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Hidden 5
어두운 골목길은 언젠가를 떠올리게 했다. 비 오던 어느 날, 좁은 골목길에 연희를 홀로 남겨둔 적이 있었다. 먼저 가라고는 했지만 연희가 기다릴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발짝을 내디딜 때마다 서걱대는 마음 부스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바스러졌었다.
이번에는 선우가 혼자 남았다.
세상에서 밀려나 홀로 남는 느낌은 익숙했다. 이제는 크게 고통스러울 것도 없는 감각이다.
그래도 궁금했다. 나를 남겨두고 가는 너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후련할까?
어쩌면 미안해할지도 모르겠다. 안 그런 척해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바보같이 군 자신의 탓이었다.
무엇보다 멍청한 것은, 정답을 모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차분히 기다려야 했다. 믿든 안 믿든 사정을 말하고 그때 네게 상처를 주어 미안했다고, 그런데 아직도 서툴러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그런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연희를 위해서'라는 변명은 말 그대로 변명일 뿐이었다.
한낱 자존심 때문이었다.
사실은 약한 놈이라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놈이라고, 네 생각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놈이라고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았다고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무엇이 남았나?
저에게 더는 반응하지 않은 차가운 얼굴이 남았다. 사랑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는 텅 빈 마음이 남았다.
연희에게 건넸던 그 말은 사실 선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말이었다. 자신 없는 마음을 숨기려 섣부르게 사랑을 무가치한 것으로 단정했다. 선우는 그 말을, 정말이지 오래도 되뇌어왔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다시 만난 연희가 제게 웃어줄 수 없다면, 차라리 화라도 냈으면 했다. 그런 반응마저도 연희가 주는 것이라면 달가울 것 같았다.
가시 돋친 한마디라도 듣고 싶어서 쓸데없는 시비를 걸고 꼬투리를 잡았다. 가당찮은 엄살도 부렸다. 앞뒤 잘라먹은 변명을 내뱉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때로는 봐달라고 애원하듯 굴었고, 때로는 술기운을 빌어 웃어 달라 투정했다. 병신같이 일관성도 없었다.
은근히 기대했던가 보다. 이렇게 비뚤어진 저라도 받아 주지 않을까 하고. 고장 난 저라도 보듬어 주지 않을까 하고.
예전에 그랬듯이. 아무 설명 없이도 결국은 용서해 줄 줄 알고. 끝을 잊은 듯이 굴었다. 더는 연희가 저를 봐줄 이유가 없는데도.
미친놈처럼 굴기도 했다. 연희 몰래 근처를 서성이고. 말도 안 되는 핑계로 회사로 불러들이고. 뒤늦게 전남편과의 결혼생활에 대해 알아보고. 그러면서도 연희가 저를 불편해한다는 자각은 있어서, 참고 참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한 번씩 연희의 일정에 끼어들었다.
사실은 일정을 알게 될 때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만나 실수를 하고 상황을 악화시키며 후회하기를 반복했다.
희망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래도 놓지 못하는 걸 보면.
그나마 후회하지 않는 게 있다면 전남편이라는 자식을 조금 손봐준 것이다.
그날은 도영이 연희의 집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본 날이었다. 분명 차를 몰고 떠났던 재민이라는 작자가 다시 연희의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연신 주위를 둘러보면서.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대시보드에서 검은 천을 꺼내들었다. 뒤에서 재민을 급습했다. 재민의 손에서 초소형 카메라와 나사, 드라이버 따위가 떨어졌다. 어디에 설치하려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자신을 알아보기 전에 검은 천으로 재민의 시야부터 차단했다. 재민이 본 것은 자신의 손목에 걸려 있던 시계뿐이리라.
꺽꺽대는 게 시끄러워 가제수건으로 입도 막아주었다. 이 매니저의 명의로 된 하얀 세단 안에는 늘 많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한 비서를 불러 뒤처리를 떠넘겼다.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차에 오른 순간, 가장 먼저 시야에 걸린 장면은 연희가 도영을 다정하게 안아주는 모습이었다.
아쉬웠다. 자신이 그 다정함의 대상이 아닌 것이. 지금 이 순간, 그들 앞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이.
하지만 이런 아쉬움 또한 욕심이겠지. 이제 선우는 연희의 무엇도 아니니까.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실낱같은 가능성에 매달리고 싶어 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 가능성을 만들 것인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끝내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완전히 사라져 주기로 했다. 연희가 원하는 대로.
* * *
하필 지금.
파혼을 선언하기 위해 수정과 약속을 잡았다. 이후 자잘한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으라는 것이 정 회장의 명이었다.
한데 이별의 말을 꺼내기 직전, 수정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를 하겠다며 자리를 비운 수정은 30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이라도 생긴 걸까. 얼마나 더 기다려줘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선우에게도 전화가 왔다. 발신자명은 태우였다. 법적으로는 선우의 사촌인, 정 회장이 누구보다 아끼는 현진 가의 장손.
그러나 전화를 건 사람은 태우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오늘 태우가 대형사고 칠 것 같아. 빨리 좀 와줘."
낯익은 목소리는 태우가 약을 할 때마다 종종 어울리는 무리 중 하나의 것이었다. 긴장한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태우의 비행이 정 회장 귀에 들어가거나 언론에 노출된다면 선우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 정 회장 곁에 머물며 그 손주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 시간이 연장될지도 모른다.
제대로 잠을 잔 것이 너무 오래되어서일까?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듣자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선우는 주머니에서 신경안정제를 꺼내들었다. 그는 단숨에 그것을 들이키고는 자리를 떴다.
딩동.
결국 J호텔 최상층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 누르고 또 누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선우도 명목상 형식을 갖춘 것에 불과했다.
들고 온 마스터키를 이용해 VVIP객실 방문을 열었다. 객실은 이름도, 방 번호도 없었다. 특정한 사람들 외에는 개방되지 않은 객실이기 때문이다. 별도의 키가 없다면 복도를 통과할 수조차 없게 만들어진 곳이었다.
완벽한 방음시설 덕에 조용하던 복도는, 문을 열자마자 새어 나온 소음으로 인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한 층의 반을 차지하는 넓은 룸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뒤엉켜 있었다. 코카인과 대마, 각종 환각제 냄새와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듣기 싫은 신음 소리와 그 결과가 낳은 배출의 냄새는 덤이었다.
얼굴을 찌푸렸다. 더러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날이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이런 풍경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마음을 벼리고 또 벼리다가, 그런 자신이 비정상임을 도저히 묻어버릴 수 없는 날.
"와서 너도 할래?"
"내버려 둬. 전에 죽을 뻔한 거 몰라?"
처음에 이곳에 들어섰을 때, 주는 약을 대놓고 거부하지 못해 말 그대로 죽을 뻔했다. 다행인 건 한 번 그러고 나니까 더는 권하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선우 같은 이를 다시 찾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일을 부릴 사람이야 찾아보면 많겠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뒤를 처리하면서도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선우는 명목상 재벌가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자였다.
이들이 누구인가? 구석진 지방 별장에서 몰래 숨어들기보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호텔에서 발아래 깔린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즐기는 것이 좋다는 사람들 아닌가? 선민의식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 선우는 참으로 흡족한 권력의 노예였다.
"술은 마시죠?"
헐벗은 여자가 선우에게 다가와 술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딱딱하게 말하자 선우를 향해 실실 웃던 여자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럼 뭐 하러 왔어?"
쓰레기가 만든 흔적을 치우러 왔지.
한쪽 구석에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진 남자 하나가 보였다. 태우의 작품일 게 뻔했다. 태우가 사람을 때리는 데는 별 이유가 없었다. 그냥 눈을 건방지게 떴다거나, 분위기를 맞추지 못했다거나.
의식이 반쯤 나간 남자를 한 비서가 부축했다. 남자를 깨우고, 적절한 보상금을 제시하고, 저들 대신 사과하는 일이 선우의 몫이었다. 그래도 입막음에 성공하지 못하면 언론보도를 막고 다른 경로로 퍼진 것이 없는지 관리해야 했다.
물론 태우에게만 한정된 서비스는 아니었다. 호텔에 머무르는 이들 중 사건사고를 달고 다니는 이들이 한둘이던가. 예전에는 죽어나간 사람도 꽤나 있었다고 들었다.
약혼식에 왔던 손님들 중에서도 앞과 뒤가 다르다고 알려진 인사들이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초대하고 싶지 않았으나, 정 회장을 만족시키려면 초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혼식 전에 이 매니저와 미리 VIP룸을 돌아다니며 도청장치는 없는지, 위험한 것들은 없는지 여러 차례 확인했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마련된 별도의 이동로 또한 꼼꼼히 확인했다. 비공식적으로 초대된 이들이 이용할 통로였다.
하루를 꼬박 그렇게 소요하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며칠 뒤 또 하루를 잡아먹었다. 비밀에 부친 호텔의 자체 리허설이란 그런 것이었다.
생각에 잠긴 새, 약에 취한 태우가 선우의 얼굴을 향해 술잔을 던졌다. 제 딴에는 장난이랍시고 한 짓이었다. 본능처럼 피한 덕에 직접 맞지는 않았지만, 파편이 튀는 바람에 뺨에 실금 같은 상처가 생겼다.
허리를 굽혀 깨진 유리조각을 집어 들자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개의치 않고 남은 조각들을 손수 치웠다. 이들이 기대하는 모습에 부응하기 위해.
벽면에 전시된 유리 액자 위로 호박색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호박색이 핏빛으로 변하고, 작았던 얼룩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환각이 일었다. 몸의 감각이 점점 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오늘… 신경안정제를 몇 번 먹었더라?
퍽.
이윽고 무언가가 다시 날아왔을 때, 선우는 피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