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미래
주말을 맞아, 연희와 선우는 대청소를 하기로 했다. 집이 넓다는 건 좋은 점도 많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는데, 특히 청소를 할 때 그랬다. 틈날 때마다 쓸고 닦아도 또 쓸고 닦을 곳이 생겼다.
"그러니까 사람 쓰자니까."
"그 정도 아니에요."
함께 살면서, 연희와 선우는 서로의 차이점을 여러 가지 발견했다. 연희는 아침에 밥을 먹었고 선우는 빵이나 시리얼을 먹었다. 선우는 무엇을 사용하든 곧바로 정리 정돈을 해야 했고, 연희는 그 반대였다. 정원을 가꾸는 일에 있어서, 선우가 살리기 전문이라면 연희는 죽이기 전문이었다.
화단에 심은 꽃이고, 미니텃밭에 심은 방울토마토와 꽃상추고 선우가 없었다면 진작 죽어버렸을 것이다. 선우가 연희에게 선물했던 소국 화분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뿌리가 썩어버렸다. 선우가 준 건 모두 잘 간직하겠다는 약속이 무색해져 버렸다. 아끼는 마음과 살리는 재주는 별개의 문제였던 것이다. 선우가 선물한 소국은 잘 말린 꽃잎 몇 개만 책장 속에 고이 잠들어 있다.
두 사람은 주말을 사용하는 법도 달랐다.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쪽이 연희였고, 주중에 못한 일을 몰아서 해결하는 쪽이 선우였다.
"네가 이렇게 게으를 줄은 몰랐는데."
청소를 위해 트레이닝복을 갈아입은 선우가 말했다. 연희는 일상복이 청소 복장과 크게 다름이 없었으므로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다.
"기운이 없어서 그래요. 늙어서 기운이 없어."
축축 처지는 말투에는 봄맞이 대청소에 대한 의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4년 더 늙은 선우가 투덜댔다. 그러면서도 쓸고 닦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좀 따라 하는가 싶던 연희는 어느새 식탁 위에 턱을 괴고 선우를 구경하고 있었다.
"선배가 진즉 잘해줬으면 덜 늙었을 텐데."
"난 너 없이도 잘 버텼거든?"
"웃기시네. 나 보고 싶다고 울었다면서요?"
"누가 그래?"
"이 매니저님요."
"말도 안 돼. 혼자 있을 때 조금 운 걸 현주 형이 어떻게 본다고…."
"거 봐."
연희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선우가 계산 없이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하게 된 것도, 연희가 이따금 선우를 놀리게 된 것도 함께 살면서 생긴 변화였다.
짧은 말 한마디에도 숨은 뜻이 없는지 세심히 살펴주던 시절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지금의 편안함이 더 좋다.
"연희야, 너는 2층 청소해라. 나는 1층 할 테니까."
"싫어요. 그럼 떨어져 있어야 되잖아."
"…그럼 1층부터 같이 시작할까?"
연희로서는 빈둥대기 위한 핑계였지만, 선우는 금세 설득 당했다. 선우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고 제자리를 찾아주는 동안, 연희는 선우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내일부터 출근하는데 이렇게 힘써도 괜찮겠어요?"
"좀 힘들긴 할 것 같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집안 꼴을 둘러보던 선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그냥 있자니까."
"이렇게 더러운데 어떻게 가만있어? 바닥 끈적거리는 거 봐."
선우가 새까매진 발바닥을 들어 보였다. 연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깔끔한 사람이 어떻게 나랑 입은 맞추나 몰라."
"입만 맞추나? 여기저기 핥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이를테면…."
"그만!"
연희가 벌떡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희에게 일을 시킬 때는 이 방법이 최고였다.
* * *
"잘 하고 와요."
연희가 선우의 넥타이를 바짝 매 주었다. 서툰 솜씨 탓에, 선우가 다시 고쳐 매야 할 것이 뻔했다. 그래도 선우는 연희와 가까이 닿는 이 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응. 잘하고 올게."
올해 초, 선우가 대표로 있는 J네크워크가 J호텔 체인을 인수했다. J네트워크는 선우가 합류한 이후 날로 사업 분야를 확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일 년의 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는 선우와 국내에서 붙박이로 지내는 연희는 별거 아닌 별거를 해야 했다.
결국 지친 선우가 J네트워크의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기로 했다. 선우는 당분간 국내에서 호텔 사업 내실을 다지는 데에만 집중할 예정이었다.
"이 매니저님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면서요?"
"아무래도 그만큼 손발이 맞는 사람을 찾기 힘드니까. 능력도 훌륭하고."
이 매니저의 부모가 운영하던 호텔이 J호텔 체인으로 흡수됨과 동시에, 이 매니저는 호텔의 부사장 직함을 달게 되었다.
"내가 운전해서 데려다줄까요?"
"됐어. 너도 바쁜 거 뻔히 아는데."
선우와의 이야기를 엮어 낸 책이 좋은 반응을 얻어, 얼마 전 그 후속 작품에 대한 계약이 성사되었다.
"그래도 선배 바래다줄 시간도 없을까."
"그건 괜찮은데…."
빤히 쳐다보는 연희에게 선우가 말했다.
"언제까지 선배라고 부를 거야?"
또 시작이다.
이런 논쟁이 있을 때마다 늘 그랬듯, 연희는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아직 결혼한 건 아니니까 '여보', '당신'이 좀 그러면 '자기야'라든지 '선우 오빠'라든지…."
"낯간지러워서 못하겠다니까요."
"우리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 있어?
"차라리 선우 씨는 어때요?"
"그건 내가 별로야. 거리감 느껴져서."
이 부분은 의견이 영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존대도 아예 그만두고. 자꾸 그러면 나도 말 높인다."
"습관이 그렇게 든 걸, 뭐."
"이제는 새로운 습관을 좀 만들자니까?"
함께 살면서 별것도 아닌 것으로 언쟁을 벌일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보통은 선우가 지고 들어가는데, 오늘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너 자꾸만… 헙."
연희는 선우의 입을 막아버렸다. 자신의 입으로.
"너 이런다고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연희는 제 할 일을 했다. 혀로 선우의 입술을 두드리고, 열린 입술 사이를 훑었다. 선우의 혀를 감아올리면서, '이래도 안 넘어가?' 하는 눈으로 선우를 바라봤다.
잠시 멈칫했던 선우가 포기의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도 연희의 입속으로 먹혀들어갔지만.
곧 선우의 하얀 손이 연희의 볼을 받쳤다. 이내 눈을 감고 고개를 비튼 선우가 연희의 공격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연희가 선우를 매만졌다. 등허리와 아랫배를 번갈아 쓰다듬었더니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연희의 손길에 선우의 이성은 매번 쉽게 무너졌다.
"출근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기껏 맨 넥타이를 선우가 거칠게 풀어헤쳤다.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는 손이 다급했다.
이 또한 늘 있는 일이었다.
* * *
혜진은 오늘 기가 막힌 일을 겪었다.
꾸준히 방송에 소개된 덕인지, 혜진이 소유한 편집 숍 매출이 작년 이맘때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다. 특히 연희에게 운영을 맡긴 2호점의 매출이 눈에 띄게 좋았다. 모처럼 서울에 올라온 김에 축하도 할 겸, 바빠진 만큼 고생한 직원들도 달랠 겸 회식을 하기로 했다.
2차는 어디로 갈까 하다가 근처에 있는 연희 집은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갑자기 남의 집에 가는 건 실례라고, 혜진 딴에는 말렸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애들로만 뽑아놔서인지 영 설득되지가 않았다.
"아직 집들이도 못 했잖아요. 한 번 가보고 싶었어요."
"맞아요. 신혼집 궁금하다."
선우가 연희와 현재 집으로 이사 온 지 한 달 째였다. 제법 긴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선우는 연희와 살던 예전 집을 그대로 둔 채 편집 숍 근처에 새로이 자리를 잡았다. 연희의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이유였다. 그래봤자 차로 20분 거리였건만.
"그럼 우리 집으로 가지, 뭐."
본래도 무던한 데다, 술기운까지 살짝 돈 연희가 흔쾌히 수락했다. 맥주와 소주, 육포와 과자 등을 바리바리 사서 보안요원을 포함한 직원 셋, 아르바이트생 하나와 함께 연희의 집에 방문했다.
이사 온 집은 어릴 때 연희가 살던 집과 비슷한 구조라고 했다. 작은 정원을 낀 단독 주택이니만큼 외관은 충분히 멋졌으나, 정리되지 않은 집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실로 기대 이상이었다. 세면대 위에 TV 리모컨이 있고 소파 위에 숟가락이 있었다. 청바지는 왜 냉장고 위에 걸려 있는 걸까.
"…요즘 원고 쓰느라 많이 바쁘니?"
"아니요. 그렇게까지는…."
그럼 평소에도 이러고 산다는 거니?
한 '깔끔'하는 선우가 평소에 이 꼴을 그냥 둔다고? 시력이 많이 안 좋아졌나?
"그래도 선배가 있으면 그때그때 치워줘서 이 정도는 아닌데, 출장 간 지 3주째여서요."
유난히 너저분한 주방을 살펴보고 있자니 연희가 변명을 했다.
"선우가 모레 돌아온다고 했던가?"
"네. 어제 화상 통화할 때 집 좀 비춰보라더니, 집에 오면 대청소부터 해야겠다고 하더라고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선우의 안구 건강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우와. 연희 점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응?"
"참. 소탈하시다고요. 하하하."
직원 하나가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을 어색하게 수습했다. 연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함께 웃으며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를 방안에 처박아 놓았을 뿐이다.
원래부터 남의 비난에 곧바로 응수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아예 신경 쓰지 않는 수준도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저렇게 멘탈이 강해졌지?
아. 선우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구나.
다시 연희를 보았다. 쉽게 흔들리지 않을 안정감이 느껴졌다. 요즘 연희는 웃기는 일에는 웃었고, 화나는 일에는 화를 냈다.(물론 일할 때는 예외였다.)
그러니까, 응당 느껴야 할 것을 느끼고 표현해야 할 것을 표현한다는 의미였다. 당연한 말 같지만 연희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아니었다.
선우와 본격적으로 사귀고, 함께 지내기 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하다못해 전남편과 치른 결혼식에서조차 감정이 다 말라버린 사람처럼 굴던 연희였다. 신랑의 애정표현을 적당히 받아주긴 했으나 감정적으로 무언가 넘쳐흘러 보이지는 않았다. 기뻐 보이지도, 그렇다고 슬프거나 아쉬워 보이지도 않는 텅 빈 얼굴이었다. 이혼을 할 즈음엔 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러니 지금은 얼마나 다행인가. 비슷한 의미로 선우에게도 참 다행한 일이고.
다행이긴 한데….
초대된 집에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엉덩이 붙일 자리나 만들어보자던 직원들은 어느새 연희의 집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