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77)화 (83/98)

<77>

전보다 성급해진 혀가 금세 다시 연희 안을 세차게 휘저었다.

"하아…."

어느새 목구멍 깊숙이까지 들어선 혀에 연희가 어깨가 움찔댔다. 선우의 혀가 연희의 혀를 끝없이 부볐다. 당겼다 밀어내고, 밀어내다 다시 당기는 움직임은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서로의 일부를 내어주고 받아들이는 느낌이 좋았다.

벌어진 입 안에서 호흡과 타액이 끊임없이 서로를 넘나들었다. 숨이 가빠지고 목 아래서 신음이 끓었다. 상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부끄러움을 덜어주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어느새 크고 거칠어져 있었다.

서로를 당기는 몸짓도 더욱 절박해졌다. 틈 없이 입술이 맞물릴 때까지 비틀렸던 고개가 떨어졌다가, 각도를 달리해 다시 가까워졌다.

입술은 겹쳐지고 또 겹쳐졌다.

고개를 튼 각도가 여러 번 뒤바뀔수록, 입술이 맞물리고 혀가 엉키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가슴속이 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몇 년 간 떨어져 있었던 시간을 서로의 체온으로 달래기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밀착했다. 가슴이 가슴과 닿고, 다리가 엉켜들었다.

선우의 목소리는 뜨거워진 분위기만큼이나 거칠어져 있었다. 그의 목 아래에서 낮게 그르렁대는 소리가 울렸다. 눈을 꾹 감은 연희가 허리를 살짝 들며 선우의 옷자락을 당기듯 그러쥐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선우가 연희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급하게 비튼 선우의 얼굴이 연희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오래 잠수했다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처럼, 잔뜩 찌푸린 선우가 밭은 숨을 쌕쌕거렸다. 불규칙한 호흡이 가느다란 목 위에서 점차 제 박자를 찾아갔다.

"연, 희야."

인내하듯 끊어 부르는 선우의 소리에 연희가 감았던 눈을 떴다.

"왜요…."

고개를 든 선우가 어설프게 웃었다.

"생각해 봤는데…."

"네."

이 와중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대답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네?"

"좋아한다는 확신도 없이 이러는 거 아니야."

예상치 못한 훈계에 연희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이상은,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해야지. 그리고…."

그렇게 치면, 입맞춤도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하는 거 아닌가? 먼저 도발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연희의 눈썹이 위로 치솟자, 선우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었다. 부러졌던 갈비뼈 부근이었다.

"나 아직 환자야. 여기서 조금만 더 흥분하면 상처 도질 거 같아."

다 나을 때까지 이 이상은 안 되겠다며, 선우가 몸을 떨어뜨렸다. 언제 진정을 한 건지 아주 담백하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잠깐의 일탈이었던 것처럼.

뭐지? 이 분위기는?

갑자기 저 혼자 밝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환자를 대상으로.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없는데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연희를 남겨두고, 선우는 천천히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입었던 피케 셔츠를 벗어 한 팔에 챙겨드는 뒷모습이 보였다. 탄탄한 등에 자리 잡은 드넓은 광배근을 보며 연희는 생각했다.

…혹시 심술부리는 건가?

역시 좋아한다는 말을 바로 돌려주지 않아서?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내가 그 말, 빨리해주나 봐라.

문이 탁, 닫혔다.

문을 닫을 때 선우가 조금 웃은 것도 같았다. 웃음에는 가당치 않게 약간의 씁쓸함 혹은 아쉬움이 묻어있던 것 같기도 했다.

* * *

다음날 아침, 연희는 일찍 눈을 떴다. 사실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어중간하게 끊겨버린 입맞춤이 자꾸만 떠올라서였다.

어색한 연희와 달리, 선우는 평온했다. 제 집인 양 연희의 주방을 휘저었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두르고 식빵을 굽더니 잼을 발라 내놓았다. 우유와 꿀을 섞은 스크램블드에그와 베이컨도 함께였다. 모두 아침 일찍 밖에 나갔다 온 선우가 사 온 것들이었다.

계란찜과 된장찌개로 손님을 대접하려던 연희의 계획은 부지런한 선우 덕분에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수목원 갈래?"

포크에 찍은 베이컨을 연희의 입에 대어주며, 선우가 물었다.

"그렇게 막 밖에 돌아다녀도 돼요?

"괜찮아. 어차피 곧 정 회장을 만나러 갈 예정이거든. 그럼 사람들 눈에 띌 수밖에 없게 되겠지."

"병원으로 가려고요?"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정 회장이 어제 의식을 찾았어. 앞으로의 일을 한 번 더 상의해야 할 것 같아."

"그럼 가족들도 만나게 될 텐데요."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잖아. 아직 마무리 못한 일도 있고."

선우는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황량한 공간으로.

"내가 한다니까?"

"안 된다니까요?"

깁스한 다리로 굳이 운전을 하겠다고 우기는 선우를, 연희가 말렸다.

"이거 제 차거든요?"

운전석 문 앞에 서 있는 선우를 제치고 서둘러 차 문을 열었다. 냉큼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켰다.

빤히 바라보는 선우에게 턱짓으로 보조석을 가리켰다. 할 수 없이 차 앞을 돌아온 선우가 보조석에 앉았다. 연희를 보는 선우의 얼굴이 부루퉁했다.

"왜요?"

"안전벨트는 왜 벌써 맸어?

"그럼 안돼요?"

"…넌 너무 빈틈이 없어."

뭐래.

오랫동안 해 온 경력에 비해 썩 좋지 않은 운전 실력으로 도심 한복판을 빠져나갔다. 이 실력으로 그 산속을 잘도 뒤져 별장까지 찾아갔구나, 싶었다. 평소 같으면 시작도 전에 포기할 일이었다.

라디오를 틀었다. 연희는 잔잔한 음악이나 들을까 했는데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선우가 뉴스를 틀어 버렸다. 앵커는 때마침 수형 그룹의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문화재단을 이용한 수형 그룹의 예산 부당 집행과 채용비리에 대한 소식이었다.

허위로 집행된 예산의 일부는 최고의원들에게 뇌물로 흘러갔다고 했다. 안 의원을 비롯해, 선우의 약혼식에서 본 정계 인사의 이름들이 여러 명 거론되었다. 선우가 다소 복잡한 얼굴을 했다.

"걱정 돼요?"

"꼭 그런 건 아닌데. 갑자기 왜?"

"그냥, 선배 표정이 안 좋아서."

사실은 지금 짓는 표정의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수형재단의 소식에, 전 약혼자인 수정이 떠오른 것은 아닌지.

조금 심란해졌다.

그동안 선우의 마음이 연희를 향해 있었다는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약혼으로 묶였던 사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잠깐이라도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이 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도 마음 한 편은 그쪽에 가 있을 수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야."

연희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선우가 잘라 말했다.

"처음부터 난 그 여자랑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어."

"왜요?"

"현아를 닮았거든."

어쩐지. 수정과 대화할 때마다 기시감이 들더라니.

"그래서 선택한 사람이었어. 파혼할 때 미안해하고 싶지 않았거든."

애초에 파혼할 생각이었구나.

명료하게 정리해 주는 선우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 * *

"선배가 오고 싶었던 곳이 여기예요?"

선우와 함께 간 식물원은 한적했다. 평일이기도 하거니와, 아직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홍보가 덜 되었지 싶었다.

실제로도 아직 정원 공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곳이 종종 보였다. 그럼에도 키 큰 나무의 푸르른 잎과 작달막한 꽃들의 생명력을 감상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런 풍경, 선배한테는 새로울 것도 없지 않아요? 서울에 있는 선배 집이나 강원도 별장에 있는 정원도 꽤 멋지던데."

선우가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평범한 곳에서 평범하게 데이트해보고 싶었는데 달리 생각나는 데가 없어서."

"보통은 영화나 공연 많이 보지 않나요? 짧게 근처 산책이나 좀 하고, 카페도 좀 가고."

휴일에 움직이기 싫어하는 연희의 취향이 다분히 반영된 코스였다.

"그건 전에 다른 사람이랑 많이 해 봤을 거 아냐."

식물원은 안 가본 줄 아나….

구역별로 천일홍, 구절초, 채송화, 국화, 단풍나무, 철쭉 등의 팻말과 함께 색색의 꽃이 심어져 있었다. 일부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고, 일부는 벌써 시들해져 있기도 했다.

오늘 아침 바람이 제법 매서워져 있었던가. 곧 낙엽이 떨어질 시기였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아름다웠다.

고개를 들자 황금빛 단풍이 화려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그 위를 덮었다. 눈을 살짝 찌푸리자, 선우가 손바닥을 들어 연희의 시야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자박자박.

돌 섞인 흙바닥을 나란히 걷는 동안, 딱히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다. 그저 상쾌한 바람과 향기와 옆 사람의 존재를 즐겼다.

한적한 길을 천천히 걸으며 현재를 곱씹을 수 있는 여유가 좋았다. 흘긋 본 선우 역시 표정이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계절의 흐름을 딱히 의식해 본 적 없는데, 오늘은 이 계절이 감사하다. 앞으로는 가을이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시간 때문에.

"손… 잡을까?"

그런 거 이제 안 물어봐도 되는데.

피식 웃은 연희가 선우의 손을 맞잡자, 선우가 그 손을 떼어내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또 다른 손가락의 느낌이, 잃어버렸던 제 것을 돌려받은 양 만족스러웠다.

선우도 다르지 않은지 환하게 웃었다. 가을 햇살을 닮은 웃음이 너무 청량해서 속이 다 시원해졌다.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선우가 허리를 살짝 굽혀 연희와 지그시 눈을 맞추었다.

"더워? 얼굴이 좀 붉어진 것 같은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이게 뭐라고. 더 한 것도 해 봤으면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손 하나 붙인 걸로 가슴이 떨렸다.

어떤 박자로 숨을 쉬었더라? 언제 어떻게 침을 넘기는 게 자연스러운 거였지?

기억을 잃은 몸이 삐걱댔다.

"선물 사줘도 돼?"

케이크만으로는 넘어가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며 선우가 맞잡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러던지요."

시원하게 미소 지은 선우가 달아오른 연희의 뺨을 톡 쳤다. 확신했다. 다 알고 이러는 거다. 얼마 전까지 침대에 누워 기죽은 얼굴로 연희의 눈치를 살피던 선우는 사라져 있었다.

신이 난 선우의 손에 이끌려 기념품 가게로 갔다. 하얀 소국 화분이 연희의 손에 쥐어졌다.

오늘의 바람과, 햇살과, 웃음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품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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