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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간쓰레기가 그룹의 앞날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니."
이 매니저는 언론이 다루지 않은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 놓았다.
선우의 현 가족들은 선우가 검찰에게 조사를 받은 동안 과다한 정보 -그러니까 정 회장 일가 개개인의 치부- 까지 누설할까 걱정했던 것 같지만, 지금까지 조용한 것으로 보아 선우가 소위 '팔 수 있을 만한' 증거를 모아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했다.
그런 게 있었다면 구형을 낮추기 위한 거래카드로 이용했을 법도 한데, 선우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끝까지 제 주제에 맞게 굴었다며 정 회장이 뿌듯해했다던가?
정 회장이 보상 조로 건물 몇 개와 경기도 어딘가의 땅덩이를 내주었으나 선우는 그것을 모두 거절했다고 했다. 대신, 자신이 개인적으로 사들였던 주식을 시가보다 조금 높은 가격에 사달라고 했다고.
조카들에 비해 적은 지분을 갖고 있었던 현정이 장외거래를 통해 그것을 냉큼 사 가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된 듯했다. 그리고.
"파양하겠답니다."
내친 김에 선우의 이름으로 돌려두었던 재산 모두를 자신의 명의로 되돌린 현정은 '개인적인 욕심으로 사업체에 누를 끼친' 선우를 파양하겠다는 의사를 이사진에게 밝혔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곧바로 파양을 하는 것은 '양아들을 내친 비정한 어미'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테니 적절한 시기를 재보는 중이라고 했다.
"연희 씨한테는 다행이죠."
선우의 효용가치가 모두 사라지면서, 이제 현진 그룹 일가 중 누구도 선우를 찾을 일이 없게 되었다. 선우의 약점을 쥐고 흔들어야 할 이유 또한 없어졌다.
덕분에 연희는 안전해졌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영국으로 떠나는 게 나았을까요?"
"그럴 리가요."
선우가 출국하지 못한 걸 안타까워했던 기색은 이 매니저에게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정 회장과 선우가 한 거래의 대가가 '모든 혐의를 뒤집어쓰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속 전에 지저분한 찌꺼기들은 선우가 끌어안고 가라앉기로 약속된 거였다네요. 정 회장이 인심 쓰듯 내민 계획이, 구속되기 전에 해외로 도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고요. 그래봤자 평생 외국에서 도망자 신세로 떠도는 게 뭐가 좋겠어요?"
이 매니저는 차라리 이렇게 된 게 선우의 앞날을 위해서는 더 나은 일 같다고 했다.
"참, 연희 씨는 요즘 글 쓴다면서요?"
"네. 재단에서 청년 예술가들 발굴하면서 경험했던 일들을 엮어보고 있어요."
요새 연희는 그간 다이어리에 메모했던 글을 본격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쓴 글을 되돌아보고 있으면, 출판을 준비한다기보다 지난날 자신의 일기장을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갈 길을 찾지 못한, 혹은 가야 할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불안해할 청춘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데 더 의미를 두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게만 느껴질 테니까.
추운 줄도 모르고 열 오른 겨울을 보냈다. 봄이 오는 문턱에서, 건강을 회복한 듯 보였던 정 회장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로 인해 TV로 선우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선우가 구속집행정지 허가를 받아 정 회장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다.
연희는 브라운관으로 손을 뻗어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쓸어 보았다.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선우였다. 알려진 뇌물공여 액수만 총 600여 억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정 회장이 그래도 변호인단 구성에 손을 써주긴 했던가 보다. 선우는 담담히 선고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 * *
"연희 씨 책이 생각보다 더 반응이 좋네."
모처럼 만난 장 대표가 연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표님이 열심히 홍보해 주신 덕분이죠."
심하게 멋들어진 홍보 때문에 민망했던 것도 잠깐, 반응이 좋다니까 그저 기뻤다.
"다음에도 이런 거 하나 더 내면 좋겠다. 남은 에피소드 없어?"
"있긴 한데, 다음에는 다른 거 써보고 싶어요."
"뭐?"
"음. 사랑 이야기?"
요즘 연희는 선우가 제게 보냈던 이메일을 바탕으로 새로운 글을 쓰고 있었다. 오랫동안 외로웠던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결국 사람의 마음에 가장 오래 남는 것도, 가장 깊이 남는 것도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어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가? 연희 씨 표정이 점점 좋아지네?"
연희는 잘 살아보기로 했다. 잘 웃고 잘 표현하고. 소소한 행복을 실감해가면서. 그래야 선우가 돌아왔을 때 여유로운 웃음으로 맞을 수 있을 테니까.
선우가 떠나 있는 시간은 돌아오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지난 시간을 보냈고, 또 남은 시간을 버틸 셈이다.
연희는 자신이 쓴 소설의 도입부를 다시 읽어보았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사랑이 오면 놓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후에는 사랑을 아예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변치 않는 사랑 앞에서 기한과 시기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바라봐 준 사람이 없었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깨달음이었다.
* * *
홍콩에 본사를 둔 온라인 공동 경매 업체 사이트에 한국인 화가의 작품 몇 점이 올라와 화제에 올랐다. 사이트를 운영하는 업체는 어린 시절부터 IT 천재로 유명했던 40대 한국인이 설립한 것이었다. 해당 업체는 NFT 기술을 기반으로 디지털 자산의 판매 및 공동구매를 중개하고 있었다.
경매에 올라온 그림 자체는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이었다. 한국 회화 경매시장에서 최고가액을 기록했던 김 화백의 사계절 연작이었다. 그림은 경이로울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공동 구매가가 지금까지의 최고 낙찰가를 가볍게 갱신했다.
첫 번째 이유는, 미공개 상태로 남아있던 2개의 작품이 함께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베일에 싸인 작품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 완성도 또한 굉장히 뛰어나 구매 의사를 불러일으켰다. 2점이 있고 없고가 연작의 전체 완성도를 좌지우지할 만큼 단일 작품으로서도, 전체의 일부로서도 훌륭한 그림이었다. 사람들은 기존에 공개된 10점의 작품과 2점의 작품이 조합된 연작을 동시에 감상하면서 장대한 사계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완성도 높은 2점의 그림에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검붉은 액체가 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잘못 관리되어 생긴 곰팡이나 얼룩 정도로 여겨졌던 그것은, 그림을 꼼꼼히 살펴 본 누군가가 혈흔이라는 게시글을 남기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혈흔에 누군가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는 글도 뒤이어 올라왔다. 처음에는 괴담 정도로 치부하는 의견이 많았으나 이내 그 실물이 유명 시사프로그램 관계자에게 송달되면서.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세 번째 이유는, 이어서 경매물로 등장한 새로운 콜라주 작품에 그 2점의 그림이 배경 소품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림은 다른 배경에서 별도로 따온 듯한 모양새로 작품 중앙에 조악하게 덧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호방한 필체로 쓰인 업무 지시, 정확히는 뇌물 공여에 대한 지시를 담은 메모가 여러 개 덧붙여져 있었다. 오른쪽에는 장부의 일부로 보이는, 거액의 단위가 기재된 쪽지가 유력 인사의 이름들과 함께 찢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콜라주 작품의 전체를 아우르는 배경은 영상 일부를 캡처한 화면이 차지했다. 화질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등장한 인물의 얼굴을 구분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쓰러진 누군가에게 깨진 액자를 휘두르고 있는 사람은 안면 윗부분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한국 사람들은 그 주인공의 정체를 금방 알아냈다. 현진 그룹의 대주주, 정태우였다. 누워 있는 사람의 정체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린 후에야 확정되었다. 현진 그룹에 입양되었다가 뇌물 공여로 수감된 인물, 선우였다.
디지털 형식의 장점을 백분 활용한 콜라주 작품은 배경음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 회장이 장부 조작과 차명계좌 관리, 뇌물 공여를 지시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는 녹음파일이었다.
'J의 그림자'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도영주 작가가 발표한 콜라주 실험작이었다. 또한 '대물림' 연작의 시작점을 찍은 작품이기도 했다.
다음날, 사이트에서는 앞선 콜라주 작품과 대응되는 또 하나의 작품이 경매에 올라왔다. 비슷한 구도였으나 폭력의 주체가 달랐다. 깨진 술병을 든 사람은 젊은 시절의 안 의원이요, 각목을 든 사람은 젊은 시절의 최 회장이었다.
그들 사이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15년 전 실종 처리된 한 여배우로서, 김 화백을 스쳐간 수많은 연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이였다.
이번 작품의 배경에도 문제의 그림 2점이 자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별도의 배경에서 해당 그림만 따온 듯한 위화감이 없었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인물들과 함께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깨진 그림 액자 사이로 군데군데 튄 피의 흔적이, 이번에 사이트에서 공개한 작품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림은 사건 직후 정 회장이 손을 쓰기도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분실된 작품이자, 한때는 수정아트갤러리 창고 구석에서 방치되어 있던 작품이기도 했다.
당시 갓 완성된 2점의 작품은 그날 살해 현장에 있던 사람들 외에는 본 적이 없었으나, '감 좋은' 선우는 갤러리 수장고 구석에서 일견 '망가진' 그 그림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제목도 작가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그림을, 선우는 아주 쉽게 손에 넣었다.
"그날 호텔에서 입찰 받자마자 분명히 없앴는데…."
작품을 본 안 의원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이어서"그림은 존재할 리 없다. 내가 이미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안 의원의 헛소리는 구속 직전 측근 몇 명만이 들은 비밀이 되었다.
김 화백이 죽기 전, 선우와의 약속 아래 자신의 사계절 연작 중 2작품을 그대로 복제해 여러 점 다시 그렸다는 사실도, 김 화백이 죽은 지 3년 뒤 그 아들이 선우에게 작품을 팔았다는 사실도 모두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었다.
복제된 그림을 선우에게서 낙찰받자마자 곧바로 태워버린 안 의원으로서는 복제 작품에 흩뿌려진 피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없었던 게 당연했다. 그 치밀하지 못함이, 최 회장 대신 그림을 낙찰 받게 된 이유라는 것도 끝내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