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84)화 (90/98)

<84>

현정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J호텔의 주가는 연일 폭락했고 그녀의 수족이라 여겼던 사람들은 더 나은 이득을 찾아 떠났다.

때를 기다린 것처럼 J호텔의 리조트 개발 사업에 대한 심층보도가 터져 나왔다. 남편인 대호가 부사장으로 있을 때 추진한 사업이었다. 보도 내용은 J호텔이 고위 공직자와 결탁해 사업상 부당이익을 취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가 조성한 페이퍼컴퍼니와 고위 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성접대 사실, 그 외 횡령과 성추문까지 갖가지 비리가 줄줄이 엮여 나왔다.

이곳저곳에 도움을 청해봤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현진 그룹도 흔들리는 마당에, 현진 그룹에서 진즉 떨어져 나온 J호텔을 도울 여유가 있겠는가.

그녀는 본래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현우가 죽으면서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세상에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기에 그녀 곁에는 늘 화풀이할 대상이 있었다. 지난 20여년 동안 그녀가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있었던 사람은….

"부르셨어요?"

지금 J호텔 사장실에 앉아 있는 선우였다. 그러니까 선우는 지금 이런 얼굴이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자신의 눈치를 보고, 주눅 들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선우는 자신과 눈을 똑바로 맞추며 느른하게 웃고 있다.

"대체 무슨 작당을 한 거니?"

현정이 말아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으나 아픈 줄도 몰랐다.

"작당이라니요. 그건 어머니가 하셨던 거고요. 제가 한 건 '자기보호'죠."

감히 말대꾸를 건네는 얼굴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근래 호텔에는 현정의 사람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즉, 말을 옮길 사람이 많았다. 가뜩이나 조카의 행패가 영상으로 오르내리는데 현정까지 화제에 오를 수는 없었다.

"어머니께 배운 대로 한 것뿐인걸요. 어머니의 원칙이자 현우의 원칙이었잖아요. 욕망하는 것은 가져야 하고, 가질 수 없으면 부수어야 하는 것."

"네가 그걸 어떻게…."

"틈날 때마다 현우의 일기를 따라 쓰라고 하신 것, 기억 안 나세요?"

현정의 비위를 거스를 때마다, 반성문을 대신해서 수도 없이 따라 쓰던 일기였다. 그래서 선우는 알 수 있었다. 현우가 어떻게 지쳐갔고, 어떻게 허무함에 잠식되어 갔는지.

생을 포기하기 직전까지, 현우가 가장 갖고 싶어 했던 것은 따뜻하게 자신을 어루만져 줄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갖지 못해 부수어 버려야 할 것으로 남았다.

자신의 대역으로는 선우가 선택되었다. 삶의 밑바닥에서 처박혀서도 살고 싶어 했던 아이. 그 삶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을 것 같은 아이.

삶의 의지 또한 현우가 갖지 못한 것 중 하나였다.

"어머니가 늘 바라시던 거잖아요. 현우 대신, 현우가 이루지 못한 것을 해내는 것."

"네가 감히 현우의 뜻을 입에 담아? 나보다 네가 현우에 대해 잘 안다고?"

격앙된 감정을 애써 누르는 현정과 달리, 선우는 싸늘하게 웃었다.

"어머니가 현우를 잘 알았다면, 현우가 그런 식으로 자살하게 두지 않으셨겠죠."

자살이라는 말에 현정의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그게 왜 자살이야? 걘 널 구하다가 죽은 거야. 내 아들은 절대 자살 같은 걸 할 리가 없다고!"

"그만 회피하세요. 짐작하고 계셨잖아요."

"아니. 그건 사고였어."

그 아이에게 주려고 했던 게 얼마나 많았는데. 미친 사람처럼 현정이 중얼거렸다. 선우가 안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곧 아버지도 구속될 텐데 이렇게 넋 놓고 계실 여유가 있을까요? 횡령에, 탈세에…. 금액이 커서 쉽게 빠져나오시진 못할 텐데."

무언가 깨달은 현정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사람이 만든 페이퍼 컴퍼니 정보, 검찰에 넘긴 것도 너지?"

"글쎄요."

선우가 빙긋 웃었다.

"너는 얼마나 떳떳해서? 우리 아버지가 뇌물로 건네라고 했던 돈, 정확한 액수 안 맞는 거 다 알고 있어. 그이가 횡령했던 돈도 군데군데 아귀가 안 맞는 건 마찬가지고. 네가 중간에서 야금야금 빼돌렸지?"

현정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화를 낼 때조차 우아하던 현정은 이곳에 없었다.

"그런 의심은 저를 믿고 맡겨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어머니를 포함해서요.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아직 너 하나쯤은…."

선우가 손을 들어 현정의 말을 막았다. 저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큰 양아들의 손짓에, 현정이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곧 입술을 깨물었다. 선우에게 위압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늦게나마 혼자 성장해 온 아이는, 더 이상 현정의 손바닥 아래 놓여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참 이상하죠? 큰 거 몇 개 터뜨렸다고 제가 갖고 있는 건 모조리 다 검찰에 넘겼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아직 저 혼자만 갖고 있는 게 훨씬 더 많은데."

이를테면 어머니가 아버지의 내연녀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그 아들은 왜 몇 년 전부터 행방이 묘연해졌는지, 같은 거요.

"두 사람의 행방을 애타게 찾고 있던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요?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양반이 과연 분노를 참아낼 수 있을까요? 더러운 쪽에서는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발이 넓다는 거, 아시죠?

제가 아버지를 속였다는 증거는 없지만, 어머니가 아버지를 속였다는 증거는 있거든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니?"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현정의 얼굴이 더없이 구겨졌다. 전 같으면 선우의 주변인에 위해를 가하든. 선우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든 했을 텐데.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지금은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도무지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가능하면 저만 알고 있을게요. 감방에 처넣어주신 건 감사하니까요."

"그건 네가 먼저!"

"어차피 하시려던 일이잖아요. 전 시기만 좀 앞당겼을 뿐이죠."

"……."

"어머니가 절 팔아넘기기 전에, 제가 저 스스로를 팔아넘긴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고(古) 정 회장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쓰고 가라앉겠다는 제안을 먼저 입에 올린 쪽은 선우였다.

그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자세 덕분에 선우는 정 회장에게서 제 사람들을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뿐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정 씨 일가가 함부로 선우를 해칠 수 없어졌고, 일가에서 버린 패가 되어 해방될 수 있었다. 그도, 그와 관련된 다른 사람들도.

무엇보다 큰 소득은, 연희가 선우를 더없이 안쓰러워했다는 것이다. 원해서 한 일도 아닌데 지은 죄에 비해 큰 벌을 받았다고 대신 억울해했다. 예나 지금이나 연희는 불쌍한 것에 약했다.

"참, 그동안 어머니의 인형으로 살아온 보상은 따로 안 해주셔도 돼요. 미리 알아서 챙겨놨거든요."

선우는 얻은 만큼 책임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제가 해낸 만큼 챙겨낼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네가 이렇게 의뭉스럽고 발칙한 거,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 같니?"

"글쎄요. 전 한 사람만 모르게 하면 되는데."

선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는 그 사람이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믿어줄 거 같거든요."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당당하게.

문턱에 발을 디딘 선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현정을 향해 눈매를 휘며 웃었다. 현정에게는 처음 보이는 진짜 미소였다. 현우를 대신해야 할 김선우가 아닌,

도선우로서의 미소.

* * *

"왜 이제 와요?"

소파에 늘어져 있던 연희가 선우를 반겼다. 품에는 먹다 남긴 과자봉지가 들어있었다. 선우는 바스락거리는 봉지에 손을 넣어 과자를 한 움큼 쥐었다. 반은 연희를 주고 반은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연희도 선우도 요새 자꾸만 무언가를 집어먹게 되었다. 입을 홀로 가만히 두면 허전해서 그랬다. 그렇다고 계속 입술을 맞붙이고 있을 수는 없으니 차선책이라도 택해야지 어쩌겠는가.

"한참 전에 호텔에서 나왔다던 사람이, 두 시간이 지나도록 안 오니까 걱정했잖아."

최근 연희는 선우에게 가끔씩 말을 놓았다. 그 빈도는 점점 잦아지는 중이었고.

"기다렸어?"

"그럼 안 기다려요?"

기다렸다는 말이 좋아서, 선우의 입매가 늘어졌다. 자신을 기다리는 진짜 가족이 여기 있었다. 언제나 삭막했던 집이, 이제는 한 사람의 온기로 꽉 차 있다.

"마지막 인사는 잘 하고 왔어요?"

"그럼."

"TV라도 하나 놓을 걸 그랬어요. 혼자서 선배 기다릴 때 너무 심심해."

"어차피 넌 글 쓰느라 바쁘잖아."

"그래도 소음이 좀 있어야 마음이 안정된단 말이에요."

"내가 옆에서 떠들면 되지. 당분간 나 시간 많을 테니까."

"하긴 그러네. 선배 내년 봄까지는 일 쉬겠다고 했죠?"

아직 선우의 재산상황도, 수입도 아는 게 없는 연희는 선우를 그저 '다 털린' 백수로 여기고 있었다.

선우가 해외법인인 J네트워크사의 대표로 취임해 한동안 바쁘게 일했다는 사실도, 지금 시간이 남아도는 이유가 장기 휴가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나 혜진 언니한테 월급 좀 올려달라고 할까? 매상도 많이 올려놨는데."

그래서 연희는 최근 선우를 먹여 살릴 궁리 중이었다. 편집 숍 일과 글 쓰는 일을 병행한 수입으로 두 사람 몫의 살림을 언제까지 꾸려나갈 수 있을지가 연희의 최대 고민거리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선우는 아직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비장한 얼굴을 할 때마다 얼마나 품에 가둬놓고 싶은지 당사자는 모를 것이다.

선우가 연희 옆에 앉아서 연희의 손을 꼭 잡았다.

"연희야. 이제 내 가족은 정말 너밖에 없어."

"……."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그런 걱정을 왜 해요?"

"그러게. 내가 꼭 붙어서 안 떨어지면 되는 건데. 그치?"

선우가 언제나처럼 넘치는 애정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연희 또한 그 이상의 애정 어린 눈빛을 돌려주었다.

저만이 줄 수 있는 것. 저만이 받을 수 있는 것.

언제부터인지, 사막 같던 가슴에 균열이 일어났다. 깊숙이 숨겨져 있던 물줄기가 땅위로 솟아올랐다. 물줄기는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것이다.

"곁에서 떨어지기만 해 봐요."

연희가 선우의 빈 어깨 위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연희의 머리 위에 선우의 머리가 얹혔다. 두 사람의 손이 포개졌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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