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고작 그런 게 무섭다고요?"
"…내가 겁이 좀 많아."
겁만 많을까? 비겁하고 비굴하기도 한데.
높으신 분들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 왔다. 그들이 선우를 마음껏 휘두르게 두었다. 그렇게 휘둘리는 동안 차라리 감정이란 것을 아예 지우고 살까도 했었다. 그들이 적선하듯 내미는 보상이나 누리면서 죄책감도, 자괴감도 없이.
하지만 그렇게 다 비워내고 나면, 자신은 그야말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 같았다.
"이번에 솔직히 나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 말 덤덤하게 좀 하지 마요."
선우가 조용히 웃었다.
"눈 감으면 살면서 좋았던 일만 떠오를 줄 알았는데, 후회되는 일만 떠오르더라. 그간 아등바등 쌓아올린 게 다 무엇 때문이었나 싶고."
"……."
"쌓은 게 많으면 줄 수 있는 것도 많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더라고."
"……."
"너하고 내가 다시 만난 뒤에, 네가 나한테 온전히 받아 간 게 뭐였는지 알아?"
"뭔데요?"
"노란 고무줄. 그거 하나."
선우가 애써 지킨 연희 아버지의 재산은 연희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다. 축의금 역시 손을 대지 않은 게 분명했다. 직접 전한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느 것도, 연희는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주는 것도 한쪽의 의지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차라리 좀 더 일찍 털어놓을 걸, 잔머리 굴리지 말고 직접 붙잡아 말할 걸, 믿을 때까지 말하고 또 말할 걸, 하고 후회했어. 그럼 마음 여린 너는 날 봐줬을지도 모르는데."
연희가 후회한 만큼, 선우도 후회했던 모양이었다. 연희보다 훨씬 더 앞서서.
"……."
"그래서, 네가 나 봐줄 때 좀 더 여기 있고 싶어."
연희가 한숨을 쉬며 선우에게 물이 든 컵을 건넸다. 아까부터 바싹 마른 입술을 보니 뭐라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 몸 나으면 안 봐줄 건데요. 집에 가버릴 거예요."
더 다쳤으면 좋을 걸 그랬네, 중얼거리던 선우가 연희에게 등짝을 맞았다.
"왜…."
장난스럽게 웃던 선우가 돌연 얼굴을 굳혔다.
새초롬한 연희의 눈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희야…."
당황한 선우가 협탁 위에서 티슈를 꺼내 연희의 뺨을 훔쳤다. 연희가 티슈를 앗아가 직접 눈물을 급하게 닦아냈다.
"선배는 대체…."
"……."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막 대해요? 왜 안 아껴요?"
"…미안."
"왜 내가 미워하게 그냥 뒀어요?"
"나 때문에 네가 너무 많은 걸 잃었잖아. 나 아니었으면 너, 지금쯤 대기업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었을걸? 아버님 사업도 그렇게 안 무너졌을지도 모르고."
물론 지난 며칠 선우가 고해성사하듯 털어놓은 이야기들은 충격이었다. 덕분에 그 집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었고.
그렇지만,
그래서 선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왜 모든 일을 선배 탓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내 탓 맞아. 나한테 엮여서 네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은 거야. 나 때문에 돌고 돌아 입사한 곳에서 그 전남편이란 작자도 만난 거잖아. 그런 주제에 양심 없이 또 널 붙잡고 있어서…. 정말 미안해."
선우는 모든 게 다 제 탓이라고만 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어가며 황당할 정도로 쓸 데 없는 부분까지 자책했다.
와중에도 연희가 부담을 가질 만한 일들에 대해서는 계속 입을 다물었다. 거듭 사과하면서도, 자신이 연희에게 돌아가는 피해를 막아보려고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끝까지 사람 바보로 만들지.
얼굴의 물기를 대충 닦아낸 연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미안해요. 선배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오해한 거, 그래서 원망하고 차갑게 대한 거요. 뭐라도 되갚아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똑같은 마음으로 돌려주기엔 지금 내가 자신이 없어요."
"그럴 필요 없어."
선우가 손등으로 연희의 눈물을 훔쳤다. 너무 조심스러워서 닿은 것 같지도 않은 손가락이 눈가를 훑고 지나갔다. 손길이 닿은 부위가 뒤늦게 간지러워졌다.
"나도 늦은 거 알아."
"……."
"무슨 이름이 붙은 관계를 원하는 건 아냐. 그냥 다시 내가 연락해도 된다는 것만 허락해 주면, 그 정도면 충분해."
안쓰러움을 담은 연희의 시선이 천천히 선우를 더듬었다. 아직 완전히 붓기가 가시지 않은 선우의 얼굴부터 보호대를 둘러맨 허리, 깁스를 한 다리까지. 다시 선우의 얼굴로 시선이 돌아왔을 때에는, 줄곧 저만 응시하던 두 눈을 마주했다.
"의식이 흐려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생각이 뭐였냐면,"
"……."
"아쉬움이었어. 너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아쉽더라."
그때를 떠올리는지 선우가 눈을 감았다.
"그래서 다시 눈 떴을 때 너 본 걸로도 충분히 감사했어. 그래도 좀 더 욕심을 내도 된다면, 그냥 이렇게 계속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네가 대답해 주면 더 좋겠고."
"정말요?"
선우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의 어깨에서 힘이 툭 빠져나갔다.
"정말 그 정도로 되겠어요?"
선우가 연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배, 내가 다른 사람 만나는 거 싫어했잖아요. 선배가 준 거 다른 사람하고 나누는 것도 싫어했고. 그렇게 욕심 많은 사람이,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선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달리 내가 뭘 더 바랄 수 있겠어."
풀 죽은 목소리였다.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그러니까 곁에 있게 해달라고 하면 넌 나 차버릴 거잖아. 여지도 안 남기겠다고 다신 안 만나주면 어떡해. 또 못 보고 살면, 이젠 정말 못 버틸 것 같은데."
당장 고백을 듣고,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안도감을 느껴야 하는 상황일까?
연희는 이불을 움켜쥔 선우의 손을 보았다. 흉터가 가득 박힌 손이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아주 밀어내지만 않아 주면 좋겠다는 얘기야. 그것도 어려울까?"
겨우 미소를 지어낸 선우의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냥 외면하지만 말아달라는 말을 하는 게, 이렇게까지 안 되어 보일 일인가. 이렇게 아픈 얼굴로 해야 할 말인가. 모두 혼자 짊어지다가 망가진 주제에 고작 그런 부탁 하나 하기가, 그리도 힘든 일일까.
연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좀 헷갈려요. 선배가 나한테 하는 게 집착인지 사랑인지요. 어쩌면 선배가 정말 소중히 여기는 건 내가 아니라 나랑 보냈던 그 시절인데 착각하는 게 아닌가도 싶고."
"아니야. 그런 거."
선우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연희가 손을 들어 선우의 입을 막았다.
"어쩌면 내가 선배 마음을 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모양이에요. 그런 마음이 향하는 대상이 나일 수 있다는 거, 생각도 안 해봤거든요."
"……."
"게다가, 선배 못 본 동안 내가 많이 지쳤어요. 사랑이란 걸 시작하는 게 좀 무서워. 뭐든 시기가 있는 거잖아요. 우린 너무 돌아왔고."
선우가 자신의 입 위에 놓였던 연희의 손을 잡아 내렸다. 처음과 달리 힘을 뺀 연희의 손이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선우는 연희의 손을 놓지 않았다. 상처가 남은 손과 부스러질 듯 마른 손이 서로의 체온을 옮겼다.
"선배만큼 오래 좋아한 사람도 없었는데 선배만큼 오래 미워한 사람도 없었어요. 이젠 좋아한 시간보다 미워한 시간이 더 많아져서, 마음을 하나만 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요."
선우만큼 연희를 힘들게 한 사람이 있었을까. 선우가 유달리 나빠서가 아니었다. 연희에게 그만큼 큰 의미를 가졌던 사람이라 그랬다. 선우는 나름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겠지만 연희는 아팠다. 쉽게 받아들이기 억울할 만큼.
"그러니까,"
연희가 다시 입을 뗐을 때, 선우는 각오하듯 눈을 감았다.
"나한테 말해 봐요."
"어떤 말?"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서툴러서 그랬다고? 겁쟁이라 그랬다고? 수많은 사과와 변명들이 선우의 머리를 스쳤다.
"나한테 부탁해요."
"……."
"사랑해 달라고."
선우의 얼굴에 웃음도 아닌, 울음도 아닌 애매한 것이 걸렸다.
있는 듯 없는 듯 뒤에 서 있던 간병인이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간병인이 처음으로 보인 감정표현이었다. 간병인이 문을 열고 자리를 피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연희의 시선은 선우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연희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오래전 기댈 줄 모르던 자신이 선우에게 기대는 법을 배웠듯, 선우 역시 오랫동안 잊고 있었을 그 방법을 다시 기억해 냈으면 했다.
"부끄러워요? 아님 자존심 상해요?"
어느새 온 얼굴이 일그러진 선우에게, 연희가 몸을 기울였다.
"그럼 비밀로 해줄 테니까 말해 봐요. 나한테 직접."
다른 사람 통해서 선배 얘기를 듣는 건 이제 그만할래요.
연희가 제 귀를 선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선우가 입이 열렸다가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닫혔다. 그리고 다시 열렸다. 그때마다 연희의 귓가에 얕은 입김이 흩어졌다.
연희는 기다렸다. 호흡이 소리를 담고 전해질 순간을.
그리고 마침내.
"사… 랑 해…. 줘."
약하게 끊겨 들린 목소리를 알아들은 연희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우선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연희가 몸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려는데, 선우가 다급히 연희의 팔을 붙잡았다. 연희와 눈을 맞추고, 아까보다 더 분명하게 말했다.
"사랑해 줘, 제발."
"……."
"날, 사랑해 줘."
연희를 붙잡고, 선우는 주문처럼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뇌었다. 점점 수그러든 고개가 연희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연희의 어깨에 이마가 닿았을 때, 그리고 연희가 그것을 피하지 않았을 때에야, 선우의 주문도 마침표를 찍었다.
"내가 잘 할게."
선우의 손이 슬그머니 연희의 손을 꽉 쥐었다. 연희가 똑같이 힘주어 손을 맞잡아 주었다. 손의 주인이 웃었다. 대단한 구원이라도 받은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