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주방에 다녀온 잠깐 사이에 분위기는 더 뭣 같아져 있었다.
좀처럼 기침이 멎지 않는 여직원에게 연희가 주의를 빼앗기자, 선우가 곧바로 아픈 척을 시작한 것이다.
"여보, 나 속이 울렁거리는 거 같아. 나 배 좀…."
은근슬쩍 연희의 손을 제 배 위에 얹는 손길에 결국 참지 못한 혜진이 딴지를 걸었다.
"술 많이 약해졌다? 달랑 맥주 두 잔 먹고 벌써 속이 안 좋아?"
선우가 혜진을 잠깐 노려봤다. 하지만 금방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비행기를 오래 탔더니 피곤해서 그런가 봐."
"그러니까 쉬지 좀…."
야. 넌 저 여우 짓이 안 보여? 안 보이냐고?
혜진이 내적 비명을 지르는 동안, 연희가 선우를 부축해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리고 내려오지 않았다.
…선우가 들고 온 상자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얘들아. 정리하고 가자."
심적으로 피곤해진 혜진이 주인 대신 파장을 선언했다. 다들 기가 빨린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을 닦고, 쓰레기를 분리하고.
오기 전보다 깨끗해진 집을 둘러보며 모두 한마음으로 다짐했다.
남의 신혼집에 다시는 오지 말자고.
띠링,
돌아오는 길에 혜진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선우가 보낸 것이었다.
[앞으로 우리 집에 남자 직원은 데리고 오지 마라.]
분노에 찬 혜진이 자판을 거칠게 눌렀다.
[데리고 오면 어쩔 건데?]
지체 없이 긴 답장이 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동훈이 펜션 바로 옆에 호텔 세울 거야. 펜션 숙박비에 맞춰서 파격 할인 할 거야.]
…쪼잔한 자식. 설마 진짜로 그러는 건 아니겠지?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정말이지 다시는 안 오고 싶었다. 절대 무서워서가 아니다.
"나도 남친이나 만들어야겠다."
누군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혜진도 동훈에게 전화가 걸고 싶어졌다.
두 사람만의 행복했던 집들이가 끝났다.
* * *
"선배, 거기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어떻게 해?"
"내가 뭘?"
선우가 부루퉁하게 되물었다.
"장 대표님은 내 은인 같은 분인데. 그렇게 예의 없이 굴어야 해? 내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
연희가 네 번째로 출간한 책이 좋은 반응을 얻어 장 대표가 친히 밥을 사주는 자리였다. 굳이 선우가 따라 나오겠다고 할 때부터 민폐가 아닌가 싶었는데, 장 대표와 연희 사이가 생각보다 친밀해 보였던지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특히 연희와 장 대표가 전 직장에서 고생한 추억담을 읊으면서부터는 뒤틀린 심사를 대놓고 드러냈다.
"거기서 출판사 곧 문 닫겠다는 말이 왜 나와?"
예의상 건넨 장 대표의 안부 질문에는 대답도 않던 선우가, 뜬금없이 장 대표의 외모며 사업 수완이며 흠을 잡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전 직장, 즉 수형문화재단의 윗대가리들이 채용비리와 공금 횡령으로 처벌받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이파이브를 하던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그래도 좋게 넘기려고 했는데.
"하하. 우리 연희 덕에 저희가 그나마 밥 벌어먹고 살고 있습니다."
분위기를 눙치려 장 대표가 건넨 말 중 '우리 연희'라는 네 글자가 문제였나 보다. 대표님이 왜 '우리'와 '연희'를 조합해 부르는 거냐며 선우가 따지고 들었을 때는 땅굴이라도 파고 싶었다."하하, 신혼이라 그런가, 남편이 질투가 많네."하고 장 대표가 덧붙이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때리고 싶다. 저 잘난 뒤통수. 무르고 싶다. 혼인신고.
가끔 보면, 선우는 연희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격이 나빴다.
"그러니까 남의 여자한테 왜 그렇게 친한 척을 하고 그래?"
"그게 무슨 친한 척이에요? 그냥 동생 같으니까 잘 해주는 걸 갖고."
"동생은 무슨. 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면 조카뻘이지."
장대표와 선우의 나이 차이는 겨우 두 살이었다.
"애초에 장 대표가 그렇게 잘 생겼다는 말은 안 했잖아?"
음. 장 대표가 좀 괜찮긴 했지만, 연희 취향은 아니었다. 연희 취향은 선우니까.
"네 주위에는 왜 그렇게 잘난 인간들이 많아? 짜증 나게."
앞에서는 여유로운 척하면서 뒤에서는 꼭 이랬다. 연희 주변에 선우만큼 잘난 남자는 없다고 토닥여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연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순수하게 선후배 사이라니까? 사심이 있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이렇게 이해를 못 해주면 내가 어떻게 사회생활을 해?"
"억울하면 여보 너도 질투하든지."
2년 동거를 마치고, 작년에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자마자 선우는 연희를 '여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연희도 '여보'라고 부르라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희는 아직도 꿋꿋이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여보는 장 대표한테도 '선배님'이라고 부르더라?"
"그야 전 직장 입사 선배였으니까."
전에는 칼 같이 '장 대표님'이라고 불렀으나 여러 번 함께 작업하면서 친해진 뒤로는 반 장난삼아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할 때가 종종 있었다.
선우는 그게 거슬렸던가 보다.
"아무나 다 선배면 나는 대체 뭔데?"
"……."
또 시작했구나.
사실 '자기'나 '여보', '당신'이라는 호칭이 쉽게 나오지 않는 건 전 결혼 생활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전남편에게 불렀던 호칭을 선우에게 다시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으니 버티고만 있는 연희도, 제발 불러달라고 하는 선우도 답답하기만 했다.
"…미안해요."
연희가 오랜만에 존댓말까지 써가며 사과했다. 동거 때까지만 해도 적당히 장난으로 눙쳤는데, 결혼을 하고 나자 그렇게 얼렁뚱땅 넘기기만 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게 나한테 쉬운 게 아니라서…."
한참의 침묵 끝에 변명처럼 한마디를 내뱉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선우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왜 사과하는데?"
"그렇게 원하는데 쉽게 말이 안 나오는 게 너무 미안해서 그렇지."
풀이 죽은 연희가 소파에 털썩 앉아버렸다. 선우가 옆에 붙어 앉더니 한 손으로 미간을 긁었다.
"아니,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라…."
연희가 고개를 들어 의아한 눈으로 선우를 보았다. 선우가 고개를 살짝 뒤로 빼며 물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해?"
"……."
"너 내가 이럴 때마다 맨날 키스해 줬잖아."
연희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변했다, 너."
선우가 섭섭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편으로는 소파에 등을 꾹 눌러 붙이고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는 게, 아직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에라, 모르겠다.
비장한 표정을 한 연희가 몸을 들어 선우의 무릎 위에 올라탔다. 선우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가슴을 바싹 붙였다. 몸을 조금 뒤로 뺐다가 앞으로 당기며 살짝살짝 허리를 움직였다.
"여보, 잠깐만."
선우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연희 때문에 쉽지 않을 텐데도 자꾸만 꿈틀거리며 옆으로 비켜 앉으려 했다.
"네?"
"아니, 지금 여보가 자꾸 나를 문지르니까."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요."
그런 거였어?
선우의 입술이 위로 솟았다.
"우리 여보는 언제부터 이렇게 발랑 까지게 되었을까?"
신나게도 물어봤다.
"그 입 좀 다물어요."
"그래서 또 반했다는 건데, 왜 그러지?"
입 다물라는 말과 달리, 연희의 혀는 선우의 입술을 한껏 벌리고 있었다. 붉은 살점을 오래도록 비비며 말캉하고도 쫀득한 느낌을 즐겼다.
"흐읏…."
연희가 시작한 일이었으나, 결국 숨 쉴 틈 없이 끝까지 몰아붙인 사람은 선우였다.
* * *
"오랜만이다."
"많이 변했네요."
대기업의 투자를 받은 H대학은 연희와 선우가 다닐 때보다 훨씬 세련되고 규모가 커져 있었다. 졸업한 후로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만큼 새로워진 점이 많았다.
"오길 잘했죠?"
모처럼 둘 다 시간이 났으니 산책이라도 나갈까 묻는 선우에게, 연희가 와보고 싶다고 한 곳이 이곳이었다.
푸른 잔디 위에 은근슬쩍 누워도 보고, 새로 지어진 건물 안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 연희와 선우가 가장 자주 드나들었던 인문대 건물은 개보수 되어 예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깨끗한 건물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연희가 자주 앉곤 하던 학생식당 앞 벤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와 똑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등받이가 있던 나무 벤치는 등받이 없는 오렌지색 철제 의자로 바뀌었다. 먼저 벤치에 앉은 선우가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곧 연희가 선우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마주 본 연희와 선우가 웃었다. 자연스럽게 손과 손이 겹쳐졌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느긋하게 봄의 캠퍼스를 감상했다.
이제는 어리게만 보이는 청춘들이 부지런히 캠퍼스를 누비고 있었다. 어리다고 해도 그들이 가진 꿈이나 고민들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연희도 선우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 버티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무언가가 이루어져 있게 마련이다. 한 발짝씩 떼다 보면 꿈꾸던 것과 꼭 같을 수는 없어도 지금보다 나아질 수는 있을 것이다. 시간은 언제 어떤 선물을 내밀지 모르니 당장의 결과만으로 크게 좌절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그 또한, 시간이 훨씬 더 지나야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다. 연희도, 선우도 그랬으니까.
솨아.
상쾌한 봄바람이 선우와 연희 주변에 벚꽃 잎을 흩날려주었다.
"그거 알아? 벚꽃을 맨손으로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대."
이번엔 낙엽에 이어 벚꽃인가. 선우가 또 싱거운 소리를 했다. 그러나 굳이 떨어지는 벚꽃을 잡으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첫사랑은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는 벚꽃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해가 지자 벚꽃나무 사이사이 심어놓은 전등이 켜졌다. 은은한 조명을 받은 꽃송이도, 나무도 신비롭기만 했다. 오늘의 풍경은 또 얼마나 기억 속에 오래 간직될지 모르겠다.
"연희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연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밤의 벚꽃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연희를 보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