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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점 (91)화 (98/98)

균열점 (91)화<91> 

주머니 안에 든 사탕이 만져졌다. 버스에서 소년의 가난한 행색을 본 옆자리 아주머니가 건네준 것이었다. 딸기 그림이 그려진 분홍색 포장지를 소년은 아직 뜯지 않고 있었다. 배가 고파지면 그때 꺼내 먹을 작정이었다. 자신에게는 돈이 별로 없으니까.

그러니까 소년 딴에는, 큰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이게 뭔데?"

아무것도 모를 꼬맹이가 무구한 눈으로 물었다.

"사탕."

"나도 있는데?"

"무슨 맛인데?"

"몰라."

"서로 바꿔 먹어 볼까?"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피스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초록색 포장지를 꺼냈다. 소년의 사탕이 꼬맹이의 손에 떨어지고, 꼬맹이의 사탕이 소년의 손에 떨어졌다.

꼬맹이는 소년이 준 사탕 포장을 그대로 뜯어 입에 넣었다. 맛이 괜찮은지 양 뺨이 볼록 튀어나오고 도톰한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울음기가 가신 꼬맹이는 꽤, 아니 많이 귀여웠다.

"안 먹어?"

꼬맹이가 소년에게 물었다.

"나는 좀 이따가 먹으려고."

"지금 먹으면 안 돼?"

기분이 좋아진 꼬맹이는 소년의 반응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가 좋으면 상대도 좋아야 한다는 생각인 걸까?

커다란 눈망울로 지켜보는 통에, 소년은 별 수 없이 사탕 껍질을 깠다. 안에 있던 투명한 것을 입 안에 넣자 화, 하는 기운이 입 안에 퍼졌다.

켁.

처음 먹어보는 매운 맛이었다. 사탕 껍데기를 확인하니 민트 맛이라고 쓰여 있었다. 소년은 그날, 자신이 민트 맛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제 돈 주고는 사먹고 싶지 않은 맛이었다.

"작은엄마가 이거 먹으면 울음 그치게 될 거랬어."

그렇긴 하겠다. 놀라서.

"그거 기분 좋아진다는 뜻인 거지?"

꼬맹이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소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아?"

"…좋아."

정확히는 소년의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고 기대하는 얼굴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소년의 대답을 들은 꼬맹이가 활짝 웃었다.

"내일 여기 또 와. 사탕 더 갖다 줄게."

"글쎄. 내일 또 오긴 힘들 거 같은데."

"그럼 나중에라도."

꼬맹이의 말투에서 아쉬움이 배어 나왔다.

"그래. 근데 나중에 만나면, 이거랑은 다른 맛으로 주라."

꼬맹이가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그땐 내가 너한테, 네가 나 준 거랑 똑같은 맛 사탕 줄게."

무슨 맛인데 그러나 싶은지 꼬맹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소년은 속으로만 씩 웃었다. 자신이 맛보기 위해서라면 절대 사지 않겠지만, 꼬맹이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라면 몇 개 쯤 사볼 만도 할 것 같았다.

해가 질 때까지 함께 있던 소년과 꼬맹이는, 소년이 먼저 자리를 뜨는 바람에 헤어지게 되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수많은 일들이 소년과 꼬맹이를 스쳐갔다. 새로운 만남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잊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지켜졌다.

* * *

"연우야. 엄마 노래하는 목소리 너무 듣기 좋지 않니?"

"그만 좀 물어봐. 이백 번도 넘었어."

나는 아빠 덕분에 ‘팔불출’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이따금 놀러오는 혜진 이모랑 동훈 이모부가 맨날 똑같은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는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엄마랑만 엮이면 ‘팔불출’이 되어버린다고.

그리고 나는, 아빠가 ‘답정너’라고 생각한다.

"잘 들어 봐. 사과 사각거리는 소리 같지 않아?"

사과향이나 사과 색깔에 비교하는 건 봤어도, 사과 씹는 소리에 비교하는 건 처음 봤다.

"전혀 모르겠는데? 밤에 아빠가 자장가 부르는 소리보다 백만 배 낫긴 하다."

아빠는 음치다. 다행히 자장가를 매일 들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우리 엄마다. 나는 아빠가 하는 노래를 들으면 짜증이 나던데, 엄마는 배를 잡고 웃다가 잠이 든다고 한다.

"넌 너무 낭만이 없어. 아무래도 엄마를 닮았나 봐."

아빠가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냥 꽃상추나 마저 심으면 안 될까?"

"…그래."

엄마 대신 정원에 나와서 아빠를 돕고 있는 것만도 충분히 불만스러운데, 뜬금없는 엄마 칭찬에 맞장구까지 쳐주고 싶지는 않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은 엄마가 어릴 때 살던 집이라고 한다. 원래는 아주 낡았었는데, 아빠가 사들인 뒤 재건축을 했다고 했다.

"이따 밤에 엄마한테 동화책 읽어달라고 할까?"

"아빠. 나도 이제 10살이야. 자기 전에 동화책 읽을 나이가 아니라고."

매몰찬 거절에 아빠가 시무룩해졌다. 엄마가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빠이기 때문이다. 자꾸 내 핑계 좀 안 댔으면 좋겠다.

"아유. 우리 귀한 연우 왔어요?"

더러워진 신발과 양말을 벗고 있는데, 엄마가 2층에서 내려왔다.

"엄마는 좋겠다. 아빠가 안 부려먹어서."

"아닌데? 엄마도 집 청소했는데?"

엄마가 집안일 했다고 해봤자 별로 기대는 안 된다. 아빠가 10분에 걸쳐 할 일을, 엄마가 하면 1시간이 걸린다. 아! 설거지는 빼고.

"그런데 아빠는?"

"아빠는 뒷정리 더 해놓고 온대."

"내일 출근할 사람이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한대? 좀 쉬지."

"그러게."

솔직히 나는 아빠보다는 엄마랑 더 잘 맞는 것 같다. 그렇지만 얼굴은 엄마보다 아빠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리고 세상에서 엄마를 제일 좋아한다는 점도 아빠를 닮았다.

"너 이따 오후에 민찬이랑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니?"

"응.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빠 도운 거잖아."

"고생이 많다."

엄마가 내게 레몬에이드를 내밀었다. 엄마가 직접 담근 레몬청(사실 시작은 엄마가 했으나 끝은 아빠가 냈다.)에 탄산수를 탄 것이었다. 우리 집 공식 음료수다. 아빠는 레몬청에 무슨 추억이 얽혀 있다고 했는데, 엄마가 아빠 입을 막아버려서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다.

아빠가 엄마와의 추억을 말하며 혼자 아련해지는 물건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반지, 수국, 다이어리, 붕어빵, 숙취해소제, 집게 핀, 귀걸이 등등.

그리고 그 추억을 그러모아 이루어낸 결실이 나라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총체적으로 담긴, 매우 행복한 아이라나?

내가 '행복한 아이'라는 결론에는 비교적 동의한다. 엄마랑 아빠는 내 말을 잘 들어주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믿어주고, 자주 칭찬을 해주니까. 심심할 틈 없이 자꾸만 새롭고 신나는 일을 벌여주니까.

엄마, 아빠가 어릴 때 받고 싶었던 것들을 내게 모두 쏟아줄 거라고 했다. 사람마다 바라는 게 다르니까 엄마, 아빠가 꼭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노력하는 자세는 '참 잘했어요.' 도장을 쾅쾅 찍어주고 싶다.

"난 반대다."

엄마 안전벨트를 매주던 아빠가 말했다. 양쪽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엄청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는 걸 강조하는 거다.

"왜? 난 민찬이 괜찮던데."

미안하지만, 아빠가 이렇게 나온다고 해서 엄마나 내 의견이 바뀌는 일은 절대 없다.

"애가 너무 깍듯하잖아."

아빠가 편을 들어달라는 얼굴로 엄마를 봤다. 하지만 엄마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건 좋은 거 아냐?"

내가 끼어들었다. 참고로 민찬이는 얼마 전에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아이였다. 나는 다음주까지 민찬이에게 대답을 돌려주기로 했고.

"지나치게 깍듯하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엄마가 피식 웃었다.

"지금 자기반성하는 거야? 예전에 당신이 딱 그랬잖아."

말의 내용과 상관없이, '당신'이라는 두 글자에 아빠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엄청나게 노력해서 받아낸 말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걔보다 더 잘 생겼었다고."

전혀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누구 이름을 대도 아빠는 비슷한 말을 할 테니까. 그리고 아빠가 뭐라고 하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아마 엄마랑 아빠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럼 출발할까?"

아빠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우리는 오늘 겨울 바다를 보러 떠난다. 낙엽마저 다 떨어진 나무들을 봐도 스산해 보이지 않는 건, 가족과 함께 있어서일까?

"근데 엄마는 아빠를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어?"

"그냥, 자꾸 보고 싶고 얘기하고 싶고 생각나고 그래서?"

"그럼 아빠는?"

"…없으면 못 견딜 것 같아서?"

"우웩. 소름 돋아."

"진짠데. 나중엔 정말 죽을 것 같았는데."

내가 팔을 잡고 온 몸을 부르르 떠는 동안, 엄마와 아빠는 요상한 웃음을 교환했다. 저렇게 사이가 좋은데, 헤어져서 몇 년을 안 본 적도 있었다니 상상이 안 간다.

그건 그렇고, 민찬이한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하다. 엄마 기준이면 나도 민찬이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빠 기준이면 민찬이를 좋아하는 게 아닌 것 같다. 걔가 안 보인다고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잘 모르겠으면 만나보면서 생각하면 되지."

역시 엄마는 현명하다. 아빠가 반대하려고 입을 열자, 엄마가 아빠 입술을 톡, 때렸다.

"당신은 연우 걱정 그만하고, 내 걱정이나 좀 더 해요."

…알고 보면 엄마도 아빠랑 똑같다. 왕닭살.

어쨌거나 우리는 함께 있다. 오늘 밤에는 바닷가에서 몸에 담요를 둘둘 만 채 거친 파도와 밤하늘을 감상할 것이다. 내일은 맛있는 것도 먹고 모래 위를 걷기도 하면서 이야깃거리를 쌓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집에 돌아올 것이다. 가끔 다투더라도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을 곳곳에 심어 놓을 것이다. 나무가 자라는 동안 나는 크고 엄마, 아빠는 늙어가겠지만 우리가 심어놓은 추억들은 그대로 남아 우리 가족을 지켜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 실제로 보는 바다가 어떠하든지 간에.

<균열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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