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68)화 (72/98)

<68>

용규와 규석은 온갖 죄목이 붙어 소년원에 들어갔다. 선우를 괴롭히던 다른 무리들도 힘을 잃고 흩어졌다. 그러나 선우는 기뻐할 수도, 안도할 수도 없었다.

현우가 죽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밤마다 꾸는 꿈에서는 그날의 장면이 매번 다르게 반복되어 나타났다. 선우가 난간을 붙잡은 현우의 팔을 직접 붙잡고 끌어올릴 때도 있었고, 반대로 현우의 등을 떠밀 때도 있었다.

꿈에서 본 현우의 표정도 다양했다. 때로는 공포에 질려 울었고 때로는 소리를 질렀으며 때로는 화를 내기도 했다. 정작 실제의 그날에는 현우의 얼굴에서 어떠한 표정도 발견할 수 없었음에도.

어느 쪽이든 현우가 옥상 아래로 추락한다는 결말만은 변함이 없었다. 떨어지기 직전에 현우가 선우에게 건넸던 말 또한 변함이 없었다.

"처음부터 내가 시킨 거였어."

그동안 현우가 그들에게 내민 돈은 사실 관람료였다고. 저는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가해자였다고. 잔인한 진실을 알린 현우가 언젠가 담배를 권했던 날처럼 아름답게 웃으며 시야에서 멀어졌다.

"대체 왜…."

그러자 현우가 또 말했다.

"너는 그래도 될 것 같았으니까."

선우를 이루는 모든 것이 이유가 되었다. 해야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여서. 집에서도 맞고 사는, 그런데 도망도 못 가는 멍청이여서.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우스운 존재라서. 의지할 곳 없는 하찮은 존재라서.

쿠웅.

까마득히 내려앉은 바닥에서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래에서부터 솟아오른 어둠이 선우의 발목을 잡고 끌어내렸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너야말로, 죽어서도 흔적 한 점 남기지 못할 너야말로 그날 죽었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겨우 두 발을 딛고 선 바닥에 균열이 일었다. 흔들리는 지면 위에서 선우는 가까스로 몸을 세웠으나, 아득한 어둠이 이미 선우를 감싼 후였다.

하나 꿈에서 가장 무서운 부분은 현우가 죽는 순간도, 현우가 진실을 알리는 순간도, 어둠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순간도 아니었다.

꿈의 끝에서, 선우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죽은 현우를 향해, 완벽하게 현우와 똑같은 표정으로.

선우는 그날 죽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라지고 있었다.

* * *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아이입니다."

어수선한 경찰서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던 선우를, 어느 경찰이 현우의 어머니에게 소개했다. 그녀의 이름은 현정이라고 했다. 퉁퉁 부은 눈으로 현정을 올려다보았다. 현우와 닮은 얼굴이 몹시도 우아한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다지? 너도 많이 힘들었겠구나."

위로의 말에 눈물이 다시금 쏟아졌다. 현정이 천천히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현정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경찰이 조서를 마저 작성해야 한다면서 자리를 떠났다.

선우가 고개를 들자, 현정이 선우와 눈을 맞추고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아직 살아있니?"

내 아들은 죽었는데.

놀라 움츠러든 선우의 손을 현정이 더욱 힘주어 붙들었다. 선우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엉뚱한 사람만 살아남은 셈이 됐구나."

이후 다른 경찰이 현정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슬픈 와중에도 예의 있게 감사인사를 전한 현정이 선우를 감싸 안았다.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다정해 보였으리라.

이후 그날의 일은 사실과 다르게 각색되어 기사에 실렸다. 현우가 평소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선우를 감싸주려 노력해 왔고 끝내는 선우를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진그룹은, 죽은 손주가 구한 아이를 입양해 끝까지 책임지는, 지극히 인간적인 그룹이 되었다.

"네게 기회를 주마. 가치 있게 살아볼 기회."

현정이 갑자기 입양을 제안했을 때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현정의 말처럼 현우 몫을 해냄으로써 그의 스러진 생명을 가치 있게 만들겠다는 속죄 의식 때문은 아니었다.

만취할 때마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오빠, 안 가면 안 돼?"

영주가 붙잡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둘 다 제자리걸음만 할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이라도 먼저 탈출해 남은 이를 끌어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고모가 널 돌볼 수 있게, 양어머니께서 도와주실 거래."

"고모는 우리 싫어하잖아."

이따금 생활비를 구걸하러 갈 때마다 고모는 경멸의 눈빛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 애비의 그 자식이라 염치도 없다고 대놓고 욕을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현정이 적잖은 양육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는데.

그렇게 믿으며 영주를 설득했다. 반쯤 설득당한 영주가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 앞 흙바닥에 영주가 그려놓은 선우의 얼굴은, 선우를 데리러 온 현정의 발자국으로 인해 형체를 잃었다.

"최소한 맞거나 굶을 일은 없어진 거잖아. 양어머니…. 아니 어머니가 고모한테 말씀 잘 해준다고 하셨어. 너도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이후 몇 달 동안 누구와도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다. 현정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현우만큼은 해야 한다고 했다. 새로운 삶은 그저 조용하기만을 바랐는데. 눈에 띄지 않으려 애쓰던 노력마저 현정은 거슬려 했다. 그건 평균에 불과하다는 뜻이니까.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했다.

재수 끝에 현정이 추천한 유명 사립 고교에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그제야 가족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선우의 예상과 달리 영주는 잘 지내지 못했다. 영주를 맡았던 고모가 양육비만 챙긴 뒤 영주를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주로 선우에게 쏟아지던 아버지의 폭력을 홀로 감당하게 된 영주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오빠 때문이야. 오빠 집에서 낸 그 기사 때문에 아빠가 더 미쳐버렸다고…."

본인을 알코올중독자에 가정폭력범이라고 보도한 기사에 분노한 모양이었다. 현정의 입장에서야 선우의 사연이 비극적일수록 자신과 아들의 선행이 두드러지니 사실을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리라.

영주는 선우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고 사정했다. 선우는 침묵했다. 애원해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영주가 펑펑 울며 선우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제 와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간신히 현정이 그어놓은 선 안에 들었는데.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곳에도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존재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곰팡이 핀 버섯을 먹어 보라며 '기생하는 꼴이 꼭 너 같다'고 조롱하는 양아버지나, 죽은 현우와 끝없이 비교하며 선우의 영혼을 쥐고 흔드는 양어머니가 두렵다고 말하지 않았다. 지금의 영주에게는 그조차 배부른 투정으로만 들릴 테니까.

"너희 아버지에 대해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구나. 쓸데없는 소동을 자꾸 일으키는 것도 그렇고, 부쩍 돈 얘기를 꺼내는 것도 그렇고."

현정이 중얼거린 다음날, 아버지는 알코올중독 시설에 격리되었다. 치료를 위한 것이라고 했으나 실상은 감금이나 다름없었다.

어린 선우가 시퍼런 멍을 달고 여기저기 도움을 청했을 때는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현정의 말 한마디에 쉽게도 해결되었다.

"돈과 권력이란 이런 거야."

법이란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거라고, 현정은 말했다.

선우는 깨달았다. 이 가정에 입양되고 말고는 처음부터 선우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현정이 선우를 입양하기로 결심한 순간, 선우에게 다른 선택지는 이미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우의 이용 가치를 찾지 못한다면 이 가정은 언제든 선우를 버릴 것이다. 선우의 뜻과는 관계없이.

문제가 있다면, 이제 선우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점이었다.

악착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위를 돌아볼 틈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오래도록 누군가의 곁에 머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연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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