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78)화 (84/98)

<78>

선우와 연희는 식물원 근처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밖에서 이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까 감격스러운데?"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신 선우가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는 아이스크림을 앞에 두고 있었다.

"호텔에서 회의할 때도 종종 마주 앉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땐 네가 눈도 잘 안 마주쳐 줬잖아. 화낼 때 아니면."

"…그건 내 탓 아니에요."

선배가 오해하게 했잖아요.

얼굴을 내리고 중얼거린 연희가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떠먹었다. 입 안에 달콤한 것을 녹이면서 이 시간과 퍽 어울리는 맛이라고 생각했다. 흡족함이 드러났는지 선우도 웃는 얼굴이 되었다.

"뭘 그렇게 자꾸 봐요? 부담스럽게."

"그냥, 맛있어 보여서."

"한 입 줄까요?"

연희가 크게 한 숟가락을 떠 선우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거 말고."

"……."

"네 입술에 묻은 거."

보는 사람만 없었어도.

아쉽다는 얼굴을 한 선우가 턱을 괴었다. 또 고장난 로봇이 된 연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면 네가 내 거 먹어볼래?"

"네?"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키웠다. 연희의 시선이 선우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

"왜 당황하지?"

붉은 혀를 내밀어 제 입술 위 물기를 훑어 내린 뒤, 선우가 아메리카노가 담긴 유리컵을 내밀었다. 커피 안 좋아하는 건 이제 알 텐데, 쌉싸름한 걸 굳이 내밀기에 도로 밀어버렸다.

"아까는 그렇게 쳐다보더니. 아! 이게 아니라 그냥 내 입술이 맛있어 보였던 건가?"

능글능글함까지 돌아온 걸 보니 몸이 거의 다 회복된 게 맞나 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돌아가겠다는 게 마음에 걸리던 참인데.

"다리 깁스는 언제 풀어요?"

"곧 풀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더 있다가 가도 되는데."

"됐어. 너 불편해서 안 돼. 어제만 해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그렇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좋기도 했는데.

"회장님하고 약속했던 것도 있고."

"그 회장님은 선배랑 한 약속 못 지킬 수도 있다면서요."

"그래도 거래는 거래니까. 내가 벌인 일은, 끝까지 내가 책임져야지."

선우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위험한 거 아닌 거 맞죠?"

선우는 아니라고 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연희는 새삼 궁금해졌다. 선우는 그녀와 그의 안위를 어떻게 보장받은 걸까? 선우가 가진 것들이 그토록 현진가의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이라면.

선우는 정 회장과 거래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우가 내민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룹의 어두운 일면에 대해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 그것만으로 정 회장이 선우를 놓아주기로 했다기에는 조건이 너무 약하지 않나? 어차피 지금까지 선우가 해오던 일이 그것이었는데.

혹은 한 비서의 말대로, 선우가 해온 그간의 노력을 인정해 작은 대가만 받고 넘어가기로 한 것일까?

정 회장이 그 정도 인정과 의리는 있는 사람이기를 믿고 싶었다.

선우가 말한 식당 앞까지 선우를 바래다주었다. 선우와 함께 내리자, 목발까지 챙겨놓고 기다리던 한 비서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연희도 고개를 숙이고 차에 다시 타려던 차였다.

"잠깐만."

선우가 연희의 허리 뒤로 팔을 뻗더니 연희를 감싸 안았다. 한 비서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게 더 민망했다.

"갑자기 왜…."

"기운 좀 내고 싶어서."

선우가 연희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 연희의 체향을 몸 안에 새기기라도 할 듯이.

"길 한복판에서 이러면 어떡해요?"

몸을 떼려고 하자 연희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몇 센티미터 멀어지지도 못하고 다시 몸이 끌려갔다.

후, 하고 흩어지는 선우의 날숨소리가 들렸다. 깊이 내쉬지 못한 숨이 짧게 끊어져 어깨 위로 쏟아졌다.

이 사람, 떨고 있구나.

연희는 한 손을 들었다. 그리고 선우를 토닥여주었다. 언젠가 선우가 그랬듯이, 느리고 규칙적으로 토닥토닥.

"나, 다시 너 보러 와도 되지?"

"…네."

"정말 그래도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등을 토닥이지 않는 손으로 조심스레 선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빌었다. 지금의 온기가 선우의 떨림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킬 수 있기를.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올 수 있기를.

* * *

사흘 내리 늦잠을 잤다. 밤새 뒤척인 탓이다. 고작 하루 머물다 갔을 뿐인데도 선우의 빈자리가 허전했다. 혼자 있는 집이 유달리 적막하게 느껴졌다.

괜한 허기에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선우가 사주었으나 시간이 없어 함께 먹지는 못한 것이었다. 입속에서 녹아드는 생크림이 적당히 달콤해서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양을 먹었다.

물뿌리개에 물을 담고 나서 TV부터 틀었다. 때마침 정오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를 배경 삼아 창가로 걸어갔다. 선우에게 받은 소국 화분이 햇볕을 받아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물뿌리개를 기울여 뿌리를 감싼 흙을 축일 때였다.

"다음 소식입니다. 내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던 XX당 안정오 의원의 불법 정치자금 의혹과 관련한 검찰 수사가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어제 오후, 현진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J호텔 김선우 부사장이 검찰에 자진 출두해 안 의원에게 금품 및 향응을 제공한 내역을 비롯, 기타 공직자 및 주요 언론인들에게 건넨 금품 및 향응 제공 관련 증거를 제출했습니다. 안 의원 측에서는 대가성 있는 어떠한 것도 받은 적이 없다며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지만 김선우 부사장은…."

익숙한 이름에 연희의 손이 멈추었다. 물뿌리개를 놓쳤다. 새어 나온 물이 마룻바닥을 적셨다.

선우를 해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이제야 깨달았다.

정 회장은 필요했던 것이다. 현진그룹을 조여 올 뇌물수수 혐의를 대신 뒤집어써줄 사람. 후계자 경영 승계시기에 맞추어 주가를 떨어뜨리되, 쉽게 내칠 수 있어 다시 그 주가를 회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

선우가 내어주어야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야 완전히 알게 되었다. 어젯밤 선우가 왜 연희를 막았는지도. 단순한 밀당이나 심술 때문이 아니었다.

앞날을 모르는 자신이기에, 연희가 발을 뺄 기회를 준 것이었다. 날을 세워 미워하지 않고 웃으며 안부를 주고받을 수는 있으나, 서로를 독점할 권리는 없는 사이로 남을 기회.

사람 잘못 봤지. 이제 와서 물러서라고?

그럴 거면 생일을 축하해 주겠답시고 집까지 찾아오지를 말던지.

온전히 성치도 않은 몸으로 현관문 앞에 주저앉아 자신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선우가 생각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조금만 먹을 것을 그랬지.

선우가 두고 간 케이크의 나머지 부분은 최대한 천천히 아껴먹기로 했다.

* * *

"여기요. 오프라인 매장 없이 온라인으로만 판매하고 있는 브랜드인데 색감이나 디자인이 우리 편집 숍 분위기랑 잘 맞는 것 같아서요."

"옷 사이즈만 좀 더 다양했으면 좋겠는데…. 좀 이따 내가 한 번 연락해볼게요."

"참! 오 디자이너님께 연락 왔어요. 우리 매장 로고 박아서 콜라보 하는 거 OK하시겠다고요."

"다행이다. 더 이름값 높아지기 전에 우리가 선점해서."

연희와 머리를 맞대고 있던 직원이 빙그레 웃었다.

"점장님이 오셔서 다행이에요. 오시고 나서 저희 숍이 훨씬 유니크해진 것 같아요."

선우를 마지막으로 본 지 3개월이 지났다. 지금 연희는 혜진의 편집 숍 2호점을 관리하고 있다.

연희가 온 이후 젊은 디자이너들과의 협업 작업이 많아졌는데, 문화재단에 근무할 때 맺은 인연을 잘 관리해 둔 덕이었다.

개성 넘치는 상품을 적잖이 보유한 점포라는 입소문이 슬슬 퍼지고 있었다. 매장 운영은 처음이라 혜진과 기존 직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만, 이제는 제법 월급 값을 해내고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연희 씨! 잘 지냈어요?"

이 매니저가 양손 가득 간식을 챙겨들고 숍을 찾아왔다. J호텔에 입점한 유명 베이커리의 각종 파이와 쿠키가 직원들의 손에 곧바로 넘어갔다. 이 매니저가 숍 직원들과 급격히 친해진 비결이었다.

"저야 잘 지냈죠. 이 매니저님은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뭐."

"호텔 그만두신다면서요?"

"네. 홍콩에 있는 형을 만나봐야 할 것 같아서요. 도움 청할 일도 좀 있고."

"아. 형님이 IT업계 쪽에서 일하신다고 했던가요?"

"네."

이 매니저는 형을 만나고 돌아오는 대로 부모가 운영하던 호텔에서 일하게 될 예정이었다. 선우도 없는데 굳이 J호텔에서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선우와의 인연으로 입사한 사람이니만큼, 선우의 어머니인 정 사장이 얼마나 압박을 주고 있을지 묻지 않아도 예상 가능했다.

"연희 씨도 기다리느라 고생이 많네요."

"고생은요."

희망 한 점 없이 더 긴 세월을 버틴 사람도 있는데 엄살을 피울 수는 없었다.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 그게 선우가 살아온 방식임을 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희생이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잃는 방식이 되더라도.

그래서 연희를 잃을 수 있음에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희는 선우의 추억으로만 남을 생각이 없었다. 선우가 돌아올 수 있는 한 지점이 되어, 선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선우가 제출한 불법 뇌물 공여 증거로 인해 여러 정부 및 정치권 인사들이 혐의를 시인한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혐의를 부인하며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기 대권주자 중 하나인 안 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매장시켰어야 하는데. 혹여 당선이라도 되었다가는 선우한테 무슨 짓을 할지…."

이어서 현진 그룹 일가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요즘 매체에서 자주 언급되는 소식이니 이 매니저도, 연희도 소식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선우가 구속된 이후, 정 회장은 주식의 대부분을 친손주들에게 미리 배분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적인 정 회장의 스타일대로, 가장 많은 주식을 증여받은 사람은 장손이라 할 수 있는 태우가 되었다. 추문으로 주가가 떨어진 틈을 타 증여했기에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액수의 세금이 절감되었다.

현진가(家)의 새로운 주인공이 된 태우의 사진이 곳곳에 실렸다. 감색 정장을 갖춰 입고 온화한 미소를 지은 얼굴은 멀끔하기만 했다. 약에 취해 선우를 무자비하게 때린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태우의 나이가 아직 너무 젊다는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 회장직은 태우의 아버지인 현규가 물려받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그룹의 지주사 및 알짜배기 계열사들은 태우의 주식 지분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경영권은 태우에게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권한으로 태우가 가장 먼저 벌인 일은 J호텔을 계열사에서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현정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정 회장의 힘이 실린 태우를 이길 수는 없을 거라는 전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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