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연희는 집들이를 막지 않았듯이 청소도 막지 않았다. 그냥 남들이 시작하니까 어쩔 수 없이 본인도 정리를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썩 내키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누가 보면 모르는 사람 집인 줄 알겠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급한 대로 거실만 치우는데도 30분은 걸린 것 같았다. 좀 전에 먹고 온 밥과 술이 다 소화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눈에 띄게 깔끔해진 풍경에 다들 보람찬 얼굴이 되었다. 겨우 자리를 잡고 긴 테이블을 펼쳐 사 온 것들을 늘어놓는 찰나,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 또 올 사람 있어요?"
막내 직원이 물었다.
"없는데. 누구 배달 주문한 사람 있니?"
연희가 물었으나 다들 고개를 저었다.
연희가 어리둥절해하며 현관문을 열자, 커다란 상자가 불쑥 나타났다. 상자 아래로 쭉 뻗은 긴 다리가 보였다.
"문 좀 확 열어주면 안 될까? 내가 지금 손이 없어서…."
상자 뒤에서 선우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예요? 아니, 그보다 어떻게 벌써 왔어요?"
입이 귀까지 걸린 연희가 상자를 받아들려고 했으나, 선우가 무겁다며 손도 못 대게 했다.
"우리 여보 빨리 보고 싶어서 밤새워가며 얼른 끝내고 왔지요."
응? 뭘 잘 못 들은 거 같은데?
"고생했겠네."
"그러니까 뽀~뽀~."
나 아까 소주 한 병밖에 안 마셨는데 왜 자꾸 환청이 들리지?
혜진은 순간 자신이 술에 많이 약해졌나 했다.
혜진이 아는 선우라면 절대 저런 목소리로, 저런 식의 귀여운 척을 할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연희의 반응은 또 어떤가? 그냥 잘 다녀왔다는, 평범한 인사를 들은 사람처럼 덤덤하지 않은가.
"웬일. 은근히 귀여운 스타일이신가 봐요."
아르바이트생이 옆에서 중얼대는 소리를 듣고야 환청이 아님을 깨달았다.
"숍에서 봤을 때는 되게 점잖아 보이셨는데."
"맞아. 좀 무서울 정도로 근엄해 보이셨는데. 맨날 정장만 입으시고."
정장 슈트는 지금도 입고 있었다. 선우는 연희가 정장 입은 모습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며 집에서 나올 때도 꼭 정장을 입고 데리러 왔다.
저러고 비행기 타고 온 거야?
진짜 입고 온 것이든, 중간 어디에서 갈아입고 온 것이든 그 노력이 대단했다. 정작 연희는 선우가 몸뻬 바지를 입는다 해도 좋아할 텐데.
혜진이 혀를 차는 사이, 현관에 상자를 내려놓은 선우가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이 와 계셨…네?"
선우가 천천히 눈을 굴려 연희와 나란히 앉아 있던 직원 둘과 맞은편에 앉은 다른 직원 하나, 혜진과 그 옆의 아르바이트생까지 스캔하듯 시선을 옮겼다.
특히 연희가 앉아 있던 좌식 테이블 중앙에 가장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선우를 마중하는 바람에, 연희가 앉아있던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혜진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선우가 놀랐는지 울대를 한번 울렸다.
그래. 너도 당황했겠지. 친구인 나도 여기 있으니까 이제 체면 좀 차려라.
선우가 입을 열었다.
"잘 생기셨네요."
보안요원을 향해.
아, 나를 의식한 게 아니었구나.
알고 보니 선우의 눈길이 머무른 곳은 젊은 보안요원이 앉아있는 자리, 즉 혜진의 맞은편이자 연희가 앉아있던 곳의 바로 옆자리였다.
준수한 이목구비에 몸까지 좋아서 요즘 손님 중의 절반은 저 얼굴을 보러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저랑 비교도 안 되게 멋진 분이 말씀하시니까 꼭 놀리시는 것 같네요."
보안요원이 예의 바르게 대답하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뭐래?
선우가 넥타이 매듭을 끌어내리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오랜 시간 선우와 함께 다녔던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지금 선우의 웃는 얼굴은 무언가 굉장히 거슬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여기 있으려고요? 2층에 올라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어요?"
"손님이 오셨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뭐라도 해 드려야지."
하지만 연희가 묻는 말에는 눈을 접으며 매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연희 말로는 3주 동안 서유럽 5개국과 아시아 2개국을 돌았다던데, 체력이 남아도나?
연희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나마 공간이 여유로웠던 혜진이 선우의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가장자리 쪽으로 몸을 옮겼다. 하지만 선우는 혜진의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
보안요원과 연희 사이에 제가 들고 온 상자를 억지로 끼워놓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보안요원이 테이블 모서리 부분까지 밀려났다.
"참, 이 박스는 뭐예요?"
연희가 선우의 등 뒤에 대고 묻자,
"사무용품인데, 아직 열어보진 말고."
선우는 걸어가면서도 연희의 물음에는 착실히 대답했다. 과연, 박스에는 그냥 '사무용품'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음…. 세부항목 없이 그냥 '사무용품'이라고 적힌 택배를 보면 떠오르는 것은?
물론 진짜 사무용품일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는데 선우 표정이…. 어느새 뒤를 돌아본 선우가 연희를 향해 요사스럽게 웃고 있었다. 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고.
자세히 보니 박스 테이프에 새겨진 로고가 낯이 익었다. 혜진도 주문해 본 적이 있는 그곳 같았다.
즉, 단순 사무 용품일 확률은 0.000001%에 수렴했다.
그런데 뭘 사면 저렇게 박스가 크고 무거울 수 있지?
어른용 장난감을 싹쓸이해 온 것도 아니고….
어쨌든 주방에 들어간 선우는 계란을 풀고 소시지를 볶았다. 보안 요원이 '저희 모두 배부르다'고, '괜찮다'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했다.
연희가 한마디 거들고서야 "그래도 여보 손님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라며 착한 척을 했다. 대답하고 싶은 말에만 대답하는 것이다.
마침내 선우가 음식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더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저 요리 잘하는데."
말은 그리 해놓고, 상자를 뒤로 밀어낸 선우가 연희 옆에 털썩 앉았다. 동시에 보안 요원 쪽으로 손을 길게 뻗어 바닥을 짚었다. 모서리를 끼고 앉아 있던 보안요원이 완전히 테이블 밖으로 밀려났다. 영문을 모르겠으나 무언가 불편함을 느낀 보안 요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필요한 건 너의 부재(不在) 같구나. 그냥 2층에 올라가주면 안 되겠니?
혜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선우의 미소에 홀린 여직원들이 자리에 그냥 앉아만 계시라고 만류하기에 실제로 말하지는 못했다. 다들 저 잘난 상판대기에 넘어갔나 보다, 하면서.
어쩐지 쉽지 않은 자리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왜 이렇게 묻히고 먹어?"
"아닌데…."
연희 옆에 딱 달라붙어 앉은 선우는, 오물대는 모습이 그렇게 예쁘다며 연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물티슈를 꼭 쥐고는, 연희 입 근처에 조금만 뭐가 묻어도 닦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소시지볶음에 케첩을 처넣지를 말던지.
처음에는 사이가 참 좋다며 감탄하던 직원들도 온전히 둘만의 세상에 빠진 집 주인 부부를 지켜보면서 점차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오랜만에 보니까 더 예뻐진 것 같네."
요 며칠 풀 야근해서 평소보다 퀭해 보이는구만 잘도 지껄였다.
그보다 옆에 있는 우리들은 사람으로 안 보이냐? 고개라도 잠깐 돌려라. 담 걸리겠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멍청하니 입만 벌리고 있던 직원 하나가 겨우 화젯거리를 찾았다. 신혼부부 집들이에서 할 말이 없을 때 흔히 나올 법한 레퍼토리였다. 대충 대답하면 되는데 선우는 한참을 생각했다.
"제가 한눈에 반했죠."
오래 생각한 것치고는 뻔한 말이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네.
대학에서 선우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학기 초에 연희를 마주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 선우의 반응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정확히 언제부터 마음이 갔는지, 아니 깨달았는지는 몰라도 첫눈에 반한 건 아닐 것이다.
연희는 객관적인 편이니까 저런 사탕발림을 믿을 리가….
"그랬어요?"
믿네.
연희가 눈을 내리깔고 새초롬하니 웃었다. 그러자 선우가 연희를 씹어 먹고 싶다는 눈빛을 마구 쏴댔다. 얼굴을 구기며 시선을 교환했던 직원들이 곧 정신을 차리고 강제로 공연을 참관하게 된 관객처럼 어색한 추임새를 넣었다.
"우와아!!"
"천생연분이시네요."
의미 없는 감탄사가 거실을 떠돌았다.
"그렇죠?"
덥석 받아 문 사람은 선우였고 고개를 끄덕인 사람은 연희였다. 연희는 얼굴 전체가 발그레해진 상태였다.
연희 너마저.
"참. 안주 부족하죠? 뭐 좀 시켜드릴까요?"
오랜만에 선우가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지들 사랑 놀음에 이 정도 추임새는 넣어주어야 뭔가를 입에 넣을 자격이 생긴다는 거야?
혜진은 자꾸만 비뚤어지려는 생각을 바로잡으려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것 좀 먹어 봐."
막상 계란말이를 만들어 와서는 연희 입으로만 쏙쏙 집어넣는 선우의 꼴은 또 어떠한가. 그러고 보니, 중앙에 놓였던 계란말이 접시가 언제부터 연희 앞에 바싹 붙어 있게 된 거지?
연희 앞에 놓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시지볶음이고 오징어볶음이고 어묵탕이고…. 그냥 모든 접시가 한 사람 앞에 죄다 몰려 있었다.
게다가 연희가 뭐 하나 삼키기 무섭게 다른 걸 먹이려고 대기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음식에 손도 못 댈 지경이 되었다. 원래 같으면 선우를 말렸을 연희도, 취기가 꽤 올랐는지 도무지 이성을 찾지 못했다. 그저 방싯댈 뿐이었다.
선우는 그 취한 모습마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고.
직원들도 더는 한계인 것 같았다. 아까 선우가 잘생겼다고, '얼굴이 인성이고 매너'라고 찬양하던 아르바이트생마저 느끼해 죽겠다며 혀를 빼물었다. 선우가 연희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닦아내고 그 잔여물을 자연스레 핥아먹었을 때에는, 누군가에게서 사레들린 기침이 튀어 나왔다.
콜록콜록.
"잠깐 기다려요, 물 좀 떠올게요."
연희가 일어서자 선우가 서둘러 연희를 잡았다.
"내가 가져올게."
"아니 내가 하면 되는데."
"그냥 내가 한다니까?"
이럴 시간에 그냥 아무나 갖고 와라. 사람 숨넘어가겠다, 이것들아!
결국 일어선 사람은 혜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