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 없습니다
1권
1. 커다란 흐름
니네이나 세이아. 그녀의 불행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니네이나의 어머니인 로페니아는 배 속에 잉태한 태아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니네이나의 외가인 샤사롯이 역모죄로 몰려 참형당하는 날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로페니아는 아이는커녕 제 한 몸도 추스르지 못했다. 로페니아는 급격한 스트레스와 충격으로 조산했고 공작가의 적녀는 어머니의 죽음과 맞바꾸어 태어났다.
다른 신생아의 반밖에 안 되는 체구와 깡마른 사지. 숨은 희미했고 심장은 가냘팠다. 그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게다가 니네이나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마저 있었다. 반역 가문의 핏줄인 그녀는 공작가의 골칫덩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인 루베니오는 공작의 장남일 뿐 공작은 아니었다. 만약 루베니오가 차기 공작이 되고 그 뒤를 니네이나가 잇는다면 공작가는 반역자의 핏줄을 수장으로 삼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니네이나도 어머니인 로페니아와 함께 죽었어야 했다는 말이 나돌며 루베니오의 자리도 위태로워졌다.
루베니오를 따르는 자들은 눈물로 읍소했다.
―따님을 버리셔야 합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약한 딸이었다.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몸이었다. 그러나 루베니오는 첫 딸을 버릴 수 없었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가 남긴 그의 혈육이었다. 그러나 딸을 호시탐탐 죽이려고 드는 공작을 이길 수도 없었다. 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내 아이에게 어머니는 없다. 이 아이는 오로지 내 아이일 뿐이다.
루베니오는 피눈물을 삼키며 로페니아를 버렸다. 죽어서 부정당한 로페니아는 로페니아 샤사롯으로 돌아갔다. 니네이나는 로페니아와 상관없는 루베니오의 핏줄이 되었다. 루베니오는 아내를 부정한 대가로 아이를 살렸다.
―여자 하나에 미쳐서 제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공작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그를 압박했다. 후계자 자리를 박탈하겠다는 위협은 물론 가문에서 내쫓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욕심 많은 공작은 제 핏줄에게도 악독했다. 그러나 공작에게 루베니오는 버리기 아까운 물건이었다. 아들 셋 중 가장 영특하고 인물도 좋아 어디 내세우기 적당했기 때문이다. 공작은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사용했다.
―사사로운 정에 휩쓸리지 말라고 했거늘! 루베니오, 너를 계속 지켜보겠다. 네가 잘한다면 그 아이도 살 것이고 네가 못한다면 그 아이도 죽을 것이다!
니네이나를 낳았을 때 루베니오는 막 성년이 된 열여덟 살 청년이었다. 당시 그의 힘으로는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문에서 완전히 내쫓기는 순간 더 이상 딸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네가 내 자리를 무사히 이을 때까지는 저것을 잊고 살아라. 나 몰래 만나러 간다면 그때야말로 참지 않겠다!
공작은 니네이나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아들과 멀리 떨어트려 놓으면 쓸모없고 허약한 아기 따위는 죽어 버릴 거라고.
루베니오도 아버지의 생각을 알았지만 아버지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니네이나를 멀리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보지도 못한 아기는 아버지의 품에서 자랄 수도 없었다. 루베니오는 눈시울을 붉히는 대신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아가야, 내가 너에게 세상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렴.
아직 말도 못 알아듣는 아기를 붙들고 기다려 달라고 부탁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참혹함을 누구도 모를 것이다. 루베니오는 아기의 손을 꽉 붙잡고 까맣게 죽어 말라붙은 감정만 뚝뚝 떨궜다. 다 죽어 가는 나무가 어린 나무를 위해 최대한 천천히 아스라이 쓰러지는 것 같았다.
―제발, 살아 다오.
그렇게 니네이나와 루베니오는 이별했다. 니네이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루베니오는 잊지 못할 이별이었다. 그러니 니네이나는 참 가엽고 가련한 여자였다. 그녀는 결국 아버지를 기다려 주지 못했으니까.
이후 루베니오가 만나게 될 것은 이미 죽은 딸의 싸늘한 시신뿐이다. 그토록 바라 왔음에도, 오로지 그 한 가지를 바라 왔음에도, 그들은 만나지 못한다. 죽은 니네이나를 루베니오에게 데려다주는 건 여주인공인 메이아였고, 원래라면 니네이나의 몫이었을 모든 건 메이아에게 주어졌다. 루베니오가 메이아를 딸처럼 사랑했던 건 아니지만 나쁘게 대한 것 또한 아니었다. 그는 메이아에게 감사했다. 목적 잃은 그는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메이아에게 모든 걸 해 주려 했다. 딸에게 해 주지 못한 것들을 그녀에게 쏟아부었다.
메이아는 노예라는 신분을 버리고 공작가의 공녀가 되어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루베니오는 메이아의 끝이 해피 엔딩에 다다랐을 때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자살해 버렸다. 이게 끝이다.
* * *
‘하하. 끝! 끝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누구라고?”
“주인…….”
“이름! 이름 말이야.”
“……니네이나 세이아 님이십니다.”
벌써 몇 번째 듣는 말인데도 충격을 받았다. 방금 전 니네이나가 된 나는 비루한 몸뚱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침대 위로 넘어갔다.
“주인님!”
복도를 닦다가 내게 불려 온 노예는 다급히 나를 붙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나 방에 있던 의원과 하녀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들을 다 물려 놨기 때문이다.
노예는 나를 눕혀 놓고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내가 노예를 붙잡는 게 빨랐다.
“넌…… 누구라고?”
요사스러울 정도로 창백하고 앙상한 손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손등을 내려다보던 노예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메이어입니다.”
이것 역시 세 번째 반복되고 있었으나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고작 감정의 동요 정도로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렸다.
이 비루한 몸뚱이!
분기에 차 침대를 팡 때렸다.
“윽!”
“주, 주인님! 괜찮으세요?”
메이어가 살짝 붉어진 내 손을 붙잡으며 나를 살폈다.
니네이나는 원래 노예의 손이 제게 닿도록 허락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니네이나…… 내가 니네이나란 말이지?”
“예…….”
“너는 메이어고?”
“예. 제 이름은 메이어입니다.”
거짓말!
노예의 이름은 메이어가 아니라 메이아였다. 나는 그걸 알았다. 왜? 책 속에서 봤으니까. 그리고 참혹한 사실 하나를 더 알고 있다.
니네이나가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거라는 것.
니네이나는 즉 나다.
“나…… 곧 죽겠는데?”
나는 결국 깨어난 지 1시간도 채 안 되어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늘 자던 침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낯선 곳이다.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17세기 유럽 왕실을 복원한 듯한 화려한 방이 보였다. 그래. 거기까지도 좋았다. 말이 안 되긴 하나 장난기 많은 룸메이트가 깜짝 파티를 연 것이라고 우기기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이 변했다. 동양인의 피부가 아니었다. 백색증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눈부시게 흰 피부였다. 놀라 벌떡 일어나자 방 안의 서양인들이 와르르 모여들어 낯선 이름을 외쳤다.
“니네이나 님!”
그들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의사들처럼 보였다. 소름이 끼쳤다. 말도 안 되는 걸 떠받드는 광신도 집단에 납치당해 생체 실험이라도 당한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온몸이 다 아팠다. 어디가 아프다고 특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구역질이 났고 속은 메스꺼웠으며 손발은 덜덜 떨렸다. 극심한 알레르기 쇼크라도 온 걸까 의심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심심풀이로 읽고 잤던 책에 빙의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됐다. 어떤 사람이 믿겠는가? 이 비과학적인 현실을!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꿈이라기에는 모든 고통이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현실을 부정해 가며 몇 번이나 자다 깨기를 반복하니 받아들이게 됐다. 집에 대한 그리움과 모르는 곳에 떨어졌다는 아득함을 아파할 새가 없었다. 죽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니까.
“하필이면 왜 이 몸…… 쿨럭! 쿨럭! 켁!”
분개에 차 유리 조각 같은 몸도 잊고 힘껏 성을 내자 건조한 목구멍을 바람이 쿡 찔렀다. 헛구역질과 기침이 동시에 올라와 정신없이 캑캑거렸다. 새하얀 얼굴이 빨갛게 물들도록 기침은 그치지 않았다. 한참 지독한 기침에 시달리고 나니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끄으……!”
“주인님!”
내가 죽은 듯 침대에 늘어지자 하녀들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입가에 젖은 천을 갖다 댔다.
“주인님, 제발 식사라도 하세요. 이러다 정말 큰일 나요!”
‘내가 안 먹고 싶어서 안 먹는 게 아니니까 문제죠.’
나는 생리적으로 올라오는 눈물을 삼키며 김이 폴폴 올라오는 고소한 수프를 씁쓸한 눈으로 바라봤다. 시위하자고 이러는 게 아니었다. 이 몸뚱이가 마음에 안 차는 건 당연하지만 굶어 죽을 것만 같은 극심한 허기를 앞서는 건 아니었다.
말은 바로 하자.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것이었다. 음식을 넘길 수가 없다. 왜? 꿀렁거리며 넘어가는 감각이 너무나 역겨웠기 때문이다. 인생은 곧 먹을 것이라는 일념으로 살아온 내게는 땅이 무너지고 바다가 솟구치는 악몽이었다.
“주인님…….”
하녀들은 재촉했지만 목이 따끔거려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딱 한 입만이라도 드셔 보세요. 향이 많이 나지 않게 신경 써 가며 끓였어요.”
그에 조바심을 느낀 듯 나이 많은 하녀 한 명이 아이 달래듯 살살 꼬드겼다.
‘아…… 진짜 힘들다.’
걱정하는 마음에서 저런다는 건 알지만 몸이 아프니 속살거리는 목소리도 따가웠다.
“아가씨…….”
하나 다행인 건 하녀들은 그들의 주인이 달라진 걸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늘 그녀 곁에 있었지만 니네이나는 지금처럼 죽은 듯 누워 지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할 말은커녕 끙끙 앓기만 했으니 내가 니네이나 몸에 들어온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몸이 아파 죽겠는데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거 하나가 유일한 위안, 은 무슨! 위안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당장 이 몸에서 꺼내 달라고!
“읍! 쿨럭!”
“꺄아아! 주인님!”
이 몹쓸 몸뚱이야! 속으로 화내는 것도 안 되니?
한참 화를 눌러 참은 뒤에야 소강상태가 되었다. 뭐라도 먹고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그럼 한 입만…….”
숨을 색색 몰아쉬며 건조하게 말했다. 혹사당한 성대를 억지로 쥐어짜 낸 목소리인데도 예뻤다. 다른 사람 몰래 눈물을 훔친 하녀가 칭찬하듯 젖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정리해 줬다.
“잘 생각하셨어요.”
하녀는 아가가 쓸 법한 크기의 숟가락으로 아주 조금씩 수프를 흘려줬다. 씹을 필요도 없이 묽은 수프였다. 식감은 없었으나 맛은 좋았다. 분명 좋았는데……. 죽을 것 같다. 이건 죽을 맛이다!
“우웨에에에엑!”
“꺄아! 주인님!”
그날, 나는 토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 * *
원작의 니네이나는 보통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방 안에는 온갖 호사스러운 것들이 많았다. 이런 걸로라도 눈요기하라는 건지 매일 새로운 꽃과 새로운 장식물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그중 번쩍번쩍한 황금 여신상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몰랐지만 그것은 니네이나의 안녕과 축복을 기원하며 루베니오가 몰래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단순한 여신상에 불과했다.
‘신이시여,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여신상은 화려한 빛을 뽐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프니까 다 서러워서 조금 울컥하고 말았다.
‘저요, 나라에 빚이 조금 있기는 한데 누구나 다 있는 학자금이에요. 졸업하면 그거 다 갚을 거고요. 돌려보내 주시면 기부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착하게 살게요. 혹시 제가 제 몸 가지고 불평했던 걸 기억하신다면 다 잊어 주세요. 이제는 불만도 불평도 없이 제 몸을 사랑할게요. 네?’
아픈 사람이 왜 신경질적이 되는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하물며 대답 없는 여신상도 미웠다.
“내 몸으로 돌려보내, 윽!”
화가 나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고꾸라지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나무라며 흉통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 몸은 갓 움튼 새끼 새의 털처럼 나약해서 딱 그 정도로 부드럽게 다뤄야 했다.
‘차라리 갓난애가 더 낫겠어.’
갓난아기의 몸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기는 젖이라도 빨지 않나? 이 몸은 수프 한 숟갈 멀쩡히 넘기는 법이 없었다. 안 죽고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책 빙의의 정석은 두 가지 아니었어? 원작 인물 피해 살아남기랑 원작 인물 도와줘서 살아남기. 그런데 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건데?’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오직 하나,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책 속 니네이나는 스무 살 되는 해 겨울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운명이었다. 하녀들에게 물어 알게 된 정보에 따르면 지금은 스무 살 되는 해 가을이었다. 즉, 죽음이 3개월 정도밖에 안 남았다.
‘당장 코앞이라고! 3개월짜리 인생 살라고 이딴 몸에 집어넣었냐!’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었지만 앞은 절벽이었다. 왜? 니네이나의 죽음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지금껏 살아남은 것 자체가 신기했던 몸이 유독 추웠던 겨울을 못 이긴 탓이었다.
‘따뜻한 곳으로 가야 하나?’
이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여행 같은 짓을 했다가는 이 몸이 당장 죽어 버리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니네이나의 사인은 추위가 아니었다. 추위가 몸을 약하게 했을 순 있어도 주된 원인은 되지 못했다. 니네이나의 죽음은 나약한 몸에서 비롯한 것이다. 온갖 약과 보양식으로 간신히 명줄만 붙여 놓은 몸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는 혼자 걷지도 못했다. 이미 한계가 왔던 것이다. 겨울의 추위가 한계를 앞당겼을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그럼 어떻게 한담?’
고민한다고 달라질 일은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조건만 필요했다.
‘물어 뭐 해? 하나밖에 없잖아! 건강해져야지!’
일단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시위하며 늘어지는 몸을 추슬러야 했다. 딱히 병이 있는 건 아니니 방법은 간단했다. 잘 먹고 재활 운동도 꾸준히 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정도였다.
‘스트레스를 안 받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이 몸에 들어온 건 니네이나가 지독한 감기를 앓은 직후였다. 안 그래도 상태가 꽝인데 메이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악을 쓰기도 했고 커다란 충격도 받았으니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나는 활동적으로 움직이기를 좋아했다. 방 안에서, 그것도 침대 위에서만 생활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악바리 근성이 있었다. 진짜 해야 할 건 해내는 끈기가 있었다.
‘의사가 포기한 말기 암 환자 중에서도 살아난 경우가 있다고 하잖아. 산에 들어가서 좋은 공기 마시고 건강한 식사 하고. 나라고 왜 못 해? 나도 살고 싶은데.’
건강. 어려운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쉬운 것이었다. 인간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즐거움 몇 가지를 포기하면 됐다.
‘살 수 있어. 살 거야. 이런 곳이라도, 이런 몸으로라도…… 살아남을 거라고.’
바뀐 환경. 볼 수 없게 된 소중한 사람들. 이따위 몸.
조금만 생각에 잠겨도 밀려오는 우울과 슬픔을 억지로 밀어냈다. 희뿌연 안개 속처럼 음침했던 머릿속을 스스로 채워 넣었다.
‘다른 생각은 말자. 먹는 거! 먹는 거만 생각하는 거야!’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렸다. 학교 앞에서 파는 바삭하게 튀긴 돈가스와 엄마가 해 준 잡채, 그리고 단골 가게에서 파는 수제 마카롱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대부분 이곳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이런 몸 상태로 먹을 수도 없었으나 생각만으로 식욕이 돋는 것 같았다.
이리이리. 손을 미세하게 움찔거리며 방 한쪽에 선 하녀를 불렀다. 종이 있는데 하녀들이 상주하는 이유가 있었다. 종도 못 흔들 만큼 아플 때가 있으니까.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이 익숙했던 하녀는 내 입가에 귀를 갖다 댔다.
“먹을 거…….”
좀비처럼 팔을 흐느적거리며 떠먹는 시늉을 했다. 워낙 예쁜 몸이라 힘겨운 움직임도 사랑스러웠으나 어딘가 광기가 느껴졌다. 살아남겠다는, 살아남아 이 지옥을 탈출하겠다는 욕망이었다.
* * *
어릴 때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있다. 음식 남기면 나중에 지옥 가서 남긴 음식 다 먹어야 하는 벌을 받게 된다고.
그 지옥에 떨어진 것 같았다. 주어지는 모든 음식이 역겹게 느껴졌다. 사흘쯤은 먹는 즉시 토했다. 이 몸의 원주인이 왜 그렇게 먹는 걸 싫어하고 먹는 걸 강요하는 사람에게 신경질을 부렸는지 알 수 있었다. 토하는 데 체력을 다 소모해 기껏 먹은 게 소용없는 지경이었다.
“집사님, 주인님 좀 말려 주세요…….”
토하다 지쳐 까무러치는 일이 나흘 동안 열 번을 넘기자 그토록 먹으라 했던 사람들이 제발 먹지 말라고 애원해 왔다. 그 후 음식 대신 위장 기능을 북돋아 주는 보약을 마셨다. 이 세계의 약은 효과가 뛰어났다. 보약을 먹은 지 며칠 지나자 구토가 멈췄다.
‘진작 이렇게 할걸…….’
그러나 지독한 역겨움은 그대로였다. 꿀렁꿀렁 넘어가는 걸쭉한 약을 마시고 나면 몇 번이나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건드리지 말라고! 난 시방 굉장히 위험한 짐승이야!’
나는 온몸으로 독기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모든 것을 노려봤다. 약을 노려보고 그걸 가져온 하녀도 노려보고 손에 든 수저까지 눈으로 할퀴어 댔다. 그렇게 독하게 발버둥 친 후에야 눈물을 쭉쭉 뽑아 가며 약을 마실 수 있었다.
토악질은 하지 않았지만 속은 계속 메스꺼웠다. 그래도 일어나자마자 또 약을 찾았다. 그 모든 게 반복되었다. 소화가 어느 정도 가능해졌을 때에는 조금씩 나눠 가며 온종일 먹었다.
“주, 주인님이 악마에 씐 건 아니겠지요?”
“불경스러운 말은 하지도 마! 주인님은 단지…… 그저…….”
내가 생각해 봐도 평범한 기준으로는 설명 안 될 독기였다. 스푼을 절대 놓지 않는 내 행동에 먹지 못해 죽은 귀신이 붙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먹고 삼키고 소화해서 흡수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단 하나, 살고 싶다는 갈망 때문이었다.
전쟁 같은 날이 그렇게 보름을 넘겼다. 너무 떫어 미각까지 통째로 사라지게 했던 보약과 무엇으로 만든 건지 짐작도 안 되는 갖가지 보양식 재료가 효과를 발휘했다. 니네이나의 몸이 현대인의 몸보다 회복력이 현저히 좋았기에. 평범한 사람은 부러진 뼈도 일주일이면 붙는다는 이 세계의 회복력이라 가능한 기적이었다.
하여 보름 후의 나는 아주 조금 건강해졌다. 얼마만큼이었냐면 갓 태어난 새끼 기린보다 연약한 다리로 침대 주위를 한 바퀴 돌았을 정도였다.
“주인님이 혼자 걸으셨다!”
나는 그저 누구의 부축도 없이 걸었다.
“곳간을 열어! 축제를 벌이자!”
“오늘을 ‘축! 주인님 혼자 걸으신 날’로 기록해!”
“그, 그런 건…… 기록하지 마!”
내 수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나 몰래 잔치는 벌어졌다.
* * *
그리고 그 소식은 니네이나의 아버지인 루베니오에게까지 발 빠르게 전달됐다. 그녀로 인해 커다란 흐름 한 줄기가 처음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루베니오는 니네이나가 어떻게 지내는지 주기적으로 보고받고 있었다. 그것으로 안심이 되지 않아 종종 믿을 수 있는 자를 보내 살폈다. 또한 니네이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그것이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무조건 보고하라고 일렀다. 그가 그런 식으로 딸의 소식을 전해 들은 게 20년이었다. 그런데도 처음이었다. 니네이나가 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인 것은.
“…….”
아이가 아프다. 감기에 걸렸다. 증상이 심해 괴로워한다.
겨울을 보내기 힘들 것 같다.
그는 부정적인 보고만 무수히 받아 왔다. 니네이나가 스무 살을 넘겼을 때 또 더 이상 살기 힘들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버텨 주면 되는데.
“…….”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만큼 이 일이 중대하여 그랬다.
“집사는 그가 얼마나 성장했을지 가늠할 수 있나?”
“……아델만 백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늘 궁금해하고 있네.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과연 어디까지 완벽할 수 있을지.”
“……주인님의 판단을 믿습니다.”
“너무 많은 걸 걱정하고 있었어. 그게 결코 버리지 못할 짐이라고 믿으며.”
“…….”
“암살 마법을 제거해야겠다.”
“주인님!”
“최대한 시간을 벌겠다. 넌 그에게 내 말을 전해라. 약속을 지켜 줘야겠다고.”
수천 번 편지를 곱씹던 루베니오가 내린 결론이었다.
“못난 아비가 살고자 하는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하겠다. 그러니 너는 부디…….”
‘울지 말렴. 아프지 말렴.’
그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정해진 대로 흐르던 물길을 직접 비틀었다. 그의 손에 움큼 잡힌 물줄기가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 *
악몽의 보름이 지나자 혼자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손목 힘이 없어 종종 스푼을 떨어트리고 음식물을 흘렸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꿋꿋이 식사했다.
“앗!”
철퍽! 누런 호박 수프가 깨끗한 식탁을 적셨다.
“한심해 죽겠네. 이번이 대체 몇 번째지?”
형편없이 젖은 식탁을 보니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한두 번이어야 그러려니 하지, 한 번의 식사에 수십 번 흘리니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세 살짜리 아기가 차라리 낫겠어.”
좀 더 분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보셨어요? 주, 주인님이…….”
“다들 정숙하렴. 주인님이 신경 쓰시잖니!”
“그렇지만!”
“후우…… 대신 작게 말하도록 해.”
그렇게 또 한 숟갈 떠먹으려 할 때였다. 외면하려고 했던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총알처럼 날아와 뼈에 박혔다.
“…….”
입을 꾹 다물고 말없이 수프를 한 입 먹었다. 이번에는 흘리지도 않았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야!”
침착해지려 노력하며 하녀들을 달래던 하녀장이 눈을 부릅뜨고 두 손을 하늘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그에 맞추어 하녀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화답했다.
“주인님이 혼자 식사하고 계셔!”
“벌써 세 스푼이나 드셨어!”
“어쩌면 혼자 한 그릇을 다 비우실지도 몰라!”
“그럼! 주인님은 오늘도 해내실 거야!”
자기들 딴에는 안 들키겠다고 속닥거리는 것 같았는데 이 몸의 청력은 멀쩡했다.
‘이게 칭찬받을 일이야? 욕이 아니라?’
나는 헨젤과 그레텔의 빵 조각처럼 점점이 떨어진 수프를 보며 고민했다. 나를 말 잘 듣는 멍멍이로 조련하기 위해 저렇게 한 거라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도 사람이라 정신을 잠깐 놓으면 우쭐하게 되었다.
‘훗. 내 스푼질이 좀 능숙하긴 하지?’
바로 이렇게.
“…….”
그러나 곧바로 찾아오는 허탈함은 막을 수 없었다. 조련당할까 두려워서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조련력이 만 렙이야. 저 무서운 사람들.’
저기에 휩쓸리면 어떤 우스꽝스러운 생각에 빠질지 알 수 없었다. 서둘러 떠받들어 주지 못해 안달 난 눈들을 외면했다.
“꺄아아아!”
고개를 옆으로 휙, 힘 있게 돌리자 높은 환호성이 들렸다. 서로 손뼉을 짝짝 쳐 가며 환희하니 모른 척하려도 할 수가 없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왜 좋아하는 거야!’
무섭고도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주인님! 주인님! 우유 빛깔 주인님!”
‘제발 그만해…….’
처음 이 몸에서 눈을 떴을 때는 습관적으로 존댓말을 사용하고 말았다. 니네이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라 하녀 여럿에 집사까지 붙어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 주인님이 곧 돌아가시려나 봐!’ 하는 눈으로 울먹거리는 탓에 할 수 없이 까칠하고 도도한 니네이나처럼 행동했더니 다들 좋아 죽으려 했다.
건드리는 손을 찰싹 쳐 떼어 내면 얼굴을 붉혔고 노려보면 더 노려봐 달라고 눈을 반짝였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만이 니네이나가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였을 것이다. 화내고 짜증 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다였으니까. 그 반응만이 죽은 사람처럼 늘어진 그녀를 살아 있다고 생각하게 했으니까.
“하아…….”
수프 한 숟갈을 떠먹을 때마다 조마조마해하며 애간장이 다 녹은 얼굴로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이래서 니네이나가 불쌍했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죽음이 보다 가까워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테니.
‘나는 달라. 너처럼 포기 안 해.’
먹는 데 집중해야 했다. 침대 커튼을 확 내려 버렸다.
“주인님이! 주인님이 커튼까지 내리셨어!”
뒤따라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는 애써 무시했다. 그제야 식사 시간이 조용하고 아늑해졌다. 밥을 든든히 먹었으니 그다음으로 중요한 청결도 챙겨야 했다.
“호호.”
낯선 여자들이 몸을 쪼물딱쪼물딱 만지며 여기가 예쁘네, 아니야 여기가 더 예쁘네 했다. 민망해서 물속에 얼굴을 넣어 버릴 뻔했다.
‘그랬다면 죽어 버렸겠지!’
예민한 이 몸은 잠깐 숨을 못 쉬어도 꼴깍 넘어가 버릴지 몰랐다.
“주인님은 배꼽도 어쩜 이렇게 고우세요? 백옥 같은 것 좀 봐.”
“여기 이 솜털들은 또 어떻고요? 금실을 햇볕에 말려 색을 뺀 것만 같아요.”
“그래도 전 주인님의 새끼손가락이 제일 사랑스러운 것 같아요. 마디마디가 얼마나 유려하신데요.”
‘배꼽, 솜털, 새끼손가락…….’
또 시작된 하녀들의 수다를 듣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좋아서가 아니었다. 민망해 죽겠어서 그랬다. 왜 저런 이상한 것들을 칭찬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 끝나?”
그들에게 잡힌 팔을 슬쩍 치우려 하자 하녀들의 뺨이 발갛게 변했다.
“거의 다 했어요. 이제 씻어 내기만 하면 돼요.”
“……하는 말이 아까부터 똑같잖아.”
“어머, 어머. 진짜예요. 정말 다 했어요.”
목욕을 지독히 싫어하는 고양이를 씻길 때가 떠올랐다. 집사들이 ‘다 했어! 다 했어!’ 하는 것과 같았다. 즉, 거짓말이었다.
“…….”
결국 시간이 꽤 지나서야 욕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주인님, 조심히 걸으세요.”
하녀의 부축에 의지해 침대로 걸어갔다. 더운 물에서 씻고 나오면 머리가 어지러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걸어야 했다. 까딱하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찬물에 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즉시 감기행일 테니.
‘불편해 죽겠어.’
하녀에게 의지해 비틀비틀 걷는데 몇 걸음 안 될 침대가 지독히 멀어 보였다. 빗자루보다도 못한 몸에 들어온 게 또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쓸모없는 몸뚱이 같으니.”
“흑…….”
“흐으…….”
“……?”
어디선가 들리는 울먹임에 옆을 돌아봤다. 다들 안쓰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쓸모가 늘었어.”
쏟아지는 눈물 폭탄에 움찔한 내가 어색하게 변명했다. 하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맞아요. 주인님은 혼자 식사도 하시고.”
“운동도 하시고.”
“누우실 수도 있어요!”
장단이 척척 맞았다. 일부러 저러는 건가 의심스러웠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되었다.
‘수십 번 흘리면서 수프 한 그릇 겨우 먹는 게 식사라면 식사일 것이고, 침대 주위를 겨우 걷는 게 운동이라면 운동일 것이고, 눕혀 주는 손에 의지해 자세만 살짝 바꾸는 게 혼자 누울 수 있는 거라면…… 그런 거겠지. ……그래. 좋게 생각하자.’
합리화를 시도했다.
‘생각할수록 비참하기만 하잖아!’
결과는 실패였다.
“으으!”
나는 젖은 빵을 삼키듯 축축한 머리칼을 꾹 움켜쥐었다.
“주인님의 머리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빛깔이에요. 금과 은이 함께 녹아든 느낌이니까요.”
“희끄무레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하녀들은 히히 웃으며 주인님의 소중한 머리칼을 정성껏 빗겼다. 반쯤 해탈한 내가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들어와.”
허락을 받은 집사가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외쳤다.
“주인님! 큰 주인님께서 사람을 보내셨어요!”
집사의 뒤로 장신의 남자가 들어왔다. 집사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서 뒤에 서 있는데도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이라니? 누가……?”
차갑고 냉엄한 분위기가 흐르는 선이 짙은 얼굴이었다. 눈가에 드리운 그림자는 어두웠고 빛 한 점 허락하지 않는 눈동자는 놀랍도록 고요했다. 아름다운 용모보다 감정 한 조각 없이 싸늘히 얼어붙은 두 눈이 지독히 아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헐떡거리며 소름이 돋았다.
‘죽은 사람의 눈 같아…….’
삶을 등지고 초점을 잃어 흐려진 눈이었다. 하다못해 한(恨)으로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한 시체의 눈이 저 남자보다는 뜨거울 것이다.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올 때마다 몸에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생존 본능과 직결된 것이기도 했다.
‘무, 무슨 짓을 하려고!’
놀란 나는 움찔 눈을 감았다.
“……입니다.”
“네?”
그러나 남자는 나를 위협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천천히 몸을 굽혔다.
“가이사 아델만입니다.”
단단한 목소리가 이름을 전했다. 내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가이…… 쿨럭!”
내 기침이 가이사의 얼굴로 와장창 쏟아졌다. 나는 정중히 인사하는 남자에게 보답으로 침 테러를 선사했다.
음. 책에서 읽은 바로 그는 결벽증이 있었다.
“…….”
가이사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그의 붉은 눈알이 아래를 쓱 내려다봤다. 그런다고 자신의 뺨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도 그걸 알 것이다. 어지간하여서는 쓸모없는 일을 하지 않는 그가 그만큼 불쾌했다는 의미였다.
아래를 향했던 눈알이 도록 굴러 위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게 된 순간 나는 심장이 짓뭉개지는 것 같았다.
“끄…….”
‘죽인다.’도 아니었다. ‘죽이고 싶다.’라는 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고작 그 정도의 감정일 것이고 살기도 아닌 살기의 편린 정도였다. 그러나 심장이 덜커덕 떨어지는 순간 내장이 다 뒤틀리는 것 같았다. 가슴을 쥐고 휘청거리던 내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
일부러 고통을 준 게 아니었다. 그 정도의 감정도 없었다. 지독한 무관심. 그는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날 그냥 내버려 둘 거야.’
넘어져 다치든 말든 보고만 있을 거라고 판단한 순간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나를 붙잡은 건. 옅게 흐르던 살기도 씻은 듯 사라진 후였다.
“괜찮으십니까?”
“…….”
내 대답은 ‘전혀 아니요.’였다. 내상이란 걸 당한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이게 그런 것 같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무협 소설에서 장풍 쏘면 ‘끅!’ 하며 피 토하는 거.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다행히 피는 올라오지 않았지만 각혈하는 정도로도 죽을까 봐 두려웠다.
“아직 3개월은 더 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죽는 건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눈을 뜨면 어지러워서 이렇게 누워 있는 게 최선이었다. 붙잡은 게 장갑 낀 가이사라는 걸 알았다면 없는 힘이라도 넣어 벌떡 일어나려 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눈을 감은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당신은 죽지 않을 겁니다.”
“…….”
“당분간은.”
“죽지 않으면 죽지 않는 거지, 당분간은 또 뭐…… 응?”
그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린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며 경련하다가 슬쩍 떠졌다.
“으악!”
“소리 지를 기력은 있는 것 같아 다행……”
“에에치! 콜록! 콜록!”
놀란 목구멍이 정신 차리라는 듯 기침을 쏟아 냈다. 처음을 재채기로 시작했으니 아밀레이스들이 또 가이사를 강타했음은 당연했다.
“…….”
소름 끼치는 침묵이었다.
“미, 미안합니다…….”
가이사의 가슴 앞에 얌전히 두 손을 모은 나는 그를 살짝 밀어내며 일어나려 했다.
“하.”
가이사는 복부 근육 형성이 제대로 안 된 아가들이 일어나려 꼬물대듯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봤다.
나도 수치스러워!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라고!
어지간해서는 표정이 변하지 않는 그가 벌써 두 번이나 표정을 바꿨으니 나는 나름 선방한 편이었다. 하나는 불쾌감이었고 하나는 황당함으로 인한 것이었어도.
그는 무척 귀찮아 보이는 얼굴로 내가 일어날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 줬다.
“저…… 방금 전에 양치했거든요.”
그의 도움으로 일어나서 조심스레 변명했다. 가이사의 결벽증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아니, 살려만 달라고요.’
그 시선을 슬쩍 피하며 ‘크흥!’ 하고 코를 삼켰다.
“괜찮습니다.”
가이사가 잠시 뒤에 말했다.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어조였다. 누가 봐도 예의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 괜찮아 보이시는데…….”
목숨이 등불 같은데 쓸데없이 솔직했다. 성격이 원래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눈을 슬쩍 들어 바라보자 곧장 꼬리를 말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씨, 씻으실래요?”
방금 씻고 나온 욕실을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보통은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 게 먼저일 텐데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침 세례를 했다고 해서 씻기를 권하지 않는다. 사과와 함께 닦을 걸 건네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수건을 놔두고 씻기를 권했다. 수건으로 닦아 내는 것이 그를 더 불쾌하게 하리라는 걸 아는 것처럼 말이다. 뜨끔했지만 위기를 느낀 생존 본능이 강력하게 발동했다.
“어…… 반대로 생각했을 때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당신의 입장이라면 지금 상황이 썩 유쾌하진 않을 것 같거든요. 그렇다고 수건으로 닦아 내면 더 묻는 느낌이라 찝찝할 것 같고…… 씻는 게 제일이잖아요.”
‘내 기준이 아니라 당신 기준이겠지만.’
어물어물 말하기는 했으나 딱히 이상할 건 없는 내용이었다.
‘휴…….’
가이사가 날카로운 시선을 거둔 걸 느끼고 안도했다.
“괜찮습니다.”
그는 굳이 씻을 필요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당신 안 괜찮아 보인다니까.’
나는 즉시 부정했다. 물론 속으로만.
“당신의 아버지가 제게 부탁한 게 있습니다.”
그는 이 만남을 이만 끝맺고 싶은 듯 찾아온 이유를 꺼냈다.
“……그, 그래요?”
“예.”
“아…… 그렇구나.”
이 상황이 몹시 어색했다.
‘그래서 어떡하라는 거지?’
이마로 식은땀이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눈알만 굴리는 나를 가이사가 지그시 바라봤다. 숨이 또 콱 막혀 들었다.
“사람들을 물려 주시겠습니까? 둘만 남았으면 합니다.”
그는 무서운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정말 싫었으나 사람들이 있다고 그가 목적을 못 이룰 것 같지는 않아 그의 말에 따랐다.
“잠깐 나가 있어.”
몇 번 해 봤기에 어렵지 않았다. 메이어와 둘만 남으려 했을 때는 반발이 심했던 하녀들도 이번에는 별말 없이 나갔다.
“네, 주인님.”
대답도 깔끔하고 문도 틈 없이 닫았다.
‘주인이라며? 이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거야……?’
그들도 그가 만만치 않은 사람임을 느낀 듯했다.
‘그건 그렇고, 가이사는 왜 벌써 나타난 거야?’
가이사 아델만. 내가 기억하는 그의 등장 무대는 이곳이 아니었다. 그는 주인공 메이아가 수도에 정착해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루베니오의 부탁을 받아 메이아의 데뷔를 에스코트해 주기 위함이었다. 가이사는 그 후로도 종종 책 속에 등장했다. 대부분 위험에 빠진 메이아를 구해 주는 역할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남주이거나 남조일 거라고 예상했다. 남주의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지며 그가 남조인 게 거의 확실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가이사는 메이아와 아무런 기류도 없었다. 애정 루트를 타지 않는 건 물론이거니와 우정 루트도 타지 않았다. 메이아를 지키는 것. 그의 행동은 정말 그게 다였다. 메이아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자 볼일이 끝났다는 듯 돌아갔다.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몇몇 사람들은 그가 실제로는 흑막이거나 최종 보스일 거라고 추측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결말에 도달할 때까지 그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루베니오가 죽자 볼일 끝났다는 듯 뒤도 안 돌아보고 메이아의 곁에서 사라졌다.
독자들은 분노했다. 이게 뭐냐고. 가이사는 대체 누구냐고.
작가는 외전에서 가이사의 과거를 풀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과거를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떨어져 버렸으니까.’
내게 가이사는 풀지 못할 미제로 남았다. 아마 이 세계에서도 가이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루베니오 정도일 것이다. 그마저도 얼마나 알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루베니오는 가이사의 정체에 대해 묻는 메이아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내가 가이사에 대해 아는 건 그가 루베니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메이아를 지켜 줬다는 것뿐이었다.
“루베니오와의 약속에 의거하여 제가 당신을 지켜 드릴 겁니다.”
그의 말 역시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한 가지 이상한 건 그가 왜 이 시기에 나타났냐는 것이다.
‘무엇이 바뀐 거지? 몸 하나 챙기기도 버거운데 원작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내가 고민하는 사이 가이사가 조건을 덧붙였다.
“당분간은.”
당분간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무섭게 들리기는 또 처음이었다.
‘저건 설마 위험한 일이 있을 거라는 소리인가?’
건강해지는 일만도 벅찬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설명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가이사는 곁가지로만 대충 읊어 놓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무정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속을 달래며 물었다.
“질문해도 되나요?”
“예.”
“루베니오…… 그러니까 제 아버지와…… 하신 약속이 뭔가요?”
“…….”
“음…… 당분간이라는 건 언제까지를 말하는 거예요?”
“약속을 지킬 때까지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인데요?”
“…….”
이 남자 보게? 그는 질문해도 된다고 했지 대답해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은 질문인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인가? 둘 중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이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대답해 주지 않는지도 말해 주지 않았다. 엄청나게 불친절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성격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어서 빠르게 포기했다. 그가 말하지 않고자 마음먹었다면 어떤 짓으로도 그의 입을 열 수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하여 남은 건 추론이었다.
나는 가이사가 떠났던 때를 생각했다.
‘계기가 뭐였을까? 루베니오가 죽어서? 메이아가 행복해져서?’
상황이 너무 포괄적이었다. 다른 정보를 더 얻어 내기 전까지는 확정하기 어려웠다.
* * *
─모든 거래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다.
─치르겠어, 그 대가라는 거.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이라면 얼마든지.
루베니오를 처음 만났을 때 가이사는 열 살이었다. 아주 오래전 꼭 필요했던 약속이었다. 루베니오는 그의 딸을 지켜 주는 것으로 대가를 치르라고 했고 가이사는 그러겠다고 했다.
인간은 싫다. 그러나 루베니오와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건 싫었다. 가이사는 밀려드는 염증을 밀어내고 니네이나를 살펴봤다.
그는 인간에게 미(美)를 느끼지 못했다. 니네이나의 아름다움도 그에게는 한낱 겉가죽에 불과했다. 대신 그는 나약함을 느꼈다. 뼈대는 가늘어서 잘못 치면 그대로 부러질 것 같았고 몸에는 근력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약한 인간이 존재할까? 니네이나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그게 다였다.
“하나 더 물을게요.”
생명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을 하고는 모순되게도 이 눈만은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반짝였다. 삶을 갈망하는 눈이나, 추잡하거나 비열하지 않았다. 오로지 생존에만 국한한 빛이었다.
가이사는 니네이나의 눈빛을 아주 잠깐 놀라워했다.
“예.”
“당신이 여기 왔다는 건 제가 위험해진다는 뜻인가요? 제 판단이지만 지금의 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보여요.”
니네이나는 가이사가 찬 검을 넌지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 검을 보고 가이사의 무력적 가치를 짐작했다는 듯.
“필요하실 겁니다.”
“……왜요?”
니네이나는 침대를 손으로 살짝 짚었다. ‘난 침대에만 있는데 뭐가 위험해?’라는 뜻이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반지르르 빛났다. 가이사는 그 순진함이 퍽 안쓰럽다는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곧 알게 되겠군요.”
그의 행동에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가이사는 만물에 대한 자애가 없는 사람이었다. 봄볕을 쬐며 종종거리는 아기 참새를 따스하게 바라보는 것. 그런 것이 자애였다.
사람은 ‘자애’를 품고 산다. 그건 좀 더 직접적인 ‘자비’와는 달랐다. 어디에나 예외가 있듯 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는 그 자신에게조차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이루어질 가이사의 행동은 오로지 약속과 계약으로 인한 것이었다.
“네? 뭐를 곧 알게 된다는 말씀……”
와장창!
니네이나의 말은 유리 터지는 소리에 잘려 나갔다. 놀라 굳은 그녀의 머리 위로 깨진 창문 조각이 매섭게 쏟아졌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그녀를 안아 들고는 뒤로 피했다. 그의 발이 허공에 살짝 떴을 때 깨진 창문 틈으로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벙벙 굳어 있던 그녀는 알아채지 못한 속도였다.
가이사는 날아오는 화살을 지그시 바라봤다. 떨어지는 별똥별이 긴 호선을 남기듯, 시전자의 살기를 흩뿌리며 다가온 화살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피할 수도 없었다.
가이사가 손을 니네이나의 이마 앞에서 꽉 쥐었다. 그가 손을 화살촉만 겨우 지나갈 틈만 두고 조였을 때 화살이 쌩 지나갔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볼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지나치는 화살을 그대로 움켜잡았다. 타고난 반사 신경이 좋다고 하여도 믿기 어려운 반응 속도였다.
“저게 무슨……!”
니네이나의 눈에는 가이사가 손을 움켜쥐는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화살이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손에 붙잡힌 불타는 화살을 보고서야 그가 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올렸는지 깨달은 듯했다.
“지정한 대상자만 목표로 하는 암살 마법입니다.”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피부를 꿰뚫지 못한 화살이 그의 손에서 바스러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니네이나의 뇌가 뭉개졌을 것이나 이번에 뭉개진 건 그녀의 뇌가 아니라 뇌를 겨냥한 화살이었다.
“필요성은 충분히 입증한 것 같습니다.”
니네이나는 가이사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화살촉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이미 기절한 상태였기에 그랬다.
죽어 버린 눈동자가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가이사는 대답 없는 니네이나를 안아 들고는 그 방을 나왔다.
엉망이 된 방을 하녀들이 치우는 동안 니네이나는 다른 방에 누워 있었고, 가이사는 그 방에 딸린 욕실에서 몸을 씻었다. 심한 결벽증이 있는 그가 왜 바로 씻으러 가지 않고 니네이나의 곁을 지켰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으나, 기뻐하는 자는 없었다.
* * *
책 속의 니네이나는 살아오며 수천 번의 위협을 받았다. 태아일 적에는 어머니의 몸이 안 좋아 위태로웠고, 태어나서는 나약한 몸에 못 이겨 몇 번이나 숨이 껄떡 넘어갈 뻔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은 없었다. 니네이나는 아기일 때 이 별장에 온 이후로 아파 위험하기만 했지 외적인 위협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비루한 몸뚱이에 위협을 느끼는 걸로도 모자라 인간에게까지 살해 위협을 당하는 거야!’
건강해지기만 하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확신한 3개월마저 하루아침에 위태로워졌다. 그렇다. 아파 죽는 것만이 죽음이 아니었다. 죽음은 어느 때나 있고 어디에나 존재했다. 내가 일어나자마자 가이사를 찾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줘요.”
“루베니오가 공작이 되려 합니다.”
“그래서요?”
“루베니오의 반항에 공작이 화가 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화풀이당하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여기저기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으나 분노하는 대신 이성적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했다.
원작에서는 니네이나가 죽을 때까지 루베니오는 공작이 되지 못한다. 루베니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숨만 잘못 쉬어도 ‘끅!’ 하고 죽어 버릴 그의 소중한 개복치 딸, 니네이나. 그녀가 루베니오의 절대적인 약점이었다.
하여 루베니오는 니네이나가 죽을 때까지 공작에게 반항하지 않았다. 원작에서 루베니오는 조금씩 힘을 키우면서도 티가 날까 봐 전전긍긍하였고 공작의 뒤통수칠 날을 기다리면서도 딸에게 피해가 갈까 봐 신중하게 움직이려 했다. 그 신중함과 걱정이 독이 되었으니 루베니오는 니네이나가 죽을 때까지 공작이 되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런 루베니오가 공작이 되려 한다. 딸에 대한 지극한 순애가 식은 건 아닐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연거푸 당한 박탈은 딸을 향한 집착과 헌신을 키웠을 테니. 루베니오는 딸을 사랑하는 걸 멈출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부성’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만이 그가 움직이는 기준이었다. 그에게 가장 절대적인 가치가 이렇게 간단히 변할 리는 없었다. 그건 루베니오가 가진 가장 값진 패일 가이사를 내 곁에 붙여 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왜?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을까?’
내가 이곳에 와 한 일이라고는 별거 없었다. 잘 먹고 잘 자려 노력한 것 정도였다. 무언가를 바꾸기에는 너무 미미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만큼이나 달라졌다.
‘루베니오는 왜 마음을 바꾸었을까? 가이사가 당분간이라고 한 건 그가 공작이 될 때까지를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만약…… 루베니오가 공작이 되는 데 실패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행인 건 루베니오가 공작이 되지 못할 확률은 낮다는 것이었다. 단 하나의 약점만 빼고 본다면. 내가 봤을 때 니네이나는 루베니오의 약점이자 방해물이었다. 방해물이 사라지는 즉시 루베니오는 본래의 역량을 발휘했다. 니네이나가 이미 죽고 없으니 공작이 니네이나에게 설치해 뒀다는 암살 마법도 비로소 소용없어졌다.
‘아! 그 화살이 그거구나!’
갑자기 화살이 날아온 이유를 알겠다. 루베니오와 공작 사이가 틀어진 이상 그런 위협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가이사가 말한 ‘당분간’은 그런 의미인지도 몰랐다.
‘가이사가 있는데도 루베니오가 공작이 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던 건 루베니오도 가이사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기 때문이겠지. 말하자면…… 도박한 것인가?’
아니다. 루베니오가 딸이 죽을지도 모르는 일에 도박을 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루베니오는 가이사가 암살 마법을 제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적어도 90% 이상의 확신이라고 생각해야 옳았다.
다시 생각해 보자. 니네이나가 죽는 순간 루베니오의 삶의 이유가 사라진다. 이건 루베니오의 족쇄가 되어 원작의 그를 불행하게 만든다.
‘그럼 지금은 왜……? 아…….’
깨달음을 얻는 순간 나는 좀 슬퍼졌다. 그것은 루베니오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니네이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망설임. 그것이 형체 없는 족쇄가 되어 그를 칭칭 휘감고 구속했다.
나는 그를 연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처럼 판단력 좋은 사람이 딸의 죽음이 너무도 두려워 아무것도 못 하고 어쩔 줄 모르다가 딸을 잃었다. 그리고 결국 그 자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다. 얼마나 절망하고 후회하고 몸부림쳤을까?
‘그깟 쓸모없는 딸이 뭐라고. 그냥 버리면 되지. 뭘 위해 당신은…… 어?’
루베니오의 고통을 생각하자 이상할 만큼 가슴이 아팠다. 강렬히 각인된 단어가 심장 위에서 불타오르다가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누군가 일부러 정리한 것처럼 머릿속이 정돈되었다. 나는 이내 완전히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런데 가이사는 왜 둘만 남아 있자고 한 걸까? 단순히 사람이 많은 게 싫어서? 둘이 있을 때 지켜 주기 더 편하기 때문에?’
그라면 습격받을 걸 미리 알았겠지만…….
음. 확실하다. 가이사라면 전자 쪽이겠지. 다른 사람과 한방에서 숨 쉬기도 싫다는 결벽증 탓일 것이다. 누가 있든 없든 지켜야 할 대상은 완벽히 보호했을 사람이다. 메이아에게 그랬듯 니네이나가 된 나에게도.
‘아…… 머리 아파.’
오래 고민한 것도 아닌데 약한 몸 그만 혹사하라고 뇌가 쾅쾅 발버둥 치며 말썽을 피워 댔다. 건강하지 않으니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건강! 건강!’
재빨리 사고를 전환했다. 내게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우선은 좀 쉬어야겠다.
“그거 알아요?”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나는 가이사의 대답에 조금 웃었다.
“알아 달라는 말은 아직 안 했는데요.”
“알아 달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감이 좋으시네요.”
“…….”
가이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딱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할 이야기라면 그도 귀를 기울여 들어 줄 것이다. 그가 말한 ‘지키는 것’과 관련한 것이니.
“이 몸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져도 죽을 거예요.”
나는 두 뼘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침대 아래를 가리키며 강조했다.
“분명.”
그는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인간은 두부가 아닙니다.”
이곳에도 두부가 있었다. 두부는 이 세계 동쪽 지역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인데 처음에는 보존 마법 처리하여 교역했다. 현재는 살찌지 않는 치즈라고 불리며 상류층이 즐기고 있으니 흔하지는 않아도 가이사가 알기에는 충분했다.
“그거 좋은 비유네요. 지금부터 날 두부 인형이라고 생각해 줘요.”
“…….”
“알았죠? 두부 인형이라고 생각해 주는 거예요!”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지킬 거면 잘 지켜 달라고 활활 타오르는 시선을 보냈다.
가이사는 선선히 손을 들었다. 새까만 장갑이 꼼꼼히 그의 손가락을 휘감고 있었다.
“아.”
장갑 낀 손이 위로 올라오자 나도 모르게 짧게 탄식하며 재빨리 손을 내렸다.
“…….”
대체 어쩌라는 건가 싶었는지 가이사는 빈손을 가만히 내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민망함이나 어색함을 느꼈을 순간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생명력이 넘치도록 환하게 웃으며 어필했다.
살려 줘! 지켜 줘!
내 두 손은 무릎 아래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가이사는 눈으로 그걸 확인했다. 씻고 나오자마자 다시 꼈을 검은 장갑이 조용히 옹송그려졌다.
“저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루베니오와의 약속대로 당신을 지키는 일에는 완벽하게 임할 것이나 그것뿐입니다. 그 이상은 바라지 마세요.”
시작도 전에 차인 기분이라 떨떠름했다.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러나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나도 그와 너무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맡은 바만 잘해 주신다면 다른 것은 존중해 드려야죠.”
비즈니스 스마일. 나는 씩 웃으며 고객님을 환영했다. 그는 결벽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원작에서 메이아를 지키기 위해 무도회 동행까지 했었다. 그가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원작에서도 종종 강조했다시피 가이사에게 루베니오와의 약속은 정말 중요한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어딘가 꼬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지켜 주겠다는 약속은 잘 지킬 것이니 나도 존중할 건 존중해 주고 싶었다.
“하루살이는 하루 뒤에 죽습니다. 길어도 2주를 넘길 수 없을 겁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삶에 의미가 있습니까?”
그는 진실로 궁금한 것 같았다. 새까만 심연 같은 눈동자에 가슴이 선득해졌다.
“하루를 살든 2주를 살든 삶에 최선을 다하자가 제 신조예요. 당신 눈에는 제가 하루살이 같나 보죠?”
기를 꺾어 버리는 눈동자였지만 내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나는 콧방귀를 흥 끼고 돌아누웠다.
“당신은 오래 살지 못할 겁니다.”
척추로 내리꽂히는 목소리였다.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돌아보게 됐다.
“싸우자는 거예요?”
“전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 마음은 해치려는 것 같은데요.”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는 단지 궁금해할 뿐이었다.
“설령 당신이 꺾고자 한다고 해도 바로 꺾이진 않아요. 전 질긴 편이라. 당신이 먼저 물었으니 저도 물을게요. 대답해 줘요.”
“듣겠습니다.”
“제가 오래 못 살 거라고 했죠?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에요. 저도 알고요. 그런데 굳이 내 앞에서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당신은 왜 그걸 내게 말한 거예요?”
그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제 말이 당신을 해치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어지간히도 독 바른 말이 떠오른 모양이다.
“뭐, 우습다고 생각했어요? 미련하다고?”
“…….”
정답, 혹은 이보다 더한 말이 떠올랐나 보다. 그래! 당신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구나. 직접 말 안 하는 걸 보니.
“저를 안타깝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
“아니요. 절 동정해 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냥 오랜만이라서 그래요. 당신처럼 담백한 시선이. 좀 차갑기는 해도 마음은 편하거든요. 당장 내가 쓰러져도 당신은 걱정 하나 안 할 테니까. 도움과는 또 별개로.”
“도움이 된다면 다행입니다.”
한껏 빈정거렸는데 우직한 답변이 돌아오니 민망했다. 비꼬는 걸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그 정도로 망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불쌍한 사람.’
의미 없이 던진 값싼 동정이 상처투성이의 가슴을 또 의미 없이 할퀴었다.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 그것이 현재 우리의 관계였다.
* * *
이 삶은 힘이 드는 주제에 지루하기까지 했다.
“주인님, 압 괜찮으세요?”
하녀들의 수준급 마사지 실력은 몸을 찐 떡처럼 흐물흐물 녹였지만 이걸로 만족할 수 없었다. 심심했다. 미칠 듯이 지루했다.
“나가고 싶어.”
“……!”
“……!”
“……!”
내 말에 하녀 셋이 동시에 동요하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눈에 담긴 의지는 똑같았다. ‘절대 안 돼!’라는 것이다.
하녀들의 고개가 동시에 휙! 휙! 휙! 돌아갔다.
‘놀라운 단합력.’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됐다. 됐어.’
필사적으로 모른 체하는 하녀들이 안쓰러워 고집부리지 않기로 했다. 말한 사람은 있으나 들은 사람은 없는 이상한 상황이 되었다.
‘그나저나 오늘 날씨 진짜 좋네. 햇볕 아래에서 시원하게 스트레칭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손에 깍지를 끼고 앞으로 쭉 뻗어 봤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생긴 건 깍지 낀 손을 등 뒤로 넘긴 후부터였다.
“으…….”
눈앞이 팽그르르 돌며 보름 동안 지독히 익숙해진 두통이 찾아왔다. 사실 익숙해졌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누가 이딴 것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주인님, 괜찮으세요?”
“몸을 그렇게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돼요.”
“허억…… 흐…….”
숨을 고르며 창틀을 꽉 붙잡았다. 의원은 빈혈이 돌면 즉시 몸을 바르게 눕히라고 권했지만 지금은 따르고 싶지 않았다.
‘맨날 누워 있고 맨날 어지러운데 뭘 새삼스럽게 또 누워?’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자 뺨의 감각이 어색해졌다. 산송장 같은 몸이 놀랍도록 아름답다는 건 결코 기쁜 일이 아니었다. 내가 괴로워하든 울부짖든 사람들은 감탄 어린 얼굴을 했다. 니네이나를 오래 모셔 왔을 여기 이 하녀들조차도.
“주인님…….”
울먹거리는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걱정이 가득했지만 반지르르 빛나는 눈과 마주칠 때면 소름이 끼쳤다. 그들의 황홀함이 나를 죽이려 들었다. 그게 하녀들 탓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인간이 아름다움에 눈을 뺏기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괜히 시각에 의존하는 동물이 아니었으니까.
‘갑자기 가이사가 떠오르네. 그 무심한 시선이 그립다니.’
하지만 이런 일로 그를 불러 어색한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나는 하녀들을 탓하고 미워하기보다는 눈을 돌리기를 선택했다.
“어?”
그러다 정원에서 말을 씻기고 있는 메이아를 발견했다.
‘이거 그거 맞지? 원작에서 나왔던 장면…….’
메이아와 니네이나는 닮은 점이 많았다. 우선 동갑이었다. 태어날 때 어머니를 잃었으며 아버지들 역시 그녀들을 지키느라 필사적이었다. 또한, 그녀들이 태어난 해에 있었던 역모 사건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일로 니네이나는 공작가 별장으로 보내졌고, 메이아는 자기 출신도 모르는 떠돌이 고아가 되었다. 몸이 아파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던 니네이나나 노예라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던 메이아나 엇비슷했으나 메이아의 인생이 더 정신없긴 했다. 아무 힘 없는 어린애가 쓰레기 같은 어른들에게 팔려 가 노예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메이아는 더 험한 일을 피하고자 철들었을 때부터 남장을 했다. 하지만 메이아는 노예가 될 수 있는 애가 아니었다. 타고난 고귀함이라는 게 정말 있는 것인지 메이아는 정말 정의로웠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하는 부당함은 참아도 다른 이에게 가하는 부당함은 참지 못했다. 메이아는 노예가 된 지 얼마 안 돼 주인에게 대든 노예가 되어 벌을 받았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목숨이 위험했던 적도 많았다. 그렇게 해서 구해 준 다른 노예 친구가 그녀를 외면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 그래도 메이아는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소나무였다.
니네이나가 메이아를 만난 건 그녀가 부러지기 직전의 때였다.
―너, 그러다 곧 죽겠구나.
노예에게는 관심이 없다며 노골적으로 그들을 폄하하던 니네이나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노예가 메이아였다.
―살고 싶지 않니?
메이아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귀족 소녀를 보고서도 매달리거나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그것이 흥미로웠는지 니네이나는 메이아를 샀다. 그러곤 잊었다. 오늘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메이아를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니네이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흠…….”
그러나 내 감상은 좀 달랐다.
“에구머니나!”
“주, 주인님! 저희가 당장 불러 혼을 내겠습니다.”
메이아는 꽃에 물을 주는 용도로 제작한 마정석으로 말을 씻기고 있었다. 노예가 허락 없이 정원에 들어간 것도 문제였지만 마정석은 감히 노예가 만지고 놀 게 아니었다. 원작이 다시 떠올랐다.
―저걸 끌고 와. 벌을 줘야겠다.
책 속의 니네이나는 물에 흠뻑 젖어 말과 함께 뛰어다니는 메이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렇게 명령했다.
―목줄에 매인 가축 주제에 자유롭다니.
그때 니네이나의 눈에는 짧은 열망과 옅은 질투가 응어리처럼 맺혔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높은 자존심이 감히 노예를 동경한 것을 참지 못했다.
니네이나는 눈앞에서 메이아를 채찍질하게 했다. 채찍이 메이아의 옷을 찢고 하얀 살결을 파고들었다. 니네이나의 눈앞에서 새빨간 피가 터졌다.
―그만해! 보기 역겹구나!
채찍이 메이아를 세 번쯤 쳤을 때 니네이나는 신경질을 부렸다. 새장 속 새였던 니네이나는 노예를 벌주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섬약한 니네이나가 채찍질을 보며 손을 벌벌 떨었다는 건 그녀를 보고 있던 메이아만 눈치챘다.
―다른 벌을 내릴 것이다. 매일 이 시각 이곳에 오도록.
더 이상 보기 싫다는 듯 이불을 휙 뒤집어쓴 니네이나는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이불을 살짝 내렸다.
―다음부터 저것을 데려올 때는 씻기고 깨끗한 옷을 내줘. 너무 더러워서 소름 끼치니까.
조금 다치긴 했어도 두 다리로 멀쩡히 걸어 나가는 메이아를 확인한 니네이나의 눈이 안도하며 떨렸다. 그것 역시 눈이 마주친 메이아만 알았다.
깜짝 놀란 니네이나는 메이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뭘 그렇게 서 있어? 그만 나가 보라니까!
목소리가 다 쉬어 기묘한 음색이 색색거렸다. 메이아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서둘러 등을 돌렸다. 니네이나는 불쌍한 여자였다. 그렇게밖에 친구를 사귈 줄 몰랐다.
메이아는 매일 그 시각 니네이나를 찾아왔다. 메이아는 죽음의 문턱을 서서히 밟는 니네이나를 지켜봤다. 니네이나는 벌이라는 명목하에 다양한 방법으로 메이아를 괴롭혔지만 메이아는 니네이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괴롭힘이라는 것이 어릴 적부터 호된 일을 겪어 온 메이아에게는 간지러운 수준이었고, 니네이나의 신경질은 메이아의 안타까움만 샀다. 무엇보다 니네이나는 메이아의 은인이었다. 니네이나에게는 변덕이었고 금세 잊은 기억이었으나 메이아에게는 아니었다. 메이아는 죽어 가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죽으면 네가 날 그 사람에게 데려가.
어느 날, 니네이나는 메이아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생을 이어 갈 수 없음을 짐작했다. 몸은 늘 아팠지만 그중에서도 그날은 특별했다. 몸의 감각이 다 잠에 빠져 조용해서 그녀도 푹 잠길 듯하였다.
―주인님! 죽는다니요!
메이아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니네이나는 듣지 않았다.
―네가 날 그 사람에게 데려가 줘.
―같이 가요. 제가 주인님을 따뜻한 곳으로 모시고 갈게요. 그럼, 그러면…….
니네이나의 죽음을 짐작한 건 메이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니네이나는 더는 허황한 희망을 바라지 않았다.
―만약 그 사람이 나에 대해 물으면…… 난 새처럼 살았다고 말해 줘. 새장 속 새가 아니라 저 하늘 위의 새였다고.
니네이나는 창문 밖을 가리키며 수줍게 웃었다.
처음 보는 해맑은 미소에 메이아는 말을 잃고 털썩 주저앉았다.
니네이나는 그런 그녀를 자애롭고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부탁했다.
―헷갈리지 말고 꼭…… 그렇게 전해. 나는…… 자유로웠다고.
‘그러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니네이나는 그 바람처럼 새가 되어 날아갔다. 땅에 남은 그녀의 흔적은 유언대로 메이아가 수습해 루베니오에게 전달했다.
“대충 이런 얘기였지…….”
그 이후는 뻔한 이야기였다. 메이아는 니네이나의 도움으로 ‘노예’라는 무거운 신분을 훌훌 털고 자유롭게 빛났다.
니네이나는 메이아를 부각할 패였다. 땅에 떨어진 새는 니네이나였고, 하늘을 나는 새가 메이아였다. 그러니 이건…… 그냥 이런 이야기였다.
“철모르고 날뛰는 망아지도 아니고! 당장 집사님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내 눈치를 살피던 하녀 한 명이 벌떡 일어나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아니야.”
나는 하녀를 말리며 살짝 웃었다.
“주인님?”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여기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말이다.
“내가 나가야겠어.”
하녀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리든 말든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저기 빛나는 것이 나뭇잎인지 햇살인지는 내가 직접 알아볼 것이다.
* * *
원작 속 니네이나는 메이아의 조력자였다. 메이아에게 끼친 영향이 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메이아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남주인공을 만나지 못하고 평생 노예로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금빛 미래가 뻔히 있는데 그곳을 밟지 못한다는 건 매우 가혹한 일이었다. 혹자는 여주인공의 조력자라면 응당 여주인공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주인공이라는 걸로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게 뭐?’
내게는 통하지 않는 일이었다.
‘내 한 몸 챙기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누구인지도 모를 애까지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니 그거야말로 부당하고 가혹하거든!’
여기 와서 보니 책 속 사람들을 종이 인간이라고 여길 수 없었다. 내가 이곳에서 살아 있듯 이곳 사람들도 모두 살아 있다. 불쌍하고 안쓰러운 노예는 수백 수천 널리고 널렸다. 그중에서 왜 메이아를 콕 집어 도와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한테 도움이 된다면 몰라도.
도움이 된다면 도와주고 그렇지 않는다면 돕지 않는다. 누가 보면 이기적이고 못됐다고 욕할지 몰라도 내게는 그게 당연했다. 몸이 멀쩡하면 또 몰라. 나 한 몸 간수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여주인공을 도울 여력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여주인공을 위협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혹시나 메이아가 노예 신분으로도 남주인공을 만나 잘된다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나? 원하는 건 메이아를 직접 보고 판단하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 나갈 거야.”
나는 안 된다고 호들갑 떠는 하녀들을 1차적으로 물리치고 무릎 꿇고 눈물로 호소하는 보스 몹 집사를 설득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남들에게는 쉬운 일일지 모르나 앞의 두 가지 일만으로도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나눠 써야 할 체력을 반 이상 써 버린 상태였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
오늘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했다. 유리 몸에 딱 맞는 운동 사이클인 침대 주변 한 바퀴 돌기와 천천히 앉았다가 일어나기 3회가 이 일로 취소되었다. 매우 큰 희생이었다. 남을 도와주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 줘야 한다니! 몹시 손해 보는 장사였다. 받은 피해가 큰 만큼 반드시 뭔가 얻어 가야 할 일이기도 했다.
“쓸 만한 패였으면 좋겠……”
“꺄아아아아!”
“또 무슨 일인데……?”
몹시 피곤해졌다. 그 순간 시작부터 그만두고 싶어졌다.
“물을 이렇게 흥건하게 뿌려 놓으면 어떡해! 발밑이 미끄럽잖아!”
“…….”
걸어가는 건 절대 안 된다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 때문에 들것에 실려 와야 했다. 업혀 가는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들것이냐고? 그건 나를 업은 사람이 넘어지기라도 하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녀들과 집사가 반대에 몰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바로 앞 정원에 오는 데에도 사람 8명이 붙은 요상한 들것에 실려 오는 중이었다.
주인님이 타는 들것은 다른 잡놈들이 타는 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열렬히 펼친 하녀장이 몹시 화려하게 치장한 들것. 사랑스러운 연분홍빛 리본이 나비의 날개처럼 요란하게 퍼덕거렸다.
퍼덕퍼덕. 퍼덕퍼덕. 퍼……
“다들 저리 비켜!”
덕…….
“주인님 가시는 길을 막으면 경을 칠 것이다!”
퍼덕…….
“꺄아아! 주인님 몸이 흔들리잖아요! 조심해서 들라고요!”
리본만 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제길! 손으로 얼굴을 감췄다. 이대로라면 창피해 죽을 것 같아서.
‘……그냥 들어갈까?’
나오겠다고 말한 한 시간 전의 내가 극도로 원망스러웠다.
“도착했습니다, 주인님.”
“여기 앉으세요. 부축해 드릴게요.”
앞뒤가 착착 맞는 집사와 하녀장이 어여쁜 소파를 가리켰다. 하얀 소파 팔걸이를 치장한 금빛이 햇빛을 받아 우아하게 번쩍였다.
‘정원에 소파…….’
집사의 인테리어 센스는 꽝이었다. 나는 반쯤 해탈했다.
“읍?”
그러던 중 입술에 솜털이 들어왔다. 이게 뭔가 싶어 입속에서 솜털을 빼는데 바로 옆에서 두꺼운 솜이불을 털고 있는 하녀들이 보인다.
“저건 또…….”
무슨 농간일까?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이걸로 괜찮을까요?”
“아침이라 날이 쌀쌀해요.”
하녀장의 오른팔인 린지와 왼팔인 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녀장 사라를 돌아봤다.
“어쩔 수 없지. 이것으로라도 해 보는 수밖에.”
사라는 전쟁에 참전하는 것처럼 심히 굳은 얼굴로 솜털 이불을 꽉 껴안았다.
사라가 먼저 앞장서 척척 걸어오자 린지와 리아가 그녀의 양옆으로 우뚝 섰다. 누가 보면 엄청난 일을 앞둔 것으로 여길 터였다.
“급하게 데운 온돌이에요.”
린지가 먼저 달려와 내 품에 따뜻한 돌을 넣어 줬다. 무거워서 스스로 옮길 재주는 없으니 나는 그걸 강제로 껴안게 됐다.
“……?”
그런 내게 사라가 이불을 펄럭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설마 하며 사라를 지켜봤다. 사라는 그 설마가 맞는다는 듯 솜털 이불로 나를 사사삭 휘감았다. 노련하고 꼼꼼한 하녀장의 거침없는 손길에 나는 점점 더 인간 도롱이가 되어 갔다.
“……후.”
일을 다 끝낸 사라가 이마를 쓱 닦으며 물러났다.
“…….”
젖은 몸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메이아와 눈이 마주쳤다. 날이 춥네 어쩌네 호들갑을 떤 하녀들의 말과는 다르게 날은 무척 좋았다. 따스한 아침의 햇볕과 살랑 부는 온풍이 메이아의 옷을 거의 말려 놓았다.
평온한 얼굴의 메이아가 창피함 때문에 부들부들 떠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시작도 전부터 여주에게 동정심을 샀다.
‘수치스러워…….’
어지러워 머리를 짚었다.
“주인……”
“그만둬!”
사라가 곧장 달려오려다가 내 손짓에 물러났다.
“나를 그냥 놔두라고…….”
목소리가 참 비통하기도 했다. 실제 감정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사라의 매서운 시선이 메이아에게로 향했다. 다 그녀 탓이라는 질책이 담겨 있었다. 사라가 먼저 메이아를 탓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따라 메이아를 노려봤다.
‘철없는 짓으로 주인님을 불러내? 나은 지 얼마 안 되어 또 감기라도 걸리시면 주인님은 진짜 돌아가실지도 몰라!’
나와 메이아는 사라의 ‘눈으로 말해요’를 잘 알아들었다.
메이아는 사람들의 매서운 시선을 받고도 두려워하기보다는 반성하기에 이르렀다.
‘쟤는 또 왜……?’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울먹거리는 메이아를 보자 당황스러웠다. 사람 여럿 불러 어린애를 괴롭히는 기분이 들어 찝찝했다.
“우선…….”
왜 말을 여기서 씻겼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주변 상황에 망설여졌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일어나 있는데 혼자만 한 시간째 무릎을 꿇고 있다니 다리가 저리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일어나.”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최대한 싸늘하게 말했지만 약간의 걱정이 담기는 건 피하기 어려웠다. 현대에서 살다 온 내게는 한 시간 동안 무릎 꿇게 시키는 것은 인도적이지 않은 처우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곳에는 더한 일이 많았다. 노예에게 사흘 밤낮 아무것도 안 주고 무릎 꿇고 있게 하는 벌은 기본이었다. 그러다 다리를 못 쓰게 되거나 죽을 수도 있지만 주인들에게 노예의 안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꽤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상냥하신 주인님…….”
나는 여전히 울먹거리는 메이아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저 말을 왜 여기서 씻긴…… 거니?”
매섭게 나가려던 말도 많이 순화되었다. 인자한 선생님이 사고 친 학생을 달래 이유를 물을 때와 비슷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메이아가 넙죽 엎드리며 소리쳤다.
“아, 아니. 널 혼내려는 게 아니라 이유를 물은 거야. 궁금해서.”
당황해서 말을 좀 더듬으며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눈치를 본 메이아가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며 내 물음에 대답했다.
“저 말은 제가 마구간에서 돌보는 커즈라는 녀석인데 제가 녀석을 씻기려 물을 가져오는 동안 정원으로 도망쳤더라고요. 놀라 달려왔는데 커즈가 마정석을 발로 잘못 건드렸는지 물이 터져 나왔어요. 제가 말렸어야 하는데 뛰어 노는 커즈를 보니 저도 즐거워져서…….”
“으음…….”
메이아의 성격상 자신을 위해 그런 짓을 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말이 좀 귀엽기는 하네.’
사태 파악을 못 한 순진한 어린 말이 보였다. 말똥말똥 뜬 눈망울이 메이아를 혼내지 말아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현대에서는 전혀 화낼 일이 아니었다. 여자아이가 말이랑 뛰어놀다가 물 좀 뿌렸다. 그게 다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아니었다. 노예가 감히 주인의 마정석을 사용해 농땡이를 부렸다. 이게 이곳의 현실이다.
‘이 패를 어떻게 쓴담?’
부드럽게 풀리려는 입꼬리를 수습하며 차가운 목소리를 꾸몄다.
“그건 변명이 되지 않아. 돌보는 말은 네가 잘 챙겼어야지. 그게 네 일이잖아.”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단 건 벌이 되지 않아.”
“무엇이든 고된 벌을 내려 주세요.”
밑밥을 깔았더니 메이아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단단한 눈동자가 나쁘지 않았다.
‘이건 쓸 만하겠어.’
조금도 시험해 봐야겠지만 첫인상은 그랬다. 고민스러워졌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벌을 줘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벌을 주긴 해야겠는데 무슨 벌을 줘야 할지…….”
“예?”
메이아가 내 혼잣말을 듣고 되물었다.
턱을 치켜들며 최대한 오만하게 말했다.
“아직 고민 중이야. 되도록 오래 고민하고 싶어. 아주 무거운 벌을 내리고 싶거든.”
“예…….”
되도 않는 허세였지만 메이아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이 시간에 내 방으로 와. 하루쯤 더 고민해 볼 테니까.”
“예, 주인님…….”
메이아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메이아와 나는 동갑이랬지만 메이아는 좀 더 애티가 났다. 겉보기에는 조그만 소년 같아서 조금 귀여웠다.
“이만 가 봐.”
하마터면 웃을 뻔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메이아를 보냈다.
‘한 번으로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
당분간은 메이아를 옆에 두고 지켜볼 생각이었다. 여주인공을 어떻게 쓸 수 있을지.
‘그것도 물론 내가 살 수 있을 때의 일이지만…….’
어쩌면 덧없는 고민이 될 수도 있었다. 죽어 버리면 소용없으니까.
“혼자 있고 싶어.”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 이게 덧없는 일이 될 것이라면 정원에 나온 동안 최대한 이 햇살을 즐기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멍하게 앉아 있는 건 침대에서나 여기에서나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하늘이 보인다고 꽤 기분이 좋았다.
푸른 나뭇잎으로 가득한 거대한 떡갈나무가 보였다. 햇빛이 비친 이파리가 하얗게 빛났다가 싱그러운 초록빛을 되찾았다. 이 떡갈나무는 적어도 몇백 년은 살았을 것이다. 나무에 비하자면 인간의 수명은 짧다. 나무보다 훨씬 못 살 인간의 평범한 수명만큼이라도 가지고 싶었다.
“얼마나 살 수 있을까?”
“길어야 5개월 정도일 겁니다.”
무심코 한 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물어봤으니 알려 준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가련한 사람일지라도. 그걸 아무 망설임 없이 행할 사람은 아마 저 남자밖에 없을 것이다.
“5개월…….”
동정 한 자락 내비치지 않는 그가 마음에 들어 환하게 웃음 짓게 됐다. 저 덤덤한 시선이 나를 기쁘게 했다.
“왜……?”
“뭐가요?”
기분이 좋아 다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물거품 같습니다.”
“뭐요?”
“온통 새하얀데 눈만 푸르게 반짝이는 게 이상합니다.”
“저기요, 그런 감상은 부디 속으로만 해 줄래요?”
“곧 잠길 것 같은데 당신은 왜 매번 그런 표정입니까?”
“에효……. 뭘 물어도 대답 안 해 주는 건 당신이면서 왜 그렇게 나한테 궁금한 게 많아요?”
“궁금…….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바보네요. 자기 마음도 모르고.”
들으라고 마녀처럼 깔깔 웃으며 가이사를 비꽜다.
“그렇군요. 저는 바보입니다.”
“…….”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멍청……”
“그, 그만둬요! 내가 너무 나빠지잖아요!”
손을 뻗어 황급히 그의 말을 막았다. 못 해 줄 말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길어서 웃었어요. 됐어요?”
“당신의 수명이요?”
고작 5개월짜리가? 당신 미친 거 아니야?
뉘앙스가 그랬다. 바보 천치를 보는 얼굴이었으나 나는 또 웃었다.
“당신이 봐도 웃기죠?”
무척 기뻐서 입가가 당겼다.
“이해하기 어려울 뿐 우습지는 않습니다.”
“난 3개월인 줄 알았는데 5개월이라고 말해 주니 기쁠 수밖에요. 그런데 나 정말 5개월짜리로 보여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거짓말은 아니겠죠?”
“아닙니다.”
“그럼 됐어요.”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 사이의 온돌에 드레스가 눌려 쉽지 않았다.
“으윽…… 으으!”
온힘을 다해 온돌을 밀었다.
“…….”
이 정도 했으면 불쌍해서 도와줄 법도 한데 그는 주먹만 한 돌도 못 드는 나를 가만히 관찰했다.
“으으읏차!”
나는 결국 그의 도움 없이 일어났다. 돌을 들어 올린 것은 아니었고 드레스가 들썩거리자 돌이 자기 혼자 굴러떨어진 덕분이었다. 앞으로 걸어가 아까 했던 상상 그대로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서 햇빛을 맞으며 손을 쭉 펴 보았다. 머리가 핑 돌았으나 느리지만 꿋꿋하게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이 몸의 남은 수명은 3개월도 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5개월이란다. 그는 의사가 아니지만 아마 어느 정도는 정확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믿을 만했다. 적어도 그녀를 동정하여 예상 수명을 늘려 주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정말…… 길어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지옥 같은 보름으로 적어도 두 달 이상을 건졌다는 소리였다. 앞으로 더 하면 된다는 소리기도 했다. 이 지옥에 처음으로 희망이 보였다.
“그렇죠?”
희망을 던져 준 남자는 여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할 말을 잃는다는 기분입니다.”
“그런 건 속으로만 말하면 안 돼요?”
“대답을 원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준 거예요?”
“돌려드린 겁니다. 당신이 해 주었듯 저도.”
장미를 만지려던 손이 우뚝 멈췄다. 멀게만 느껴지는 그것보다 그가 더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당신은 볼일이 없으면 안 올 사람 같아서요. 또 제게 위험한 일이 있나요?”
가이사가 찾아올 일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나를 지키는 일.
“지켜 준다니 고맙기는 한데 가끔 당신이 사신처럼 느껴져요. 가이사가 왔다! 위험을 피해라! 이런 느낌?”
뭇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말이 그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서 던진 시시한 농담이었다. 한 번쯤은 웃는 얼굴이 궁금해서.
“이번에는 줄 게 있어서입니다.”
물론 그는 웃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켰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두부 인형처럼 다루라던 내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아…… 저기 더 있고 싶은데.”
그래서 나도 답지 않게 칭얼거렸다. 그만큼 안타까웠고 또 딱 그만큼 그가 편안했다. 완전한 타인이라는 점에서. 나는 바닥에 발을 꾹 붙이고 버텼다. 그에게는 깃털 같은 무거움일 것이다.
그는 그 하잘것없는 반항을 우스꽝스럽다고 평하는 대신 장정 셋이 붙어 옮겼던 거대한 소파를 들어 내 앞에 놓아 줬다.
“앗!”
가이사가 아무렇게나 대충 내려놔서 들꽃 하나가 짓눌리고 말았다.
‘내가 곧 죽을 것 같으니 다른 것들도 다 불쌍하네.’
쓸모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소파를 옆으로 살짝 밀었다. 소파는 움직였다. 그가 낑낑거리는 나를 보고 슬쩍 힘을 보탰기 때문이다. 꽃은 이미 반쯤 짓눌려 있었다. 좀 더 일찍 그에게 부탁하였다면 멀쩡한 모습이었을 텐데.
“제게 말씀하셨으면 더 쉽지 않습니까?”
눈이 동그래지는 게 느껴졌다.
“이런 것도 해 주세요?”
“내키면 해 드릴 겁니다.”
“사람이 참 야박하네.”
나는 혼잣말하듯 말했으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
드물게도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는 표정 변화에 익숙지 않아 보였다.
“음…… 당신도 앉을래요?”
옆을 두드리며 말했다. 혼자만 앉기 미안해서였다.
“됐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번 거절하자 더 권하지 않고 포기했다. 한 번 권했으니 됐다는 생각에서였다.
“준다는 게 뭐예요?”
“이겁니다.”
“팔찌?”
“정령석을 가공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녹색 팔찌를 내 손목에 걸어 줬다. 까칠한 가죽 장갑이 팔을 긁어내리듯 지나갔다. 기분 탓인지 피부가 좀 얼얼했다.
“여기에 정령이 봉인되어 있나요?”
“예. 바람의 정령으로 이름은 소나입니다.”
‘소나? 그거 가이사의 정령 아닌가?’
어울리지 않게도 가이사는 정령사이자 검사였다. 정령을 부르는 것은 순전히 자연 친화력에 달렸지만 정령과 계약을 맺고 친구가 되는 건 정령과 교감이 잘되어야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걸 재능으로 찍어 눌렀다. 결핍된 시선에도 힘에 눌린 정령은 그와 계약을 맺었다. 압도적인 재능이 모든 걸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메마른 성격으로도 정령술을 꽤 잘 다뤘다.
“이걸 왜 제게 주세요? 저는 정령술을 다룰 줄 모르는데.”
계약자가 있어 결정에 봉인된 정령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술자 외의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았다. 가끔 정말 마음에 드는 인간을 발견하면 도와주기도 한다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정령은 계약자의 말 외에는 안 듣잖아요.”
“들을 겁니다. 바람 친화력이 높은 편이시니.”
“제가요?”
“예.”
“처음 듣는 말인데요? 아마도……?”
분명 처음 듣는 말이었고 책에서도 보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전의 니네이나도 이랬을지는 알 수 없었다.
가이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무심히 말했다.
“정령사를 처음 보는 것이겠지요. 가르쳐 줄 사람이 없고 스스로 깨우치지 못했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아…….”
뛰어난 정령사는 다른 사람의 친화력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제자를 찾는 정령사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이미 봉인된 정령을 제게 주시는 건가요? 제게 친화력이 있다면 스스로 계약을 시도하는 게 맞지 않아요?”
“편법입니다.”
“그러니까 왜요?”
“…….”
그는 미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말해 줄 수 없는 내용은 아닌 듯했고 설명하기 귀찮은 쪽에 가까워 보였다.
“이봐요, 귀찮다는 얼굴이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들썩거리는 몸에 팔찌가 짤랑짤랑 흔들렸다.
“귀찮다는 이유가 다라면 설명해 줘요. 저도 알아야 하잖아요.”
후. 그는 숨을 내뱉으며 무심한 눈동자를 들었다.
“죽을 겁니다.”
“네?”
“그 몸으로 계약을 시도했다가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죽을 거라는 뜻입니다. 정령을 소환하는 건 힘이 많이 필요한 일이니까요.”
“아하.”
죽음을 곁에 두고 생활하다 보니 죽을 거라는 말이 두렵지 않았다. 이유를 알았으니 됐다. 무심한 시선이 얼굴을 한차례 훑었다. 사신의 눈빛을 받은 것처럼 섬뜩했다.
“당신이 그럴까 봐 설명하기 싫었습니다.”
“네?”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었으나 그는 싸늘해진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찰나였다. 금세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사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몇 가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는 이 상황이 무척 귀찮고 피곤해 보였다.
“……네.”
“이름을 부르시면 됩니다.”
“이름? 그게 다예요?”
호기심도 드러내지 말라는 건지 그의 얼굴은 다시 차가워졌다.
“야박하게 굴지 말고 알려 줄 거면 끝까지 알려 줘요.”
“……기본적으로 당신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니 이름을 불러 소환하면 실드를 쳐 주며 나올 겁니다.”
“아하. 방어막을 쳐 준다는 말이지요? 계속 소환하고 있어도 힘들지는 않나요? 아시다시피 제가 워낙 유리 몸이라…….”
“정령이 실체화하는 데 필요한 마나는 제가 제공합니다.”
“어? 그건 너무 죄송한데…… 제가 장시간 소환하기라도 하면 당신이 위험해질지 모르잖아요?”
“그럼 죽을 겁니까? 정령에게 마나를 빼앗겨서? 제가 보기에는 30분 정도만 소환해도 충분하실 것 같습니다만.”
“아니요. 당신 마나 잘 쓸게요, 고마워요.”
나는 그 즉시 정색하고 고개를 저었다. 유리 몸 주제에 누굴 걱정하느냐고 생각하며.
“이제…… 영애께 표식을 새길 겁니다.”
그는 뜸을 살짝 들이다가 말했다.
“표식이요?”
“……소나가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겁니다.”
“아하. 어떻게 새기면 돼요?”
나는 내 몸에 벌어질 일이 궁금한 게 당연했고 하여 물은 것뿐인데 그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접촉이 필요합니다. 맨살과 맨살로.”
그는 불편한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가이사는 지독한 결벽증이 있었다.
‘저런.’
나는 안타까움을 먼저 느꼈다. 직접 겪어 보니 몸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었다. 결벽증이라는 건 결국 공포증의 일종이었다. 어떤 일이 어떤 식으로든 트라우마가 되어 굳어진 것이었다. 저토록 심한 결벽증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결코 평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저런 남자가 무엇이 두려워 아직도 공포를 떨치지 못했을까?’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꼈다. 혹은 동지애라고 해도 좋았다.
“허락하시겠습니까?”
멀찍이 서서 호흡을 가다듬던 그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떨떠름함과 가련함 사이에서 번민했다. 칼날처럼 아릿한 시선은 반대로 의문을 품게 했다. 그가 감정을 저 정도로 드러내면서까지 이 일을 해 주려는 게 이상했다.
“저는 괜찮지만 오히려 당신의 허락을 받아야겠는데요.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습니다.”
“그럼 왜……?”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는 말을 잘라 버리고 장갑을 벗었다. 검은 장갑 사이로 드러난 맨손 끝이 조금 붉었다. 박박 긁거나 자주 씻어 손이 터 버린 것이다.
‘지독하네.’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보지 말아야 했을 남자의 가장 연약한 속살을 헤집은 것 같았다. 그의 상처를 빤히 본 게 미안해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메이아에게는 이러지 않았는데.’
원작의 가이사는 메이아의 마법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봤다. 루베니오에게 메이아의 마법 스승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충고한 사람도 그였다. 가이사의 정확한 능력 수치는 원작에서도 밝혀진 바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를 능가하는 인물은 없었다. 사용하는 건 정령술과 검술 두 가지였는데 마법에 대한 태도가 애매했다. 정말 마법을 쓸 줄 몰라 메이아를 직접 가르치지 못한 건지 혹은 알면서도 하지 않은 건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정령술은 직접 알려 주는 걸 보면 전자가 아닐까?’
그에게 약속이 어떤 의미인지는 몰라도 지킬 자의 호신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이 정도까지 하는 걸 보면 그 무게가 가볍지는 않을 듯했다.
‘안심해도 좋으려나?’
나는 외부의 위협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판단했다.
“응?”
생각하느라 몰랐는데 눈앞에 새까만 주머니가 보였다. 그의 옷에 달려 있던 것이다. 그가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나 싶어 깜짝 놀랐다. 등이 주춤 젖혀져 소파에 푹 눌렸다.
“깜짝이야. 기척 좀 내고……”
“그대로 움직이지 마세요.”
그의 무릎이 허벅지 옆을 눌렀다. 무게 때문에 소파가 살짝 기울었다. 중심을 잡지 못해 흔들리다가 하마터면 그의 팔뚝 위로 엎어질 뻔했다.
가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상처 입은 짐승이 곁에 다가오는 미지의 것을 무조건 쳐 내는 방어 본능과 비슷했다.
‘겁먹은 것 같아 보여.’
당황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곧 침착함을 되찾고 양손을 꼭 붙잡아 무릎 위에 올렸다. 소파 위로 기댄 자세도 한결 편안해졌다.
“네, 얌전히 있을게요.”
그의 손은 여전히 내 얼굴 위를 맴돌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얼굴을 다 뒤덮을 듯 뻗어 있으니 거목의 나뭇가지 같은 그림자가 졌다.
나는 아무 재촉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낯선 어둠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끝에 남아 있던 상처가 알알이 박혀 눈을 뜰 수 없었다.
“하…….”
앓는 듯한 숨소리가 났다. 괴로워 죽겠다는 듯 소스라치는 떨림이 그대로 덮쳐 와 뺨 위를 누르는 것만 같았다.
“…….”
그의 시선은 집요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다 느껴졌다. 떠나지 않고 뿌리 끝까지 잡아챌 기세로 맹렬히 뒤흔들었다. 조금씩 두려워졌다. 그래도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짐작했을 것이고 느낀 대로 속삭였다.
“저는 당신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 가만히 있습니까?”
“글쎄요. 피할 만큼 두렵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그 말을 삼키며 살짝 웃었다.
“…….”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천 근은 너끈히 나갈 쇳덩어리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가 그 손 하나를 움직이기 어려워했다. 마치 누가 일부러 그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림자가 아주 천천히 눈가 위를 맴돌았다.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내 머리칼을 뒤로 넘기는 게 느껴졌다.
“……!”
내 머리칼이 손에 닿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는지 그가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훈풍은 머리칼만 뒤로 젖혀 줬을 뿐이었다. 자연스레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하얀 이마가 드러나는 게 느껴졌다. 마침 가이사가 만지려던 자리였다.
그는 다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는 시간을 끌었으나 나는 계속 눈을 꾹 감고 있었다.
“당신은…….”
그의 숨이 아주 약간 편안해졌다.
‘차가워!’
그의 손이 이마에 닿자 입술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의 손이 너무 차가워서 스칠 때마다 한기가 스몄다. 어깨가 덜덜 떨릴 만큼 강했다. 그의 체온 때문에 감기에 걸려 버릴지도 모르겠다며, 다소 바보 같고 다소 현실적인 생각을 했다. 스치는 칼바람 같았던 손짓은 조금씩 빨라졌다. 그의 연주에 맞춰 출렁거리던 녹색 마나가 피부 위에 스며들었다.
“다 됐습니다.”
검지로 콕 찍어 마무리한 그가 황급히 내 곁에서 떨어졌다.
“윽!”
가이사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겠지만 이마를 기분 나쁘게 툭 민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이건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번쩍 떴다.
“저…… 괜찮으세요?”
하지만 막상 나간 말은 걱정이었다.
“…….”
그가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에서 허리를 숙인 채 두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뛴 사람처럼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던 가이사가 대답했다.
“아니요.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말아 줄래요? 상처인데요.”
뼈아픈 진담을 섞어 농담했다. 너하고는 역겨워서 키스 못 하겠다는 개망나니 연인을 둔 기분이었다. 물론 나와 그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지만 받은 느낌은 엇비슷했다.
잠시 뒤 허리를 바로 세운 그가 떨리는 손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속이 울렁거린다는 기분이군요. 너무 오랜만이라…….”
“…….”
나는 가이사의 말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더 들어 봤자 마음만 찢어졌다.
‘아픈 사람이다. 저 사람은 마음이 아픈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안정을 되찾았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씻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을 찾는 것 같았다.
“장갑 안 챙기세요?”
바닥에 버려진 장갑을 가리키며 물었다.
“감염될 것 같습니다.”
“예, 제 마음도 부서지네요.”
싸늘한 혐오를 허허롭게 웃는 얼굴로 받아칠 수 있었다. 이제 그러려니 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이가 없을 뿐.
그는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빠르게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와…… 진짜 나빠.”
역시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니었다. 마음속 그에 대한 평가가 하락했다.
‘음?’
그러나 곧 미묘해졌다. 저렇게 싫어하면서도 그가 저 모든 걸 감내한 건 나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격이 아닐까? 방식이 좀 그래도 날 도와주려 한 거잖아. 나한테 허락 맡으면서까지.’
고민하며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그가 사라진 쪽에서 집사가 나타났다.
“주인님, 이만 들어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내가 부르는 소리 들었어?”
“부르셨습니까? 방금 전에 아델만 백작님이 가 보라고 하셔서 왔습니다만…….”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백작이었으니 아델만 백작은 그를 뜻하는 말이었다. 루베니오가 공작이 된 후에도 가이사는 아무런 경칭 없이 ‘루베니오’라고만 불렀던 걸 보면 그게 다는 아닐 테지만 말이다.
‘괜히 물어봤나?’
혹시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좀 더 편할까 싶어 잔꾀를 부렸다가 도리어 당하고 말았다.
가이사는 아마 혼자 남았을 두부 인형을 염려해 괴로운 와중에도 사람을 보내 주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이 오직 약속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나를 위하는 한, 그에게 고마웠다. 잠시 하락했던 가이사에 대한 평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직접 봐도 도저히 알 수가 없네.”
“예? 주인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혼잣말이었어.”
집사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집사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다가 간곡히 속삭였다.
“그럼 이만 돌아가시겠습니까?”
집사의 눈시울이 붉었다. 벌벌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직역하자면 ‘너무 오래 있으면 안 좋으니까 제발 좀 돌아가!’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받은 햇볕을 놓치기 싫었다. 어떻게든 말을 돌려 보려 고민하다가 무심코 메이아가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메이아가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그곳의 풀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메이어에게는 무슨 벌을 줘야 할까? 난 그런 거 잘 모르니까 집사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은데.”
집사의 눈이 그렁그렁하게 변했다. 어느 포인트인지는 몰라도 내 말에 감동해 버린 모양이었다.
“감히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으응.”
고상한 중년의 충직한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눈을 살짝 돌렸다.
“오늘의 잘못을 뼛속 깊이 새길 수 있도록 흔적을 남기는 게 좋겠습니다.”
“흔적?”
가이사가 남겨 놓은 표식이 떠올랐다. 나는 어떤 마법적 문양이 잠시 메이아의 몸에 새겨졌다가 사라지는 걸 상상했다.
“손가락, 발가락, 귀 등의 신체 끝단을 조금 자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는 듯 차분하게 설명하는 집사의 눈이 차가웠다. 집사에게 나는 지켜야 할 주인이고 메이아는 감히 그런 주인을 위험하게 만든 노예였다. 집사의 달라진 태도에 매우 놀랐지만 이 세계에서는 집사의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곳이 현대와 다르다는 건 얼핏 알았지만 새삼 그 사실이 마음에 다가왔다.
‘옹호해 줄 마음은 없었는데…….’
현대인의 감성이 남아 얼굴이 저절로 굳어졌다.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아? 메이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라잖아. 마정석을 작동한 것도 메이어가 아니라 말이고. 메이어는 마정석을 켜는 법이랑 끄는 법도 모를 거야. 그래서 그냥 어쩌다 잠시 물을 맞다가 내게 들킨 걸지도 모르잖아.”
집사는 애틋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노예의 말을 다 믿어 주는 순진함이 안타까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이레간 굶는 벌은 어떠십니까?”
집사는 반박하는 대신 내 말에 따랐다. 감히 주인의 말에 토를 다는 건 종복이 할 일이 아니라는 태도였다.
‘이레나 굶으면 사람 죽는 거 아니야?’
나는 속으로 경악했다. 이레간 굶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고된 노동을 하는 노예가 이레나 굶어도 괜찮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장기적인 거는 없어? 이레는 너무 짧은데.”
집사의 말을 무조건 안 된다고 하지는 않았다. 아직 이곳 세상을 잘 몰랐고 해가 돌아오지 않는 한 그것에 간섭할 의욕도 없었다. 나는 기간이 긴 대신 가벼운 벌을 오래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주인공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신체에 상해를 입히는 짓은 꺼려졌다. 물론 내 안위를 위해서였다. 또한 메이아라는 인물을 관찰할 시간이 필요했다. 노련한 집사는 내가 잔인한 형벌을 꺼린다는 걸 알았다. 그는 마땅찮을 속내를 감추며 기꺼이 내 의지에 따랐다.
“한 달간 마구간 청소를 시키고 하루에 4시간만 자게 하겠습니다. 잠잘 시간을 줄이는 건 노예들이 가장 꺼리는 일 중 하나니 충분히 벌이 될 겁니다.”
집사의 말을 잘 따져 봤다. 마구간 청소야 평범한 청소일 테니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루 4시간 자는 건…….’
고등학생 때가 떠올랐다. 수능이 얼마 안 남았을 때에는 4시간도 사치처럼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한 달이나 반복하면 몸이 크게 상할지도 모르나 이 세계 사람은 튼튼했다. 일단 시켜 놓고 메이아의 상태를 봐 기간을 줄여 줘도 될 일 같았다.
“그럼 그렇게 해.”
“예.”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은 그 애를 내 방으로 데려와. 궁금한 게 있으니까.”
집사가 자세한 사정을 물으면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고민하느라 심장이 조마조마 떨렸다. 집사는 노예 하나에 관심을 갖는 나를 의아하게 여기는 듯했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메이아에게 내릴 벌이 정해졌다.
즉, 내 시간 끌기도 끝났다. 나는 어르고 달래는 그들의 등살에 못 이겨 돌아갔다.
아디오스, 태양!
지겹구나, 침대야!
* * *
다시 침대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나 나는 이제 이 방을 온전히 혼자 사용할 수 있었다.
“종을 흔드는 것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지.”
흐뭇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건 인간 승리였으니까!
나는 웃으며 침대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사용하는 사람의 힘을 고려해 최대한 작고 가볍게 만든 금빛 종이 내 손에 가볍게 들렸다가 내려갔다.
“무슨 일이 있으면 종을 흔들면 되고. 무슨 일이 없으면…… 이제 뭐 하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들을 다 쫓아내긴 했으나 혼자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안 하려니 심심했다.
“아까 미룬 침대 주변 한 바퀴 돌기나 마저 해 볼까?”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게으름을 부릴 틈이 없었다. 어디 걸려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이 유리 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바닥을 잘 보며 침대 주위를 돌았다. 어디가 많이 아픈 사람처럼 어기적어기적 걷는데 예법은 제대로 지킨 우아하고 아파 보이는 걸음걸이가 이 몸의 특징이었다.
“몸에 밴 거라 자연스럽게 따라 줘서 다행이지.”
원래 몸처럼 휘적휘적 걸었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을 텐데 참 다행이었다. 또한 이 사실은 걸음걸이뿐만 아니라 몸으로 하는 모든 활동에 적용됐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 세계의 언어를 사용하고 모르는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것은 몸의 기억 덕분이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몸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썼던 것처럼.
그런데 이건 역시 적응 안 됐다.
“으…… 허억……. 무슨 몸이, 흐아아…… 이 따위야!”
낑낑거리며 무거운 추 같은 발을 옮겼다. 침대 맞은편 거울에 내 모습이 보였다. 색소가 옅은 백금발의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거울을 보고 있었다. 달라진 외모에 어쩔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며 거울을 씁쓸히 바라봤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그 흔한 색깔이 내게 없다는 이유로 뼈저리게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잃어야만 그 가치가 보인다는 점이 서글펐다.
‘살기 위해 그 생각은 안 하기로 했잖아.’
뭉클해지는 눈가에 힘을 주며 거울을 노려봤다.
잠시 뒤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거울 가까이 서서 앞머리를 들춰 봤다.
“뭐가 보이나?”
가이사가 이마 위에 표식을 남겨 두었다는 건 알겠는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다. 정령들만 알아볼 수 있는 특별한 표식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 눈에도 안 보이겠지?”
집사나 하녀들이 별말 안 했던 걸 보면 다른 사람 눈에도 안 보이는 게 분명했다. 문신 하나 새기는 거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는데 눈에 띄지 않는다니 다행이었다.
“소나를 부르면 내 눈에도 보이려나……?”
무심코 중얼거리는 내 곁으로 바람이 모여들었다. 투명한 공기가 짙은 녹색 빛으로 출렁거리다가 자그맣고 사랑스러운 요정을 만들어 냈다.
“세상에…….”
심장이 말캉말캉 흔들렸다.
‘너무 귀엽고 앙증맞고 깜찍하잖아!’
대체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존재하나 싶어 놀랍기만 했다. 얼굴과 몸 그리고 등 뒤에 달린 자그만 날개까지 모두 연둣빛이었으나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날갯짓을 하지 않으면 날 수 없는지 자꾸만 파닥파닥 소리를 내는 날개도 귀여웠고, 오동통한 뺨과 유순한 눈망울이 만들어 내는 순진무구한 표정이 무엇보다 압권이었다. 너무 귀여워 살짝 현기증이 났다. 비틀거리는 내 등을 무언가 아주 단단한 것이 받쳤다.
“이게 실드라는 거야?”
투명한 연둣빛 방어막을 건드리며 묻자 소나가 자신이 한 게 맞는다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뺨에 열이 올랐다. 만져 보고 싶었으나 소나가 놀랄까 봐 그럴 순 없었다. 또한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가이사의 마나를 소모한다는 게 걸렸다.
“마음 같아서는 너랑 계속 있고 싶은데 가이사의 마나를 펑펑 쓸 수는 없으니까…… 근데 어떻게 돌려보내는 거지?”
“돌려보내는 건 제가 합니다.”
“그렇구나. 돌려보내는 건 당신이 하는…… 응?”
엉거주춤 소리가 들리는 곳을 돌아보았다. 가이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창문 밖에 서 있었다.
‘여기 2층인데?’
당황하여 그쪽을 향해 쭈뼛쭈뼛 걸어갔다.
“거, 거기서 뭐 해요? 어떻게 거기 그렇게 있는 거예요? 밟을 게 있나?”
있으니 저렇게 서 있는 것이겠지만 정확한 답은 알 수 없었다. 그는 내 말을 대충 흘리며 창문을 열었다.
“들어가도 됩니까?”
창문 안으로 몸을 살짝 들이미는 가이사는 이미 들어오겠다는 기세가 만만이었다. 어쩐지 저 무표정한 얼굴이 험악하게 느껴졌다.
“그, 그러세요.”
허울뿐인 허락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싸늘한 얼굴로 걸어 들어온 그는 나를 흘긋 한 번 바라보고는 소나를 노려봤다.
“돌아가.”
주인의 차가운 명령에 정령은 고개를 시무룩하게 숙이고 사라졌다.
“……!”
몹시 안타까웠으나 도와줄 순 없었다. 내 코가 석 자였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제가 실수로 이름을 불러서 소환해 버렸어요.”
마나 제공자는 가이사이니 정령이 소환되면 그에게 신호가 가겠지. 화난 기색으로 달려온 그를 보고 그 사실을 짐작했다.
“화났어요?”
가이사가 빠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얼마나 험상궂은지 심장이 철렁했다.
“다시 새겨야 합니다.”
“다시 새겨요?”
“제가 새겼던 표식은…… 일회용입니다.”
“아.”
“…….”
가이사에게서 봤던 수많은 무표정 중에 지금이 단연코 가장 무서웠다. 미미한 압박감이 그의 주위로 흘렀다.
“읏!”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 * *
니네이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고개를 떨궜다.
“당신…….”
처음에는 분노가 앞서 무의식적으로 흘렸을지 모르나 살기는 즉각 사라졌다. 그런데도 바닥을 바라보는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것저것 다 미안한데 저 일단…… 기절……”
그녀의 몸이 힘을 잃고 넘어갔다. 바닥에는 러그가 깔려 있었지만 충격을 완전히 없애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가이사는 더 생각하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그는 이미 니네이나를 향해 뻗은 손을 보고 난 뒤 생각했다.
‘대체 이건 뭐야?’
그는 뭐라 형용 못 할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그의 품에서 축 늘어졌다.
“…….”
그는 니네이나와 헤어진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시간이 넘도록 씻는 것에만 열중했다. 그러다 그녀가 정령을 소환한 걸 느끼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혹여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충 걸친 하얀 셔츠 위로 까만 머리칼이 서글픈 물방울을 툭 떨어트렸다. 니네이나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으나 가이사는 지금 맨손이었다. 가이사가 그걸 자각했을 때 그의 몸 깊은 곳에서 감정이 울컥 솟아났다. 사람의 온기가 싫었다. 끔찍했다.
가이사의 목젖이 불거져 나왔다. 니네이나는 옷을 입고 있었으나 갖춘 의복이 얇아 체온이 느껴졌다. 저 지겨운 것을 막아 주던 장갑이 없으니 숨이 턱 막혔다. 공포가 아니었다. 이건 원한이었다. 살심이고 증오였다.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일그러지며 두방망이질 쳤다. 파괴적인 충동이 일었다. 그 끔찍한 온기를 없앨 수 있다면 눈앞의 인간들을 모두 다 죽이고 싶었다.
순간 제어를 잃은 욕망이 니네이나의 목을 죄게 했다. 쏟아지는 살기에 니네이나의 몸이 무얼 느끼기라도 한 듯 바들바들 떨렸다.
‘죽여!’
뭘 망설이는 걸까? 그에게 더한 짓도 서슴지 않았던 건 인간이었다.
―이번 제물은 아주 훌륭하군.
―튼튼한 놈입니다. 잘 죽지도 않고 상처를 찢어도 금방 재생합니다.
―꼬마야, 오래 버틴다면 너도 내 발을 핥을 수 있게 해 주마.
가이사는 지독한 기억에 휩싸여 니네이나를 저 창문 밖으로 밀어 버리고 싶었다.
‘안 돼.’
그의 얼굴이 아이처럼 서럽게 일그러졌다.
―가이사, 모든 인간이 다 그런 건 아니란다.
가이사는 아직도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인간은 어리든 늙었든 작든 크든 하나같이 다 똑같다. 똑같이 구역질이 났다. 본태가 인간인 자신 역시 그랬다.
가이사는 인간의 태를 벗고 싶었다. 인두겁이 그를 내리누르고 그를 인간이라고 할 때마다 죽고 싶어졌다. 그는 종종 충동에 휩싸였다. 왜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삶에 집착하는가? 소중한 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외면당하거나 박탈당했다. 겨우 쥐었던 마지막 하나는 스스로 그의 곁을 떠나기를 선택했다. 모두 인간이 가이사에게 한 짓이다.
가이사는 제 아버지가 죽은 날 그와 함께 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워 아직 이 땅에 남아 있을까? 차라리 죽일 수 있는 만큼 다 죽여 버리는 게 편할 텐데. 그러나 그의 손은 충실히 그녀의 허리를 안정적으로 받치고 있었다. 그것이 소름 끼치도록 괴로웠다.
한 줌도 안 될 허리가 후덥지근한 체온으로 그의 손을 눌렀다. 언젠가 겪었던 것처럼 손에 피 구멍이 뚫려 그 안을 벌레가 파고드는 것 같은 환상통이 일었다.
“헉!”
숨이 발작적으로 터지며 아름다운 가이사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인간은 모두가 이랬다. 다 똑같이 저 구역질 나는 체온을 가졌다.
가이사를 몸서리치게 하는 건 이 온도였다. 인간 특유의 썩어 빠진 뜨거움.
“으읏…….”
섬뜩한 살기가 온몸을 흠뻑 적시자 니네이나는 기절하고 나서도 편안하지 못한 듯했다.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상처뿐인 무감정한 눈이 품에 갇혀 살고자 경련하는 몸뚱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가이사, 잊지 말거라. 우리에게 약속은 절대적이다.
그대로 니네이나의 목을 꺾을 것 같았던 살기가 단숨에 걷혔다. 핏빛 물안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건 가이사의 눈동자뿐이었다.
가이사는 멍하니 걸어가 침대 위에 니네이나를 눕혔다. 그리고 숨을 편안하게 쉬지 못하는 그녀의 턱을 젖혀 기도를 확보했다. 그러고도 혹시 죽을까 안심하지 못해 두꺼운 이불을 덮어 주고 달래듯 이불 위로 가슴을 토닥거렸다. 식은땀으로 젖은 관자놀이에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미안…….”
가이사는 무심코 그 한 방울을 걷어 내려다가 자신이 맨손임을 깨달았다. 그의 손이 파르르 경련하다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미안합니다.”
그녀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건 그도 알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이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싫었다. 인간이라고 정의되었다면 무엇이든 같았다.
‘역겨워.’
가슴이 또 뛰었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삼키려 그는 입가를 가리고 쭈그려 앉았다. 소나를 붙여 주려면 니네이나가 다시 정신을 차려야 하니 두고 달아날 수도 없었다. 인간이 혐오스러운데 그런 인간을 지켜야 했다. 그 모순이 그를 지옥에 살게 했다. 그가 선택한 삶이었다.
“저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아버지…….”
닿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중얼거린 헛된 소리가 바람에 밀려 사그라졌다. 더운 날 썩어 부패한 생선처럼 흐렸던 눈이 아주 잠깐 반짝임을 틔웠다가 휩쓸려 죽어 버렸다.
소리는 닿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죽지 못했다.
* * *
나는 12시간 넘게 죽은 것처럼 자다가 일어났다. 내가 깨어났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흐음……?”
눈을 끔뻑끔뻑 뜨다가 천천히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 잠깐 기절했을 뿐인데 하루가 다 가 있었다. 또 하나, 몸은 왜 이렇게 아프단 말인가?
“의원이 일어나면 약을 드시라고 했습니다.”
내가 일어난 걸 알아챈 가이사는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어 내지 않고 무심히 충고했다. 기절하기 직전 누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봤는지 떠올랐다. 먼저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으…… 아?”
몸만 무거운 줄 알았더니 목구멍도 따가웠다. 침을 삼키자 얼얼한 걸 보니 목이 좀 부은 듯했다.
“설마…… 밖에 좀 나갔다고 진짜 감기?”
색색거리며 말하자 책을 탁 덮는 소리가 났다. 다가오는 그의 머리칼이 살짝 젖어 있었다. 또 씻고 나온 모양이었다. 괴로웠나? 미안함이 살짝 커지는데 그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쩐지 그가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한테 뭐…… 할 말 있어요?”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네. 뭐, 제가 고집부려 밖에 나간 탓이니 누굴 원망하겠어요?”
“영애의 탓이 아닙니다.”
“제가 아니면 누구 탓이에요? 좋다고 밖에 나간 건 저……”
“절 원망하시면 됩니다.”
“네?”
“영애의 목이 아픈 건 제가 당신께 화풀이를 해서 그렇습니다.”
기절하기 직전 봤던 오싹한 붉은 눈이 떠올랐다.
‘죽여? 살려?’ 고민하는 눈이었다.
“절 때렸나요?”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럴 리는 없어서 반쯤은 웃자고 한 말이었다.
“아니요. 그랬으면 이렇게 눈을 뜨지 못하셨을 겁니다.”
가이사는 조금의 농담도 섞지 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나를 때린다면 나는 그 즉시 목숨이 다할 것이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앞으로도 때리지 말아요.”
“예.”
그는 안 때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하고 그를 따라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까먹지 않고 덧붙였다.
“아. 죽이지도 말아요.”
“…….”
가이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슬그머니 다시 책을 폈다.
뭐야! 왜 대답 안 하는데? 불길함이 등골 위를 적셨다. 원작에서 그는 오직 진실만 말한다고 했다. 거짓말할 만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니 그랬다.
‘그런데 대답을 안 한다는 건…….’
식겁한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죽이진 않았으나 죽이고 싶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잠드신 사이.”
가이사는 조금도 웃지 않고 말했다.
“아……. 그럼 전 당신 때문에 기절한 건가요?”
나는 가이사의 말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나도 아주 가끔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람들 대부분이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생각만큼은 자유였다. 행동으로만 옮기지 않는다면.
“예. 당신의 몸이 안 좋아진 건 제 탓입니다.”
“아픈 적이 한두 번이었어야죠. 이제 이 정도로는 화도 안 나요.”
‘생각은 누가 못 해?’
목이 계속 따끔거렸다. 무의식적으로 계속 목을 매만지자 그가 손을 뻗어 약을 건네줬다.
“의원이 두고 간 약입니다.”
“고마워요.”
씁쓸한 약 냄새가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갔다. 그것도 액체라고 조금 나았다.
“당신을 창문 밖으로 밀어 떨어트리려 했습니다.”
“풉! 콜록! 콜록!”
갑작스럽고 구체적인 살해 계획에 놀란 나는 마시던 약을 뿜으며 격하게 기침했다. 가뜩이나 힘없던 손이 미끄러져 그릇까지 놓쳐 버릴 뻔했지만 그건 가이사가 잡아 줬다.
‘설마 내가 또?’
또 입에 든 걸 가이사에게 뿌려 버렸나 싶어 황급히 그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쏟아지기 전에 무사히 피했는지 멀쩡한 얼굴이었다. 더 이상 당하지 않는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 위풍당당했다.
‘과연.’
나는 박수라도 쳐 줄까 싶어 고민하다가 말았다. 방금 전 그가 나를 죽일 뻔했다는데 잘했다고 박수 쳐 주는 것도 웃겼다.
“……생각은 괜찮아요. 그런데 생각만 하세요.”
“생각은 정말 괜찮습니까?”
“네.”
“…….”
그는 생각은 괜찮을 거라고 굳건히 믿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숨이 막혀 두 주먹에 힘이 자꾸 들어갔다.
“진짜 죽이는 건 절대 안 돼요. 약속해요.”
“…….”
“왜 대답이 없어요?”
나는 대답을 망설이는 그를 채근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설마 하는 의심이 커졌다.
그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흥분한 나를 보고는 할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정말요?”
“예. 약속할 테니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당신께는 작은 자극도 독이 되는 것 같더군요.”
지켜야 할 대상이 유리 몸이라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확답을 받은 나는 늘 보는 노골적인 귀찮음쯤은 자애롭게 넘겼다. 나는 원래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는 훨씬 관대했다.
“그 일은 됐어요. 대신 다음부터는 더 조심해 주세요.”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까?”
“사과하려고 했어요?”
“예.”
“어…… 지금 저한테 미안해하시는 거예요?”
나는 원작에서 그가 남한테 사과한 적이 있었든가 떠올려 봤다. 생각나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한참 뒤에야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질문을 잠시 잊었을 만큼 긴 침묵이었다.
“그렇게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일이에요?”
“예.”
역시 장난으로라도 거짓말하지 않는 남자다웠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누굴 약 올리냐고 화냈을 테지만 그는 좀 달랐다. 지금은 그가 저 정도까지 말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럼 사과 안 받을래요. 괜찮아요.”
‘이제 내가 사과할 타이밍인가?’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언제쯤 표식에 대해 말해도 좋을지 고민했다.
“……지금 제 눈치를 보시는 겁니까?”
“저도 사과할 게 있으니까요.”
“…….”
그의 눈빛이 짙어졌다. 저 가련한 것을 어쩌면 좋겠냐는 느낌이었다.
“으음…….”
그러나 내가 그의 눈치를 살피는 시간이 점차 흐르자 그의 눈빛은 차갑게 굳어 갔다. 온도 차가 느껴지는데 의미를 모르겠다.
“음…….”
마침내 나는 살짝 웃으며 운을 뗐다. 이 몸은 눈매가 삐죽 솟아 새침한 인상이었는데 웃으면 아이처럼 해맑아 보였다.
“제가……”
그 순간 가이사는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을 느낀 것처럼 조급히 입을 열었다.
“영애의 수명을 줄여 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짝 웃고 있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충격이 몹시 커서 마음속 어둠이 짙게 깔렸다.
“얼마나요?”
“짧게는 보름 많다면 한 달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가이사를 노려보는 내 눈이 결코 따스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과하세요. 지금 당장.”
“…….”
그의 입술이 의미 없이 달싹거렸다. 몇 초의 시간을 두고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려운 것을 마주한 어색한 말투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진지하게 사과했음을 알았지만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요?”
그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귀찮음보다는 곤란함에 더 가까웠으나 나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네. 앞으로 제 수명 연장에 적극 협조해 줘요. 제가 원래 상태로 돌아갈 때까지.”
처음 니네이나가 되었을 때 겪은 보름간의 악몽을 떠올리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게 어떻게 만들어 놓은 소중한 것들인데! 그는 한순간의 실수로 많은 걸 앗아 갔다. 가장 소중한 귀물을 빼앗기면 그게 설령 일부라고 해도 굉장히 화가 나는 법이었다. 내게는 목숨이 그랬다.
‘뭘 버리고 선택한 건데.’
살기 위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비통함도 지워 버렸다. 나중에 그리워하려 묵혀 두고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지키고 살린 불씨였다. 열이 차오른 눈시울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툭 터트릴 듯했으나 눈을 부릅떠 터지려는 눈물을 삼켰다.
“돌려놔요. 원래대로.”
나는 이를 꽉 깨문 채 웅얼거렸다. 그는 곤란한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자기가 한 말을 후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내 지독한 노려봄에 그는 한발 물러났다.
“……몸을 보할 보약을 구해 오겠습니다.”
“그리고요?”
“운동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가이사가 운동을 도와줘? 뾰족한 시선으로 건강하고 튼튼한 그의 몸을 쭉 훑었다. 사심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고 스승이 될 자질이 있나 살펴본 것이었다. 잘 발달한 상체와 바지에 가려져서도 튼실한 허벅지 그리고……. 이런, 사심을 넣고 말았다.
“……좋아요.”
뺨이 조금 발그레해졌다. 모르는 척 고개를 쓱 돌리며 승낙했다.
그는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절 용서하신 겁니까?”
그의 말에 나는 대번 눈을 날카롭게 떴다.
“아니요.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당연히 보류예요.”
“……야박하십니다.”
그는 언젠가 했던 내 말을 돌려줬다. 물론 나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곱게 길러 온 소중한 아가들을 당신이 빼앗았어요. 아가들을 잃은 나한테 야박하다니요?”
“제가 언제 당신의 아가를 빼앗았단 말입니까?”
“제 수명 말이에요. 제가 알뜰살뜰 보살피며 낳은 애들이니 제 아기나 다름없어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그가 이길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의 보호 대상이었고 그는 날 지켜야 했으니까. 잘하는 협박이나 고문……. 그의 특기가 떠올라 침이 꼴깍 넘어갔다.
“……취소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는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피곤하다는 듯이. 침대에 누워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내는 내가 그에게는 몹시 어려운 것 같았다.
그는 일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표식 문제를 해결해야겠습니다.”
표식 얘기가 나오자 기세등등했던 마음이 한풀 꺾였다. 표식을 새기던 그가 얼마나 그 일을 힘들어했는지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의 움직임, 목을 졸린 듯 가파르게 꺾이던 숨소리, 시리도록 차가운 손에 맺혔던 식은땀. 보지 않았다고 해서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그 일을 몹시 싫어함을 알았다. 어쩌면 두려워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건…… 제가 미안해요. 전 그게 일회용인 줄 몰랐어요. 아니, 몰랐어도 제가 조심해야 했는데…… 아무튼 정말 미안해요.”
사과를 받았으니 뭐라 대답해 줄 법도 한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사과를 받으면 뭐가 달라지는 겁니까?”
“네?”
“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에 물어보는 겁니다.”
그의 말에 화가 나진 않았다.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내려앉았을 뿐이다.
“……제 사과가 당신께 아무 의미가 없었나요?”
“예.”
그는 어려웠다. 그의 마음을 따라가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음……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화가 났던 기분이 풀리고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돼요.”
가이사의 눈이 아주 짧게 번들거렸다.
“만약, 아주 만약에…… 당신을 죽인 사람이 당신을 찾아와 사과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고민하며 어렵게 한 질문 같았다.
“음…… 그 사람이 절 고의로 죽였나요?”
있을 수 없는 일을 물어보는 그의 질문을 시답지 않다고 넘기지는 않았다. 때론 무척 사소한 것이 어떤 사람의 가장 중요한 것이 되기도 했다.
읏! 들어 주고 있는데 저 눈빛은 뭐지? 그는 나를 뚫을 기세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당신을 잔인하게 죽입니다.”
“그런 주제에 사과한다고요?”
감정 이입이 과했다. 화가 벌컥 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죽음을 곁에 둔 사람으로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라 ‘만약’인 겁니다.”
나는 오래 고민했다. 시간이 10여 분 째깍째깍 흘렀을 때 나는 비로소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전 똑같이 되돌려 줄래요. 제가 그럴 능력이 된다면.”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없는데도 말입니까?”
“달라지는 게 왜 없어요? 복수를 했잖아요. 그 사람이 나만큼 비참해졌잖아요.”
복수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끝이 허망하더라도 불에 타 엎어지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하지만 당신은 달라진 게 없지 않습니까? 그를 죽여도 당신은 이미 죽어 있으니까.”
“난 영혼을 믿어요.”
“…….”
나는 영혼이 실재한다는 증거 그 자체였다. 그러니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그의 눈이 잘게 떨렸다.
“사람은 모두 달라요. 당신은 저를 처음 봤으니 나 같은 사람은 처음일 수밖에요. 나도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에요!”
너만 그런 줄 알아? 나도 너 때문에 종종 황당하거든!
톡 쏘아붙이자 그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하던 대답이나 마저 했다.
“내가 이미 죽었어도 내 영혼이 살아 있을 테니…… 분명 있어요. 달라지는 것.”
“영혼이 있다…….”
“네.”
“내가 죽는다면 이미 죽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겁니까?”
그 사람. 그는 누군가를 특정해 두고 있었다. 아마도 몹시 만나고 싶은 사람인 듯 눈동자가 반짝였다.
‘사후 세계까지는 잘 모르는데…….’
정답은 모른다. 그러나 바라는 게 있는 사람에게 원하는 대답을 해 주는 건 쉬웠다.
“네.”
“……지금 이 지긋지긋한 삶이, 변변찮은 목숨이 의미가 있다고 말한 겁니다.”
그러니 책임이라도 지라는 걸까? 나는 소심하게 한발 뺐다.
“세상에 의미 없는 삶은 없어요. 윤회라는 거 알죠? 나중에 뿌린 대로 다 거두게 될걸요. 이왕이면 최선을 다해 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최선? 똑같은 말을…….”
자조가 스친 뒤 그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 앞에서 살기 싫다는 소리를 했다가는 가만 안 둘 거예요!”
지긋지긋한 삶. 변변찮은 목숨. 아까부터 기분 나빴다.
“…….”
이를 악물고 노려보는 그녀의 눈을 먼저 피한 건 그였다.
“표식을 다시…… 새기겠습니다.”
그는 완전히 깨져 버리기 전에 외면하고 이음새를 긁어 버렸다. 두려운 생각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음에도 또 끔찍한 게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저 이야기도 이 일도 다 원하지 않았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걸 보자 밀쳐 내고 추궁할 수 없었다.
“표식은 일회용밖에 없어요? 몇 번 더 되는 게 있으면 좋을 텐데요.”
나는 말을 돌리기를 택했다. 그가 하도 싫어하니 걱정되어 하는 말이었다. 또 실수해 버리면 가이사의 얼굴을 못 볼 것 같았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하기 싫습니다.”
평소대로 돌아온 그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거부감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으나 아까의 깨질 것만 같았던 얼굴보다는 나았다.
“방법이 뭔데 그래요?”
싫다면 두 번 권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말하기도 싫다는 얼굴을 하자 궁금했을 뿐이다.
“……죽일 겁니다.”
“네?”
“그 방법을 쓰면 제가 당신을 죽이게 될 겁니다. 매우 높은 확률로.”
‘여, 역겨워서? 그보다 방금 전에 안 죽인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그 와중에도 잠시 궁금해졌지만 나는 곧 호기심의 싹을 밟아 죽였다. 죽음이라니! 절대 싫어!
정색하고 딱 잘라 말했다.
“구관이 명관인데 제가 헛소리를 했죠? 아까처럼 잘 부탁합니다.”
“…….”
그는 바로 표식을 새겨 넣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하기 싫어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단 할 말이 남았다는 기색이 더 느껴졌다.
“왜요? 또 뭐가 남았어요?”
“일회용이라 하여 사용을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저, 저를 걱정해서 일회용이라고 말씀 안 하신 거예요? 제가 미안해서 못 쓸까 봐?”
“아니요, 속이 울렁거려서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설마 그럴 리 있냐는 얼굴로 무심하게 대답했다.
‘이 남자가 진짜!’
잠시 느꼈던 감동이 힘없이 바스러지는 걸 느꼈다.
“……아무튼 알았어요.”
“아는 걸론 안 됩니다.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으면 생각하기에 앞서 정령의 이름을 부르셔야 합니다. 약간의 망설임이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니까요.”
가이사가 명심하라는 듯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까딱하면 날아갈 바람 앞의 등불이 내 목숨이라는 뜻이었다. 그가 나를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건 다 그 약속 때문이겠지만 나는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모래알처럼 부서져 날아갔던 감동 조각을 다시 긁어모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잊지 않을게요.”
내 감동을 훔쳐보던 그는 장갑을 벗으며 무덤덤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또 한 번 이런 일이 있으면 화낼 겁니다.”
“……망설이지 말고 쓰라면서요?”
“위험한 상황이라는 전제가 붙지 않습니까.”
귀찮음이 반 한심함이 반이었다. 순간 울컥할 뻔했다.
‘참자. 참아. 이번 일은 내가 잘못한 거잖아? 그는 날 도와주는 거고.’
속을 달랜 후 잘 알겠다며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아침에 봤을 때보다 손끝이 더 붉어진 손이 눈가로 다가왔다. 그 손은 내 속눈썹에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가며 이마를 살짝 눌렀다.
“정말…… 혼내 줄 겁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꺼풀을 아래로 밀어트렸다.
‘알았어요.’
긴장한 그를 위해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고 속으로만 대답했다. 그는 아마 내 감은 눈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떨리는 손이 차근차근 결을 맺었다. 긴장한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표식을 남기기 위해 애쓴 시간이 전보다 훨씬 더 짧아졌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