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아주 오랜 시간 이곳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리는 눈발이 열 오른 얼굴 위에서 녹아내렸다. 뚝뚝, 작은 물방울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선우는 실제로 한국에 올 때마다 가끔씩 이곳에 들렀었다. 그러나 좀처럼 연희를 보지는 못했다. 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왜 나타나지 않는지, 문득 서러워졌다.
땅바닥만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멀찍한 곳에 서 있는 인영이 눈에 걸렸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연희는 웬 남자와 함께 서 있었다. 그들을 비추는 가로등은 선우의 위를 비추는 가로등과 달리 밝고도 강한 빛을 쏘았다. 남자가 연희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남자의 목에 팔을 감은 연희가 속눈썹을 떠는 모습까지 선명히 보일 정도로.
내일을 약속하는 연인의 움직임이 애틋하고 단단해 보였다. 선우가 끼어들 틈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왼쪽 가슴에 격통이 일었다.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땅에 묶인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꿈에서는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보이고 들렸다.
변함없는 애정을 확인한 연희가 남자의 팔짱을 끼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속삭이며 선우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가는 눈발을 뚫고 온 연희가 남자를 향해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연희야!"
선우가 부르자 연희의 웃음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연희의 옆에 선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누구야?"
남자가 물었다.
"아무도 아니야."
무덤덤하게 대답한 연희가 남자를 재촉해 자리를 벗어났다. 미움조차 남지 않은, 낯선 이를 마주한 얼굴이었다.
아! 이 장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구나.
실제로 겪은 과거에서는 연희가 선우를 보지 못했으니까. 선우는 연희의 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몰래 연희와 남자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유학 중 친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들렀던 때였다. 아버지의 죽음에 별다른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해방감을 느꼈다면 너무 나쁜 자식인 걸까?
더러 좋았던 추억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막상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사실 한국에 온 이유는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리워하던 이와 같은 시간대를 공유할 수 있겠다는 계산으로. 어쩌면 먼발치에서 얼굴이라도 한 번 볼 수 있겠다는 기대로.
가당찮게도 조금은 두근거렸던 것도 같다. 못 본 동안 연희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남몰래 연희의 집 부근을 서성였다.
유학 직전에 헤어진 이후, 그날 처음으로 연희를 봤다. 그날은 연희의 전남편을 처음 본 날이기도 했다.
그는 연희의 가족에게 인사를 하러 온 듯했다. 배웅 나온 가족들이 집으로 들어가고 연희와 남자 둘만 남았을 때, 남자가 연희에게 천천히 다가갔을 때….
그때의 진짜 선우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새로운 악몽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장면은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때로는 선우 곁에 다른 누군가가 서 있을 때도 있었으나 그 사람이 연희는 아니었다. 검은 골목길이 알록달록한 식장으로 변하기도 했다. 선우가 검은 턱시도를 입고 있으면 하얀 정장 치마를 입은 연희가 선우 앞에 나타나 후련하다는 얼굴로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결혼 정말 축하드려요."
선우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연희야. 이런 건 내가 원한 게 아니야."
선우의 부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내놓든 연희는 멀어지기만 했으니까. 선우를 떠나는 연희의 곁에는 늘 낯선 남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네가 먼저 떠났잖아."
문득 뒤돌아본 남자가 입을 벌렸다. 입만 시커멓게 뚫려 있는 남자는 재민을 닮은 듯도, 준호를 닮은 듯도, 도영을 닮은 듯도 했다.
"너한테 남은 기회는 이제 없다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익숙한 사람의 것으로 변했다. 연희의 것 위에 양어머니의 것이 겹치고 양아버지의 것이 겹쳤다. 영주의 것이 겹치고, 현우의 것이 겹쳤다.
선우를 지탱하던 것들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희망할 것이 없는 삶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지?
선우는 수많은 물음 속에 홀로 남겨졌다. 꿈의 빛깔은 온통 회색으로 바래있었다. 뿌리 없이 몸체만 남은 꽃과 풀도 시든 지 오래였다.
다시 꿈을 꾸어야겠다. 조금 더 행복한 꿈으로.
이번에는 연희가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꿈으로.
* * *
침대에 묶인 몸이 한없이 무거웠다. 허리께의 통증을 느끼며 손가락을 까딱여 보았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려나."
이 매니저의 음성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이제 슬슬 숨을 곳을 옮겨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가족들이 꼬리를 밟기 전에요."
조금 전 꿈에서 들었던, 익숙한 음성도 함께 들렸다. 다만 말투가 달랐다. 봄볕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걱정이 담긴.
"아무래도 그렇죠. 대책 없이 크게 다치는 바람에 한곳에서 머문 시간이 너무 길긴 했어요. 적어도 다음 달에는 다른 곳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가습기를 통과한 하얀 수증기가 보였다. 때마침 눈이 마주친 이 매니저가 입을 쩍 벌렸다.
"선우 눈 떴어요!"
연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얼굴로 서둘러 선우 곁에 달려왔다. 아니, 놀라움만은 아니었다. 안도와 반가움도 있었다. 생생한 표정을 드러낸 연희가 꿈보다 더욱 꿈같았다.
연희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눈매를 좁혀 다친 얼굴을 오랫동안 샅샅이 뜯어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곳이 간지러웠다. 무슨 말이든 하려 입을 열었으나, 다 말라 갈라진 목이 바람 빠진 쇳소리를 냈다.
움찔대는 입으로 시선을 옮긴 연희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다 곧 고개를 푹 숙이고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떨리는 입술이 깊게 잠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선배 진짜 진상이에요. 알아요?"
툭, 침대보 위로 투명한 것이 떨어졌다. 곧 또 하나가 방울지며 떨어졌다. 미지근한 그것은 선우의 손등 위에도 떨어졌다가 이내 아래로 흘러갔다. 떨리는 손을 들어 연희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거칠하기도 하고 보드랍기도 했다.
정말로 꿈이 아니었다.
"나, 네 선배야?"
겨우 내민 말에 연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눈가에 어린 물기가 온기를 담고 반짝였다.
"그럼 부사장님 하든지요."
"아니,"
선우가 얼른 고개를 젓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다시 배시시 웃었다. 엉망인 얼굴로 짓는, 그럼에도 기가 막히게 예쁜 웃음이었다. 정말로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기에 그랬다.
그 바람에 연희는, 선우에게 하려던 수많은 말을 잊었다.
"그럼… 나 이제 말 놔도 돼?"
연희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고작 그런 거나 물어보냐는 얼굴이었다.
선우에게는 가장 중요한 물음이었는데.
선우가 용기를 내어 연희의 옷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마른 손을 내려다 본 연희가 깊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다시 잠들었다. 선우의 나지막한 숨소리가 병실을 채웠다. 길게 내린 속눈썹이 순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반면 색이 연한 입술 아래 살짝 솟은 아래턱은 금방이라도 싸움을 앞둔 사람 같다. 속눈썹 아래에 잠긴 또렷한 눈동자도, 입술 아래 숨은 고른 치아도 언제든지 제 역할을 할 준비를 마쳐 놓았을 것이다. 지금은 잠시 쉬고 있을 뿐.
새삼 참 잘난 얼굴이다 싶다가도, 그런 얼굴이 상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러다가 다시 긴 목이나 널찍한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뭉텅 잘려 나간 시간을 깨달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긴 시간, 제대로 된 휴식 없이 달려온 것은 연희도 마찬가지였다. 쉴 틈이 없어서, 쉴 곳이 없어서.
연희에게도 졸음이 몰려왔다. 내려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올려 떴다. 아직 잠들고 싶지 않았다. 선우가 눈을 떴을 때 곧바로 눈을 마주해주고 싶어서였다.
연희는 일어서서 창가로 갔다. 커튼을 조금 열어젖히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갑자기 마주한 햇살이 눈을 괴롭혔다. 잠시 눈을 감자, 지친 몸이 잠깐 균형을 잃었다. 연희가 서둘러 창틀을 짚었다.
"괜찮아?"
깊숙이 잠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연희가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침대에 반쯤 기대앉은 선우가 보였다. 겨우 그만큼 움직이는 데도 힘이 들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마주한 두 눈은 연희에 대한 걱정만을 담고 있었다.
"…누가 누구한테 괜찮으냐고 물어요?"
뜨거워진 눈가를 감추려 연희가 서둘러 등을 돌렸다. 커튼을 묶고 창을 아예 열어젖혔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눈이 부신 탓이라고 해야겠다. 그대로 방문으로 향하자 선우가 다시 엉덩이를 들썩였다.
"어디 가?"
다급히 묻는 음성이 불안한 듯 떨렸다.
"거실에 물 가지러 가요."
"아…."
그제야 몸에서 긴장을 뺀 선우가 침대에 등을 기대었다.
"뭐 다른 것도 가져다줘요? 배고플 텐데."
"난 목도 안 마르고 배도 안 고픈데…."
갈라진 목소리로 웅얼대던 선우가 마른기침을 했다. 갈증이 인 것이 분명했다. 속 보이는 거짓말에, 연희는 저도 모르게 선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귓가가 조금 붉어진 선우가 뒷머리를 긁었다.
"넌 밥 먹었어?"
"아직요. 샌드위치 갖고 와서 먹으려고요. 선배는… 죽 가져오면 될까요?"
정신을 차리고 '선배'라는 말을 입에 담으려니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그 대목에서 선우가 환히 웃었기 때문에,"그게 진짜 꿈이 아니었구나…."하고 감탄하듯 중얼거렸기 때문에 다른 호칭으로 부를 수 없어졌다.
그동안 왜 몰라봤을까. 적어도 저에게만은 투명한 속을 몇 번이고 내보인 사람이었는데. 왜 타인을 대하는 선우의 얼굴만 보려 했을까? 왜 저와 남을 대할 때 달라지는 표정을 믿을 수 없다고만 생각했을까?
"물을 게 있어요."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내가 선배 약점이에요?"
아,
선우가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작은 탄식만 입 밖에 던지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요."
뒤통수 맞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으니까.
망설이던 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가 선우 어깨너머로 들어오는 햇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민 햇살이 더는 눈부시지 않았다. 그저 따뜻하고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