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선우가 있다는 곳은 강원도에 위치한 별장이었다.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 위치한데다 커다란 나무로 빽빽이 둘러싸여 있어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깊숙이 숨겨진 웅장한 저택은 일견 감옥 같아 보였다. 이 육중한 대문이 과연 열리기는 하는 걸까, 생각하며 오른쪽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마중 나갈게요."
이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도 수 분 뒤에야 철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 뒤에는 지친 얼굴의 이 매니저가 서 있었다.
별장 출입문에서 안쪽에 자리한 본채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푸른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은 예상외로 깔끔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분위기 탓일까. 해가 저문 후 보는 꽃무더기는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마저 흉흉한 장송곡 같았다.
무전으로 근처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이 매니저가 뒤따라 온 경호원들을 무르고 연희를 본채로 안내했다.
"미안해요. 선우 어디 있는지 진즉 알려주지 못해서. 선우가 부탁했거든요. 선우가 남긴 번호로 연희 씨가 먼저 연락해오기 전에는 가만히 있어 달라고."
이 매니저의 입에서 나오는 '선우'라는 호칭이 낯설었다.
이 매니저가 구식 열쇠를 이용해 본채 현관문을 열었다. 목조 바닥으로 된 거실을 가로질러 안쪽 방에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은 본래 선우의 집만큼이나 황량하고 쓸쓸해 보였다. 값비싼 원목가구가 곳곳에 자리하고, 화려한 그림이 줄지어 걸려 있음에도 그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 때문일 것이다.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에 선우가 미동 없이 누워 있었다. 손등에는 링거 주삿바늘이 꽂힌 채로.
가까이 다가가자 다리를 감싼 깁스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 곳곳에는 긁힌 상처와 피멍이 있었다. 낯빛이 너무 창백해서 살아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연희가 선우의 코끝에 손을 대보았다. 내뱉는 호흡을 확인하고서야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을 수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연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선우에게는 차마 닿지 못한 손으로 침대 시트만 말아 쥐었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 몸에 덮인 이불까지 함께 들썽거렸건만, 선우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잠깐 나가 주겠어요?"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던 남자 간병인에게 이 매니저가 부탁했다. 간병인이 조용히 방을 나섰다.
"얼마나 다친 건가요?"
"가장 크게 다친 건… 골절이겠죠. 경골 정강이뼈하고 갈비뼈 3개가 부러졌어요. 다행히 장기 손상은 없고요."
"얼굴은 또 왜 이런데요?"
퉁퉁 부은 얼굴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충격과 공포 탓인지 슬픔과 안쓰러움 탓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안와골절 때문에 수술받았거든요. 다른 덴 몰라도 얼굴까지 맞아 온 건 처음이에요. 평소에는 잘 피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어쩌다 그랬는지…. 늙어서 몸이 전 같지 않나?"
분위기를 바꿔보겠답시고 이 매니저가 농담을 했지만 연희는 웃을 수 없었다. 입으로만 웃는 이 매니저의 얼굴도 씁쓸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이 또 있었다고요?"
"솔직히 말하면, 다치는 일이야 자주 있었죠."
이 매니저의 담담한 태도가 연희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장차 J그룹 후계자라는 것들이 약 먹고 사람 패는 거, 유명인 끼고 스캔들 일으키는 거 수습하다 보면 몸으로 부딪힐 일이 은근히 많거든요. 전담 대응 팀을 따로 두었다곤 해도 선우가 직접 움직여야 하는 일이 워낙 많았어요."
"……."
"애초에 호텔에 자리를 내준 것도 거기서 일어나는 일 수습하라고 맡긴 거나 다름없었어요. 그러면서 경영 성과도 적당히 내야 했죠. 워낙 능력이 좋다 보니 정 회장님도 최근에는 경영 쪽에 더 집중하길 원하는 것 같았지만, 나쁜 버릇 든 사촌들이 잡고 놔줘야 말이죠. 할아버지는 모르게 해달라면서도 어찌나 스케일 크게 사고를 쳐대는지."
"그런 일까지 꼭 해야 해요?"
"선우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 집안이어서요.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기에는 선우가 무감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게 문제고요."
연희가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통증 때문인지 선우의 반듯한 눈썹이 미묘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서늘한데도 귓가에 땀방울이 어려 있었다.
"신경안정제를 너무 자주 복용한다 싶더니 결국 이렇게 됐네요."
선우가 깨어 있었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이렇게 아프면서까지 지켜내야 할 게 무어가 있다고. 선우를 노려보느라 오랫동안 깜빡이지 못한 눈이 지독하게 매웠다.
"어떻게 그렇게 멀쩡한 척을 할 수 있었던 거래요?"
"선우가 뭘 속 시원히 말해주는 성격인가요? 저도 선우가 무슨 생각으로 버텨온 건지는 몰라요. 연희 씨에 대한 선우의 감정도 직접 들은 적 없고요. 다만 추측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같이 유학하다가 제가 먼저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종종 연희 씨에 대한 걸 부탁했거든요."
"저에 대한 거요?"
"아! 그러고 보니 결혼식 때 받은 축의금 봉투 중에 이름 없는 거 하나 있지 않았어요? 그거 제가 대신 내준 건데."
통장에 고이 모셔두기만 했던 거액의 축의금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이제야 답을 찾았다.
"표현을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표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마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겠죠."
연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지난한 삶을, 선우가 어찌 버텨 온 건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의식이 있긴 한 거예요?"
"있긴 한데, 이상하게 잠에서 깨려고 하질 않아서요. 눈 좀 뜨나 하면 자고 또 자고. 영양제를 투여 받고는 있다지만 뭘 제대로 먹지도 않고 누워만 있으니까 영 무섭네요."
"아…."
순간 연희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녀가 잠시 비틀대자 이 매니저가 성급히 말을 덧붙였다.
"많이 피곤한 상태라 그럴 수도 있어요. 요 몇 년 잘 시간도 아껴가며 일했던 데다가 원체 불면증이 심했거든요."
그리 바쁘고 피곤했다는 사람이 잘도 제 곁을 맴돌 시간을 냈구나, 싶었다. 그 귀한 시간을 내놓고도 연희에게 뾰족한 말이나 듣고 돌아서기 일쑤였다. 이 불쌍한 사람에게 연희는 설명할 기회도, 용서받을 기회도 준 적이 없었다.
마음을 열고 들어줄걸. 뭐라고 하든 그냥 믿어 봐줄걸. 웃어달랄 때 그냥 웃어줄걸. 무언가 해 주겠다고 할 때는 그냥 고마워만 할걸. 뭐 그리 어려운 일이었다고.
연희는 뜨거워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