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진즉 오셨으면 좋을 걸 그랬어요. 오신 후에 부쩍 회복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습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주치의의 말에 연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실제 선우의 몸 상태가 어떤지는 몰라도, 겉보기에는 빠르게 나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산송장 같더니, 지금은 다리에 한 깁스만 제외하면 환자 같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멀끔해진 외양 덕을 보는 걸 수도 있겠다.
연희와 대화를 나눈 다음날부터, 선우는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씻어대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면도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심지어 연희가 잠든 틈에 사람을 불러 이발까지 했단다.
체력을 회복해야겠다며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가벼운 운동도 시작했다. 별장에 있는 재활치료시설을 야무지게 이용하는 모습이 꽤나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연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저릿했다. 오늘도 종일 선우에게 잡혀있던 까닭이다. 씻고 옷을 갈아입는 시간, 운동하고 치료받는 시간 외에는 연희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선우였다. 손을 놓을 일이 생기면 옷자락이라도 잡고 있어야 했다.
사랑해달라는 말을 받아낸 이후, 선우와 연희 사이에 달라진 점은 이것 하나였다. 그 외에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선우가 좋아한다는 말을 다시 꺼낸 적도 없었고, 연희가 그에 대한 대답을 돌려주지도 않았다. 평범하고도 담백한 일상이 흘러갔다.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좋아."
연희와 선우는 나란히 앉아 창밖을 보았다. 빠르게 올라온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바람이 거센지 잔가지에 달린 나뭇잎이 저마다의 방향으로 위태롭게 흔들렸다. 가로막힌 창 하나를 사이로 안과 밖이 이렇게 달랐다.
지난 몇 년 간, 선우는 연희의 창이었다. 홀로 비와 바람을 막다가 금이 가고 닳아버린 창.
연희가 선우의 손을 가만 쓸어보았다. 선우의 손이 잠깐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곧 선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더 꽉 잡아도 되는데.
"저 내일 서울 올라가야 해요."
"아….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지?"
선우가 연희를 잡았던 손을 떼어냈다. 온기가 사라진 손이 시원하면서도 허전했다.
선우는 아직도 연희의 눈치를 봤다. 불쌍한 척이라도 하겠다더니, 막상 약한 모습을 직접 보이는 건 아직도 꺼려지는가 보다. 필요한 게 있어도 꾹 참고 있다가 간병인이나 한 비서를 시켰다. 너무 조심스러워해서 섭섭할 정도였다.
"나, 가도 되겠어요?"
"…가야지. 너도 네 생활이 있는데."
선우가 평연한 척 목소리를 깔았다.
"다시 안 올지도 모르는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던 선우가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꼭 내일 바로 가야 하는 거야?"
끝내 숨기지 못한 아쉬움에, 연희의 입가가 조금 느슨해졌다.
"네. 모레가 준호랑 유진이 결혼식이어서요."
"준호가 결혼해?"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무척 반가운 소식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같이 갈래요? 혜진 언니랑 동훈 오빠도 와요."
잠시 생각하던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축의금만 전해줘."
"아직 멀리 움직이기는 힘들어서 그래요?"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지금 얼굴 드러낼 상황이 아니잖아. 나랑 같이 있으면 네가 손해일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런다. 연희 옆자리는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는 듯이.
연희의 얼굴에 다시 불만이 서렸다.
혹시 내가 아직 좋아한다는 말을 돌려주지 않아서 이러는 건가?
그리 생각하면서.
* * *
준호와 유진의 결혼식은 저녁에 진행되었다. 식은 소박하지만 유쾌하게 이루어졌다. 하얀 수국과 리시안셔스로 장식된 식장을, 준호와 유진이 씩씩하게 가로질렀다. 나란히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두 사람은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언젠가 보았던 선우의 약혼식보다 규모는 작아도 훨씬 더 따뜻하고 유쾌한 분위기였다. 연희는 진심으로 두 사람의 축복을 빌었다.
준호와 유진이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집중해서 듣고 있을 때, 바로 옆에 앉은 혜진이 연희를 쿡 찔러왔다.
"오늘은 좀 영혼 있어 보인다?"
"언제는 없어 보였어요?"
"연희 너, 사랑하고 연관된 이야기만 나오면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굴었잖아. 기억 안 나?"
오늘은 '함께 있는' 얼굴이라는 얘기에 웃어버렸다. 이제 '사랑'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일까?
선우가 함께 왔으면 더욱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변함없이 다정하고 밝은 사람들의 풍경 속에 선우도 끼어 있으면 좋겠다고.
* * *
"그래도 오늘이 네 생일인데, 다 같이 한 잔 하고 가지, 왜?"
혜진이 아쉬운 듯 연희를 붙잡았다.
"피곤해서요. 생일이 뭐 대단한 날도 아니고."
그간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몸도 지쳤나 보다. 결혼식 참석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해졌다. 오랜만에 보는 혜진과 동훈은 물론 세나 역시 연희에게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당장은 너무 쉬고 싶었다.
"하긴, 강원도에서 오늘 새벽에 올라왔다고 했지? 차라리 어제나 그제 일찍 올라와서 푹 쉬고 나오지 그랬어."
원래는 연희도 그러려고 했다. 잠들기 직전까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선우 때문에 어그러지고 말았지만.
"그럼 다음에 다시 날 잡아서 보자. 연희는 얼른 들어가서 쉬어."
웬일로 동훈이 깔끔하게 자리를 정리했다.
비슷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가장 끈덕지게 연희를 붙잡던 사람이 동훈이었는데, 오늘은 연희가 많이 피곤해보였나 보다.
세나와 혜진, 동훈이 각자 준비한 생일선물을 연희에게 건넸다. 포장도 풀지 못한 상자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탔다. 정류장에서 집까지 걷는데 걸리는 시간이 오늘따라 길게 느껴졌다.
익숙한 빌라 공동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5층에서 마주 보는 두 집 중 오른쪽이 연희의 집이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집 앞에 낯선 덩어리가 하나 보였던 것이다. 검고 커다란 덩어리가 조금 움찔거리며 영역을 이동했다.
뭐야, 이거.
스토커나 강도, 빈집털이범 등 온갖 범죄자들이 떠올랐다. 어깨를 굳히며 다가갈까 말까 망설이는데 웅크렸던 덩어리가 갑자기 위로 훅 솟아올랐다. 그제야 켜진 복도 센서등이 다리를 감싼 깁스를 비추었다.
선우였다.
"선배가 여길 대체 왜…."
경악한 연희와 달리 선우가 씩 웃었다. 선우가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연희에게 다가왔다. 깁스한 다리를 움직이는 게 아직은 조금 불편해 보였다.
"놀랐어?"
"언제부터 기다렸어요?"
"얼마 안 되었어."
거짓말이었다. 연희 뒤에 바짝 붙어 선 선우에게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니까.
쌀쌀한 날씨에도 연희의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건, 고개 숙인 선우의 호흡이 자꾸만 목덜미에 와 닿기 때문일 것이다. 좀 떨어지면 좋을 텐데, 조금만 뒤로 물러서도 선우의 가슴이 연희의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몸도 안 좋으면서.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어요?"
그럼 더 일찍 오려고 노력했을 텐데.
"괜히 나 때문에 신경 쓰지 말고 맘 편히 있다가 오라고 그랬지."
선우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가족들 눈에 띄면 힘들어질 수도 있다면서…. 위험하게 뭐 하러 여기까지 올라왔어요."
"그냥, 오늘 꼭 보고 싶어서."
"굳이요?"
"생일 축하해."
선우가 들고 있던 상자를 연희 눈앞에서 흔들었다.
"케이크야. 배고프면 먹으라고."
"저 방금 결혼식장 다녀왔는데요."
"그럼 내일 먹으면 되지. 아니면 모레나."
버리지만 말아달라고 했다. 받아든 상자가 꽤 무거웠다. 막상 선우는 단 걸 좋아하지도 않는데, 참 커다란 것도 사 왔다.
아주 오래 전, 집 앞에서 만났을 때는 정말이지 냉랭하고 최악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연희는 선우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연희는 선우를 집으로 초대했다.
"좀 어수선하죠?"
깔끔했던 선우의 집을 떠올린 연희가 머쓱하게 물었다. 연희가 입고 있는 하늘색 원피스가 연희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나풀거렸다.
"아니, 괜찮은데?"
선우가 연희를 따라 거실 중앙에 섰다.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치울게요."
손님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정리하지 않고 나간 거실이 난장판이었다. 베란다에는 개지 않은 빨래들이 널려 있었다.
"상관없어. 그보다…."
선우가 절뚝이는 걸음으로 연희 앞에 섰다.
"아, 다리 불편하죠? 소파는 따로 없는데. 식탁 의자에라도 가서 앉을래요?
연희가 식탁 쪽을 고갯짓하는데도 선우의 시선은 그쪽을 향하지 않았다. 연희 얼굴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왜요?"
"귀걸이 했네?"
"아…."
"예쁘다."
다시 만난 이후, 선우 앞에서 귀걸이를 한 적이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선우의 관찰력이 남다르다는 것도.
"혜진 언니가 하는 편집 숍에서 팔던 거예요. 개업식에 갔더니 언니가 떡 대신 이거라도 받으라고 해서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설명을 붙인 건 어색해서였다. 선우 때문에 얼굴이 뚫릴 것 같아서.
예쁜 건 귀걸이라면서 정작 바라보는 건 연희의 얼굴이었다. 그래도 제대로 듣고는 있었는지 대답은 잘 했다.
"결혼식, 나도 같이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걸."
선우가 사뭇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니까…."
선우가 귀걸이로 손을 뻗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하얀 큐빅이 알알이 박힌 원형 귀걸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귀걸이를 향해 다가온 손가락이 귓불을 스쳤다. 아니, 스쳤어야 했는데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닿은 손가락이 차가웠다.
연희가 움칠, 몸을 떨었다.
"아쉽다. 놓친 시간들이."
연희가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선우를 마주 보았다. 선우의 손가락은 아직도 연희의 귀걸이와 귓불 언저리에 닿아 있었다. 손끝이 거친데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게 이상했다. 굳이 선우의 손을 피하지 않은 건, 그 보듬는 느낌이 안온해서였을 것이다.
"그럼 다음에는 선배도…."
다 같이 만나자고 하려는데 식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오는데?"
선우가 휴대폰을 집어 연희에게 건넸다.
"이 밤에 누가…."
화면을 들여다보던 연희가 굳었다. 곧 현관문이 쾅쾅 울렸다.
"연희야. 문 열어!"
응답하고 싶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누구?"
연희가 선우의 입을 다급하게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