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나 현아 씨 만났어요."
선우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말을 꺼냈다. 껄끄러운 이야기지만 짚고 넘어가야 했다.
"왜? 걔가 먼저 만나자고 한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뜬 선우가 등을 곧추세웠다. 침대 옆에 앉은 연희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당황스러웠으나, 연희는 굳이 뒤로 몸을 물리지 않았다.
"주식 내놓으면 보상한다고 전해달래요. 그 보상이라는 건…. 저하고 관련된 거라고 했고요."
선우의 눈이 조금 전보다 더욱 커졌다. 어디까지 아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연희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무슨 주식을 말하는 거예요? 영상도 주면 좋겠다던데 그건 또 뭐고요?"
"너랑은 관계없는 이야기야."
보상으로 걸린 게 자신의 안위라는데, 연희도 마냥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기왕 선배에 대해 알리기로 했으면 전부 말해 줘요. 숨기지 말고."
망설이던 선우가 설명을 시작했다.
선우가 가진 주식(정확히는 선우의 주식 중 현아가 알고 있는 주식이라고 말했다.) 중 대부분은 실제로는 본인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대주주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어머니의 것을 일부 받아두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선우가 하는 역할은 어머니의 의견에 무조건 찬성표를 던지는 것이라고도 했다.
가끔은 어머니를 대리해 상대를 회유하는 용도로도 쓰였다는데, 자신의 '쓰임'을 이야기하는 태도가 너무도 담담해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현아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할아버지가 가진 차명 주식 정보일 거야. 상속에 대비해 둔 건데 내가 관리하거든. 내가 알기로 그중에 현아에게 돌아갈 몫은 없어. 내게 넘기라는 '주식'이 그것까지 말하는 거라면, 생각보다 훨씬 더 간이 커졌다고 봐야겠네."
그 명목상 소유주에게 주식을 회수하고 제 주인에게 배부하는 일은 선우가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멋대로 움직였다가 혹시 정 회장이 의식을 찾기라도 하면, 선우가 그 후폭풍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될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현아가 뻔뻔하게 요구한 일은, 선우에겐 매우 위험한 짓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순순히 듣고 있을 게 아니라 욕이라도 한바탕 해주고 왔어야 했다.
"그런 일을 왜 선배가 해요?"
"적당히 쓸 만하면서 버려도 부담 없는 패니까?"
턱 아래를 쓰다듬던 선우가 까칠한 턱수염을 인식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스스한 뒷머리도 매만져 보았다. 슬금슬금 손을 들어 올리더니 제 얼굴을 반쯤 가려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묵직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보안이 중요하고 껄끄러운 일은 보통 내가 처리해. 할아버지가 정부 인사나 정치권에 건네는 뇌물, 그래서 생긴 이중 회계장부도 내가 총관리하지."
한 비서에게 들은 이야기가 보다 구체적으로 펼쳐졌다. 이제는 저 좋은 것만 택해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욱 힘들어지기만 한 것 같았다. 얼마든지 하소연을 해도 좋으련만.
"그러니까 난 네가 좋아할 만한, 정의롭고 깨끗한 사람은 전혀 되지 못한 거지."
선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길어진 앞머리가 선우의 이마를 가렸다. 연희는 무심코 손을 뻗으려다가 서둘러 자신의 행동을 제어했다. 하마터면 선우의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 줄 뻔했다.
"…선배가 원해서 한 일이에요?"
"아니."
"그럼 선배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억지로 한 거잖아요."
"원해서 한 일은 아니지만, 거절하지도 않았지. 그저 손에 쥔 걸 내려놓으면 될 일이었는데."
그렇게 시작한 일은 이제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게 되었다. 기업의 약점을 움켜쥔 사람이 이제 와 모든 것을 잊고 얌전히 살겠다고 한들 누가 믿을까. 차라리 모아둔 약점을 꽉 붙들고 있는 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일 지도 모르겠다.
"왜 내려놓지 못했는데요?"
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희는 알았다. 그 이유 중에 자신 또한 들어가 있으리란 것을.
내줄 것이 있어야 타인 곁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선우였으니까. 어리고 서툴렀으며, 조급했던 선우는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이라도 지니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 대가로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더라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우는 어느 누구의 곁에도 머물지 못했다.
연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을 바보로 만든 것에 대한 원망을 먼저 해야 할지, 묵묵한 희생에 감사를 해야 할지, 이제 그렇게 살지 말라고 충고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감히 충고할 수도 없었다. 선우가 견뎌낸 삶의 무게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연희가 생각에 잠긴 동안, 선우는 무엇이 그렇게 불안한지 연신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한참 만에 눈을 굴리며 물었다.
"나 좀 많이 별로지?"
이 와중에도 선우가 가장 불안해하는 것은 연희에게 경멸을 사는 것이었다.
"……."
"질리려나?"
연희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연희가 지금 가진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제가 아니면 다르게 살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 돌려놓을 힘이 자신에게 있긴 한 건지 모르겠다. 막막했다. 개학 전날, 모르고 있던 방학숙제를 갑자기 전해 듣게 된 기분이다.
타인을 위해 이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하는 게 과연 정상일까? 그런 게 사랑이라는 걸까? 하긴 남들이 말하는 평범한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애당초 저를 위해 오롯이 쏟아진 애정은 느껴 본 적도, 기대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선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찌해야 할 줄 몰라 그저 자신이 아는 대로 최선을 다한 결과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나도 내가 이상한 거 알아."
선우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서 이런 거까진 알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네."
"그럼 어디까지 알려주려고 했는데요?"
선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 네 생각보다 좀 더 불쌍하다는 것 정도? 아예 잊히는 것보단, 그렇게라도 기억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타인을 위해 그토록 자신을 깎아내고 아무렇게나 방치해 왔으면서 바란다는 게 고작 동정 한 줌이라니. 하지만 제대로 돌려받아본 적이 없어 기대하지 못하는 빈곤한 마음을 알기에, 연희는 선우를 어떠한 말로도 비난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사람을 어찌해야 할까 생각했다.
연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랑 때문에 헤맨 사람들을 참 많이도 봐왔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작은어머니도 결국은 사랑을 구하고, 피하고, 지키려다 어디 한 군데가 망가져버린 사람들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사람만큼 직접적으로 안타깝게 와닿은 적이 있었던가. 어리석은 짓 좀 그만하라며 욕을 퍼부어서라도 스스로를 상처 내는 짓을 말리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럼 선배가 숨기려고 한 '이런 거'는 대체 또 뭔데요?"
"너한테 너무 오래 매달린 거. 지금도 붙들고 있는 거."
선우가 터진 입술을 잘근 씹었다.
갑자기 나타나 잘난 척할 때는 그냥 재수가 없었는데, 저렇게 풀이 죽어 눈치나 보고 있는 걸 보니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힘들었다고 거들먹대는 게 낫겠다. 나는 몰랐던 일이라면서 싸워라도 볼 수 있게.
예나 지금이나, 연희는 선우가 저렇게 기가 죽어 있는 게 정말 싫었다. 차라리 뻔뻔하게 속을 뒤집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 그냥 선배 자신만을 위해 살지 그랬어요. 그게 선배한테는 훨씬 나았잖아요."
"그게 날 위한 일이었어. 그래야 내가 사는 데도 좀 의미가 있는 것 같았거든. 그러니까 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을까? 저를 위해 내주고 또 내준 사람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배가 날 위해 희생한 것들. 그러다가 나한테 묻지도 않고 벌인 일들에 내가 왜 미안해해야 하나 싶어서 선배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다 내 마음대로 한 일인데 네가 갚을 게 뭐가 있어."
선우의 내리깐 눈이 연희의 주먹 쥔 손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기가 눈을 피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잘못한 것도 없이 잘못한 것처럼 굴었다.
"내 앞에서 그렇게…. 선배가 하찮은 사람인 것처럼, 아무렇게나 여겨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마요."
"……."
"이상하다고 하지도 마요. 내 눈에는 선배 하나도 안 이상하니까."
선우가 이상하다고 한다면 저 역시 이상한 사람이었다.
안타까워서 화가 날 수도 있구나, 미안해서 차라리 외면해 버리고 싶을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혼자 남겨두기는 또 싫어서 곁을 지키고 있으니까. 풀 죽은 선우가 보기 싫으면서도, 자꾸만 선우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고 싶으니까.
연희는 선우에게 졌다. 아니, 정확히는 선우를 향한 자신의 충동에 졌다. 아이를 어르듯, 선우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 주고야 말았다.
"선배가 갖고 있다던 그 정보들, 그냥 검찰에 넘기고 멀리 떠나버리면 안 돼요? 밝히고 털어 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런다고 편해지지 않아. 그럼 정 회장이 날 보호하라고 지시한 것도 전부 무효가 되는 거고. 정 회장이 살아있는 한, 적어도 날 죽이지는 못할 테니 그걸 믿고 정 회장의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봐야지. 게다가…."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덤덤하던 선우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이대로 갔다가 또 십 년 후에나 널 만날 수 있게 되면? 그때야말로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