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65)화 (69/98)

<65>

가슴이 답답했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물어볼 사람이 곁에 없었다. 선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정말이지 묻고 싶었다.

갑자기 사라져놓고는 자신을 찾게 만들었다. 불현듯 나타나 속을 뒤집더니, 안 보이는 곳에서 연희를 위해 늘 무언가를 해왔다고 한다. 연희가 선우를 미워하고 잊으려 했던 긴 시간 동안 변함없이.

누가 알아준다고.

연희는 진즉 놓아버린 인연의 실 끄트머리를 선우 혼자 미련 맞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금 또 물음이 남는다.

도대체 왜.

준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주는 걸 좋아한다던 사람이 아닌가.

연희에게 뾰족한 말로 얻어맞을 때, 선우는 앞뒤 잘라먹은 사랑 고백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도 있었다. 너는 내게 이렇게 많은 것을 신세 졌다고, 그러니 나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연희를 붙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우는 그러지 않았다.

때마침 작은어머니가 이혼을 결심하고 진실을 털어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때마침 정 회장이 쓰러져서 현아가 선우와 거래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선우가 연희를 위해 어떤 일들을 했는지.

선우가 눈에 띄게 남겨놓은 것이라고는 현우의 사진과 전화번호뿐이었다. 자신이 그 대단한 일가의 진짜 일원이 아니라는 것과 누군가의 대체품임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것들. 늘 멋져 보이고 싶어 했던 그가, 가장 볼품없을 자신의 알맹이를 보란 듯 남기고 떠났다.

고마워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이 무거웠다. 죄지은 것 없이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습관처럼 틀어놓은 TV에서는 아직도 현진 그룹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정 회장의 수많은 자산이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될지에 대한 추측은 점점 정 회장의 아들인 정현규와 친손주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지는 중이었다.

선우의 어머니인 현정은 지금 경영권을 갖고 있는 J호텔과 면세점 정도를 상속받는 데서 그치지 않겠냐는 것이 중론이었다. 선우의 입양 사실을 대놓고 거론하는 언론은 없었으나, 선우의 이름은 후계자 예상 구도에서 자연스럽게 제외되었다.

다만 선우의 이름은 다른 종류의 기사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수정과의 파혼 보도가 그것이었다. 누가 먼저 파혼을 선언한 것인지, 왜 파혼을 하게 되었는지까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아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그렇게 현진 그룹은 다양한 화제로 연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선우를 찾는 연희의 업무도 자연스럽게 종료되었다. 공식적으로는.

계약만료를 한 달 남겨놓은 시점에 회사 내규에 따라 사직서를 제출했다. 곧 회사 홈페이지에 연희의 후임자를 뽑는 공고가 올라왔다. 드물게도 신속한 일 처리였다.

그리고 마지막 출근 날이 될 오늘.

- 누나,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응. 잊지 않았어. 퇴직 턱 내라며."

도영과 통화하면서 사무실 문을 열었다. 어깨에 전화기를 끼고 문을 열자 자신이 없어도 잘만 굴러가는 사무실 풍경이 보였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일을 떠안기기에, 자신이 업무를 벗어나 있는 동안 큰일이라도 터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한 것이 무색했다. 서 팀장도, 최 주임도, 한 대리도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그래. 보통은 이게 맞는 거지. 나 한 사람 없다고 무너져 버리는 존재가 있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예하문화재단이랑 나무아트센터에서도 사람 구한다던데 한 번 알아봐요. 누나가 가진 경력하고 실력이면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일하게 될 수 있을 걸요.”

도영은 진심이겠지만 썩 믿음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끝으로 전화를 끊고, 사무실 구석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책상 주변에는 이미 온갖 서류와 집기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당장 나가라는 소리나 진배없었다.

"대체 어떻게 밉보였기에 이사님 입에서 당장 책상을 비우라는 말이 나와? 인사팀에서 계약만료일까지 남은 일수는 다 휴가로 처리할 거라고 전해 달래."

서 팀장은 연희가 회사를 예정보다 일찍 떠나게 된 게 대단한 처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연희에게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그간 기록상으로만 존재했던 휴가를 이렇게 돌려받게 되었으니까.

제대로 된 인수인계도 없이 후임자가 어떻게 일을 처리해 나가게 될지 모르겠으나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대충 책상을 치워 마우스가 움직일 공간을 마련했다. 회사 이메일함을 열었다. 그동안 -연희가 선우를 찾아다닐 동안- 연희의 일을 임시로 담당하던 직원에게 지난 업무 메일을 전달했다. 갖고 있던 연락처와 함께 연간 일정표도 대략적으로 만들어 보내주었다.

더불어 그동안 확인하지 않았던 이메일을 차근차근 열어보았다. 곧 사라질 계정이라지만 웬만한 것은 모두 지우고 갈 작정이었다. 평소에는 보지도 않고 지워버리는 스팸메일함까지 들어가 보았다.

잘못 분류된 메일 하나가 스팸메일함에 들어있었다.

올해 초 연희가 담당했던 뮤지컬 극본 공모전에 지원하는 메일이었다. 하지만 접수 시기가 한참 지나 있었다. 시기가 지나서 메일이 들어오는 경우가 왕왕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생뚱맞은 시기에 오는 메일은 흔치 않았다.

지워버리면 그만인데, 그래도 읽어보자 싶었다. 괜찮다 싶으면 다음 담당자에게 전달해 주고 내년 공모전에 지원해 달라는 메일이라도 한 통 보내줘야지 싶었다.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원자를 위해서였다. 시기가 맞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노력과 용기를 무시할 성격은 못 되었다.

보낸 이의 이름은 길고 복잡한 영어 아이디였다. 무심코 타자를 따라 쳐보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email protected]

한글로 치면 녹차 붕어빵이었다. 귀여운 아이디네, 어린 학생인가? 그렇게 생각하다가….

어스름한 옛 기억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홀린 듯 첨부파일을 열었다. 펼쳐진 극본은 굳이 다음 담당자에게 전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졸작이었다. 시시하고 진부했다. 모든 게 예측 가능하고 익숙했다.

연희가 겪어본 이야기였으니까.

그 언젠가 선우와 연희가 했던 대화와 행동이 그때 그 장소들을 배경으로 재연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고 분량을 채우지 못한 짧은 원고에는 현재가 없었다. 이야기는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현실에 발 딛고 선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둔 걸까?

마지막 장은 남자와 여자의 재회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자의 독백까지 빠르게 읽어 내린 후 첨부파일을 외부 메일로 전달했다. 사내 계정으로 온 메일은 그대로 지우고 휴지통까지 깔끔하게 비웠다.

책상 위를 정리하고 서랍 안에 담긴 것들을 꺼냈다. 필기도구와 방석, 개인 USB, 카디건과 무릎담요 정도를 챙겼다.

"예림 씨."

"네."

"혹시 내가 남기고 가는 게 있으면… 그냥 버려줄래?"

"그럴게요."

팀 사람들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건물 밖에 세워둔 차 뒷좌석에 짐이 든 쇼핑백을 던져 넣었다.

아.

운전석에 앉았다가 사무실에 남겨둔, 그러나 버려져서는 안 되는 게 하나 생각났다. 꼭 챙겨가야 할, 챙기고 싶은 것이었다.

다시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연희가 향한 곳은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윤 대리의 자리였다.

"정말 죄송한데요. 전에 제가 드렸던 집게 핀, 다시 돌려주시겠어요?"

"네?"

"예의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선우에게 받은 이것만큼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다. 선우의 얼굴을 마주한 뒤, 제대로 대화하고 나서.

연희의 결심을 알 리 없는 윤 대리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서 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영 씨, 정말 미안한데 오늘 약속은 취소해야 할 것 같아."

- 갑자기 왜요?

"급한 일이 생겼어."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에, 도영이 풀 죽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나 오늘 반차까지 썼는데.

"미안. 다음에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사 줄게."

-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언제 또 용기 날지 모른단 말이에요.

아.

‘용기’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희 역시 그런 용기를 끌어 모았던 때가 있었으니까.

도영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영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도 더 키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분명히 말해야 했다.

"나한테 용기 내지 마, 도영 씨. 그런 용기는 다른 사람을 위해 아껴 둬야 하는 게 맞아."

제법 잔인하게 말하고 나서, 연희는 조용히 쌍욕을 읊조렸다. 김선우에게.

좀 괜찮은 남자가 나타날 때마다, 어쩌면 이렇게 타이밍을 맞춰 일을 망쳐놓는지 모르겠다고.

그냥 선우 욕이 하고 싶어서 그랬다. 정말 하고 싶었다. 김선우에게 김선우 욕을.

그러면서도 휴대폰을 들어 조잡한 극본 상단에 적혀있던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 매니저님이세요?"

"연희씨!"

"혹시 지금…."

선우와 함께 있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이 매니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전화 많이 기다렸어요. 좀 와줄 수 있을까요?"

다급한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긴장한 연희가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도통 깨어나질 않아서요."

누구인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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