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75)화 (81/98)

<75>

"불 켜진 거 다 봤어! 기껏 생일 축하해주려고 했는데 종일 내 연락 씹더라?"

누군데 그래? 선우가 입을 움직였지만 연희의 손안에서 소리가 막혀버렸다. 연희가 선우의 귀에 바싹 입을 붙이고 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전남편요."

선우의 어깨가 굳는가 싶더니 한 손을 들어 자신의 귓가를 긁었다. 다른 손으로는 현관문과 자기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제가 해결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연희가 다시 속삭였다.

"그냥 없는 척해요."

"……."

"지금 선배 얼굴 드러내서 좋을 게 없잖아요."

선우와 연희의 눈이 마주쳤다. 잠깐의 침묵 후, 선우가 눈을 내리떠 항복을 표했다. 연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연희의 손은 선우의 입을 막고 있는 채였다.

재민은 지치지도 않는지 오래도록 문을 두드렸다. 긴장해 선우의 입을 막고 있던 연희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선우가 손바닥으로 연희의 팔꿈치를 받쳐 주었다.

연희가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제지하지 못하자, 선우가 연희의 손바닥 아래에서 천천히 입매를 끌어올렸다.

"절대 큰소리 안 낼 테니까 팔 내려."

연희가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따뜻한 눈으로 연희를 보던 선우가 다시금 재민이 만드는 바깥 소음에 인상을 구겼다.

"그 정도 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나 모르는 새 또 뭐 했어요?"

연희가 황당하게 묻는 소리가 튀었다. 이번에는 선우의 손바닥이 연희의 입술 위를 덮었다.

"조용히 하라며."

연희가 가만 노려보자 선우가 우물댔다.

"그냥, 한 비서 통해서 경고 좀 했어."

"……."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매운맛을 보여줄걸. 지금이라도…. 아야!"

선우의 손등을 꼬집은 연희가 선우의 손을 끌어내리고는 그대로 잡아채서 방으로 이끌었다.

"잠깐 방에 들어가 있어요. 내가 얘기하고 올 테니까."

방 침대 위에 선우를 앉혀 놓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방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이번엔 선우가 연희를 잡아끈 탓이었다.

풀썩.

침대 위에서 엉덩방아를 찧은 연희가 다시 일어서려고 했지만, 선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연희를 다시 당겼다. 활짝 열린 방문 사이로 흥분한 재민의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렸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 보는 동안,

쿵. 쿵.

방까지 넘어오는 소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었다. 주위를 한참 서성이는 모양이었다.

"너도 나가지 마."

"…이래선 선배 계속 밖에 못 나가요."

선우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서, 연희의 말간 눈이 당황으로 이지러졌다. 선우가 얼굴을 좀 더 가까이하며 말했다.

"내 걱정하는 거면, 난 괜찮아."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숨어있는 처지에 자꾸 얼굴 팔릴 짓 하려 드는데."

"남들이 나 볼까 걱정돼?"

"그럼 안 돼요?"

"그렇게 걱정되면 나 재워주면 되잖아."

"농담을 해도 무슨…."

연희가 말을 멈췄다. 농담이라기엔 선우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나 갈 데 없는 거 알잖아."

"……."

"그러니까 너도 나가지 마. 응?"

선우는 말 안 되는 소리를 퍽 진정성 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쨌거나 너무 간절하게 말하는 바람에 연희도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만족스레 미소 지은 선우가 제 이마로 연희의 이마를 톡, 쳤다.

연희와 붙어 있을 수 있는 게 좋아서, 재민을 손보는 건 조금 뒤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한 선우였다.

한참 동안 침대 위에서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결국 다시 거실로 나왔다. 어쩐지 야릇한 분위기가 민망해졌기 때문이다.

좀 쉬어야겠다는 선우의 말에 연희가 커다란 담요를 하나 챙겼다. 거실 한 가운데, 펼쳐진 담요 위에는 선우가 앉아있게 되었다.

별장에서 선우의 간호를 한답시고 연희가 꽤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둘이 한 공간에 있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까부터 쿵쿵대는 소리가 재민의 거친 발걸음 소리인지,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연희는 알 수가 없었다. 당황한 연희의 눈이 선우의 눈과 제대로 마주쳤다. 마른침을 삼키는지, 선우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차라도 한 잔 마실래요?"

연희가 묻자마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가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수납장에서 레몬 청이 든 유리병을 꺼냈다. 노란 레몬을 설탕에 절인 청은 새콤달콤한 향이 진동했다.

가장 아끼는 유리컵을 꺼내 청을 따르고 휘휘 저었다. 잘 섞인 차를 네모난 쟁반 위에 올렸을 때, 지금까지 중 가장 큰 '쾅' 소리가 다시 들렸다. 연희가 한숨을 쉬었다.

"맘 편히 쉬긴 틀렸네요."

쾅쾅 울리는 소리에도 마음이 평온한 이유는 선우 덕일 것이다.

연희는 따뜻한 차 대신 냉수를 꺼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물에 띄운 얼음을 아작아작 씹어 삼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좋지 않은 상황인데도, 번갈아 부풀어 오른 뺨을 뚫어지게 보던 선우 입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하도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서 경찰도 방법이 없다고 하고…. 처음엔 이사도 많이 다녔는데 이젠 못해요. 이 동네는 전세가 잘 안 나가더라고요."

"우리 둘 다, 썩 잘 지내진 못했네."

그럴 거면 차라리 보고 살걸.

어차피 똑같이 못 지낼 거면.

연희가 타 준 레몬차를 선우는 한참 동안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국 연희가 다시 차를 권하고 나서야 아껴먹듯 천천히 입에 머금었다. 자조를 저며 넣은 씁쓸한 말들이 얇게 썰린 레몬 조각과 함께 씹어 삼켜졌다.

* * *

재민이 서성대는 소리가 사라지자 선우는 금방 잠이 들었다. 불면증이라고 들은 게 무색하게, 연희가 보는 선우는 잘만 잠들었다.

연희는 최대한 소리 죽여 집을 치웠다. 베란다에 널린 옷을 거두어왔다. 개킨 옷과 수건은 서랍과 화장실 수납장에 각각 정리해 넣었다. 널브러진 것들을 치우고 먼지를 닦아냈다.

모두 끝내고 거실을 둘러보았을 땐, 컵 두 개만 식탁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한 컵에는 선우가 남긴 레몬차가, 다른 한 컵에는 자신이 남긴 냉수가 담겨 있었다.

남은 레몬차를 개수대에 쏟아냈다. 노란 액체가 얼음을 타고 흘러내렸다. 냉수도 쏟아냈다. 반 이상 녹아내린 얼음 알갱이가 저들끼리 부딪혀 달각거렸다. 자연스레 섞인 액체가 조르륵 소리를 내며 하수구를 빠져나갔다.

침묵 속에서도 작은 소리는 계속해서 생겨났다.

잠든 선우가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소리, 연희가 움직일 때마다 옷감이 사각대는 소리, 설거지통에 담아놓은 그릇이 찰박이는 소리,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 심장이 뛰는 소리. 조용히 하려 애써도 모든 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막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연희의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 역시 그러했다. 생각은 아까부터 한순간만을 뱅뱅 돌고 있었다. 오늘 선우와 바짝 붙어서 꽤 오래 눈을 마주했던 순간.

연희의 목덜미에 흩어지던 따뜻한 숨을, 입가에 닿았던 커다란 손의 체온을, 이마에서 이마로 전해지던 열기를.

검고 빛나는 눈동자를, 연희를 향해 웃을 때 쉽게도 휘어지던 눈매를, 반듯한 이마와 매끈한 코의 선을, 살짝 자라 꺼칠한 턱수염을.

제 시선을 선우가 눈치 챘을까 싶어 불안해하던 것도 뒤늦게 떠올렸다. 불안정한 호흡이 선우에게 닿을까 싶어서, 한 것도 없이 목이 타던 자신을.

연희는 개수대 앞에 서서 허리를 쫙 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시끄러운데, 그냥 설거지까지 끝내버리기로 했다. 고무장갑을 꼈다. 선우를 향했으되, 선우는 듣지 못할 말을 읊조리면서.

"예전에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선배 생각 꽤 오래 했거든요. 그때 선배가 했던 말과 행동이 어떤 의미였을까, 나를 어떻게 생각했던 걸까, 그렇게 돌이키고 또 돌이켜 봤는데도 내내 오답만 찍고 있었던 거네요. 그렇죠?"

당연하게도, 잠든 선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돌아오는 답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결론은 연희 스스로 낼 일이다.

"진즉 알았으면 상처받지 않았을 텐데. 갚아주겠답시고 선배한테 상처 주지도 않았을 텐데."

복잡한 식기건조대가 눈에 들어왔다. 미리 정리해두지 않은 탓에, 새로운 것을 둘 자리가 없었다. 번거롭긴 했지만 고무장갑을 잠깐 벗었다. 습기가 가신 것들을 차곡차곡 제자리에 놓아두는 일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래도 이건 봐줘야 해요. 선배 덕에, 꽤 오랫동안 난 내가 아무한테도 의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선배가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데, 그래서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선배한테 화가 나요. 예전처럼 무턱대고 좋아한다는 말이 안 나와."

누구보다 좋아하고 원망했으며, 미워하는 한편 의지하고 싶어 했다. 공존할 수 없는 양 끝단의 감정이 오래도록 연희를 힘들게 했다. 연희 인생에 있어 선우만큼 큰 감정의 진폭을 겪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선우는 연희에게 늘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 감정을 오가는 게, 진짜 사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잖아요?"

언제나 그랬다. 선우와 함께 있으면 죽은 듯 가라 앉아있던 감정이 격하게 요동을 쳤다. 아니, 함께 있지 않을 때도 선우를 생각하기만 하면 종종 그랬다.

그러면 연희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오래도록 어머니를 기다렸던 아버지를. 미련스러울 정도로 한 사람만 바라보던 남자를. 끝까지 소멸시키지 못한 애정을.

그렇게 살기 싫었다. 그래서 가늠할 수 없는 폭을 지닌 감정은 고이 묻어두려 애를 썼더랬다. 그런데 요즘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생각보다 불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타인을 위해 자존심을 굽히는 것도, 미움을 기다림으로 덮어버리는 것도 아버지에게는 굴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아버지의 삶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뿐이다.

이제야 연희는 아버지를 이해했다. 아버지만큼이나 맹목적이었던 또 하나의 남자를 만났기 때문일까. 연희를 붙들고 있는 것이 선우에게는 살아가는 의미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연희를 사랑해서 했던 모든 일들이 곧 선우 자신을 위한 일이 되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희에게 선우는 여전히 안쓰러운 존재였다. 그리하여, 이제 연희가 해야 할 노력은 다른 곳을 향할 것이다.

"나도 노력해 볼게요. 다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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