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70)화 (76/98)

<70>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데요? 계속 이렇게 살 작정이래요? 죽을 때까지 자기를 망가뜨리면서?"

이 매니저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우도 벗어나려고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때마다 가족들이 선우의 약점을 잡고 늘어지지 않았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겠죠."

약점이라는 말에 연희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현아가 말하지 않았던가. 연희가 선우의 약점이라고.

하얗게 질린 연희가 입만 달싹이자 눈치 빠른 이 매니저가 황급히 덧붙였다.

"너무 죄책감 갖지 마요. 비단 꼭 누구 하나만 국한된 게 아니라, 선우가 신경 쓰는 사람들은 죄다 약점이 되어 왔던 거예요. 처음엔 동생이었고, 다음엔 어머니였고…. 그런 식으로 지금은 연희 씨가 된 것뿐이죠."

그중 선우의 진심을 알아준 사람이 있기는 할까? 선우에게 한 줌의 애정도 드러나지 않던 영주와 고모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저 역시 크게 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다 정리하고 떠나자고 했거든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정 회장과 미리 거래도 해놓은 상황이었고요. 파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영국으로 바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다 세워놓은 계획을 선우가 갑자기 엎어버렸어요. 그래서 일이 복잡해졌고요."

"왜 엎은 건데요?"

답을 들으면 돌이킬 수 없겠다는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제대로 듣지 않는 것도 비겁한 행동이 아닐까?

"글쎄요.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이 매니저가 찬찬히 연희를 보았다.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 눈으로 묻는 것 같아 연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매니저가 어쩐지 안도한 얼굴로 조금 웃었다.

"아마도 기다린 거겠죠?"

"……."

"연희 씨를."

어렴풋이 예상했던 답변임에도 연희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쥐고 있던 이불만 더욱 세게 그러쥐었다. 가까이 다가온 이 매니저가 연희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제야 연희의 손에서 이불이 놓였다.

이 매니저가 구겨진 침대 이불을 바로 펴주었다. 얇은 천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가 작게 끙끙대는 소리도 들렸다.

"예전에 연희 씨가 그랬다면서요? 정말 가까운 사이라면 비밀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너무 까마득한 옛일이라 말을 꺼낸 자신조차 잊고 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매니저의 말을 듣자마자 그때 한 생각이 그대로 떠올랐다.

선우와 조금 더 가까워지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들을 나누며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럼 덜 외로울 것 같다고.

선우는 자신과 생각이 달랐다. 모든 걸 다 털어놓을 필요는 없지 않냐고 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약한 부분을 숨기고 싶어 하는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려보자 싶었나 봐요. 그게 연희 씨가 생각하는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니까."

연희의 방식에 맞춰 보겠다고 위험을 무릅쓴 남자가 병상에 누워 있었다.

"어차피 곳곳에 힌트야 널려있고, 마음만 먹는다면 과거의 선우를 알아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테니까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작 자신의 관심 한 줌을 받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힘든 시간을 연장했다는 게.

그 맹목적인 애정이. 절박함이.

"물론 연희 씨가 선우에 대해 더 안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 거란 보장은 없었죠.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놓치기 싫었나 봐요. 떠나면 다시는 안 돌아올 작정이었으니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바보네요."

감당하지 못할 마음의 무게에 몸이 짓눌릴 지경이었다. 이 매니저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건 딱 질색인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연희 씨랑 이런 대화를 하고 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데."

"……."

"사실 선우가 계획한 만남은 이런 게 아니었어요. 이렇게 망가진 꼴로 만나게 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요?"

"그러게요. 저도 예상 못 했네요."

"선우가 제대로 정신 차리기도 전에 연희 씨한테 이곳을 알려줘도 되나, 저도 고민 많이 했어요. 흉한 얼굴 들키게 했다고 화낼 거 같더라고요."

"제가 먼저 다 알고 왔다고 하세요. 이 매니저님 협박했다고."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에 이 매니저가 하하 웃었다.

"미주알고주알 죄다 일러바친 거까지 알면 무슨 핑계를 대든 혼날 거 같은데요. 선우 깨어나기 전에 일단 난 도망갈래요."

이 매니저가 옷걸이에 걸어둔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들었다.

"연희 씨는 연희 씨 생각대로 해요.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이곳을 나가든지, 여기 남아서 선우랑 대화를 더 해보든지."

이 매니저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연희를 보았다. 어떤 선택을 하겠냐고 묻듯이.

연희는 이 매니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협탁에 있던 티슈를 뽑아 선우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뒤를 돌아보자, 그때까지 가만 서 있던 이 매니저가 좀 전보다 가벼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

연희는 선우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알아야 할 것 같았다.

* * *

"얼른 좀 일어나요.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말고."

어제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8시쯤이었는데, 어느새 이튿날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듣기로는 연희가 자리를 비운 새 잠시 눈을 뜨고 화장실도 다녀왔다는데, 연희가 곁에 있는 동안은 시체처럼 누워만 있으니 살아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잠버릇이 험해서 움직임이라도 있으면 마음이 좀 나을 텐데, 누가 묶어놓은 것처럼 얌전하게도 잤다. 이 매니저가 왜 그리 불안해했는지 이해가 갔다.

"아직도 여기 계셨습니까?"

문을 연 한 비서가 연희를 보더니 드물게도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연희가 어정쩡하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 매니저가 여기 게스트룸이 따로 있다고 알려주지 않던가요?"

"아는데, 그냥 옆에 있고 싶어서요."

"간병인은 어디에 갔습니까?"

"들어가서 좀 쉬시라고 했어요."

사실은 선우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선우가 아무 반응 없이 누워만 있을지라도. 자신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연희 씨도 피곤해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는 한 비서 역시 피곤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한 비서는 오늘 새벽 이곳에 도착해 잠깐 눈을 붙인 뒤 다시 나타난 참이었다.

"밥은요?"

"대충…."

"안 먹었나 보네요."

별장에 상주한다는 가사 도우미가 때마다 식사를 마련해 주었지만 도무지 식욕이 돋지 않았다. 한 비서가 혀를 찼다.

"이 매니저는 뭐 하러 연희 씨를 일찍부터 불러냈는지 모르겠네요. 부사장님께서 완전히 회복하신 뒤에 다시 연락했어도 될 텐데."

"덕분에 뭐라도 할 수 있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한데요."

그냥 옆을 지키고 있는 게 다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았다.

"여긴 위험해요. 그동안이야 정 회장님께서 미리 손 써놓은 덕에 괜찮았다지만, 의식 없이 누워계신 기간이 너무 오래되었어요. 언제 이곳이 노출될지 모르는데, 연희 씨까지 여기 있어서 좋을 게 없어요."

"아직까지는 가족 분들 모두 이곳 위치는 모른다는 거죠?"

"정 회장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라요. 회장님께서는 일부러 부사장님에 대해서는 제한된 정보만 노출시켰고요."

"회장님이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건데요?"

"부사장님께서 정 회장님의 정치권 로비 내역을 정리해 둔 게 있거든요. 어차피 그 로비가 부사장님을 통해 이루어진 거니까 어렵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번에 그 장부와 자유를 맞교환하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선우로서는 목숨을 건 거래였다. 장부를 만들어 별도로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충성심을 의심받을 만한 이야기였으니까. 정 회장이 장부만 따로 찾아 없애는 방식을 선택했다면 선우는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장부만 넘기면 놔주겠다고 했다고요?"

의심스레 묻자 한 비서가 확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 부사장님이 기업과 가족들을 위해 희생한 부분을 인정해 준 게 아닐까요?"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해야 할까요?"

비아냥거리자 한 비서가 픽 웃었다.

"문제는 정 회장님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 가족들이 부사장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유산상속 문제를 다룰 때 부사장님이 가진 정보를 자신의 무기로 쓰고 싶어 하거든요. 각자 남몰래 부사장님께 시켜서 해온 떳떳하지 못한 일들이, 이제는 서로의 약점이자 선점해야 할 무기가 된 거죠."

정 회장이 생각한 승계 구도는 아직 공식적으로 확실히 언급된 것이 없었다. 치밀한 정 회장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직 재산 배분에 대한 유언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신의 건강을 과신한 탓이리라.

그러니 남은 가족들끼리 물밑 협상을 하는 이때, 선우가 가진 정보들이 새삼 중요해진 것이다. 자신의 약점은 감추고 상대의 약점은 찾아내야 하니 한시가 급할 터였다. 선우가 구체적인 증거까지 갖고 있다는 것은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 존재 유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도 선우와의 대화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선우를 찾는 이유가 좀 더 평범하면 좋았을 것을. 하나뿐인 아들, 혹은 오빠나 형, 혹은 조카의 안부가 궁금해서. 다쳤다는 몸이 걱정되어서. 그런 평범한 것들.

간병인이 물을 채운 대야와 수건을 방으로 가져왔다. 간병인에게서 대야를 받아 들던 한 비서의 앞을, 연희가 가로막았다.

"제가 할게요."

연희가 한 비서의 손에 들린 물건들을 빼앗듯 가져왔다.

"뭐라도 하고 싶어서 그래요. 가만히 있으니까 안 좋은 생각만 들어서."

자꾸만 불쌍하고 화가 났다. 미안했다.

"부사장님이 이렇게 된 건 연희 씨 탓이 아닙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이 매니저도, 한 비서도 연희에게 부담을 갖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선우 혼자 품고 있던 것들이 너무나 무거웠다.

* * *

선우는 긴 꿈을 꾸었다. 한때 자주 꾸던 꿈이었다.

사방은 온통 푸른빛 잔디로 가득했다. 붉은 장미 덩굴이 회색 담벼락을 촘촘하게 덮고 어두운 밤하늘에는 불꽃이 터졌다. 알록달록한 알전구가 주위를 밝히고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연희와 보낸 축제의 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꿈의 배경은 금세 어두운 골목길로 바뀌었다. 고장난 가로등이 느리게 깜빡이며 선우의 머리 위를 비추었다. 선우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때는 까마득한 과거인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같기도 했다. 어쩌면 현재일지도.

가로등 뒤의 담장 너머에는 연희의 집이 있었다. 널찍한 단독주택이었다. 연희와 그곳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선우가 연희를 붙잡았고, 연희는 붙잡혀주었다.

꿈속에서 선우는 다시 연희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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