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왜요?"
"출출하지 않아?"
선우가 연희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연희가 선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딱 붙어서 정문을 벗어났다. 연희와 선우는 언젠가 함께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다시 걸었다.
예전과 다름없이 화려한 간판이 반짝였지만 면면을 들여다보면 달라진 점이 훨씬 많았다. 기억하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그러나 아쉽지만은 않았다. 사라진 것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오늘 본 새로운 풍경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번엔 내가 사주고 싶었는데 없어져 버렸네?"
연희와 선우가 함께 사 먹었던 붕어빵 가게도 없어졌다. 대신 와플 가게가 생겼다. 연희는 생크림이 듬뿍 들어간 블루베리 와플을 주문해 선우와 나누어 먹었다. 연희가 입에 베어 물면, 입가에 묻은 걸 선우가 핥아먹는 방식으로.
선우의 손목에 각종 주전부리가 든 비닐봉지가 걸렸다. 부스럭대는 봉지 속에는 남은 와플과 음료수, 삼각김밥과 샌드위치 따위가 담겼다. 연희와 선우의 발걸음 소리에 비닐봉지의 바스락대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그 위를 다정한 연인의 목소리가 덮었다.
"근데 연희 너, 아까 여기 남학생한테 웃어주더라?"
"아니, 나한테 길 물어보는 게 웃기잖아. 누가 봐도 여기 학생이 아닌데."
"아니야. 너 되게 어려 보여. 그러니까…."
"응?"
"남들한테 안 웃어주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얘기하네, 또."
"그러다 다들 여보한테 반하면 난 어떡해?"
"선배가 옆에 있는데 누가 나한테 접근하겠어? 내가 그동안 선배 때문에 날려먹은 연애만 해도…."
"아쉬워?"
핵심을 빗긴 채 저 듣고 싶은 말만 들은 선우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귀여웠다. 더 부추기고 싶어질 만큼.
"선배 없을 때 좋은 사람들이랑 연애 많이 했어야 했는데…."
선우가 금세 눈꼬리를 내리며 시무룩한 어조로 투덜댔다.
"어차피 너 남자 보는 눈 없잖아. 나를 포함해서."
몇 년 전까지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겠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은 내게 있어서 '최고의 남자'라고 말하기도 쑥스러워서, 연희는 불퉁하게 다른 진심을 내뱉었다.
"더 잘난 남자가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야. 난 선배밖에 안 보이는데."
말투는 무뚝뚝해도 두 볼에는 홍조가 배어 있다. 너무 은은해서 자세히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그것은, 활짝 핀 벚꽃을 닮아 있었다.
비로소 제 계절을 찾아든 벚꽃이었다.
펑. 펑.
축제도 아닌데, 누군가 쏘아 올린 불꽃이 밤하늘 위에서 터져 올랐다. 연희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불꽃이 터지는 곳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옆얼굴을, 선우는 꿈꾸듯 바라보았다.
"사랑해, 연희야."
선우가 멍하니 고백했다. 준비할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말은 항상 멋대가리가 없었다. 그래도 원할 때마다 마음껏 말할 수 있어 좋았다.
웃으며 이 말을 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걸어왔던가.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연희의 뺨에 입술을 붙였다. 두 사람의 얼굴 위로 하나의 불꽃이 사이좋게 피어나고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