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한옥 펜션에 도착했다. 기와지붕과 대청마루가 멋들어진 10채의 독채 펜션은 모두 비어 있었다. 그뿐일까. 중심에 자리한 관리가옥도 꽁꽁 잠겨 있었다. 키 큰 소나무와 청량한 바람만이 선우와 연희를 맞이했다.
"여기 전체를 빌렸다고요?"
"응."
돈이 아깝다는 눈으로 연희가 선우를 쳐다봤다. 영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선우가 변명조로 외쳤다.
"지인 할인받았어!"
"누구한테요?"
"동훈이."
최근 동훈이 새로이 인수했다는 펜션이 여기였나 보다. 이곳의 매입을 적극적으로 권한 지인이 있다더니, 그 지인이 누군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언제부터 연락하기 시작했는데요?"
"음. 네가 준호 결혼식에 갔던 날부터?"
어쩐지. 그날 웬일로 쉽게 집에 보내주더라니. 선우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던 거구나.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는데요? 또 뒷조사했어요?"
"아니야! 동훈이가 대학 때 번호 그대로 쓰고 있던데?"
선우가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둘이 무슨 얘기 했는데요?"
연희가 가늘게 뜬 눈으로 선우를 흘겨보았다. 시선을 피한 선우가 손가락을 들어 펜션 쪽을 가리켰다.
"펜션이 참 예쁘지? 리모델링 끝나면 나부터 빌려 달랬는데."
서툴기 그지없는 화제전환이었지만 넘어가주기로 했다. 어차피 둘이 나눌 이야기야 연희 자신에 관한 것일 게 뻔했으니까. 동훈이 의외로 시치미를 잘 떼는 성격이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선배랑 만날 때는 이렇게 사람 없는 곳만 다녀야 하는 거예요?"
예전에 선우와 함께 갔던 수목원도 리모델링이 채 끝나지 않아 사람이 드문 곳이었다. 첩보작전도 아니고, 언제까지 사람을 피해 다녀야 하나 궁금했다.
"이번엔 그냥 단둘이 있어보고 싶어서 그런 거거든?"
"……."
선우가 강조한 '단둘'이라는 말이 괜히 부끄러워서, 연희의 볼이 금세 달아올랐다.
"그래도 다음에는 이런 데 돈 쓰지 마요."
잠시 후, 선우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리조트 예약을 취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어로 대화하는 걸로 보아 해외 어딘가에 있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전체를 빌렸다고 해도, 결국 쓸 방은 각자 하나씩이었다. 선우의 옆방에 간단히 챙겨 온 짐을 내려놓았다.
한옥 펜션이기에 침대는 없었으나 부드러운 이불보와 깔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옷장과 협탁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창호지가 붙은 사각 창을 열자 파란 하늘이 보였다.
연희는 창틀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골랐다. 한 5분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딩동.
벨이 울리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잇따랐다. 문을 여니 선우가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왜 벌써…."
"그냥, 벌써 보고 싶어서."
선우가 씩 웃었다.
"산책이나 좀 할까?"
표정은 여유로운 주제에 손가락은 쉴 새 없이 다리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한 시간만 쉬고 이따 만나면 안 돼요? 나 피곤한데."
"오랜만이잖아. 같이 걷는 거."
좀 전까지 버스에 같이 올라타고 같이 내려서, 여기까지 나란히 걸어온 사람이 무슨 소리인지.
빤히 보고만 있자 선우가 애처롭게 두 눈을 내리떴다. 뻔한 수작인데. 안 된다고 하려 했는데….
선우가 연희의 새끼손가락에 손가락을 걸어왔다. 덩치도 커다란 남자가 웃기지도 않는 수작을 거는데 밉지 않다니 이상했다. 새끼 강아지처럼 치대는 모습이 안 어울리는데 희한하게도 귀여워 보였다.
연희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선우한텐 늘 약했으니까 뭐.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또 걸었다.
풀벌레 우는소리를 들으며 도심보다 맑은 공기를 실컷 들이켰다. 잠깐 걷기로 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선우와 연희는 어느새 달빛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랜만에 보는 설렘은 여전했다. 맞잡은 손부터 정수리까지 간지러움이 끊임없이 타고 올라왔다. 얽힌 채로 가끔씩 움찔대는 손가락이 자신의 것인지, 선우의 것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급하게 사 입었다는 크림색 면바지와 녹색 라운드 티셔츠도 선우에게는 맞춤옷처럼 잘 어울렸다. 모자를 벗은 지 한참 되어 붕 떠오른 머리와 구겨 신은 운동화도 마찬가지다.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긴 주제에, 거짓도 가식도 없는 맨얼굴이 그저 어리게만 보였다. 아마도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순수한 표정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펜션 주위를 둘러싼 오솔길 입구에 들어섰다. 동훈의 취향을 반영한 아기자기한 들풀과 꽃이 낮게 솟아 있었다. 길의 양옆에는 나무 울타리가 나란히 놓였다. 입구에 꽂힌 팻말에는 낯익은 글씨로 '맨발로 걷는 길'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바닥에 촘촘히 박힌 색색의 돌멩이들이 발바닥의 혈액순환을 돕는다고 했다.
"신발 벗고 걸을까?"
선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잡고 있던 손이 잠깐 풀려났다. 선우는 주저 없이 운동화에 이어 양말마저 벗어던졌다. 사탕 하나에도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처럼, 오늘의 선우는 작은 것도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다.
연희도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길의 초입에는 선우의 신발과 연희의 신발이 나란히 놓였다.
"손 좀 줄래?"
원래 한 쌍이었던 것처럼 서로의 손바닥이 맞닿았다. 선우가 연희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걷는 동안 발과 발이 스치기도 했다. 선우의 발은 얼굴과 달리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발이 연희의 발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연희는 생각했다. 선우의 몸에서 선우의 삶과 가장 닮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발이 아닐까 하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구르고 다치느라 망가지고 거칠어졌다는 점에서.
고개를 들자 검푸른 하늘 위에 무수한 별이 떠올라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빛의 무리에, 연희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래서 여기로 오라고 한 거예요?"
"응. 너한테도 꼭 보여주고 싶었거든."
위로는 넓은 하늘, 아래로는 호수와 마을이 보이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그래서 택했다. 선우는 자신이 아는 가장 아름다운 것도, 가장 향기로운 것도 모두 연희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정말 예쁘네요."
"응. 그러네."
하지만 정작 선우의 눈은 연희를 향해 있었다.
"엄청 반짝이네요."
"응."
선우가 연희의 집게 핀에 손을 대어 만지작거렸다.
"이게 아니라 저거요."
연희가 손으로 별을 가리켰다. 지상의 일과는 무관한 별들이 하늘 위에서 모두에게 공평한 빛을 뿌리고 있다.
"응. 알아."
대답하면서도 선우의 눈은 여전히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지상의 존재, 힘이 들면 말하라고 손을 내밀어 주었던, 사랑해 달라고 부탁하는 법을 알려준 이를 향해.
"대체 뭘 보는 거예요?"
"너."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말에도 얼굴이 붉어지는 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도 진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배는 왜 늘 나를 그런 눈으로 봐요?"
"어떤 눈?"
더없이 사랑스럽고 귀한 것을 보는 눈이었다. 연희조차 자신을 그렇게 여겨 본 적이 없는데.
사실 '왜'라기보다는 '어떻게'라는 말을 붙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렇게 변함이 없을 수 있냐고.
"…됐어요."
그런 눈으로, 선우는 연희에게 오기 위해 용기를 내 주었다. 그러니 어찌 같은 눈으로 선우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선배."
"응?"
선우가 고개를 기울이자 연희의 시야에 선우의 얼굴만이 담겼다.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올랐다.
목구멍까지 넘치는 마음을 기어이 입 밖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사랑해요."
품고만 있기에는 버거운 말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갔다.
후련함이 몰려왔다. 그제야 선선한 바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선우는 굳어버린 것처럼 한동안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어?"
"…사랑한다고요."
"다시 말해줄래? 내가 못 들은 거 같아서."
"사랑…."
"다시."
반복되는 요구에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만 좀 해요. 어차피 다 알고 있었으면서 뭘 자꾸 물어요?"
말만 안 했지 티는 있는 대로 다 냈는데.
"자꾸 듣고 싶어서 그래."
선우가 연희에게 성큼 다가섰다. 이제는 조심스러울 것 없이.
"얼굴 보고 싶어."
연희가 두 손을 반쯤 내렸다. 얼핏 보면 날카로워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순함이 드러나는 작은 얼굴이 선우를 마주한다.
"이제 내 말 잘 들어주네?"
"원래 그랬거든요. 선배가 감추고 속이는 바람에 변한 거지."
사람은 별과 달라서,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고 지상의 일과 무관하지도 않았다. 선우는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던 말을 전하고 싶어졌다.
앞으로는 저만 특별히 대해달라고, 모든 시간을 저와 함께 해달라고.
선우가 연희의 허리에 두 팔을 둘러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선선히 끌려간 연희의 얼굴이 선우의 가슴 부근에 닿았다. 포근한 품에 달아오른 얼굴이 감춰졌다.
선우가 가만히 연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풀린 머리 아래로 집게 핀이 톡, 떨어졌다. 선우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선배가 준 건 이제 다 잘 갖고 있으려고요."
강건한 가슴에 막힌 목소리가 평소보다 나직하다. 목소리가 닿은 곳부터 번져가는 따뜻함이 좋아서 선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응."
나지막이 웃은 선우가 '앞으로 잘 부탁해', 하고 인사했다. 고개를 끄덕인 연희가 선우의 뺨을 쓸었다. 선우와 함께 나누어 낀 반지가 손 위에 내려앉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연희가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문제'라는 한마디에 심각해진 선우가 연희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내려다 본 연희의 눈썹이 곤란한 듯 찌푸려져 있었다.
"그게 뭔데?"
"나는 받기만 하는 거 싫어해요."
"괜찮아.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거잖아."
또 뭘 거절하려나 싶어 선우는 초조해졌다.
사실 아직 주고 싶은 게 많았다. 연희는 모르지만 해외에 일궈놓은, 오롯이 선우의 것인 재산들은 앞으로 연희를 위해 쓰일 예정이었다.
"빚지는 기분 싫단 말이에요."
"빚이 아니라니까?"
"그럼 난 선배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돼요?"
연희가 조심스럽게 묻는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아. 주고 싶은 게 있었구나.
"대체 뭘 주려고 그러는데?"
"물건은 아니고."
"응."
주위를 둘러본 연희가 선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부터 선배한테…."
"응?"
"선배만 할 수 있는 거, 하게 해주려고요."
"나만?"
"응. 선배만."
연희가 고개를 들어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들어 선우의 귓불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고개를 비틀어 선우의 입술 위에 제 것을 겹쳤다. 연희가 선우의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
여전히 선우의 귓가에 머물러 있던 손이 목덜미로 내려앉았다. 기꺼이 허락을 받아들인 선우가 연희의 몸을 끌어안았다. 각도가 다른 가벼운 입맞춤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