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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혐의로 구속된 안 의원은 언제나 그랬듯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전과 달리 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했다. 함께 구속된 최 회장이 본인의 살인 행각을 자백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당시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안 의원이 약과 술을 제공했고, 취한 상태에서 사물을 분별하지도 못한 채 환청과 환시 속에서 약자를 함께 때려죽였다는 이야기였다. 최 회장의 구체적인 진술 덕분에, 비슷한 시기에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던 최 회장의 아들은 훗날 갖가지 횡령과 배임 혐의에서 최소한의 형량을 선고받게 된다.
언론들이 해당 사건을 연일 보도하게 되면서, 국민들이 공분을 일으켰다. 때맞춰 익명의 누군가가 검찰청과 언론사에 당시 살해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보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
고지에 오르기 직전, 안 의원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높이 올랐던 만큼 강한 타격을 입은 그는 완벽하게 무너졌다. 실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대대적인 국민의 비난은 안 의원의 가족과 정치 파트너들에게까지 옮겨갔다. 덕분에 선우가 감옥에서 나오는 대로 손을 봐주려 했던 안 의원의 계획 역시 파기되었다.
영상에는 약에 취해 살인에 가담한 안 의원과 최 회장 외에도 한 명의 인물이 더 등장했다. 그 살인을 방조하고 적극적으로 뒤처리를 도운 고(古) 정 회장이었다. 안 그래도 구설수에 여러 번 오르내렸던 현진 그룹은 제대로 위기를 맞았다.
공공연히 드러난 고(古) 정 회장과 태우의 만행을 시작으로, 그 가족들의 숨겨진 치부 역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태우, 윤우에게 봉변을 당하고도 입을 다물어야 했던 힘없는 피해자들이 여론의 힘을 등에 업고 단체소송을 걸기도 했다. 폭행이 이루어진 장소는 대부분 J호텔이었는데,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한 그곳에서 피해자들이 증거자료를 어떻게 확보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선우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자행되어 온 불법 정치자금 지원 사실과 국가사업 입찰 로비 사실 역시 구체적으로 폭로되었다. 범국민적인 '현진그룹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선우 하나만이 문제가 되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고(古) 정 회장만 사라지면 회사를 손에 쥐고 승승장구하게 될 줄 알았던 그 후손들은, 뜻밖의 사태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처음으로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의 부재를 제대로 실감해야 했다.
가장 어렵고 힘겨운 일들은 한발 앞서 막아주던 고(古) 정 회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죽어버린 사람은 어떤 보호도 대신해 줄 수 없었다.
그들이 그토록 탐내했던, 그리하여 선우가 미련 없이 넘긴 차명 재산은 그들이 움켜쥐고 있는 한 휴지조각으로 전락하게 될 터였다.
* * *
"이곳이었던 것 같은데."
연희는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한적한 시골마을 입구에 위치한 것이었다.
평일 오후이기 때문일까, 정류장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배차간격이 긴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여러 대의 시내버스가 연희를 스쳐 지나갔다. 습한 흙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푸른 논밭을 달구었다. 가을걷이 전까지 부지런히 영글어 갈 곡식이 눈앞에 있었다.
연희는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한 뒤 집게 핀을 다시 꽂았다. 예전에 선우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연희가 있는 버스정류장과 맞은편의 버스정류장에 각각의 버스가 동시에 들어섰다. 순식간에 시야가 가로막혔다.
역시 연희의 버스가 아니었던 까닭에, 버스 문이 열리고 닫히는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침내 버스가 정류장을 떠났다. 그러자 전과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맞은편 정류장에 사람이 하나 나타난 것이다.
껑충한 키의 남자가 구불구불한 앞머리 위로 캡 모자를 눌러 쓴 채 연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풉.
연희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남자가 다가오며 물었다.
"왜 웃지?"
"꼴이 그게 뭐예요?"
연희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허락도 없이 남자의 모자를 벗겨내자, 잔뜩 눌린 곱슬머리가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악성 곱슬이라 어쩔 수 없거든? 그동안 비싼 숍에서 관리 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잖아."
환한 빛 아래 얼굴을 모두 드러낸 선우가 불퉁하게 말했다. 부끄러움의 다른 표현이었다.
"만져 봐도 돼요?"
"얼마든지."
선우가 살짝 고개를 숙여주었다. 연희의 손이 숱 많은 머리카락에 닿았다. 전처럼 결이 좋지는 않았으나, 불규칙하게 꼬인 모양은 만지는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이런 정리되지 않은 모습까지 기꺼이 보여주는 선우가 좋았다.
"나올 때 왜 연락 안 했어요?"
"가석방이 뭐 자랑이라고."
선우는 현진 그룹 일가의 협박과 지시에 의해 뇌물을 공여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당초 구형된 수감 기간의 1/2 정도만 채운 뒤 석방되었다.
선우가 검찰에 자진출두하기 전날 녹음된, 정 회장과 선우의 대화 내용 파일이 결정적인 증거이자 동정여론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로 활용되었다.
"처음에는 형량 다 채울 생각도 했는데, 자꾸만 누가 보고 싶어져서."
"그런 생각이었으면 진작 공개했어야죠."
"정 회장이 살아있었으면 공개해도 소용없었을 텐데?"
고(古) 정 회장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덕에 선우가 마음 놓고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현진 그룹의 힘은 결국 고(古) 정 회장의 인맥과 능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으니까.
"근데 녹음은 어떻게 한 거예요? 몸수색 때문에 아무것도 안 들고 갈 거라고 했잖아요."
"목발."
사실 그때 다리는 다 나아 있었다면서, 선우가 이마를 긁었다. 억지로 절뚝이고 다니느라 오히려 힘이 들었다나? 탐지기에 걸리지 않고 눈에도 띄지 않는 소형 녹음장치를 만들어 설치하는 데에는, 홍콩에 있던 이 매니저의 형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이제 우리 얘기할까?"
선우가 씨익 웃으며 연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특하게 잘 찾아왔네?"
"못 찾으면 바보 아니에요? 내 다이어리에 만날 날짜랑 버스정류장 번호에 타야할 버스 번호까지 자세히도 적어놓고 갔던데요?"
다이어리에 적힌 선우의 글씨를 본 것은 선우가 떠나고 한 달쯤 뒤였다. 한참을 넋이 빠져 있다가 글이라도 써볼까 마음먹고 지난 기록을 되새겨보던 어느 날 밤.
나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적혀 있었으나 거짓말인 걸 알았다. 기다리라는 말의 다른 형태 같아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때맞춰 가석방 안됐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럼 다시 날짜를 정해서 알렸겠지. 물론 이쯤이면 나오게 될 거라고 계산해두긴 했지만. 정 회장이 힘을 쓸 수 있는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예상했거든."
고(古) 정 회장의 그늘만 벗어난다면 뒷일은 자신 있었다면서, 선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정 회장이 완전히 회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집안에 아무도 없었으니 누가 무슨 조치를 해도 했을 거라고.
안 그래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음모설이 돌고 있었는데, 소문이 진짜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섬뜩해졌다.
"그냥 평범하게 전화로 약속 잡으면 안 되는 거였어요? 꼭 이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만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연희가 투덜거리자, 선우가 코끝을 훑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냥, 네가 날 찾아온다는 느낌이 좋아서."
하긴, 자신이 모르는 동안에도 자신을 찾아 헤맨 선우였다. 그러니 이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을까?
연희가 고개를 숙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참 동안 무언가를 달그락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 자랑할 거 있는데, 봐줄래요?"
연희가 손을 내밀었다. 반짝이는 무언가가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이게 뭐야?"
선우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친구가 준 선물이요."
"…무슨 친구?"
당황에서 당혹으로 번져가는 표정,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얼굴색이 조금 재미있다고, 연희는 심술 맞은 생각을 했다.
"자세히 봐 줄래요? 디자인이 딱 제 취향이거든요."
숫제 사색이 된 선우가 연희의 손을 붙잡아 천천히 살펴봤다. 그러다 무언가가 이상한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 했던 선우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의심과 기대감이 고루 섞인 눈이 비로소 연희를 마주본다.
"설마 이거…."
"오래전에 누가 버리고 간 건데, 세나가 주웠대요."
"…세나가 이걸 어떻게 주워?"
"지금 그게 중요해요? 누구 마음대로 내 걸 버렸어요?"
세 개의 빗금 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는 백금 반지는, 연희에게 고백받기도 전에 선우가 미리 사둔 것이었다. 하지만 전하지 못했다. 마침내 연희의 마음이 완전히 떠나버린 연희의 졸업식 날, 선우는 연희가 쓰던 사물함에 이 반지를 버렸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조금쯤은 누군가 발견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때 내가 선배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거든요. 그래서 세나가 전해주려다가 그냥 갖고만 있었다더라고요. 본가에 두고는 한동안 잊고 있었다고, 작년 생일선물로 그거 주던데?"
"내가 산 걸 왜 자기가 선물로 준대?"
웃는 얼굴과 달리 다소 잠긴 목소리로 선우가 말했다.
"그러니까 제때 직접 전해줬으면 이럴 일 없었잖아요."
"…그러게."
"한 개 더 받았는데, 그건 내 손가락에 안 맞더라."
연희가 한 쪽 주머니를 뒤적거려 다른 반지를 꺼냈다. 선우의 손을 잡고 네 번째 손가락을 잡아 올렸다. 연희 것보다 커다란 반지는 그대로 선우의 손가락에 끼워졌다.
"이제 못 버리겠네."
연희의 웃는 얼굴을, 선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버리지 않을 거라는 말이 몹시도 기뻐서, 지금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하고 싶어서.
반지 낀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시선을 내린 연희가 다시 선우의 손을 잡아 올렸다. 연희의 손가락이 선우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손가락에 닿는 금속의 질감이 나쁘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선우는 연희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연희의 허리를 감았다. 가는 몸이 커다란 품속으로 얌전히 감겨왔다. 눈을 꾹 감은 선우가 연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웠던 체취를 마음껏 들이켰다. 기억보다 선명한 향기가 뱃속까지 흘러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