지 하나 못 보내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그럼 보내겠습니다.”
“아앗!”
그는 발을 동동 구르는 내 손에서 편지를 쏙 빼내어 갔다.
야멸쳤다!
가이사가 문을 열고 편지를 맡기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즉시 루베니오에게로.”
루베니오가 그랬듯 나도 편지 앞면에 이름을 썼다. 가이사에게 편지를 건네받은 집사는 그 편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최단의 루트로 가장 빠르게 전해졌을 편지에 가이사의 말이 더해져 집사의 눈빛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가이사는 잘 해내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집사의 얼굴을 더 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그의 손에 뚜껑 덮인 접시 하나가 들려 있었다.
“지금도 기분 좋으십니까?”
그가 나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순간 오한이 온몸을 내리쳤지만 내게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 몸뚱이 또 골골거리네.’
몸의 신호를 무심히 넘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기 정도야 이제 익숙했고 딱히 기분 나쁠 일도 없었다.
“네.”
내 대답에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는 즉시 접시의 뚜껑을 열어 내 앞에 내려놨다.
“드세요.”
교묘하게 조리한 수프였다. 무엇을 첨가했는지 알 수 없게 푹 끓여서.
“이게 뭐예요?”
“주방장이 새로 개발한 수프라고 들었습니다.”
“무슨 수프예요? 처음 보는데.”
가이사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에 익숙한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초록색의 걸쭉한 수프를 한 숟갈 떠서 먹었다.
“평범한 식물성 재료가 대부분입니다. 소화가 잘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수프보다는 채소 주스 같네요. 확실히 채소가 많이 들어갔나 봐요.”
“몸에…….”
가이사는 말하려다 말고 멈칫하더니 금방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몸에 잘 맞는 재료들만 엄선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맞춤형이에요?”
“많이 드세요. 기분이 좋으면 잘 먹는다고 하니까요.”
맛과 색이 가려져 수프 안에 뭐가 들었는지 짐작하지 못했지만 맛있었다. 나는 깨끗하게 접시를 비웠다. 한 그릇 다 비우고 반 그릇 정도 더 먹기도 했다.
“헛구역질을 안 하시는군요.”
“수프 정도는 이제 괜찮아요.”
그는 의뭉스럽게 웃고 있었다. 느낌이 이상해 빤히 바라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지그시.
나는 집요하게 좇아갔다. 그의 뺨에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소나.”
그때 녹색 정령이 뿅 하고 튀어나왔다.
“무슨…… 수작이에요?”
눈은 저절로 사랑스러운 정령에게 이끌렸으나 경계하는 걸 잊지는 않았다.
“수작? 당신이 좋아하는 정령을 부른 것뿐입니다. 식사 후에 기분이 좋아야 소화도 잘되겠지요.”
그가 손짓하자 정령이 포르르 느리게 다가왔다. 팔다리가 짧은 것은 문제가 아닐 텐데 부끄러워 그러는 것이었다. 정령의 투명한 몸체가 바르르 흔들렸다.
“어? 소나가 왜 이래요?”
“일종의 감정 표현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낀 인간의 뺨이 붉어지는 것처럼.”
서걱 썰리는 말투가 평소보다 더 찼으나 그 정도야 이제 그러려니 했다. 내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내 콧잔등 위에 손을 살짝 올리는 소나에게. 작은 손이 피부 위를 살짝 스치는 순간 놀랍도록 강렬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읏! 차가! 아하하!”
어쩐지 웃음이 터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바람이 잔잔하게 부는 절벽이 보였다. 나는 절벽 위의 나무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 스치며 잎사귀의 이슬이 똑똑 떨어질 때마다 즐겁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정령의 축복입니다. 소나는 역시 당신이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건조한 말에 황홀한 환상이 깨졌으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기분이 개운했다.
“나도 널 좋아해.”
어린애 고백 같은 말이 살짝 부끄러웠다. 파닥거리던 날개가 포르르 위아래로 진동했다. 소나는 파닥파닥 소리를 내며 내 주위를 빙글거렸다. 꼭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대화는 통하지 않아도 함께 있으면 귀엽고 유쾌했다. 정령은 가볍게 날아와 내 뺨에 뺨을 비비기도 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원한 청령감에 얼굴 근육이 헤실거렸다.
“정령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관대하십니다.”
“귀엽잖아요. 사랑스럽고 예쁘고.”
그는 굉장히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태도에서 괴리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설마 귀여운 소나와 자기가 동격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먹었으니 운동을 좀 할까요?”
운동!
잠시 들었던 가이사에 대한 의심이 바람처럼 날아갔다.
“운동 좋아요!”
“서기 운동입니다.”
걷기 운동도 아니고 서기 운동이라니. 내 몸에는 그야말로 적합한 운동이었으나 내심 서운했다.
“난이도를 살짝 높인.”
는 무슨. 그는 참 올바른 스승이었다. 준비성도 좋고.
“그게 뭐예요?”
“일종의 지압 판입니다. 혈액 순환에도 좋고 운동도 되는.”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둥근 반원이 여러 개 솟아 있었다. 높이 차가 있어 서면 꽤 아플 것 같았다.
“와서 서 보세요.”
망설이지 않고 가서 섰다. 옆에서 봤다면 신이 나 달려 나가는 어린 강아지 같았겠지.
“으흣!”
그러나 곧 고통이 찾아들었다. 지압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정수리까지 지끈거리는 통증이었다.
“아파요…….”
“제가 당신을 괴롭히는 것 같군요. 운동을 하는 것뿐인데. 뒤까지 꽉 힘주세요.”
“이건, 너무…… 아, 아파요! 선생님…… 꺄흣!”
매로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발바닥이 찌릿거렸다. 발버둥 치다가 떨어질 뻔했는데 그의 손이 내 팔뚝을 붙잡아 지탱했다.
“……선생님?”
그가 몹시 오묘한 말투로 물었지만 발바닥에 불이 난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읏! 악! 아악!”
불판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오른발 왼발이 빠르게 바뀌었다. 몇 번 휘청거렸으나 그의 손이 끈끈이처럼 감겨 탈출을 막았다.
“사, 살려 줘요…… 선생님!”
“이런 걸로는 안 죽습니다. 그리고 누가 선생……”
“아악!”
눈물이 찔끔 나왔다. 너무 아프다고!
“거기를, 누르는 건…… 으으, 너무 심하잖아요!”
“체중을 더 줘야 자극이 될 게 아닙니까!”
그가 다시 어깨를 눌렀다. 새빨갛게 익었던 발바닥이 다시 희게 질렸다. 내 얼굴도 저렇게 떴겠지.
“발가락 끝에 더 힘을 줘서 누르세요.”
“이, 이렇게요?”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꽉.”
“으아아! 너무 아파요!”
비명이 너무 컸는지 방문이 갑자기 활짝 열렸다. 당황한 사라와 눈이 마주쳤다.
“서, 선생님이랑 운동…… 아아! 살살!”
“…….”
사라는 그녀의 뒤에서 빼꼼 들여다보는 다른 하녀들을 막으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쿵. 냉정하게 닫히는 문소리가 어쩐지 수치스러웠다. 문 닫히는 소리에 왜 이런 감정이 느껴질까?
* * *
평범하게 먹고 평범하게 잤는데 점점 더 상태가 좋아졌다. 평범하다는 건 내 기준이었고 여전히 몸이 빈약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제 10분 정도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방을 한 바퀴 걷는 것도 무리 없이 해냈다. 어지러움, 가슴 통증, 구역감 등은 여전히 있었지만 몸을 몸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척 기뻤다. 그러다 보니 어쩔 때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혹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다.
“저 정말 건강해진 거 맞아요? 죽을 때가 되어서 이러는 건 아니죠?”
멍하니 생각하던 내가 가이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지금 그에게 안겨 정원으로 옮겨지는 중이었다. 무려 정원 산책이 나에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막 정원에 도착한 가이사가 나를 내려 주며 표정을 굳혔다.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당분간은?”
전에 가이사가 했던 말을 따라 했다.
그의 얼굴이 좀 더 굳어졌다.
“앞으로도.”
낮은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드물게도 감정을 담고 있었지만 원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빠르게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가이사의 말에 살짝 웃었다. 내게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이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들려 기분이 좋아졌다.
“맨발로 땅 밟아 본 적 있어요?”
“있습니다.”
곧장 나를 따라 몸을 굽힌 그가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대답에 꽤 놀랐다. ‘이런 적 없죠?’라고 묻는 건 놀리는 것 같아 저렇게 물었지만 그에게 진짜 그런 경험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통의 귀족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가이사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는 귀족이 하지 않을 다소 특이한 경험을 해 본 거였다.
“기분이 어땠어요?”
나는 조금 흥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하는 걸 해 본 사람이 옆에 있다니 동질감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두려웠고 그 후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맨땅을 밟는 행동이요?”
“아주 어릴 때라 무엇이든 두려웠을 겁니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와 밟은 모래알이 따끔거렸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살갗이 여렸던 때인가 봐요.”
“네. 그러니 당신도 조심하세요.”
“저는 다 컸잖아요. 흙이 촉촉할 때 맨발로 밟는 게 좋아요.”
“발이 더러워질 텐데요.”
“씻으면 돼요.”
이미 정원을 맨발로 걷기로 마음먹었다. 신발을 휙 벗고 달랑 들어 올리자 신발 끝이 경쾌하게 흔들렸다.
흠흠. 느린 허밍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발에 난 상처는 아플 겁니다.”
가이사의 어투가 기이해서 경고나 협박처럼은 들리지 않았다.
“앞을 잘 보면 되죠. 넘어지지 않게. 다치지 않게.”
“…….”
“전 걸음이 느려서 앞은 잘 볼 거예요.”
나는 농담처럼 말하며 첫발을 내디뎠다.
* * *
가이사는 니네이나의 발 위에 어렸던 자신의 발을 겹쳐 보았다.
─저 새끼, 잡아!
환청이 들렸다. 소리보다 더 질척하게 환각이 뇌를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조각에 발을 베여 피를 뚝뚝 흘리느라 도망친 흔적을 그대로 남기고 말았다. 아주 어렸을 때라 그런 점이 미흡했다.
지금이라면 그딴 실수를 하지 않을 텐데.
지금이라면 그때 그놈들을 다 죽여 버렸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에게도 어리고 약했던 시절은 있었다. 그리고 그건 꽤 끔찍한 경험이었다. 날붙이 하나 없이 예쁘게 관리된 니네이나의 정원과는 다르게.
그는 그때 깨달았다. 니네이나가 선 정원에는 사람의 발을 해할 만한 게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흙은 부드럽고 움튼 싹은 연했다. 니네이나의 발은 그중에서도 가장 약할 것이나 상냥한 자연은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 같았다. 유리구슬이 거친 표면 위를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을 뿐이다.
아. 해야 할 게 생각났다. 가을볕이 그때처럼 뜨거웠다. 그는 잠시 새파랗게 고운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소중한 유리구슬을 좇았다. 정신이 빠르게 산열했다.
* * *
“가이사?”
나를 쫓아오는 줄 알았는데 그가 곁에 없었다.
몇 번 두리번거리자 머리 위에 시원한 그림자가 졌다.
“가을볕이 뜨겁습니다.”
머리 위에 쓴 보닛을 누르며 돌아봤다. 모자를 썼으니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보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아하하하.”
내 것으로 추정되는 꽃무늬 양산이 가이사와 지독히 안 어울렸기 때문이다. 가이사는 내가 왜 웃는지 짐작한 것 같았으나 별다른 반응은 보이진 않았다. 다그치고 싶지도 화내고 싶지도 않아 보였다.
“뜨거우니까 이리 오세요.”
그가 재촉하며 양산을 내 쪽으로 좀 더 기울였다. 그가 조용히 서 있기만 하자 머쓱해진 나는 금방 웃음을 멈췄다.
“미안해요. 저 너무 웃었어요?”
“괜찮습니다. 웃는 건 몸에 좋습니다.”
“요즘 부쩍 협조적이란 말이죠.”
“당신이 건강해지는 건 여럿을 위하는 일입니다. 웃음을 금방 멈춘 게 아쉬울 정도로.”
나는 집안의 다른 가솔들을 생각했다.
“하긴 제가 건강해야 다들 편하겠죠. 당신을 포함해서요.”
“…….”
“저쪽으로 가 볼래요.”
앞장서서 다시 걷자 그가 따라왔다.
“오늘은…….”
“응? 뭐라고요?”
“오늘은 안 아프십니까?”
“아. 네! 몸 상태가 좋은 것 같아요. 오래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너무 많이 걷지는 마세요. 뭐든 적당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네, 선생님.”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그를 얼마 바라보지 않고 다시 앞으로 쫄랑쫄랑 걸어갔다. 날이 무척 좋아서 기분이 붕붕 떴다. 흰 구름을 요람 삼아 흔드는 것 같았다.
“뛰지 마세요.”
그는 다시 잔소리하며 양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만 쓰는 게 미안해서 그의 옆에 살짝 붙어 같이 걸었다. 내가 두 발짝 움직이면 그는 큰 보폭으로 느릿하게 한 발짝 걸어왔다.
“나 때문에 지루하죠?”
싫증 내지 않고 조용히 쫓아와 주었지만 내가 괜히 미안했다.
“딱히…….”
뭐라고 딱 정의하기 어려웠는지 하얀 미간이 찡그려졌다. 햇볕을 그대로 받고 있는 얼굴에 내가 살짝 양산을 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나도 괜찮아요.”
“…….”
“같이 쓸 거죠?”
“…….”
그는 뺨이 빡빡하게 굳었다. 챙겨 주는 건 익숙한데 챙김 받는 건 훨씬 어색해 보였다.
“당신이 나만큼 건강해진다면 말입니다.”
양산이 다시 내 쪽으로 기울었다.
“그거 완전 반칙……!”
잠깐! 지금 저 남자, 나한테 농담한 건가? 믿기 어렵게도 그의 입가가 살짝 풀려 있었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정도로 희미하게 곡선을 그린 입술 위로 햇볕이 반짝반짝 빛을 터트렸다. 믿기 어려워 멍하니 바라보는데 그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팔로 내 앞을 막았다.
“잠시…….”
더 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움직이지 말란 말은 들었지만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나비가 내려앉은 담벼락이 보였다. 은은한 베이지색 담벼락 위의 노란 나비는 날아가지 않고 앉아 있었다. 바로 뒤에 사람이 서 있는데도 말이다.
모자를 푹 뒤집어쓴 사람인데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그 사람 뒤에도 사람 몇이 서 있었는데 이상하게 눈이 가지 않았다. 두 눈이 방향을 잃은 것처럼 계속 그 사람만 보였다.
“아가…….”
앞을 막았던 가이사의 팔이 스르륵 내려갔다. 참 이상했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