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83)화 (89/98)

<83>

이제 와 못한다고 할 것도 아니고.

비장한 얼굴로 눈을 꾹 감은 연희가 입을 벌렸다. 선우의 혀가 처음부터 거칠게 돌진했다. 입천장을 지나 목구멍 안쪽까지 성기처럼 박히는 혀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서야, 선우가 입을 뗐다. 그리고 연희의 온몸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숨구멍마다 선우의 호흡이 박혔다. 이제는 온몸이 뜨거워 상대가 뜨겁다는 감상을 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동안 선우의 성기는 연희의 안쪽 끝까지 완전히 다다라 있었다.

"후우."

뜨겁고 좁은 안을 음미하느라 선우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눈이 가느다래지고 몸이 조금 떨렸다. 짓씹은 잇새로 굵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너무 좋아."

따뜻하고 부드럽고. 나한테 딱 맞고.

또 한 번 '좋다….'고 읊조린 선우가 성기를 반쯤 빼냈다가, 다시 천천히 성기를 집어넣고는 구석구석 비벼댔다. 내벽을 뭉근히 문지르는 느낌의 호오를 묻는다면 단연 좋은 쪽이겠지만 이걸 계속 반복하고 있자니….

"차라리. 읏. 그냥 세게 하면… 안…읏, 돼요?

잔잔한, 하지만 쉬지 않고 계속되는 흥분에 지친 연희가 결국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세게 해서 빨리 끝내는 게 내일을 위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헐떡이느라 군데군데 끊긴 소리를 선우는 용케도 알아들었다.

"그럴… 까?"

성기를 거의 끝까지 빼낸 선우가 기다렸다는 듯 퍽, 소리를 내며 연희의 안을 파고들어갔다. 더 갈 곳도 없을 것 같았는데, 연희의 안쪽을 꾹 누른 성기는 깊이, 더 깊이, 끝없이 제 갈 길을 갔다.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뿌득, 이 가는 소리와 함께 그르렁대는 신음이 들렸다.

슬쩍 올려다 본 선우는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참는 듯 아니, 그 반대로 무언가를 터뜨리는 듯.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읽혔다. 공간이라고는 남지 않은 안쪽을 둥글게 문지르던 성기가 밖으로 조금 빠져나가는가 싶었다.

그리고.

"아윽!"

곧바로 다시 세게 짓쳐왔다. 조금 전 최대로 깊이 들어온 그곳까지 단숨에.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눈으로 보고 부피와 크기를 파악해 둘걸 그랬다. 그럼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안쪽이 방망이로 얻어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대만 얻어맞으면 될 줄 알았는데, 횟수를 세기 힘들 정도로 얻어맞아야 했다.

세게 짓쳐들어온다고 빨리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걸, 연희는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울컥.

마침내 뜨거운 것이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을 때, 연희는 차라리 안심했다.

"힘들지?"

선우가 묻는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가 안쓰럽다는 듯 헝클어진 연희의 머리카락을 살살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콘돔을 빼내 묶으며 재차 다정하게 물었다.

"자세를 좀 바꿀까?"

선우는 이미 다른 콘돔의 포장을 뜯고 있었다. 그제야 선우의 하체, 정확히는 굵은 허벅지 사이에 자리한 중심부위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몸 붙인 상대의 몸을 대놓고 비교할 정도로 매너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절로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내가 본 건 혹시 자라다 만 거였나? 원래 보통은 다들 저런 사이즈인데 내가 몰랐던 건가? 아니야. 다 저런 사이즈면 무거워서 어떻게 달고 다녀…. 근데 저 사람은 바지 속에 저런 걸 어떻게 숨기고 다녔지?

어쨌든 저걸 품어낸 자신의 몸이 대단히 유연하다는 것은 잘 알겠다.

인체의 신비란.

"이제 좀 친해질 생각이 들었어? 뽀뽀 한 번 해주고 시작할래?"

"……."

"아니다. 지금은 얘가 너무 더럽다, 그치? 다음에 인사하자."

"……."

짓궂게 웃은 선우가 연희의 눈앞에서 자신의 성기를 툭툭 쳤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선우를 올려다보면서, 연희는 혜진이 휴가 기간을 길게 내준 것에 새삼 감사했다.

몸 위로 선우의 입술이 다시 달라붙었다. 숨을 뱉기 위해 잠시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작게 벌어진 입술 밖으로 신음이 흘렀다. 그럼 눈을 번뜩인 선우가 자신의 것을 더욱 욱여넣었다.

"하아…."

새벽녘에야 긴 몸싸움이 끝났다. 탈력감이 든 지는 이미 오래였고, 눈이 절로 감긴 지도 꽤 되었다.

"자도 돼."

선우가 연희의 귀에 속삭일 때쯤, 연희는 비몽사몽이었다. 뒤이어 물에 적신 수건이 자신의 피부 위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간지러웠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어 내버려 두었다. 몸 위에 보드라운 이불이 덮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욕실에서 샤워기 물 뜯는 소리를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연희가 덮은 이불이 들추어지고 있었다. 이불 안으로 들어온 선우가 연희 곁에 바싹 몸을 붙였다. 연희의 머리를 살짝 들고, 팔베개를 해준다. 그때쯤 조금이나마 돌아온 기운을 빌어, 연희는 선우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선우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았다.

연희와 선우는 그렇게 서로의 품 안에서 잠이 들었다. 꿈도 없는 단잠이었다.

선우는 눈을 떴다. 잠든 연희는 여전히 선우를 향해 모로 누워 있었다. 연희의 머리 아래 받쳐두었던 팔은 어느새 연희의 두 손안에 붙들려 있었다.

곱게 내려앉은 속눈썹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꾹 다물린 아담한 입술 또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건, 그 향취를 곧바로 느낄 수 있다는 건 이렇게나 가슴이 차오르는 일이었다.

꿈은 아닐까.

한때 선우에게 사랑이란 것은, 결코 긍정적일 수 없는 모든 것들을 합쳐서 마구잡이로 섞어 놓은 것이었다. 기껏 단련된 자신을 흔드는 것, 주저앉고 싶게 만드는 것.

불안함. 포기. 절망. 자괴감. 공포와 함께 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고 싶은 것. 그러나 가지면 안 되는 것. 가질 수 없는 것.

그런데도 해보고 싶었다.

사랑이라서가 아니라, 연희라서.

부드러운 몸이 선우의 몸에 붙어왔다. 선우는 온몸과 마음으로 연희를 안았다. 침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아침 햇살만큼이나 청명하게 들렸다.

절로 다시 눈이 감겼다. 금세 다시 잠들 수 있으리라.

선우가 꿈꾸던 것들은, 현실로 마주했을 때 꿈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 * *

"매번 '혐의 없음'이라더니 퍽이나."

가판대 신문의 1면 기사를 본 행인이 중얼거렸다.

현진 그룹의 정태우 이사가 거리 한복판에서 행인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사진이 함께 실려 있었다. 약물에 취해 누렇게 번들거리는 눈, 입가에 흐르는 타액이 가차 없이 드러났다.

행인들이 찍어 SNS에 산발적으로 올린, 그러나 곧 현진 그룹에 의해 비공개 처리된 영상에는 다리의 비틀거림이나 손의 떨림까지 그대로 포착되어 있었다.

사실 태우의 행패가 담긴 영상이나 사진이 공개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태우의 아버지이자 그룹의 현 회장인 정현규가 최선을 다해 언론을 통제하고 무혐의를 이끌어냈을 뿐이다.

문제는 태우가 반성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달라지지도 않았다. 차남인 윤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현진 그룹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이때, 그룹의 최대주주이자 차기 경영후계자로 지목된 태우의 비행은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몇 년 간 태우와 윤우가 벌인 신사업들이 연이어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의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것과, 이를 은폐하기 위해 불법 행위를 벌였다는 것까지 뒤늦게 드러났다.

의도적으로 사실을 숨기고 발행한 수천억의 어음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수많은 투자자들이 분노를 터뜨렸다.

연이은 그룹 경영의 실책은 '약에 취한' 정 씨 일가 탓이라는 여론이 급물살을 탔다. 요령도, 인맥도 고(古) 정 회장만큼 좋지 못한 정현규 회장이 수습할 수 있는 범위는 진즉 벗어났다.

그들에게 주식과 경영권을 승계한 고(古) 정 회장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탐욕에 기반한 혈연 위주의 사고와 장자 승계의 덫에 빠져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 한 탓이다. 고(古) 정 회장이 살아있을 당시, 태우의 사업실적을 은근슬쩍 부풀리면서 정 회장의 시야를 가린 선우의 탓도 조금은 있겠지만.

현진 그룹의 재계 서열은 순식간에 아래로 밀려났다. 아무리 그래도 대기업인데, 그리 쉽게 무너지겠는가 하는 의심도 잠깐이었다.

범국민적인 비난 여론, 현진 그룹의 몰락을 바라왔던 수많은 타 기업의 공조와 이를 묵인한 정권의 외면 아래, 현진 그룹은 침몰하는 배가 되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정 씨 일가는 이미지 쇄신과 법적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해 사재를 출연해서라도 투자자 피해 금액을 보상하겠다고 나섰다. 재원 마련을 위해 보유 주식을 대량 매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주가가 떨어져 있는 상태였을뿐더러, 뒤늦은 연극에 속아줄 이들이 더는 없었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 봐도, 사업적 능력으로 봐도 문제가 많은 태우와 윤우가 경영권을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주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들의 행태를 묵인해 준 정현규 역시 주주들의 등쌀에 떠밀려 회장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바닥까지 떨어진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인 것은 기존 현진 그룹의 대주주이기도 했던 'J네트워크 사(社)'였다. 이제 현진 그룹 지주사의 최대 주주는 개인이 아닌 'J네트워크'가 되었다. 경영권 역시 J네트워크에게 이관되었다.

기업 전문 투자 회사인 J네트워크, 정 회장과 함께 현진 그룹을 공동 창립했으나 경영권을 넘기고 재미(在美)한 오 회장이 설립한 곳이었다.

회사는 각국의 여러 기업에도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고, 가치가 떨어진 기업의 소유권을 확보해서 분해해 팔거나 재건하는 일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J네트워크의 개입이 딱히 대수로울 일은 아니었다.

J네트워크의 지휘 아래 대부분의 계열사들이 매각되었다. 대폭 규모가 줄어든 그룹은 지주회사 외에 2개의 계열사만을 남기게 되었다.

와중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선우가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즈음 오 회장이 J네트워크 사의 대표직에서 물러났다는 것이었다. 뒤를 이은 대표는 오 회장보다 더 많은 회사 지분을 갖게 된 제임스 킴, 즉 김선우였다.

그것이 오 회장의 숨겨진 혼외자이자 김 화백의 전 연인인 한 무명배우의 억울한 죽음을 수면 위로 드러내 준 대가이자, 더 나아가 그 범인을 처벌 받게 도운 대가라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간 실종으로 처리되었던 무명배우가 두 남자의 진정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선우에게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고(古) 정 회장이 그들의 애정을 하찮게 여긴 것도. 그리하여 그들의 복수심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도.

오늘의 이 결과는, 제 후손들은 밝은 길만 걷길 바라며 선우에게 온갖 지저분한 일을 맡긴 고(古) 정 회장 덕분이었다. 선우는 제게 정보를 쥐여 준 고(古) 정 회장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적절한 때에 세상에서 사라져 준 것까지.

J네트워크가 사들인 현진 그룹의 주가는, 선우가 현정에게 팔았던 주가의 1/3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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