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69)화 (74/98)

<69>

가증스러운 아이는 벌벌 떨면서도 저를 변호하기 바빴다. 이건 모두 현우가 갑자기 미쳐 날뛰어 벌어진 일이라고. 정말로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생각까진 없었다고.

그럼 감히 손도 대지 말았어야지. 네가 대신 죽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살려냈어야지.

"우발적인 실수라더군. 다른 애를 좀 놀릴 작정으로 장난을 쳤는데 현우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는 거야."

대호가 규석을 감싸는 순간, 내장이 터지고 가슴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현정만을 쏙 빼닮은 현우를 경쟁자로 여기면서도, 대체적으로는 다정한 아버지를 연기해오던 대호였다. 그러나 현우가 죽음 앞에서 대호가 마음을 기울인 아이는 현우가 아니라 규석이었다.

대호는 규석을 처음 만나는 것처럼 굴었다. 규석 역시 그 연극에 동참했다. 하지만 대호가 자신의 편을 들 때마다 새어 나오는 반가움과 안도의 기색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남 몰래랍시고 구석으로 숨어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사실 현우가 시킨 일이었다고요. 자기가 찍은 애를 대신 괴롭혀주면, 엄마가 도망간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자신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은 돌아보지 못하고 현우를 핑계 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건 진즉 나한테 말했어야지. 사채 빚만 잔뜩 남기고 밀항한 여자를 현우가 무슨 수로 찾아내? 네 엄마 이름도 제대로 몰랐을 게 분명하다."

"틀림없이 위치를 아는 것처럼 굴었다고요."

"나도 모르는 걸 그 자식이 알 리가 있나? 그냥 널 갖고 논 거야. 영악한 새끼."

대호가 죽은 현우를 대놓고 욕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안해했다. 현우가 규석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건지 궁금했으리라. 아니, 그보다 정확히는 현정이 규석의 정체를 아는지 궁금했겠지.

하지만 대호는 곧 자신 있게 "아빠만 믿어!"라고 말했다. 현정이 규석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자신을 그냥 뒀을 리 없다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

내연녀의 대단한 빚이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밀항 경로와 종착지가 어떻게 설계된 건지 알았다면 그럴 수 없었으리라. 기왕이면 규석까지 데리고 사라져줬으면 했는데, 이기적인 여자는 아들을 친척 집에 맡긴 채 저 혼자만 쏙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홀로 지옥에 떨어졌다.

"어쨌거나 넌 끝까지 날 모르는 척해야 한다.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살아."

이제 내가 가진 재산은 다 네 것이나 다름없게 될 거라고. 당분간 쥐 죽은 듯 숨어 지내기만 하면 된다고 대호가 속살거렸다.

대호에게 자신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남아 있던가? 지금 그가 쥔 것들은 모두 정 회장과 현정이 일군 성과의 부스러기를 주워 삼킨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남의 피와 땀으로 빚어낸 재물을 어떻게 하면 제 사생아에게 빼돌릴 수 있을지 궁리하는 꼴이라니.

그렇게 비밀로 하고 싶다면야 영원히 모르는 척해 줄 수도 있었다.

다만 그 아이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거야.

현우가 남긴 빈자리에 다른 아이를 집어넣어서라도, 규석이 발들일 공간은 절대로 없게 만들 것이다.

선우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규석의 말을 듣고 추리해 보자면, 현우는 그 아이를 망가뜨리려고 했다. 왜 그랬을까? 현우가 갖고 싶어 했으나 갖지 못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라도 한 걸까?

그 초라하고 약해 빠진 아이에게 특별한 점이 있을 리 없는데.

반신반의하면서도, 현정은 선우를 선택하기로 했다. 현우 대신 살아남은 아이이자 규석이 가장 무시하던 아이였다. 그 정도 자격이면 현우의 자리를 메꾸는 인형으로 쓰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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