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64)화 (68/98)

<64>

"현아 씨를 비롯한 가족분들이 그 사람을 힘들게 했다는 거요? 지금의 가족이든 옛 가족이든 그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요? 그래서 늘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다는 거요? 아니면,"

말할수록 선우를 괴롭힌 이들에 대한 원망이 차올랐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중에 선우 본인이 직접 말해준 것은 없었다. 결국 선우가 제 입으로 말했던 것은, 그렇게 홀로였던 선우가 저를 향해 내보인 한 가지는.

"그 사람이 절 사랑…한다는 거요?"

현아가 마시던 주스를 뿜을 기세로 커다랗게 웃었다. 세상 웃긴 말을 들었다는 듯 테이블을 두드렸다.

"걔가 직접 말했어요? 사랑한다고?"

"네."

"걔가 그런 말을 했다니 너무 안 어울리네요."

연희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선우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을 돌아볼수록 남는 것은, 저를 향해서만은 진실을 고하는 것 같던 애처로운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다.

수정에게 향하던 침착하고 단조로운 목소리와도, 업무관계자들에게 향하던 무감하고 냉정한 목소리와도 달랐다. 선우는 그런 태도로 사랑을 말했었다. 그리고 상처 입었다.

"또 다른 건 없어요?"

그래서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는,

"…아파했어요."

아프다고, 곁에 있어달라고 했는데 매몰차게 뿌리쳤다. 돌아볼수록 후회스럽다. 왜 아픈 건지, 뭘 바라는지 물어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예상치 못한 반응이 왔다. 현아가 눈을 빛내며 강하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하긴 그렇겠죠. 노인네가 선우를 꽁꽁 숨겨뒀을 때는 이유가 있을 건데 내가 깜빡했네. 이제 더 댈 만한 핑계도 떨어졌으니까 완전히 나을 때까지 남들 눈에 안 띄는 게 낫긴 하겠네요."

현아는 답을 찾아 후련하다는 낯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충분히 이해한다는 태도였다. 연희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제 내가 하려던 얘길 할게요. 어차피 나랑 협상하고 싶어서 연락한 거잖아요?"

현아는 사랑을 비웃을지언정 선우가 연희를 믿는다는 데는 의심이 없는 듯했다. 선우가 있는 장소를 연희에게만은 알려줄 만큼. 선우 자신을 대신해 협상테이블에 앉힐 만큼.

"오빠가 갖고 있는 주식, 나한테 내놓으면 나도 오빠한테 그만한 보답은 꼭 하겠다고 전해 줘요. 다른 사람들하고 달리 나는 약속을 꼭 지킬 거라고도. 그런 의미에서 다른 정보도 나한테 넘겨주면 더 좋고요."

왜 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 주식이 뭔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선우를 대신해 협상하러 나온 사람이라면 이런 것부터 묻지 않을까?

"무슨 보답인데요?"

선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인가. 무언가를 내줄 가치가 있을 만한 일인가를 알고 싶었다.

"뭐긴 뭐겠어요? 그쪽한테 피해 없도록 하겠다는 거지."

현아가 의자에 느슨히 기대며 픽 웃었다.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연희가 그대로 굳었다.

"왜 모르는 척해요? 그쪽이 오빠 약점이잖아."

수정이 벙찐 연희의 얼굴을 살피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사랑이라느니 뭐니 낯간지러운 말은 잘도 하면서 그런 얘긴 안 해요?"

"……."

"그럼 혼자 뭘 그렇게까지 열심히 한 거야?"

현아가 중얼거렸다.

"하긴, 그쪽 때문에 몇 번이나 무릎 꿇고 빌었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죠? 걔는 어차피 시키는 대로 다 할 거면서 왜 그깟 자존심 하나를 못 버리나 몰라. 저만 힘들지. 안 그래요?"

머리부터 등줄기까지 둔탁한 충격이 일었다. 선우가 자신 때문에 그런 비굴함까지 무릅썼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그쪽이 지금 빚더미에 내려앉지 않은 게 누구 덕이겠어요? 빈껍데기에 빚만 남은 그 공장, 누가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샀을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유산이 꽤 넉넉해서 놀랐을 텐데?"

연희가 천천히 몸을 굳혔다. 작은아버지가 가로챘다는 아버지의 유산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선우 자신이 목숨처럼 생각하던 '자존심'을 깔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건 잘 알게 되었다. 연희가 기억하는 선우라면 절대 할 리 없는 짓이었다.

그런데 연희는 그것을 지켜내지도 못했다.

하얗게 질린 연희의 얼굴을 살피던 현아가 조소를 흘렸다.

"줘도 못 먹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하고 흥얼대듯 중얼거리기도 했다.

"보아하니 그쪽은 어수룩하게 대충 살아왔나 본데, 우리 집은 가족 간에도 계약서가 오가는 집이에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줘야 하는 집."

"……."

"그렇다고 해도 선우한테 손해는 아니었을 텐데,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노친네 그림자에 숨어버릴 생각을 했을까? 그 양반한테 도움을 받으려면 치러야 할 대가가 여간 아닐 텐데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연희 자신을 포함해, 수정이 부린 수많은 사람들이 왜 지금껏 선우를 찾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정 회장이 교묘하게 펼쳐놓은 가림막 때문이었으리라.

"사촌들한테 몇 대 맞는 게 새삼 무서웠을 리도 없고."

"맞다니요?"

연희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럼 선우가 왜 아픈 줄 알았어요? 선우 꼴 보면 답이 딱 나오지 않아요?"

아까 수정이 수긍했던 선우의 '아픔'은, 단순히 마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건가?

멍하니 있는 연희를 보고 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얼굴이죠? 단순히 구르거나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아닌 건 대충 봐도 알았을 텐데?"

현아가 묘사하는 상황에 숨이 턱 막혀왔다. 떨리는 몸을 애써 다잡으며 말했다.

"…자기 얘기 잘 안 하는 성격인 거, 알잖아요."

"흐음…."

현아가 잠깐 만든 침묵에 연희의 속이 바싹 타들어갔다. 이대로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헤어지게 될까 봐. 그래서 급히 말을 덧붙였다.

"특히 저한테는요."

다행히 현아도 동의했다.

"하긴, 그쪽이 구체적으로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을 수는 있겠네요. 이런 쪽 이야기는 많이 알수록 위험해지니까."

"……."

"애초에 선우 특기가 입 다무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 집에 계속 붙어 있을 수 있었던 거지만."

선우를 물건처럼 취급하는 말에 울컥 솟아오르는 마음을 애써 참아 넘겼다.

"내가 대신 말해줄게요. 선우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그런 거거든. 우리가 직접 하긴 좀 그런데, 남들 시키긴 또 꺼림칙한 일들. 우리 잘나신 외사촌들 사생활 관리 좀 해주고, 인심 쓰는 김에 그 친구들 뒤처리까지도 좀 해주고."

선우가 관리하는 사생활에는 현아의 것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현아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숨겼다. 선우 역시 그렇게 자신을 숨겨왔었다. 아주 가끔 실패했지만, 대부분은 성공했다.

그래서 선우에 대해 적당히 몰라도 현아에게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씁쓸하게도.

"그분들이 다혈질이다 보니까 취하면 뵈는 게 없어요. 그거 막다 보면 몇 대 맞기도 하고, 찢어지거나 부러지기도 하고 그런 거지, 뭐. 아! 최근에 좀 더 심해지긴 했다더라."

현아가 목소리를 죽여 킥킥댔다. 다른 이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으면서.

"그러고 보면 선우는 참 운이 좋아요. 노인네 쓰러진 후에 몇 대 맞고 쓰러졌으면 이렇게 남모르는 곳에 숨어서 쉴 수조차 없었을 텐데. 다행히 타이밍이 맞았네."

맞아서 쓰러졌다는 사람에게 '운이 좋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여튼 그 주식은 나한테 넘기라고 해요.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보다는 내가 더 잘 쳐줄 거라고. 기왕이면 그 동영상도 복사해 주면 더 좋겠다고도 말해주고요. 무슨 동영상인지는 알 거 없고,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하는 것도 물론 안 되고. 나 그쪽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에요. 우리 어머니 닮았거든."

이제는 현아의 뒷말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명치를 내리누른 부채감 때문에.

갚지 못할 도움은 연희가 모르는 동안 차곡차곡 잘도 쌓여 있었던 것이다. 거절할 기회도, 감사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 * *

선우 집 현관에서, 어느새 외워버린 비밀번호를 눌렀다.

서재를 뒤졌다. 전처럼 선우의 행적에 대한 정보를 찾는 대신, 선우가 엮어놓은 업무 관련 자료를 샅샅이 읽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도 무작정 그랬다.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인쇄물은 수량이 어마어마했다. 지금껏 J그룹 산하 계열사를 돌며 갖가지 일을 해온 까닭에 종류도 다양했다. 현진패션, 현진식품, 현진전자, 현진캐피털, 현진생명, 현진홀딩스 아래 있는 HJ엔터테인먼트와 현진물산에 이르기까지.

계열사의 곁가지 부서 사원으로 시작해 점점 계열사 중심축으로 이동해 온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처음부터 의사결정권자의 위치를 점한 사촌들과는 다른 행태였다.

타 기업의 자산 현황과 인수 실적을 정리해 놓은 자료에 이르러서는 인쇄물을 넘기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작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업체의 정보를 발견하고 나서는, 한 페이지도 더 넘기지 못했다. 사업체는 저 혼자만 'Y'라는 이니셜로 표기되어 오히려 눈에 띄었다.

아마도 이것이 아버지의 공장이었으리라. 공장의 연 매출액도, 부채비율도, 성장 가능성도 목록에 있는 다른 기업에 비해 눈에 띄게 형편없었다.

공장 폐쇄 직전 몇 년 간의 손익을 따져 보면, 훨씬 더 전에 문을 닫았어야 할 공장이 겨우 생명을 이어간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마저 선우의 덕이라고 느껴졌다면 착각인 걸까?

연희가 놓친 것은 작은아버지의 가정폭력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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